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산 회암사 나옹화상탑 복원
이성계의 또 다른 왕궁, 회암사
https://www.youtube.com/watch?v=1lvXzqpu0VU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200640&code=kc_age_20
회암사의 창건 시기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회암사에 원경국사(圓鏡國師)의 글씨가 남아 있다는 언급이 있다. 또한 그 글씨를 본 금나라 사신의 일화에 관한 내용도 전한다. 원경국사(?~1183)는 인종(제17대 왕, 1109~1146, 재위: 1122~1146)의 아들이자 의종(제18대 왕, 1127~1173, 재위: 1146~1170)의 형제인 왕실 출신의 출가자였다. 1147년(명종 4)에 금나라 사신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고 원경국사가 1156년(명종 13)에 입적하였으므로 회암사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313년(충선왕 5)에는 승려 보우(1301~1382)가 회암사에서 광지에게 출가하였다. 보우는 공민왕대 왕사, 국사를 잇달아 지낸 승려이다. 인종~의종대의 왕자승인 원경국사의 글씨가 남아있고, 명종대 금나라 사신이 다녀간 것으로 보건대 12세기경 회암사는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회암사 중건과 관련하여서는 당대의 유명 문인들이 지은 기문이 전한다. 그중 이색(李穡, 1328~1396)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 에 의하면 나옹의 스승인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指空, ?~1363)이 회암사 지세가 서축(西竺) 난타사(蘭陀寺)와 같아 이곳에 사찰을 일으키면 국운이 도래하고 불법이 재흥한다고 예언한 수기(授記)에 의해 나옹이 중건을 시작하고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磵), 각전(覺田) 등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1344년(충혜왕 후5)에 나옹이 회암사에 머물면서 득도하였다. 이후 그는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만났다. 과거 나옹은 지공이 고려에 왔을 때 그에게 계(戒)를 받아 수지(受持)하였다. 나옹은 원에서 다시 지공을 만나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 일대) 소재의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면서 지공의 밑에 있다가 강남(江南)으로 내려가 저명한 고승들과 교류하였다.
나옹은 1358년(공민왕 7)에 고려로 돌아왔다. 그는 1360년에 공민왕의 요청으로 개경으로 들어와 입궐하여 설법하였는데 후에는 금강산(金剛山), 오대산(五臺山) 일대를 순력하며 지낸다. 공민왕은 불교 교단의 통합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양종오교(兩宗五敎) 승려들을 한 자리에 모아 처음으로 공부선(功夫選)을 시행하였는데 이것을 나옹이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에 나옹은 1370년(공민왕 19)에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서 이루어진 공부선을 주관하고, 법회를 마친 뒤 회암사로 돌아왔다. 공민왕은 다음 해인 1371년에 그를 왕사로 봉하고 당시 선종의 제1도량으로 여겨진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나옹은 송광사에 내려갔으나 그 다음 해인 1372년에 다시 회암사로 돌아온다.
앞서 나옹의 스승인 지공이 고려에 머무른 동안 회암사의 지형을 보고는 서축의 난타사와 같아 이곳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佛法)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하며, 그 터를 측량한 바 있었다. 나옹은 그러한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1374년(공민왕 23)에 회암사의 대대적인 중수를 시작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완성되어 낙성회(洛城會)를 열게 된다.
그러나 이후 회암사에 너무 많은 신도들이 몰리게 되면서 사헌부의 비판을 받았는데 도당(都堂)의 명으로 결국 절의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런데도 회암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자 조정에서는 아예 나옹을 추방한다. 그는 1376년에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향하던 중 병으로 신륵사(神勒寺)에서 쉬다가 결국 그곳에서 입적하게 된다.
*한글 창제 이전이어서 우리말을 한자로 표현함. 물론 이두와는 다름.
원효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은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 이두임.
문자는 오랜 세월 동안 그 형태를 변화하여 고착되기 마련인데,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신라시대의 노래인 향가 25수를 표기하지 않나, 세종 시절엔 표음문자인 산스크리어를 모델로 발음기관의 형태를 본떠 28자를 만들지 않나, 그래서 문자를 만든 날짜까지 명기한 걸 보면 한국인의 천재성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한문에 익숙한 고려말의 대표적 선승 나옹선사가 이런 노래를 남긴 건 기냥 예사일이다.
