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作別, Auld Lang Syne, 올드 랭 사인)은 스코틀랜드의 가곡이자 작자가 확실한 신 민요이다. 스코틀랜드의 시인인 로버트 번스가 1788년에 어떤 노인이 부르던 노래를 기록하여 그것을 가지고 지은 시를 가사로 하여 윌리엄 쉴드가 작곡한 곡이며 영미권에서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부르는 축가로 쓰인다. '올드 랭 사인'은스코트어로 '오랜 옛날부터(영어: old long since)'라는 뜻이다.[1] 영화 '애수(원제:Waterloo Bridge→워털루 다리)'의 주제곡으로 쓰였다. 석별의 정이라고도 한다.
Auld Lang Syne - Barenaked Ladies
번역 : rushcrow.com
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And never brought to mind? 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And days of Auld Lang Syne.
오랜 친구를 잊어야 하는가 다시 떠올리지 않아야 하나 오랜 친구를 잊어야 하는가 그리운 시절의 나날들을
For Auld Lang Sy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We'll take a cup of kindness yet For Auld Lang Syne.
그리운 시절을 위하여, 내 사랑, 그리운 시절을 위하여 아직은 우정의 잔을 들 수 있다네 그리운 시절을 위하여
And here's the hand, my trusty friend And gives a hand of thine We'll take a cup of kindness yet For Auld Lang Syne.
여기에 손이 있네, 내 진실한 친구여 자네의 손을 주게 아직은 우정의 잔을 들 수 있다네 그리운 시절을 위하여
For Auld Lang Syne, my dear, For Auld Lang Syne, We'll take a cup of kindness yet For Auld Lang Syne.
그리운 시절을 위하여, 내 사랑, 그리운 시절을 위하여 아직은 우정의 잔을 들 수 있다네 그리운 시절을 위하여
Auld Lang Syne : 스코틀랜드 민요로 Old Long Ago라는 뜻으로 보통 '그리운 시절'로 해석된다고 가사는 Robert Burns (1759-1796)의 시가 원조라고 한다
When you walk through the storm 당신이 폭풍 속을 헤치고 걸어갈 때 Hold your head up high 고개를 숙이지 말아요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그리고 어둠을 두려워 하지 말아요 At the end of the storm 폭풍이 끝나면 There's a golden sky 금빛 하늘이 있을 거에요 And the sweet silver song of the lark 그리고 종달새의 달콤한 노래가 있을 거에요
Walk on, through the wind 계속 걸어가요, 바람을 뚫고서 Walk on, through the rain 계속 걸어가요, 비를 뚫고서 Though your dreams be tossed and blown 비록 당신의 꿈이 던져지고 날아간다 할지라도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계속 걸어요, 걸어가세요. 마음에 희망을 간직하고서 And you'll never walk alone 그리고 당신은 결코 혼자 걸어가지 않을 테니 You'll never walk alone 당신은 결코 혼자 걸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계속 걸어요, 걸어가세요. 마음에 희망을 간직하고서 And you'll never walk alone 그리고 당신은 결코 혼자 걸어가지 않을 테니 You'll never walk alone 당신은 결코 혼자 걸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이난영(李蘭影, 1916년6월 6일 ~ 1965년4월 11일)은 전라남도목포 출생의 일제강점기트로트 가수이다. 대표곡으로는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해조곡〉 등이 있으며,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진방남)과 함께 가요계의 3보(寶)'라고 불린다. 1936년 같은 가수로서 함께 노래했던 김해송과 결혼을 하게 된다. 해방 후에는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극단 등에서 활동했으며, 6.25로 김해송이 납북된 후로는 자식들과 조카들을 혹독히 연습을 시켰으며 그들은 각각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같은 가수였던 남인수와 사랑이 싹트는데, 남인수의 폐결핵으로 사랑은 얼마 가지 못하였으며, 2~3년이 지난 1965년 서거하셨다. 목포를 대표하는 가수로서, 목포 시민을 중심으로 이난영기념사업회(목포의눈물기념사업회라고도 불린다.)가 조직되어 있기도 하다.
