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동남 아시아·인도까지 활동 범위 넓혀 나가

소년한국일보 / 입력시간 : 2007-07-30 13:27

백제 땅 중심으로 바닷길 이어져 일찍부터 해외 교류… 왜국 등과 무역 통해 큰 이익
'백제 금동 대향로' 코끼리·악어 등장…겸익, 인도서 불교 공부… 경전 들여와


백제 금동 대향로에 새겨진 코끼리를 탄 사람.

■ 뛰어난 선박 제작 기술과 항해술 지녀

한반도 서남부의 긴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던 백제에는 좋은 항구들이 많았습니다. 바닷길이 백제 땅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어 백제인들은 일찍부터 대륙과 일본 열도로 진출하기가 쉬웠지요. 백제인들의 활동 범위는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답니다.

543년 백제 성왕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부남국의 보물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부남국은 지금의 캄보디아로, 이는 당시 백제가 부남국과 교역을 했음을 알 수 있는 실마리지요. 성왕은 또 554년에는 신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왜국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답등’이란 것을 선물합니다.

이는 양털이 주성분인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백제가 답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북인도와 직접 교역했거나, 적어도 활발한 무역을 통해 해외의 진귀한 물건들을 구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642년 백제 사신이 왜국과 교역을 하려는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 넣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곤륜은 지금의 동남아시아 지역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가 왜국과 단독으로 교역하려는 것을 백제가 가로막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당시 왜국은 배 만드는 기술과 항해 기술이 부족해 백제에 의지해 외국 물건을 구입하고 있었습니다. 백제에는 방(舫)이라 불리는 큰 선박이 있었답니다. 왜국에서 ‘구다라선’이라고 불렀던 이 배는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였습니다. 선박 제작 기술과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백제는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얻은 물건을 왜국 등지에 수출하면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이지요.

악어.

■ 백제인, 진취적이고 적극적…국제화된 나라

백제를 대표하는 예술 작품인 ‘백제 금동 대향로’에는 짐을 갖고 코끼리에 올라 탄 사람과 악어가 보입니다. 코끼리와 악어는 동남아시아 혹은 인도에 백제인이 자주 왕래를 했기 때문에 예술 작품에도 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백제는 지금의 일본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던 유구국과 필리핀, 캄보디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인도 등과 활발한 교류를 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겸익 스님은 백제인의 활발한 해외 활동 상황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는 512년경 백제를 떠나 양자강 남쪽의 양나라에 잠시 머물다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 지역을 거쳐 인도까지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왔습니다. 인도 중부의 절 상가나사에서 인도 말인 범어를 배우고 불교를 공부했지요. 14 년 후인 526년 나란타사의 배달다 삼장 법사와 함께 귀국했습니다.

이 때 백제의 임금이었던 성왕은 겸익을 흥륜사에 머물게 하고, 인도에서 가져온 아담장과 오부율문이란 경전을 번역하라고 명하였답니다. 이 작업에는 백제의 승려 28 명이 동원되어 모두 72 권이 번역됐지요. 인도에서 건너온 책이 직접 번역됨으로써 불교의 한 교파인 율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우리 나라 경전은 대개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뒤 들어온 것이었지요. 겸익은 불교의 참 의미를 알기 위해 인도까지 여행했던 것입니다.

백제인들은 겸익 스님처럼 알고자 하는 것, 새롭고 진귀한 물건을 찾아 위험한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답니다. 백제는 신라, 고구려, 왜, 중국 등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국제화된 나라이기도 하였지요. 바다를 향해 크게 열려 있었던 나라가 바로 백제였습니다.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동영상)클릭참조>> <<부활하는 고대의 한국 악기클릭참조>>

<<일본 아스카 시대 유물, 대부분 한국 불교예술이다클릭참조>>

中, 고구려 이어 “부여도 우리 역사”