그는 려말 불교의 국가적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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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見指空
ㅡ지공(指空)화상을 찾아 뵙고 나서20)
喪亡自宗
상망자종,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군.
咄這瞎漢
돌저할한: 쯧쯧, 이 눈먼이여!
反入羅籠
반입라롱, 도로 그물망 속으로 빠져드는구나.
20) 나옹화상은 원(元)나라로 들어가 인도승 지공화상을 만나 가르침을 청하였다.
[성철 스님의 누구나 아는 일화]
나를 만나려려거든 부처님께 3천배를 하고 와라.
[교훈] 불교는 참 나[眞我]를 가르치는 종교다.
깨달음은 부처님의 법을 통해서 참 나인 佛性을 깨치는 것임. "나는 너를 깨칠 수 없다."
곧 칠불통게계(七佛通偈戒) 가 곧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들[七佛]의 가르침이다.
七佛이란 석가불 이전의 六佛과 함께 통칭하는 말,
https://kydong77.tistory.com/20780
◈ 제1존 비바시불 Vipasyin - 毘婆尸佛 <淨觀佛>
身從無相中受生
신종무상중수생, 몸은 모양이 없는 속에서 생명을 받은 것이니
猶如幻出諸形像
유여환출제형상, 형상으로 나타난 모든 것은 허깨비와 같다네,
幻人心識本來無 * 심식 心識 citta-vijinana: 인식하여 분별하는 마음
환인심식본래무, 허깨비 같은 사람의 심식도 본래 없는 것이니
罪福皆空無所住
죄복개공무소주. 죄나 복도 전부 허공과 같아 머문 곳이 없다네.
<파파라수波波羅樹 아래서 성불>
◈ 제2존 시기불 SSikhi - 尸棄佛 < 最上佛 佛頂 頂髮 >
起諸善法本是幻
기제선법본시환. 모든 선한 법을 지어내는 것이 본래 허깨비요
造諸惡業亦是幻 *환 幻 : 미혹 허깨비 妖幻 幻視
조제악업역시환, 모든 악업을 만들어 내는 것도 또한 허깨비라.
身如聚沫心如風
신여취말심여풍, 몸은 거품이 모인 것이요 마음은 바람 같으니
幻出無根無實性 *실성 : 眞如
환출무근무실성, 幻(환)에서 나온 것은 뿌리도 없고 實性도 없다네.
<분타리수分陀利樹 아래서 성불>
◈ 제3존 비사부불 Visvabhu - 毘舍浮佛 <遍一切處自在佛>
假借四大以爲身 * 사대四大 : 흙 물 불 바람[사물을 구성하는 원소]
가차사대이위신, 地水火風(지수화풍) 잠시로 빌려서 이 몸을 이루게 되니
心本無生因境有 * 무생無生 : 동요가 없음 不生不滅
심본무생인경유, 마음은 본래 무생이나 경계를 따라 생겨나네.
前境若無心亦無
전경약무심역무, 만약 앞선 경계에 무심하다면 마음 역시 없고
罪福如幻起亦滅
죄복여환기역멸, 죄나 복도 허깨비와 같아 일어나자 사라지네.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성불>
◈ 제4존 구류손불 Krakucchanda - 拘留孫佛 <所應斷已斷佛 頂結>
見身無實是見佛
견신무실시견불, 몸의 실상이 없음을 안다면 이는 부처를 본 것이오.
了心如幻是了佛
요심여환시요불, 마음이 허깨비임을 알았다면 곧 부처를 이룬 것이다.
了得身心本性空
료득신심본성공, 이 육신과 마음의 본래 성품이 공함을 깨달았거늘
斯人與佛何殊別
사인여불하수별, 이 사람이 어찌 부처와 다를 바가 있으리오.
<시리사수尸利沙樹 아래서 성불>
◈ 제5존 구나함모니불 Kanakamuni - 拘那含牟尼佛 <金寂靜>
佛不見身知是佛
불불견신지시불, 부처 몸은 볼 수 없고 아는 이것이 부처이다.