제주도 (1929 ~ 1932)
이난영은 약 2년간 제주도에서 생활했다. 제주도에는 아버지의 술과 불화를 참지 못해 먼저 목포에서 떠나 제주도에 온 어머니가 있었는데, 당시 어머니는 제주읍에서 극장을 하고 있던 한 일본인 가정집의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극장은 제주 최초의 극장으로 알려진 창심관(暢心館)이었다. 그곳에서 이난영이 허드렛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를 듣고 집주인에게 발탁되어 막간가수로 활동을 하게 되며, 오빠인 이봉룡은 영사기사로 일을 했다고 한다. 창심관은 제주에 위치한 까닭에 갑작스럽게 배가 올 수 없어 영화의 필름이 도착하지 못했으면 그곳에서 유랑 극단이 펼쳐졌는데, 그 사이사이마다 이난영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극장에 화재가 나,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던 이난영은, 극장 주인의 추천으로 삼천리가극당의 특별 단원이 되어 제주를 떠나게 된다. 후에 이난영의 딸이자 김시스터즈의 멤버였던 김숙자는 이난영이 제주에 있을 때 해녀를 한 적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목포의 눈물 (1934 ~ 1935)
오케레코드와의 전속 계약이 체결된 후 1933년 11월 〈불사조〉로 첫 히트를 치게 되었고, 1934년 2월에 취입한 〈봄맞이〉까지 히트가 되며 슬슬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그해 가을에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 유일한 한국인 가수로 혼자 출전하기까지 하였다. 1935년 초에는 오케레코드와 조선일보가 협업하여 제 1회 향토노래 현상(조선 10대도시[경성,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흥, 청진]찬가)을 모집해 3000대 1의 확률로 목포에 거주하고 있던 문일석(文一石)이라는 필명을 쓴 사람이 1등으로 당선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당선된 가사가 〈목포의 눈물〉과 〈부산 노래〉, 〈평양 행진곡〉이었고, 목포의 눈물의 당시 제목은 〈목포의 사랑〉이었으며, 후에 이철이 〈목포의 눈물〉로 이름을 고치게 된다. 여기에다 원래 고복수가 취입하려 작곡가 손목인이 만들어 놓았던 〈갈매기 우는 항구〉라는 제목의 멜로디에 〈목포의 눈물〉 가사를 넣게 되고, 손목인이 목포에 관한 노래이니 목포 출신 가수가 불러주었음 좋겠다 해서 가수가 이난영으로 바뀌게 된다. 〈목포의 눈물〉은 노래 녹음까지 순탄하게 흘러갔으나 2절의 첫 부분이었던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가사가 검열에 걸려서 가사지만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로 개사하고, 녹음은 개사 전 그대로 한체 1935년 9월 신보로 발표하게 된다. 목포의 눈물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노래를 발표한지 한달 정도 된 1935년 10월 「삼천리」에서 조사한 10대 가수에 3위로 이름을 올리고, 5만장에 판매고 기록과 일본에서까지도 큰 반응을 얻게 된다.
트로트는 일제 강점기에 발생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장르이다. 트로트는 일본 엔카 음악이 한국에서 현지화한 음악이다. 《트로트》라는 이름은 구미 춤곡의 하나인폭스트롯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본 토속 음악에 접목 돼엔카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 전해졌다. 한국에서 전해오던세 박자 또는 다섯 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것을《트로트》라고 부르고,빠른 두 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것을《뽕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뽕짝》은 속어로 보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가사의 "삼백년 원한품은"을 한 해설자는 일본에 원한 품은 게 없다고멋대로 강변했하지만 1592년의 임진왜란을 잊었단 말인가? 작사자의 가사 취지를 왜곡해도 분수가 있어야제. 가정과 가족도 잊은 채, 목숨을 걸고 결사항전하셨던 의병들과 독립투사들을 뭘로 보는겨?
고딩동기팀이 주문진수산시장을 찾았다. 벗님들은 복타령이었지만 운영자의 관심은 생활의 터전인 항구와 바다에 있었다. 고달프긴 하지만 거기엔 새로운 세계로 열린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난영(李蘭影)의 노래부터 들어 보았다. 1934년 조선일보 향토가사현상공모에 문일석의 '목포의 노래'가 당선작이었다. 작사자에 의해 제목이 '목포의 눈물'로 고쳐지고 작곡가 손목인님의 재능이 덧붙여진, 가수 이름에서부터 향기가 묻어나는 '난초의 그림자'의 노래는 민족의 한과 어울어진 온 국민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아버지는 부두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일자리를 찾아 제주도로 떠났다. 제주에서 16세에 무대에 선 그녀의 노래 인생 3년차인 18세 때 부른, 가난한 천재가수의 노래 '목포의 눈물'은 '아리랑' 다음으로 지금껏 변함없는 향토의 노래를 넘어서, 한국민의 노래를 대표한다.
진양조의 육자배기, '흥타령'이 몸에 밴 정감가는 호남 출신 특유의 애절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데다 생활상의 한까지 더해져 이난영의 목소리는 지금 들어도 애간장을 녹이게 한다.
* '흥타령'은 신명나 부르는 흥취겨운 노래가 아니라 내용과 감정의 실상은 신세타령, 한타령이다.
본명은 이옥례이고, 전라남도 목포 출생이다. 15세 때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태양극단에 입단, 단역가수로서 노래하다가 1934년OK레코드사에서 손목인(孫牧人) 작곡의 <불사조(不死鳥)>를 불러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이어 <시드는 청춘>, <봄맞이> 등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같은 해 도쿄[東京]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음악대회`에서는 갈채를 받았다.
1935년 손목인 작곡인 <목포의 눈물>이 크게 히트하여 유명해졌으며, 그 후에도 <해조곡(海鳥曲)>,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過去夢)>, <목포는 항구다> 등 많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8·15광복 후는 남편 김해송(金海松)과 함께KPK악극단을 결성, 활약하였으나 6·25전쟁 때 김해송은 납북되었다.
그 자녀들은 후에 `김시스터즈`, `김보이즈`라는 보컬팀을 만들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활약하였다.
트로트(영어: Trot)는 대한민국의 음악 장르 중 하나로, 정형화된 반복적인 리듬과 펜타토닉 스케일 음계와 한국 민요의 영향을 받은 떠는 창법이 특징인 장르이다. 또한 트로트는 미국의 춤곡인 폭스트롯(영어: Foxtrot)이 트로트의 어원이며, 기존의 동양 전통 음악과 미국, 유럽 국가들의 다양한 음악들이 혼합하여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