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생애 가운데 탄생과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가장 많습니다. 붓다의 탄생에 관한 유명한 전설의 골자는 이미 초기성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존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석존의 탄생을 일반적으로 ‘강탄(降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1)
이러한 강탄 설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한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그토록 완벽한 인격을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부처 되기 이전에 무수한 생애를 거쳐오는 동안 끝없이 자기 희생의 공덕을 쌓았고, 그 결과 도솔천에 올라가 거기에서 신들을 교화하면서 지상에 내려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2) 그래서 보살의 수많은 전생 설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생 설화들은 대부분 여러 생애를 통해 선행의 공덕을 쌓았다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 도솔천에 머물고 있으면서 인간 세상에 내려가 교화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솔천 하강설입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도솔천은 보살(菩薩)이 다음 생애에는 지상에 태어나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준비를 위해 그곳에 잠시 머문다고 합니다. 이때 보살은 하생의 시기와 대륙과 나라와 집안에 대해 살핀다고 합니다. 시기라 함은, 인간 사회가 너무 이상적인 상태에 있으면 종교심이 일어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타락한 세상에서는 종교를 돌아볼 여유가 없으므로 그 중간의 알맞은 시기를 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륙[洲]이라 함은, 고대 인도의 세계관에 의한 네 개의 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 잠부드비파(閻浮提)라는 곳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우리들의 인간 사회를 말한 것인데 부처님의 출현에는 거기가 제일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같은 인도 중에서도 변경(邊境)이 아닌 중앙부가 좋다고 선택됩니다. 인도 사회의 계급은 세습 종교가인 바라문과 무사 귀족의 크샤트리야(刹帝利)가 상위(上位)에 있는데,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크샤트리야 쪽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보살도 그런 집안에 태어나기로 한다는 것입니다.3)
여러 신들은 어느 나라의 왕을 고를까를 의논하여, 열여섯 큰 나라를 하나씩 들어보지만 보살이 태어나기에 적당한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들이 다시 보살에게 그 조건을 물으니, 보살은 국토에 대해서는 예순 네 가지, 어머니가 되실 분에 대해서는 서른 두 가지 조건을 내어놓습니다. 말하자면 국토의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말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그 인품이 뛰어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들은 여러 보살과 신들은 석가족의 숫도다나왕(淨飯王)과 마야비(摩耶妃)야말로 그런 분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었다고 합니다.4)
한편 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합니다. 신과 천녀들은 머지않아 보살과 작별할 것을 슬퍼합니다. 보살은 자기의 후임으로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정했다고 합니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신들에게 법을 설하고 언젠가는 석가모니를 본받아 지상에 내려가 부처가 될 날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5)
후세의 전설들에 의하면 특히 한역 경전들에 의하면 태자가 탄생하자, 많은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손으로 태자를 받들었다고 하고, 그 때에 하늘에서 두 줄기의 온수(溫水)가 쏟아져 태자의 몸을 씻어드렸고, 그러자 태자는 선뜻 대지(大地)에 일어서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며,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디고서 오른 손으로는 위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사자후(獅子吼)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탄생게(誕生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붓다의 탄생에 관한 설화는 일찍부터 신화화(神話化) 되었습니다. 초기경전에도 탄생과 관련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는데, 이러한 설화들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더욱더 윤색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오늘날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정전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분명하게 믿을 수 없는 부분을 빼버리고, 나머지 부분을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6) 다만 우리는 이러한 설화를 통해 이렇게 해서라도 상징(象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류의 스승 석가모니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흠모(欽慕)의 정을 충분히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7)
2. 역사적 붓다의 탄생
석가족은 현재 네팔 중부의 남쪽 변경과 인도 국경 근처에 위치하였던 작은 부족으로, 까삘라밧투(Kapilavatthu, 현재 네팔의 타라이 지방의 티라우라 코트에 해당함)를 수도로 하여 일종의 공화정치 또는 귀족정치(혹은 과두정치)를 행하였습니다. 왕(rajan)이라고 하는 수장(首長)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꼬살라 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8)
붓다는 이러한 석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였고, 그의 어머니는 마야(Maya, 摩耶) 부인이었습니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수장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으로 불렸으며, 석존도 왕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9) 그러나 결코 대왕(大王)이라고 불린 적이 없습니다. 아마 이 지방의 지배자(支配者)였던 것은 틀림없으나, 대국(大國)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왕(淨飯大王)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를 이상화(理想化)한 데서 생긴 호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야부인도 후세에는 마하마야(Mahamaya) 왕비로 높여 불렸습니다. 그녀는 같은 석가족의 한 별계(別系)인 꼴리야(Koliyas)족의 공주였습니다.10)
초기성전에서는 고따마(Gotama, Gautama, 瞿曇)라고 하는 이름이 종종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좋은 소’라고 하는 의미의 족성(族姓)입니다. 그의 이름은 싯닷타(Siddhattha, Siddhartha, 悉達, ‘목적을 성취한 자’의 뜻)이지만 초기성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입니다.11)
숫도다나(정반왕)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석존을 낳은 것은 아마 당시 40을 넘었을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 석존의 탄생이 이 가문(家門)의 얼마나 큰 경사(慶事)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12)
마야 왕비는 출산이 임박해 오자 당시의 풍습에 따라 아기를 낳기 위해서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향하던 중, 두 도시 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룸비니(Lumbin ) 동산에 이르자, 꽃이 만발한 무수 아래서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13)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 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아기의 이름을 짓고 또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바라문들은 심사숙고한 후 일곱 명은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 세계의 통치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어 온 세계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세속을 떠나 출가한다면 왕자님은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입니다.” “오! 왕이시여! 이 왕자는 언젠가는 진리를 찾아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등각자가 될 것입니다.”14) 그런데 어머니 마야부인은 석존을 낳은 지 이레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가 양모가 되어 석존을 양육하였습니다.
3.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붓다의 탄생지는 룸비니(Lumbin )라고 전해지는데, 1896년 퓨러(A. Fuhrer)15)가 네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에서 발견한 아소까 왕의 석주(石柱)에는 ?여기에서 불타 석가모니가 탄생하였다?고 하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어 석존 탄생지에 대한 초기성전의 기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16) 이곳은 현재 룸민데이(Rummindei)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룸비니 동산은 마야비(妃)의 친정인 석가 일족의 데바다하(천비성)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왕비의 친정 어머니 이름을 따서 룸비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온갖 아름다운 꽃과 수목,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울창하고, 연못과 늪과 흐르는 시내도 있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훌륭한 동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기 405년 이곳을 찾은 중국인 승려 법현(法顯)은 여기에 두 용왕이 태자에게 첫 목욕물을 끼얹어주었다는 유적이 그때도 우물과 연못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그 근처에 살고 있던 불교 승려들의 음료수로도 사용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 633년 이 지방을 찾아간 현장(玄 )은 연못과 샘말고도 그 고장 사람들이 유하(油河)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시냇물이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더라고 적었습니다. 해산한 뒤 마야비가 목욕한 강이라는 것입니다.17)
현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 무우왕(無憂王, 아소까왕을 가리킴)이 세운 큰 돌기둥[石柱]이 있고 그 꼭대기에 마상(馬像)이 새겨져 있었는데, 뒷날 벼락으로 돌기둥이 중간에서 꺾이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8)
이 룸비니 동산의 유적은 오랫동안 정글에 묻혀서 잊혀진 채 겨우 그 고장 사람이 조그만 집을 짓고 지켜왔었습니다. 그러다가 1896년, 그 당시 인도 정부의 노력으로 퓨러(A. Fuhrer)라는 사람이 네팔에 들어가, 이른바 타라이 지방의 룸민디라는 마을이 룸비니의 고적임을 확인했습니다.19) 특히 아소까왕이 세운 돌기둥이 발견됨으로써 결정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현장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 돌기둥의 위쪽은 꺾여진 채 없어지고 말았지만, 아랫부분은 그대로 있어 거기에 적힌 비문의 넉 줄 반의 글자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석주에는 93자로 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습니다.