若實有知別無佛
약실유지별무불, 만약 참으로 안다면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智者能知罪性空
지자능지죄성공, 지혜로운 이는 죄의 성품이 공함을 알았기에
坦然不懼於生死
탄연불구어생사, 항상 태연하여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오잠파라수烏暫婆羅樹 아래서 성불>
◈ 제6존 가섭불 Kasyapa - 迦葉佛 <飮光佛>
一切衆生性淸淨
일체중생성청정, 일체 중생들의 성품은 맑고 깨끗해서
從本無生無可滅
종본무생무가멸, 본래부터 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네.
卽此身心是幻生
즉차신심시환생, 이 몸과 마음은 환으로 생겨난 것이니
幻化之中無罪福 환幻 : 허깨비
환화지중무죄복, 허깨비로 생긴 것은 죄도 복도 없다네.
<이구류수尼拘類樹 아래서 성불>
◈ 제7존 석가모니불 Sakyamuni - 釋迦牟尼佛<能仁寂默>
法本法無法
법본법무법, 法(법)엔 본래 법이 없음이 법이요
無法法亦法
무법법역법, 법이 없다는 법 또한 법이로다.
今付無法時
금부무법시, 이제 無法을 전하고자 하는 때
法法何曾法
법법하증법, 法 法하니 일찍이 무슨 법인고.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성불>
◈ 칠 불 통 계 게<七佛通戒偈>
諸惡莫作
제악막작, 모든 악한 일들은 짓지 말고
衆善奉行
중선봉행, 선한 일들은 받들어 행하라.
自淨其意
자정기의, 자기 마음을 깨끗이 맑히는 것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음>
是諸佛敎
시제불교, 이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
▲ 지공(가운데)과 나옹(오른쪽), 그리고 무학(왼쪽)은 삼대화상/ 여주 신륵사에 보관돼 있는 삼화상 진영.
법통(法統) 승계 - 지공(천축승)> 나옹> 무학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6133
https://kydong77.tistory.com/18370
臣 이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비명을 짓는다.
* 이색[ 李穡 ]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탑명 (塔銘)
전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랑 중문충보절동덕 찬화공신 중 대광한산군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지서연사 신이색 봉교찬
前朝列大夫 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 中文忠報節同德 贊化空臣 重 大匡韓山君
藝文官大提學知春秋官事*成均大司成知書硏事 臣 李穡 奉敎撰
臣 이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비명을 짓는다.
* 이색[ 李穡 ]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展也禪覺 惟麟之角
전야선각 유린지각
王者之師 人天眼目
왕자지사 인천안목
진실로 선을 깨친 이시며〔禪覺]
기린의 뿔이로다 * '코뿔소의 외뿔'의 표현인 듯. 기린은 두 뿔이니까.
임금의 스승이요
인천(人天)의 눈이로다. *人天 - 인간세계와 천상세계
萬衲宗之 如水赴壑
만납종지 여수부학
而鮮克知 所立之卓
이선극지 소립지탁
뭇 승려들 우러러보기를
물이 골짜기로 달리는 듯하나
선 바가 우뚝하여
아는 이가 드물다
隼夢赫靈 在厥初生
준몽혁령 재궐초생
龍神護喪 終然允藏
롱신호상 종연윤장
신령한 새매 꿈이
처음 태어날 때 있었고
용신 (龍神) 이 초상을 호위함하여
마지막 죽음을 빛냈도다
矧曰舍利 表其靈異
신왈사리 표기령리
江之闊矣 皎皎明月
강지활의 교교명월
하물며 사리라는 것이
스님의 신령함을 나타냈나니
강은 넓게 트였는데
달은 밝고 밟았도다
空耶色耶 上下洞徹
공야색야 상하동철
哉高風終 終古不滅
재고풍종 종고부멸
공(空)인가 색(色)인가
위아래가 훤히 트였나니
아득하여라, 높은 모습이여
길이 소멸치 않으리라.
[참고] 만해 한룡운 선생의 제자이신 춘성[春城] 스님은 사리 같은 나의 자취를 남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상은 소멸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니까요. 부처님의 다비식에서 여러 나라의 왕들이 나눠 가져간 것은 덜 태운 부처님의 뼈조각이엇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리탑이 생겼고, 불상이 조성된 것은 서력 기원 이후입니다.
於是世尊即說偈言。
그리고는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常者皆盡 高者必墮 合會有離 生者有死
항상할 것 같아도 모두 다 없어지고
높은 데 있는 것도 반드시 떨어지며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고
태어난 것은 언젠가는 죽느니라.
