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592- 영혼이 책을 부탁하다 (托友推冊)

연안(延安) 고을에

이씨 성을 가진 선비가 살았는데,

김씨 성을 가진 한 친구와

평생 정이 매우 두터웠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는 동네는

조금 떨어져 있었고,

근래 여러 달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

 

하루는 이씨 선비가

김씨 친구를 한번 만나 보려 마음먹고,

오후 늦게 집을 나서

김씨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씨 선비는 가는 동안

신발이 작아 발이 아파 오자

쉬고 또 쉬며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원 참, 무슨 해가 이렇게 짧단 말이냐.

벌써 어두워지내.'

이씨 선비는 해가 이렇게 짧은가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어두컴컴한 길을 걷노라니,

뜻밖에도 김씨 선비가 저쪽에서

마주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지 이씨 선비는 달려가서

친구의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하니,

김씨 선비도 반가워하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니 이 사람아,

오랜만이구먼.

어디를 이렇게 가는가?"

"나 말일세.

자네를 오랫동안 못 봐서

자네 집에 가는 길인데,

여기서 이렇게 만났구먼.

그 간 별고 없었나?"

김씨는 친구가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말에

멈칫하며 말했다.

"뭐야? 우리 집으로

날 만나러 오는 길이라고?

허면 길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됐구먼.

이제 도로 집으로 돌아가게나."

"아닐세. 이미 이렇게 집을 나섰고

날도 어두워졌으니,

여기서 가까운 자네 동네 근처로 가서

다른 친구 좀 만나 볼 참이네."

 

이씨 선비가 자기 동네 근처로

가겠다는 말을 들은

김씨 선비는 기뻐하면서 다가섰다.

"그러면 됐네.

이왕 우리 동네 근처로 간다면

내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는데,

내 말 좀 전해 주겠나?"

"응,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내 가는 길에 전하겠네."

이에 김씨 선비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내 평생 어느 책을 좋아하는 줄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 아무개 친구가 빌려가서는

오래도록 돌려주질 않는구먼.

내 지난날 가서 돌려 달라니

아직 덜 읽었다면서

돌려주지 않더라고.

그러고 몇 달 지나 다시 독촉을 했는데,

역시 못다 읽었다면서 안 주는 거야.

그 책은 말이지,

한 군데는 담뱃불로 인해

여러 장이 탔고,

또 몇 군데는

약간씩 탄 흔적만 있다네.

그러니 자네 우리 집으로 좀 가서,

아이들에게 그 책을 찾아다가

내 방에 놓아두라고 전해 주게나."

 

이 말을 들은 이씨 선비는

다소 의아해 하며

이렇게 물었다.

"아니, 이 사람아!

그런 일이라면 급하지도 않은데

자네가 뒷날 천천히 찾아오면 되지,

왜 그걸 나한테 부탁하는가?"

"이 친구야! 난 지금 죽은 몸일세.

그래서 아무에게도 부탁할 수가 없어

자네를 만난 김에 부탁하는 것이니,

우리 집에 들러 그 책을 꼭 찾아다가

내 탁자 앞에 놓아 달라고

말해 주기 바라네."

그러고 나자 김씨 선비는

문득 간 곳이 없었다.

 

이씨 선비는 마치 꿈을 꾼 듯

의아하게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여

김씨 선비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과연 그가 사망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난 뒤였다.

이씨 선비는 빈소에 들어가

애도를 표하고

집안사람들한테 그 말을 전했다.

그리고 책을 찾아오라고 해서 살펴보니,

과연 담뱃불에 탄 흔적이

아까 들은 말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씨 선비는 통곡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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