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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금료소초(金蓼小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금료소초(金蓼小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금료소초(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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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금료소초(金蓼小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금료소초(金蓼小抄)

1. 금료소초서(金蓼小抄序)

2. 금료소초(金蓼小抄)

 

 

금료소초서(金蓼小抄序)

우리나라 의학(醫學) 지식은 그다지 넓지 못하고 약 재료도 그다지 많지 못하므로, 모두 중국의 약재를 수입해다 쓰면서도, 항시 그것이 진품이 아닌 것을 걱정하였다. 이와 같은 넓지 못한 의학 지식을 가지고, 또 진품이 아닌 약재를 쓰고 있으니, 병은 으레 낫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에 대리시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에게,

 

요즘 의서(醫書)들 중에, 새로운 경험방(經驗方)으로 사서 갈 만한 책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경(尹卿),

 

근세의 일본(日本) 판각 소아경험방(小兒經驗方)이 가장 좋은 책인데, 이 책은 서남 해양 중에 있는 하란원(荷蘭院)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또 서양의 수로방(收露方)이란 책이 극히 정미로우나, 시험해 보니 그다지 효력이 없었는데, 이는 대체로 사방의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기품과 성질이 다른 까닭입니다. 방문만 따라서 약을 준다는 것은, 조괄(趙括)의 병법(兵法) 이야기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정속금릉쇄사(正續金陵瑣事)에는 역시 근세의 경험들을 많이 수록하였고,  요주만록(蓼洲漫錄)이란 책이 있고,  초비초목주(苕翡草木注)》ㆍ《귤옹초사략(橘翁草史略)》ㆍ《한계태교(寒溪胎敎)》ㆍ《영추외경(靈樞外經)》ㆍ《금석동이고(金石同異考)》ㆍ《기백후청(岐伯侯鯖)》ㆍ《의학감주(醫學紺珠)》ㆍ《백화정영(百華精英)》ㆍ《소아진치방(小兒診治方) 등은 모두 근세의 저명한 학자들이 지은 책이어서, 북경 책사에서는 무엇이나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연경으로 돌아와 하란(荷蘭) 소아방(小兒方)과 서양의 수로방을 구해 보았으나 모두 얻지 못하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책들도 더러는 광동(廣東) 지방 각본(刻本)들이라 말했으나, 책사들에서도 모두 그 명목조차 몰랐다. 우연히 향조필기(香祖筆記 청의 왕사진(王士稹) )를 들추다가 그 중에서 금릉쇄사(金陵瑣事) 요주만록의 기록을 발견했으나, 그 원서(元書)는 모두가 의학 관계의 내용은 아니었고, 이상(貽上 왕사진 저)의 기록은 전부가 경험에 관계되는 기록이었으므로, 나는 수십 종의 법을 따서 베끼고, 이 밖의 잡지와 필기 중에 실린 옛날 방문과 잡록들을 아울러 초록하여, 금료소초라 이름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산중에는 의서도 없고 약제도 없으므로, 가다가 이질이나 학질에 걸리면 무엇이든 가늠으로 대중하여 치료를 하는데, 때로는 맞히는 것도 있기에 역시 아래에 붙여 산골 속에서 쓰는 경험방을 삼으려 한다. 연암(燕巖)은 쓰다.

 

 

[C-001]금료소초서(金蓼小抄序)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하란원(荷蘭院) : 화란(和蘭)의 교회(敎會).

[D-002]조괄(趙括) : 전국 때에 조()의 장수의 이름. 그는 그의 아버지 조사(趙奢)의 병법(兵法)을 잘 외기는 하나, 이용 변통할 줄은 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금료소초(金蓼小抄)

 

 

물류상감지(物類相感志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산길을 가다가 길을 잃을 염려가 있을 때는, 향충(向蟲) 한 마리를 잡아 손에 쥐고 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

하였다.

유환기문(遊宦紀聞 () 장세남(張世男) )에는 신경(腎經)이 허하여 허리가 아픈 병을 치료하는 데 정사수(程沙隨)의 방문을 기재하였으되,

 

두충(杜沖 한약재의 일종)을 술에 담갔다가 불에 구워 말린 뒤에, 빻아서 가루를 만들 때 재를 없게 하여 술에 타서 마신다.”

하였고 또,

 

날것이나 찬 것을 먹고서 앙가슴이 아픈 데는, 진수유(陳茱萸 한약재의 일종) 560개를 물 한 잔에 달여, 찌꺼기를 버리고 평위산(平胃散 한약정) 3돈쭝을 넣어서 다시 달여 먹는다.”

하였고, ,

 

사수(沙隨)가 항시 임질(淋疾)을 앓았는데, 날마다 백동과(白東苽 한약재의 일종) 큰 것 세 개씩을 먹고 나았다.”

하였다.

강린기(江隣幾 미상) 잡지(雜志) 후청록(侯鯖錄 송 조영치(趙令畤) ) 중에 모두 적혀 있기를,

 

옛 약방문에 쓰인 한 냥쭝은 지금의 석 냥쭝이 된다. 이는 수() 때에 이르러서 석 냥을 합쳐서 한 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풍창소독(楓窓小牘 일명씨(逸名氏) ), 동파(東坡) 일첩록(一帖錄) 중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이끌었다.

 

발병에는 위령선(葳靈仙 한약재의 일종)과 우슬(牛膝 한약재의 일종) 두 가지를 가루로 만들어 꿀에 버무려서 환을 만들어 공복에 먹으면 신효를 보게 된다.”

수종(水腫)을 다스리는 데는, 논에서 나는 우렁이와 큰 마늘과 차전초(車前草 한약재의 일종)를 한데 갈아, 큼직한 지짐떡만큼씩 고약으로 만들어 배꼽 위에 붙여 두면, 물이 대소변에 따라 나오고 곧 병이 낫는다.

해소를 낫게 하는 경험방으로서는, 향연(香櫞)의 씨를 발라내고 엷게 썰어 가늘게 조각을 내어서 청주(淸酒)와 함께 연하게 간 뒤에 사기 탕관에 넣고는, 저녁 때부터 새벽 오경(五更)까지 흠뻑 익혀 가지고, 다시 꿀에 타서 잘 버무려 두고는, 자다가 일어나서 숟가락으로 떠 먹으면, 매우 효험이 있는 것이다. 또 남쪽으로 뻗은 부드러운 뽕나무 가지 한 묶음을 한 마디씩 잘게 잘라 가마에 넣고, 물 다섯 보시기를 부은 뒤에 한 보시기나 되도록 달여서 목이 마를 때마다 마실 것이다.

송 효종(宋孝宗 조신(趙昚))은 게를 많이 먹고 이질을 앓았다. 때마침 엄방어(嚴防禦)란 자가 있어서, 새로 캔 연뿌리를 잘게 갈아서 더운 술에 섞어 썼더니, 과연 나았다.

붉은 막이 덮인 눈병을 다스리는 데는, 흰 소라[白螺] 한 마리를 까서, 황련(黃連 한약재의 일종) 가루에 버무려서 하룻밤 이슬을 맞혔다가 새벽에 보면, 소라의 살은 녹아서 물이 된다. 이 물을 눈에 떨어뜨리면 붉은 막이 저절로 사라진다.

고기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는 개의 침을 먹고, 곡식 가시랭이가 목에 걸렸을 때는 거위의 침을 넘기면 즉차할 것이다.

무릇 물에 빠진 사람이나 쇠부스러기를 먹었을 때는 오리 피를 먹으면 곧 낫는다.

갑자기 귀머거리가 된 자는, 전갈[] 온 마리를 독을 없애고 가루로 장만하여 술에 타서 귓구멍에 방울로 떨어뜨리면, 소리가 들리며 낫는다.

구기자(枸杞子)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 시력을 더 좋게 할 수 있다.

쇠 연장에 베었거나 다쳤을 때는, 외톨이 밤을 말려 갈아서 가루를 내어 붙이면 곧 낫는다.

후비유아(喉痺乳蛾 편도선 염증)에는 두꺼비 껍질과 봉미초(鳳尾草 한약재)를 잘게 갈아서 상매육(霜梅肉 한약재)과 함께 술에 삶아 각각 조금씩 섞어서는, 다시 갈아 가지고 가는 베로 짜서 즙을 내어 거위깃으로 찍어 환부에 바르면, ()을 토하고 곧 멍울이 사라진다.

악창이나 나쁜 종기가 처음 돋을 때, 당귀(當歸 한약재의 일종)황벽피(黃檗皮 한약재의 일종)강활(羌活 한약재의 일종)을 가늘게 가루로 내어 노사등(鷺鷥藤 한약재의 일종)을 날것 채로 찧어서 즙을 내어 섞어서 종기 자리의 네 변두리에 붙이면, 자연히 독기를 빨아 내거나 한데로 모여 작게 돋치게 되어 터지기도 한다. 그러나 종기머리, 곧 테두리 자체에 붙여서는 아니 된다.

필기(筆記) 중에 이르기를,

 

() 때 경산(徑山)에 살고 있던 중이 동산에 들어갔다가 뱀에게 발을 물렸을 때, 마침 손으로 왔던 어떤 중이 이를 치료하는데, 먼저 맑은 물을 길어 씻고, 또 계속 물 몇 섬이 들도록 바꾸어 씻어서 곪아 썩은 살을 다 없애 버리고, 상처에 흰 힘줄이 보일 때 부드러운 명주에다가 약 가루를 묻혀 상처 속에 집어 넣으니, 더러운 진물이 샘솟듯 솟아났다. 그 이튿날 맑게 씻고는 처음 모양으로 약을 발라 두니, 한 달 만에 독은 다 뽑아지고 살갗은 예전과 다름 없게 되었다. 그 약방문인즉, 향백지(香白芷 한약재의 일종)를 가루로 만들어 오리주둥이담반(膽礬 한약재의 일종)사향(麝香)을 각기 조금씩 넣었다. 이는 담수(談藪 저자 미상)에 실려 있다.”

여자들이 경도로 인하여 출혈이 심할 때는 당귀(當歸) 한 냥쭝과 형개(荊芥 한약재의 일종) 한 냥쭝을 술 한 종지와 물 한 종지에 달여 마시면 곧 그친다.

무주(撫州)에 살고 있던 상인이 이질을 만나 매우 위급하자, 태학생(太學生) 예모(倪某)가 당귀 가루를 아위(阿魏 한약재의 일종)로써 환을 지어 끓인 물에 세 번 복용시켜 곧 낫게 하였다.

또 이질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황화(黃花 한약재의 일종)와 지정(地丁 한약재의 일종)을 찧어 거기에서 난 즙을 술 한 잔 분량에다 벌꿀을 조금 타서 먹으면 신효를 본다.

습담(濕痰)으로 종기가 나서 걸을 수 없을 때는, 도꼬마리목홍화(木紅花)나복영(蘿葍英)백금봉화(白金鳳花)수룡골(水龍骨)화초(花椒)괴조(槐條)창출(蒼朮)금은화(金銀花)감초(甘草) 등 열 가지를 달여 환부에 김을 쐬도록 하고, 물이 조금 따뜻한 때를 기다려 곧 씻는다.

소장(小腸)의 산기(疝氣)에는, 오약(烏藥 한약재의 일종) 6돈쭝과 천문동(天門冬 한약재의 일종) 5돈쭝을 맹물에 끓여 먹으면 신효가 난다.

소변이 잘 통하지 않을 때는, 망초(芒硝 한약재의 일종) 한 돈쭝을 보드랍게 잘라 용안육(龍眼肉 한약재의 일종)으로 싸서 잘 씹어 넘기면 당장에 효력을 본다.

혹을 다스리는 방법은, 댓가지를 써서 혹 위쪽의 살 껍질을 피가 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긁어 헤치고는, 구리에 푸른 녹을 헤친 곳에 넣고 고약으로 붙여 둔다.

절골을 잇는 방법으로는, 기왓장을 불에 달구고 잘 말린 자라 반 냥쭝을, 뜨거운 대로 물에 적시어 자연동(自然銅)유향(乳香)몰약(沒藥)채과자인(菜瓜子仁) 등을 각기 등분해서 가늘게 가루를 내어 한 푼 반 쭝씩 술에 타 먹되, 상체가 상했을 때는 밥을 먹은 뒤에 먹고, 하체가 상했을 때는 식전에 먹는다.

온역(瘟疫)으로 머리와 얼굴이 부었을 때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금은화(金銀花) 두 냥쭝을 걸게 달여 한 잔 마시면 곧 사라진다.

바늘이 뱃속에 들어갔을 때는, 참나무 숯가루 서 돈쭝을 우물물에 타서 먹어도 좋고, 또 자석(磁石)을 항문에 대 두면 끌어당겨 나온다.

형개(荊芥) 이삭을 가루로 만들어 3돈쭝을 술에 타서 먹으면, 중풍증이 당장에 낫는다.

주마감(走馬疳)을 다스리는 데는, 또 장이나 소금에 절이지 않은 홍합(紅蛤)보다 조금 작은, 와룡자(瓦壟子 홍합과 비슷함)를 불에 태워 남은 재 덩이를 찬 땅에 두고 잔으로 덮어 씌워 다 식기를 기다렸다가 끄집어내어,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환부에 발라 스며들도록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말 발굽을 태운 재에 소금을 조금 뿌려 환부에 바르기도 한다.

천연두가 내뿜다가 검게 잦아들 때에, 침향(沈香)유향(乳香)단향(檀香 향의 일종) 등을, 다소를 불구하고 화롯불에 태우고, 아이를 안아 그 연기 위에 쬐면 즉시 내뿜는다.

악창을 다스리는 데는, 동과(冬瓜) 한 개를 복판을 쪼개어, 먼저 한 쪽을 헌 데에 엎어 붙인다. 동과가 더워지면 더운 데는 베어 버리고, 다시 가져다 붙여, 열이 식어지면 그만둔다. 또 다른 방문으로는, 마늘을 찧어서 떡처럼 만들어 헌 데에 얹고 불을 당겨 뜬다. 뜨면 아프지 않기도 하고, 또는 아프기도 한데, 아픈 데는 뜨고 아프지 않으면 그만둔다.

어린애들의 귀 뒤에 나는 부스럼을 신감(腎疳)이라 하는데, 지골피(地骨皮 한약재)만을 가루로 내어 굵은 놈은 뜨거운 물에 타서 씻고, 가는 놈은 참기름에 섞어 문지른다.

광동(廣東)광서(廣西) 지방과 운남(雲南)귀주(貴州) 등지에는 벌레 독이 많은데, 음식을 먹은 뒤 당귀를 씹으면 곧 독이 풀린다.

엽포주(葉蒲州 미상) 남암전(南巖傳) 중에, 칼에 다친 상처를 치료하는 방문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단옷날 벤 부추를 찧어 즙을 낸 뒤, 거기다가 석회를 섞고, 다시 찧어 익혀서 떡을 만들어 상처에 붙이면, 피는 곧 멈추고, 뼈까지 상했더라도 아물게 되어 신효를 볼 것이다.”

의이(薏苡 율무)의 일명은 간주(簳珠)라고도 한다.

계신잡지(癸辛雜志)에 이르기를,

 

목이 메었을 때는 장대산(帳帶散 한약재의 일종)을 쓰되, 다만 백반(白礬 한약재의 일종) 한 가지만을 쓰면 낫지 않기도 한다. 남포(南浦) 땅에 늙은 의원이 있어 가르치기를, 오리주둥이와 담반(膽礬)을 부드럽게 갈아 아주 독한 초에 섞어서 마시라고 한다. 어떤 관가의 늙은 호위병의 아내가 이 병을 앓아 이 방문으로 약을 썼더니, 약을 목구멍으로 넘기자마자 뻑뻑한 담을 두어 되나 토하고는 당장에 효험을 보았다.”

하였고, ,

 

눈에 티가 끼었을 때는, 곰의 쓸개를 정한 물에 조금 풀어 타서 눈꼽 먼지와 눈알을 죄다 씻고, 빙뇌(氷腦) 한두 쪽을 쓰되, 근지러울 때는 생강가루를 조금 넣어, 때때로 은 젓가락으로 찍어 눈에 떨어뜨리면 신효를 본다. 눈이 충혈되었을 때도 역시 쓸 수 있다.”

하였다.  민소기(閩小記 저자 미상)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연와(燕窩)에는 검은 것, 흰 것, 붉은 것 등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붉은 것은 제일 구하기가 어렵고, 흰 것은 능히 담()을 고칠 수 있고, 붉은 것은 어린애들의 홍역에 좋은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이질을 앓는데, 여러 의원들이 약을 써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금오(金吾 벼슬 이름) 장사(長史) 장보장(張寶藏)이 방문을 올렸는데, 그에 의하여 필발(蓽茇 한약재)을 젖에 달여 먹였더니 당장에 나았다.

주공근(周公謹)이 괄창(括蒼)에서 나는 진피(陳皮 한약재)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두창(痘瘡)을 치료하는 데 쓴다 하였는데, 환자의 빛이 새까매지고, 뒤틀어지고, 입술이 얼음장처럼 찰 때, 개파리 일곱 마리를 찧어, 거르지 않은 술에 타서 조금씩 먹이면, 얼마 못 되어 붉은 윤기가 전과 같이 돌게 된다. 겨울철에 개파리는 개의 귓속에 있다.”

하였다.

천연두 독 때문에 밖으로는 죄어들고 안으로는 막히고 할 때는, 뱀 허물 한 벌을 정하게 씻어 불에 쬐어 말리고는, 다시 천화분(天花粉 한약재)을 같은 분량으로 부드럽게 가루로 만들어, ()의 간을 따서 속을 쪼개고 약 가루를 집어넣은 뒤, 세 껍질로 동여매고는 뜨물에 삶아 익혀서 썰어 먹으면 열흘이 못 가서 곧 낫는다.

졸지에 더위를 먹어 숨이 막혔을 때는, 큰 마늘 한 줌과 길바닥의 볕에 쬔 뜨거운 흙을 섞어 갈아서 이긴 뒤, 다시 새로 길어 온 물을 부어 걸러서 찌꺼기를 버리고 마시면 낫는다. 이 말은 피서록(避暑錄) 중에 실려 있다.

단풍나무 버섯을 먹으면,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도은거(陶隱居)의 본초주(本草注)에 보면,

 

땅을 파고 냉수를 부어 휘둘러서 흐리도록 만들었다가, 조금 뒤에 이 물을 떠 마신다. 이것을 지장(地醬)이라 부르며, 여러 가지 버섯독을 낫게 할 수 있다.”

하였다.

향조필기(香祖筆記) 에 이르기를,

 

황생(黃生) 아무개는 여주(廬州) 사람으로, 우리 고을로 유람와서 단방(單方)으로 병을 치료하는데, 모두 효험이 있었다. 그 중에서 세 가지만을 적으면, 속결되는 병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깍지 벗긴 대비마(大萆麻 한약재) 1 50낱과 괴화나무 일곱 치[]를 향유(香油) 반 근에 넣어, 사흘 밤낮을 결어 두었다가 타도록 볶은 뒤, 찌꺼기를 버리고 비단(飛丹 한약재) 넉 냥쭝을 넣어 고약을 만들어서 우물 속에 사흘 동안을 담가 두었다가 밤에 끄집어내어, 먼저 피초(皮硝 한약재) 녹인 물로 환부를 씻고 이 고약을 붙인다. 치질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대변을 본 뒤 감초(甘草) 끓인 물을 뒷물로 하고, 오배자(五棓子 한약재)와 여지초(荔枝草 한약재) 두 가지를 사기 남비에 달인 물로 씻는다. 여지초의 다른 이름은 나하마초(癩蝦蟆草)로서 사철, 언제나 있는데 면은 푸르고 안쪽은 희며, 얽은 구멍이 더덕더덕 있으면서 괴상한 냄새를 피우는 것이 곧 이 풀이다. 또 혈붕(血崩)증에는, 저종초(豬鬃草 한약재) 넉 냥쭝을 동변(童便)과 청주(淸酒) 각 한 종지씩에 섞어 넣어 한 종지가 되도록 달여서 따뜻하게 먹는다. 저종초는 사초(莎草)와 같고 잎은 둥글다. 정하게 잘 씻어서 쓸 것이다.”

하였다.

왕개보(王介甫)는 언제나 편두통을 앓기에, 신종(神宗)이 궁중에서 쓰는 방문을 하사하였는데, 새 나복(蘿葍)의 즙을 내어 생룡뢰(生龍腦 한약재)를 조금 넣고 골고루 잘 섞은 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약 방울을 콧구멍에 떨어뜨린다. 왼쪽 머리가 아플 때는 오른편 콧구멍에 넣고, 오른쪽 머리가 아플 때는 왼편에 넣는다.

원앙초(鴛鴦草)는 덩굴로 자라나서 누른 꽃과 흰 꽃이 마주 쌍으로 핀다. 이 약은 옹저(癰疽 등창과 같은 종기) 같은 독종을 치료하는 데 더욱 신기하다. 먹기도 하고 붙이기도 다 할 수 있다. 심존중(沈存中) 양방(良方 소심양방(蘇沈良方)의 약칭)에 실린 금은화(金銀花)가 곧 그것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노옹수(老翁鬚)라고도 하는데, 본초주(本草注)에는 그를 인동(忍冬)이라 하였고, 군방보(群芳譜 () 왕상진(王象晉) )에는 노사등(鷺鷥藤)이라 하였으며, 또 금차골(金骨)이라고도 하였다.

사재항(謝在杭 미상) 문해피사(文海披沙) 중에 이르기를,

 

슬가(蝨瘕 이에 물려서 헌데가 된 것)은 황룡연수(黃龍沿水 미상)로 다스리고, 응성충(應聲蟲) 병은 뇌환(雷丸 한약종)과 쪽으로 다스리고, 식폐계충(食肺系蟲 폐를 먹는 벌레)은 달조(獺爪 수달의 발톱)로 다스리고, 격식충(膈食蟲 명치를 먹는 벌레)은 남즙(藍汁)으로 다스리고, 얼굴에 돋은 창은 패모(貝母 한약재)로 다스린다.”

하였다.

무창(武昌)소남문(小南門)의 헌화사(獻花寺)에 있는 늙은 중 자구(自究)란 자는, 음식으로 목이 막히는 병에 걸려 죽으면서 그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내가 불행히 이 병에 걸려 죽기는 하나, 가슴속에는 필시 무슨 물건이 있기 때문일 터이니, 죽은 뒤에 가슴을 갈라 보고 입관(入棺)을 해 달라.”

하였다. 그 제자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 비녀처럼 생긴 뼈 한 개를 끄집어내었다. 이 뼈를 불경 공부하는 책상 위에 두었는데, 오랜 뒷날에 군사를 거느리고 가던 어떤 장교가 이 방을 빌려 썼다. 어느 날, 부하들이 거위를 잡을 때 쉽사리 다 죽이질 못하여 이 뼈로 찔러 죽이자, 거위 피가 뼈에 묻은 즉시 뼈는 당장에 사라져 없어졌다. 뒷날, 그 제자가 역시 목 메는 병이 들었을 때, 전일 일이 생각나서 거위 피로 나을 수 있을 것을 깨닫고, 이를 여러 차례 먹었더니 드디어 나았다. 이내 이 방문을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려서, 누구나 다 낫게 되었다.

난산(難産)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행인(杏仁 살구씨) 한 알의 껍질을 벗겨서 한 쪽에는 날 일() 자를 쓰고 또 한 쪽에는 달 월() 자를 써서 꿀을 묻혀 붙이고, 볶은 꿀로 환을 만들어 백비탕이나 혹은 술을 마셔서 넘긴다. 이 방문은 어떤 방술(方術)하는 중이 전한 것이다.

손사막(孫思邈 ()의 학자) 천금방(千金方 천금요방(千金要方)의 약칭)에 이르기를,

 

인삼탕(人蔘湯)은 반드시 흐르는 물을 써서 달일 것이요, 괸 물을 쓰면 효험이 없는 법이니, 이는 인삼보(人蔘譜 저자 미상)에 실려 있는 말이다.”

하였다.

담포기(談圃記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증노공(曾魯公 미상)이 나이 70여 세에 이질에 걸렸는데, 고향 사람 진응지(陳應之)가 수매화(水梅花)를 납차(臘茶)에 복용하도록 하여 곧 나았다.”

하였으나, 수매화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첨사(僉事 벼슬 이름) 장탁(張鐸 ()의 무관(武官))의 말에 의하면,

 

비둘기를 기르면 어린애들의 감질(疳疾)을 다스린다. 비둘기를 많이 기르고, 매일 새벽마다 어린애들로 하여금 방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리게 하면, 비둘기의 기운이 낯에 부딪쳐서 감질이 없어진다.”

하였다.

권유록(倦遊錄 저자 미상)에 쓰여 있기를,

 

신가헌(辛稼軒)이 산질(疝疾)에 걸렸을 때, 어떤 도인(道人)이 가르치기를, 율무알과 황토로 바른 동쪽 벽토를 한데 볶아서, 다시 물에 달여 고약을 만들어 자주 먹었더니 산질이 곧 사라졌고, 정사수(程沙隨)도 이 병에 걸리자, 가헌이 이 방문을 가르쳐 주어서 역시 나았다.”

하였다.

문창잡록(文昌雜錄 송 요원영(廖元英) )에 이르기를,

 

정주 통판(鼎州通判) 유응신(柳應辰)이 생선 뼈에 걸린 병을 다스리는 방문을 전해 왔는데, 역수로 흐르는 물 반 잔을 떠다 놓고, 먼저 환자더러 병의 증세를 묻고 그로 하여금 그 기운을 빨아들인 다음에, 동쪽으로 향하여 원()()()() 넉 자를 일곱 번 외고 공기를 들여마신 다음, 숨을 내쉬지 않은 채 물을 조금 마시면 즉시 낫는다.”

하였다.

수질(水疾 물에서 얻은 병)을 다스리는 법은, 배를 젓는 노()가 서로 마찰하는 데를 조금 긁고 또 배 밑에 묻은 때를 조금 긁어서 환약을 만든 다음, 소금물로써 세 알을 넘기면 신효가 난다.

 

 

붙임[]

 

얼굴에 난 수지(水痣)는 속칭 무사마귀[武射莫爲]라 한다. 그를 다스리는 방법은, 가을의 바닷물로 씻으면 곧 없어진다. 나의 종제(從弟) 유원(綏源)이중(履仲) 89세 때 얼굴에 무사마귀를 함빡 덮어 쓰다시피 하여서 백약이 무효였는데, 어가(魚哥) 성을 가진 늙은 의원이 있어 89월의 바닷물로 자주 씻으면 낫는다고 가르쳐 주어, 당장에 효험을 보았다.

내가 여남은 살 났을 때 얼굴에 함빡 쥐의 젖을 뒤집어 쓰게 되었는데, 눈시울과 귓가가 더욱 심했다. 더덕더덕 밥티가 붙은 것 같아서, 언제나 거울만 들여다보고 울면서 화를 냈지마는 백약이 무효였다. 때가 바로 봄 여름철이어서 가을철까지 바닷물을 기다릴 수 없어, 염정(鹽井)의 물거품을 물에 타서 몇 차례 씻고는 그대로 말렸더니, 아주 신효를 보았다. 나는 이 방법을 널리 전했더니, 효험을 아니 본 자가 없었다.

왕혹정(王鵠汀)의 종인 악가(鄂哥)는 나이 스물 한 살인데, 얼굴이 깨끗하게 생겼었다. 마침 이질에 걸려 많이 앓던 판이라, 혹정은 나에게 우리나라 태의(太醫)를 좀 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의사를 청할 필요가 없소. 촉촉한 땅을 파고 지렁이 수십 마리를 잡아 백비탕에 넣어 끓여 짜서는, 목이 마를 때 이 물을 많이 마시면 효험을 볼 것입니다.”

하였더니, 혹정이 당장에 시험하여 곧 나았다.

목생(穆生)이란 자가 마침 학질을 앓아서, 혹정은 나에게 인도하여 보이고 방문을 청한다. 나는 이슬에 생강즙을 타서 마실 것을 가르쳐 주었더니, 목은 사례를 하면서 가 버렸는데, 그 이튿날 회정(回程)했으므로 이것을 먹고 효험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대체로 이 생강즙은 학질 고치는 데 좋은 방문으로, 생강 한 뿌리를 즙을 내어 하룻밤을 한데 내어 두었다가, 해뜨기 전에 동향(東向)하고 앉아 마신다. 여러 번 시험했으나 다 나았다.

고북구(古北口)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목에 혹이 많이 달렸는데, 여자가 유달리 더하였다. 나는 혹정에게 한 방문을 가르쳐 주면서,

 

혹이 만일 담핵(痰核)이라면, 끼니마다 밥을 먹을 때 먼저 한 술을 떠서 손바닥 위에 놓고 밥을 동글동글하게 비벼 쥐고 있다가, 밥을 마친 뒤에 소금을 밥에 조금 넣고 엄지손가락으로 섞어 개어서 상처에 오랫동안 붙이면 저절로 없어진답니다. 그리고 밥은 멥쌀로 지어서 쓴답니다.”

하였다.

해산을 빨리 시키는 데는, 피마자 한 알을 찧어 발바닥 한복판에 붙이면 순산을 한다. 순산한 뒤엔 곧 떼어 버려야 한다. 만일, 이를 잊어버리고 떼지 않으면 대하증(帶下症)이 생기기 쉽다.

양기를 돕는 데는, 가을 잠자리의 머리와 날개와 다리를 떼어 버리고, 곱게 갈아서 쌀뜨물에 반죽을 하여 환을 만들어 세 홉을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 있고, 한 되를 먹으면 늙은이가 젊은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방문은, 기록하여 왕혹정에게 준 것들이다.

 

 

[D-001]정사수(程沙隨) : 송의 장형(張逈). 사수는 호요, 자는 가구(可久).

[D-002]계신잡지(癸辛雜志) : 송 주밀(周密)의 저. ()는 지()가 잘못된 것이다.

[D-003]주공근(周公謹) : 이름은 주밀(周密). 공근(公謹)은 자.

[D-004]괄창(括蒼) : 절강성에 있는 산명(山名).

[D-005]도은거(陶隱居) : 이름은 도홍경(陶弘景). 은거는 그의 호 화양은거(華陽隱居).

[D-006]혈붕(血崩) : 여자의 경도가 과다하게 계속하는 병.

[D-007]심존중(沈存中) : 이름은 심괄(沈括). 존중은 자.

