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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書經)>(53) 상서(商書)(1)
상(商)나라 시대의 사적을 기록해둔 것이라고 하여 상서(商書)라 일컫게 되었는데, 상(商)은 성탕(成湯)
의 조상이 봉함을 받은 땅의 이름이었다. 성탕이 무도한 하(夏)의 걸왕(桀王)을 쳐서 멸망시키고 국호를
상(商)이라고 한 것이다. 상왕조(商王朝)는 기원전 1751~1111년까지 영화를 누리며 충국 대륙을 통치해
온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상왕조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지는데, 성탕으로부터 그후 360여년간을
전기로 보고, 제17대 임금 반경(盤庚)에 이르러 은(殷)땅으로 천도한 기원전 1384년 부터 상(商)의 멸망
까지를 후기로 본다. 반경은 즉위한 지 15년 째 되던 해에 천도를 하였으며, 이후 상(商)을 은(殷)이라고
도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지금 알려져 있는 상대(商代)의 기록과 역사적인 자료및 기타 문물이 모두 이
시대에 남겨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상서 가운데 남은 기록은 <금문상서>의 탕서(湯誓),반경(盤庚),고종
융일(高宗肜日), 서백감려(西伯勘黎), 미자(微子)의 5편과, <위고문상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중훼지고
(仲虺之誥), 탕고(湯誥), 이훈(伊訓), 태갑(太甲), 함유일덕(咸有一德), 열명(說命)의 6편인데,이 작품들
가운데 상중하로 나뉘어진 것이 있어서 총 17편에 이른다.
제1편 탕서(湯誓)(1)
탕(湯)은 순(舜)과우(禹)를 보좌하여 상(商)의 제후로 봉함을받은 설(契)의14손(孫)이다. 원(原)은 천을
(天乙)이라 하며, 성탕(成湯)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무력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무왕(武王) 이라고 일컬었다. 이 탕서는 탕왕(湯王)이 무도한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쳐부수어야 하
는 취지를 밝힌 것이다. 상(商)은 탕왕(湯王)에 이르러 지금의 하남성(河南省)동쪽과 산동성(山東省) 서
쪽의 평원을 점유한 강대한 제후로 부상하여 하(夏)와는 동서(東西)로 대치한 국면에 놓여 있었다. 야심
만만한 탕왕은 이윤(伊尹)이라는 재상을 등용하여 힘을기르면서 점차적으로 부근의 제후들을 합병하여
동방의 영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하(夏)를 토벌하게 되었는데, 제후로서는 처음으로
그 임금을 정벌한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할 것 인지 두려웠다. 출사(出師)에도 신중을 기
하였거니와, 하(夏)를 정벌해야 하는 취지를 그의 도읍지인 박(亳)에서 제후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
다. 그것이 곧 이 탕서(湯誓)인 것이다.
[1] 하(夏)나라가 죄를 지었으니 정벌해야 한다.
王曰(왕왈) : 탕왕(湯王)이 말하였다.
格爾衆庶(격이중서) 悉聽朕言(실청짐언)
"고하노니 그대들이여, 모두 짐의말을 들으라.
非台小子(비태소자) 敢行稱亂(감행칭란)
결코 내가 경솔하게, 감히 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有夏多罪(유하다죄)
하(夏)나라의 죄가 많기에,
天命殛之(천명극지)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그를 멸하게 한 것이다.
今爾有衆(금이유중) 汝曰(여왈)
지금 그대들 무리가 있기에,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我后不恤我衆(아후불휼아중)
‘우리 임금이 우리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고,
舍我穡事(사아색사)
우리들 농사를 그르치게 하고,
而割正夏(이할정하)
하(夏)나라를 치게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予惟聞汝衆言(여유문여중언)
나도 그대들의 말을 들었다.
夏氏有罪(하씨유죄) 予畏上帝(여외상제)
그러나 하나라의 왕이 죄를 지은 이상, 나는 하늘이 두려워서,
不敢不正(불감부정)
감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탕왕은 천하의 민심이 동요될까 염려한 나머,지 하(夏)를 정벌하는 것은 오로지 하(夏)의 걸왕(桀王)이
무도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한 하늘의 뜻이라는 요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상
(商)의 시조(始祖) 설(契)은, 순임금과 우(禹)를 보좌하여,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邱縣)인 상
(商)에 봉함을 받아서 탕왕에 이르기 까지 여덟 번이나 천도하였으며, 그 범위는 대체로 지금의 하남성
(河南省)과 산동성(山東省), 그리고 하북성(河北省)의 접경 지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
서 상(商)에 살았던 시기가 가장 길었으며, 14대인 탕왕에 이르러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박현[亳縣:일
설에는, 산동성(山東省) 조현(曹縣)]에 살기 시작 하였다. 탕왕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자, 하(夏)의 걸왕
(桀王)은 이를 시기하여, 한 때는 탕왕을 유리(羑裏)의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탕왕은 여전히
하나라의 걸왕을 감히 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하의 걸왕에게는 아직도 제후의 지지가 있었기 때
문이다. 반면 하의 걸왕은 제후를 유잉(有仍) 땅에 모이게 하였는데, 유민씨(有緡氏)가 이에 따르지 않
자, 공격하여 망하게 하는 등 점점 방자하게 굴었다. 따라서 제후 가운데 위씨(韋氏)·고씨(顧氏)·곤오씨
(昆吾氏)등이 걸과 결탁하여 어지러운 정치를 자행하여 백성들을 학대하였다. 그래서 걸왕에게로 화살
을 돌렸지만, 하와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 이족(夷族)이 아직도 걸왕(桀王)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이 때 재상으로 있던 이윤(伊尹)이 공물을 바치지 말고 동정을 엿보라는 계책을 올렸으므로, 탕왕이 이
계책을 따랐다. 그러자 걸왕은 크게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들을 일으켜 상(상)을 정벌하려고 하였다.
이윤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알리고 용서를 빌도록 하였다. 성탕은 걸왕에게 사죄하고 다시 신하
의 노릇을 했는데, 그 이듬해 다시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노한 걸왕이 구이의 군사를 일으
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윤의 계책을 실천에옮겨 성탕이 군사를 일으키니, 지
금의 산서성(山西省) 안읍현(安邑縣)인 명조(鳴條)에서 동과서의 대군이 격돌하기에 이르렀다. 천운이
다한 듯 재위 53년 만에 걸왕은 크게 패하여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소현(巢縣)인 남소(南巢)로 쫓겨가
3년후에 안휘성 화현(和縣)인 정산(亭山)에서 죽으니, 이로써 하왕조가 멸망한 것이다. 이때가 바로 기
원전 1751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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