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298화 - 듣는 건 마음에 달렸다 (聾聽隨意)

 

조선 시대에는 '지가죄인(止家罪人)'이란 것이 있어

백성들이 매우 곤욕을 치렀다.

 

지체 높은 고관이 출입할 때

행차 앞에서 길을 침범하는 사람이나

벌목이 금지된 산에서 나무를 자르는 사람,

그리고 길가에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 등

가벼운 범죄인을 군노나 포졸들이 잡았을 때,

다른 업무 처리가 남아 있어

관청으로 즉시 압송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럴 때에는 군노나 포졸들이 그 죄인을 근처 민가에 맡기고,

도망가지 못하게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 '지가 제도(止家制度)'이다.

 

이렇게 죄인을 일단 민가에 맡겨 두었다가,

처리해야 할 업무를 끝낸 다음

군노나 포졸들이 그 집에 와서

다시 죄인을 압송해 가는 제도인데,

죄인을 맡았다가 도망이라도 가게 되면

그 집에서 대신 벌을 받아야 하니,

민가에서는 그 피해가 적지 않았다.

 

한 재상이 멀리 출타를 하면서 가마를 타고 가는데,

앞에서 '길을 비키라'고 소리치는 벽제(僻除)를 계속 외쳤지만,

한 사람이 실수로 피하지 못하고 그만 행차를 침범하여

재상 집 하인들에게 붙잡혔다.

 

그런데 지금 행차를 멈출 수 없으니,

그 사람을 바로 치죄할 겨를이 없었다.

곧 하인들은 이 사람을 근처의 민가에 맡겼는데,

그 집은 팥죽을 쑤어 파는 노파의 집이었다.

 

이에 재상의 행차가 지나간 뒤 

노파는 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따가 잡혀 가면 곤장을 맞게 되는데,

가진 돈이 있으면 나에게 뇌물로 주구려.

그러면 내 풀어주리다."

 

이리하여 그 사람은주머니의 돈을 모두 털어 주니,

노파는 그 사람을 풀어 주며 달아나라고 했다.

 

그리고 노파는 태연히 팥죽을 팔고 있었다.

얼마 후 그 재상 댁 하인들이 나타나서는

맡겨 놓은 죄인이 없자

화를 내면서 노파에게 소리쳐 물었다.

 

"맡겨 놓은 지가 죄인은 어디로 갔느냐? 죄인을 내놓아라!"

"아, 팥죽을 사먹겠다고요? 몇 그릇을 드릴까요?"

노파는 귀가 들리지 않는 귀머거리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죄인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는 소리를

팥죽 사먹겠다는 말로 알아들은 척 꾸며서 한 말이었다.

 

이에 하인들은,

"팥죽이 아니라 지가죄인(止家罪人) 말이야, 지가 죄인!"

하고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노파는 조금 들린다는 듯,

이렇게 엉뚱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아, 우리 집은 남자들이 없고,

특히 '지가(池哥)' 성을 가진 사람도 없답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귀머거리 행세를 하면서

죄인을 맡고 있으라 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니,

하인들은 이 노파를 재상 집 집사 앞으로 끌고 가서

사실을 고했다.

 

하인들의 보고를 받은 집사가 소리를 높여 노파에게 물었다.

"너는 왜 잡고 있으라는 죄인을 마음대로 놓아 보냈느냐?"

"예, 나리! 쇤네는 나이 80세로 아무 것도 모릅니다."

 

"너는 왜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횡설수설하느냐?"

"아, 나리! 쇤네는 오로지 팥죽을 팔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파가 이같이 들리지 않는 척 하니,

집사는 화가 나서 죄인을 맡겼던 그 하인을 엎어 놓고

곤장을 치면서 말했다.

"길가에 허다한 집들이 있는데, 하필 귀머거리 노파의 집에다

죄인을 맡겼단 말이냐? 네가 대신 곤장을 맞아라!"

 

이러고 집사는 모두들 물러가라고 명령했다.

노파가 풀려 나오니 노파를 따라갔던 이웃 사람들이 물었다.

 

"할멈은 어찌 저 죄 없는 하인에게 곤장을 맞게 합니까?"

"아, 젊은 사람은 곤장 몇 대 맞아 봐야 아프지도 않다우."

 

이 때 곤장을 맞고 엉덩이를 만지면서 밖으로 나오던 하인이,

귀머거리 행세를 한 노파의 말을 듣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할멈은 지금까지 줄곧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어떻게 말소리가 들리오? 그 무슨 조화요?"

 

"내 귀는 말이지, 매우 신통해서

듣지 않아야 할 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들어야 할 때는 분명하게 잘 들린단 말이야.

그리고 남의 귀가 들리고 안 들리는 것을 왜 시비하는가?"

 

이러고 노파가 홱 돌아서 가버리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흔들면서 무서워하고 미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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