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241화 - 금주 감독관에 임명하다 (禁酒禁督)

 

이 이야기는 조선 후기

순조 4년(1804)에

나라에서 민간에

술을 빚지 못하도록

금주령을 내렸을 때,

경기도 안성군에서 있었던

실제 상황을 설화로 기술한 것이다.

 

갑자해(1804)에

금주령이 내려졌을 당시,

안성 고을에 한 선비가 있었다.

마침 그 부친의 생신을 맞이하여

동네 어른들을 초빙해야 하겠는데,

술을 빚을 수 없으니

큰 고민에 빠진 채 걱정을 하고 있었다.

'동네 노인들을 초청해 놓고

술이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술을 빚었다가는

국법을 어기는 꼴이 되어

벌을 받게 될 터인즉,

그 일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널리 다른 지방과 서울의 사정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한 선비는

먼저 서울의 사정을 탐지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서울의 아는 사람을 통해

여러모로 알아보니,

잔치 같은 경우에

술을 한 항아리 정도 빚어서

사용하는 것은

크게 규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 나도 술을 한 항아리만 빚어

부친 생신에 모인 노인들에게

한 잔씩 돌리도록 하자.

그래 가지고 잡혀가면

큰 죄인은 아니니,

자식된 도리로 내가

벌을 받으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은 선비는

부인에게 당부하여,

한 항아리만 술을 빚으라고 했다.

마침내 생신날이 되어,

동네에서 부친과 함께 어울리는

노인들을 모두 초빙했다.

 

이에 곧 빚은 술을 거르니,

서너 말의 탁주가 준비되었다.

그리하여 노인들은 오랜만에

술을 한 잔씩 마시면서

매우 유쾌해 했다.

이 때 부친의 친구 한 사람이

좌중을 죽 둘러보고는,

"그 참 이상하다.

매일 모임에 나오던 조생원(趙生員)이

지금까지 보이질 않으니

좀 걱정이 되는걸." 하고

다른 노인들은 다 모여

술을 한 잔씩 마셨는데,

조생원만 참석하지 않은 것에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생원의 성격이

원만하지 못하고

비꼬기를 잘하니

여러 사람들이

경계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마침 조생원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여러 손님들과 선비가

반갑게 맞이해 자리에 앉히고는,

모두들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면서

인사말을 건넸다.

이어서 선비가 한 잔 가득

술을 따라 올리면서 말했다.

"늦게 오신 손님은

술 석 잔을 드시는 게

향음(鄕飮) 모임의 관례이오니,

석 잔을 받으셔야 하옵니다."

그러자 조생원은

술잔을 받지 않은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선비를 꾸짖는 것이었다.

"자네는 양반의 자식으로,

어찌 이렇게

조정에서 금하는 술을 빚어

방자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여러 노인들은

술을 마시고 즐거워 하지만,

나는 국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네."

하고는 뿌리치고 일어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에 여러 손님들은 선비에게,

"저 사람은 천성이

충직한 것 같으면서도

시기심이 많고

남을 해치기를 좋아하니,

필경 관아에 고발할 것일세.

그러니 자네가 따라가서

빌고 애걸하여

모시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라고 말하면서

따라가 모셔 오라고 권했다.

 

곧 선비는 급히 따라가서

조생원을 잡고

이렇게 애걸했다.

"근래 서울에 알아보니,

혼인이나 장례 또는 잔치에

조금씩 술을 빚어 쓰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고 들었사옵니다.

마침 가친의 생신을 맞아

몇 말의 술을 담갔사온데,

어르신께서 함께 들지 않으시면

가친께서 매우 슬퍼하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어서 저의 집으로

돌아가셔서

술 한 잔 드시면서

노시기를 애원하옵니다."

 

그러자 조생원은

심한 말로 공갈과 협박을 하고는,

"자네 집의

몇 섬지기 밭을 내게 주면,

내 금년부터 농사를 짓겠노라.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내 한번 생각해 보지."

하고 말하면서

전답을 요구하자 선비는 거절했다.

"우리 집 밭이라곤

그것밖에 없사온데,

어른을 모시는 사람으로

그것마저 없으면

무엇으로 살아가겠습니까?"

 

이에 조생원은 이를 갈면서

주먹을 휘두르며 돌아가 버렸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선비가

조생원의 말을 그대로 아뢰니,

노인들의 의견은 이러했다.

"오늘 일은 자네 부친을 위한

헌수 잔치가 아닌가.

