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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불교논집 2집.1992.
方仁* , 新羅 佛敎思想史의 太賢 唯識學의 意義
*경북대 철학과 교수
Ⅰ. 서론
Ⅲ. 相宗(상종)과 性宗(성종)에의 귀속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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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계속>첫 번째 중간 ㉯>두 번째 중간 ㉰>세 번째
Ⅳ. 新羅唯識思想史(신라유식사상사)에서의 太賢(태현)의 위치 중간>元曉(원효)는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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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①>화엄종의 융성은 ~ 중간 ②>서명학파에는 ~ 중간 ③>유식론의 대표적 ~
Ⅴ. 결론
以上(이상)에서 태현의 性宗(성종)과 相宗(상종)의 귀속문제에 관한 세 가지 가설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 세 가설들이 갖는 타당성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하자.
첫 번째 高翊晋(고익진)의 학설에 대해서 살펴보자. 고익진은 태현의 起信論內義略探記(기신론내의략탐기)가 元曉(원효)의 起信論疏(기신론소), 別記(별기), 二障義(이장의)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원효의 발언을 인용하는 의도 자체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즉 원효는 起信論(기신론)을 唯識論(유식론)이나 瑜伽論(유가론)보다는 더 우월한 교리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현은 그런 견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두 논지가 결국 같은 뜻이라는 元曉(원효)의 和(화)등的(적)인 말만을 되풀이 引用(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효의 화쟁적인 발언이란 起信論(기신론)과 唯識(유식)을 '二意雖異 識體無二(이의수이 식체무이)'라는 관계에서 파악한 것을 말한다. 즉 起信論(기신론)과 唯識(유식)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다른 주장을 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본질인 識體(식체)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는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효의 敎相判釋(교상판석)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원효는 결코 唯識(유식)과 起信論(기신론)을 같은 차원에서 본 적이 없고 오히려 그의 起信論別記(기신론별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中觀(중관)을 "往而不遍論(왕이불편론)"으로, 瑜伽(유가)를 "與而不奪論(여이불탈론)"으로 비판하면서도
起信論(기신론)에 대해서는 "諸論(제론)의 祖宗(조종)"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朴太源(박태원)은 그의 논문 [見登(견등)의 起信論觀(기신론관)]에서 고익진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익진은 이상과 같은 논거들에 입각하여 태현의 기신론관은 원효와는 판이한 것으로서 결국 태현은 원효계 화엄승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 論者(논자)로서는 태현이 원효계인지 아닌지를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內義略探記(내의략탐기)의 내용에서 엿볼 수 있는 태현의 기신론관은 원효와 판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唯識(유식)과 起信(기신)을 同類(동류)로 회통하여 해석하는 것은 원효의 중요한 특징이며 태현은 원효의 그러한 견해를 온전히 발췌하고 있기 때문이다.
朴太源(박태원)이 고익진의 견해를 논박하고 있는 이유는 고익진이 원효와는 다른 입장에 속한다고 보여지는 증거로서 제시하고 있는 태현의 발언이 사실은 태현이 그대로 轉載(전재)하고 있는 元曉(원효)의 말을 태현의 말로서 고익진이 誤認(오인)한 데서 비롯된다고 보는 데 있다.
박태원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고익진이 그의 책 [한국고대불교사상사] p.353 상단에서 태현의 이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부분이다. 고익진이 이 부분에서 완전한 착각에 빠졌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확인된다.