[D-008]신가헌(辛稼軒) : 송의 학자 신기질(辛棄疾). 가헌은 호요, 자는 유안(幼安).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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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행재잡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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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행재잡록(行在雜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행재잡록(行在雜錄)

 

1. 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2. 행재잡록(行在雜錄)

3. 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4. 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5. 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6. 중존평어(仲存評語)

 

 

 

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아아, 황명(皇明)은 우리 상국(上國)이다. 상국이 속국에게 주는 물건은 비록 터럭같이 작은 것일지라도 하늘에서 떨어진 듯이 그 영광이 전국을 움직이고 경사스러움이 만세(萬世)에 끼칠 것이요, 그 따뜻한 말과 몇 줄 되는 편지쪽을 받들더라도 높기는 운한(雲漢)과 같고, 놀랍기는 우레와 같으며, 감격하기는 때를 맞추어 오는 비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상국인 까닭이다. 무엇을 상국이라 하느냐. 중국을 가리켜 하는 말이니, 우리 선왕(先王)들과 여러 조정에서 명()을 받은 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도읍인 연경(燕京)을 경사(京師)라 하고, 그 순행(巡幸)하는 곳을 행재(行在)라 하며, 우리나라 토물(土物)을 바치는 것을 직공(職貢)이라 하고, 당시의 임금을 천자(天子)라 하며, 그 조정을 천조(天朝)라 하고, 사신이 그 조정에 가는 것을 조천(朝天)이라 하고, 그 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는 것을 천사(天使)라 하여, 우리나라 부인이나 어린애들까지도 상국을 말할 때는 언제나 하늘이라 일컫지 않는 법이 없어 4백 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대개 우리가 명실(明室)의 은혜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 왜인(倭人)이 우리 강역(疆域)을 뒤엎었을 때 신종 황제(神宗皇帝)는 천하의 군사를 몰아 우리나라를 원조해서 자기의 사재까지 말려가면서 군비에 다 써서 우리의 삼도(三都 서울개성평양)를 회복하고 우리의 8()를 도로 찾아 주었으매, 우리 조종(祖宗)은 없어진 나라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백성들은 이마에 문양을 새기고 풀 옷을 입는 오랑캐의 풍속을 면하게 된지라 그 은혜 뼈에 사무쳐 만세(萬世)에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모두 상국의 은혜인 것이다. 지금의 청()은 명()의 구신(舊臣)들을 어루만져 사해(四海)를 통일하고서 여러 대를 두고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풀어 왔었다. 우리가 물건을 바치는데, 금은 토산(土産)이 아니라 해서 이것을 그만두게 하고, 말이 작고 약하다 하여 이를 면제했고, 모시종이자리 같은 폐백도 해마다 그 수를 감했으며, 몇 해 동안 칙사(勅使)를 내보낼 만한 일도 반드시 그냥 처리하고 송영(送迎)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이번 우리나라 사신이 열하에 들어오자 특히 군기 대신(軍機大臣)을 보내서 맞게 하고 조정에 있어서는 대신들의 반열 속에 서도록 명령하고 연극을 볼 때에는 조정의 대신들과 나란히 하여 즐기도록 하며, 또 조서를 내려 정공(正貢) 이외에 별사(別使)가 바치는 방물(方物)은 길이 면제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세상에 없는 성전(盛典)으로서 일찍이 황명(皇明) 시대에도 있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대해 주는 것으로 여길 뿐 이것을 은혜로 생각지 않고, 걱정으로 여길 뿐 영화로 생각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상국이 아닌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황제가 있는 곳을 행재(行在)라 일컬어서 그 사실을 기록하지만 상국이라 이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중국이 아닌 때문이다. 우리가 힘을 굽혀서 저들에게 복종하고 본즉, 그들을 대국이라 하는 것이요, 대국이 능히 힘으로써 우리를 굴복하게 하기는 했으나 우리가 처음 수명(受命)한 바 천자는 아니었다. 이제 그들이 준 여러 가지 우대와 공물을 감면해 주라는 명령은 대국으로서는 작은 것을 돌보아 주고 먼 곳을 회유하자는 정사에 지나지 않고 본즉, 비록 대()마다 한 번씩 공물을 없애주고 해마다 한 번씩 폐백을 면제해 주더라도 이는 우대일 뿐, 우리가 이르는 은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슬프다. 오랑캐의 성질은 깊은 골짜기와 같아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가죽 폐백이 부족하면 개나 말을 받고, 개나 말이 부족하면 주옥(珠玉)을 받는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사랑하고 이해하며 관대하고 용서해서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을 베풀지 않아도 어기거나 거절하는 것이 없으니, 바로 우리의 사대(事大)하는 정성이 족히 저들을 감동하게 하여 그들의 성질을 부드럽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의 뜻은 역시 아직도 하루라도 우리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 하면 저들이 중국에 산 지 백여 년에 아직 한 번도 자기 땅을 객지로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아직 한 번도 우리 동방을 이웃으로 생각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늘과 같이 사해가 승평(昇平)한 날에 와서 가만히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고 대우를 두텁게 하는 것은 그 덕을 팔고자 함이요, 인정을 맺는 것은 진실로 방비를 해이하게 하고자 함이다. 딴 날 자기 땅으로 돌아가 국경을 누르고 앉아서 옛날 군신의 예로써 따져 주린 해에는 구제를 청하고, 전쟁이 날 때에는 도움을 바란다면, 어찌 오늘날의 구구한 종이나 자리 같은 공물을 면제해 주는 것이 딴 날에 견마(犬馬)와 주옥(珠玉)을 청하는 자료가 되지 않으리라고 할 것인가. 그러므로 가히 걱정이 될지언정 영화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지금 황제의 뜻이 반드시 그런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동방이 대국의 후한 대우를 받은 지 여러 해가 되었은즉, 인심이 편안해져서 소홀하기가 쉬운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황제에게 올린 글과 칙유(勅諭)를 아울러 기록해서 천하의 걱정거리를 먼저 걱정할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바이다.

 

 

[C-001]행재잡록서(行在雜錄序)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8() : 당시 이조의 여덟으로 나눈 행정 구역.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행재잡록(行在雜錄)

 

 

예부(禮部)가 대사(大使) ()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의 대사. 장문금(張文錦)의 자는 환연(煥然)이요, 순천 대흥(大興) 사람이다. 사람됨이 키가 작되 다부지게 생겼다. 에게 분부하기를,

 

이제 황제의 뜻을 받들어 이르노니 조선(朝鮮)으로부터 온 정부사(正副使)가 열하에 와서 예를 행할 것이니 즉시 이 뜻을 조선 사신에게 전하고 열하로 같이 가게 하라. 관원과 종인(從人)들의 성명을 베낀 것을 즉시 정찬사(精饌司 음식을 맡은 관청)로 보내고 내일은 곧 데리고 떠나게 하라. 이것을 특히 분부하는 것이다. 8월 초 4일 초저녁.”

이라 했다.

예부가 대사 장에게 분부하기를,

 

황제의 뜻을 받들어 조선 사신 등을 데리고 열하로 가서 예를 행할 것은 이미 명령했거니와, 즉시 사신의 성명과 수행관들의 성명을 함께 베낀 것을 곧 예부로 보내고 기다리라 했는데 아직도 보고가 이르지 않았으니, 황제의 뜻을 받든 바에 어찌 늦출 수가 있는가. 속히 베껴서 예부로 보낼 것을 서서 기다리노라. 다음으로 수행할 통관(通官)오림포(烏林浦) 사가(四哥)서종현(徐宗顯)이다. 보수(保壽)박보수(朴寶樹)이다. 등 세 사람에게 즉시 이 분부를 전해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내일 사시(巳時)에 조선 사신들을 데리고 임구(林遘)에 가서 잘 것을 특히 분부하노라. 아울러 분부할 것은 대사 장이 내일 묘시에 아문(衙門)에서 기다리면 면대해서 알려 줄 일이 있으니 이것을 특별히 분부하노라. 8월 초 4.”

이라 했다.

조선국 진하 겸 사은사(朝鮮國進賀兼謝恩使)로 먼저 열하 행재소(行在所)로 간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정사(正使)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부사(副使)이조 판서잠시 차함(借啣)이다. 정원시(鄭元始), 서장관 겸 장령(書狀官兼掌令)조정진(趙鼎鎭)과 대통관(大通官)홍명복(洪命福)조달동(趙達東)윤갑종(尹甲宗)과 종관(從官)주명신(周命新)정사의 비장(裨將)이다. 정창후(鄭昌後)이서귀(李瑞龜)부사의 비장이다. 조시학(趙時學)서장관의 비장이다. 과 따르는 사람 64명으로 이상 모두 74명과 말 55.”

() ()와 신() ()은 아뢰나이다.” 만인 상서(尙書)는 덕보(德甫), 한인 상서는 조수선(曹秀先)인데, 육부(六部)가 모두 만인과 한인을 써서상서와 시랑(侍郞)을 두었다.

조선국 사신으로 만수절(萬壽節) 경하차로 온 정사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달 초 9일에 열하에 도착시켜 신 등이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잘 보살펴 두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건륭 45 8월 초 9일에 아뢰고 황제의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신 조와 신 덕은 사정에 따라 삼가 천은(天恩)을 감사하는 사건에 대하여 아뢰나이다. 조선국 사신 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 등이 올린 글을 보면, ‘엎드려 아뢰노니 국왕이 황제의 칠순(七旬) 만수절을 당하여 기뻐함을 이기지 못하여 저희들을 시켜 국서를 받들고 경하차 오게 되어 열하에 이르러 예식을 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영광과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요, 또 다시 성지(聖旨)를 입어 소국(小國) 사신으로 하여금 천조(天朝)의 이품(二品)삼품(三品) 대신들의 다음에서 예식을 행하도록 은혜를 베푼 것은 격외(格外)의 일이었고 실로 천고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삼가 마땅히 돌아가서 국왕에게 아뢰어 황은(皇恩)에 감격할 것이요, 저희들의 춤출 듯 기꺼운 정성을 청컨대 예부의 대인(大人)들은 이 뜻을 대신 아뢰어 주십시오.’

하고, 진정으로 문서를 갖추어 왔으므로 이로써 삼가 주문(奏聞)합니다.”

건륭 45 8 10일에 아뢰고 다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예부는 삼가 주문(奏聞)하는 일로써 상주하나이다. 이달 12일에 신 등이 분부를 좇아 회동이번원(會同理藩院)사원(司員)들을 보내서 조선 사신 정사 박과 부사 정과 서장관 조 등을 데리고 찰십륜포(札什倫布)에 가서 액이덕니(額爾德尼)에게 뵙는 예절을 행하였습니다. 예가 끝나자, 앉으라 하고 차를 마시며, 그 나라의 원조와 아울러 입공(入貢)하는 내력을 물으매, 사신들은 대답하기를,

황상의 칠순 되는 큰 경사를 축하하는 표()를 올리고 아울러 천은을 삼가 사례하러 온 것입니다.’

하니, 액이덕니는 듣고 나자 심히 기뻐하여 즉시,

영원하도록 공손하면 자연 복을 얻으리라.’

신칙을 하면서, 사신에게 내리는 동불(銅佛)과 서장향과 모직 옷감을 주니 그들은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였습니다. 사신 등에게 준 동불 등 물건의 목록을 적어 황제께 뵈이기 위해서 여기에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건륭 45 8 12일에 아뢰고, 아셨다는 뜻을 삼가 받들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사신이 반선을 본 이야기는 내가 찰십륜포기(札什倫布記)에 갖추어서 실었다. 이제 예부의 주문한 글을 보면, 액이덕니를 절해 뵈었다든가 사신에게 물건을 주었을 때 사신 등이 즉시 머리를 조아리고 사례를 했다고 운운한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상주한 말에는 사세가 부득이했던 것이다. 다만 내가 목격한 바를 자세히 기록하여 산 속에 돌아가 등을 볕에 쪼이는 날 한 번 웃음거리로 삼을 터인데, 이 글을 보는 자는 마땅히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정사에게 동불(銅佛) 1, 보료 18, 합달(哈達) 1, 합달(哈達)은 폐백(幣帛)과 같은 말이다. 붉은 빛 탄자 2, 서장향 24묶음, 계협편(計夾片) 1주머니. 무슨 물건인지를 모르겠다.

부사에게 동불 1, 보료 14, 합달 1, 붉은빛 탄자 1, 서장향 20묶음.

서장관에게 동불 1틀 보료 10, 합달 1, 붉은빛 탄자 1, 서장향 14묶음.

 

 

[C-001]반선사후지(班禪事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소위 동불이란 것은 높이가 한 자가 넘으니, 이것은 호신불(護身佛)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으레 멀리 여행하는 자에게 서로 선사하여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조석으로 공양하는 것이요, 서장 풍속에는 연례(年例)로 진공(進貢)하는데, 부처 한 틀로써 방물을 삼는 것이니, 이번 이 동불도 법왕이 우리 사신을 위해서 여행의 무사함을 비는 가장 아름다운 폐백으로 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부처와 인연을 가진 일이 있고 보면, 평생에 누()가 되는 것이거늘 하물며 이것을 준 자가 번승(番僧)이었음에랴. 사신이 이미 북경으로 돌아오자, 그 폐백들을 모두 역관들에게 내주었으나 여러 역관들도 역시 똥오줌처럼 더럽다고 보아 은 90냥에 팔아 일행의 마두배(馬頭輩)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으나 마부들도 이것으로는 술 한 잔도 사먹을 수 없다 했으니, 결백하다면 결백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나라 풍속으로 본다면, 고루한 시골 티를 면치 못할 것이다.

예부는 공무(公務)를 위하여 보낸 조선국 공문 한 통을 병부(兵部)로 보내기 위하여 돌려 발송하는 것이 옳다.

주객사(主客司)는 행재소 예부의 공문에 준하여 아뢴다. 본부에서 상주한 조선 사신이 열하에 도착한 문서 한 통과 또 상주한 조선 사신이 천자의 은혜를 공손히 사례한다는 문서 한 통과 또 반선(班禪) 액이덕니가 조선 사신에게 준 물건의 명목 한 통을 응당 따로 베껴서 알리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각 상주문(上奏文)들은 원문대로 베낄 것은 물론이요, 유지(諭旨)를 받들고 이송(移送)한 글까지도 베껴서 담당한 곳에 보내어 처리하게 할 것이다. 방례과(房禮科)와 절강(浙江 절강의 관원)도 아울러 시행한다.

예부는 삼가 예의(禮儀)에 관한 일을 상주하나이다. 건륭 45 8 13일은 황제의 칠순 만수성절에 경하례(慶賀禮)를 행하겠습니다. 이날 난의위(鑾儀衛 황제의 의례를 맡은 관청)는 미리 황제의 법가로부(法駕鹵簿 황제가 타는 수레)를 담백경성전(淡泊敬誠殿) 뜰에 차려 놓고 중화소악(中和韶樂)을 담박경성전 처마 밑 양편에 베풀고 단폐대악(丹陛大樂)을 이궁(二宮) 문안 양편의 정자 속에 북향하여 차리고 호종(扈從)하는 화석친왕(和碩親王) 이하 여덟 사람과 공작(公爵) 이상과 몽고의 왕공(王公) 토이호특(土爾扈特) 등은 모두 망포보복(蟒袍補服)을 입고 담박경성전 앞에 이르러 벌여 서고 문무 대신과 조선국 정사와 토사(土司)들은 이궁 문 밖에 각각 등급에 따라 벌여 서고 3품 이하 각 관원과 조선의 부사와 번자(番子)두인(頭人)들은 피서산장(避暑山莊) 문 밖에서 각각 품급(品級)에 따라 벌여 설 것입니다. 이때 예부의 당관(堂官)이 황상께서 용포(龍袍)와 곤복(袞服)을 입고 담박경성전 보좌(寶座)에 오르실 것을 주청(奏請)할 것입니다. 중화소악을 지으면 건평지장(乾平之章)을 아뢸 것이요, 황상께서 자리에 오르시면 음악을 그칠 것입니다. 난의위의 관원이 명편(鳴鞭)을 하라고 소리를 지르면 뜰 아래서 세 번 명편을 하고 명찬관(鳴賛官)이 반열을 차립니다. 이때에 단폐대악을 연주하는데, 경평지장(慶平之章 악장 이름)을 아뢰면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이 여러 왕들과 문무관을 인도하여 각각 반열을 차려 섭니다. 명찬관이 창을 하는데 무릎을 꿇라고 창하면 왕들 이하 모든 관원들은 모두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일어나라고 창을 하면 왕 이하 모든 관원들은 세 번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합니다. 명찬관이 물러서라는 창을 하면 왕 이하 모든 관원들은 다 함께 제자리에 돌아와 서게 합니다. 이때에 음악은 그치고 난의위의 관원이 계하에서 세 번 명편(鳴鞭)하면 예부의 당관은 예식이 다 끝났음을 아뢰고, 중화소악을 지어 태평지장(太平之章 악장 이름)을 연주합니다. 황상이 타신 수레는 환궁하시게 되고 음악이 그치면서 왕공 이하 모든 관원들은 모두 나오게 됩니다.

내감(內監 환관)은 황상이 내전에서 보좌에 오르시기를 주청하면 비빈(妃嬪)들은 용포와 곤복을 갖추어 황상 앞에 내놓으면서 여섯 번 숙배(肅拜)하고, 세 번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는 예를 행하면 예식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황상께서 자리에서 일어나면 비빈들은 대궐로 돌아가고 황자(皇子)와 황손(皇孫)황증손(皇曾孫)들이 예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이것으로써 삼가 갖추어 주문하나이다.

주객사(主客司)는 행재소 예부의 문서에 의준해서 아래와 같이 알리노라. 건륭 45 8 12일에 내각은 다음과 같은 황상의 유지를 받들었노라.

 

조선은 번봉(藩封)을 대대로 지켜서 본래부터 공손하다고 일컬었고 해가 바뀔 때마다 직공(職貢)을 정성껏 하는 것은 가상한 일이다. 때로 특별한 칙유(勅諭)를 내리고 또 자기 나라로 돌려 보내는 등 일이 있을 때는 유구(琉球) 같은 나라와 같이 역시 글을 갖추어 진사(陳謝)하게 되는데 오직 조선국만은 반드시 토물을 갖추고 나서 표문(表文)을 부쳐서 정성껏 바쳐 왔다. 저번에도 그들의 사신이 멀리 왔는데, 그들이 가지고 온 폐백을 돌려보낸다면, 발섭(跋涉)하는 수고만 더하겠기에 그것을 높이 평가하여 정공(正貢)으로 삼아서 우대하고, 그 나라는 자기들 직분을 분명히 지켜 정공을 보낼 때에는 따로 예물을 갖추어 바쳐서 왕래하기에 더 복잡하고 보니 한 가지 의식이 더 많아진 셈이다. 지금 우리 두 나라는 서로 성의로 맺어지고 한 몸과 같이 되었으니 이러한 번거롭고 헛된 절차가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올해 짐()의 만수절에도 그 나라에서는 표문을 갖추어 사신을 열하 행재소까지 보내어 우리 조신(朝臣)과 일제히 예를 행했다. 가지고 온 표문과 예물은 그들의 경축하는 정성으로 받으려니와 다음부터는 세시(歲時)나 경절의 정공만을 전례대로 받을 것이며, 그 외의 진사(陳謝)하는 표문이나 예물은 모두 정지시켜 짐의 먼 나라를 생각하여 실상을 주로 하고 허식을 취하지 않는 지극한 뜻에 맞도록 하라.”

신 덕과 신 조는 사정에 의하여 천은을 삼가 사례한다는 일에 대하여 아뢰나이다. 조선국 사신 금성위 박과 이조 판서 정 등이 글을 올렸습니다.

 

삼가 황상의 만수절을 당하여 구역(九域)에 경사가 넘쳐 흘러서 본국으로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못하나마 진하(進賀)하는 정성을 본받았던 바 예부에서 성승(聖僧)을 뵈옵고 복을 받았다는 문구를 여기에다 첨가하였다. 이에 격외(格外)의 은상(恩賞)을 특별히 소방(小邦)에 내려 천한 사신에게까지 미쳤으니, 예부에서 이 대문을 고쳐서, “국왕과 사신과 아울러 따라온 사람들에게 비단과 은을 더 주었다.”라고 하였다. 영광의 힘 입은 바는 실로 전후에 없었던 일입니다. 삼가 마땅히 돌아가서 국왕에게 여쭈어서 예부에서 이 대문에다 따로이, “표문을 갖추어 감사의 뜻을 올렸습니다.”라고 첨가하였다. 황은(皇恩)에 감격하게 할지니 예부의 대인들도 대신 전하여 아뢰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이 일을 삼가 갖추어 아뢰나이다. 건륭 45 8 14일에 아뢰고 다 아셨다는 뜻을 받들었다.

 

 

[C-001]동불사후지(銅佛事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주객사(主客司) : 황제 직속 접빈처(接賓處).

[D-002]토사(土司) : 남방 만족(蠻族)들의 추장.

[D-003]두인(頭人) : 만주의 벼슬 이름.

[D-004]건평지장(乾平之章) : 악장(樂章)의 이름.

[D-005]명편(鳴鞭) : 채찍을 울려 정숙하기를 경고하는 의례.

[D-006]명찬관(鳴賛官) : 창홀(唱笏)하는 집사(執事).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필첩식(筆帖式)에 있는 문부 가운데는 이러한 뜻으로써 쓴 글이 원본과 많이 달랐으니 대개 예부가 옮겨 상주할 적에 첨개(添改)한 까닭이다. 사신은 크게 놀라 일 맡은 역관을 시켜 먼저 예부의 조방(朝房)으로 가서 그 이유를 묻기를,

 

무슨 까닭으로 바치는 글을 몰래 고쳐서 우리가 모르게 하였느냐.”

했더니, 낭중(郎中)은 크게 노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친 글이 사실을 전부 빼놓았기 때문에 예부의 대인들이 너희 나라를 위해서 주선하여 이미 품()해서 바친 것인데, 너희들은 덕 되는 것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기를 쓰고 와서 질문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고 하였다.

6() 가운데 예부가 가장 거행하는 일이 많아서 천지(天地) 교묘(郊廟)와 산천의 제사를 비롯하여 황제의 기거와 사해 만국의 일이 관계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내가 열하에 있을 때 예부가 거행하는 일에 우리나라에 관계되는 것을 보아서 천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가 사신에게 특별한 은혜가 있은즉, 예부는 여기 따라서 즉시 글을 올려 전주(轉奏)하겠다고 협박하여 명령했다. 이것은 사신의 의리에 해당하는 일이라 사례를 하고 않는 것은 사신의 자유일 것이다. 사신이 대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비록 외국 사신이 제 스스로 사례를 하여 상주할 것을 요구하더라도 번거롭고 시끄러운 폐단이라고 물리치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서 오직 글을 제때에 올리지 못하여 전주(轉奏)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사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맘대로 글귀를 고쳐서 대체(大體)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한때 황제를 기쁘게 할 자료만 필요로 하여 스스로 위를 속이는 죄를 범하고 외국의 멸시를 달게 취하고 있다. 예부가 이와 같으니 다른 여러 부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신은 며칠이 안 되어 응당 돌아가야 할 처지여서 자문(咨文)도 절로 받아 갈 만한 터인데, 먼저 서둘러서 발송을 하여 자기 공로를 세우기에 눈이 어두워 마치 위항(委巷) 소인의 행세를 한다. 대국의 일이 어찌 그리 천박하니 이것으로서는 족히 천하의 법도를 삼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심히 걱정되는 것이 우리 일에 분주히 서두르는 것이 우리를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황제의 명령이 엄하고 급한 것을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이다. 사신은 앉은 채로 예부의 독촉만 받고 어렵고 쉬운 일 할 것 없이 오직 속히 이루어지기만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저들도 모르게 대우를 후하게 해준다는 것으로써 세도를 부리는 것이다. 몇 해 이래로 이미 이러한 규례(規例)가 생겨 통관(通官)과 서반(序班 벼슬 이름)도 그 사이에 조종할 바가 없어 우리 사신에게 불평을 쌓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만일 황제가 일조에 조회를 보지 않고 예부의 거행이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서반 한 사람으로써 넉넉히 우리 사신의 진퇴를 제약할 수 있었고, 더욱더 예부가 분주하게 구는 것은 본래 황제의 기쁨을 사는 미봉(彌縫)의 일이었음에랴. 사신 된 자는 이를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릇 사신의 진퇴에 관한 일은 전혀 예부에 관계되는 것이니, 사신이 독촉해서 이루는 일은 담당 역관을 상대할 따름이요, 담당 역관은 통관에게 부탁할 뿐이요, 통관은 아문(衙門)에 부탁할 뿐이어서 소위 아문이란 것은 곧 사역(四譯)의 제독(提督)과 대사(大使)를 말함이다. 제독과 대사가 예부의 당관(堂官) 사이에는 엄격한 등차가 있어서 쉽게 청탁을 못할 처지이다. 그러므로 사신의 의심과 노여움은 항상 역관에게 있으니, 이것은 대개 자신이 언어를 능히 통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다만 피차에 역관의 혀만 믿기 때문이다. 사신은 이미 속는다고 의심하고 역관은 항상 해명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상하의 사정과 처지가 간격이 생기어 서로 통하지 못하니, 역관에 대한 사신의 독촉이 더할수록 서반(序班)과 통관(通官)의 조종은 더욱 심해진다. 진퇴와 완급(緩急)이 비로소 손아귀에 들어 얼핏하면 뇌물을 찾는 것이 해마다 더하고 늘어 드디어 하나의 전례가 되었다. 이제 그들의 조종을 받는 일이란 돌아갈 기한의 연기나 문서의 접수 여부에 불과할 뿐이지만, 만일 급한 일이 생겨서 대국에서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전일과 달라서 정상을 보전하지 못하고 보면, 여관 속에 깊이 앉아 있는 자는 외국의 배신(陪臣)에 불과할 뿐이니 장차 누구를 믿을 것인가. 오직 서반에게 목을 달아매어 예부에 관한 모든 일은 비로소 패연(沛然)함을 얻어서 공공연히 조종을 부리게 될 것이니 사신된 자는 가히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일어난 지 백 40여 년에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중국을 오랑캐라고 하여 부끄러워하고 비록 사신의 내왕은 힘써 하면서도, 문서의 거래라든지 사정의 허실은 일체 역관에게 맡겨 두고, 강을 건너 연경에 이르기까지 거쳐 오는 2천 리 사이에 각 주()()의 관원과 관액의 장수들은 그 얼굴을 접해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통관(通官)이 공공연히 뇌물을 찾는데, 우리 사신은 그들의 조종을 달게 받고 역관은 황황히 받들어 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항상 무슨 큰 기밀이나 숨겨둔 것 같은 것은 이야말로 사신들이 망령되이 자기 편을 높은 체하는 데 허물이 있는 것이다. 사신이 담당 역관에 대하여 너무 의심을 하는 것은 정리가 아니요, 지나치게 믿는 것도 또한 옳지 않으니, 만일 일조에 걱정이 생기면 세 사신은 장차 말 없이 서로 쳐다보고 한갓 담당 역관의 입에만 의존할 것이니, 사신된 자는 힘써 연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연암은 쓰다.

 

 

[C-001]행재잡록후지(行在雜錄後識) : 여러 본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가하였다.

[D-001]필첩식(筆帖式) : () 때 각 관청에서 만주어로 문서를 만드는 서기(書記)의 벼슬 이름.

[D-002]전주(轉奏) : 남을 대신하여 어떤 일의 내용을 임금에게 상주하여 전함.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중존평어(仲存評語)

 

 

중존씨(仲存氏)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는 모두들 깊은 걱정과 먼 생각이다. 이 편은 원집(原集) 중에 실려 있는 은화(銀貨)를 의논한 한 단락(段落)과 함께 정치를 맡은 자는 마땅히 익숙히 연구하여야 하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https://blog.naver.com/karamos/222586630789

 

열하일기(熱河日記) - 옥갑야화(玉匣夜話)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옥갑야화(玉匣夜話)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옥갑야화(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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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옥갑야화(玉匣夜話)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옥갑야화(玉匣夜話)

1. 옥갑야화(玉匣夜話)

2. 허생전(許生傳)

3. 허생후지(許生後識)

4. 허생후지(許生後識)

5. 차수평어(次修評語)

 

 

 

옥갑야화(玉匣夜話)

옥갑(玉匣)에 돌아와서 모든 비장들과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밤들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연경은 옛날에는 풍속이 순후하여 역관배가 말하면 비록 만 금이라도 무난히 빌려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모두 사기로써 능사를 삼으니 이는 실로 잘못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서른 해 전에 한 역관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연경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제 그 단골 주인을 보고서 울었다. 주인은 괴이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강을 건널 때에 가만히 남의 은()을 가지고 왔더니 일이 발각되자 제 것까지 모두 관()에 몰수되었습니다. 이제 빈 손으로 돌아가려니 무엇으로도 생활할 수 없겠기에 차라리 이곳에서 죽고자 합니다.”

하고는 곧 칼을 빼어 자살하려 하였다. 주인이 놀라서 급히 그를 껴안고 칼을 빼앗으면서,

 

몰수된 은이 얼마나 되는지요.”

하였더니, 그는,

 

삼천 냥입니다.”

하였다. 주인은,

 

사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음이 걱정이지, 은이 없기로 무엇이 근심이요. 이제 이곳에서 죽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당신의 처자에게 어떻게 하려는 거요. 이제 내가 당신에게 만 금을 빌려 드릴 테니 다섯 해 동안을 늘이면 아마 만 금은 남겠지요. 그때 가서 본전으로 나에게 갚아 주시오.”

하고는, 그를 돌보면서 위안하였다. 그는 이미 만 금을 얻자, 곧 물건을 많이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 당시에는 그 일을 아는 이가 없었으므로 모두들 그의 재능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과연 다섯 해 만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곧 역원(譯院)의 명부에서 자기의 이름을 깎아버리고는 다시 연경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친구 하나가 연경에 들어가기에, 그는,

 

연경 저자에서 만일 아무 단골 주인을 만나면 그는 응당 나의 안부를 물을 테니 자네는 그의 온 집안이 몹쓸 유행병을 만나서 죽었다고만 전해 주게.”

하고, 가만히 부탁의 말을 던졌다. 그 친구는 이 말이 너무나 허황함으로 곤란한 빛을 보였다. 그는,

 

만일 그렇게만 하고 돌아온다면 마땅히 자네에게 돈 일백 냥을 바치겠네.”

하고, 단단히 부탁하였다. 그 친구가 연경에 들어서자 그 단골 주인을 만났다. 주인이 역관의 안부를 묻기에, 그 친구의 부탁한 바와 같이 답하였더니, 주인은 곧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한바탕 슬피 울면서,

 

아아, 하느님이시여. 무슨 일로 이다지 좋은 사람의 집에 이렇듯 참혹한 재앙을 내리셨나요.”

하고는, 곧 백 냥을 그에게 주면서,

 

그이가 처자와 함께 죽었다니 주장할 이도 없을 테니, 당신이 고국에 돌아가시는 그 날로 나를 위하여 오십 냥으로 제물을 갖추고, 또 나머지 오십 냥으로 재()를 벌여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어 주시오.”