조생원까지 와서 함께

술을 마시고 놀았으면 좋았겠지만

저렇게 술을 마시지 않고 가버렸으니,

반드시 관아로 가서

고발을 할 걸세.

그러니 자네가 얼른 여기 남은

술 항아리를 가지고

관아로 달려가게.

그리고 관장 앞에 나아가

자세히 고하고

벌을 청함이 옳을 것 같네.

어서 술을 가지고 가게나."

 

이에 선비가

술 항아리를 짊어지고

관아로 달려가니,

중도에서 자기를 잡으러 오는

관노들을 만났다.

그래서 함께 관아로 들어가

군수 앞에

술 항아리를 올리고 엎드렸다.

 

이 때 보니 조생원은

이미 군수 옆에 와 앉아 있었다.

선비가 술 항아리를 바치는 것을 보고

군수가 물었다.

"너는 금주령이 내려져 있는 이때에

어찌 감히 술을 빚었으며,

또한 그 술을 가지고

관아로 온 까닭은 무엇인고?"

"예, 아뢰옵니다.

집안에 연로하신 부친이 계시어

대문 밖 출입을 못하는고로,

연세 높은 동네 분들께서

집으로 찾아와

장기며 바둑으로

소일하고 있었사온데,

전에는 술 한 잔을 드신 뒤

헤어지곤 했사옵니다.

그런데 금주령 이후로는

술 대신 더운 물로

대신해 왔사옵니다.

마침 가친의 생신을 맞아

서울의 소문을 들으니,

잔치에 약간의 술을 담그는 것은

허용된다고 하기에

소인도 약간의 술을 빚었사옵니다.

그리고 가친의 친구 분들을 초빙하여

한 잔씩 올렸사온데,

모두들 즐겁게 드셨지만

오직 조생원만 술을 드시지 않고

물러갔사옵니다.

그래서 따라가

함께 드시기를 애걸했더니,

농토를 뇌물로 요구했사옵니다.

그러나 소인의 가정 형편상

농토를 허락할 수 없기에,

조생원의 고발이

있을 걸로 알았사옵니다.

따라서 가만히 집에 있다가

관아에서 차사(差使)가 나오게 되면

가친께 헌수하려고 한 것이

도리어 걱정만 끼치는 것이 되겠기에,

이렇게 자진하여

죄를 청하는 것이옵니다."

 

이에 군수는

일부러 소리를 크게 질러 꾸짖고는

다음과 같이 엄명했다.

"들어라!

금주령이 내려진 가운데

술을 빚었으니

네 죄는 면하기 어렵도다.

그러니 벌로써 곤장 3대를 치게 하노라.

그리고 술독을 이미 관아에 바쳤으니

임의로 마시지 못할 것이니라.

그러나 네 집안 수연(壽宴)이라고 하니,

내 특별히 관아의 명령으로

그 술을 내리노라.

어서 가지고 가서

잔치를 하도록 하라."

 

군수는 이와 같이 판결하고,

선비에게 곤장 3대를 맞게 한 다음

술 항아리를 도로 가져가도록 했다.

이어서 군수는

조생원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엄명을 내렸다.

"생원은 날마다 만나서 놀던

동네 사람들의 안면도

돌아보지 아니한 채

의리를 단절하고,

사사로운 정리를 내버리면서까지

조정의 법을 지키려고 한 그 정신은

가히 지극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내 그 열의에 보답하고자

생원을 금도감관1)으로 임명하니,

1)금도감관(禁都監官) : 금지 명령을 어긴 사람들을 적발하는 관원.

이후로 관내에서 주금(酒禁)을 어긴 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내야 하느니라."

 

이에 조생원은 깜짝 놀라

사양하면서 아뢰었다.

"이 늙은 몸은 힘이 없어 돌아다니면서

수행하기 어렵나이다.

임명을 취소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사양했지만,

군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이방을 불러

속히 차첩(差帖)2)을

발급해 주라고 명했다.

2)차첩(差帖 : 임명장

 

이 후로 관내에서는

조생원의 성격을 알기에,

술을 빚는 집이 한 집도 없었다.

그러니 조생원은

한 건도 실적을 올리지 못해,

군수는 소임을

태만히 한 결과라고 하면서

벌을 내렸다.

곧 3일 후 매 10대를 때렸고,

또 3일 후 30대를 때렸으며,

그 3일 후에 40대,

또 3일 후에 80대,

이렇게 하여 한 달 동안

무려 3백여대의 매를 맞고 물러났다.

이와 같이

군수가 재량권을 발휘해 처리하니,

사람들은 모두

능력 있는 관장이라고 칭찬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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