“신들의 보호를 받는 덕 높은 왕(아소까)이 왕위에 오른지 20년 되는 해에 친히 이곳에 와서 공양을 올렸다. 여기서 붓다 사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담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게 했다. 세존께서 여기서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받고, 또 생산의 팔 분의 일만을 지불하게 된다.”20)
위의 석주에는 ‘석가족의 성자, 붓다,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dhe jate Sakyamuni)21)라는 대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의해 이곳이 룸비니 동산이었음이 분명히 밝혀진 것입니다. 이 거대한 석주는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법사가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4. 탄생 연대
붓다의 탄생 연도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전과 북전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제국의 불교도들은 불멸(佛滅)을 기원전 544년(또는 543년)으로 보는 학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세일론(스리랑카) 불교의 전설에 근거한 것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있으며 학문적으로 무시되고 있습니다. 학문적 입장에서 볼 때 현재 학계에서 쓰이고 있는 붓다의 재세 연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22)
첫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560-480년 설입니다. 이것은 주로 서양의 여러 학자들이 세일론의 사서(史書) 등의 자료를 검토하여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멸 연대를 서력 기원전 489년(A. Bareau), 487년(V. A. Smith), 484년(H. Jacobi), 483년(W. Geiger 등), 482년(J. Fleer) 혹은 478년(J. Filliozat), 477년(F. Max Muler 등)으로 보는 등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이들의 학설은 이른바 중성점기(衆聖點記; 많은 聖者들이 불멸 후 <律藏>에다 매년 점을 하나씩 찍어 온 기록)에 희한 486년 설(수정설은 485)과도 거의 일치합니다.23)
두 번째는 서력 기원전 약 460-380년 설로서 일본의 우이하쿠주(宇井伯壽)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학설입니다. 우이(宇井)은 아소까 왕의 즉위 연대를 기원전 271년으로 추정하고 이 즉위가 불멸 후 116년에 거행되었다고 하는 북전(北傳)의 불교 전승에서 역산(逆算)하여 불멸을 서력 기원전 386년으로 산정하였습니다. 아소까 왕의 연대는 그 후의 연구에 의해 다소 수정되어 현재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는 268년 즉위설을 취합니다. 따라서 붓다의 연대는 서력 기원전 463-383년으로 수정됩니다.24)
이상의 두 가지 학설에는 약 100년의 차이가 있지만 고대 인도에 있어 역사 관념의 결여, 연대의 불명확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100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에 오히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25)
우리나라에서 붓다의 탄생일을 4월 8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방의 불교국에서는 베사카(Vesakha, Vaisakha, 인도력의 2월로서 태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함) 월의 만월일(滿月日)을 붓다의 탄생·성도·열반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도와 중국의 역법(曆法)이 서로 틀리기 때문입니다.
Notes:
1)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p.36-37. 2) 와타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 샘터, 1990), p.18.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p.18-19 참조. 4)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p.19-20. 5)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0. 6)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tv Ltd, 1992), pp.27-29 참조. 7)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26. 8)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6. 9)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6. 10) 이기영, 앞의 책, p.18. 11)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6. 12) 이기영, 앞의 책, p.18. 13) 피야다시 지음·정원 옮김, <부처님, 그 분 : 생애와 가르침> (서울 : 고요한 소리, 1988), p.10. 14) 피야다시 지음, 앞의 책, pp.10-11. 15) 피야다시(Piyadassi Thera) 장로는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룸비니 동산을 1896년 저명한 고고학자 커닝엄(Cunningham) 장군에 의해 발굴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피야다시 스님의 착오에 의한 것 같다. 피야다시 지음, 위의 책, p.10 참조. 16)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7. 17)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3. 18)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3. 19)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위의 책, p.24. 20) “When king Devanampiya Priyadar in had been anointed twenty years, he came himself and worshipped (this spot), because the Buddha kyamuni was born here. He both caused to be made a stone bearing a horse(?) ; and caused a stone pilar to be set up (in order to show) that the Blessed one was born here. (He) made the village of Lummini free of taxes, and paying (only) an eighth part (of the produce).” translated by Dr. Hultzsch. See Edward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pp.18-19. 21) 피야다시 지음, 앞의 책, p.10. 22)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앞의 책, p.37. 23)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7-38. 24)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8. 25) 후지타 코타츠 외 지음, 위의 책, p.38.
붓다의 젊은 시절
1. 태자의 어린 시절
태자가 탄생한 후 7일 만에 그의 생모(生母)였던 마야(Maya) 왕비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야 왕비의 사망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있지만, 너무 미화시킨 것이라 믿기 어렵습니다. 마야 왕비가 일찍 사망한 원인은 아마 산후 몸조리를 잘못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출산을 위해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로 가던 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태자를 낳았습니다. 야외에서 출산한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곧바로 이동하여 왕궁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태자가 자라면서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사실은 태자의 인격과 성격 형성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봅니다.1)
그 후 태자는 그의 이모(姨母)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언니인 마야 왕비의 뒤를 이어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부인이 되었으며, 나중에 난다(Nanda, 難陀)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나중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교단(敎團)은 그녀의 출가로 인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붓다의 어린 시절을 종합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붓다는 어려서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뭇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실례로 어느 날 농부가 일구어 놓은 땅 속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자 새가 날아와 그 벌레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태자는 생물은 서로 해친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합니다.
둘째, 붓다는 천성적으로 명상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2)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명상(冥想)을 좋아하는 형의 소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석가족의 왕인 그의 아버지는 국가적인 행사인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습니다. 이때 어린 왕자도 함께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농경제가 진행되는 동안 어린 왕자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여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합니다.
<중아함경(中阿含經)> 제29권의 <유연경(柔軟經)>에 따르면, 붓다께서는 출가 전에 이미 초선(初禪)의 경지를 체험한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전의 내용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또 옛날을 생각하면, 농부가 밭 위에서 쉬는 것을 보고 염부(閻浮)나무 그늘에 가서 가부를 맺고 앉아 욕심을 떠나고 악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떠나, 각(覺)이 있고 관(觀)이 있어, 욕계(欲界)의 악을 떠남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 초선(初禪)을 얻어 성취하여 노닐었다.”3)
이 때가 농경제(農耕祭)에 참가했을 때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는 정확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태자가 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앉아 명상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쾌 지나간 모양이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그늘은 해가 돌아감에 따라 모두 그 그림자 자리를 옮겨갔는데, 태자가 앉은 나무의 그늘만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의 오래된 조각(彫刻)들에는 그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시간도 태자의 명상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미래의 붓다의 위력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설사 이것이 후대의 추측인 첨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에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4)
한편 후대에 성립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제4권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태자의 선정에 대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태자가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사선(四禪)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것은 붓다께서 출가하여 성도(成道)를 향한 고행을 마치고, 과거 소년시절 체험했던 명상의 시간을 회상하여 그와 같은 방법으로 좌선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셋째, 붓다의 젊은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것 같습니다. 붓다께서 만년에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여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앞에서 인용했던 <중아함경> 제29권 유연경에 설해져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자신을 위해 겨울·여름·봄 세 계절에 어울리는 세 가지 종류의 궁전(三時殿)이 지어졌다는 등 유복하고 호화로운 생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내가 부왕(父王) 숫도다나(悅頭檀) 집에 있을 때에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 궁전, 곧 봄 궁전과 여름 궁전 및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궁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시 푸른 연꽃 연못·붉은 연꽃 연못·빨간 연꽃 연못·흰 연꽃 연못 등 여러 가지 연꽃 연못을 만들고, 그 연꽃 가운데에는 온갖 물꽃, 곧 푸른 연꽃·붉은 연꽃·빨간 연꽃·흰 연꽃을 심어서 언제나 물이 있고 언제나 꽃이 있었으며, 사람을 시켜 수호하여 일체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네 사람을 시켜 나를 목욕시키고는 붉은 전단향( 檀香)을 내 몸에 바르고 새 비단옷을 입혔으니, 위아래나 안팎이나 겉과 속이 다 새 것이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언제나 일산(日傘)을 내게 씌웠으니, 나로 하여금 밤에는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볕에 그을지 않게 하기 때문이었다. ……
내가 옛날의 아버지 숫도다나 집을 생각하면 여름 4개월 동안은 정전(正殿)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남자는 없고 오직 기생만 있어서, 스스로 즐기면서 당초에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동산으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삼십명의 제일 훌륭한 기병(騎兵)을 뽑아 의장(儀仗)이 앞뒤에서 시종하고 인도하게 하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이런 여의족(如意足)이 있었으니, 이것이 가장 유연(柔軟)한 것이었다.”6)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7) 이와 같이 태자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 보다 좋은 조건과 풍족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붓다는 세속적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즐기며 지내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 하지만 이 젊은 왕자는 온갖 안락과 사치를 누리며 예기(藝妓)들의 시중을 받는 궁궐생활에 오히려 싫증을 느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쾌락이나 세속적 야망에 만족하기에는 감수성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입니다. 초기 팔리어 사료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슬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하며 환멸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8)
보통 사람들은 추한 노인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지만, 어느 누구도 병의 고통이나 병자의 추잡스러움을 바라지 않지만, 병에 걸리는 것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반드시 닥쳐옵니다. 젊은 날의 붓다는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두려움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 젊음이 넘치는 그의 신체로부터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9)
이러한 세속적 쾌락에 대한 혐오감과 인생이 단지 끝없는 고통이라는 생각은 이 젊은 왕자를 크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종교적 삶을 통해서 평화와 고요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0)
2. 태자의 교육
태자는 당시 왕족의 교양으로서 필요한 모든 학문·기예(技藝)를 배웠으며, 비범한 재간을 발휘했다는 사실이 후대의 불전(佛傳)에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 교육이란 어떠한 내용의 것을 어떻게 배우는 것이었을까?