하였다. 그 친구는 몹시 아연했으나 벌써 거짓말을 하였는지라, 하는 수 없이 백 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역관의 온 집안은 벌써 역질을 만나서 몰사하였다. 그는 크게 놀라는 한편 두렵기도 하여 그 일백 냥으로 그 단골 주인을 위하여 재를 드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 연행(燕行)을 폐기하고는, 말하기를,

 

내 무슨 낯으로 그 단골 주인을 만나겠어.”

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지사(李知事) ()는 근세에 이름 있는 통역관이었으나 평소에 입에는 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40여 년을 연경에 드나들었으되 그 손에는 일찍이 은을 잡아본 적이 없었으며, 근실한 군자(君子)의 풍도를 지녔다.”

한다.

어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성군(唐城君)홍순언(洪純彦)은 명() 만력(萬曆) 때의 이름난 통역관으로서 명경(明京)에 들어가 어떤 기생 집에 놀러 갔었다. 기생의 얼굴에 따라서 놀이채의 등급을 매겼는데, 천 금이나 되는 비싼 돈을 요구하는 자가 있었다. ()은 곧 천 금으로써 하룻밤 놀기를 청하였다. 그 여인은 나이 바야흐로 16세요, 절색을 지녔다. 여인은 홍과 마주 앉아서 울면서 하는 말이, ‘제가 애초 이다지 많은 돈을 요청한 것은 실로 이 세상에는 모두들 인색한 사나이가 많으므로 천 금을 버릴 자 없으리라 생각하고서 당분간의 모욕을 면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루 이틀을 지나면서 관 주인을 속이는 한편, 이 세상에 어떤 의기를 지닌 남자가 있어서 저의 잡힌 몸을 속()하여 사랑해 주기를 희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창관(娼館)에 들어온 지 닷새가 지났으나 감히 천 금을 갖고 오는 이가 없었더니, 이제 다행히 이 세상의 의기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은 외국 사람인 만큼 법적으로 보아서 저를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시기에는 어렵사옵고, 이 몸은 한번 더럽힌다면 다시 씻기는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한다. 홍은 그를 몹시 불쌍히 여겨서 그에게 창관에 들어온 경로를 물었더니, 여인은 답하기를, ‘저는 남경(南京) 호부 시랑(戶部侍郞) 아무개의 딸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장물(贓物)에 얽매였으므로 이를 갚기 위하여 스스로 기생 집에 몸을 팔아서 아버지의 죽음을 속하고자 하옵니다.’ 한다. 홍은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실로 이런 줄은 몰랐소이다. 이제 내가 당신의 몸을 속해 줄 테니 그 액수(額數)는 얼마나 되는지요.’ 했다. 여인은 말하기를, ‘이천 냥이랍니다.’ 하였다. 홍은 곧 그 액수대로 그에게 치르고는 작별하기로 하였다. 여인은 곧 홍을 은부(恩父)라 일컬으면서 수없이 절하고는 서로 헤어졌다. 그 뒤에 홍은 이에 대하여 괘념(掛念)하지 않았다. 그 뒤에 또 중국을 들어갔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모두들 홍순언이 들어오나요.’ 하고 묻기에, 홍은 다만 괴이하게 여겼을 뿐이었더니, 연경에 이르자, 길 왼편에 공장(供帳)을 성대하게 베풀고 홍을 맞이하면서, ‘병부(兵部) 석 노야(石老爺)께서 환영하옵니다.’ 하고는 곧 석씨(石氏)의 사저로 인도한다. 석 상서(石尙書)가 맞이하여 절하며, ‘은장(恩丈)이시옵니까. 공의 따님이 아버지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답니다.’ 하고는 곧 손을 이끌고 내실로 들었다. 그의 부인이 화려한 화장으로 마루 밑에서 절한다. 홍은 송구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석 상서는 웃으면서, ‘장인(丈人)께서 벌써 따님을 잊으셨나요.’ 한다. 홍은 그제야 비로소 그 부인이 곧 지난날 기생 집에서 구출했던 여인인 줄을 깨달았다. 그는 창관에서 나오게 되자 곧 석성(石星)의 계실(繼室)이 되었던 바, 전보다 귀하게 되었으나 그는 오히려 손수 비단을 짜면서 군데군데 보은(報恩) 두 글자를 무늬로 수놓았다. 홍이 고국으로 돌아올 때에 그는 보은단(報恩緞) 외에도 각종 비단과 금은 등을 이루 헤아리지 못할 만큼 행장 속에 넣어 주었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석성이 병부에 있으면서 출병(出兵)을 힘써 주장하였으니, 이는 석성이 애초부터 조선 사람을 의롭게 여겼던 까닭이다.”

어떤 이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 사람 장사치들과 친하고도 단골 주인인 정세태(鄭世泰)는 연경에서의 갑부(甲富)였다. 그러던 것이 세태가 죽자, 그 집은 곧 일패도지(一敗塗地)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다만 손자 하나가 있었는데, 뭇 사내 중에 절색(絶色)이었으나 어려서 극장(劇場)에 몸을 팔았다. 세태가 살아 있을 적에 회계(會計)를 보던 임가(林哥)는 이때에 와서 이름난 부자가 되었는데, 극장에서 어떤 미남자가 연극하는 것을 보고 마음으로 퍽 애처롭게 생각하던 차에 그가 정씨(鄭氏)의 손자인 줄을 알고는 서로 껴안고 울었다. 곧 천 금으로 그를 속()해 집에 데리고 돌아와 집 사람들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들은 잘 대우하렷다. 이 이는 우리 집 옛 주인이니 결코 배우의 몸이라 해서 천시하지 말라.’ 하고는 그가 자라난 뒤에 그 재산의 절반을 나눠서 살림을 시켰다. 그는 몸이 살찌고 살결이 몹시 희며, 또한 얼굴이 아름답고도 화려하였다. 그는 아무런 일도 없이 다만 연() 날리기로써 성 안을 노닐 따름이었었다.”

옛날 이곳에서 물건을 매매할 때는 봇짐을 끌러 검사하지 않고, 곧 연경에서 싸보낸 그대로 갖고 와서는 장부와 대조해 보아도 조금도 그릇됨이 없었다. 어느 때인지 흰 털감투로써 겉을 싼 것이 있었는데 돌아와서 끌러 본즉 모두 흰 모자였다. 그러나 저쪽에서 고의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저곳에서 검사해 보지 못했던 것을 스스로 후회하였더니, 정축년(1517)에 두 번이나 국상(國喪)을 당하자 도리어 배나 되는 값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역시 그네들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전조(前兆)인 것이다. 근년에 이르러서는 화물을 반드시 스스로 단속하고, 단골집 주인에게 맡기지 않는다 한다.

어떤 이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변승업(卞承業)이 중한 병에 걸리자 곧 변돈 놀이의 총계를 알고자 하여 모든 과계(夥計) 장부(帳簿)를 모아 놓고 통계를 내어본즉, ()이 모두 50여 만 냥이나 적립되었다. 그의 아들이 청하기를, ‘이를 흩는다면 거두기도 귀찮을 뿐더러 시일을 오래 끌면 소모되고 말 테니 그만 여수(與受)를 끊는 것이 옳겠습니다.’ 했을 때 승업은 크게 분개하면서, ‘이는 곧 서울 안 만호(萬戶)의 명맥(命脈)이니 어째서 하루아침에 끊어버릴 수 있겠느냐.’ 하고는, 곧 빨리 돌려 보내게 하였다. 승업이 이미 나이 늙으매 그의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내 일찍이 공경(公卿)들을 섬겨본 적이 많은데 그들 중에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자기의 사사 이익을 꾀하는 이 치고 그 권세가 삼 대를 뻗는 이가 없더란 말이야. 그리고 온 나라 사람 중에서 재물을 늘리는 이들이 으레 우리 집 거래를 표준 삼아서 오르내리는 것도 역시 국론(國論)인 만큼, 이를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재앙이 미칠거야.’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 자손이 번창하면서 모두들 가난한 것은, 승업이 만년에 재산을 많이 흩어버린 까닭이다.”

나도 역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일찍이 윤영(尹映)이란 이에게 변승업의 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부는 애초부터 유래가 있어서 승업의 조부 에는 돈이 몇 만 냥에 지나지 않았더니, 일찍이 허씨(許氏) ()을 지닌 선비의 은 십만 냥을 얻어서 드디어 일국의 으뜸이 되었던 것이 승업에게 이르러서 조금 쇠퇴된 셈이다. 그가 처음 재산을 일으킬 때에 역시 운명이 있는 듯싶었다. 허생(許生)의 일로 보아서 이상스러우니, 허생은 끝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제 윤영의 이야기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D-001]국상(國喪)을 당하자 : 2월에는 정성 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의 국상이 있었고, 3월에는 인원 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국상이 있었다.

[D-002]승업의 …… 드디어 : 옥갑야화(玉匣夜話)로 되어 있는 여러 본에는 이 부분이 누락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옥류산관본(玉溜山館本)’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허생전(許生傳)

 

 

허생(許生)은 묵적골에 살고 있었다. 줄곧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터 위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사립문이 그 나무를 향하여 열려 있으며, 초옥 두어 칸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였고, 그의 아내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셈이다. 하루는 그 아내가 몹시 주려서 훌쩍훌쩍 울며 하는 말이,

 

당신은 한 평생에 과거(科擧)도 보지 않사오니 이럴진대 글은 읽어서 무엇하시려오.’

하였다. 허생은,

 

난 아직 글 읽기에 세련되지 못한가 보오.’

하고 껄껄대곤 했다. 아내는,

 

그러면 공장이 노릇도 못하신단 말예요.’

하였다. 허생은,

 

공장이 일이란 애초부터 배우지 못했으니까 어떻게 할 수 있겠소.’

하니, 아내는,

 

그럼, 장사치 노릇이라도 하셔야죠.’

한다. 허생은,

 

장사치 노릇인들 밑천이 없고서야 어떻게 할 수 있겠소.’

하였다. 그제야 아내는 곧,

 

당신은 밤낮으로 글 읽었다는 것이 겨우 어찌할 수 있겠소 하는 것만 배웠소그려. 그래 공장이 노릇도 하기 싫고, 장사치 노릇도 하기 싫다면, 도둑질이라도 해보는 게 어떻소.’

하고는 몹시 흥분하는 어조로 대꾸했다. 이에 허생은 할 수 없이 책장을 덮어 치우고 일어서면서,

 

아아, 애석하구나. 내 애초 글을 읽을 제 십 년을 채우렸더니 이제 겨우 7년밖에 되지 않는군.’

하고는, 곧 문밖을 나섰으나,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는 곧장 종로 네거리에 가서 저자 사람들에게 만나는 대로,

 

여보시오, 서울 안에서 누가 제일 부자요.’

하고 물었다. 때마침 변씨(卞氏 변승업(卞承業)의 조부)를 일러주는 이가 있었다. 허생은 드디어 그 집을 찾았다. 허생이 변씨를 보고서 길게 읍()하며,

 

내 집이 가난해서 무엇을 조금 시험해 볼 일이 있어 그대에게 만 금(萬金)을 빌리러 왔소.’

했다. 변씨는,

 

그러시오.’

하고는, 곧 만 금을 내주었다. 그러나 그는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어디론지 가 버렸다. 변씨의 자제(子弟)와 빈객(賓客)들은 허생의 꼴을 본즉, 한 비렁뱅이였다. 허리에 실띠를 둘렀으나 술이 다 뽑혀 버렸고, 가죽신을 뀄으나 뒷굽이 자빠졌으며, 다 망그러진 갓에다 검은 그을음이 흐르는 도포(道袍)를 걸쳐 입었는데, 코에서는 맑은 물이 훌쩍훌쩍 내리곤 한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모두들 크게 놀라며,

 

아버지, 그 손님을 잘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변씨는,

 

몰랐지.’

그러시다면 어찌 잠깐 사이에 이 귀중한 만 금을 평소에 면식도 없는 자에게 헛되이 던져 주시면서 그의 성명도 묻지 않음은 무슨 까닭이십니까.’

했다. 변씨는,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엔 반드시 의지(意志)를 과장하여 신의(信義)를 나타내는 법이다. 그러고 얼굴빛은 부끄럽고도 비겁하며, 말은 거듭함이 일쑤이니라. 그런데, 이 손님은 옷과 신이 비록 떨어졌으나 말이 간단하고 눈 가짐이 오만하고 얼굴엔 부끄런 빛이 없음으로 보아서 그는 물질(物質)을 기다리기 전에 벌써 스스로 만족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아마 그의 시도하려는 방법도 적지 않거니와, 나 역시 그에게 시도함이 없지 않는 거다. 그리고 주질 않는다면 모르려니와 기왕 만 금을 줄 바에야 성명은 물어서 무엇하겠느냐.’

하였다.

이에 허생은 이미 만 금을 얻어 갖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언뜻 생각하기를,

 

저 안성(安城)은 기()()의 접경이요, 삼남(三南)의 어귀렷다.’

하고는, 곧 이에 머물러 살았다. 그리하여 대추감자석류유자 등의 과실을 모두 값을 배로 주고 사서 저장했다. 허생이 과실을 도고(都庫)하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지 얼마 아니 되어서 앞서 허생에게 값을 배로 받은 장사들이 도리어 십 배를 치렀다. 허생은,

 

어허, 겨우 만 금으로 온 나라의 경제(經濟)를 기울였으니 이 나라의 얕고 깊음을 짐작할 수 있구나.’

하고는, 곧 칼호미명주솜 등을 사가지고 제주도(濟州島)에 들어가서 말총을 모두 거두면서,

 

몇 해만 있으면 온 나라 사람들이 머리를 싸지 못할 거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망건(網巾) 값이 과연 십 배나 올랐다. 허생은 늙은 뱃사공에게,

 

영감, 혹시 해외(海外)에 사람 살 만한 빈 섬이 있는 것을 보았나.’

하고 물었더니, 사공은,

 

있습디다그려. 제 일찍이 바람에 휩쓸려서 줄곧 서쪽으로 간 지 사흘 낮밤 만에 어떤 빈 섬에 닿았습니다그려. 그곳은 아마 사문(沙門)장기(長崎) 사이에 있는 듯싶은데, 모든 꽃과 잎이 저절로 피며, 온갖 과실과 오이가 저절로 성숙되고, 사슴이 떼를 이루었으며, 노니는 고기들은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더이다.’

한다. 허생은 크게 기뻤다.

 

자네 만일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 준다면 부귀(富貴)를 함께 누릴 걸세.’

했다. 사공은 그의 말을 좇았다. 이에 곧 바람 편을 타고 동남 쪽으로 그 섬에 들어갔다. 허생이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며,

 

땅이 천 리가 채 못 되니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나 토지가 기름지고 샘물이 달콤하니 다만 이곳에 부가옹(富家翁)의 노릇쯤은 하겠구나.’

하고,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사공은,

 

섬이 터엉 비고 사람 하나 구경할 수 없으니 뉘와 함께 사신단 말씀이시오.’

했다. 허생은,

 

()만 있으면 사람은 저절로 찾아드는 거야. 나는 오히려 내 덕 없음이 걱정이지 사람 없음이 무슨 걱정이 될 건고.’

했다. 이때 마침 변산(邊山)에 도적 수천 명이 떼를 지어 있었다. ()()에서 군졸을 징발하여 뒤를 쫓아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뭇 도적 역시 잠시도 밖으로 나와서 노략질을 하지 못하여 바야흐로 주리고 곤한 판이었다. 허생이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서 그의 괴수(魁帥)를 달래기 시작했다.

 

너희들 천 명이 합쳐 돈 천 냥을 훔쳐서 서로 나누어 갖게 되면 각기 얼마나 되겠는고.’

하고 물었다. 그는,

 

하나 몫이 한 냥밖에 더 되나유.’

한다. 허생은 또,

 

그럼 너희들의 아내는.’

하자, 뭇 도적은,

 

없어유.’

한다.

 

그럼 너희들의 밭은 있겠지.’

했더니, 이때에 뭇 도적은 웃으며,

 

밭 있구, 아내 있다면야 어찌 이다지 괴롭게 도둑질을 일삼겠수.’

한다. 허생은,

 

정말 그렇다면 아내를 얻고 집을 세우고, 소를 사서 농사지어 살면, 도둑놈이란 더러운 이름도 없을뿐더러 살림살이엔 부부(夫婦)의 낙()이 있을 것이며, 아무리 나와서 쏘다닌다 하더라도 체포당할 걱정이 없고, 길이 잘 입고 먹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했다. 뭇 도적은,

 

그야 정말 소원이겠지만 다만 돈이 없을 뿐이어유.’

한다. 허생은 껄걸 웃으며,

 

너희들이 도둑질 한다면서 돈이 그렇게 그립다면 내 너희들을 위해서 마련해 줄 수 있으니 내일 저 바닷가를 건너다 보면 붉은 깃발이 바람결에 펄펄 날리는 게 모두 돈 실은 배일 거야. 너희들 멋대로 가져 가려무나.’

했다. 허생은 이렇게 뭇 도적에게 약속하고는, 어디론지 가버렸다. 뭇 도적은 모두 그를 미친놈으로 알고 웃었다. 그 다음날이었다. 그들은 시험삼아 바닷가에 이르렀다. 허생은 벌써 삼십만 냥을 싣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깜짝 놀라 나란히 절하며,

 

이제부턴 오직 장군님 명령대로 따르겠소이다.’

한다. 허생은,

 

이것을 힘껏 지고 가는 게 어때.’

했다. 이에 뭇 도적이 다투어 돈을 져보려 했으나 백 냥을 채우지 못했다. 허생은,

 

너희들 힘이 겨우 백 냥도 들지 못하면서 무슨 도둑질인들 변변히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너희들이 비록 평민(平民)이 되고 싶다 하더라도 이름이 도적의 명부(名簿)에 올랐으니 갈 곳이 없지 않나. 그러니 내 이곳에서 너희들 돌아오길 기다릴 테니 각기 백 냥씩을 갖고 가서 하나의 몫에 계집 한 사람과 소 한 필씩을 데리고 오렷다.’

했다. 뭇 도적은,

 

예이.’

하고, 모두들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허생은 스스로 이천 명이 일 년 동안을 먹을 식량을 장만하고 기다렸다. 뭇 도적은 과연 기일이 되자 다 돌아오되 뒤떨어진 자 없었다. 이에 모두들 배에 싣고 그 빈 섬으로 들어갔다. 허생이 이렇게 도적떼를 데리고 사라지니 온 나라 안이 잠잠하였다. 이에 나무를 베어 집을 세우고, 대를 엮어서 울타리를 만들었다. 지질(地質)이 온전하매 온갖 곡식이 잘 자라서 묵정밭은 갈지 않고 김매지 않아도 한 줄기에 아홉 이삭씩이나 달렸다. 삼년 먹을 식량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배에 싣고 장기도(長崎島)에 가서 팔았다. 장기도는 일본(日本)의 속주(屬州)로서 호수(戶數) 31만이나 되는데, 바야흐로 큰 흉년이 들었는지라 드디어 다 풀어 먹이고는 은() 백만 냥을 거두었다. 허생은 탄식했다.

 

이제야 내 조금 시험해 보았구나.’

하고는, 곧 남녀 2천 명을 모두 불러 놓고,

 

내 처음 너희들과 함께 이 섬에 들어올 때엔 먼저 부()하게 한 연후에 따로이 문자(文字)를 만들며 옷갓을 지으려 하였는데 땅이 작고 덕이 엷으니,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련다. 너희들은 어린애가 나서 숟가락을 잡을 만하거든 오른손으로 쥐기를 가르치고 하루를 일찍 났어도 먼저 먹게 사양하렷다.’

하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른 배들을 모조리 불사르며,

 

가지 않으면 곧 오는 이도 없겠지.’

하고, 또 돈 50만 냥을 바닷속에 던지며,

 

바다가 마를 때면 이를 얻을 자 있겠지. 백만 냥이면 이 나라엔 용납할 곳이 없으리니 하물며 이런 작은 섬일까보냐.’

하고, 또 그 중에 글을 아는 자를 불러내어 배에 태우고,

 

이 섬나라에 화근(禍根)을 뽑아 버려야지.’

하고는, 함께 떠나왔다. 온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난하고 하소연할 곳마저 없는 자에게 돈을 나눠 주고도 오히려 10만 냥이 남았기에,

 

이것으로 변씨에게 빌린 것을 갚아야지.’

하고는, 곧 변씨를 찾아 보고서,

 

그대, 날 기억하겠소.’

하고 물었다. 변씨는 놀란 어조로,

 

자네, 얼굴빛이 조금도 전보다 낫지 않으니 만 냥을 잃어버린 모양이지.’

한다. 허생은 깔깔 웃으며,

 

재물로써 얼굴빛을 좋게 꾸미는 것은 그대들이나 할 일이지. 만 냥이 아무리 중한들 어찌 도()를 살찌게 한단 말야.’

하고는, 곧 돈 10만 냥을 변씨에게 주며,

 

내가 한때의 주림을 참지 못해서 글 읽기를 끝내지 못했으니, 그대의 만냥을 부끄러워할 뿐이로세.’

했다. 변씨는 크게 놀라서 일어나 절하며 사양하고는 십분의 일의 이문(利文)만을 받으려 했다. 허생은 그제야 크게 노하여,

 

그대는 어찌 날 장사치로 대우한단 말인가.’

하고는, 소매를 뿌리치고 가 버린다. 변씨는 하는 수 없어 가만히 그 뒤를 따라 밟았다. 그는 남산 밑으로 향하더니 한 오막살이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마침 늙은 할미가 우물 곁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변씨는,

 

저 오막살이는 뉘 집인고.’

하고 물었다. 할미는,

 

허 생원(許生員) 댁이랍니다. 그분이 가난하되 글 읽기를 좋아하더니 어느 날 아침 집을 떠나고는 안 돌아온 지 벌써 다섯 해나 된답니다. 그리고 다만 아내가 홀로 남아서 그가 집 떠나던 날에 제사를 드린답니다.’

한다. 변씨는 그제야 그의 성()이 허()인 줄을 알고 탄식하고 돌아왔다. 그 이튿날 자기의 은()을 다 가지고 가서 그에게 바쳤다. 허생은,

 

내 일찍이 부()하려 했다면 100만 냥을 버리고 10만을 취하겠는가. 나는 이제부터 그대를 믿어 밥을 먹겠으니 그대가 자주 와서 나를 돌봐주게그려. 다만 식구를 헤아려 식량을 대며 몸을 재어서 베를 마련해 준다면 일생에 그것으로 만족할지니 무슨 까닭에 재물로써 나의 마음을 괴롭히겠나.’

하고, 사양한다. 변씨는 백방(百方)으로 허생을 달래었으나 끝내 막무가내였다. 변씨는 이로부터 허생의 의식이 결핍되었을 것을 짐작되는 대로 반드시 손수 날라다 대어 주면, 허생은 역시 흔연(欣然)히 받되 혹시나 분량이 초과되면 곧 기뻐하지 않는 어조로,

 

그대가 어째서 내게 재앙을 끼쳐 주려 하누.’

했다. 그러나 술병을 차고 가면 더욱 기뻐하여 서로 권커니 마시거니 하여 취하고야 말았다. 그럭저럭 몇 해를 지나고 본즉 피차에 정이 날마다 두터워졌다. 어느 날 조용히,

 

다섯 해 동안에 어떻게 백만 금을 벌었습죠.’

하고 물었다. 허생은,

 

이건 가장 알기 쉬운 일일세. 우리 조선(朝鮮)은 배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국내(國內)에 두루 다니지 못하는 까닭으로, 백물(百物)이 이 안에서 생산되어 곧 이 안에서 소비되곤 하지 않나. 대체로 천 냥이란 적은 재물이어서 물건을 마음껏 다 살 수는 없겠지만, 이를 열로 쪼갠다면 백 냥짜리가 열이 될지니 이를 가지면 아무래도 열 가지 물건이야 살 수 있지 않나. 그리고 물건의 무게가 가벼우면 돌려 빼기 쉬운 까닭으로 한 가지 물건이 비록 밑졌다 하더라도 아홉 가지 물건에 이문이 남는 법이니 이는 보통 이문을 내는 길이요, 저 작은 장사치들이 장사하는 방법이지. 그리고 대체로 만 금만 가지면 족히 한 가지 물건은 다 살 수 있으므로 수레에 실린 것이면 수레를 모조리 도매할 것이며, 배에 담긴 것이라면 배를 온통 살 수 있겠고, 한 고을에 가득 찬 것이라면 온 고을을 통틀어서 살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마치 그물에 코가 있어서 물건을 모조리 훑어들임과 같지 않겠나. 그리하여 뭍의 산물(産物) 여러 가지 중에서 어떤 그 하나를 슬그머니 독점해 버린다든지, 물에서 나온 고기들의 여러 가지 중에서 어떤 그 하나를 슬그머니 독점해 버린다든지, 의약(醫藥)의 재료 여러 가지 중에서 어떤 그 하나를 슬그머니 독점해 버린다면, 그 한 가지의 물건은 한 곳에 갇히매 모든 장사치의 손 속이 다 마르는 법이니, 이는 백성을 못살게 하는 방법이야. 뒷세상에 나랏일을 맡은 이들이 행여 나의 이 방법을 쓰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말 걸세.’

한다. 변씨는,

 

애당초 당신은 무엇으로써 내가 만 금을 내어 줄 것을 예측하고 찾아와 빌리기로 했던 거요.’

했다. 허생은,

 

이는 반드시 자네만이 내게 줄 것이 아닐세. 만 금을 지닌 자 치고는 주지 않을 자 없겠지. 내 재주가 족히 백만 금을 벌 수는 있겠으나 다만 운명은 저 하늘에 달려 있는 만큼 내 어찌 예측할 수 있었겠나. 그러므로 나를 능히 쓰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는 반드시 부()에서 더 큰 부를 누릴 테니 이는 곧 하늘이 명하는 바라, 그가 어찌 아니 줄 수 있겠나. 이미 만 금을 얻은 뒤엔 그의 복을 빙자(憑藉)해서 행한 까닭에 움직이면 문득 성공하는 것이니, 만일 내가 사사로이 혼자서 일을 시작했다면 그 성패(成敗)는 역시 알 수 없었겠지.’

한다. 변씨는,

 

지금 사대부(士大夫)들이 앞날 남한(南漢)에서의 치욕을 씻고자 하는데, 이야말로 슬기 있는 선비가 팔뚝을 뽐내고 슬기를 펼 때인 만큼 당신과 같은 재주로 어찌 괴롭게 어둠에 잠겨서 이 세상을 마치려 하시오.’

했다. 허생은,

 

어허, 예로부터 어둠에 잠긴 자가 얼마나 많았던고. 저 조성기(趙聖期)졸수재(拙修齋) 는 적국(敵國)의 사신(使臣)으로 보낼 만하건마는 베잠방이로 늙어 죽었고, 유형원(柳馨遠)반계거사(磻溪居士) 은 넉넉히 군량을 나를 만하였으나 저 해곡(海曲)에서 바장이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나랏일을 보살피는 자들을 가히 알 것이 아니겠는가. 나로 말한다면 장사를 잘하는 자인 만큼 내 돈이 넉넉히 아홉 나라 임금의 머리를 살 수 없음은 아니로되 아까 저 바닷속에 그걸 던지고 온 것은 아무런 쓸 곳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네.’

한다. 변씨는 곧 후유 하며 긴 한숨을 내쉬고 가 버렸다.

변씨는 애초부터 정승(政丞)이완(李浣)과 친했다. 이공(李公)은 때마침 어영 대장(御營大將)에 취임되었다. 그는 일찍이 변씨와 이야기하다가,

 

지금 저 위항(委巷)과 여염(閭閻) 사이에 혹시 기이한 재주가 있어서 커다란 일을 같이 할 만한 자가 있더냐.’

했다. 변씨는 그제야 허생을 소개했다. 이공은 깜짝 놀라며,

 

기특하이,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은 무어라 하던고.’

한다. 변씨는

 

소인이 그와 상종한 지 삼년이나 되었습니다만, 아직껏 그 이름은 몰랐소이다.’

했다. 이공은 또,

 

그 이가 곧 이인(異人)이야. 자네와 함께 그를 찾아가 보세.’

하고는, 밤들어 이공은 수행 자들을 다 물리치고 변씨만을 데리고 걸어서 허생의 집을 찾았다. 변씨는 이공을 말려 그 문밖에 세워 놓고 혼자서 먼저 들어가 허생을 보고 이공이 찾아온 사연을 갖추어 말했다. 허생은 들은 체 만 체 그저 하는 말이,

 

자네가 차고 온 술병이나 빨리 풀게.’

한다. 그리하여 서로 더불어 즐겁게 마셨다. 변씨는 이공이 오랫동안 바깥에 있음을 딱하게 여겨서 자주 말을 하였으나 허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덧 밤은 이미 깊었다. 허생은 그제야,

 

손님 좀 불러 볼까.’

한다. 이공이 들어왔다. 허생은 굳이 앉아서 일어서지 않았다. 이공은 몸둘 곳이 없을 만큼 불안했다. 황급히 국가에서 어진 이를 구하는 뜻을 진술했다. 허생은 손을 저으며,

 

밤은 짧고 말은 기니, 듣기에 몹시 지루하이. 도대체 지금 너의 벼슬은 무에라지.’

한다. 이공은,

 

대장(大將)이랍니다.’

했다. 허생은,

 

그렇다면 네 딴엔 나라의 믿음직한 신하로고. 내 곧 와룡선생(卧龍先生)과 같은 이를 천거할 테니 네가 임금께 여쭈어서 그의 초려(草廬)를 삼고(三顧)하게 할 수 있겠느냐.’

한다. 이공은 머리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이건 어렵사오니, 그 다음의 것을 얻어 듣고자 하옵니다.’

했다. 허생은,

 

나는 아직껏 제이의(第二義 첫째가 아니고 다음 것)란 배우질 못했거든.’

한다. 이공은 굳이 물었다. 허생은,

 

()의 장병(將兵)은 자기네들이 일찍이 조선에 묵은 은의(恩義)가 있다 하여 그의 자손들이 많이 동으로 오지 않았나.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떠돌이 생활에 고독한 홀아비로 고생하고 있다니, 네 능히 조정에 말씀드려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골고루 시집보내고, 김류(金瑬)와 장유(張維) 따위들의 집을 징발해서 살림살이를 차려 줄 수 있겠느냐.’

한다. 이공은 또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그것도 어렵소이다.’

했다. 허생은,

 

이것두 어렵구 저것두 못한다 하니 그러고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야. 가장 쉬운 일 하나 있으니 네가 할 수 있겠느냐.’

한다. 이공은,

 

듣고자 원하옵니다.’

