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해설 20. 불생불멸(不生不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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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은 대승과 소승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해탈문입니다.

그만큼 이 空은 중요한 것입니다.

空은 모습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無相입니다.

모든 법의 공한 모습(諸法空相)이 곧 불생불멸(不生不滅)이죠.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생겨난 게 없으므로 소멸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자주 설명드렸다시피, 空은 아무것도 없는 無가 아닙니다.

空은 아무것도 없는 無도 아니며, 그렇다고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空을 여여(如如)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있되 그 오온에 고정불변의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없어서 空입니다.

이 空은 그 어떠한 표현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 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표현도 맞지 않습니다.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허공을 그 어떤 단어나 설명으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空을 허공에 비유합니다.

허공엔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허공을 알 수 있습니다. 물건으로 알 수 있죠. 물체가 없는 곳이 곧 허공입니다.

허공처럼 불생불멸한 것이 우리 마음의 본래 모습입니다.

이 생멸하며 찰라생 찰라멸하는 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 공한 것이며, 불생불멸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의 몸도 죽고, 마음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걸 반복하지만,

몸과 마음엔 원래 자체가 실체가 없어 공한 것이라, 공 그 자체엔 태어난 것도 없고 소멸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죽습니다만,

이 몸과 마음의 본질은 텅 빈 허공과 같아서 본래 죽는게 없는 것입니다. 생겨난 게 없으므로 죽을 것도 없죠.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생사를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외도의 종교나 도닦는 것들과는 정반대죠.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불변한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 영혼을 나의 본체라고 여기는 것 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오로지 오온에 의지해서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그저 명칭상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그 오온은 空한데, 그 空한 오온에 의지해서 나가 있으니,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란 개념은 이 오온 이외에 어떤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영원불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죠.

만약 영원불멸이라면, 그 어떠한 변화가 없어야 합니다.

그 어떤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과연 나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또 영혼이 괴롭다느니...뭐 이런 소리를 하는데...

영혼이 괴롭다는 것은 곧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곧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불변의 영혼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죠. 변하니까 말입니다.

또 괴로운 것은 오온 중에서 느낌입니다.

괴로움은 느낌이지, 그게 영혼은 아닙니다.

그래서 소승이든 대승이든 밀교든, 불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가끔 영혼이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해탈은 불가능합니다.

영혼이 있다라고 설법해주는 부류들은 해탈할 부류가 아니고, 선업을 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이 있다고 얘기해야, 내생을 믿고, 그로 인해 내생이 잘되길 바래서 선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이것은 희망의 말씀입니다. 소멸이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왜 소멸이 안 되느냐 하면 본래 생겨난 게 없으므로 소멸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죽음조차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인들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멸도...즉 열반에 드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라한이 되신 비구니 스님들이 너도 나도 미리 열반에 들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열반에 들겠다라는 얘기는 세속적으로 죽겠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 석가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께서 열반에 들어버렸습니다.

또 석가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나서도 수많은 아라한들이 앞을 다퉈 열반에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상태라서 그렇죠.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생노병사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걸 설명한 것이 바로 12연기법입니다.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고....

이 뜻이 과연 뭘까요?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결국은 안 죽었다는 뜻이고, 결국은 태어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죽고나서 다시 또 태어났다는 것은 결국 안 죽었다는 뜻이고,

태어났다가 죽었다라는 것은 결국 태어난 게 없다는 뜻입니다.

계속 죽고 또 죽고를 반복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따져 봤을 때 안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계속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따져봤을 때 태어난 게 없다는 의미입니다.

불생불멸이므로 윤회가 가능합니다.

본질이 空하기 때문에 윤회가 가능합니다.

우리의 몸에 정말로 영원한 실체가 있다면 죽을 수 없습니다.(상주론)

또한 정말 몸에 영원한 실체가 있는데도 죽었다면

그 실체도 또한 몸이 죽을 때 소멸돼서 없어져 버려야 하니 그것은 단멸론입니다.

空(불생불멸)이 곧 중도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아주 소멸되지 않습니다.

왜 소멸되지 않는가 하면, 소멸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후세계가 있고, 내생이 있고, 내생에 또 전생에 지은 업력을 받게 됩니다.

귀신영화/공포영화/전설의 고향같은 걸 보면 아주 웃긴 게 하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정말 웃긴데, 이걸 잘 안 따지고 보죠.

귀신이 멀쩡히 살아있으면서도 <나는 죽었어, 원수를 갚아야 해>하면서 복수하는 장면입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죽었다라고 여기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모습은 사실 꽤 웃긴 겁니다.

도를 닦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면,

아, 난 안 죽었잖아...아 신나네..이러면서 춤을 출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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