왜냐하면 고익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으로써 그 인용문을 태현의 발언으로 착각하고 있음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태현은 어떤가? 中觀(중관), 唯識(유식)에 대한 상기 원효의 비평을 전혀 소개치 않고 다음과 같은 딴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불교전서 3-746-a에 실린 태현의 글은 한국불교전서 1-735- c-736-a에 실린 元曉 撰(원효 찬 ) [大乘起信論記會本(대승기신론기회본)]으로부터의 인용이다. 두 글을 대조해보면 몇 글자만 빼고는 동일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태현이 기신론의 一心二門(일심이문)의 체계를 發心(발심;一心)과 止觀雙運(지관쌍운;二門)의 瑜伽行(유가행)의 체계로 돌려놓고 있다는 그의 견해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一心二門(일심이문을 태현이 唯識的(유식적)으로 각색하고 있다는 고익진 견해의 잘못을 지적한 박태원의 견해는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고익진은 태현의 유식가적 입장이 과연 그의 기신론해석에 얼마 만큼이나 반영되어 있는가를 충분히 밝히지 못하였다. 고익진의 견해는 태현이 원효의 저술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오히려 逆(역)으로 유식을 옹호하려 했으며,
見登(견등)은 다시 元曉系(원효계) 화엄의 입장에서 이를 반격한 것이라는 너무도 대담한 가설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고익진의 입론이 확증되기 위해서는 좀 더 정밀한 태현의 기신론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고익진의 견해가 잘못이라면 박태원의 주장, 즉 "內義略探記(내의략탐기)에서 엿볼 수 있는 태현의 기신론은 원효와 판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唯識(유식)과 起信(기신)을 同類(동류)로 회통하여 해석하는 것은 원효의 중요한 특징이며 태현은 원효의 그러한 견해를 온전히 발췌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명제는 정당화되는 것인가 ?
필자는 원효가 起信論(기신론)과 唯識(유식)을 同類(동류)로 會通(회통)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元曉(원효)가 그의 敎相判釋(교상판석)에서 中觀(중관)과 唯識(유식)을 止揚(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봄으로써 起信論(기신론)을 그것들보다는 더 우위에 놓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元曉(원효)가 起信論(기신론)을 敎判(교판)에 포함시키지 않음으로써 원효사상 내에서의 起信論(기신론)의 위치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원효의 기신론 해석을 검토함으로써 명확해질 수 있는 문제이다.
원효가 敎判(교판)에서 三乘別敎(삼승별교), 三乘通敎(삼승통교), 一乘分敎(일승분교), 一乘滿敎(일승만교)로 나누고 中觀(중관)과 唯識(유식)을 三乘通敎(삼승통교)로 나누고 中觀(중관)과 唯識(유식) 사이에 아무런 가치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起信論(기신론)도 그러한 범주에 포함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三乘(삼승)은 方便(방편)의 敎(교)요, 一乘(일승)은 眞實(진실)의 敎(교)라는 法華經(법화경)의 체계에 따른다면 起信論(기신론)은 一乘(일승)의 道理(도리)에 속한다.
起信論(기신론)의 내적 논리체계에 따른다고 할지라도 一心(일심)은 窮極(궁극)의 道理(도리)요, 一心이 다시 眞如門(진여문)과 生滅門(생멸문)을 갖는다. 여기서 원효는 生滅門(생멸문)을 唯識(유식)에, 眞如門(진여문)을 中觀(중관)에 해당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一心은 眞如門(진여문)과 生滅門(생멸문)의 止揚(지양)일 수밖에 없으므로 一心의 논리를 본바탕으로 하는 起信論(기신론)은 中觀(중관)이나 唯識(유식)보다는 優位(우위)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元曉(원효)의 會通(회통)이 모든 것을 同一化(동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거니와 그렇다면 太賢(태현)은 그러한 元曉(원효)의 논리와 같은 범주에 포함되는 것인가? 태현이 起信論(기신론) 해석에서 원효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확실해보인다.
왜냐하면 태현이 起信論內義略探記(기신론내의략탐기)에서 주로 참고하고 있는 것이 法藏(법장)의 大乘起信論義記(대승기신론의기)와 더불어 원효의 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와 大乘起信論別記(대승기신론별기)이기 때문이다.