했다. 허생은,

 

대체로 대의(大義)를 온 천하에 외치고자 한다면, 첫째 천하의 호걸을 먼저 사귀어 맺어야 할 것이요, 남의 나라를 치고자 한다면 먼저 간첩(間諜)을 쓰지 않고서는 이룩하지 못하는 법이야. 이제 만주(滿洲 ())가 갑자기 천하를 맡아서 제 아직 중국 사람과는 친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판 아닌가. 그럴 즈음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솔선적(率先的)으로 항복하였은즉 저편에서는 가장 우리를 믿어 줄 만한 사정이 아닌가. 이제 곧 그들에게 청하기를, 우리 자제들을 귀국에 보내어 학문도 배우려니와 벼슬도 하여 옛날 당()()의 고사(故事)를 본받고, 나아가 장사치들의 출입까지도 금하지 말아 달라 하면 그들은 반드시 우리의 친절을 달콤하게 여겨서 환영할 테니 그제야 국내의 자제를 가려 뽑아서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지식층(知識層)은 가서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고, 세민(細民)들은 멀리 강남(江南)에 장사로 스며들어 그들의 모든 허실(虛實)을 엿보며, 그들의 호걸(豪傑)을 체결(締結)하고선 그제야 천하의 일을 꾀함직 하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지 않겠어. 그러고는 임금을 세우되 주씨(朱氏)를 물색(物色)해도 나서지 않는다면 천하의 제후(諸侯)들을 거느려 사람을 하늘에 추천한다면, 우리나라는 잘되면 대국(大國)의 스승 노릇을 할 것이요, 그렇지 못할지라도 백구(伯舅)의 나라는 무난할 게 아냐.’

한다. 이공은 무연(憮然),

 

요즘 사대부(士大夫)들은 모두들 삼가 예법(禮法)을 지키는 판이어서 누가 과감하게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겠습니까.’

했다. 허생은 목소리를 높여,

 

이놈, 소위 사대부란 도대체 어떤 놈들이야. ()()의 땅에 태어나서 제멋대로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찌 앙큼하지 않느냐. 바지나 저고리를 온통 희게만 하니 이는 실로 상인(喪人)의 차림이요, 머리털을 한 데 묶어서 송곳같이 찌는 것은 곧 남만(南蠻)의 방망이 상투에 불과하니, 무엇이 예법(禮法)이니 아니니 하고 뽐낼 게 있으랴. 옛날 번오기(樊於期)는 사사로운 원망을 갚기 위하여 머리 잘리기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靈王)은 자기의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고 호복(胡服) 입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거늘, 이제 너희들은 대명(大明)을 위해서 원수를 갚고자 하면서 오히려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끼며, 또 앞으로 장차 말달리기칼치기창찌르기활 튀기기돌팔매 던지기 등에 종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넓은 소매를 고치지 않고서 제 딴은 이게 예법이라 한단 말이냐. 내가 평생 처음으로 세 가지의 꾀를 가르쳤으되, 너는 그 중 한 가지도 하지 못하면서 네 딴에 신임받는 신하라 하니, 소위 신임 받는 신하가 겨우 이렇단 말이냐. 이런 놈은 베어 버려야 하겠군.’

하고는, 좌우(左右)를 돌아보며 칼을 찾아서 찌르려 했다. 이공은 깜짝 놀라 일어나 뒷들창을 뛰어나와 달음박질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다시 찾아갔으나 허생은 벌써 집을 비우고 어디론지 떠나버렸다.”

 

 

[D-001]허생(許生) : 여러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옥류산관본을 따라서 추록하였다.

[D-002]은행나무 : 흔히들 살구나무로 해석하나 잘못된 것이다.

[D-003]도고(都庫) : 물건을 도거리로 혼자 맡아서 파는 일.

[D-004]해곡(海曲) : 여기서는 전라도 부안(扶安)을 가리킨 말.

[D-005]이완(李浣) : 조선 효종(孝宗) 때 무신. 자는 징지(澄之).

[D-006]어영대장(御營大將) : 어영청(御營廳)의 주장(主將). 종이품(從二品).

[D-007]와룡선생(卧龍先生) :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의 호.

[D-008]김류(金瑬)와 장유(張維) : 이 둘은 모두 조선 인조(仁祖)의 소위 반정공신(反正功臣). 김류의 자는 관옥(冠玉)이요, 장유의 자는 지국(持國). ‘수택본서울대학본대만영인본(臺灣影印本)’에는 이귀(李貴)김류(金瑬)로 되었고, ‘계서본(溪西本)’자연경실본(自然經實本)’박영철본광문회본(光文會本)’김택영본(金澤榮本)’김택영중편본(金澤榮重編本)’주설루본국립도서관본에는 훈척(勳戚) 권귀(權貴)로 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일재본옥류산관본(玉溜山館本)’녹천산관본(綠天山館本)’에 의하였다.

[D-009]빈공과(賓貢科) : ()으로부터 이미 빈공과를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유학생을 받았다.

[D-010]주씨(朱氏) : ()의 황족(皇族).

[D-011]백구(伯舅) : 제후 중에 가장 큰 나라. 또는 황제의 맏외숙의 나라.

[D-012]() : ()와 같은 뜻으로 썼다.

[D-013]옛날 …… 않았고 : 번오기(樊於期)는 전국 시대 때 진()의 장수 이름. 일찍이 망명하여 연()에 갔다가 형가(荊軻)에게 제 머리를 주어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사기(史記) 형가전(荊軻傳)에 나온다.

[D-014]무령왕 …… 않았거늘 : 무령은 전국 때 조()의 임금 조옹(趙雍). 무령은 시호. 사기 조세가(趙世家)에 나온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허생후지(許生後識)

 

 

혹자는 이르기를,

그이는 황명(皇明)의 유민(遺民)이야.”

한다. 숭정(崇禎) 갑진년(甲辰年) 뒤로 명의 사람들이 많이들 동으로 나와 살았으니 허생도 혹시 그런 분이라면 그 성은 반드시 허씨가 아니리라 생각된다. 세속에서 전하는 말이 있으니 다음과 같았다.

조 판서(趙判書) 계원(啓遠)이 일찍이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어 순행차로 청송(靑松)에 이르렀을 때, 길 왼편에 웬 중 둘이 서로 마주 베고 누웠다. 앞선 마졸(馬卒)이 비켜달라 고함을 쳤으나 그들은 피하지를 않고, 채찍으로 갈겨도 일어나지 않기에 여럿이 붙들어 끌어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가 이르러 가마를 멈추고는,

 

어디에 살고 있는 중들이냐.’

하고 물었더니, 두 중은 일어나 앉아 한결 더 뻣뻣한 태도로 눈을 흘기고 한참 동안 있다가 하는 말이,

 

너는 헛된 소리를 치며 출세를 하여 감사의 자리를 얻은 자가 아니냐.’

한다. 조가 중들을 보니 한 명은 붉은 상판이 둥글고, 또 한 명은 검은 상판이 길었으며, 말하는 태가 자못 범상치 않았다. 가마에서 내려 그들과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중은,

 

따르는 자들을 물리치고 나를 따라 오려무나.’

한다. 조는 몇 리를 따라 가노라니 숨은 가빠지고 땀은 자꾸만 흘러 좀 쉬어서 가기를 청했더니 중은 화를 내어,

 

네가 평소에 여러 사람들과 있을 때는 언제나 큰소리를 하면서 몸에는 갑옷을 입고 창을 잡아 선봉(先鋒)을 맡아서 대명(大明)을 위하여 복수와 설치를 하겠다고 떠들더니, 이제 보아 몇 리의 걸음도 못 걸어서 한 자국에 열 번 헐떡이고, 다섯 자국에 세 번을 쉬려고 하니 이러고서 어찌 요()()의 벌판을 맘대로 달릴 수 있겠느냐.’

하고 꾸짖었다. 그리고 어떤 바위 밑까지 닿으니 나무에 기대어서 집을 만들고, 땔나무를 쌓고는 그 위에 가 눕는 것이었다. 조는 목이 몹시 말라 물을 청하였다. 중은,

 

에퀴이, 귀인이니 또 배도 고프겠지.’

하고는, 황정(黃精)으로 만든 떡을 먹이려고 솔잎 가루를 개천 물에 타서 주었다. 조는 이마를 찡그리며 마시지 못한다. 중은 또,

 

요동 벌은 물이 귀하므로 목이 마르면 말 오줌을 마시는 것이 일쑤렷다.’

하며, 크게 호통치고는, 두 중은 마주 부둥켜 안고 엉엉 울면서,

 

손 노야(孫老爺), 손 노야.’

하고 부르더니, 조에게,

 

오삼계(吳三桂)가 운남(雲南)에서 군사를 일으키어 강소(江蘇)와 절강(浙江) 지방이 소란한 것을 네가 아느냐.’

하고 묻는다. 조는,

 

들은 적이 없소이다.’

하였더니, 두 중은 탄식을 하면서,

 

네가 방백(方伯)의 몸으로서 천하에 이런 큰 일이 있건마는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는 함부로 큰소리만 쳐서 벼슬자리를 얻었을 뿐이로고.’

한다. 조는,

 

스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였더니, 중은,

 

물을 필요가 없어. 세상에는 역시 우리를 아는 이가 있을거야. 너는 여기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렷다. 내가 우리 선생님하고 꼭 같이 와서 너에게 이야기를 하련다.’

하고는, 일어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 조금 뒤에 해는 지고 오래 지나도 중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는 밤 늦도록 중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으나 밤은 깊어 푸나무에는 우수수 바람 소리가 나면서 범 싸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는 기겁을 하고 거의 까무러쳤다. 조금 뒤에 여럿이 횃불을 켜들고 감사를 찾아왔다. 그리하여 조는 거기서 낭패를 당하고 골짜기 속을 빠져 나왔다. 이 일이 있은 지 오래 되어도 조는 언제고 마음이 불안하여 가슴속에는 한을 품게 되었다. 뒷날, 조는 이 일을 우암 송 선생(尤菴宋先生)에게 물었더니, 선생은,

 

이는 아마도 명()의 말년 총병관(總兵官) 같아 보이네.’

한다. 조는 또,

 

그는 언제나 저를 깔보고, 네니 또는 너니 하고 부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나라 중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고, 땔나무를 쌓아둔 것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의미함일세.’

한다. 조는 또,

 

울 때면 반드시 손 노야를 찾으니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했더니, 선생은,

 

그는 아마 태학생(太學生) 손승종(孫承宗)을 가리킨 듯싶네. 승종이 일찍이 산해관(山海關)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만큼, 두 중은 아마 손()의 부하인 듯하네.’

하였다.”

 

 

[C-001]허생후지(許生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서 추록하였다.

[C-002] : 또 한 편이 발견되었으므로 구별하기 위해서 표시하였다.

[D-001]숭정(崇禎) 갑진년 : 1664. 실은 청 나라 강희 4년이었으나 조선에서는 오히려 명의 연호인 숭정을 썼다.

[D-002]계원(啓遠) : 조선 효종 때 관리. 자는 자장(子長).

[D-003]() : ‘박영철본에는 조공(趙公)으로 되었으나 김택영(金澤榮)이 추가한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수택본 주설루본을 좇았다. 이 후지(後識) 중 다음에 나오는 것도 이에 따랐다.

[D-004]황정(黃精) : 한약재의 일종. 도사(道士)들이 장생(長生)을 위하여 복용했다 한다.

[D-005]와신상담(臥薪嘗膽) : 전국 때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 나라가 망했음을 한하여 땔나무 위에 누워서 괴로움을 체험하여 광복을 맹세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허생후지(許生後識)

 

 

나의 나이가 20(1756) 되었을 때 봉원사(奉元寺)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떤 손님 하나가 음식을 적게 먹으며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선인(仙人) 되는 법을 익혔다. 그는 정오가 되면 반드시 벽을 기대어 앉아서 약간 눈을 감은 채 용호교(龍虎交)를 시작했다. 그의 나이가 자못 늙었으므로 나는 존경하였다. 그는 가끔 나에게 허생의 이야기와 염시도(廉時道)배시황(裵是晃)완흥군부인(完興君夫人) 등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잇달아 몇 만언(萬言)으로써 며칠 밤을 걸쳐 끊이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거짓스럽고 기이하고 괴상하고 휼황하기 짝이 없는 것들로, 모두 들음직하였다. 그때 그는 스스로 성명을 소개하기를 윤영(尹映)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병자년(1756) 겨울이다. 그 뒤 계사년(1773) 봄에 서쪽으로 구경갔다가 비류강(沸流江)에서 배를 타고서 십이봉(十二峯) 밑까지 이르자, 조그마한 초암 하나가 있었다. 윤영이 홀로 중 한 사람과 이 초암에 붙여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듯이 기뻐하면서 서로 위안의 말을 나누었다. 대체로 열여덟 해를 지났지마는 그의 얼굴은 더 늙지 않았다. 나이 응당 팔십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걸음이 나는 듯하였다. 나는 그에게,

 

허생 이야기 말입니다. 그 중 한두 가지 모순(矛盾)되는 점이 있더군요.”

하고 물었더니, 노인은 곧 풀이해 주는데 역력히 그저께 겪은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는 또,

 

자네, 지난날 창려(昌黎)의 글을 읽더니 의당.”

하고는, 또 뒤를 이어서,

 

자네, 일찍이 허생을 위해서 전()을 쓰려더니 이젠 글이 벌써 이룩되었겠지.”

하기에, 나는 아직 짓지 못했음을 사과하였다. 이야기 할 때 나는,

 

윤 노인(尹老人).”

하고 불렀더니, 노인은,

 

내 성은 신()이요, 윤이 아니거든. 자네 아마 잘못 안 것일세.”

한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는,

 

내 이름은 색()이라우.”

한다. 나는,

 

영감님의 옛 성명은 윤영이 아닙니까. 이제 갑자기 고쳐서 신색이라니 무슨 까닭이십니까.”

하고 따졌더니, 노인은 크게 화를 내면서,

 

자네가 잘못 알고서 남더러 성명을 고쳤다구.”

한다. 나는 다시 따지려 했으나 노인은 더욱 노하여 파란 눈동자가 번뜩일 뿐이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그 노인이 이상한 도술을 지닌 분임을 알았다. 그는 혹시 폐족(廢族)이나 또는 좌도(左道)이단(異端)으로서 남을 피하여 자취를 감추는 무리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문을 닫고 떠날 무렵에도 노인은,

 

허생의 아내 말씀이요, 참 가엾더군요. 그는 마침내 다시 주릴 거요.”

하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 또 광주(廣州)신일사(神一寺)에 한 노인이 있어서 호를 삿갓 이생원이라 하는데 나이는 아흔 살이 넘었으나 힘은 범을 껴잡았으며, 바둑과 장기까지도 잘 두고 가끔 우리나라 옛 일을 이야기할 제 언론이 풍부하여 바람이 불어 오는 듯했다. 남들은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그의 나이와 얼굴 생김을 듣고 보니 윤영(尹映)과 흡사하기에 내가 그를 한번 만나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세상에는 물론 이름을 숨기고 깊이 몸을 간직하여 속세를 유희(遊戲)하는 자가 없지 않은즉 어찌 이 허생에게만 의심할까보냐. 평계(平谿) 국화 밑에서 조금 마신 뒤에 붓을 잡아 쓴다. 연암(燕巖)은 기록하다.

 

 

[C-001]허생후지(許生後識) : 여러 본에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이에서는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으며, 또 여러 본에는 모두 이 편이 없었고, 다만 일재본옥류산장본(玉溜山莊本)’녹천산장본(綠天山莊本)’을 좇아서 추록하였다.

[D-001]용호교(龍虎交)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물과 불의 교합 도인술(導引術)의 하나.

[D-002]염시도(廉時道) : 신광수(申光洙) 석북잡록(石北雜錄)과 이원명(李源命) 동야휘집(東野彙輯)에는 염시도(廉時度)로 되어 있고, 일명씨의 성수총화(醒睡叢話)에는 염희도(廉喜道)로 되어 있다.

[D-003]배시황(裵是晃) :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배시황(裵是熀)으로 되어 있고, 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는 배시황(裵是愰)으로 되어 있다.

[D-004]완흥군부인(完興君夫人) : 완흥군은 인조(仁祖)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삼등의 하나인 이원영(李元榮)인 듯하다.

[D-005]비류강(沸流江) : 평안도 성천(成川)에 있는 물 이름.

[D-006]십이봉(十二峯) : 성천부 동북 30리에 있는 흘골산(紇骨山). 속칭 무산(巫山) 12봉이라 한다.

[D-007]창려(昌黎) : 한유(韓愈)의 봉호.

[D-008] : 원전(原典)에 한 글자가 탈락되었다.

[D-009]평계(平谿) : 연암서당(燕巖書堂) 앞에 있는 시내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차수평어(次修評語)

 

 

차수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는 대체로 규렴(虬髥)으로써 화식(貨殖), 합친 것이었으나 그 중에는 중봉(重峯)의 봉사(封事), 반계(磻溪)의 수록(隨錄), 성호(星湖)의 사설(僿說) 등에서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능히 말하였다. 문장이 더욱 소탕(疎宕)하고 비분(悲憤)하여 압수(鴨水) 이동에 있어서의 유수한 문자이다. 박제가(朴齊家)는 삼가 쓰다.”

 

[C-001]차수평어(次修評語) : 여러 본에는 모두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차수(次修)는 박제가(朴齊家)의 자.

[D-001]규렴(虬髥)화식(貨殖) : () 두광정(杜光庭)이 지은 규렴객전(虬髥客傳)과 한() 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 화식열전(貨殖列傳).

[D-002]중봉(重峯) : 조선 선조(宣祖) 때 유학자 조헌(趙憲)의 호.

[D-003]봉사(封事) : 조헌이 중국에 갔다 돌아와서 임금에게 올린 글.

[D-004]반계(磻溪) : 조선 실학파(實學派) 학자 유형원(柳馨遠)의 호.

[D-005]수록(隨錄) : 유형원이 실학의 이론을 저술한 책.

[D-006]성호(星湖) : 조선 실학파 학자 이익(李瀷)의 호.

[D-007]사설(僿說) : 이익의 저서.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이 유선하여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만들었다.

[D-008]박제가(朴齊家)는 삼가 쓰다 : 어떤 본에는 이를 중존(仲存)의 평어라 하였으나 잘못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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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동란섭필(銅蘭涉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동란섭필(銅蘭涉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동란섭필(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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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동란섭필(銅蘭涉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동란섭필(銅蘭涉筆)

1. 동란섭필서(銅蘭涉筆序)

2.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섭필서(銅蘭涉筆序)

내가 유황포(兪黃圃) 세기(世琦)를 찾았더니, 책상 위에 무늬 있는 돌로 만든 연병(硯屛)이 놓였고, 연병 옆에는 난() 한 포기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구리를 부어서 만든 것인데, 봉 같은 눈이 바람을 맞으며 자줏빛 이삭이 이슬에 젖었으니, 참으로 기이하게 만들었다. 나는 며칠 동안 빌려다가 내가 거처하는 방 동쪽 벽 밑에 놓고, 편액(扁額) 동란재(銅蘭齋)’라 하였다.

 

 

[C-001]동란섭필서(銅蘭涉筆序) : 모든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여기에서는 주설루본에 의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란섭필(銅蘭涉筆)

 

 

건륭(乾隆) 41년 병신(1776), 유구(琉球) 사신이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돌아가기를 청했다. 유구 정사(正使) 이목관(耳目官) 상숭유(尙崇猷)와 도통사(都通事) 모경창(毛景昌)이 사정에 따라 빨리 돌아갈 것을 승낙해 달라고 청한 글에,

 

숭유 등은 왕명을 받들고 건륭 39(1774)에 조공을 하고자 복건(福建) 무창(撫昌)으로부터 병패(兵牌)를 발급 받고, 연로(沿路)에서 일행의 호송(護送)을 받아 작년 12 1일에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은혜로운 분부를 내려 반열에 따라 행례하게 되고, 조하(朝賀)할 때와 원조(元朝)와 명절에는 작은 나라의 말직 관리로서 천안(天顔)을 가까이서 뵈었고, 게다가 상급(賞給)과 식사까지 돌봐 주시어, 숭유 등은 감격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공무를 이미 끝내고 한가히 거처하고 있습니다. 유구는 땅이 해외에 속하여 왕래할 때는 오로지 바람만 믿고 있으니, 이때에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귀국할 시기에 알맞기 때문입니다. 숭유 등이 북경에 올 때는 바로 한겨울이라, 강물이 얼어서 부득이 왕가영(王家營)을 거쳐 바로 육로로 왔습니다. 지금 돌아간다면 때가 바로 중춘(仲春)이라, 바람은 화창하고 땅은 따뜻하여 기정(起程)하기에 알맞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간절히 청하오니, 대인(大人)은 황상의 지극한 뜻을 받들고 멀리서 온 자의 사정을 보살펴, 전례에 비추어 육로로 제령(濟寧 산동성에 있다)까지 가서 배를 타고 돌아가도록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치로 하면 응당 미리 대인께 글로 밝혀야 될 일이오나, 빨리 칙서와 병부(兵部)의 문서를 2월 초순 안으로 내리도록 주청해 주시면, 숭유 등은 소식을 듣는 대로 출발하겠사온 바, 실로 이 은혜는 천추에 잊지 못할 것입니다. 건륭 41 1 24일에 갖추어 올립니다.”

하였는데, 그 서술이 솔직하고 말이 간곡하였다. 이것은 옛 당보(唐報 관보의 일종)에 실린 것인데, 이번에 우리나라 사신이 몇 번 올린 글도 응당 당보에 실려서 천하에 유전(流傳)될 것이다.

유구국이 조공을 하는 규례는 유황(硫黃) 1만 근, 적동(赤銅) 1천 근, 석랍(錫鑞) 3천 근이라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이르기를,

 

() 때의 곽리자고(霍里子高)는 조선 사람이다.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젓다 보니, 한 백수(白首) 광부(狂夫)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찬 채 물을 건너려 하매, 그 아내가 말렸으나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물에 빠져 죽었다. 그 아내는 공후(箜篌)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임은 가람 건너지 마옵소서 하였으나 / 公無渡河

임은 기어이 가람 건너시다가 / 公終渡河

임은 빠져 숨졌으니 / 公淹而死

임이시여 그 어찌할꼬 / 當奈公何

그 소리가 몹시 처절하였는데, 곡조가 끝나자 역시 물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자고는 집에 돌아와 노랫소리를 옮겨서 그의 아내 여옥(麗玉)에게 이야기했더니, 여옥은 매우 슬퍼하면서 공후를 이끌어 그 노래를 본떠서 불렀으니, 이것을 공후인(箜篌引)’이라 한다.”

하였다. 내가 열하에서 태학(太學)에 있을 때 악기를 구경했으나, 소위 공후라는 것은 보지 못했고, 여러 번 사람을 시켜 북경 유리창(琉璃廠)에 가서 보게 하였으나, 이 악기를 얻어 보지 못하여 그 모양을 알지 못하였다.

천비(天妃)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황하(黃河)의 귀신이라 한다. 이제 청()에서 칙령으로 천후(天后)로 봉하였다는 바, 회회(回回) 사람들이 이 교에 많이 들었다고 한다. 천비라는 귀신의 열두 글자의 존호(尊號)는 청의 사전(祀典)에 실려 있다.

우리나라 도포와 갓과 띠는 중국의 중옷과 흡사하다. 그들이 여름에 쓰는 갓을, 혹은 등()으로 만들고, 혹은 종려(棕櫚)로 만들기도 한다. 도포는 특히, 깃이 모가 난 것이 좀 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도포는 모두 검정 공단이거나 문사(紋紗)를 쓰고, 가난한 자는 오히려 수화주(秀花紬)나 야견사(野繭紗)로 도포를 만들어 입는다. 나는 변의(卞醫) 관해(觀海)와 더불어 옥전(玉田) 어느 상점에 들어갔더니, 수십 명이 둘러서서 우리들이 입은 베도포 만든 제도를 자세히 구경하다가, 매우 의아하게 여기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말하기를,

 

저 중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니, 한 사람이 희롱으로 대답하여,

 

사위국(舍衛國) 급고원(給孤園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곳)으로부터 왔겠지.”

한다. 우리들이 조선 사람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도포와 갓을 보고서 걸승(乞僧)들과 비슷하다고 조롱하는 것이다. 대체로 중국의 여자와 승려(僧侶)와 도류(道流)들은 옛날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의관은 모두 신라의 옛 제도를 답습한 것이 많았고, 신라는 처음에는 중국 제도를 본뜬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하므로, 민간에서는 중국의 중옷을 많이 본떠서 1천여 년을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변할 줄을 모르고, 도리어 중국의 승려가 우리의 나라 의관을 본떴다고 말했으니, 어찌 그렇겠는가.

중의 갓이, 등나무 실로 짠 것은 그 빛이 우리나라 초립(草笠)과 같고, 종려나무 실로 짠 것은 우리나라 주립(朱笠)과 같다. 등나무 갓에는 종려나무 실로 무늬를 놓고, 종려나무 갓에는 등나무 실로 무늬를 놓는다. 몽고 사람들도 역시 여름철에 갓을 쓰는데, 가죽으로 만들어 도금(鍍金)을 한 위에 구름 무늬를 그린 것이 많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겨울에도 갓을 쓰고 눈 속에도 부채를 들어, 타국의 치소(嗤笑)를 받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향시(鄕試 지방고시) 규정은 첫 번째 사서(四書)로 글짓는 것 세 편과 성리론(性理論) 한 편을 일주야에 마치고, 두 번째로 경문(經文) 네 편과 배율(排律) 한 편을 하루 동안에 마치고, 세 번째로 책() 다섯 편을 역시 일주야에 마치는데, 모두 천여 자씩 된다. 회시(會試) 규정도 역시 향시와 같고, 전시(殿試)는 단번에 책() 한 편을 써서 역시 일주야에 마치는데, 반드시 글은 만여 자가 되어야 한다. 또 이 격식에 하나도 틀리지 않아야 한림(翰林)에 들어갈 수 있고 전시 뒤에는 또 조고시(朝考試)가 있어 조( 황제의 지시문)( 황제의 교서)( 논문)() 등을 시험보이는데, 시간은 하루로 계산하여 마친다. 향시나 회시에서, 다섯 편 책() 중 세 조()는 옛날 역사에서 글제를 내고, 두 조는 시무(時務)에서 제목을 낸다. 전시는 시무뿐이요, 한 번 향시에 합격하면 이내 거인(擧人)이 되고, 회시 때마다 직접 응시할 수 있다. 비록 회시에 합격을 못하더라도, 10여 년 뒤에는 고을 한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이탁오(李卓吾 ()의 사상문학가 이지(李贄). 탁오는 자())는 머리가 가려워서 공공연하게 머리를 깎았더니, 중국 사람들은 또한 그를 흉성(凶性)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대체로 중국 사람들이 머리를 깎을 징조라고 할 것이다. 지금 중국 사람의 머리 깎는 풍속은 금원 시절에는 없던 풍속이니, 만일 중국이 낳은 진주(眞主) 명 태조(明太祖) 같은 이가 있다면, 건곤(乾坤)을 맑게 숙청할 것인데, 우민(愚民)들이 이런 습속에 젖은 지도 이미 1백여 년이 지나고 보니, 또한 머리를 묶고 모자를 쓰자면 도리어 가렵고 불편하다고 할 자가 없지 않았다.

내가 중국에 들어오는 연로(沿路) 2천여 리 사이에, 때는 바야흐로 여름과 가을의 중간이라, 지독한 더위로 낮에는 언제나 네댓 번씩 말에서 내려 인가에 들어가 쉬어 가곤 했다. 두 길이나 되는 파초(芭蕉), 태호석(太湖石 태호산(太湖産)의 괴석(怪石))이며, 도미(荼蘼 꽃이름)를 올린 시렁이며, 반죽(斑竹)으로 두른 난간들을 왕왕 보았고, 섬돌을 덮은 푸른 대와 주렴에 가득 찬 푸른 오동나무를 도처에서 많이 보았다.

고려 때는 송의 장삿배들이 해마다 자주 예성강(禮成江)에 닿았으며, 백화(百貨)가 몰려들었다. 고려왕은 예절을 차려서 대우했으므로, 당시에 서적들은 훌륭히 갖추어졌고, 중국의 기물(器物)로서 안 들어온 것이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뱃길로 중국 남방과 통상을 하지 못하므로 문헌에는 더구나 캄캄하며, 삼왕(三王)의 일을 몰랐던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강남(江南)과 통하므로, ()의 말년에 고기(古器)와 서화와 서적과 약료(藥料)가 장기(長崎) 지방에 폭주(輻輳)하여, 지금의 겸가당(蒹葭堂) 주인 목씨(木氏) 홍공(弘恭)의 자는 세숙(世肅)인데, 3만 권의 책을 가지고 중국의 명사와도 많은 교제가 있다고 한다.

반선(班禪)이 거처하는 자리는, 앞은 평상이요 뒤는 거울이며, 왼편에는 종을 달았고 오른편에는 옥을 걸었으며, 위에는 물을 소반에 떠 놓았고 아래에는 보도(寶刀)를 걸었는데, 진종일 분향하고 있다 하니 아연히 한 번 웃을 일이다.

지금의 호부 상서(戶部尙書) 화신(和珅)은 황제의 총신(寵臣)으로, 구문제독(九門提督)을 겸해서 귀명(貴名)이 조정에 떨치고 있다. 황제의 탄일(誕日)에 내가 산장(山莊) 문밖에 이르렀더니, 공헌(貢獻)하는 물건들이 문 앞까지 폭주하고 있는데, 모두 누른 보를 덮은 것이 금부처가 아니면 옥그릇들이라 했다. 화신이 실어 온 물건은, 진주로 만든 포도 한 덩굴이 그 속에 있었다고 하며, 금과 은오동(烏銅)으로 빛을 내어 덩굴과 잎을 만들고, 화제(火齊 구슬의 일종)와 슬슬(瑟瑟 구슬의 일종)로 포도알을 만들었는데, 이야말로 초룡주장(艸龍珠帳 극단적인 사치품)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강희황제(康熙皇帝)의 만수절(萬壽節) 3월인데, 강희 계미년(1703) 이날은 구경(九卿)이 모두 고옥(古玉)과 서화를 진상하여 축하하였다. 물건은 모두 내부(內府)로 받아들이는데, 왕사정(王士禎 왕사진의 별명)은 당시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있으면서, 역시 자기 집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왕진경(王晉卿 ()의 관리)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 장권(長卷) 뒷장에 미원장(米元章)의 글씨와 동파(東坡)의 긴 시구가 쓰인 것을 바쳤더니, 강희는 분부하여 말하기를,

 

저번에 가져 온 그림들은 대개 옛 물건이 없고, 이 그림 뒤에 있는 미원장의 글씨가 매우 아름다우니, 특히 받아들이고 사정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것으로 강희 시절의 고옥(古玉)이나 서화를 헌납하는 절차가 미상불 겉치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 이것이 다시 바뀌어 금부처와 진주 포도로 되고 말았은즉, 신하로서 사사로이 황제에게 물건을 선사하는 버릇은 강희가 처음 열어 놓은 것이다. 화신은 방금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으므로, 황제도 역시 말하기를,

 

신은 나를 사랑하는구나. 제 집 일은 잊어버리고 내게만 바치는구나.”