태자가 취학(就學)을 한 것은 일곱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인도의 습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인도의 관습에 의하면 보통 브라만 계급의 사람들은 여덟 살부터 12년 동안, 크샤트리아 계급의 사람들은 열 한 살부터 12년 동안, 바이샤 계급의 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12년 동안, 스승 밑에서 인도인이 가장 존중하는 고전(古典)인 <베다>를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학문에 뛰어난 재간이 있는 사람은 일곱 살부터 스승을 맞이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태자가 이와 같은 부류의 소년이었을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1) 그리고 태자는 <베다>는 물론 <베다>의 보조학(補助學)도 학습하였다고 합니다. 불교의 경전에는 세 개의 <베다>와 자휘학(字彙學), 어원학(語源學),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순세파학(順世派學), 대인상학(大人相學)으로 되어있고, 이것들에 통하는 것이 브라만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자이나교 측에서는 네 개의 <베다>와 사전(史傳), 문법학(文法學) 등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당시의 수재들은 <베다>의 본문 암송(暗誦), 그것에 의한 문법, 어원(語源)에 관한 학문, 사전(史傳) 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밖에 당시의 일반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록들에는 인도 사상 중 가장 깊이 있는 내용을 가진 <우파니샤드>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붓다 당시 <우파니샤드>의 사상은 이미 주지(周知)되어 온 사실이기 때문에 태자가 학습한 과목 중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은 명백합니다. 불교의 원시경전 중 가장 오래된 층의 것들 속에 우파니샤드적 표현이 많은 것은 석존의 태자 시대의 <우파니샤드>에 대한 교양을 말하고 있음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12)
또한 태자가 크샤트리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문(文)의 면만이 아니라, 무(武)의 면도 같이 연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는 무사계급(武士階級)인 크샤트리야족 출신으로서 필요한 무술(武術)을 배우고 닦았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후대의 불전에는 태자가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나 있었다고 했고, 그가 야소다라비(妃)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도 그가 궁중에서 열린 무술대회에서 발군(拔群)의 성적을 올린 까닭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13)
태자는 인도의 언어와 고전 문학 등의 일반적인 학습만을 한 것이 아니라 도보경주, 원반 던지기와 창 던지기 등의 육체적인 단련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족에게 필수적인 네 가지 기예, 즉 말타기, 코끼리 타기, 전차 몰기 그리고 군대의 배치법을 배웠다고 합니다.14) 이와 같이 전기나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태자는 왕족으로서의 교양을 쌓는데 필요한 온갖 학문과 기예를 습득했고, 비범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있습니다.15)
3. 태자의 결혼
태자가 결혼을 한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그리고 그 태자비(太子妃)가 라훌라(Rahula, 羅候羅)란 아들을 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모든 불전(佛傳)이 다 그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16) 결혼의 시기는 16세, 17세, 19세 20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 따르면 16세에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16세에 결혼한 것을 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자비의 이름은 남방성전(南方聖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북방성전(北方聖典)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방의 전승에서는 라훌라마따(Rahulamata, ‘라훌라의 어머니’의 뜻)라든가 밧다깟짜(Bhaddhakacca) 혹은 밧다깟짜나(Bhaddhakaccana, 跋陀迦旃延)로 불려지고 있지만 북방의 전승에서는 범어로 야소다라(Yasodhara, 耶輸陀羅, ‘영예를 지닌 여성’의 뜻)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뒷날 팔리어 성전의 주석서에서도 ‘야소다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전승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이름도 정하고 있어 동일인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습니다.17)
남방의 팔리어 전기(傳記)에서는 다만 ‘라훌라의 어머니'(羅候羅母)라고만 불려지고 있는데, 이런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호칭법으로 옛날 인도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일이 흔했던 것 같습니다. 붓다의 제자나, 신자들 중에도 아들 이름을 붙여 그 어머니를 호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북방의 성전에서는 태자의 비를 야소다라(耶輸陀羅)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야소다라에 관한 이야기는 붓다께서 성도한 뒤 옛 왕성(王城)을 방문했을 때, 출영(出迎)한 것과 그 후에 이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더불어 열심히 출가를 원해서 허락을 받고 니승(尼僧)이 되었다는 두 가지 사실밖에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18)
붓다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지식을 폭넓게 습득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삶의 문제를 통찰하는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에도 그러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후 얻게 된 그의 깨달음은 그의 단순한 천재성이나 직관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지속된 내성적 성숙과 노력의 결과라 할 것입니다.19)
Notes:
1) 이기영,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 지문각, 1965), p. 46. 2) 平川彰 著 · 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卷 (서울 : 민족사, 1989), p. 41. 3) <中阿含經> 제29권(大正藏 1, pp. 607c-608a), “我復憶昔時看田作人止息田上. 往詣閻浮樹下結跏趺坐. 離欲惡不善之法. 有覺有觀. 離生喜樂得初禪成就遊.” 4) 이기영, <석가>, pp. 47-48. 5) <方廣大莊嚴經> 제4권 (大正藏 3, p. 560b), “諸欲惡有覺有觀 離生喜樂住初禪內淨一心滅覺觀 離生喜樂住二禪 離喜受 聖說住捨有念有想 身證樂住三禪 斷除苦樂滅憂喜 不苦不樂 念淸淨住四禪.” 6) <中阿含經> 제29권(大正藏 1, p. 607c). 7) F. L. Woodward and E. M. Hare, Gradual Saying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2), I, p. 128. 8) 케네스 첸 지음, 길희성 · 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 (왜관 : 분도출판사, 1994), p. 35. 9) 平川彰, 앞의 책, pp. 41-42. 10) 케네스 첸 지음, 길희성 · 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 p. 35. 11) 이기영, <석가>, p. 48. 12) 이기영, <석가>, p. 49. 13) 이기영, <석가>, p. 50. 14) 길희성 · 윤영해 옮김, 앞의 책, p. 34. 15) 정승석, <불교의 이해> (서울 : 대원정사, 1989), pp. 23-24. 16) 이기영, <석가>, p. 50. 17) 후지타 코타츠 외 · 권오민 옮김, <초기 ·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 39. 18) 이기영, <석가>, p. 52. 19) 정승석, 앞의 책, p. 25.
“경 가운데에도 이러한 법이 있긴 하나 중생의 근기와 행동이 같지 않으며, 받아서 이해하는 연(緣)도 다르다.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의 근기가 예리하고 설법하는 사람도 색(色)‧심(心)의 업이 수승하여 원음(圓音)으로 한 번 연설하매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하므로 논을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래가 돌아가신 후에는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널리 듣고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이가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자심력(自心力)이 없어서 광론(廣論)에 의하여 이해하게 되는 사람도 있으며, 또한 어떤 중생은 다시 광론의 글이 많음을 번거롭게 여겨 마음으로 총지(總持)와 같이 글의 분량이 적으면서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런 것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한없는 뜻을 총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논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2. 입의분(立義分)
已說因緣分. 次說立義分.
摩訶衍者. 總說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法. 二者義.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 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
何以故. 是心眞如相. 卽示摩訶衍體故. 是心生滅因緣相.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
所言義者. 則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體大. 謂一切法眞如平等不增減故.
二者相大. 謂如來藏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用大.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
一切諸佛本所乘故. 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故.
이미 인연분(因緣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입의분(立義分)을 말할 것이다.
대승이란 총괄하여 설명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衆生心)을 말함이니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을 포괄하며,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의 진여상(眞如相)이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의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이 대승 자체의 상(相)‧용(用)을 잘 보이기 때문이다.
의(義)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체대(體大)니, 일체의 법은 진여로서 평등하여 증감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이 갖추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용대(用大)니,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인과(善因果)를 잘 내기 때문이다. 일체의 여러 부처가 본래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모두 이 법에 의거하여 여래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심진여(心眞如)란 바로 일법계(一法界)중의 대총상(大總相) 법문(法門)인 체(體)이니, 이른바 심성(心性)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으며 명자상(名字相)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 결국 평등하게 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일심(一心)일 뿐인 것이니, 그러므로 진여라 이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言說)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요, 다만 망념을 따른 것이어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言眞如者. 亦無有相. 謂言說之極因言遣言.
