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3bJF0Drv30g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미당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1802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미당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이 작품은 미당 선생이 23세 때(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다.
출전:<시건설> (1939), <화사집>(남만서고, 1941)
[해설] 1연의 첫머리에 나오는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시인의 고백적인 문구가 사실에 기인된 것인지 궁금하여 찾아보니, 서정주 시인의 부친 서광한은 농감(農監)이었다. 농사꾼들을 관리하는 감독이었으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최하위의 '종'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몰론, 지주의 입장에서 보면, '종'일 수도 있겠다.
23세의 청년, 서정주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종'으로 인식되어 있고,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속한 시대의 국가 또한 그러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국가는 다름아닌 '종'이었고, 불가피하게 그가 견뎌야 하는 하나의 시련이었다.
*운영자 첨언: '종'이란 지금말로 하면 직장일에 얽매여, 가족 관계에선 어머니가 그토록 먹고 싶어하는 "풋살구" 하나 못 따다주는 바보 천치였다. 미당 선생님의 부친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의 부호인 인촌(仁村) 김성수(金成洙)님의 농감이었다. 인촌은 한때 고려대(1905년 설립) 설립자로 알려졌으나 학교측은 설립자 이름을 이용익으로 밝히고 있다.
상대적으로 이런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건만 그가 애비를 '종'이라 칭한 것은 그의 무의식의 심층에 투영된 '종"이기를 강요하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 표출임이 분명하다. 어떤 놈이 기획했는지 모르지만 호남 표 좀 모아볼까 하고 명성과 신뢰 높은 그 분을 선거방송 유세에 끌어들여 역사에서 매장시켜 버린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운영자는 선생님께서 마이크 앞에 앉아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원고를 들고 겁에 질린 당시 현장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선생님은 언제나 여유롭고 한가한 모습으로 살아오신 莊子 스타일에 어울리는 분이셨다. 일테면 소나기가 쏟아진다고 뛰어가실 분도 아니고 날씨가 좀 춥다고 호들갑을 떨 분도 아니셨다. 그냥 너털웃음을 지으며 씩 한번 미소지으면 상황끝인 그런 분이셨다.
공과를 따질 일이 있으면 그것대로 따지면 될 일이지 한 가지 일로 전체를 부정하는 그런 사회주의식 역사인식이나 인물 재단이 재발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선생님은 일제시대에도 저항시 등을 통해서 엄연히 한국어의 품격과 감성을 한 차원 상승시킨 천재시인이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예견이나 한 듯이 아래 시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그분의 고심에 찬 치렬한 삶은 아래 시구에서 더욱 명징하게 증명된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위 [해설]의 출전
https://blog.naver.com/nskim6896/221335322464
작품1은 어제 작고하신 누님이 극락왕생하여 먼저 가신 자형님 만나 이승의 사랑을 회복하기를 비는 마음에서고,
*자형님은 홍승표(홍우택) 남진공영 사장님이셨고, 누님은 김도자 여사입니다.
작품2는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는 시구에서 '바람' 을 '누님'으로 대치하고 싶은 심정 때문이었다.
누님의 영안실 사진과 함께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관련 동영상을 몇 꼭지 올립니다.
자형님과 누님의 극락왕생을 다시 기도합니다.
두 분게서는 부처님의 도량을 지니신 두 집안의 어버이셨으니 극락왕생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5797
https://www.youtube.com/watch?v=-KXRaPwgwr0
https://www.youtube.com/watch?v=UHHmFzMANf4&t=62s
https://www.youtube.com/watch?v=SDOyFrYP8zk
https://www.youtube.com/watch?v=6rQUTJwANSQ
https://www.youtube.com/watch?v=JrUzAFfkUD4&t=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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