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황제는 장차 반드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사해의 부자로서도 이런 진주 포도가 없었는데 화신은 대체로 어디서 이것을 얻었을까.”

그렇게 되면 화신도 위태로운 처지로다.

경직도(耕織圖)는 송() 때 생겼는데, 오잠령(於潛令)으로 있던 사명(四明) 누도(樓璹 ()의 관리)가 지어서 사릉(思陵 () 고종(高宗)의 능)에 헌납했다. ()마다 헌성 황후(憲成皇后)의 제자(題字)가 있는데, 강희 때에 와서 다시 명령해서 모사하였으니, 단마다 강희의 시가 친필로 씌어 있다. 건륭 연간에는 휘주(徽州)의 지방관이 각 단에 먹판각으로 본떠서 정교하게 새겼다. 먹은 모두 네 갑인데, 한 갑에 먹 열두 개씩을 넣어 값이 은 1 30냥이 된다고 한다. 건륭 신묘 연간(1771)에 그 값이 이렇다고 했는데, 병신년(1776)에는 값이 떨어져 80냥이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나는 몸소 유리창(琉璃廠)에 와서 두 갑을 찾아내었는데 사람의 솜씨로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서문포(徐文圃) ()에게 값을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먹은 절품이 아니요, 또 차서로 보아 먹 두 자루가 빠졌으므로, 오랫동안 팔리지 않았지만, 그대로 값은 60냥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라고 하였다.

서황(徐璜)은 내게 말하기를,

 

장서(藏書)를 좀먹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는, 한식(寒食)날 밀가루에다 납일(臘日)날 받은 눈 녹인 물을 섞어 풀을 쑤어서 장황(裝潢)을 하면 좀이 먹지 못하고, 조협(皀莢)의 가루를 책 속에 넣어 두면 역시 좀이 먹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방법은 송의 왕문헌(王文憲 미상)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양필방(養筆方 붓을 보관하는 방법)으로는 유황(硫黃)을 끓여 붓촉을 펴서 담그는데, 소동파는 황련(黃連 한약재)을 끓인 물에 경분(輕粉 한약재)을 섞고 붓촉을 적시었다가 말려서 간수했다고 합니다. 황산곡(黃山谷)은 천초(川椒)와 황벽(黃蘗 한약재)을 달인 물에 붓을 적시어 보관하면 더욱 좋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방사(方士)의 말에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인데, 바다 가운데 있어서 언제나 신선이 왕래하면서 놀고 사는 데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이런 산이 있다 하고, 우리나라는 역시 금강산을 봉래라 하고, 제주 한라산(漢拏山)을 영주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이라 하고 있다. 황여고(皇輿考)에는 이르기를,

 

천하의 명산이 여덟이 있는데, 그 중에 다섯은 중국에 있어 태산(泰山)화산(華山)소실(少室)수양(首陽)이요, 그 외에 셋은 외지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황여고에는 방사의 말을 따라 세 산이 외지에 있다고 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분분하게 저마다 있고 없는 것을 겨루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천하의 명산이 어찌 여덟에 그칠 것이랴. 중국의 명산이 어찌 다섯에 그칠 것이며, 외지의 명산이 또한 어찌 셋에만 그칠 것이랴.

황여고에는,

 

천하에 큰물 셋이 있어 황하(黃河)장강(長江)과 압록강이 그것인데, 압록강은 역시 외지에 있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의 저() 에 이르기를,

 

장회(長淮)는 남북의 큰 한계가 되는데, 장회 이북은 북조(北條)가 되어 모든 물은 황하를 조종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란 이름을 붙인 물은 없고, 장회 남쪽은 남조(南條)가 되어 모든 물은 대강(大江 양자강(揚子江))을 조종으로 삼고 있으므로 ()’라는 이름을 붙인 물은 없다. 두 가닥 물 이외에 북으로 고려에 있는 물은 혼동강(混同江)압록강이라 하고, 남으로 만조(蠻詔 지명)에 있는 물은 대도하(大渡河)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의 치수 사업 중에 들지 않았다.”

하였으나, 나는 이 말들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과 하()는 맑고 흐린 것으로 구별한 것이니, 내가 압록강을 건널 때 강 넓이는 한강(漢江)보다 넓은 것이 없으나, 물이 맑기는 한강에 비할 만했다. 북경에 이르기까지 무려 물을 10여 차나 건너면서, 때로는 배로 건너고 때로는 발로 건넜다. 물이름은 혼하(混河)요하(遼河)난하(灤河)태자하(太子河)백하(白河) 등인데, 어디나 누른 흙탕물이다. 대체로 들에 흐르는 물은 탁하고, 산골물은 맑다. 압록강의 발원지는 장백산으로서, 국경의 여러 산속을 흘러내리므로 언제든지 물이 맑다. 동팔참(東八站)의 여러 물들은 모두 맑으니, 이것도 이유는 같은 것이다. 나는 비록 장강(長江)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근원이 민아산(岷峨山) 같은 첩첩한 산중에서 발원하여 삼협(三峽)을 뚫고 내려올 것이고 보니, 물이 맑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위 남조(南條)의 물들이 하()라고 이름 붙인 것이 없는 것은, ()의 남쪽은 산도 많고 돌도 많으므로 물이 모두 맑은 까닭이다. 그러니 만조(蠻詔)의 대도하(大渡河)도 필시 평양에서 발원하여 물이 탁하므로 하수라 불렀을 것이다.

양순길(楊循吉 ()의 문학가)의 지이(志異)에는 이르기를,

 

황조(皇朝)의 문신(文臣)으로 가장 높은 품작(品爵)을 받은 자가 몇 명 되지 않는 중에, 위령백(威寧伯) 왕공(王公)이 그 한 사람이다. 공은 궁중 과거 보는 날을 당하여, 글쓰기를 겨우 마치자 갑자기 겨드랑 밑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종이를 불어올려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과거보던 자들은 일제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그 시권(試券)이 점점 높이 구름 속으로 올라가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궁중의 관리들이 이 일을 황제에게 여쭈었더니, 명령을 내려 다른 종이로 다시 써서 올리게 하였고, 뒤에 공은 집헌(執憲)의 벼슬을 거쳐 대사마(大司馬)를 지내고백작(伯爵)에까지 이르렀다.”

하였으니, 이는 곧 왕월(王越)의 사적이다. 우리나라 성종조(成宗朝) 때 경복궁(景福宮) 간의대(簡儀臺) 가에 중국 조정에서 쓰는 시권 한 장이 떨어져 있었는데, 봉함에 왕월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조정은 중국 사절 편에 이 시권을 보냈더니, 천자는 왕월의 사람됨이 남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가상히 여겨서 즉시로 집헌의 직책을 맡겼다. 순길의 기록에는 다만 회오리바람이 시권을 날렸다는 말만 하고 그 시권이 어디에 떨어진 줄은 몰랐으며, 그가 집헌을 거쳐 승진을 한 일은 죄다 말하면서, 실상 우리나라를 거쳐 천자에게 주달되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원시비서(原始秘書 저자미상)에 이르기를,

 

고려의 학문은 기자(箕子)로부터 시작되었고, 일본의 학문은 서복(徐福 진 시황 때의 방사(方士) 서시(徐市). 복은 별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안남(安南)의 학문은, ()의 군현(郡縣) 제도를 세우고 자사(刺史)를 두어 중국의 문화를 펴서 뒷날 오대(五代) 말기에 절도사(節度使) 오창문(吳昌文)의 시기에 와서야 성황을 이루었다. 중국으로부터의 문화가 외지로 퍼져 나간 지 수천 년 사이에, 그들의 학문이란 모두 이적(夷狄)의 풍습을 면하지 못하고 궁하며 고루해서,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하기 부족함은 대개 그 성음(聲音)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묘하고 심오한 이치야 붓 끝으로 가히 전할 수 없으므로 서로 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가위 절실한 이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협음(叶音)의 묘미를 알지 못하므로 유미암(柳眉菴)을 지음(知音)에 능하다고 불렀지만, 그가 언문(諺文)으로 해석한 모시(毛詩)는 협음을 따르지 못하였으므로, ()이 끊어진 곳이 많았다. 예를 들면, ‘왕희지차(王姬之車 시경중의 문구)’란 차() 자를 마() 자 운을 따르지 않고 어() 자 운을 따라서 ()’ 음으로 한 것이 곧 이것이다.

유양잡조(酉陽雜爼 단성식(段成式) ())에 보면,

 

요사이 어떤 바다 사람이 신라로 가는 길에 바람에 밀려서 한 섬 위에 이르니, 산에 가득하게 흑칠(黑漆) 젓가락이 달린 큰 나무가 많았다. 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젓가락들은 모두 칠나무의 꽃이나 수염들이다. 그는 이내 백여 쌍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써 보았더니, 무거워서 쓸 수가 없었다. 뒤에 우연히 이 젓가락으로 찻물을 젓다가 보니, 그대로 녹아 버렸다.”

하였는데, 이 이야기는 허튼 소리만 같다. 우리나라 남쪽 섬 속에 만일 이런 나무가 있었다면, 어찌 듣지 못했을 이치가 있으랴.

허항종(許亢宗 미상) 행정록(行程錄)에는,

 

동주(同州)로부터 40리를 가서 숙주(肅州)에 이르러 동쪽을 바라보면 큰 산이 보이는데, 금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신라산(新羅山)이라 부르고, 이 산중에는 인삼과 백부자(白附子) 같은 약재가 많이 나는데, 그 산이 고구려와 접경해 있다.”

하였으나, 이것은 허튼 소리다. 동주와 숙주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금 나라 사람들이 신라산이라 가리킨 데가 어찌 고구려와 접경이 될 수 있겠는가. 가위 남북의 위치가 뒤바뀐 셈이다.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 작자 미상),

 

세 가지에 다섯 잎이 / 三椏五葉

양지를 등지고 응달로 향했구나 / 背陽向陰

나를 얻고져라 이곳을 오려거든 / 欲來求我

가나무 밑에 찾아와 주려무나 / 椵樹相尋

라고 하였는데, 중국의 문헌에는 이 글을 많이들 싣고 있다. 유자나무 잎은 오동잎과 비슷하면서 매우 넓어서 그늘이 많이 지므로, 인삼이 이런 음지에서 자란다고 한다. 가나무는 곧 우리나라에서 책 판각에 쓰는 이른바 자작나무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천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분묘(墳墓)에 이 나무를 많이 심어서, 청석령(靑石嶺 심양과 산해관 중간에 있다) 같은 데는 숲을 이루고 있었다.

대당신어(大唐新語 () 유숙(劉肅) ())에 보면,

 

이습예(李襲譽 () 관리. 자는 무실(茂實))는 성질이 검소하고 독서를 좋아해서 책을 베낀 것이 수만 권이나 되었는데, 그는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토록 가난하나, 수도에는 나라에서 하사한 밭이 열 이랑이 있어 밥은 먹을 수 있고, 하남(河南)에는 뽕나무 1천 주를 심어 둔 것이 있어 옷은 입을 수 있고,  1만 권을 베껴 두었으니 넉넉히 벼슬자리를 구할 만하니, 너희들은 함께 이 세 가지에 근면한다면, 무엇을 다른 사람들에게 구할 것인가.’ 하였다.”

하였으니, 나 역시 성질이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으나, 평생에 베낀 책을 점검해 보니 불과 10권이 차지 못하고, 연암 골짜기에 손수 심은 뽕나무가 겨우 열 두 포기로, 긴 가지라는 것이 겨우 어깨에 닿을지 말지 하매, 일찍이 슬픈 한탄을 금할 수 없었던 바, 이번에 요동(遼東)을 지나오면서 밭 가에 둘러선 뽕나무숲을 바라보다가, 끝없이 넓은 것을 보고는 또 망연히 정신만 얼떨떨하여졌다.

중원 사람들은 시경의 소서(小序 복상(卜商)이 지었다 한다)는 반드시 없앨 수 없다고 하는데, 완정(阮亭왕사진의 호)의 말은 아주 공정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자(程子 정이(程頤))가 소서를 일러, ‘이것은 반드시 당시 사람들이 자기 나라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의 자취를 밝혀 전하려고 한 것이다.’ 한 것이 곧 이것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이 시편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또 대서(大序 복상이 지었다 한다)는 중니(仲尼)의 저작으로서, 모두 대의를 얻은 것이라 하였는데, 주자는 두 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를 학문의 조종으로 삼으면서도 소서에 이르러서는 의견을 달리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학초망(郝楚望 ()의 학자 학경(郝敬). 초망은 호)이 시 한 편마다 반드시 주자의 주석을 반박한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상숙(常熟) 고대소(顧大韶) 중공(仲恭 고대소의 자())은 책 한 권을 저술하는데 모전(毛傳 () 모형(毛亨) 시전(詩傳))을 주장하되, 모전이 잘 통하지 않는 데가 있어야만 정주(鄭註 한 나라 정현(鄭玄)의 시경 주)를 참고하고, 정의 주가 반드시 통하지 않는 데가 있어야만 주자의 주석을 참고로 하였고, 주의 것이 모두 통하지 않을 때는 여러 학설을 망라해서 자기의 의견과 절충했다. 엄찬(嚴粲)의 시집(詩輯), 주자의 주석이 나온 이후에 특별히 제가(諸家)의 주석보다 우수하다 하나, 대전(大全)이란 것들은 주자의 주석을 부연한 것이므로 아무런 발명도 없으니, 장독 덮개로나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저 중국 사람들이, 주자가 소서를 없앤 것을 배척하는 것은, 이 세상의 한 가지 큰 시론(時論)이 되었다. 주죽타(朱竹坨) 경의고(經義攷)2백 권이다. 에는 주자를 배척하여 목과(木瓜 시경의 편명)에서 제 환공(齊桓公)을 찬미한 것이라든지, 자금(子衿 시경의 편명)에서 학교 폐지한 것을 풍자한 것이라든지, 야유만초(野有蔓草 시경의 편명)와 유왕(幽王)을 풍자하고, 정홀(鄭忽 정 나라의 공자(公子))을 풍자한 모든 시는 경전(經傳)을 깊이 상고하여 모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인데, 주자는 모두 이것을 반대하여 자기의 의사대로 함부로 결정해서 소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그러나, 그는 실상 소서를 많이 이용하면서, 유독 정()()의 시만은 정성(鄭聲)을 버리라(논어에 나오는 구절)는 한 마디 말에 근거하여 모두 음탕한 시의 부류에 남겨 두었으니, 소리는 음탕하지만 시는 음탕하지 않다고 한 말은 서하(西河 모기령의 호) 모씨(毛氏 모기령(毛奇齡))의 학설로서, 대체로 소서를 두둔하는 자의 학설은 모두 이와 같았다. 말로는 이 주석이 주자의 친필이 아니요, 반드시 그의 문인의 손에서 나왔으리라 하지만, 이는 문인이란 명색을 붙여 마음놓고 공격하자는 심산인 것이다. 송사(宋史) 유림전(儒林傳)’ 중에 왕백(王栢)이 말하기를,

 

시경3백 편은 어찌 모두 공자의 손으로만 정착된 것이랴. 추린 시 중에, 혹은 민간에서 부박한 입에 떠돌아다니는 시들 중에서 한()의 선비들이 이것을 주워 모아 보태어 편찬했을 것이다.”

했으니, 이 말이 심히 이치에 합당하다. 그런즉 중국에서 지지(支持)하는 소서 중에 어찌 한()의 선비들이 부회(傅會)한 것이 없겠는가.

내가 일찍이 초 한림(初翰林) 팽령(彭齡)과 고 태사(高太史) 역생(棫生)과 함께 단가루(段家樓)에서 술을 마시면서 분분히 소서를 가지고 질문을 했다. 내가 큰 소리로,

 

시경 3백 편은 당시의 여항(閭巷)에 떠돌아다니는 풍요(風謠)에 불과할 것입니다. 즐겁고 아프고 희로(喜怒)와 애락(哀樂)이 있을 때에는 이런 소리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니, 후충(候虫)과 철새[時鳥]가 스스로 울고 읊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 풍요를 모아서 글자와 구절을 맞추어 학교에 벌여놓고 악기에 맞춘 것이 소위 열국(列國)의 풍요로서 ()’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생긴 것입니다. 작자의 성명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소서에는 시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시의 저작자가 있다고 하며 이것이 누구누구의 작품이라고 하여 마치 후세의 전당시(全唐詩)와 같이 말하나, 이것은 틀림없이 억측으로서 초중경(焦仲卿)의 아내가 지었다는 것은 엉뚱한 말입니다. 고시(古詩) 19는 언제 작가의 성명이 있었습니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잠잠하였으나 겉으로 보건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대개 소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소자유(蘇子由 ()의 문학가 소철(蘇轍). 자유는 자())로부터 시작하였고, 소서를 공격하기는 정협제(鄭夾際 ()의 문학가 정초(鄭樵). 협제는 호)로부터 시작하였고, 주자의 주석을 공박하기는 마단림(馬端臨 ()의 학자)모기령(毛奇齡)주이준(朱彝尊) 등에게 이르러서 극심했으며, 근세에 와서는 아주 시의(時義)로 되어 버렸다.

오군(吳郡) 풍시가(馮時可 ()의 학자) 봉창속록(篷牕續錄),

 

취두선(聚頭扇)은 곧 겹쳐 개는 부채로서, 영락(永樂) 연간에 중국에 공물로 들어가 국내에 많이 유행되었다. 동파(東坡)는 말하기를, ‘고려의 백송선(白松扇)은 펴면 넓이가 한 자가 넘고 접으면 불과 두 손가락 정도밖에 안 된다 하였으니, 왜인들이 만든 검정대 뼈에 금색으로 면을 칠한 것이 곧 이것이다. 내가 북경에 닿으니 외국 도인(道人) 이마두(利瑪竇)가 나에게 왜선(倭扇) 넉 자루를 보냈는데, 합치면 손가락 하나의 부피도 못 되는데 매우 가볍고 바람이 잘 나고 또 든든했다.’ 하였다.”

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중국에서 처음에는 이런 부채가 없었고, 모두 단선(團扇)으로서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미선(尾扇)이었던 것이다. 대개 옛 그림에 보이는 파초잎오동잎흰깃 같은 것으로 만든 것이 이것이다. 우리나라 기물로서 일본의 것을 모방한 것이 많이 있으니, 접는 부채도 고려는 일본에서 배웠고 중국은 고려에서 배워 갔는데, 중국에서 큰 부채를 고려선(高麗扇)’이라 부르면서 만든 품이 질박하고 조선 종이에 기름을 먹여 가는 서화를 그린 것을 자못 진기롭게 여기었다.

구라파 철현금(鐵絃琴)은 우리나라에서는 서양금(西洋琴)’이라 부르고, 서양 사람들은 천금(天琴)’이라 부르고, 중국인들은 번금(番琴)’ 또는 천금이라 부른다. 이 악기가 어느 때 우리나라에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향토 곡조를 여기에 맞추어 풀어 내기는 홍덕보(洪德保)로부터 시작되었다. 건륭 임진년(1772) 6 18일에, 내가 홍덕보의 집에 앉았을 때 유시(酉時 하오 6)쯤 되어 그가 이 악기 해득하는 것을 나는 목견했다. 대개 홍은 음악 감상에 예민해 보였고, 또 이것이 비록 작은 예술이지만 벌써 그것이 맨 처음으로 된 발견이므로, 나는 그 일시(日時)를 자세히 기록했던 것이다. 그것이 전()한 지 이제 9년 사이에 넓게 퍼져서 금사(琴師)로서 이를 탈 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오군 풍시가(馮時可)가 처음 북경에 와서 이마두로부터 이것을 얻어 가졌는데, 구리 철사로 줄을 만들어 손으로 타지 않고 작은 나무쪽으로 건드리면 그 소리가 한층 더 맑았다고 했으며, 또 자명종(自鳴鍾)은 겨우 작은 향합만 한데 정밀한 쇠로 만들어서 하루 열두 시간에 열두 번을 치니 역시 이상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모두 봉창속록(篷牕續錄)에 실려 있었다. 대개 이 두 가지 기계는 명()의 만력 연간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했다고 한다. 내가 있는 산중의 양금(洋琴)은 등에 오음서기(五音舒記)라고 낙인(烙印)이 찍혔는데, 만든 것이 매우 정밀하였으므로, 이번 중국에 온 김에 남의 부탁을 위하여 이것을 구해 보고자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했으나, 소위 오음서기는 끝내 얻지 못했다.

단청기(丹靑記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왕유(王維 ()의 문학가)가 기왕(岐王 미상)을 위해서 큰 돌을 한 개 그렸는데, 붓 가는 대로 휘두르고 보니 아주 천연(天然)의 운치가 있는지라, 기왕 보물로 여겨서, 때로 처마 밑에 홀로 앉아 주시(注視)하면서 산중 생각을 하노라니, 유연(悠然)히 넘치는 운치가 있었다. 그 뒤 몇 해를 지나니 그림에 더욱 정채(精彩)가 돌았는데, 어느 날 아침 폭풍우가 몰아치고 뇌성 벽력이 함께 일어나면서 갑자기 돌이 날려 가고 집도 함께 무너졌다. 웬 영문인지 모르다가 뒤에 보니, 그림 축()에 빈 종이만 남았으므로 이에 그림에 있던 돌이 날아간 것을 알았을 뿐이다. 헌종(憲宗) 때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큰 풍우가 일고 신숭산(神嵩山 개성(開城)의 송악) 위에 웬 이상한 돌 하나가 날아와 떨어졌는데, ‘왕유라는 글자가 박혀 있으므로 중국서 날아온 돌인 줄을 알고 감히 그대로 머물러 둘 수 없어서 사신을 보내어 가져다 바칩니다 했다.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왕유의 수적(手蹟)을 가져다가 비교해 보았더니 터럭만큼도 틀림이 없었다. 황제는 비로소 왕유의 그림이 신묘한 것을 알고 국내에 두루 그의 그림을 찾아 궁중에 간직하고 땅바닥에 닭과 개의 피를 뿌려 돌이 날아가지 않도록 예방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 제해(齊諧 괴담(怪談)을 수록한 글)의 기록들이 허탄하고 틀린 것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고려로 부르는 것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고구려는 당 고종(唐高宗) 영휘(永徽) 연간에 망했은즉, 허종 때에 어떻게 사신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인가. 또 왕씨의 고려는 송악산(松岳山) 밑에 도읍했고, 송악을 신숭(神嵩)’이라 불렀는데, 만약 이것이 왕씨의 고려였다면, 고려 태조가 나라를 일으킨 것은 주량(朱梁 주전충(朱全忠)이 세운 후량(後梁)) 우정(友貞 후량의 말제(末帝))의 정명(貞明) 4(918)이니, 헌종보다 1백여 년 뒤 연대이고, 왕유는 또 당 명황(唐明皇) 때 사람인즉 헌종보다 1백여 년 앞섰으니, 그 돌이 날아갔다는 이야기는 본래 황탄하고 기록도 또 심히 틀렸으니, 이는 필시 왕월(王越)의 시권 이야기를 희미하게 본떠 만든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나라가 동파(東坡)에게는 가장 잘못 보였던 모양이다. 고려가 송()에게 서사(書史)를 구하면, 동파는 한()의 동평왕(東平王 동평헌왕(東平憲王))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상소를 올려 준열하게 배척했다. 그가 항주(杭州)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동파는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의 연호)’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았다 하고 받았으니, 이것은 동파의 묘지(墓誌)에 실렸다.

원우(元祐) 5(1090) 2 17일에 왕백호(王伯虎) ()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密院)예방(禮房)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 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

하였다.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 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

하였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동파의 지림(志林)에 실려 있는데, 자첨(子瞻 소식의 자)은 당시 고려를 불러 사귀는 것을 실계(失計)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러 가지 기술(記述)한 것을 보건대 모두 국가를 위한 깊은 걱정이다. 그러나 당시 송()의 사대부들은 유달리 고려가 중국에 향한 정성이 적심(赤心)에서 나온 것을 몰라 주었다. ()와 금()이 견제가 되어 있으므로 송을 섬기지 못한 것이 고려의 역대 조정으로서는 지극히 유감스러웠던 것이다. 송 나라 학자들의 서적을 얻으면 분향을 하면서 공손히 읽는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한갓 중국의 사대부들로부터 천대를 받은 것은 족히 한심스러운 일이다. 나는 왕혹정(王鵠汀)과 더불어 극히 변명했던 것이다.

명산기(名山記 저자 미상)에 말하기를,

 

강원도 금강산 속에 소[] 하나가 있으니 관음담(觀音潭)’이라 한다. 소 가의 언덕 이름은 수건애(手巾崖)’라 하고 돌 복판에는 오목하게 방아확 같은 데가 있으니 세속에서 전하는 말에는 관음보살이 빨래하던 곳이라 한다.”

하였다.

숭정(崇禎) 정축년(1637) 11 11일 정조사(正朝使)건주(建州)와 더불어 화해를 한 뒤이다. 한형길(韓亨吉 조선 선조(宣祖) 때의 관리)과 서장관(書狀官) 이후양(李後陽 미상)의 일행이 사절로 갔을 때, 정례의 진상품 외에 별공(別貢)으로 홍시(紅柿) 30바리를 가져다 바쳤더니, 칙사는 또 다시 2만 개를 더 바치라고 독책한다. 당시의 칙사는 영아아대(英俄兒代 만인(滿人))마복탑(馬福塔)대운증(戴雲曾 미상) 등으로 연로에서 말을 달려 사냥을 하면서 고을 기생들의 수청을 강요하여 조금이라도 여의치 못할 때는 매질을 하고 야료를 낭자히 했고, 왜인들도 역시 말 3백 필과 매 3백 마리와 황새 3백 마리를 구하였다. 이번 걸음에 가지고 온 방물(方物)이란 종이와 자리에 불과했으나, 중국은 우리가 유숙하는 비용을 치르는 것만 하더라도 언제나 10여만 냥이 든다고 하니, 청 나라 초기에 비한다면 가위 도리어 중국에 폐를 끼치는 셈이 된다.

서위(徐渭 명 나라 문학가) 노사(路史)에 이르기를,

 

당 나라 시절에 고려는 송연묵(松煙墨 소나무 연기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진상했는데, 이것은 송연(松煙)에다가 사슴의 아교를 섞어 만든 먹으로서 유미(隃麋)’라고 불렀다.”

하였는데, 왕완정(王阮亭)의 고증에 의하면, ()의 고을 이름으로서 유미라는 데가 있는데, 그 땅에서 석묵(石墨)이 나기는 하나 고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을 뿐, 당 나라 시절에는 애초에 고려가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유미에서 난다는 석묵은 필시 요사이 쓰고 있는 석탄일 것이다. 한 나라 시절에는 석탄을 땔 줄은 모르고 석묵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의 만력 9(1581)에 서양 사람 이마두(利瑪竇)가 중국에 들어와 북경에 머무른 지 29년에 중국 사람으로서는 한 사람도 그를 믿는 자가 없었고, 다만 그의 역법(曆法)을 주장한 자는 서광계(徐光啓 청 나라 과학자) 한 사람뿐으로 드디어 그는 만세력(萬歲曆)의 조종(祖宗)으로 되었은즉 만력(萬曆)’이란 연호는 이마두가 중국에 들어올 조짐이었던가.

만력 임진년(1592)에 신종(神宗) 천자가 군사를 크게 내어 동쪽으로 우리나라 난리를 구했는데, 이 당시 내부(內府)의 은을 허비한 것이 8백만 냥이라 한다.

신라 시대 토산(土産)으로 대화어아금(大花魚牙錦)소화어아금(小花魚牙錦)조하금(朝霞錦)백첩포(白㲲布)가 있었다.

왕원미(王元美 왕세정(王世貞). 원미는 자())는 조선 종이를 일컬어 주었고 서문장(徐文長 서위(徐渭). 문장은 자)은 조선 종이로서 돈 같이 두꺼운 것을 심히 사랑했고, 종백경(鍾伯敬 명 나라 문학가 종성(鍾惺). 백경은 자)은 일찍이 조선 종이에 당() 유신허(劉愼虛 당 나라 문학가)의 시 14수를 썼다.

중국에서는 진사(進士) 급제(及第) 출신으로 일갑(一甲)이 세 사람인데, 첫째가 장원(壯元)’이요, 다음이 방안(榜眼)’이며, 또 다음은 탐화(探花)’라 하여, 장원은 즉시로 한림원(翰林院) 수찬(修撰)의 벼슬을 주고, 방안과 탐화는 한림원 편수(編修)를 준다. 이갑(二甲) 890명인데 그 중 첫째는 전려(傳臚)’라 하여 역시 한림의 벼슬을 주고, 삼갑(三甲)은 백여 명 되는데 이갑과 함께 모두 조고(朝考 황제가 친림하여 보이는 고시)에 응시할 수 있는 바, 혹은 한림 후보도 되고, 혹은 육부(六部)의 주사(主事)도 되고, 혹은 지현(知縣)도 되고, 여기에 참여 못하면 진사로 되돌아간다. 우리나라에서 지벌(地閥)을 따져서 3()에 벼슬을 나누는 규정에는 비할 바 아니다.

옹정(雍正) 임자년(1732)에 역관(譯官) 최수성(崔壽誠)이 고교보(高橋堡)를 지나다가 오광빈(吳光霦)을 만났다고 한다. 광빈은 일찍이 오삼계(吳三桂)의 위조 사령을 받고 이 때문에 귀양살이를 하다가, 그대로 눌러 이곳에 살아 왔는데 당시에 나이 87세로 귀가 먹고 정신이 혼몽하여 아무런 수작도 못하고, 당시의 문적(文籍)들을 내어 보냈는데 그 첫째의 것은,

 

천하도초토병마대원수주왕(天下都招討兵馬大元帥周王 오삼계(吳三桂)의 손자 오세번(吳世璠))은 관직을 올려 임명한다. 우주가 혼몽하여 긴 밤중에 사는 것 같은데, 우러러 천의(天意)를 받들어 의병을 일으켜 백성을 구하고자 하니, 반드시 슬기롭고 용맹 있는 인재를 얻어 함께 승평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여기에 오광빈을 얻게 되어 금오시위유격(金吾侍衛遊擊)에 임명함으로써 우수한 인재를 임명하는 본을 보인다. 이 때문에 문건을 출급하는 데 해당 관원은 여기에 따라 일을 맡을 것이다. 너는 이 임무를 맡고 반드시 더욱 분발하고 노력할 것이요, 그 반열에 처하여 공훈을 많이 세워 등용한 책임을 담당하라. 만일 특수한 공로를 세울 때는 자연 특별한 관직과 포상이 있을 것이니 너는 부디 배나 노력할 것이다. 이 문건을 유격 오광빈에게도 준용할 것이다. () 4(1681) 5 27.”