此眞如體無有可遣. 以一切法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皆同如故.
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 名爲眞如
진여라 말한 것도 상(相)이 없으니 이는 언설(言說)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임을 이르는 것이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이기 때문이며, 또한 주장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問曰. 若如是義者. 諸衆生等云何隨順而能得入.
答曰. 若知一切法雖說無有能說可說. 雖念亦無能念可念. 是名隨順. 若離於念名爲得入.
묻기를,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야 정관(正觀)에 들어가게 될 수 있는가?”
답하기를,
“만약 일체의 법이 설명되기는 하나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되기는 하나 역시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안다면 이를 수순(隨順)이라고 하며, 만약 생각을 여읜다면 정관(正觀)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復次眞如者. 依言說分別有二種義. 云何爲二.
一者如實空. 以能究竟顯實故.
二者如實不空. 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
다시 이 진여란 언설에 의하여 분별함에 있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필경에는 실체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 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具足)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일체법의 차별되는 모양을 여읨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허망(虛妄)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自性)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유(有)‧무(無)를 함께 갖춘 모양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같은 모양도 아니요 다른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요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고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일체의 중생이 망심(妄心)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불공(不空)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空)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바로 이는 진심(眞心)이며, 이 진심은 항상 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만족하기 때문에 불공(不空)이라 이름 한다. 그러나 또한 취할만한 상(相)이 없으니, 망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함으로써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b. 생멸문(生滅門)
가. 널리 풀이함
ㄱ) 심생멸(心生滅)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 名爲阿梨耶識.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 하여 아라야식(阿藜耶識)이라고 하는 것이다.
각(覺)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니, 망념을 여읜 상(相)이란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본각의 뜻이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又以覺心源故名究竟覺. 不覺心源故非究竟覺.
또 심원(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며, 심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닌 것이다.
범부 정도의 사람은 먼저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각(覺)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바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이상(異相)을 깨달아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이는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着相)을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 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주상(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이 없으니, 이는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 한다.
보살지(菩薩地)가 다한 정도의 사람은 방편을 만족시켜서 일념(一念)이 상응하고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상(相)을 깨달아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으니, 이는 미세념(微細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 한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볼 수 있다면 곧 불지(佛智)에 향함이 된다’고 말하였다.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 만한 초상(初相)이 없는 것이며, 그런데도 초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무념(無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 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염념이 상속하여 아직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망념이 없게 되면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니무념(無念)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실로 시각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니, 왜냐하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각(覺)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본각이 염(染)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의 상(相)을 내지만, 저 본각과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정상(智淨相)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이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화합식상(和合識相)을 깨뜨리고 상속심상(相續心相)을 없애어 법신을 현현(顯現)하여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모든 심식(心識)의 상이 다 무명이니, 무명의 상이 본각의 성질을 여의지 않아서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파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에 의하여 물결이 움직일 때, 물의 모양과 바람의 모양이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바람이 그쳐서 없어지면 움직이는 모양(곧 물결)은 곧 없어지나 물의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도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일 때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것이 곧 없어지나 지혜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란 것은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각체상(覺體相 : 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이란 것은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으며, 이는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지라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니, 여실불공(如實不空)을 말한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되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아니하며,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아서 일심에 항상 머무르니, 이는 일체법이 곧 진실성이기 때문이며, 또 일체의 염법이 더럽힐 수 없으니 지체(智體)는 움직이지 아니하여 무루(無漏)를 구족하여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불공법이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서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법출리(法出離)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善根)을 닦도록 하여 (중생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기 때문이다.
불각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념이 있게 된 것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치 방향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각(覺)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을 것이며,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의(名義)를 알아서 진각(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의 자상이라고 말할 만한 것도 없는 것이다.
復次依不覺故生三種相. 與彼不覺相應不離. 云何爲三.
一者無明業相. 以依不覺故心動說名爲業. 覺則不動. 動則有苦. 果不離因故.
二者能見相. 以依動故能見. 不動則無見.
三者境界相. 以依能見故境界妄現. 離見則無境界.
다시 불각에 의하기 때문에 세 가지의 상이 생겨서 저 불각과 더불어 상응하여 여의지 않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무명업상이니, 불각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면 고통이 있게 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능견상(能見相)이니, 움직임에 의하기 때문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니, 움직이지 않는다면 볼 것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니, 능견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가 거짓 되이 나타나는 것이니 견(見)을 여읜다면 경계가 없어질 것이다.
以有境界緣故復生六種相. 云何爲六.
一者智相. 依於境界心起分別愛與不愛故.
二者相續相. 依於智故生其苦樂覺. 心起念相應不斷故.
三者執取相. 依於相續緣念境界. 住持苦樂心起著故.
四者計名字相. 依於妄執分別假名言相故.
五者起業相. 依於名字尋名. 取著造種種業故.
六者業繫苦相. 以依業受果不自在故.
경계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다시 여섯 가지의 상을 내는 것이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경계에 의하여 마음이 일어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음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에 의하기 때문에 그 고락을 내어서 각심(覺心)으로 망념을 일으켜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에 의하여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해서 고락에 주지(住持)하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잘못된 집착에 의하여 거짓된 명칭과 언설의 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名字)에 의하여 이름을 따라가면서 집착하여 여러 가지의 행동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아서 자재(自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 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
무명이 모든 염법을 내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왜냐하면 모든 염법은 다 불각상(不覺相)이기 때문이다.
동상(同相)이라고 말한 것은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의 와기(瓦器)가 모두 똑같은 미진(微塵)의 성상(性相)인 것처럼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여러 가지 업환(業幻)도 다 똑같은 진여의 성상인 것이다. 이러므로 경 가운데 이 진여의 뜻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의 중생은 본래 열반‧보리의 법에 상주하여 들어가 있는 것이니, 이는 닦을 수 있는 상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상이 아닌지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색상(色相)을 볼 만한 것이 없으되 색상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염법의 업환(業幻)에 따라 지은 것이지 지색불공(智色不空)의 성질은 아니니 지상(智相)은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상(異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의 와기(瓦器)가 각기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이 수염환(隨染幻)의 차별이며 성염환(性染幻)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불각하여 일어나서 볼 수 있고 나타낼 수 있으며 경계를 취할 수 있어서, 망념을 일으켜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의(意)’라고 말하였다. 이 의는 다시 다섯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업식이라고 이름 하니, 무명의 힘으로 불각하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니, 이를 말한 것이다.
둘째는 전식이라고 이름 하니, 움직여진 마음에 의하여 능히 볼 수 있는 상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식이라고 이름 하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를 나타냄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현식도 그러하여 그 오진(五塵)을 따라서 대상이 이르면 곧 나타내어서 앞뒤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임의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고 이름 하니, 염법과 정법을 분별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속식이라고 이름 하니, 망념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한량없는 기간의 선악의 업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또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게 하기 때문에 현재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고 미래의 일을 자신도 모르게 잘못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삼계(三界)는 거짓된 것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六塵)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잘못 생각하여 생긴 것이어서 일체의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얻을 만한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망심에 의하여 머물러 있게 되니, 이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가운데의 형상과 같아서 얻을 만한 실체가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음에 의식(意識)이라고 말한 것은 곧 이 상속식이 모든 범부의 집착함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아(我)와 아소(我所)를 계탁하여 여러 가지 망집(妄執)으로 일에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을 분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 :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이름 하니, 이 식이 견애번뇌(見愛煩惱)의 증장되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다.
무명의 훈습(薰習)에 의하여 일어난 식(識)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는 보살이 처음의 정신(正信)에서 발심하고 관찰함으로부터 저 법신(法身)을 증득한다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만이 끝까지 다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이 무명에 의하여 물들게 되어 그 염심이 있는 것이니, 비록 염심이 있으나 항상 변하지 아니하는지라 그러므로 이러한 뜻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所謂心性常無念. 故名爲不變.
이른바 심성(心性)이 항상 망념이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라 이름하며,
以不達一法界故心不相應忽然念起名爲無明.
하나의 법계(法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아니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染心者有六種. 云何爲六.
一者執相應染. 依二乘解脫及信相應地遠離故.
二者不斷相應染. 依信相應地修學方便漸漸能捨. 得淨心地究竟離故.
三者分別智相應染. 依具戒地漸離. 乃至無相方便地究竟離故.
四者現色不相應染 依色自在地能離故.
五者能見心不相應染. 依心自在地能離故.
六者根本業不相應染. 依菩薩盡地得入如來地能離故.