조선일보ㅣ입력 : 2006.06.30 22:55 / 수정 : 2006.06.30 23:00

중국이 부여의 유물로 분류해 랴오닝성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서차구유적(서기전 3세기~서기전 1세기) 고분 출토 금귀고리.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를 이룬 나라이지만, 전시설명판에는 중국 동북지역 소수민족이 세운 국가로, 일찍부터 한(漢)

왕조에 복속됐다고 적혀있다. /랴오닝성박물관 도록

지금 중국 선양(瀋陽) 랴오닝(遼寧)성 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遼河文明展)’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동양사, 더 나아가 세계사를 새로 쓰게 하려는 기획이다. 요하 유역을 아우르는 ‘요하문명’이 세계적인 문명 발상지임을 세계에 알리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리장성 밖 요서·요동을 포괄하는 요하문명 전체를 자기 역사로 만드는 ‘요하문명 공정’에 중국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동북공정’을 넘어서는 일이다.

일찍이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은 뒤, 장성 밖의 무지몽매한 새외(塞外)민족과 차별을 두었다. 그것은 중국문명의 ‘북방한계선’을 긋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런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만리장성 밖에서 중국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뿐만 아니라 더 발달된 구석기·신석기문화가 속속 확인됐다. 요하유역의 구석기문화인 영구(營口)의 금우산인(金牛山人)은 북경인(北京人)보다 형질인류학적으로 더 발달된 것이다. 이 지역 사해(査海)의 신석기문화는 서기전 8000년에 이르며, 신석기 말기(서기전 3500년~2500년)의 것이 바로 독특한 옥기 작품을 낳은 홍산문화(紅山文化)다. 이번 전시에서 신석기 빗살무늬토기에서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려고 하는 뱀의 도상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신라의 도우에 많이 나타나는 도상과 똑같지 않은가.

그런데 전시 중 세 번째 테마 ‘화하일통’은 중국(=華夏)이 요하문명을 통일(=一統)했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를 이룬 부여(서기전 3세기~서기 5세기)와 고구려는 물론, 삼연(북연-전연-남연)의 유물이 이 주제 아래 전시되고 있었다.

부여를 소개하는 코너에서는 “부여는 우리나라 동북지역에서 이른 시기에 국가를 세운 소수 민족의 하나”라고 기술했다. 중국은 지금까지 금귀고리나 철검 등 위세품이 출토된 랴오닝성 서풍현 서차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초기 철기시대 것’이라고만 소개해 왔다. 그러나 이번 전시부터는 ‘(중국에 속한) 부여’ 유물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요하지역에서 ‘화하일통’의 역사는 최소한 2500여 년은 됐음을 선언하는 셈이다.

내몽골·요하유역의 각 유적과 이 일대 평원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은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요령식 동검, 다뉴세문경, 옥룡(=곡옥) 등을 공유하는 알타이어계 요하문명권이었다. 한국은 요하문명의 굳건한 바탕 위에 중국 문명을 접목하며 역사를 형성해 왔다.

  •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

이 지역에서는 우리 말고도 타민족들의 영웅 호걸들이 등장해 여러 제국을 건설했지만 결국 중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한 때 요하문명의 패자(覇者)로 비록 중국과 신라의 협공에 멸망했지만 그 정신과 예술은 지금까지 맥맥이 살아 남아, 세계적으로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도록 활력소를 제공해준 요하문명의 유일한 문화국가였다.