이라 하였고, 그 둘째의 것은,

 

병부(兵部)의 관리를 승임시키는 데 관하여 내리노라. 홍화(洪化 ()의 연호) 원년(1678) 7 16, 병과(兵科)에 뽑힌 이소보(李少保)와 금오위좌장군(金吾衛左將軍) 호제(胡題) 등을 등용함에 관한 문건에 의하면, 이번에 알게 된 시위유격(侍衛遊擊) 오광빈은 사람됨이 노련하여 응당 참장(參將) 직함을 주고, 국내의 일을 맡길 터인 바, 오광빈의 임명장에 의한 비준 문서를 보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협의에 의하여 임용하기로 하였는데 병부에서는 이에 따라 준수할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문건을 갖추어 보내니, 해당 관리는 해당 부서의 지시에 따라 직무를 맡길 것이다. 이상 임명을 받은 오광빈은 이대로 시행하라. 홍화 원년 7 21.”

이라 하였고, 또 하나의 문서는 호부(戶部)에서 관원을 증가하기 위하여 신청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광빈에게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임명한 문건이다. 여기에도 홍화 2 7 26이라 하였고 인장과 수결이 갖추어졌다 하니, 대개 오삼계는 군대를 일으킨 지 4년 만에 연호를 고치고 스스로 구석선문(九錫禪文)을 지은 것은 이극용(李克用 후당(後唐)을 창립한 임금)으로서도 못한 바로서, 그는 죽음을 맹세하고 다음날 당()의 사직(社稷)을 회복하기를 약속했던 것이다. 대명(大明)의 유민(遺民)들이 날마다 의기(義旗)를 바라고 있는데 천하에 누가 주가(周家) 홍화라는 연호를 알까보냐. 오광빈은 오히려 이 문건을 가장(家藏)의 고적으로 삼고자 하였으니, 그의 뜻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요, 또한 당시의 정치가 관대했다는 것도 짐작되는 일이다.

흡독석(吸毒石 독기를 빨아내는 돌)은 크기가 대추만 하고 검푸른 빛깔이다. 소서양(小西洋)에 있는 일종의 독사(毒死) 머리 속에 든 돌인데, 이 돌은 능히 사갈(蛇蝎)과 지네 같은 여러 가지 독충들에게 물린 상처를 낫게 하고, 발치와 일체의 독종과 악창을 고친다. 이 돌을 종기 부위에 놓으면 종기 부위에 붙어 떨어지지 않다가 독기를 다 빨아내면 돌이 저절로 떨어지고 종기는 당장에 낫는다 한다. 그러나 반드시 사람의 젖[] 한 종지를 준비했다가 떨어진 돌을 빨리 집어넣어 젖빛같이 약간 노란빛이 날 때까지 담가 둔 후에 맑은 물에 잘 씻고 닦아서 다음 번에 쓸 수 있도록 한다. 만일 너무 오랫동안 젖에 담가 두면 돌의 독이 모두 빠져서 오랜 뒤에는 영험이 없어진다 한다.

산해관(山海關)에 가기 10여 리 전에 강녀묘(姜女廟)가 있다. 새로 행궁(行宮)을 세웠고, 망부석(望夫石) 옆에는 조그만 정자가 있어 진의정(振衣亭)’이라 부른다. ()의 시절에 범칠랑(范七郞)이 장성(長城)을 쌓다가 육나산(六螺山) 아래서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허()(), 이름은 맹강(孟姜)으로, 섬시 동관(同官) 사람이다. 혼자 수천 리를 가서 칠랑의 유해를 간수해 가지고 이곳을 지나면서 쉬었다고 하여 후세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 한다. 강녀(姜女)는 마침내 유해를 지고 바다로 들어가 죽었는데, 며칠이 못 되어 바다 가운데서 바윗돌 하나가 솟아나 조수가 밀려 와도 물에 잠기지 않았다 한다. 망부석이란 세 글자는 태원(太原) 백휘(白暉)의 글씨요, ‘작여시관(作如是觀)’ 넉 자는 내각수찬(內閣修撰) 하정좌(賀廷佐)의 글씨요, 이반(李蟠)이 지은 사기(祠記)는 고병(高昺)의 글씨다. 사당 뒤에는 비석 네 개가 섰는데, 하나는 장간(張揀)의 글로서 황명 만력 갑오년(1594)에 세운 것이요, 하나는 장시현(張時顯)의 글로서 만력 병신년(1596)에 세웠고, 하나는 정관이(程觀頤)의 글로서 강희 기유년(1669)에 세웠고, 하나는 고제대(高齊垈)의 글로서 강희 무진년(1688)에 세운 것이다. 당의 시절 왕건(王建)이 읊은 망부석은 무창(武昌)에 있는데, 혹자는 이르기를,

 

진의 시절에는 섬()이라 부르지 않고 낭()이란 이름도 없었으며, ()이라는 성을 보아서 제()의 계집일 것이다.”

라고 한다.

왕민호(王民皥)는 청의 건국에서 한 임금 제도를 찬미하여,

 

밖으로는 삼왕(三王)이요, 안으로는 이교(二敎)라 하였으니, 이는 대저 석가와 노자(老子)의 학설에 유교를 섞어서 빛깔을 낸 것입니다.”

한다. 옹정(雍正) 시대에 황제에게 비밀히 청하는 자가 있어, 중들을 모두 배필을 정해 주어 환속(還俗)하도록 하면 직속 군대 백만은 얻을 것이라 했으므로, 옹정은 조서를 내려 통유(洞諭)하기를,

 

불교와 노교는 심성(心性)의 근원과, 선악의 감응(感應), 이기(理氣)의 근본에 두고 있다. 예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윤상(倫常)에 근본을 두고 사업의 공적에 표준하였으니, 이 두 가지 교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의 구역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이 혹 밝은 교화에 방해될까 두려워서 밝은 임금과 어진 천자는 이것을 소홀히 하여 멀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사람의 성품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것을 없앴다는 일은 듣지 못했다. 요새 나에게 비밀히 불교를 혹독하게 비방하면서 중들을 모두 환속시키자고 청하는 자가 있으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비록 한 지아비 한 지어미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는 바이다. 이제 그들의 사정도 들어보지 않고 속인으로 만든다면,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자가 수백만 명이 될 뿐만 아니라, 대체로 중들은 곧 환과(鰥寡)와 고독(孤獨)으로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할 자들이다. 소위 이학(理學)을 한다는 자들은 석가와 노자를 욕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이학자로 자처하고 있으나, 이 습관은 어느 경전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무릇 이학이란 궁행 실천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만일 헛되이 석가와 노자를 비방하는 것으로써 이학을 삼는다면, 이는 천박한 생각일 것이다. 국가가 이학을 떠받드는 뜻은 본래 이같은 뜻이 아니니, 만일 요망한 말로써 사람들을 의혹시키고 작간과 범죄를 하는 자가 모두 중이라 한다면, 그들이 자기 교에 실천 궁행이 없음이지 기율을 범하고 법을 무시하는 행동이 어찌 이 교의 책임이라 하겠느냐. 또 요사이 중죄를 범하고 극형을 받은 자가 하필 승려와 도사(道士)들뿐이리요. 법이 공평하지 못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고, 주장하는 이론이 공평하지 못하면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유시(諭示)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것은 민상(閔相) 응수(應洙 조선의 정치가. 자는 성보(聲甫)) 계축연행록(癸丑燕行錄) 속에 실려 있는데, 왕씨의 말과 서로 부합된다.

건륭 40년 을미년(1775) 11 20일에, 내각은 아래와 같은 황제의 유시를 받들었다.

 

충정(忠貞)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것은 풍속과 교화를 세우고 신하의 절개를 고무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조정이 한 번 바뀌어 전조(前朝)의 충신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은 신하들의 기록이 드물었을 뿐 아니라 이름도 바뀐 것이 있다. 오직 우리 세조 장황제(世祖章皇帝)는 나라를 세우고, 먼저 숭정 말년에 순국한 신하들 중에 태학사 범경문(范景文 ()의 명신)  20여 명에게 특히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전조의 충신들을 생각하는 그의 성스러운 도량을 우러러 볼 때 실로 만고에 뻗칠 만한 광전(曠典)이라 할 것이다. 당시는 겨우 전문(傳聞)에 근거하고 아뢰는 사건마저 두루 알아볼 여가가 없었으므로, 이런 표창을 받은 자의 수효가 이에 불과했으나, 조금 지나서 남은 행적들이 드러나고 또 다시 판정을 거쳐야 할 것은 지금의 명사(明史)에 실린 것을 보더라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가법(史可法)이 외로운 충성을 맹세하고, 망해가는 판국을 붙들려다가 마침내 몸을 바친 일이라든가, 또 유종주(劉宗周 () 학자)황도주(黃道周 () 학자) 등은 조정에 서면 기탄없는 바른말로 뭇 아첨배와 마주 대항하고, 어려운 시기를 만나 나라의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바치니 넉넉히 일대의 훌륭한 인물이 될 만하므로, 이런 인물들은 응당 표창하고 찬양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혹 고성(孤城)을 사수하기도 하고, 전진에서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포로로 붙들려 참살을 당하는 등 죽음을 초개처럼 여긴 자도 있었다. 당시는 임금이 거느린 군사가 진격함에 따라 저절로 범령을 엄하게 펴서 귀순자와 반역자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이 지난 뒤에 평탄한 심정으로 이런 인물들을 의논한다면, 그들은 모두 질풍(疾風)에 경초(勁草)처럼 부끄러울 바 없는 인물로서, 제 몸을 희생하여 명절(名節)을 온전히 했으니, 그 심정인즉 역시 가긍한 것이다. 비록 복왕(福王)은 창졸간에 한쪽 구석에서 조정을 만들었고, 당왕(唐王)과 계왕(桂王 영력제(永曆帝))이 또 유리(流離)하여 자취를 감추다가 나라를 위하여 다시 성공은 못했다 하더라도 당시 여러 사람들은 갖은 고생을 겪어가면서 함께 따라 목숨을 버리면서도 의리를 취하여 능히 각각 충성을 다했으니, 어찌 이런 일을 인멸시키고 드러내지 않을 것이랴. 마땅히 사서(史書)를 상고하여 모두 시호를 표창해야 할 것이다. 혹 포의(布衣)의 출신으로서 성명도 잘 모를 자들도 강개(慷慨)한 이가 없지 않겠지만, 이들에게 일일이 시호를 주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그 역시 저마다 고향에다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들어 위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우리 태조의 실록(實錄)을 공손히 읽어보니, 살이호(薩爾滸) 전쟁에서 명의 양호(楊鎬) 등은 20만 대군을 끌어 모아 사로(四路)로 나누어 우리 흥경(興京)을 침범하자, 우리 태조와 태종(太宗)과 패륵(貝勒) 대신들은 정병 수천을 거느리고 그들의 군대를 반 이상 섬멸해서, 당시 명의 양장(良將) 유정(劉綎)두송(杜松)양호 등은 모두 진중에서 죽었다. 근일에, 나는 이 사적을 들어 글 한 편을 지어 그들의 충렬을 찬양하여 역사에 전하도록 하였다. 오직 이같이 국가를 창건하는 시기에 있어서 우리 편에 반항하여 선봉으로 오는 자는 응당 용서 없이 무찔러 죽이는 것이 마땅했지만 칼날과 창끝을 무서워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여 싸우는 태도는 적군이라도 가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명이 망할 무렵 손승종(孫承宗 ()의 충신)노상승(盧象昇 ()의 충신) 등은 우리 군대에 저항하다가 몸이 들녘에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고, 주우길(周遇吉)채무덕(蔡懋德)손전정(孫傳廷) 등은 목을 내놓고 몸을 짓밟혀 가면서 적을 막다가, 몸은 죽었어도 그들의 늠름한 태도는 오히려 생기가 있었다. 오로지 명의 정치가 해이했던 까닭으로 만력 시대로부터 숭정에 이르기까지 간신(奸臣)이 꼬리를 물고 환관이 횡행하여, 흑백이 뒤섞이고 충신과 양신은 흔적이 없게 되어 언제나 이를 갈면서 불평을 하게 되었다. 복왕 때에 이르러 혹은 시호를 추봉(追封)한 자가 있으나, 이것도 처리가 공평치 못하여 종잡을 수 없었다. 나는 오직 공평 무사하게 그들을 전형하여 무릇 명의 말년에 절개를 완전히 지킨 신하들로 이미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자는 한결같이 우대하고 표창하여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전겸익(錢謙益)과 같이 스스로 깨끗한 듯이 큰소리를 치다가 부끄러운 빛도 없이 항복을 해 왔거나, 김보(金堡)굴대균(屈大均)등과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요행히 살아 보고자 거짓 중 노릇을 한 자들은 모두 창자도 없고 수치도 모르는 자들이니, 이런 무리들이 과연 절개에 죽을 자이겠는가. 그들은 오늘 내가 표정(表旌)한 이름 속에도 들어 있는 듯하니, 이에 이미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언어와 문자를 빌려 스스로 살 것을 찾는 시늉을 엄폐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반드시 그들의 진퇴의 절차가 근거 없는 것을 명백히 배척할 것이며, 어둠 속에 표창을 받은 것을 삭탈하여 하나의 상이나 벌을 가장 명백히 밝혀, 천하 만세로 하여금 사리에 비추어 선악을 밝힘으로써 강상(綱常)을 세우고, 이로써 또 잘한 것을 표창하는 나의 뜻을 알게 하여 다오. 시호를 받을 여러 사람들은 아울 명사와 집람(輯覽 저자 미상)에 실린 바를 두루 조사하되 세조 때의 전례에 비추고, 본래의 관직에 따라 시호를 줄 것이다. 시호의 결정을 어떻게 분별하여 처리할 것인가는 태학사와 구경(九卿)경당(京堂)한림첨사(詹事)과도(科道) 등을 모아 협의하여 보고할 것이다. 아울러 여기서 중외(中外)에 이를 통유(通諭)하노니 알아서 시행하라.”

하였다. 이 조서에 보면, 우리나라 삼학사(三學士)와 청음(淸陰)의 사적이 응당 청 태종(淸太宗)의 실록에 실렸을 터인데 아무런 기록도 없음은 무슨 까닭일까. 대체로 외국의 신하로서 중국을 위하여 춘추의 대의를 지킨 일은 천고에 없었던 것으로, 건륭은 천하 만대를 위하여 스스로 공정을 표방하면서 다만 우리나라의 여러 현인(賢人)들에 대하여는 조금도 보인 데가 없으니, 그 일이 외국에 관계되었다 하여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인가. 중국 인사들이 왕왕 청음에 관하여 언급을 했다는 것도 다만 몇 편의 보잘것없는 시구로 기록하는 데 그쳤을 뿐이요, 그의 큰 절의(節義)가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툴 만한 것은 하나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와의 강화(講和)가 실상 관외(關外)에 있었을 때 일이고 보니 중국 사람들로서는 아직 이 사적을 자세히 알지 못한 까닭일까. 그렇지 않으면 수답(酬答)하기를 꺼려서 짐짓 모른 체 함인가. 또는 일부러 감구집(感舊集)에 왕어양(王漁洋) 사정(士禎)이 지은 감구집 중에는 청음 선생의 시가 실렸고, 그 소서(小序)에는 그의 관함과 이름과 자가 기록되었다. 말 못할 뜻을 잠시 표시한 것일까. 내 매양 청음 두 글자를 들을 때마다 미상불 머리털이 움직이고 맥이 뛰어 비록 아무도 모르게 목 속에서 배회하는 말을 입 밖으로 감히 내지 못하지만, 거의 왕혹정(王鵠汀)이 말한 바와 같이 체증이 생기려 하고 있으니 어찌할 것이냐. 어찌할 것이냐.

요동(遼東)에 이르기 전에 동쪽으로 왕상령(王祥嶺)이란 고개가 있고, 고개를 넘어 10여 리를 가면 냉정(冷井)이 있는데, 사행(使行)이 있을 때는 장막을 치고 조반을 먹는 곳이다. 돌로 쌓은 우물이 아니요, 길가에 솟는 샘으로, 물 줄기는 확을 넘고 있다. 물 맛은 달고 맑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다. 우리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흘러 넘치게 솟다가도 조선 사람이 떠나면 즉시 말라 버린다고 하니, 대개 요동은 본래 조선 땅이므로 기운이 서로 감응해서 그렇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난리를 피할 복지(福地)가 열 곳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나라의 명승(名僧)무학(無學)과 방사(方士) 남사고(南師古)가 잡은 곳이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복지란 임금이 파천한 곳만 한 데가 없을 것이니, 비록 포의(布衣)와 미천한 선비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피난처가 될 것이다. 임금을 모시고 그 좌우를 떠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갑자기 병란(兵亂)을 당하면 사녀(士女)가 물 끓듯이 매양 심산 절협을 찾아 바위 구멍에 몸을 감추니, 그 슬기롭지 못한 것이 심하기도 하다. 양식이 이미 떨어지면 반드시 먼저 주려 죽을 것이니 이것이 그 어리석은 것의 하나요, 군사도 못보고 범이나 짐승에게 해를 입을 것이니 그 어리석음의 둘이요, 외간 소식이 끊어져서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니 그 어리석음의 셋이요, 풀과 나무와 안개 이슬에 먼저 병이 들 터이니 그 어리석음의 넷이요, 만일 토적(土賊)을 만나면 반드시 약한 놈이 먹힐 터이니 그 어리석음의 다섯이라. 세상이 불행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고 본즉, 의주(義州)와 남한(南漢)은 모두 복지가 되는 것이다. 당시에 피난 간 사람들은 이 두 곳이 절지(絶地) 고성(孤城)이라 했으나, 나는 왕령(王靈)이 있는 곳에는 천지가 힘을 같이하고 백신(百神)이 보호할 터이니 나라가 있으면 제 몸도 있을 것이요, 나라가 망하면 제 몸도 망할 것이다. 몸을 멀리 초망(草莽) 속에 숨기고 하찮은 충성을 지킨다고 구렁 속에 사는 것은 차라리 살아서 충신이 되고, 죽어서 외로운 귀신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일찍이 송계기행(松溪記行)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지은 것이다. 을 보니,

 

청병(淸兵)이 송산(松山)에 진격하여 포위했을 때 우리나라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봉림저(鳳林邸)에 있을 적인데, 소현세자(昭顯世子 효종의 형)를 모시고 함께 청의 진중에 있었다. 막차(幕次)가 지세로 인해서 불편하여 겨우 딴 곳으로 옮겼던 바, 이날 밤 영원총병(寧遠摠兵) 오삼계(吳三桂)가 기병(騎兵)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에운 것을 뚫고 도망하려던 곳이 바로 처음에 군막을 쳤던 곳이다.”

라고 하였으니, 당시에 군막을 옮긴 것은 하늘이 돕고 귀신이 보살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1백 명이 넘는 종인(從人)들이 만일 왕령(王靈)에 의탁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그들의 습격에 유린당하는 변을 면했을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불행히 아홉 번 죽을 고비를 당할지라도 임금을 모시고 있는 자리가 곧 복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열하에 있을 때에, 반선(班禪)이 거처하는 금전(金殿) 용마루 위에 금으로 만든 한 쌍의 누런 용이 말처럼 일어서서 있었다. 길이는 모두 두 길이 넘는데, 밑에서 보는 것이 이럴 적에야 그 길이와 높이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양이 보통 그림에 보는 신룡(神龍)과는 같지 않았다. 양용수(楊用修 () 학자 양신(楊愼). 용수는 자) 단연록(丹鉛錄)에는,

 

용은 새끼 아홉 마리를 낳는데, 용이 되지 못하면 첫째는 비희(贔屭)인데 모양이 거북 같이 생겨 무거운 짐을 잘 지키는데, 지금의 비석 바탕 돌로 거북 모양을 만든 것이 이것이요, 둘째는 치문(鴟吻)인데 성질이 바라보기를 좋아하므로 지금 지붕 모퉁이에 짐승 모양으로 만든 것이요, 셋째는 포뢰(蒲牢)인데 울기를 잘하므로 지금의 종()에 매는 끈이 되었고, 넷째는 폐간(狴犴)인데 모양이 범과 비슷하므로 옥문 앞에 세웠고, 다섯째는 도철(饕餮)인데 성질이 먹기를 잘하므로 솥뚜껑에 붙이고, 여섯째는 패하()인데 성질이 물을 좋아하므로 다리 기둥 위에 세웠고, 일곱째는 애자(睚眦)인데 성질이 죽이는 것을 좋아하므로 칼자루에 새겼고, 여덟째는 금태(金蛻)인데 모양이 사자 같고 성질이 연기와 불을 좋아하므로 향로에 세우고, 아홉째는 초도(椒圖)인데 모양이 소라 같이 생기고 성질이 문을 닫고 잘 숨으므로 문간에 세웠다.”

라고 하였다.

또 금전(金殿) 사각에 있는, 금으로 만든 황룡(黃龍)은 용마루 위에 있는 것과 모양이 또 달랐다. 치미(鴟尾), 치문(鴟吻)이니 하는 말도 전하는 기록이 모두 다르다. 대개 중국에서는 궁전을 이룩할 때는 반드시 치미와 치문을 먼저 만들어서 그 집의 성하고 허물어질 것을 점치게 되므로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대류총귀(對類總龜 저자 미상)에는 말하기를,

 

용이 새끼 아홉 마리를 낳는데, 하나는 조풍(嘲風)으로 모험을 좋아하므로 전각 귀퉁이에 세우고, 하나는 치문(蚩吻)으로 삼키기를 좋아하므로 전각 용마루에 세운다.”

하였고, 박물지일편(博物志逸篇 저자 미상)에는 말하기를,

 

이문(螭吻)은 모양이 짐승 같은데 바라보기를 좋아하므로 전각 모에 세우고, 만전()은 형상이 용과 비슷한데 성질이 풍우를 좋아하므로 지붕 용마루에 쓴다.”

하였으니, 단연록(丹鉛錄) 이야기와 모두 다르다. 한 무제(漢武帝)의 백량전(柏梁殿)에 불이 났는데, 무당이 말하기를,

 

이름을 규()라 하는 바닷고기가 있어 그 꼬리가 치()와 비슷한데 물결을 치면 비가 내리므로 그 형상을 따라 만들어 전각 용마루 위에 얹어 두면 화재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하였고, 또 건장궁(建章宮)에 불이 나서 무당은 예방으로 치미(鴟尾) 형상을 전각 용마루에 설치할 것을 아뢰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배 꼬리를 치라고 하는데 치미라는 치인 것 같기도 하다.  박물지일편(博物志逸篇)에는,

 

비희(贔屭)는 성질이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하므로 비석을 지게 하였고, 이호(螭虎)는 모양이 용 같이 생기고 성질이 문채를 좋아하므로 비문 위에 세운다.”

하였고,  대류총귀 에는 말하기를,

 

용의 아홉 마리 새끼 중에 하나는 패하(霸夏)라 하여 무거운 것을 좋아하므로 비석 바탕으로 하였고, 비희는 글을 좋아하므로 비문의 양쪽에 새긴다.”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역시 다 각각 다르니, 용 새끼의 명호(名號)와 성정(性情)을 무엇으로 알 것인가. 옛날 이야기의 부회(附會)함이 이런 것이 많았다.

복희씨(伏羲氏)로부터 지금의 건륭 황제까지 정통(正統)을 이은 천자가 모두 2 50명이다. 만일 여후(呂后 ()의 여치(呂雉))와 무후(武后 () 무조(武曌))와 정통이 아닌 천자 조조(曹操)의 위(), 손권(孫權)의 오()와 남북조(南北朝)로부터 오대(五代)까지 통계(通計)한다면 모두 85명이 될 것이요, 참위(僭僞)한 제왕 후예(后羿)로부터 주()의 홍화 황제(洪化皇帝)인 오삼계(吳三桂)까지 친다면 도합 2 70명이요, 춘추(春秋) 때 임금으로 불린 것이 4 90여 명이다.

산동(山東) 등 여러 곳을 순행하면서 농사를 관리 감독하고 겸하여 군무를 정리하던 도찰원우부도어사(都察院右副都御史)()은 황제의 거룩한 덕이 갖추어 지극하시고 하늘의 어진 마음이 가지런히 높으시어 상서로운 기린(麒麟)이 나서 아름다운 응보(應報)가 밝게 비치고 있는 일을 삼가 보고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옹정 10년 임자년(1732) 6 13일 포정사(布政使) 정선보(鄭禪寶)가 조주거야현지현(曺州鉅野縣知縣) 요개춘(寥開春)의 보고에 근거하여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옹정 10 6월 초 5일 신성보(新城保)지보(地保) 축만년(祝萬年) 등이 말하기를, ‘이 보에 속한 이가장(李家庄) 이은(李恩)의 집에서는 금년 6월 초 5일 진시(辰時)에 소가 기린을 낳았는데, 금빛이 싸고 돌아 진시(辰時)와 사시(巳時) 두 시()를 지낸 뒤에는 원근의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모두들 기이하다고 말하면서 반드시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했습니다. 그들은 즉시 기린이 난 곳까지 직접 가서 삼가 자세히 검사해 보니, 노루 몸뚱이에 소 꼬리였습니다. 몸뚱이에는 모두 갑옷 같은 것을 뒤집어 썼는데 붉은 털로 기운 것같이 얼룩거렸고, 광채가 찬란하여 실로 성대(聖代)의 상서로운 징조로 보이기에 상부에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본직(本職)이 즉시 사람을 거야(鉅野 산동성에 있다)로 보내어 더 자세히 조사했던바, 그들의 말에 의하면, 기린의 몸뚱이는 길이가 1 8촌이요, 높이가 1 6촌이요, 노루 몸뚱이에 소 꼬리로 머리에는 고깃덩이로 된 뿔이 났고, 이마에는 곱슬 털이 있으며, 눈은 수정 같고 이마는 백옥 같으며, 온 몸에는 비늘 갑옷이 되어 모두가 푸른 빛을 띠었다 합니다. 비늘들은 자줏빛 털로 기운 것 같고, 등은 검정 빛으로서 세 마디로 되었는데, 가운데 마디는 털이 모두 꼿꼿이 섰고, 앞마디는 털이 앞으로 향해고, 뒷마디는 털이 모두 뒤로 향했다 합니다. 가랑이와 배와 발굽과 다리에는 흰 털이 났고, 꼬리 길이는 5 5푼인데 꼬리 끝에는 검정 털 4개가 났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려서 본직에게 보내 왔으므로 본직이 삼가 열람해 보니 실로 즐겁기 짝이 없었습니다. 즉시 공손히 향안(香案)을 설치하고 대궐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려 경축하기를,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도덕이 청녕(淸寧)에 맞으시고, 공훈이 화육(化育)에 참여하여 하늘의 뜻을 본받아 정교를 세워서 육부(六府)가 다스리고 삼사(三事)가 조화되었으며, 표준을 세워서 백성에게 펴 주었고, 오전(五典 오륜(五倫))이 도타워지자 구주(九疇)가 펴졌습니다. 그리하여 빛나는 별이 제 궤도에 따르고 상서로운 하늘에는 쌍구슬(해와 달)이 반짝이고, 맑은 이슬이 달에 맺혀서 수놓인 듯한 이 지구에서 방울방울 듣고 있습니다. 황하(黃河)는 조( 산동성에 있는 지명)( 산동성에 있는 지명) 사이에 맑았으니 그 물결이 비단 진( 섬서성)( 감숙성)에서만 맑은 것이 아니요, 상서 구름은 수( 산동성에 있는 수명(水名))( 산동성에 있는 수명)의 가에 나타났으니 어찌 전( 운남성)( 귀주성)에서만 빛났으리까. 이제 거야의 시골에서 다시 상서로운 기린이 나타났는데, 사슴의 몸뚱이에 소의 꼬리로써 이상한 꼴을 지녔고, 외 뿔에 둥근 발은 모두 괴이한 물건이라 하였습니다. 본직(本職)은 삼가 서경(書經) 춘추(春秋)를 상고하여 보니 복건(服虔 후한(後漢)의 학자)의 주()에 이르기를, ‘왕위에 있는 이가 보살핌이 밝고 예법이 다달았을 때에 기린이 나타난다.’ 하였고,  예위(禮緯 저자 미상)의 두위의(斗威儀 예위의 일종)에는 이르기를, ‘임금이 정치와 송사가 없으면 기린이 교외(郊外)에 나타난다.’ 하였고 효경(孝經)의 원신계(援神契 효경의 편명)에 이르기를, ‘임금의 덕이 새와 짐승에게까지 이르면 기린이 나타난다.’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헌원(軒轅 황제(黃帝))의 조정에는 기린이 놀았다는 기록이 있고, 성왕(成王)강왕(康王)의 때에 인지(麟趾 시경의 편명)를 노래하였습니다. 이 신물(神物)이 탄생함을 보아서 더욱이 상서로운 증험을 보았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황제께옵서 그 공경이 사표(四表)에 빛나기를 마치 일월이 내려 쬐는 것과 같으며, 정치가 팔굉(八紘)에 두루 미쳐서 마치 건곤이 널리 덮였음과 같았습니다. 하물며, 이 동성(東省)은 땅이 수도와 멀지 않아서 교화가 더욱 빠르고 길이 강구(康衢)에 접하여 은혜를 입음이 가장 흡족하였으니 이로서도 기린의 상서를 신빙할 수 있겠습니다. 오색의 찬란한 빛은 문명이 크게 열릴 것을 미리 점쳤으며, 사령(四靈 기린거북)의 으뜸이었으니, 다가오는 복록을 예측할 수 있겠습니다. 본직은 외람되이 봉강(封疆)의 책임을 맡아서 이런 성미(盛美)한 일을 만났사오니 하늘로부터 내린 명령에서 완전한 복록이 이르렀음을 알았습니다. 원컨대 승항(升恒)의 찬송을 본받아서 배무(拜舞)의 정성을 펴려 하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이 일을 사신(史臣)에게 내리시어 중외(中外)에 선포하고, 교수(郊藪)에 일러서 천추에 하악(河岳)의 기이한 일을 표하며, 도서(圖書)에 실어서 만고에 규루(奎婁)의 별을 빛내옵소서. 황제께옵서는 친히 보아서 시행하시옵기를 빌면서 이 글을 갖추오니 귀부(貴部)에 자문하시어 대조해 보시옵기를 바랍니다.”