원효가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을 衆典之肝心(중전지간심)이라고 말한 것처럼 태현도 [대승기신론]을 馬鳴菩薩(마명보살)이 一切(일체)의 外道(외도)를 물리치기 위해서 지었다고 말함으로써 매우 높은 地位(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法藏(법장)이 그의 敎判(교판)에서 불교의 제 종파를 나누어 小乘(소승) · 大乘初敎(대승초교) · 大乘終敎(대승종교) · 頓敎(돈교) · 圓敎(원교)의 다섯 단계로 하였는 바,
그 중에서 唯識(유식)을 두번째 단계인 大乘初敎(대승초교)에, 그리고 起信論(기신론)을 세번째 단계인 大乘終敎(대승종교)에 배치한 분류법을 태현이 그대로 따르고 있느냐 하는 데 있다.
丁永根(정영근)은 태현이 法藏(법장)의 意見(의견)에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데, 이에 따르면 태현은 法藏(법장)과는 달리 起信論(기신론)을 最高(최고)의 단계에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태현은 華嚴五敎判(화엄오교판)을 그의 이론의 틀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五敎(오교)의 深淺(심천)을 판별하고 있지 않다. 사실 이 모든 문제는 태현의 [기신론]관이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은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필자는 잠정적으로 假說的(가설적) 성격의 추론을 제시하려고 한다. 태현이 大乘起信論內義略探記(대승기신론내의략탐기)를 저술할 당시 그는 唯識家(유식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起信論(기신론) 계통이나 如來藏(여래장) 계통 사상가도 아니었다.
만일 그가 唯識家(유식가)이거나 起信論(기신론)계통이라면 그의 [略探記(약탐기)]에서 구태여 法藏(법장)의 五敎判(오교판)의 체계를 사용해서 논의를 펼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法藏(법장)의 五敎判(오교판)의 체계는 철저하게 태현의 起信論(기신론) 해석의 방법론으로서 채용되고 있거니와 이는 태현이 그러한 敎判(교판)체계를 수용하고 있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略探記(약탐기)를 쓸 당시의 태현은 華嚴思想家(화엄사상가)이다. 왜냐하면 五敎判(오교판)에서 최고의 단계는 圓敎(원교)로서 이는 華嚴(화엄)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번째 학설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보다 통찰력을 가지고 검토할 수 있겠다. 과연 太賢(태현)에게 前記(전기)의 性宗(성종)에서 後期(후기)의 相宗(상종)에로의 사상적 전환은 있었는가 ?
만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태현에게 華嚴思想家(화엄사상가)로서의 시절이 있었다면 그가 인생의 後半(후반)에 唯識家(유식가)였던 것은 너무나 분명하므로 그는 性宗(성종)에서 相宗(상종)으로 전환한 것이 된다.
실제로 태현이 자기의 저서 菩薩戒本宗要(보살계본종요)의 말미에서 한 그의 인생에 대한 회고는 태현에게 그러한 학문적 전환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회고는 그의 菩薩戒本宗要(보살계본종요)에 나오는 것이므로 이 菩薩戒本宗要(보살계본종요) 자체는 적어도 이 회고의 기록에서 언급된 唯識判(유식판), 瑜伽記(유가기) 以後(이후)의 작품임을 부수적으로 알 수 있다.
내가 모든 理論(이론)과 교파를 편력하여 여러 차례 이를 보배삼아 지금까지 이르렀다.
少年(소년)의 나이도 가득 차니 이제서야 半錢(반전)의 利益(이익)을 얻었도다. 이 요긴한 門(문)을 자주 드나들어, 나중에서야 古迹(고적)을 修集(수집)하게 되었다.
이것은 [瑜伽記(유가기)]와 이에 아울러 첨부한 頌(송)의 경우와 같다. 내 마음대로의 즐거움을 펼쳤으니 이것은 [唯識判(유식판)] 一卷(일권)의 경우와 같다. 행여나 같은 뜻을 둔 자가 있으면 해서 자세히 하여 이를 決擇(결택)하였다.