염심이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二乘)의 해탈한 이와 신상응지(信相應地)의 사람에 의하여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에 의하여 방편(方便)을 수학(修學)하여 점점 버려서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서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셋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하여 점점 여의며 이에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넷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에 의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진지(菩薩盡地)에 의하여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서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不了一法界義者. 從信相應地觀察學斷. 入淨心地隨分得離. 乃至如來地能究竟離故.
일법계(一法界)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치단함을 배우고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되어야 마침내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염심(染心)의 뜻이란 번뇌애(煩惱碍)라 이름 하는 것이니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막기 때문이요, 무명의 뜻이란 지애(智碍)라 이름 하는 것이니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막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염심에 의하여 볼 수 있으며 나타낼 수 있으며 잘못 경계를 집착하여 평등성을 어기기 때문이며, 일체법(一切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상이 없으나 무명불각이 망령되이 법과 어긋나기 때문에 세간의 모든 경계에 수순(隨順)하는 여러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생멸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추(麤)니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細)니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추중의 추는 범부의 경계요, 추중의 세와 세 중의 추는 보살의 경계요, 세 중의 세는 부처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이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며 연(緣)에 의하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의 뜻이기 때문이고, 연에 의한다는 것은 잘못 경계를 짓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이 멸한다면 연이 멸하는 것이니, 인이 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멸하고 연이 멸하기 때문에 상응심(相應心)이 멸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만약 상속한다면 어떻게 마침내 멸해 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멸한다는 것은 오직 심상(心相)만 멸하는 것이요 심체(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람이 바닷물에 의해서 동상(動相 : 파도)을 만드는 것이니, 만약 바닷물이 없어지면 풍상(風相)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지마는 바닷물이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풍상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바람이 멸하기 때문에 동상(動相)이 따라서 멸하지만 바닷물이 멸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무명도 또한 그러하여 심체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니, 만약 심체가 멸하면 중생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지만 심체가 멸하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치(癡 : 무명)가 멸하기 때문에 심상이 따라서 멸하지만 심지(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나. 훈습론(熏習論)
復次有四種法熏習義故. 染法淨法起不斷絶. 云何爲四.
一者淨法. 名爲眞如.
二者一切染因. 名爲無明.
三者妄心. 名爲業識.
四者妄境界. 所謂六塵.
다시 네 가지 법의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염법과 정법이 일어나 단절하지 않는 것이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훈습의 뜻이란 세간의 의복이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마는 만약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면 그 때문에 곧 향기가 있는 것과 같이, 이도 또한 이러하여 진여정법에는 실로 염(染)이 없지만 다만 무명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곧 염상(染相)이 있으며, 무명염법에는 실로 정업(淨業)이 없으나 다만 진여로 훈습하기 때문에 정용(淨用)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진여법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무명염법의 인(因)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며, 훈습하기 때문에 곧 망심이 있게 된다. 망심이 있어서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달(了達)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하여 망념이 일어나 망경계를 나타낸다. 망경계의 염법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곧 망심을 훈습하여 그로 하여금 염착(念着)케 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지어서 일체의 신심(身心)등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 망경계 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념훈습(增長念熏習)이며 둘째는 증장취훈습(增長取熏習)이다.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熏習)이니, 아라한(阿羅漢)과 벽지불(辟支佛)과 일체 보살의 생멸고(生滅苦)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이니, 범부의 업계고(業繫苦)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명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을 일으켜 단절시키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이니, 이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며 훈습하는 인연의 힘에 의하여 곧 망심(妄心)으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믿어서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일 뿐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이리하여 앞의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隨順行)을 일으켜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잘못 생각하지도 아니하며, 내지 오랫동안 훈습한 힘 때문에 무명이 곧 멸하게 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하기 때문에 심상(心相)이 다 없어지니, 이를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이룬다고 말한다.
妄心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分別事識熏習. 依諸凡夫二乘人等. 厭生死苦隨力所能. 以漸趣向無上道故.
二者意熏習. 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인(二乘人)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함에 의하여 힘이 닿는 대로 점차로 무상도(無上道)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용맹(發心勇猛 : 마음을 발함이 용맹함)하여 속히 열반에 나아감을 말하기 때문이다.
자체상훈습이란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부사의업(不思議業)을 갖추며 경계성(境界性)을 짓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뜻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훈습의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묻기를,
“만일 이러한 뜻과 같다면 모든 중생에게 모두 진여가 있어서 똑같이 훈습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믿음이 없기도 하여 한없는 전후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모두 동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아서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답하기를,
“진여는 본래 하나이지만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차별되어 후박(厚薄)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애염번뇌(我見愛染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일체의 번뇌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어서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 것이며, 오직 여래만이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불법에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는 것이니, 인연이 구족하여야 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무 중의 화성(火性)이 불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못하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정인(正因)의 훈습하는 힘이 있으나 만약 모든 부처, 보살, 선지식(善知識)등을 만나 그들로 연(緣)을 삼지 못한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외연(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으로 인(因)의 정법(淨法)이 아직 훈습의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또한 구경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인연이 구족한 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보살 등의 자비와 원호(願護)함을 받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히며,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의 보여 주고 가르쳐 주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함을 만나 차츰 일을 이루어 나아가 열반의 도에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용훈습(用熏習)이란 곧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이니, 이러한 외연에 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대략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연(平等緣)이다.
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부처와 보살 등에 의하여 처음 발의(發意)하여 비로소 구도(求道)할 때로부터 부처가 되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서 혹은 부처를 보기도 하고 혹은 생각하기도 함에 있어, 어떤 경우는 권속(眷屬)‧부모‧제친(諸親)이 되며, 어떤 경우는 급사(給使)가 되며, 어떤 경우는 지우(知友)가 되며, 어떤 경우는 원가(怨家)가 되며, 어떤 경우는 사섭(四攝)을 일으키며, 내지 일체의 짓는 한량없는 행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니 이는 대비(大悲)로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혹은 보거나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빨리 도탈(度脫)을 얻기 때문이고,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도탈을 얻기 때문이다. 이 근원(近遠)의 두 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이다.
‘평등연(平等緣)’이란 일체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 중생을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동체지력(同體智力)으로써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응하여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중생이 삼매(三昧)에 의하여야 평등하게 모든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미상응(未相應)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의와 의식의 훈습으로 신력(信力)에 의하기 때문에 잘 수행을 하지만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이 체와 더불어 상응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며, 아직 자재업(自在業)의 수행이 용(用)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상응(已相應)이니, 법신보살이 무분별심을 얻어 모든 부처의 지용(智勇)과 더불어 상응하여 오직 법력에 의하여 저절로 수행하게 되어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염법(染法)은 무시의 때로부터 훈습하여 단절되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곧 단절함이 있으나, 정법훈습(淨法熏習)은 곧 단절함이 없어서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히 나타나 용(用)의 훈습을 일으키므로 단절함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의 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諸佛)에게 증감됨이 없으며 앞에서 나는 것도 아니요, 뒤에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필경에 늘 변함이 없어서 본래부터 성품이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가득 채운 것이다.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法界)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이여,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常)‧락(樂)‧아(我)‧정(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청량(淸涼)하고 불변(不變)하고 자재(自在)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불리(不離)‧부단(不斷)‧불이(不異)‧부사의(不思議)한 불법(佛法)을 구족하고 내지 만족하여 부족한 바가 없는 뜻이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위에서 진여는 그 체가 평등하여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진여의 체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공덕(功德)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실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차별의 상이 없어서 똑같은 일미(一味)이며 오직 하나의 진여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무분별(無分別)로 분별상(分別相)을 여의니, 이러므로 둘이 없는 것이다. 