하였으니, 이는 예부(禮部)에 바친 글이다. 이 글을 보고한 것은 산동 독무(督撫)()이란 성을 가진 자이다. 이 글은 우리나라 과려(科儷 과거문(科擧文)의 병려체(騈儷體)) 문체에 비교하면 소활하나 화려하고 풍성한 맛이 있어 저절로 고색(古色)이 났다. 윤형산(尹亨山)이 일찍이 말하기를,

 

산동에는 편벽되이 기린이 잘 나서 강희 때는 네 마리를 모두 소가 낳았고, 용정 때는 다섯 마리를 낳았는데 소가 두 마리를 낳고 돼지가 세 마리를 낳았으며, 금상(今上) 성조(聖朝)에는 다섯 마리를 낳았는데, 사천(泗川)복건(福建)절강(浙江)하남(河南)에서 두 해 동안에 모두 소가 낳았고, 한 마리는 직예(直隸) 양향(良鄕)에서 돼지가 낳았답니다.”

하였다.

순치(順治) 병신년(1656) 10 16일에, 네 공주(公主)가 각각 막북(漠北)으로 돌아갔는데, 그들은 모두 몽고왕의 처인 까닭이다. 길은 옥하관(玉河館) 앞을 거쳐 갔는데, 몽고왕은 부하들을 데리고 약대와 말을 장하게 차리고 달리는데, 공주도 역시 말을 타고 갔다. 번인(番人)과 한인들이 그 뒤를 따라 가는 것은 모두 멀리 전송을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인평대군(麟坪大君)이 본 일이라 한다.

건륭 41년 병신년(1776) 1 25일에 내각이 황제의 유시를 받들었는데, 그 글에는,

 

전에 명의 말년에 순절(殉節)한 여러 신하들이 저마다 각각 그 임금을 위해서 바친 의리와 충렬이 가상할 만하다 하여 시호를 내리기 위해 이를 조사해 밝힘이 마땅하므로 즉시 태학사(太學士)와 구경(九卿)경당(京堂)한림(翰林)첨사(詹事)과도(科道)들에게 명하여 의논을 모아 주문(奏聞)해서 충량(忠良)한 자를 표창함으로써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본받게 하였던 것이다. 다시 생각건대 건문(建文 ()의 혜제(惠帝). 건문은 연호)이 쫓겨 날 때 그 신하들로서 절개를 지켜 죽은 자로 사책(史冊)에 실린 이는 매우 많았는데, 당시의 영락(永樂 () 성조(成祖). 영락은 연호)은 지위가 본래 번신(藩臣)으로서 모반하여 음모로 나라를 빼앗았으니,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당연히 의리로 보아 함께 한 하늘 밑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제태(齊泰)나 황자징(黃子澄)은 경솔할 뿐 아니라 꾀가 적었고, 방효유(方孝孺)는 식견이 오괴하여 어린 임금을 돕기에 부족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임금을 떠받들고 역적을 베어 없애고자 한 심정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으나 오히려 군사를 모집하여 끝내 저항하면서 목숨을 바치고 일족이 희생되었으되 백절불굴한 그들의 정성은 세상에 교훈할 자료로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 경청(景淸)이나 철현(鐵鉉) 등은 혹은 강개 비분하게 자기 몸을 바쳤고, 혹은 잠자코 의리를 지켜, 비록 죽는 방법은 달랐으나 지조와 절개는 늠름하여 모두 대의를 밝혔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이다. 심지어 동호(東湖)의 초부(樵夫)나 솥 땜장이까지도 비록 성명은 없어져 드러나지 못했지만 그 심정들은 모두 족히 가상하다 할 것이다. 특히영락은 성질이 잔학하여 자기 맘대로 음형(淫刑)을 써서 참혹한 도륙(屠戮)을 마치 외 덩굴을 끊듯이 단번에 죽여 없앴으니 사람의 심리라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역사를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미상불 분하고 한스러움을 참지 못했다. 명의 중엽(中葉)에 이르러 비록 조금 법을 늦추었으나 사정에 따르고 곡휘(曲諱)하여 끝내 드러내어 표창을 못했으므로 충신과 의사들의 옳은 행실은 오랫동안 나타내지 못했으니 실로 민망하고 불쌍한 일이다. 무릇 전조의 혁명(革命) 시기에 우리에게 반항하여 온 자까지도 그들의 충성을 생각하여 특히 표창을 해주었는데, 더구나 건문 시대의 여러 신하들은 불행히 내란을 당하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인()을 이루고 의()를 취했거늘 어찌 이를 그대로 사라지도록 묻어 없앨 것인가. 이들에게도 마땅히 모두 시호를 하사하여 어둠을 헤치고 광명을 밝혀야 할 것이다. 공도(公道)를 바로잡아 처리할 것은 전에 지시한 대로 태학사에게 맡겨 한꺼번에 자세한 조사와 의논을 합쳐서 나에게 보고함으로써 충정(忠貞)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나의 지극한 뜻에 맞도록 하라.”

하였다.

황명(皇明) 숭정 11(1638)에 우리나라 장수 이시영(李時英)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건주(建州)로 들어갔더니 청인은 시영을 협박하여 앞장을 세우고 명의 도독(都督) 조대수(祖大壽)와 송산(松山)에서 싸우게 했다. 토병(土兵)들은 모두 정밀한 총을 가지고 있어 조대수의 군사를 많이 죽였는데, 조대수는 군중에 하령하여 청병(淸兵)의 머리 하나에는 은 5십 냥을 주고, 조선 군사의 머리 하나에는 은 1백 냥을 준다 하였다. 조선 군사 중에 이사룡(李士龍)은 성주(星州) 사람으로서 홀로 차마 총에 탄환을 재지 못하고 무릇 세 번을 쏘아도 아무도 상하지 않았던 바 이는 본국의 심정을 밝히려 함인데 청인이 이것을 깨닫고 드디어사룡을 베어 조리를 돌렸다. 조대수의 군사는 이것을 바라보고 모두 크게 울었고, 대수는 이에 깃발 위에 큰 글씨로 조선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이라 써서 시영의 군사를 선동하였다. 지금 성주 옥천(玉川) 위에 충렬사(忠烈祠)가 있으니, 곧 이사룡을 제사 지내는 곳이다. 진실로 황제로 하여금 사룡의 이름을 듣게 했다면 특별히 시호를 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나는 송산을 지나면서 글을 지어 사룡의 혼을 조상하였다.

전목재(錢牧齋) 겸익(謙益)의 자는 수지(受之). 그의 신분은 반은 중국이요 반은 오랑캐이며, 그의 문장은 반은 유교요 반은 불교이다. 그의 명절(名節)은 땅을 쓸다시피 되어 마침내는 부랑자(浮浪子)의 칭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위로 스승되는 손고양승종(孫高陽承宗 고양은 손승종이 살던 지명(地名)이다)에게 부끄러울 것이요, 아래로는 그의 제자 구 유수 식사(瞿留守式耜 유수는 벼슬 이름)에게 부끄러울 것이요, 중간으로는 그의 아내 하동군(河東君) 유여시(柳如是)에게 부끄러울 것이다. 수지(受之)가 늙어 죽을 때는 하동군이 아직도 젊었는데, 여러 악소년들이 수지를 질투하던 나머지 유를 욕보이고자 했더니, 유는 자살해 버렸다. 지금 건륭의 조서를 보면 수지를 배척해 말하기를,

 

스스로 청류(淸流)인 듯이 큰소리를 치다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항복을 하고서 거짓 중 노릇을 하여 창자도 없고 수치도 몰랐다.”

하였으니, 가위 전겸익으로서도 부끄러워 죽을 일이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수지의 이 같은 실행(失行)을 모르고 다만 그의 유학(有學 전겸익의 시문집) 초학(初學 전겸익의 시문집) 등 책만을 보고는 그를 미상불 애석히 여길 뿐 아니라, 그의 시문(詩文)을 초출하여 문 승상(文丞相 문천상(文天祥). 승상은 벼슬)이나 사첩산(謝疊山 사방득(謝枋得). 첩산은 호)의 글 아래에 많이 늘어놓기도 한다. 근년에는 자못 그의 책판을 없애고 간직하기를 금하는 영이 있다는 말도 들었지마는 그러나 과거 공부를 하는 속생(俗生)으로서는 반드시 다 알지 못할 것이므로 여기 자세히 기록해 둔다.

소동파가 고려를 미워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당시에 고려는 오로지 거란을 섬기고 있었는데, 특히 중국을 사모할 뜻으로 때로는 송의 조정을 찾았다. 중국 선비들은 고려의 충정(衷情)을 알뜰히 보아 주지 않고 혹은 조정을 정탐하지나 않는가 의심한 것은 전혀 괴이할 것이 없다. 또 그 조공하는 길이 명주(明州)로부터 하륙(下陸)하여 반드시 유신(儒臣)으로 관반(館伴)이 있어, 그 막대한 비용은 요의 사신에 다음 가고 있다. 국가와의 외교도 아니요 속번(屬藩)도 아닌데, 강한 하()를 접대하는 것보다 더 많으니 당시 사대부들이 무익(無益)하다고 말한 것도 마땅한 일이다. 지금 우리 조정이 황명(皇明)에 충순(忠順)한 지도 이미 3백 년이나 되어 일심으로 중국을 사모하기는 고려보다 더 했건만, 동림당(東林黨)의 무리들은 문득 조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목재는 동림당의 괴수인즉 우리나라를 야비한 오랑캐라고 보는 것을 청론(淸論)으로 삼았으니 분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 있으랴. 더구나 우리나라 시문(詩文)에 이르러서는 말살(抹殺)하기가 일쑤여서 그의 황화집(皇華集)()에 보면,

 

본조(本朝)의 시종(侍從)으로 있던 신하가 칙사가 되어 고려에 갈 때는 으레 황화집을 편찬한다. 이 책은 가정(嘉靖) 18년 기해년(1539)에 황천(皇天) 상제(上帝)에게 태호(泰號)를 올리고 황조(皇祖)황고(皇考)에게 성호(聖號)를 올릴 때 홍산(鴻山) 화수찬(華修撰) ()이 황제의 조서를 반포하면서 지은 것이다. 조선의 문체(文體)는 평연(平衍)한데 여러 사림(詞林)들이 깎고 고치는 것을 아끼지 않고 먼 곳 사람들을 회유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보배롭고 고운 시구는 극히 적었다. 그 중 배신(陪臣)의 편집(篇什)을 보면 글자 두 자가 일곱 자의 뜻을 포함하였으니, 예를 들면,

나라 안에 창도 없이 한 사람만 앉아 있네 / 國內旡戈坐一人

와 같은 글귀는 그 나라의 소위 동파의 체()일 것이니, 제공(諸公)은 아예 그들과 더불어 창수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나라 문체가 진실로 그의 말과 같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어찌 헐뜯기를 이 같이 할 수가 있었으랴. 나는 짐짓 이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목재가 우리나라를 훼방하는 것이 동파와도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증(錢曾)의 자는 준옥(遵玉)이니, 목재의 족손(族孫)이다. 서건학(徐乾學 청 나라 학자)과 함께 경전 해석을 편집하여 당시 오매촌(吳梅村 () 학자 오위업(吳僞業). 매촌은 자)공지록(龔芝麓 () 학자 공정자(龔鼎孶). 지록은 호)과 함께 삼대가(三大家)로 불렸다. 모두 명조의 현달한 관리로서 역시 지금의 청조에 벼슬한 자들이다. 그가 조선에 칙사로 나갈 유홍훈(劉鴻訓)에게 준 목재의 글을 주석한 것을 보면 말이 실상이 아닌 것이 많고, 또 이 제독(李提督 ()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원조한 일에는 더욱 잘못된 기록이 많으니 가히 개탄할 일이다.

지금 황제가 전겸익을 배척한 조서에서 말하기를,

 

오히려 문자(文字)를 빌려 구차하게 살아남은 허물을 덮어 가리려고 하였다.”

한 것은 그의 간사한 심정을 깊이 조감한 것이니, 고려판(高麗板) 유문(柳文 유종원(柳宗元)의 글)의 발()을 쓴 것 같은 유가 그것이다. 그 발에는,

 

고려 판각(板刻) () 유선생집(柳先生集 유종원의 시문집(詩文集))은 견지(繭紙)가 탄탄하게 정치하였으며 자획이 가늘고 빳빳해서 중국에서도 역시 좋은 책이라 할 것이다. 배신(陪臣) 남수문(南秀文 조선 때의 학자)의 발문 앞뒤에는 공손히 쓰기를, ‘정통(正統) 무오년(1438) 여름과 정통 4(1439) 겨울 11월이라.’ 하였으니, 정삭(正朔)을 높여서 천하를 통일하고 있는 뜻이 내왕하는 편지에도 숙연히 나타나 있었다. 대개 기자의 풍교(風敎)가 그대로 남아 있고 명의 문화가 만맥(蠻貊)에게까지 베풀어진 것은 실로 당의 시절에 비교할 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기울어지다시피 명이 망한 뒤에 고려는 동문(同文)의 꿈을 짓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나는 이 책을 어루만지면서 산연(潸然)히 눈물을 흘렸다.”

하였다. 배신(陪臣)으로서 교서를 받들어 책을 편찬한 자는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최만리(崔萬里), 직제학(直提學) 김빈(金鑌), 박사(博士) 이영서(李永瑞),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조수(趙須) 등이요, 남수문의 응교(應敎) 직함을 썼는데, 조산대부 집현전응교 예문관응교지제교 경연검토관 겸춘추관기주관(朝散大夫集賢殿應敎藝文館應敎之製敎經筵檢討官兼春秋館記注官)이라 하였다. 이제 아울러 써서 이로써 조선의 고사(故事)를 보존하려 한다. 조선 사람들이 매양 동문몽(同文夢)이란 한 마디 말을 고실(故實)로 삼아서 과거 때에 시제(詩題)로 쓰고 있으니 더럽기 심하고 심한 노릇이다. 진입재(陳立齋 미상)의 집에는 고문백선(古文百選)과 유문초(柳文抄)가 있었는데, 모두 한구자(韓遘字)로서 이것을 고려판(高麗板)이라 하여 자못 귀중히 여기고 있으니 대개 이 발문에 근본한 것이다.

우리나라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홍류동(紅流洞)에 원융각(元戎閣)이 있어 명의 중군도독태자태보(中軍都督太子太保) 이여송(李如松)이 쓰던 갓과 전포와 당시에 지은 시 한 편을 보관해 두었다. 내가 일찍이 해인사를 유람할 때에 갓과 도포를 구경하니, 갓 모자 둘레가 세 아름이나 되니 그 머리통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절에 있는 중 가운데 키가 가장 큰 자를 뽑아 전포를 입혀 보았더니 땅에 한 자나 남게 끌렸다. 만력 임진에 우리나라가 왜인의 침로를 당했을 때 공()은 요계보정산동군무제독(遼薊保定山東軍務提督)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도와 평양(平壤)으로 달려 나와서 왜장(倭將) 평행장(平行長)을 모란봉(牧丹峰) 아래서 격파시켰다. 장사(壯士) 누국안(婁國安)을 행장의 영채에 보내서 빼앗아 간 왕자 순화군(順化君 조선 선조(宣祖)의 여섯째 아들)과 대신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 등을 빼앗아 왔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간 지 6년 뒤에 요동에서 전사했는데, 의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조서를 내리고 소보(少保)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불렀다. 공은 우리나라로 올 때에 군사를 몰아 조령(鳥嶺)을 넘어 문경(聞慶)으로부터 충주(忠州)로 돌아왔으므로 그의 갓과 전포가 합천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공은 본래 조선 사람으로 그의 원조(遠祖)는 영()인데, 홍무(洪武) 연간에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가 양평(襄平)에 살았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의 근본을 아는 자가 드물지만 일찍이 왕이상(王貽上) 대경당집(帶經堂集)에 실린 청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이휘조(李輝祖)의 신도비(神道碑)에는,

 

철령(鐵嶺) 이씨는 영원백(寧遠伯) 성량(成樑)으로부터 시작하고 문벌이 명의 시절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여 본조에 들어와서는 가문이 더욱 커져서 안으로는 경악(經幄)에 참례하게 되고, 밖으로는 장수의 지위에 나아가게 되었다. 이씨의 선조는 조선 사람으로서 제일 먼저 양평에 옮겨 오기는 영이었는데, 영은 처음 군공(軍功)으로 철령위도지휘사(鐵嶺衛都指揮使)를 받았고, 그의 아들은 문빈(文彬)이요, 문빈의 아들 다섯중 맏이가 춘미(春美), 춘미의 아들이 경()이요, 경의 아들이 영원(寧遠)이요, 영원의 장자(長子)가 공이다.”

했으니, 휘조는 춘미의 아우 춘무(春茂)의 후손이다. 이로써 공이 우리나라 출신인 것을 더욱 알 수가 있겠다. 숭정 말년에 공의 아들과 여백(如栢)여매(如梅)의 아들들이 조선으로 탈신(脫身)해 온 것은 그 부형들이 조선에서 큰 공을 세웠은즉 비단 옛 은혜를 판 것만이 아니라 역시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향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혁명이 나면서 우리나라 역시 기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우리나라에 온 여러 이씨들도 감히 그 소자출(所自出)을 밝혀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선무문(宣武門) 안 첨운패루(瞻雲牌樓) 앞에서 한 미소년(美少年)을 만났는데, 그는 말하기를, 영원백의 후손으로 이름은 홍문(鴻文)이라 하였다. 이튿날 나를 비단 점방으로 찾아와 품속에서 인쇄한 족보(族譜) 두 권을 내놓는데,  철령이씨세보(鐵嶺李氏世譜)로서, 영으로부터 시작하여 계통을 이어서 곧 조선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가 전에 알던 것과 더욱 들어맞아 의심할 것이 없었다. 홍문의 할아버지 되는 편덕(偏德)은 금년에 나이 82세인데, 풍증으로 기동을 하지 못하고 그 손자로 하여금 두루 조선 사람의 여관을 찾아, 뜻 있는 사람을 만나 이것을 전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을 살피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더구나 이훤(李萱 미상) 같은 자가 지금 우리나라에 벼슬을 하고 있는 줄 모르고, 나 역시 감히 영원백의 후손으로 누구 누구가 본국에 있다고 분명히 말을 못했다. 날이 저물어 여관으로 돌아와 급히 촛불을 켜고 내원(來源)의 무리와 더불어 보니, 대개 영원백의 장자가 여송(如松)이요, 여송의 한 아들이 성충(性忠)이요, 성충의 아래로는 무후(無後)라 하였는데, 이것은 성충이 달아나서 조선으로 도망해 온 까닭이다. 내 비록 이훤과 일면(一面)도 없으나, 마땅히 조선으로 나가면 전하려 한다.

만력 시절에 형문(荊門 호북성에 있다) 사람 강국태(康國泰)는 법에 걸려 요양(遼陽)에서 귀양을 살았다.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건주(建州)를 칠 때 국태는 종군했다가 전사했고, 아들 세작(世爵)은 나이 17세에 바로 청군(淸軍) 속에 들어가 아버지의 시체를 찾았다. 병부(兵部)웅정필(熊廷弼)이 휘하에 두었더니, 요양이 함락되자 세작은 마등산(馬登山)으로 도망해 들어갔다가 밤에 참호를 헤엄쳐 요새(要塞)를 빠져 나와서 다시 봉황성(鳳凰城)을 지키더니, 성이 함락되자 금석산(金石山)으로 들어가 날마다 나뭇잎을 먹으면서 죽음을 면하고, 의주(義州)로 나와서 드디어 난리를 피하여 회령부(會寧府)에 살았는데, 항상 초() 제도의 관을 쓰고 자기 집을 초책당(楚幘堂)이라 불렀다. 내가 금석산을 지날 때 의주 마부꾼들이 가리키면서 세작이 은신했던 곳이라 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기이한 말이 많았다.

고려 충선왕(忠宣王)휘는 장()이다. 은 원()에 가서 연경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염복(閻復)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우집(虞集) 등과 더불어 교유하면서 서사(書史)를 연구했다. 원에서는 그를 심양왕(瀋陽王)에 봉하고 승상으로 삼았다. 박사 유연(劉衍) 등을 강남(江南)으로 보내어 서적을 사들이다가, 배가 파선하여 당시 판전교(判典校) 홍약(洪瀹)이 남경(南京)에 있으면서 1백 정()을 연에게 주어 서적 1 8백 권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또 황제에게 품하여 책 4 70권을 왕에게 하사했으니, 이것은 모두 송의 비각(秘閣)에 간수했던 책들이다. 심양왕은 원 나라 영종(英宗)에게 강남에 강향(降香)할 것을 청하여, 강소(江蘇)절강(浙江)에 놀아 보타산(寶陀山)에 이르렀고, 이듬해에 또 강향을 청하여 금산사(金山寺)까지 이르렀더니, 황제는 사자를 보내어 급히 불러 군사를 시켜 옹위해 가지고 본국으로 호송(護送)하라 명령했다. 왕은 지체하고 즉시 떠나지 않으니, 황제는 명령하여 머리를 깎고 불경을 공부하라는 핑계로 토번(吐蕃)의 살사길(撒思吉) 땅으로 유배(流配) 시켰다. 박인간(朴仁幹)  18명이 그를 따라 갔는데, 이곳은 연경에서 1 5천리나 떨어진 곳이니, 충선왕이 어찌 한갓 왕의 천승(千乘) 지위를 버리고 서적만 탐혹해서 그랬을 것이랴. 옛날 남월왕(南越王) 울타(尉陀)는 육가(陸賈 () 때의 변사(辯士))를 만나고 매우 기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그와 함께 술을 마셔가며 말하기를,

 

()에서는 족히 더불어 이야기할 사람이 없더니, 당신을 만난 뒤로 날마다 못 듣던 소문을 듣는 것이 이 같거든 참으로 눈으로 보게 됨이리요.”

했다 하니, 소위 하백(河伯)이 바다를 보고 탄식한 것과 같도다. 당시의 종신(從臣) 이제현(李齊賢)의 무리는 비록 문학과 재망(才望)으로 우리나라 거벽(巨擘)이라 일컬었지만, ()()()()의 틈에 끼었다면 응당 하백이 바다를 본 것처럼 부끄러워 했을 것이다. 옥동교(玉棟橋) 가에서 멀리 오룡정(五龍亭)을 바라볼 때 참으로 이른바 인간의 세상이라 하겠다.

육비(陸秘)의 자는 기잠(起潛)이며, 호는 조음(篠飮)이요, 항주(杭州) 인화(仁和) 사람이다. 건륭 병술년(1766) 봄에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과 함께 연경에 와서 홍덕보(洪德保)와 간정호동(乾淨衚衕)에서 사귄 회우록(會友錄)이 있는데, 나는 일찍이 이 책에 서()를 써 주었다. 조음의 집은 서호(西湖)인데 동네 이름은 호서대관(湖墅大關)의 주아담(珠兒潭)이다. 기잠은 말하기를,

 

육계(肉桂 한약 재료)는 교지(交趾 월남(越南)) 산물로 근세에는 구하기 어려우며, 육계는 성질이 화기(火氣)를 이끌고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요, 계피(桂皮 한약 재료)는 숨은 화기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그 용처가 아주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망령되이 두꺼운 계피를 육계로 대용(代用)하고 있으니 위험한 일이다. 나는 일찍이 이 이야기를 두루 의원들과 약국에 알렸던 바, 마침 통주(通州) 어느 약국에서 육계를 찾았더니 주먹 만한 놈을 내어 보이면서 값은 은 50냥이라 했다. 범생(范生)이란 자가 나를 따라 오면서 가만히 말하기를,

 

이것도 진품이 아닙니다. 중국에서도 진품이 떨어진 지 이미 20여 년이나 되었답니다.”

하였다.

진택장어(震澤長語 저자 미상)에 이르기를,

 

조종(祖宗) 때 세용(歲用)은 황납(黃蠟) 한 가지로만 말하더라도, 국초(國初)에는 일년에 불과 2천 근이던 것이 경태(景泰)천순(天順) 사이에는 8 5천 근이 되었고, 성화(成化) 이후는 12만 근으로 불었으니 그 나머지는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정덕(正德) 16(1521)에 공부(工部)의 아뢴 것을 보면, 건모국(巾帽局)에서 소비되는 내시(內侍)의 신에 드는 삼실과 사모(紗帽)와 가죽 등 재료가 성화 연간에는 20여 만이요, 정덕 89년에는 46만에 이르고, 말년(末年)에는 72만에 이르렀다 하니, 이것으로도 그 나머지는 가히 알 만한 것이다.”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돈 열 푼을 한 돈이라 하고 열 돈을 한 냥이라 한다. 지금 중국에서는 백 60푼이 1() 16() 1()이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돈 한 문()을 한 푼()이라 하고 돈 열 푼을 한 돈()이라 한다. 이형암(李炯菴) 덕무(德懋),

 

이것은 저울과 자에서 나온 것이라 10()가 한 푼이요, 10푼이 한 촌()이며, 10촌이 일척(一尺)인데,  1문의 두께는 10()를 쌓은 두께로 한 푼이 되고, 문의 두께는 10푼의 두께로 일 촌이 되니 백 문의 두께는 한 자이다. 저울로 치면 10리가 1푼이요, 10푼이 한 돈이고, 열 돈이 한 냥이니, 지금 돈의 명수(名數)는 저울에서 딴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돈은 대소와 후박(厚薄)이 고르지 못해서 이를 표준하기 어렵다.

해외기사(海外記事) 1권은 영표(嶺表)의 두타(頭陀) 산엄(汕厂)이 강희 갑술(1694)에 대월국(大越國)에 갔을 때 본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한 것이다. 대월국은 경주(瓊州) 남쪽 해로(海路)로 만여 리인데 매일 아침이면 전조(箭鳥)란 새가 바다 가운데로부터 날아와 배를 한 바퀴 돌고 앞으로 향해 날아갔다. 뱃사람들은 이것을 신조(神鳥)라고 하며, 바다 가운데 물결 위에는 여러 가지 괴이한 것이 보였다. 혹은 붉고 혹은 검은 작은 기가 있어 잠깐 잠겼다가 잠깐 뜨곤 하였다. 이것은 한 가지가 지나가면 한 가지가 다시 와서 계속하여 십여 가지씩 오는데, 뱃사람들은 이것을 귀전(鬼箭)이라 하며 보기만 해도 이롭지 못하다고 한다. 풍랑(風浪)이 크게 일고 운무(雲霧)가 자욱하게 밀려오면 조룡(鳥龍)이 꿈틀거리며 배 왼편에 나타나는데, 뱃사람들은 급히 유황과 닭털을 태우고 더러운 물건을 물에 뿌리면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했다. 하루 저녁에는 음운(陰雲)이 컴컴하고 성월(星月)이 빛이 없는데 홀연 뒤에서 화산(火山)의 불빛이 돛대 위에 가까이 비치더니 마치 불[]과 석양처럼 밝아 왔다. 뱃사람들은 나무로 뱃전을 두드리며 계속 소리를 내었으니, 이런 지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배의 키가 그 몸뚱이에 걸린 것을 알았다. 배를 조금 옆으로 돌리자 불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으니, 대개 이것은 해추(海鰍)의 눈에서 나는 번갯불이라 한다. 이미 그 나라에 이르니, 모두 나체(裸體)에 머리를 풀고 수건으로 앞을 가렸을 뿐이다. 북상투를 틀고 이빨에는 옻칠을 하고 물 위에는 연꽃이 떴는데, 푸른 잎이 번득거리며 뿌리도 없고 줄기도 없었다. 그 나라에서 전쟁을 할 때는 모두 코끼리를 사용하고 국왕이 연무(演武)할 때는 코끼리 열 마리로 짝을 지어, 등에는 붉은 칠을 한 안장을 얹고 세 사람이 코끼리 한 마리에 함께 타는데, 모두 금 투구에 초록빛 옷을 입고 창을 들고 그 등에 선다. 풀을 묶어 사람을 만들어 축대 위에 벌여 세운 다음 군진(軍陣) 모양으로 동고(銅鼓)를 연해 울리고 화기(火器)를 함께 쏘면, 여러 군사들은 앞으로 돌격하여 코끼리 떼에 부딪친다. 이때 코끼리 떼는 역시 축대를 밟고 올라가 앞으로 달아나는데, 모든 군사들은 물러서서 피하고 코끼리들은 저마다 코로 풀사람을 말아 들고 돌아온다. 국가에서 죄인을 사형할 때는 코끼리를 놓아 사람을 몇 길 위로 던지고 이빨로 받게 하여 가슴과 배를 뚫어 시체가 금시에 썩도록 하기에, 산엄이 이 형벌을 없애도록 권했었다. 국왕은 말하기를,

 

이 나라 산중에는 서우(犀牛)와 코끼리가 떼를 지어 사는데, 산 채 코끼리를 잡는 데는 길들인 암코끼리 두 마리를 써서 숫놈을 꾀어 오게 하여, 굵은 밧줄로 발을 묶어 나무 사이에 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며칠 동안 굶긴 다음 상노(象奴)를 시켜 점점 가까이 가서 먹을 것을 주어, 조금씩 길을 들인 뒤에 두 암놈이 끼고 돌아옵니다.”

라고 하였다. 때는 마침 이른 봄이라 논에는 푸른 모가 이미 이삭을 팼고, 거름도 주지 않는데도 한 해에 세 번 수확을 한다고 한다. 풍토(風土)와 기후는 항상 따뜻하여 그늘이 습기를 돕고 볕이 따가워 쇠라도 녹일 것 같으므로 만물은 가을과 겨울에 피어난다고 한다. 일은 밤에 하며, 여자가 남자보다 지혜가 있고, 나무는 파라밀(波羅密)야자(椰子)빈랑(檳榔)산석류(山石榴)정향(丁香)목란(木蘭)번말리(番茉莉)가 많다. 그 시골 촌락들은 모두 초가에 대 울타리이다.