여기서는 태현 자신이 일체의 理論(이론)과 宗派(종파)를 섭렵하였으나 이제서야 반푼어치의 이익을 얻게 되었음을 겸손하게 회고하면서 古迹記(고적기)에 해당되는 저술들이 그의 인생의 後期(후기)에 지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가 여기서 자신의 저술로서 언급하고 있는 瑜伽記(유가기), 唯識判(유식판) 등은 모두 唯識(유식)관계 저술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역시 唯識(유식)관계 저술들이 그의 後期思想(후기사상)의 주요부분일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태현이 자기자신에게 사상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다. 태현의 저술목록이나 현재 남아있는 태현의 저술을 분석해볼 때 태현이 唯識(유식)학승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그의 현저한 특징이다.
문제는 그가 한때 화엄학승이었다가 나중에 유식학승으로 전환한 인물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화엄과 유식의 경향을 겸비한 사람이었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사실 태현의 학적 체계가 방대하고 그의 저술이 소위 性宗(성종)의 것으로부터 相宗(상종)의 것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발견되며,
또 한편으로 태현의 唯識(유식)의 연구가 대부분을 차지하면서도 華嚴(화엄)이나 起信論(기신론) 관계의 것이 작은 양이나마 발견된다는 것을 미루어 본다면 그가 한때 젊은 시절 性宗(성종)의 문헌에 침잠하였다가 드디어는 유식에 몰두하여 그의 종국적인 입장,
즉 유식가의 면모를 굳히게 되었다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할 것은 태현이 한때 화엄학승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태현이 살던 시기는 법상종의 세력과 화엄종의 세력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였으며 태현은 그의 當代(당대)에 이르러 바야흐로 강성해져가는 화엄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화엄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초기 사상에 한정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가 청년기에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화엄종의 교리에 매력을 느꼈을 수도 있으나 설령 그가 華嚴(화엄)의 교리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단기간에 그쳤을 가능성이 짙다.
왜냐하면 現存(현존)의 태현의 저술목록 중에서 화엄에 관한 것은 [華嚴經古迹記(화엄경고적기)]와 [佛地論古迹記(불지론고적기)] 等(등) 2개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설의 타당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가설이 상정하고 있는 것은 태현이 초기의 性宗(성종)의 입장으로부터 후기의 相宗(상종)으로 전환한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性相融合的(성상융합적)인 경향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일본학자 富貴原章信(부귀원장신)은 性相融和(성상융화)적인 측면이 단지 태현에게서만 보이는 모습일 뿐 아니라, 신라의 유식가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었던 경향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신라의 불교는 본래부터 華嚴宗(화엄종)의 경향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이미 전에 圓光(원광), 慈藏(자장)의 시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경향으로서 그 뒤에 더욱 뚜렷해진 것이다. 특히 신라의 法相宗(법상종) 가운데에는 화엄적인 색채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라불교의 性相圓融的(성상원융적)인 특징은 단지 화엄적인 색채에 그치지 않는다. 新羅(신라)의 法相學者(법상학자)들은 起信論(기신론) · 楞伽經(능가경) · 寶性論(보성론) · 佛性論(불성론) · 馬鳴生論(마명생론) 등을 광범위하게 연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의 法相(법상)학자들, 특히 慈恩(자은) 계통의 학자들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경향이다. 또 淨土(정토)의 三部經(삼부경)이 신라의 法相學者(법상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는 점도 중국의 법상학자들에게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勝莊(승장) · 太賢(태현) · 元曉(원효) · 義寂(의적) 등은 梵網經(범망경) · [쫴珞經(쫴낙경)] 등 菩薩戒(보살계)의 講究(강구)에도 몰두하였다는 것에도 주목할 수 있다. 大乘戒(대승계)의 연구는 중국에서보다도 오히려 신라에서 더 성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가령 性相融合的(성상융합적)이라고 할지라도 敎判(교판)에 있어서 華嚴(화엄)을 最高(최고)에 위치시키는 입장과 唯識(유식)을 頂点(정점)에 두는 입장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태현이 性相融合的(성상융합적)인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法相學者(법상학자)임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 본다면 性相融合的(성상융합적) 태도를 취한다 할지라도 화엄승들과 대립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고 하겠다.