북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바꾼 국호)-대진국(발해의 국호)-통일신라-고려-조선-한국이라는 전승관계를 통해 우리 민족이 요하문명의 완성자이기에, 중국은 사활을 걸고 동북공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중국은 고구려를 넘어 한국의 미래까지 노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북녘의 문화유산’ 특별전을 보러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놀라움에 발걸음이 멈칫했다. 평양에서 출토된 높이 90㎝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빗살무늬토기. 요하문명의 빗살무늬 토기들 가운데 황제같은 늠름한 모습이었다. 우리 문화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다.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대표)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북한과 중국이 발굴한 발해유적

국제신문 / 입력: 2009.01.01 19:32

北·中 공동발굴 결과 만주 고조선·발해가 韓역사로 밝혀지자 '쉬쉬'
中, 63년 이후 30년 넘게 침묵 1997년 마지못해 내용 공개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북한과 중국이 공동발굴한 길림성 돈화의 육정산 고분군.
1963년 8월 늦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때에 17명의 북한 고고학자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6·25동란이 끝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아서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당시였겠지만, 그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쓰자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북한의 학자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중국 학자들과 공동으로 한 팀은 고조선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요령성, 내몽고 동남부 지역의 비파형동검 관련유적을 조사했고, 또 다른 한 팀은 길림성과 흑룡강의 발해유적을 살폈다. 그들의 조사는 1965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3년 간의 조사는 1966년에 북한에서 보고서로 출판되었지만 누가 발굴하고 집필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중국 측은 이 발굴에 대해서 30년 넘게 침묵하다가 1997년에서야 그 보고서를 냈다. 하지만 중국 보고서에는 북한과 같이 발굴했다는 내용은 한 줄도 없었다.

중국으로서는 잊고 싶은 발굴이었고, 북한 측에게도 숨겨놓고 싶은 보고서인 셈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발굴로 만주지역의 고조선과 발해는 한국의 역사이며, 한민족의 고대사는 현재의 국경이 아닌 만주지역을 포괄한다는 주장을 굳히게 되었다. 반대로, 중국으로서는 문화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데다 자칫하면 공동발굴이 갓 점유한 만주에 대한 영유권 문제로 번질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결국 조·중 공동발굴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보고서가 남한과 일본에서 계속 인용되자 마지 못해 공동발굴이라는 이야기는 뺀 채 그 내용을 공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었던 인심 좋은(?) 중국의 결정에는 당시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周恩來)의 역할이 컸다. 그는 만주지역이 고대 이래로 한국의 역사였으며, 공동으로 조사하는 것은 뜻 깊다고 적극적으로 공동발굴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때 중국은 지금같이 역사의 왜곡에 집착하지 않았었다. 북한과 사회주의 형제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고, 만주가 현재 자신들의 영토라는 것을 고마워했지, 결코 그 역사를 뺏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의 학자들은 길림 돈화의 육정산 고분, 발해의 수도였던 흑룡강 영안 동경성 유적을 발굴했다. 육정산 고분군은 발해 정효 공주묘가 발굴된 대표적인 고분유적이요, 동경성은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발굴한 이래 발해의 대표적인 궁성지였으니 가장 중요한 유적들을 조사한 셈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성과는 매우 알찼다. 특히 동경성에서 발굴한 얼굴이 그려진 벼루는 발해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물자료로 평가된다.

필자가 이 보고서를 접한 것은 1994년으로, 당시 비파형동검자료를 모으던 중에 어렵사리 흐릿한 복사본을 구해서 읽으면서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2006년, 2007년에 육정산 고분과 동경성을 갔을 때 따사로운 아침햇살에 펼쳐진 유적을 보노라니 대학원 시절 놀라움에 넘겼던 책장 하나 하나가 떠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필자의 답사는 중국의 감시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육정산과 성자산(대조영이 건국한 동모산으로 추정됨) 유적은 감시를 피해 새벽에 갈 수밖에 없었다. 또 발해 동경성을 답사할 때는 중국 관계자들에게 몇 시간 억류되기까지도 했다.