강희 을미(1715) 연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흑진국(黑眞國) 사람이 여자 하나와 같이 가는 것을 산해관(山海關) 밖에서 만났다. 영고탑(寧古塔) 동쪽으로 수천 리를 가면 빙해(氷海)가 있어 5년에 한 번씩 육지(陸地)까지 얼어붙는데 나라 하나가 있으니 그것이 흑진국이다. 일찍이 육지에 통하지 못한 지 10여 년에 흑진국 사람 하나가 졸지에 얼음을 건너 서쪽 언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무슨 물건인지 분별하지 못하겠더니 자세히 살펴본즉 사람이었다. 온몸을 짐승 가죽으로 둘러썼고 다만 얼굴만 드러냈는데 머리털은 양털처럼 곱슬머리였다. 변방 사람들이 산 채로 붙들어 북경으로 보냈다. 강희 황제가 그를 불러 보고 밥을 주었더니 먹을 줄을 알지 못하고, 생선과 날고기만 먹었다. 여러 가지 물건을 앞에 벌여 놓고 무엇을 갖고 싶어 하는가 보았더니, 끝내 돌아보지도 않았다. 여자를 끌어다가 뵈었더니 즉시 흔연히 끌어안았다. 이에 황제가 총명한 여자를 골라 배필로 삼아 주고 또 영리한 시위(侍衛) 다섯 명을 여자와 함께 보호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오곡 종자와 농사하는 법을 가르쳐 보냈더니, 5년 뒤에 그는 여자와 함께 다시 빙해를 건너 와서 은혜를 사례했는데, 주먹만 한 큰 구슬 몇 개와 길이가 한 길 넘는 초피(貂皮)를 갖다 바쳤다. 여자 말에는,

 

나라는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임금도 어른도 없으며, 키가 큰 사람은 세 길이나 되고 작아도 한 길 넘어 되며, 오직 금수를 사냥하고 생선과 자라를 날로 먹는 것뿐이요, 바다 속에는 구슬이 가득하여 광채가 괴상하여 헤아릴 수 없습디다.”

한다. 이것은 일암(一菴 미상) 연행기(燕行記)에 실려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다가 학지정(郝志亭)에게 물었더니 그의 대답도 대동소이(大同小異)했다. 이로써 더욱 천하는 넓고 없는 물건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소위 군기 대신(軍機大臣)이란 모두 만인(滿人)이다. 일찍이 듣건대, 국중에 기밀(機密)한 큰일이 있으면, 황제는 비밀히 군기 대신을 불러서 함께 높은 누각(樓閣)에 올라가면 밑에서 사닥다리를 치워 버렸다가 누상(樓上)에서 방울 소리가 난 연후에야 도로 그 사닥다리를 가져다 놓는다. 비록 며칠이라도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좌우의 누구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한다. 옹정(雍正) 때 군기 대신은 망곡립(莽鵠立)이었는데, 몽고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려 일찍이 강희 황제와 옹정 황제의 초상을 그렸다. 악이태(鄂爾泰)팽공야(彭公冶)는 모두 문무(文武)를 겸한 재사였으며, 김상명(金常明)은 우리나라 의주 사람으로 역시 군기대신의 칭호를 띠고 있었다. 지금 복차산(福次山)은 밀운점(密雲店)까지 따라왔는데 나이는 256세 가량으로 역시 군기 대신이라 불렀다.

옹정 2(1724) 정월 경자에 흠천감(欽天監)이 아뢰기를,

 

해와 달이 벽()을 합하여 함께 밝고 오성(五星)이 구슬처럼 연하여 영실(營室)의 다음으로 돌아드니, 그 위치는 취자(娶訾)의 궁에 해당하옵니다.”

한다. 황제는 칙명을 사관(史館)에 붙여 중외(中外)에 알리게 하였다. 또 옹정 4(1726)에 친히 적전(籍田)에 나가 밭을 가는데 가화(嘉禾)가 한 줄기에 두 이삭으로부터 89이삭까지 나왔었다. 이때 오중(吳中)에서는 상서로운 고치를 바쳤는데 크기가 모자만 했다고 하며, 이 밖에도 기린이 나타나고 봉황이 울고 황하가 맑아지며 경운(慶雲)이 뜨고 단 이슬과 신령스러운 지초가 났다는 등, 이런 상서가 없는 해가 없었다. 사사정(査嗣庭 () 때의 관리)의 일록(日錄)에는 이런 상서는 도리어 재앙이 있을 변으로 삼았고, 혹은 중국에 진인(眞人)이 나올 조짐이라 하였다. ()의 옥사(獄事)가 생기자 옹정 황제는 중외에 조서를 내리기를,

 

너희 한인들이 이미 태평을 함께 누리면서 그 복을 국가에 돌릴 줄 모르고 반드시 진인이 꼭 나온다고 하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이는 정말 반역을 생각하는 백성들이다.”

운운하여, 이 옥사에 연좌된 수가 수만 호에 달했던 바 70()에서 나타난 상서는 옹정 때 이르러서 더욱 많았으며, 한인이 문득 옛 한( 망한 명 나라)을 생각하다가 감옥살이를 하게 되니, 이는 과연 상서로운 조짐이 아니라 재앙의 조짐인가 보다.

() 경릉(景陵)의 호는 곧 성조인 황제(聖祖仁皇帝). 그 아들은 모두가 명사(名士), 과친왕(果親王)윤례(允禮)의 글씨는 축지산(祝枝山 () 축윤명(祝允明). 지산은 호)에게 비교할 바 아니다. 강녀묘(姜女廟)와 북진묘(北鎭廟)에는 모두 과친왕의 주련(柱聯)이 있었고, 무령현(撫寧縣) 서소분(徐苕芬)의 집에도 역시 과친왕의 글씨가 있기에 나는 모사해 오려고 했으나 길이 바빠서 못하였다.

강희는 아들이 모두 2명이었는데 재자(才子) 이친왕(怡親王) 윤상(允祥), 장친왕(莊親王) 윤록(允祿), 과친왕(果親王) 윤례(允禮), 옹정 황제는 윤진(允禛)인데 넷째 아들이요 팔왕(八王) 윤아(允䄉), 구왕 윤당(允禟), 십삼왕 윤지(允禔), 십오왕 윤우(允祐), 염친왕(廉親王) 윤기(), 십사왕은 윤제(允禵)인데 본명은 윤정(允禎)으로, 이는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중망(衆望)을 모았다. 강희의 병이 위급하자, 한의 각로(閣老) 왕담(王惔)과 함께 고명(顧命)을 받으면서 ()’ 자를 ()’ 자로, 넷째 아들인 것을 열넷째 아들로 잘못 알았다가, 왕담은 죄를 입고 윤정은 역적 괴수로 되었는 바, ‘()’ 자를 ()’ 자로 고쳤다 한다.

우리나라 서해안 장연(長淵)풍천(豐川) 해변의 고기잡이에는 중국 배들이 휩쓸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각화도(覺華島) 사람으로 매년 5월 초에 와서 7월 초에 돌아간다. 잡는 것은 방풍(防風 한약 재료)과 해삼(海蔘)뿐으로 때로는 육지에 내려 양식을 청하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황제께 아뢰어 금지할 것을 청했다. 강희 54(1715) 2월에 예부에서 주청하여 문서를 돌려 봉천 장군(奉天將軍)봉천 부윤(奉天府尹)과 산동(山東)강남(江南)절강(浙江)복건(福建)광동(廣東) 등지의 독무(督務)에게 신칙(申飭)하여, 연해 수사영(水師營)에서는 조선에 가까운 해상에서 고기를 잡지 못하도록 하고, 밀항(密航)하여 바다를 건너다가 붙들려 조선에 보낸 자를 엄하게 치죄(治罪)할 것과, 그 지방 관리와 해당 부서는 협의하여 역시 엄격히 신칙하고, 조선 연변을 지키는 관리나 군사들이 불시에 순찰하여, 만일 이런 자를 발견할 때는 즉시 붙들어 압송할 것을 운운하였다. 지금 중국 배가 서해안에 오면 지방 이교(吏校)들이 즉시 지방관에게 보고하지만, 실상은 금지할 방도가 없은즉, 알고도 모른 체하고 있다가 돌아갈 시기를 기다려 멀리서 배 떠나는 날짜를 묻고 그제야 수영(水營)에 아뢰기를, 방금 배가 왔다고 하면 수영은 일변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그 지방 관리에게 그날로 쫓아내라고 명령을 하는데, 실상인즉 모두 귀 막고 방울 도둑질하는 격이니, 우리나라 국경 수비가 실로 한심한 일이다.

()의 제도에 삼공(三公)의 월봉(月俸) 3 50( 곡은 10)이다. 이 밖에 중 이천석(中二千石)으로부터 백석에 이르기까지 무릇 14등급으로 나누었으니, 중 이천석의 월봉은 1 80곡이요, 백석의 월봉은 16곡이다. 후한(後漢) 시대 대장군과 삼공의 월봉은 3 50곡이요, 중 이천석의 월봉은 72곡에 돈이 9천 냥이요, 백석의 월봉은 4 8두에 돈 8백 냥이다. ()의 제도는 품질(品秩)에 있어 제 일등이 1 8백 곡이요, 후주(後周)에서는 구명(九命)과 삼공이 1만 석이요, 하사(下士) 일명(一命)에는 1 25석이다. 당의 제도는 정일품(正一品)이 매년 7백 석에 돈 3 1천 냥이요, 9(從九品)에 이르러는 52석에 돈 1 9 70냥이다. 송의 제도는 41등급인데, 재상과 추밀사(樞密使)가 매월 돈 3 1천 냥(30만 냥)이요, 보장정(保章正)에 이르러는 2천 냥이다. 명에서는 정일품에 매월 쌀 87석을 주고, 9품에 5석을 준다. 대체로 비교해서 춘추 전국(戰國) 시대는 대신의 녹봉이 1만 종( 1종은 10()이다)이라 하였은즉, 한의 삼공의 월봉은 너무 약소한 편이다. 지금 청의 녹봉 제도와 지방관들의 보수를 보면 명의 제도보다 적은 편이다.

고려 중서(中書)상서령(尙書令)과 문하시중(門下侍中)은 연봉이 쌀 4백 석이요 조교(助敎)에 이르러는 쌀 10섬이다. 우리 조정에서는 정일품은 연봉 98석에 명주 6, 정포(正布) 15, 저화(楮貨) 10장이요, 9품은 12석에 정포 2, 저화 1장이요, 임진왜란 뒤는 일품 연봉이 60여 석에 명주와 정포저화는 없앴다. 대개 녹봉 제도가 전 시대보다 검약해진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관원이 많아진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겨울철 창살에 종이를 붙이는데 사이에 인물과 화초를 그려 넣은 유리 조각을 끼운다. 방 안으로부터 밖을 보면 작은 것이라도 뵈지 않는 것이 없으나 밖에서 안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원래 구양초(歐陽楚 구양초옹인데 옹()자가 빠졌다)의 어가사(漁家詞)에 나오는 화호(花戶) 유창(油牕)이다. 연로(沿路)의 저자에서 채색 그림을 그린 유리를 파는 자가 아주 많은데 이것은 모두 창살에 끼우는 것이다.

구슬을 목에 거는 제도는 반드시 5품 이상이라야 하였는데, 한림(翰林)들은 7품이라도 거는 것이 허락됐다. 지현(知縣)이 되면 걸지 못하는 법인데 통관(通官) 오림포(烏林哺)와 서종현(徐宗顯)의 무리들도 함께 구슬을 걸 수 있는 것은, 외국 사람에게 영화롭게 보이기 위하여 권도로 걸게 한 것이다.

() 2 70년 간에 세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으니, 태조 고 황제는 중으로서 몸을 일으켰고, 건문 황제는 대내(大內)에서 중으로 늙었으며, 숭정 황제는 머리를 풀고 나라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다.

왕양명(王陽明)의 도학과 척남궁(戚南宮)의 무략(武略)과 왕남명(汪南溟 명 나라 문학가 왕도곤(王道昆). 남명은 자)의 문장으로도, 모두 사나운 아내가 있어 평생을 굽실거리고 감히 제 기운을 내지 못했다 하니, 또한 명의 세 가지 이상한 일에 들 만하다.

강희 연간에 왕사정(王士禎)은 형부(刑部)에 있으면서 매일 원서(爰書 죄인들의 초사를 기록한 책)를 열람해 보니, ()이 묘씨(妙氏)도씨(島氏)반씨(盤氏)민씨(民氏)전씨(纏氏)저씨(杵氏)유씨(劉氏)율씨(律氏)다씨(茶氏)연씨(煙氏)양씨(穰氏)수씨(首氏)비씨(卑氏)위씨(威氏)빙씨(氷氏)감씨(坎氏)탑씨(榻氏)남씨(欖氏)자씨(慈氏)가 있었는데 모두 중국의 희성(稀姓)이다. 내가 심양에 이르니, 빈희안(貧希顔)희헌(希憲) 형제가 있어 모두 강남 대상(大商)이라 했고, 산해관(山海關)에 오니 구승(臼勝)이란 자가 있어 거인(擧人)이라 했다. 우리나라에도 역시 부씨(夫氏)양씨(良氏) 등은 모두 탐라(耽羅)출신이요, 또 불씨(乀氏)궉씨(鴌氏)도 있는데, 비단 성이 드물 뿐만 아니라 글자도 역시 상고할 수 없으니 괴상한 일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옹백(雍伯)이 옥을 심었다 하는데, 지금 내가 지나가는 옥전현(玉田縣)이 바로 이곳이다. 오후청(五侯鯖 저자 미상)에 실린 이야기로, 설경(薛瓊)은 지극한 효자로서 집이 가난하여 나무를 하러가다가 우연히 늙은 농부를 만났더니, 그가 무슨 물건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은실(銀實)인데, 서쪽 벽토(壁土)를 파다가 동분(銅盆)에 심으면 꼭 은을 얻을 것이다.”

하므로, 그 말대로 심었더니 열흘이 되어 싹이 나고 다시 열흘이 되어 꽃이 피는데, 꽃빛은 은색이어서 자개와 같았다 하며, 열매가 맺었는데 모두 은이었다 한다. 고태사(高太史) 역생(棫生)이 나에게 말하기를,

 

서역(西域)에서는 양의 배꼽을 심는데, 양을 잡을 때 먼저 배꼽을 따서 이를 흙으로 두껍게 심으면 1년 만에 양이 생긴다 하며, 그것이 땅 위에 엎드려 꼭 짐승 모양으로 되었다가 천둥 소리를 들으면 배꼽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이것은 원사(元史)에 실렸습니다.”

하니, 양의 배꼽을 심을 수 있다면 은과 옥도 역시 심을 수 있을 것인가.

옹정(雍正) 원년(1723)의 조서에 이르기를,

 

대행(大行) 황제의 서사(書笥) 속에서 아직 반포하지 않은 유지(諭旨)를 찾아내었으니, 그 내용에, ‘명 태조(明太祖)는 포의(布衣)로서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였으되, ()을 경()으로 삼고 무를 위()로 삼기는 한송의 여러 임금이 따르지 못할 바요, 그 뒤로 대를 이은 임금들도 역시 전 시대와 같이 포학하고 음탕하나 나라를 망치던 자취는 없었은즉, 이제 지파(支派) 자손 하나라도 찾아서 관직을 주고 춘추 제사라도 받들고자 한다. 내가 생각해 보니, 옛 역사에는 동루(東樓)를 기록했고, 시경(詩經)에는 백마(白馬)를 노래했는데, 후세에서는 모두 이를 의심하고 기휘해서 역대 임금의 종사(宗祀)가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황고(皇考) 강희(康熙)이다. 의 하늘 같은 마음을 받들고, 멀리 옛 임금의 성한 덕을 본받아서, 삼가 대행황고(大行皇考)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의 유지를 반포하여 명 태조의 지파 자손을 찾아 적당한 직함(職啣)을 주고, 그로 하여금 춘추 향사(享祀)를 하도록 할 것이다 했다.”

하였다. 이때 주씨(朱氏) 한 사람이 성명을 바꾸어 숨기고 외읍에 벼슬을 하더니, 원수의 직고(直告)로 인하여 황제가 그를 불러 그 근본을 자세히 묻고는, 특명으로 국공(國公)에 봉하고 명()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고 한다.

파극집(巴克什)은 만주말로 큰 선비를 일컫는 것이다. 청 태종(淸太宗) 때 파극집 달해(達海)란 자가 있었는데, 만주 사람으로 나이 21세에 죽으니, 제자로서 효복(孝服)을 입은 자가 3천 명이나 되어 신인(神人)이라 불렀다 한다. 신라 사다함(舍多含) 15세에 풍표(風標)가 청수(淸秀)하고 지기(志氣)가 방정해서 당시 사람들이 화랑(花郞)으로 삼았더니, 그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것을 달해의 숙성(夙成)한 데 비했더니 풍병건(馮秉健)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신라 화랑의 칭호가 이학 선생(理學先生)보다 훨씬 낫습니다. ()의 육경대(陸瓊臺)는 천자(天資)가 고매해서 나이 겨우 약관(弱冠)에 선비들을 동림(東林)에 모아 강론을 하는데, 옷을 걷고 허리를 구부리면서 방 안에 벌여 서는 제자가 하루아침에도 8백 명이나 되었답니다.”

하였다.

명의 특진광록대부 전군도독부 좌도독(特進光祿大夫前軍都督府左都督) 남창(南昌) 유공(劉公) ()의 자는 자신(子紳)이다. 그는 대도(大刀) 쓰기를 좋아하며 대도의 무게가 백 20근이나 되니, 유대도(劉大刀)라 불렀다.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에 있는 열무관(烈武觀)은 곧 그가 임진년에 조선을 도우러 왔을 때 군사를 시찰하던 곳이다. 정이 이 제독(李提督)을 따라 진격하여 왜군의 추장(酋長) 행장(行長)을 문경(聞慶)에서 무찔렀다. 제독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정은 혼자 성주(星州)에 주둔하면서, 거성(莒城)에 들어가 도독 진린(陳璘)과 함께 행장을 순천 앞 바다에서 격파하고, 예교(曳橋)를 포위했으나 10여 일에 행장은 도주했다. 그가 동쪽으로 출사(出師)한 것은 전후 7년인데, 공이 가장 컸고 그 뒤 20년에 심하(深河) 싸움에서 죽었다. ()이 출사할 때 정이 보졸(步卒) 5천으로 왜병을 공격하겠다 하니,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이를 장하게 여겨 허락한 것이다. 명의 사기에는 행장이 가만히 군사 천여 명을 출전시키매 정이 드디어 물러났다 했으나, 이것은 모두 잘못된 사기이다. 사기에 또 이르기를,

 

두송(杜松)의 군사가 패하자, 양호(楊鎬)가 말을 달려 정을 불렀으나, 기병이 가기 전에 정은 이미 죽었다.”

하였다. 지금 청의 천자는 정조(正朝)에 반드시 먼저 종묘(宗廟)에 제사 지내고 친히 당자(堂子)에 참배하는데, 혹은 등 장군(鄧將軍)의 묘라고도 하고 혹은 유대도(劉大刀)의 사당이라고도 하며 중국 사람들은 몹시 이것을 비밀히 하여 기휘한다. 혹은 말하기를,

 

유정이 갑자기 죽자 그의 영혼은 심히 영험이 있어, 천자가 친히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천하에 큰 역질이 돌고 흉년이 들며, 종묘에도 문득 재이(災異)가 생겨 편안하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박송당(朴松堂 송당은 박영의 호) ()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이다. 천자(天資)가 호매(豪邁)하고 또 부후(富厚)하며 나이 17세에 요동에 들어가 집비둘기를 사 가지고 왔다. 내가 요동에 이르렀을 때, 한 전방에서 먹이는 비둘기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저녁이 되면 날아 돌아와 각각 제집을 찾아든다. 전방 안에는 큰 돌 구유에 미리 잿물을 만들어 두었다가 요동 들에 나가 콩을 배부르게 주워 먹은 비둘기가 돌아와 다투어 잿물을 먹고 콩을 모두 토해 놓으면 이것으로 말을 먹였다.

왕원미(王元美) 완위여편(宛委餘編)에는 여자로서 병관(兵官)이 된 자가 실렸는데, 군사마(軍司馬) 공씨(孔氏)는 고침(顧琛)의 어머니요, 정렬 장군(貞烈將軍) 왕씨는 왕흠(王廞)의 딸이다. 당 행영절도(行營節度) 허숙기(許叔冀)의 부하 왕씨당씨(唐氏)후씨(侯氏)는 모두 그 행영에서는 과의(果毅 군관(軍官) 이름) 출신 교위(校尉)들이다. ()의 여자 백경아(白頸鵝)가 거란의 회화 장군(懷化將軍)이 되었다 하였으나, 당 태종이 신라의 선덕 여왕(善德女王)을 추증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고, 또 진덕 여왕을 주국(柱國)에 책봉하여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했으며, 또 왕이 죽자 고종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追贈)한 것은 실리지 못했다. 나는 일찍이 이덕무(李德懋)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서 이 기록을 보았다. 유리창(琉璃廠)에 있는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능야(凌野)와 고역생(高棫生)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다가 이 말을 했더니, 능과 고, 그 밖의 여러 사람들도, 자못 넓게 안다고 나를 칭찬하였다.

나는 가는 곳마다 낙화생(落花生)과 귤병(橘餠)매당(梅糖)국차[菊茶] 등으로 대접을 많이 받았는데, 모두가 복건절강 지방에서 나는 것이다. 양매(楊梅) 5월에 익으며 그 빛이 붉고 크기는 한 치쯤 되고, 성분이 더워서 많이 먹으면 이가 상한다 한다.

정효(鄭曉 명 나라 학자) 고언(古言)에 이르기를,

 

구양영숙(歐陽永叔 구양수(歐楊修). 영숙은 자)은 계사(繫辭)를 비방하고, 사마군실(司馬君實 사마광(司馬光). 군실은 자)은 맹자(孟子)를 비방하며, 왕개보(王介甫 왕안석(王安石). 계보는 자)는 춘추(春秋)를 잘못되었다 하고, 두 정자(程子)는 옛날 대학(大學)을 고치고, 회암 선생(晦庵先生)은 자하(子夏 복상(卜商)의 자)의 시서(詩序)를 쓰지 않았던 일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나도 적이 여기에서 느낀 바 있었다.

사람은 아는 것을 너무 자랑하고 함부로 책을 기술할 것이 아니니, 강희 연간에 왕사정(王士禎)의 저서가 가장 많았는데, 그의 필기(筆記)에서 말하기를,

 

풍속통(風俗通, 한의 태수(太守)에 뇌선정(先井)그 자주(自注)에 정()의 음은 담()이다. 이란 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되, 자기 성명 석 자에 두 자는 통하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내 일찍이 이 말을 이무관(李懋官)에게 했더니, 무관은 말하기를,

 

이것은 어양(漁洋)이 잘못 안 것입니다. 풍속통에는 교지 태수(交趾太守)로 뇌선(賴先)이란 자가 있는데 뇌() 자는 뇌() 자의 고자[古文]이고,  옥해(玉海 왕응린(王應麟) )에는, 한에 뇌단(賴丹)이란 교위(校尉)가 있었으니, 이것은 뇌선과 뇌단을 합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 자는 정() 자의 본문(本文)이니, 주를 내어 음이 담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단가루(段家樓)의 술 자리에서 누명재(漏明齋)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누는 이무관의 박식한 것이 어양보다도 낫다고 하였다.

춘명몽유록(春明夢游錄)북평(北平) 손승택(孫承澤)의 저 에 이르기를,

 

그들의 국사(國史) 고려사(高麗史) 를 상고해 보니, ()의 전성 시절에 원 효왕(元孝王 고려의 고종(高宗))이 강화도(江華島)로 옮기니, 원도 어쩔 수가 없어서 다만 그가 육지에 오르지 않는 것만 책망했었다. 그는 필경 원에 복종했지만 마침내 육지에 오르지 않고, 그의 아들 순효왕(順孝王 고려의 원종(元宗))에 이르러 친히 왕주(王主) ()의 공주(公主) 를 맞아 원의 복색으로 함께 가마를 타고 본국으로 들어왔다. 보는 자들이 해괴히 여겼으며, 그때 따르는 종실들은 머리를 깎지 않았다 하여 왕은 이를 책망하였다. 그 아들 충렬왕(忠烈王) 때에 이르러 재상으로부터 하료(下僚)에 이르기까지 머리를 깎지 않는 자가 없었고, 다만 금내(禁內)에 있는 학관(學館)에서만 머리를 깎지 않았으므로, 좌승지(左承旨) 박환(朴桓)이 집사(執事)를 불러 일러서, 이때에야 관학생(館學生)들도 모두 머리를 깎았다.”

하였다. 청이 처음 일어날 제 한인을 붙드는 대로 머리를 깎았으며, 정축년(1637) 맹약(盟約)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머리는 깎지 않았다. 대개 여기에는 까닭이 있으니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는,

 

청인들이 여러 번 한() ()의 태종(太宗) 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를 깎도록 명령하라고 권했으나, ()은 묵연(黙然)히 이에 응하지 않고 가만히 여러 패륵(貝勒)들에게 이르기를, 조선은 본래 예의로 이름이 나서 머리털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그 심정을 꺾는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반복(反覆)할 터이니, 그들의 풍속에 따라 예의로써 얽매어 두는 것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도리어 우리 풍속을 익혀 기사(騎射)에 편리해진다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그만두었다. 우리로서 말하자면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저들로서 계교한다면 우리들의 문약(文弱)함을 그대로 두려던 것이었다.

 

 

[D-001]태평어람(太平御覽) : 송 태조(宋太祖)의 명을 받아서 이방(李昉) 등이 엮었다.

[D-002]배율(排律) : 장편시로서, 글귀마다 운율을 배열(排列)하는 시체(詩體)의 하나.

[D-003]() : 산문으로 문제에 따라 자기의 포부와 실력을 서술하는 문체의 하나.

[D-004]회시(會試) : 향시에서 급제한 자를 수도에 모아서 치르는 두 번째의 고시로서, 합격자에게는 진사(進士)라는 학위를 주었다.

[D-005]전시(殿試) : 황제가 직접 정전에서 보이는 중앙 고시의 일종.

[D-006]삼왕(三王) : ()이 망한 뒤에 남방으로 도망한 왕족으로서, 임시 정부를 조직한 복왕(福王)계왕(桂王)당왕(唐王).

[D-007]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 : 연기가 끼인 강물에 첩첩이 쌓인 산을 그린 것이다.

[D-008]유미암(柳眉菴) : 조선 중종(中宗) 때 학자 유희춘(柳希春). 미암은 호요, 자는 인중(仁仲). ()은 암()이 잘못된 것이다.

[D-009]모시(毛詩) : 시경(詩經)에 모형(毛亨)과 모장(毛萇)의 전()이 있으므로 모시라 한다.

[D-010]()()의 시 : 시경중의 정풍(鄭風)과 위풍(䘙風).

[D-011]초중경(焦仲卿) …… 것은 :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라는 장편 서사시(敍事詩)를 한말(漢末) 여강부(廬江府) 소리(小吏) 초중경의 아내가 지었다 하였다.

[D-012]고시(古詩) 19 : 혹은 매승(枚乘)의 작이라 하고, 혹은 부의(傅毅)장형(張衡)채옹(蔡翁) 등이 지었다 한다.

[D-013]하였다. : ‘원우 5 …… 없겠다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첫째 이야기다.

[D-014]회동제거 …… 아니랴 : ‘회동제거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가 둘째 이야기다.

[D-015]마복탑(馬福塔) : ()의 장수. 우리나라에서는 흔히들 마골대(馬骨大)라 한다.

[D-016]만력 …… 조짐이었던가 : 만력(萬曆)이란 연호가 만세력(萬歲曆)을 응한 참언(讖言)이라는 것이다.

[D-017]3() : 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성균관(成均館).

[D-018]구석선문(九錫禪文) : 천자가 제후에게 최고 공훈을 표창하는 아홉 가지의 문건을 내릴 때의 고시문.

[D-019]복왕(福王) : 명이 망한 뒤에 마사영(馬士英) 등이 남경에서 세운 주유숭(朱由崧)의 봉호.

[D-020]구경(九卿) …… 등을 : 도찰원(都察院)의 소속 육과(六科)의 급사중(給事中) 15() 감찰어사(監察御使)의 총칭.

[D-021]삼학사(三學士) : 병자호란에 척화신(斥和臣)으로 이름 높았던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D-022]무학(無學) :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 정하는 일을 도와주던 중 박자초(朴自超). 무학은 승호(僧號).

[D-023]남사고(南師古) : 조선 선조(宣祖) 때 사람으로서 풍수설(風水說)에 가장 저명하였다.

[D-024]육부(六府) :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에 있는 말로, ()()()()()()을 이름.

[D-025]삼사(三事) : 서경(書經)대우모(大禹謨)에 있는 말로,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을 이름.

[D-026]구주(九疇) :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아홉 가지의 정치 요강(要綱).

[D-027]승항(升恒) : 시경(詩經)구여(九如)의 글귀로서, “해가 오르는 듯이 달이 이지러지지 않는 듯이라는 뜻.

[D-028]규루(奎婁) : 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별 이름으로, ‘는 문명을 맡은 별이요, ‘는 원목(苑牧)을 맡은 별이다.

[D-029]모반하여 …… 빼앗았으니 : 연왕(燕王)이던 성조가 조카인 혜제를 축출한 것을 말한다.

[D-030]그의 …… 유여시(柳如是) : 여기에서는 아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첩이었다. 하동군은 봉호가 아닌 별칭. 자는 미무(蘼蕪), 본 성명은 양애(楊愛). 그가 일찍이 전겸익에게 절자하기를 권했으나 좇지 못했다.

[D-031]동림당(東林黨) : 명의 고헌성(顧憲成)이 고반룡(高攀龍) 등과 더불어 무석(無錫)에 있는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시정(時政)과 인물을 논하여 동림당의 지목을 얻었다.

[D-032]최만리(崔萬里) : 조선 세종 때의 학자. ()는 이()의 잘못. 자는 자명(子明).

[D-033]한구자(韓遘字) : 조선 숙종(肅宗) 때 한구(韓構)가 쓴 활자. ()는 구()의 잘못.

[D-034]갓 모자 …… 되니 : 여기서의 아름 단위는 양팔 둘레의 아름이 아니고 양손 둘레의 아름이다.

[D-035]하백(河伯) …… 탄식한 것 : 남화경(南華經) 추수편(秋水篇)에 나오는 구절.

[D-036]영실(營室) : 28개 성좌(星座) 중의 하나인 실성(實星) 성좌.

[D-037]취자(娶訾) : 미성(尾星) 16도와 규성(奎星)의 사도에 있는 성좌.

[D-038]적전(籍田) : 황제가 종묘(宗廟)에 바칠 곡식을 친히 경작하는 밭.

[D-039]()의 제도 : 관리의 연봉을 곡식의 석수로 표시하던 한()의 관제(官制).

[D-040]우리나라에도 …… 일이다 : ‘수택본에는, “옛날 이루(離婁)의 이씨(離氏)가 있어서 감씨(坎氏)와 더불어 혼인하고 저씨(杵氏)가 구씨(臼氏)와 더불어 짝이 되었으니, 가히 하늘이 정해 준 배필이라.” 하였다.

[D-041]동루(東樓) : 주 무왕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하우(夏禹)의 후손을 동루에 봉하였다.

[D-042]백마(白馬)를 노래했는데 : 기자가 백마로 조주(朝周)한 일을 읊었다.

[D-043]동림(東林) : 명의 동림당(東林黨)의 학자가 강학하던 동림서원(東林書院).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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