또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상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뿐인지라 실로 망념이 없지만, 망심(妄心)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여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하는 것이니,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곧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견(見)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상이 있는 것이니, 심성(心性)이 견을 여의면 바로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게 되며 상(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이리하여 열뇌(熱惱)하며 쇠변(衰變)하면 자재하지 못하며 이에 항하의 모래들보다 많은 망염(妄染)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뜻에 대(對)하기 때문에 심성이 움직임이 없으면 항하의 모래들보다 많은 모든 깨끗한 공덕상의 뜻을 가져 나타낸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어 다시 앞의 법의 생각할 만한 것을 본다면 모자라는 바가 있을 터이지만, 이러한 정법의 무량한 공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며,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한 것이니, 법신‧여래장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인지(因地)에서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波羅密)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攝化)하며, 크나큰 서원(誓願)을 세워 일체의 중생계를 모두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겁(劫)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을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에 의해서인가? 일체 중생과 및 자기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인 줄 여실히 앎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방편지(大方便智)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멸하고 본래의 법신을 보아서 자연히 부사의업의 여러 가지 작용을 갖는 것이니, 곧 진여와 똑같이 모든 곳에 두루 하게 되며 또한 그러면서도 얻을 만한 작용의 모양도 없다. 왜 그런가? 말하자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지상(智相)의 신(身)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로서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는 것이어서 시작(施作)을 떠난 것이나,다만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이익 되게 하기 때문에 용(用)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 용(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에 의한 것으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응신(應身)이라 이름 하니, 이는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밖에서 온 것이라 보고 색의 분제(色分齊)를 취하여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업식에 의한 것이니, 이는 모든 보살이 초발의(初發意)로부터 보살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본 것을 보신(報身)이라 함을 이르는 것이다. 그 몸에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도 무량한 여러 가지 장엄이 있어서 곳에 따라 나타냄이 곧 가이없고 궁진(窮盡)할 수 없어 분제상(分齊相)을 여의었지만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있어서 훼손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은 모두 모든 바라밀 등 무루의 행훈(行熏) 및 부사의훈(不思議熏)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니, 이러한 한량없는 낙상(樂相)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범부에게 보여 지는 것은 그 추색(麤色)이니, 육도(六道)에 따라서 각각 보는 것이 같지 아니하여 여러 가지 이류(異類)이며, 낙상(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 말한다. 다음,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적은 부분으로나마 보신을 보아서 저 보신의 색상(色相)과 장엄(莊嚴) 등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 분제를 떠났으며 오직 마음에 의하여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은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스스로를 분별하고 있으니, 이는 아직 법신(法身)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심(淨心)을 얻으면 보는 바가 미묘하여 그 작용이 점점 수승하며 이리하여 보살지진(菩薩地盡)에 이르러 보신(報身)을 보는 일이 구경(究竟)하게 되거니와,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보는 상(見相)이 없어지는 것이니, 모든 부처의 법신은 피차의 색상(色相)을 서로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곧 이법신은 색의 체(體)이기 때문에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色)과 심(心)은 둘이 아닌 것이니, 왜냐하면 색의 본성은 곧 지(智)인 까닭에 색의 체에 형체가 없는 것을 지신(智身)이라 하며, 지성(智性)은 곧 색(色)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타낸 색이 분제가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과 무량한 장엄을 나타냄에 각각 차별이 되지만 모두 분제가 없어서 서로 방해되지 아니한다. 이는 심식(心識)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생멸문으로부터 곧 진여문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른바 오음(五陰)의 색(色)과 심(心)을 추구해 보건대, 육진경계(六塵境界)가 필경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으며, 또한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으니, 마치 사람이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지만 방향 자체는 실로 변화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念)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며,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念)이 없는 줄 알면 곧 수순(隨順)하게 되어 진여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2) 사집(邪執)을 대치함
對治邪執者. 一切邪執皆依我見. 若離於我則無邪執. 是我見有二種.
云何爲二. 一者人我見. 二者法我見.
사집(邪執)을 대치한다는 것은 일체의 사집이 모두 아견(我見)에 의하는 것이니, 만약 나(我)를 여의면 곧 사집이 없는 것이다. 이 아견(我見)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고,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① 인아견(人我見)
人我見者. 依諸凡夫說有五種. 云何爲五.
인아견(人我見)이란모든 범부에 의하여 말해지는 것으로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경(經)에서 ‘여래 법신이 필경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허공이 여래성(如來性)이라 여기는 것이니, 이를 어떻게 대치하는가? 허공상(虛空相)은 망법(妄法)인지라 체가 없어 여실하지 못한 것이나, 색에 대하기 때문에 이 볼만한 상이 있는 것이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색법(色法)이 본래 마음이요 실로 밖의 색이 없는 것이니, 만약 밖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상도 없음을 밝힌 것이다. 소위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에서 망령되이 일어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약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가 멸하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 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의 구경의 뜻을 말한 것이요, 허공상과 같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수다라(修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는 체(體)가 공(空)하며, 내지 열반‧진여의 법도 필경에는 공한지라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여 일체의 상(相)을 여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로지 공(空)이라 여기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對治)하는가? 진여 법신은 자체(自體)가 공하지 아니하여 무량한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했기 때문임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은 증감이 없어서 체가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여래장은 색‧심법의 자상(自相)과 차별이 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직 진여의 뜻에 의해 말하였기 때문이며, 생멸염(生滅染)의 뜻에 의하여 나타냄을 차별(差別)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모든 세간의 생사의 염법이 다 여래장에 의하여 있는지라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生死) 등의 법을 갖추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본래부터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모든 정공덕(淨功德)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아니하여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이 오직 망령되이 있는 것이요, 그 자성(性)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의 체(體)에 망법(妄法)이 있다면 증회(證會)하여서 영원히 망법을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처음이 있다고 하고, 처음을 보기 때문에 또한 여래가 얻은 열반이 마침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고 하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전제(前際: 시초)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상(相)도 시작함이 없으니 만약 삼계(三界)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남이 있다고 한다면 곧 이는 외도경(外道經)의 설이며, 또 여래장은 후제(後際: 마지막)가 없으니 모든 부처가 얻은 열반이 그것과 상응하여 곧 후제가 없기 때문이다.
법아견(法我見)이란 이승의 둔근(鈍根)에 의하기 때문에 여래가 다만 그들을 위하여 인무아(人舞我)만을 설하였으며, 이 설함이 구경(究竟)하지 않기 때문에 오음생멸(五陰生滅)의 법이 있음을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망령되이 열반을 취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음법(五陰法)은 그 자성이 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멸함도 없어서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망집(妄執)을 끝까지 다 여읜다는 것은 염법과 정법이 모두 서로 의지하는 것이어서 말할 만한 자상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色)도 아니요 심(心)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어서 필경에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는데도 말함이 있는 것은 여래의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취지란 모두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니, 일체법을 생각하면 마음을 생멸케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3) 도(道)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함
分別發趣道相者. 謂一切諸佛所證之道. 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모든 여러 부처가 증득한 도에 모든 보살이 발심, 수행하여 나아가는 뜻을 말하기 때문이다.
略說發心有三種. 云何爲三.
一者信成就發心. 二者解行發心. 三者證發心.
대략 발심(發心)을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解行發心이요, 셋째는 證發心이다.
信成就發心이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어떤 행실을 닦아서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發心)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른바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 의하여 훈습의 힘과 선근(善根)의 힘이 있으므로 업의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고자 하며,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信心)을 수행한다. 이리하여 일만 겁(劫)을 지나서 신심이 성취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케 하니, 혹은 대비(大悲)에 의하여 스스로 발심케 하며, 혹은 정법(正法)이 없어지려 함에 의해서 호법(護法)의 인연으로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심이 성취되어 발심하게 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필경 퇴전하지 아니하니, 이를 여래종(如來種) 중에 머물러 정인(正因)과 상응한다고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소(微少)하여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텁다면 비록 부처를 만나 공양하게 되더라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고,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根器)가 결정되지 아니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나며, 혹 여러 부처에게 공양함이 있더라도 아직 일만 겁(劫)을 지나지 아니하여 중도에 연(緣)을 만나 또한 발심함이 있다. 이른바 부처의 색상(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여러 스님에게 공양함에 의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 마음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발심들은 모두 결정되지 아니한 것이니, 나쁜 인연을 만나면 혹 퇴실(退失)하여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說有三種. 云何爲三.
一者直心. 正念眞如法故. 二者深心. 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
다음에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떠한 마음을 밝히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니 일체의 모든 선행을 이루기 좋아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問曰. 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 何故不唯念眞如. 復假求學諸善之行.
묻기를,
“위에서 법계(法界)는 하나의 상(相)이며 불체(佛體)는 둘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가?”
“비유컨대 큰 마니보(摩尼寶)가 그 체성(體性)은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를 가지고 있어 만약 사람이 마니보의 깨끗한 본성을 생각하면서도 방편(方便)으로써 갖가지로 갈고 다듬지 않으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그 체성이 텅 비고 깨끗하나 한량없는 번뇌의 더러운 때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眞如)를 생각하지만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훈습하여 닦지 않으면 또한 깨끗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한량이 없어 모든 법에 두루 하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서 대치하는 것이니, 만약 사람이 모든 선법(善法)을 수행하면 절로 진여법에 귀순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생김이 없음을 보고 망견(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하며, 모든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과(業果)를 잃지 아니함을 보고 대비를 일으켜 여러 복덕(福德)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하여 열반에 머물지 아니함을 말하니,이는 법성의 주착(住着)함이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二者能止方便. 謂慚愧悔過. 能止一切惡法不令增長. 以隨順法性離諸過故.