2006년 여름의 일로 필자가 동경성을 갔을 때에 중국은 단독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발굴정비 중이어서 제한된 지역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답사팀 중 한 명은 출입금지 팻말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발굴장면을 무심코 사진을 찍다가 발각되었고, 우리 답사팀은 몇 시간 버스 안에서 갇혀 있어야 했다. 결국 사진기의 사진을 지우고 벌금을 무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는데, 며칠 뒤에 다른 한국 학자팀이 방문하자 먼저 왔던 사람들이 억류되었네 하면서 아예 출입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어떻게 돌았는지 한 달 뒤에 러시아를 가니 공동발굴하는 러시아 친구가 "강인욱, 자네 중국에서 감옥에 들어갔다는데 어떻게 도망친거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런데 천리 가는 발 없는 말 치고 제대로 가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새해가 밝았다. 올해에는 1963~1965년도 같은 국가 간의 사이좋은 공동연구가 이루어지는 '태평성대'가 도래하길 바랄 뿐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 국제신문(www.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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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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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 고대 시베리아 신석기 유물 (출처 : 민족반역자처단협회)

- 세석기 -


- 세석기 문화권 -


- 철제의료기구(좌)와 흑요석으로 만든 세석기(간석기)날을 현미경으로 비교한 것 -

철제의료기구는 울퉁불퉁한데 비해 세석기는 매끄럽다, 즉 날카로움은 세석기가 더 뛰어나다.

- 세형돌날로 직접 고기를 잘라보는 사진 -

- 샤먼이 사용하던 사슴뿔 관 -

- 암각화 분포도 -

- 사슴뿔로 만든 곡괭이 -

- 뼈바늘, 현재까지도 일부 이누잇족이 쓰고 있다 -

- 돌칼로 이발하는 이누잇족 사진 -

<<'한국형' 암각화 내몽고서 첫 발견 클릭참조>> <<제주문화의 뿌리를 찾아서클릭참조>>

초종교국가연합, 21∼24일 서울서 ''몽골반점동족''국제대회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4-09-19 15:27 |최종수정2004-09-19 15:27

세계 '몽골리안' 한데 뭉쳐 평화운동

세계 처음으로 몽골반점을 가진 종족들의 지도자 회의가 열린다. 또 몽골반점 종족 국제기구가 창설된다.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IIFWP·회장 곽정환)은 초종교초국가평화의회(IIPC)와 공동으로 21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11개국 13개 ‘몽골반점 종족(몽골리안)’이 참가하는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행사는 평화의 시원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몽골리안에 대한 역사적 재인식과 문화적 각성을 통해 동북아시아와 나아가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한편, 세계적인 ‘몽골리안 협력 벨트’를 조성한다는 측면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몽골반점이란 갓난아이의 엉덩이 위쪽에 생긴 푸른 반점으로 한국·몽골 등 동북아에 거주하는 북방계 종족에서 주로 나타나지만, 전 세계에 분포돼 있다. 몽골리안의 형질적 특성이 형성된 곳은 시베리아 바아칼호 부근이라고 한다.

시베리아 몽골리안은 다시 옛 시베리아족(옛 아시아족)과 새 시베리아족(새 몽골족) 두 그룹으로 분화된다. 옛 시베리아족에는 축치족 코리야크족 캄차달족 길리야크족 아이누족 아메리카인디언 등이 있고, 새 시베리아족에는 사모예드족 위구르족 핀족 터키족 몽골족 퉁구스족 등이 있다.

이번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만주·네이멍구·위구르(신장성), 몽골,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헝가리, 핀란드, 북미인디언, 남미인디언, 에스키모 등 13개국에서 총 500여명의 정치 종교 학계 비정부기구(NGO) 등 지도자들이 참가해 세계 평화를 위한 몽골리안의 역할과 협력 방안 등을 모색할 계획이다.

‘심정문화 세계와 영구적인 평화의 실현―몽골반점 종족의 역사, 문화, 가정 전통의 의의’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회의에는 ▲몽골리안의 근원과 가정문화의 재발견(김충렬 고려대 교수·철학) ▲동북아시아 국가의 문화적 교류(박흥순 선문대 교수·국제학) ▲몽골리안의 평화와 심정문화(신현덕 한국산업기술대 교수·교양학) 등 8개의 전체 및 그룹 회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몽골리안의 시원지로 알려진 바이칼호 내 알흔섬이 러시아 후지르 마을 언덕 너머로 신비스럽게 바라다 보인다.