<법구비유경> 제1 무상품 中에서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118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https://www.youtube.com/watch?v=oGi4_qb2bJA
이 “팔만대장 부처님께” 시조창은 작자는 미상이다. 주제는 사랑하는 임을 다음 세상에서도 만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원하는 내용이다. 시조창 분류에 의하면 사설시조(辭說時調)로서 평시조부(乙부) 다음 단계로 甲부에 해당한다.
1. 시조보(時調譜)
◼초장(初章) : 팔만대장(八萬大藏) 부처님께 비나이다. 나와 임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중장(中章) : 여래보살(如來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오백나한(五百羅漢) 팔만가람(八萬伽藍)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종장(終章) : 후세(後世)에 환토상봉(還土相逢)하여 방연(芳緣)을 잇게 되면보살(菩薩)님 은혜(恩惠)를 사신보시(捨身報施). (하오리다)
2. 시조보 해설
◾ 팔만대장경 :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불교 경전을 새긴 나무판으로 불경(佛經)의 총칭이다. 합천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은 국보 제32호이며, 세계기록유산이다.
◾보살(菩薩) : 불교사전에 의하면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함.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부처님 다음가는 성인(聖人)” 이라는 뜻도 있다.
◾ 보리(菩提) : 불교에서 최상의 이상(理想)인 불타정각의 지혜 즉 깨달음을 의미한다.
◾ 여래(如來) : 석가여래 즉 부처님을 의미함
◾ 지장보살 : 석가 입멸(入滅)후 미륵불의 출세(出世)까지 무불의 세계에 머물러 중생을 화도(化導)한다는 보살
◾문수보살 : 여래의 좌편에 있어 지혜를 지니어 맡은 보살. 법신(法身), 반야(般若), 해탈(解脫))의 삼덕(三德)을 갖추고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지혜로 불도중에는 부모에 해당하는 보살
◾ 보현보살 : 불타(佛陀)의 이(理), 정(定), 행(行)의 덕을 맡아 보는 보살
◾ 오백나한 : 여래가 입멸한 뒤 “유고결집(遺敎結集)” 때 모였던 五百人의 아라한(阿羅漢 :소승불교의 수행자가 오료도달(悟了到達)하는 최고지위)
◾ 팔만가람 : 팔은 八方(온세상)을 의미하고 만(萬)은 “많다”는 의미이다, 가람(伽藍)은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 즉 “세상의 수많은 사찰”을 뜻한다.
◾서방정토 : 불교에서 멀리 서쪽에 존재한다는 아미타불의 세계. 즉 극락정토(이상향)을 말함
◾ 극락세계 : 아미타불이 살고있는 극락정토의 세계. 지극히 안락하고 아무걱정없어 행복한 세계(金色世界라고도 함)
◾관세음보살 : 대자대비(大慈大悲 : 그지없이 넓고 큰 자비로움)하여 중생이 괴로울 때 정성으로 그 이름을 외면 곧 구제(救濟)한다는 보살 (“관음보살” 이라고 함)
◾남무(南無) : “나무”로 읽는 범어(梵語). 돌아가 의지(依支)한다는 뜻
◾아미타불 : 서방정토에 있다고 하는 부처님.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이 부처를 모시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로 간다고 함(無量光佛이라고도 함)
◾환토상봉 : 죽은 뒤 환생하여 다시 고토(故土: 고향)에 돌아와 다시 만남
◾ 사신보시 : 수행보은(修行報恩)을 위하여 속세(俗世)에서의 몸을 버리고 불문(佛文)에 들어감.
https://www.youtube.com/watch?v=9oj7SxLuozc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 5행과 7행의 兮 : 어구를 맞추기 위해 덧넣은 字.
나머지 兮 는 7언한시가 아님을 나타낸, 우리말답게 표현한 덧글자.
위 청산시에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나옹화상의 불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출처] 청산은 나를보고(나옹선사)|작성자 인삼대장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118?category=851518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https://kydong77.tistory.com/18119
https://www.youtube.com/watch?v=1lvXzqpu0VU
양주 회암사 나옹화상탑 복원
* 아래는 산문 기술은 생략하고 운문인 銘만 발췌함.