둘째는 능지방편(能止方便)이다.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모든 악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모든 허물을 여의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을 일으켜 증장시키는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삼보(三寶)에게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를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권청(勸請)하여 이와 같이 삼보를 애경(愛敬)하는 순후(淳厚)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되어 무상의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며, 또 불(佛)‧법(法)‧승(僧)의 힘으로 보호됨에 의하여 업장(業障)을 녹이고 선근이 퇴전하지 않음을 말하니, 이는 법성의 치장(癡障)을 여의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미래에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 제도하여 남음이 없게 하여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이루도록 발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단절됨이 없음을 수순하기 때문이며, 법성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에 두루 하여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피차(彼此)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구경에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 마음을 내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법신을 보게 되며,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願力)에 따라서 여덟 가지로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나와서 모태(母胎)에 들어가고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와서 출가하여 성도(成道)하고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듦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가 과거 한량없는 때로부터 유루(有漏)의 업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나는 바에 따라서 미세한 고통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업의 계박이 아닌 것이니, 대원(大願)에 의하여 자재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다라 중에서 ‘혹 악취(惡趣)에 물러나 떨어짐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실제로 물러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만 초학보살(初學菩薩)로서 아직 정위(正位)에 들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하여 두려워하게 하여 저로 하여금 용맹케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이 한 번 발심한 후에는 겁약한 마음을 멀리 여의어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짐을 끝내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령 무량무변한 아승기겁(阿僧祇劫)에 어려운 행실을 부지런히 애써야만 열반을 얻는다는 것을 듣더라도 겁내어 좌절하지 않는 것이니, 일체법이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解行發心이란 더욱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처음 정신(正信)으로부터 제일 아승기겁이 다 차려고 할 때이므로 진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 닦는 것이 상을 여의기 때문이다. 법성(法性)의 체는 간탐(慳貪: 인색하고 욕심이 많음)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보시(檀: 布施)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물들어 더럽혀짐이 없어 오욕(五欲)의 허물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계(尸: 持戒)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고(苦)가 없어 성내고 괴로워함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인욕(羼提: 忍辱)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신심(身心)의 상이 없어 게으름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정진(毘梨耶: 精進)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안정하여 있어 그 체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선정(禪定)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체가 맑아서 무명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반야(般若)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소위 진여니, 전식(轉識)에 의하여 경계라고 말하지만 이 증득은 경계가 없는 것이요 오직 진여지(眞如智) 뿐이므로 법신(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이 보살이 일념(一念) 사이에 시방(十方)의 남김 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여 법륜(法輪)을 굴리기를 청하니, 그것은 오직 중생을 개도(開導)하여 이익 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지(地)를 초월하여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을 보이니 이는 겁약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내가 한량없는 아승기겁의 기간에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수한 방편의 불가사의함을 보이지만 실로 보살은 종성의 근(種姓根)이 같으며 발심이 곧 같고 증득한 것도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모든 보살이 모두 다 세 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 세계의 같지 않음과 보는 바와 듣는 바 근(根: 능력)‧욕(欲: 희망)‧성질(性)이 다름에 따라서 행하는 것을 보이는 것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의 발심상(發心相)이란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은 공덕이 다 이루어져서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니, 이는 일념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자연히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 시방(十方)에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며 세계가 무변하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심행(心行)의 차별도 또한 무변하니, 이와 같은 경계를 한계 지을 수 없어서 알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무명이 단절된다면 심상(心想)이 없어질 텐데 어떻게 잘 알기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 하는가?”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一心)으로서 상념을 떠나 있는 것이나, 중생이 경계를 잘못 보기 때문에 마음에 한정됨이 있으며, 상념을 잘못 일으켜서 법성(法性)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망견, 망상을 여의어서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는 모든 법의 본성인 것이다. 그 자체(自體)가 모든 망법을 환하게 비추어 대지(大智)의 작용이 있어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의 응당 알아야 할 바를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의(法義)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이름 하게 된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의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 하며 작의(作意: 의식적인 노력)가 없기 때문에 ‘자연(自然)’이라 한 것이니 다만 중생심에 의하여 나타낸 것이다. 중생심(衆生心)이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심에도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4.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已說解釋分. 次說修行信心分.
是中依未入正定. 衆生故. 說修行信心.
이미 해석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수행신심분을 말하겠다.
이 중에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에 의거하기 때문에 신심을 수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何等信心 云何修行.
略說信心有四種. 云何爲四.
一者信根本. 所謂樂念眞如法故.
二者信佛有無量功德. 常念親近供養恭敬. 發起善根. 願求一切智故.
三者信法有大利益 常念修行諸波羅蜜故.
四者信僧能正修行自利利他. 常樂親近諸菩薩衆. 求學如實行故.
어떠한 신심들이며, 어떻게 수행하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신심에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소위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서 항상 부처를 가까이하고 공양하고 공경하여 선근(善根)을 일으켜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사문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리(自利)‧이타(利他)할 것을 믿어서 항상 모든 보살들을 즐겨 친근히 하여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修行有五門. 能成此信.
云何爲五.
一者施門. 二者戒門. 三者忍門. 四者進門. 五者止觀門.
수행에 오문(五門)이 있어, 이 믿음을 잘 성취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시문(施門)이요, 둘째는 계문(戒門)이요, 셋째는 인문(忍門)이요, 넷째는 진문(進門)이요, 다섯째는 지관문(止觀門)이다.
어떻게 시문(施門)을 수행하는가? 만약 일체의 와서 구하여 찾는 사람을 보거든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닿는 대로 베풀어 줌으로써 스스로 간탐(慳貪)을 버리어 저로 하여금 환희케 하며, 만약 액난(厄難)‧공포‧위핍(危逼)을 받는 사람을 보거든 자기의 능력에 따라 무외(無畏)를 베풀어 주며, 만약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아는 대로 방편으로 설하되 명리(名利)나 공경을 탐내어 찾아서는 안 되고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여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계문(戒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살생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으며, 양설(兩舌)하지 않고, 악구(惡口)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기어(綺語)하지 않으며, 탐질(貪嫉), 기사(欺詐), 첨곡(諂曲), 진에(瞋恚), 사견(邪見) 등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만약 출가한 자라면 번뇌를 꺾어 굴복시키기 위한 까닭에 응당 시끄러운 것을 멀리 여의고 항상 고요한 데에 처하여 소욕(少欲)과 지족(知足)과 두타(頭陀) 등의 행을 수습하며 내지 작은 죄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 부끄러워하고 회개하여 여래가 만든 금계(禁戒)를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고 마땅히 다른 사람의 기혐(譏嫌)을 막아 그 비난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망령되이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문(忍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응당 타인의 괴롭힘을 참아서 마음에 보복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마땅히 이익과 손해, 비난과 명예, 칭찬과 기롱,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법을 참고 견디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문(進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한 일에 마음이 게으르거나 주저함이 없어서 마음먹은 것이 굳세고 강건하여 겁약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구원(久遠)한 때로부터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의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음을 생각하여야 하며, 이 때문에 응당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하여 빨리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사람이 신심(信心)을 수행하였으나,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기 때문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어지럽힘을 당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事務) 때문에 여러 가지로 끌리고 얽매이며, 혹은 병고(病苦)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기 때문에 응당 용맹히 정근(精勤)하여 아침 저녁의 육시(六時)에 모든 부처에게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勸請)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를 벗어나게 되어 선근이 증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하는가? 지(止)라 하는 것은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사마타관(奢摩他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요,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함을 말하는 것이니 비발사나관(毗鉢舍那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가지 뜻으로 점점 수습하여 서로 여의지 아니하여 쌍으로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지(止)를 닦는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르게 하되, 기식(氣息)에 의하지 않으며, 형색(形色)에 의하지 않으며, 공(空)에 의하지 않으며 지(地)‧수(水)‧화(火)‧풍(風)에 의하지 않으며, 내지 견문(見聞)‧각지(覺知)에 의하지 않아야 한다. 일체의 모든 상념을 생각 생각마다 다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도 없애야 한다. 일체법이 본래 상이 없기 때문에 생각 생각이 나지 않으며 생각 생각이 멸하지 않으며, 또한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생각하지 않은 후에 마음으로 마음을 제멸(除滅)하는 것이다. 마음이 만약 흩어져 나간다면 곧 거두어 와서 정념(正念)에 머물게 해야 할 것이니, 이 정념이란 오직 마음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곧 또한 이 마음도 자상(自相)이 없어서 생각 생각마다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앉은 데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머무는 데에 행위 하여 짓는 바가 있더라도 이 모든 때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관찰하여 오래 익혀 익숙하게 되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된다. 마음이 머물기 때문에 점점 맹리(猛利: 매우 예리함)하여 진여삼매에 수순하여 들어가게 되어 번뇌를 깊이 조복(調伏)하고 신심(信心)이 증장하여 속히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이룬다. 오직 의혹하고 불신하고 비방하고 중죄업장(重罪業障)을 짓고 아만(我慢)과 해태(懈怠)한 사람은 제외하나니, 이러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삼매에 의하기 때문에 곧 법계가 일상(一相)인 것을 아는 것이니, 일체 모든 부처의 법신이 중생신(衆生身)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말하며, 이를 곧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이름 한다. 진여가 이 삼매의 근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만일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무량한 삼매를 내는 것이다.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모든 마구니와 외도(外道)와 귀신들에 의하여 어지럽게 되니, 혹은 좌중(坐中)에서 어떤 형체를 나타내어 공포를 일으키게 하거나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낼 경우,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계가 곧 멸하여 끝내 뇌란(惱亂)되지 않을 것이다.