특히 23일에는 ‘21세기 국제평화 하이웨이 프로젝트’ 설명회와 ‘지구촌 평화와 복지를 위한 고찰―몽골리안 연대·협력의 길’을 주제로 한 종합 심포지엄이 마련되며, ‘몽골반점동족 세계평화연합’이 창설돼 국제평화기구로 출범할 계획이다.

회의 의장인 곽정환 IIFWP회장은 “인류를 한가족으로 묶기 위해 참사랑·참생명·참가정 운동을 펼쳐온 문선명 총재의 주창으로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평화회의’를 열게 됐다”고 회의 개최 배경을 설명했다.

곽 회장은 이어 “몽골리안은 시원의 시대부터 인류 평화와 복지를 갈망했던 종족이었으나 오늘날 정체성과 존재의 근본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며 “몽골리안 문화와 정신적 원형을 회복하는 일은 지구촌 화해·협력 시대에 매우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IIFWP는 전·현직 국가수반, 종교 지도자 등 국가 지도급 인사들이 연대해 인종·국가 간 갈등, 종교분쟁 등 지구촌 난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해 12월과 올해 5월에는 분쟁지역인 이스라엘에서 ‘평화대행진’을 벌여 세계의 이목을 끈 바 있다.

정성수기자/hulk@segye.com

■ 몽골리안이란

우리나라 대다수 갓난아이들은 엉덩이에 청색 반점이 있는데, 이는 삼신할머니가 아기를 받다가 아기가 숨을 쉬지 않자 엉덩이를 때려서 생긴 멍 자국이라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청색 반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몽골계 사람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 ‘몽골반점’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몽골리안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몽골반점은 의학적으로 진피의 심층에 있는 방추형 또는 분지형의 멜라닌 색소세포가 모여 표피를 통해 보이는 것으로, 생후 2세까지는 빛깔이 진하다가 점차 옅어져 11∼12세가 되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국 어린이에게서는 90 % 이상이 나타난다.

상고시대로부터 평화와 복지를 찾아 세계를 순례한 몽골리안 종족의 선조들은 인류 문화사에 귀한 자원으로 알려진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인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문명을 탄생시켰으며, 인류사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그 시원지는 러시아 동시베리아 남부 지역에 위치한 바이칼호 수내 알흔섬으로 전해진다. 바이칼호 자체가 수많은 북방 종족 신화의 탄생지다.

실제 몽골리안은 중앙아시아에만 거주하지 않는다. 고대 몽골리안 후손들은 한국, 일본, 중국 서북부, 중동, 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몽골리안 배경을 가진 종족은 공통적으로 하늘을 모시는 제천의식과 사람을 사랑하는 공동체 생활, 자연친화적인 사고, 영적인 세계관 등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원형들은 몽골리안의 생활문화와 심층 무의식의 세계에 용해돼 여전히 남아 있다.

정성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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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말 이후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해양 강국 고구려.

허구의 종족 짱골라

교수 “순수한 은 없다”… 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동아일보 / 기사입력2007-02-16 03:00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 교수. 회족()인 그는 한족()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 성 친양()에서 톈수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西) 성 남부와 장쑤() 성 서부 및 안후이()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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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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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명의 시원(始源)을 캐는 프로젝트’라는 뜻인 ‘중화문명탐원공정’은 현재 예비연구가 진행 중이며, 산시(山西)성 린펀(臨汾)시, 샹펀(襄汾)현과 허난(河南)성 신미(新密)·덩펑(登封)시 등에서 중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은 ‘화하족(華夏族)’이 활동했던 중심 지역이다. 특히 화하족은 낙양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소수민족이었다.하지만 동아시아 전대륙을 차지했던 배달겨레에게 흡수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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