원문은 하단의 글 참조. 나옹(懶翁)三歌 - 완주가,고루가, 백납가
탑명 (塔銘)
전조열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랑 중문충보절동덕 찬화공신 중 대광한산군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지서연사 신이색 봉교찬
前朝列大夫 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 中文忠報節同德 贊化空臣 重 大匡韓山君
藝文官大提學知春秋官事*成均大司成知書硏事 臣 李穡 奉敎撰
臣 이색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비명을 짓는다.
* 이색[ 李穡 ]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展也禪覺 惟麟之角
전야선각 유린지각
王者之師 人天眼目
왕자지사 인천안목
진실로 선을 깨친 이시며〔禪覺]
기린의 뿔이로다 * '코뿔소의 외뿔'의 표현인 듯. 기린은 두 뿔이니까.
임금의 스승이요
인천(人天)의 눈이로다. *人天 - 인간세계와 천상세계
萬衲宗之 如水赴壑
만납종지 여수부학
而鮮克知 所立之卓
이선극지 소립지탁
뭇 승려들 우러러보기를
물이 골짜기로 달리는 듯하나
선 바가 우뚝하여
아는 이가 드물다
隼夢赫靈 在厥初生
준몽혁령 재궐초생
龍神護喪 終然允藏
롱신호상 종연윤장
신령한 새매 꿈이
처음 태어날 때 있었고
용신 (龍神) 이 초상을 호위함하여
마지막 죽음을 빛냈도다
矧曰舍利 表其靈異
신왈사리 표기령리
江之闊矣 皎皎明月
강지활의 교교명월
하물며 사리라는 것이
스님의 신령함을 나타냈나니
강은 넓게 트였는데
달은 밝고 밟았도다
空耶色耶 上下洞徹
공야색야 상하동철
哉高風終 終古不滅
재고풍종 종고부멸
공(空)인가 색(色)인가
위아래가 훤히 트였나니
아득하여라, 높은 모습이여
길이 소멸치 않으리라.
https://kydong77.tistory.com/18121?category=851518
https://www.youtube.com/watch?v=hNAqBFOpqCg
나옹선사께서는 탐진치(貪嗔痴) 三毒을 버리랬더니 요즘 애들은 시류에 맞게 옷을 벗어 버리는군요. 참으로 웃음을 유발케 하는군요. 탐진치란 사리사욕에 도취한 탐욕, 벌컥벌컥 화를 내며 성질 부리는 것, 진리를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곧 三毒을 말합니다.
https://namu.wiki/w/%ED%9A%8C%EC%95%94%EC%82%AC
檜巖寺(址)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폐사되어 지금은 터만 남았다. 숭유억불 정책과 관련된 좋은 예시이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2.1. 조선 왕실의 원찰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 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좋아하였다. 반면 불교를 싫어한 태종 이방원은 불교가 국가 운영에 끼어들지 못하게 본격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했지만 재위 중 원경왕후가 병에 걸리자 승려들을 불러모아 '니들 평소에 그리 연마하는 도가 얼마나 효엄있는지 보자. 만약 아무 효과도 없으면 불교는 그날로 조선에서 완전히 박멸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아 승려들은 정말 내일이 없다는 심정으로 절박히 기도해서 원경왕후가 어느 정도 병세가 완화되자 태종은 회암사에 땅과 곡식을 내려주는 걸로 답례를 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 등에 힘입어 회암사도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반대하는 신료들을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또한 회암사는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석왕사처럼 더욱 특별히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아무리 유교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도, 한번 왕실의 전통으로 정착하면 단지 '왕실의 전통'이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명분을 획득하였다. "유교에 어긋나기는 하는데, 역대 선대왕님들도 인정하셨고 손 안 대셨잖아. 그러고도 선대왕들께서 잘못하셨다고 주장하냐?" 하고 물었을 때, "선대왕들께서 잘못하셨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2] 아무리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선대왕들의 품위를 지켜가며 공격해야 하니 논쟁에서 불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신하들,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자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왕실 사찰'로 기능하는 이 거대한 절이, 조선 유학자들의 눈에는 마치 레이드 떠야 할 보스급 몬스터처럼 보였을 것이다. 유생들은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리며 회암사를 공격하였다.
https://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11099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577
https://www.youtube.com/watch?v=_zDXu2hvV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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