혹 천상(天像)과 보살상을 나타내거나 또한 여래상을 지어서 상호(相好)가 구족하며 혹은 다라니(陀羅尼)를 설하며 혹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설하며, 혹은 평등하고 공(空)하며 무상(無相)하고 무원(無願)하며 무원(無怨)‧무친(無親)하고 무인(無因)‧무과(無果)하여 필경 공적(空寂)함이 참된 열반이라고 설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숙명(宿命)의 과거의 일을 알게 하고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하고 타심지(他心智)를 얻게 하여 변재(辯才)가 막힘이 없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나 이익 되는 일에 탐착(貪着)하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내고 자주 기뻐하게 하여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혹은 장애가 많거나 잠이 많고 병이 많아서 그 마음이 게을러지게 하며, 혹은 갑자기 정진을 하다가 뒤에 곧 그만두어 불신하는 마음을 내어 의심이 많고 염려가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행위를 버리고 다시 잡업(雜業)을 닦으며 혹은 세속의 일에 집착하여 갖가지로 끄달리게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모든 삼매를 얻게 하여 진여삼매에 든 것과 약간 비슷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외도가 얻은 것이지 참다운 삼매가 아닌 것이다. 혹 또한 사람들에게 혹은 하루, 혹은 이틀, 혹은 사흘 내지 이레를 정(定) 중에 머물게 하여 자연의 향미(香美)한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쾌적하여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게 하여 사람들이 그것에 애착하게 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먹는 것에 한계가 없게 하여 잠깐 많았다가 잠깐 적게 하며 안색을 변이하게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언제나 응당 지혜로써 관찰하여 이 마음을 사망(邪網: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마땅히 부지런히 정념(正念)하여 취착하지 아니하면 이러한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읠 수 있을 것이다. 외도(外道)가 가지는 삼매는 모두가 견(見)‧애(愛)‧아만(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리와 공경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眞如三昧)란 보는 상(相)에 머물지 않고 얻은 상(相)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내지 정(定)에서 벗어난 때에도 게을리함이 없어서 가지고 있는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되니,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법을 익히지 아니하면 여래종성(如來種性)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간의 모든 선(禪)과 삼매를 닦으면 흔히 거기에 맛 들여 아견(我見)에 의하여 삼계(三界)에 얽매여 외도와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니 만약 선지식의 보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견(見)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 現世當得十種利益. 云何爲十.
一者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
二者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
三者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
四者遠離誹謗甚深之法重罪業障漸漸微薄.
五者滅一切疑諸惡覺觀.
六者於如來境界信得增長.
七者遠離憂悔於生死中勇猛不怯.
八者其心柔和捨於憍慢不爲他人所惱.
九者雖未得定於一切時一切境界處則能減損煩惱不樂世間.
十者若得三昧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
또한 정근(精勤)하여 전념으로 이 삼매를 수학(修學)하는 이는 현세(現世)에서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항상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호념(護念)함을 입을 것이요, 둘째는 모든 마구니와 악귀에 의하여 두려움을 받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아흔 다섯 가지 외도와 귀신에 의하여 혹란(惑亂)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깊고 미묘한 불법을 비방함에서 멀리 떠나 중죄(重罪)의 업장(業障)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일체의 의심과 모든 나쁜 사고(思考)를 없애는 것이요, 여섯째는 여래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증장되는 것이요, 일곱째는 근심과 후회를 멀리 여의어 생사 중에 용맹하여 겁내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교만을 버려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는 것이요, 아홉째는 비록 정(定)을 얻지 못하였으나 모든 때에 모든 경계처(境界處)에 대하여 번뇌를 줄여서 세간을 즐기지 않는 것이요, 열째는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外緣)의 모든 소리에 의하여 놀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을 즐기지 않고 대비를 멀리 여의게 되니, 이러므로 관(觀)을 닦는 것이다. 관(觀)을 닦아 익히는 이는 마땅히 모든 세간의 유위(有爲)의 법이 오래 머무름이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하여 없어지며, 모든 마음의 작용이 생각 생각마다 생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고(苦)인 줄 알아야 하며,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하여 꿈과 같은 줄 알아야 하며,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하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세간의 모든 몸뚱이가 모두 다 깨끗하지 못하고 갖가지로 더러워서 하나도 즐거워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중생이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한 바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하여 이미 모든 신심(身心)의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마는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것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서원(大誓願)을 세워야 할 것이다. 즉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함으로써 시방에 두루 하여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케 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열반제일의의 낙(第一義樂)을 얻도록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願)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때, 모든 곳에 있는 여러 선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버리지 않고 수학하여 마음에 게을리함이 없으니, 오직 앉았을 때 지(止)에 전념하는 외에는 나머지 일체에서 다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행하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일어나거나 어느 때든지 모두 지관을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니, 소위 비록 모든 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또한 곧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빠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하며, 비록 인연의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곧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지(止)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주착(住着)함을 대치하고 이승의 겁약(怯弱)한 소견을 버릴 수 있으며, 만일 관(觀)을 닦으면 이승(二乘)이 대비를 일으키지 아니하는 협렬심(狹劣心)의 허물을 대치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음을 멀리 여읜다. 이러한 뜻에 의하므로 이 지(止)‧관(觀) 이문(二門)은 함께 같이 조성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만약 지‧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보리에 들어갈 수 있는 방도가 없을 것이다.
다음에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약하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머무름에 스스로 항상 제불(諸佛)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가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신심은 성취하기가 어렵다’라고 하니, 뜻이 퇴전하려고 하는 이는 여래가 수승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섭호(攝護)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뜻을 오로지하여 부처를 생각한 인연으로 원(願)에 따라 타방불토(他方佛土)에 나게 되어 항상 부처를 친히 보아서 영원히 악도(惡道)를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수다라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생각하여 그가 닦은 선근으로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아가기를 원구(願求)하면 곧 왕생(往生)하게 되며 늘 부처를 친히 보기 때문에 끝내 퇴전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만약 저 부처의 진여법신을 관(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왕생하게 되어 정정(正定)에 머물기 때문이다.
5.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已說修行信心分. 次說勸修利益分.
如是摩訶衍諸佛袐藏我已總說.
이미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의 제불(諸佛)의 비장(秘藏)을 내가 이미 모두 말하였으니,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 대하여 바른 믿음을 내어서 비방(誹謗)을 멀리 여의고 대승도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을 가지고 사량(思量)‧수습(修習)하면 구경에 무상도(無上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나서 겁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부처의 종자를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에게 수기(授記)하는 바가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중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번 식사하는 시간에 바로 이 법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보다 우월하여 그와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사람이 이 <기신론>을 받아 가져서 관찰하고 수행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한다면 그가 가지는 공덕이 한량없고 가이없어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니, 가령 시방의 일체의 모든 부처가 각기 무량한 아승기겁에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또한 다할 수가 없다. 어째서인가? 이는 법성의 공덕에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계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중생이 이 <기신론>에 대하여 훼방(毁謗)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가 받는 죄의 과보는 무량겁을 지나도록 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우러러 믿어야 할 것이요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깊이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 해쳐서 일체의 삼보(三寶)의 종자를 단절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여래가 다 이 법에 의하여 열반을 얻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이로 인하여 수행하여 불지(佛智)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 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 未來菩薩當依此法得成淨信.
과거의 보살도 이미 이 법에 의하여 정신(淨信)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도 이제 이 법에 의하여 정신을 이루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에 의하여 정신을 이루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니,
是故衆生應勤修學.
이러므로 중생이 부지런히 수학(修學)해야 할 것이다.
三. 총결회향(總結廻向)
諸佛甚深廣大義 我今隨分總持說 迴此功德如法性 普利一切衆生界
모든 부처의 매우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분(分)에 따라 요약하여 말하였으니, 법성과 같은 이 공덕을 회향하여 널리 일체의 중생계를 이롭게 하여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