어떤 사람이 이론적인 면에서는 融合的(융합적)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러한 경향성이 발휘되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元曉(원효)와 같은 會通的(회통적)인 인물의 경우 당시의 불교계의 인물들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므로 태현의 性相融合的(성상융합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태현이 화엄승려들과 갈등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以上(이상)의 세 가설들 중에서 필자는 두번째 가설을 지지한다.
이 두번째 假說(가설)이 事實(사실)로서 확증되기 위해서는 태현의 大乘起信論內義略探記(대승기신론내의략탐기)의 내용에 대한 좀더 철저한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 두번째 가설이 확증된다고 할지라도 세번째 가설이 완전히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태현이 性宗(성종)에서 相宗(상종)으로 전환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性相兼備(성상겸비)의 태도를 堅持(견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유식승임에는 변함이 없다.
태현의 저술은 비록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나 그것이 설령 戒律(계율)사상이나 淨土(정토)사상에 관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유식사상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태현은 본질적으로 유식학승인 것이다.
Ⅳ. 新羅唯識思想史에서의 太賢의 위치;(신라유식사상사에서의 태현...)
신라사상사는 그 나름대로의 다양한 흐름을 형성하며 전개되어 왔다. 그 가운데에는 淨土(정토)사상의 흐름이 있는가 하면 또 미륵사상, 반야사상, 화엄사상, 유식사상 등 매우 다양하게 펼쳐져 온 것이다.
이러한 신라사상의 다양성의 특징에 주목하여 학자들은 이를 通佛敎(통불교)라든가 아니면 會通佛敎(회통불교)라든가 하는 이름으로 불러 왔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인 특성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불교는 도대체 어떤 종파도 형성한 적이 없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더 구체적으로 新羅(신라)의 法相宗(법상종)의 성립에 관련해서 金煐泰(김영태)는 신라시대에 法相宗(법상종)이 성립하였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주장하고, 또 五敎九山(오교구산)의 하나로서의 法相宗(법상종)의 성립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가 종합적이고 융합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해서 그러한 성격을 한국불교가 지녔던 하나의 특징 내지는 경향성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불교를 모두가 융합된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불교에서 禪宗(선종), 淨土宗(정토종), 華嚴宗(화엄종), 法相宗(법상종) 등으로 불리우는 것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교리의 이해체계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고유한 활동근거지를 형성하여 하나의 특수한 집단으로서의 특징을 유감없이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들 종파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타 종파와 경쟁적인 관계 내지는 친근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갔다. 따라서 어느 시기에 어떤 특정한 종파가 그 시대 사상계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보여진다.
신라 법상종의 존재가 실체로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단일한 학파 내지는 신앙집단의 존재를 확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신라의 法相宗(법상종)이 모두 동일한 계통에 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다.
文明大(문명대)는 신라 법상종의 계보를 圓測(원측) · 太賢系(태현계)와 圓光(원광) · 眞表系(진표계)로 구분한 바 있다.
金南允(김남윤)은 여기서 더 나아가 태현계의 法相宗(법상종)을 학파불교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眞表(진표)계의 法相宗(법상종)을 민중불교적인 것으로 정의하면서 진표계의 법상종이 태현계보다 약간 늦게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 학파불교 안에서도 다양한 흐름은 공존할 수 있는 바, 신라유식학자들을 모두 西明學派(서명학파)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神(신)꾼이나 遁倫(둔륜)은 설령 그들이 같은 신라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서명학파와 아무런 계보적 관련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설령 유식이론에 있어서 동일학설을 공유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法相宗(법상종)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들이 唯識家(유식가)인 한에서는 유식적인 敎判(교판)을 신봉할 것이고 唯識(유식)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신봉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法相宗(법상종) 계통의 학자들은 그들 내부에서는 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역시 그 大義(대의)에 있어서는 일치하였으며 타 종파와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順璟(순경)이 華嚴經(화엄경)의 初發心(초발심)의 때에 正覺(정각)을 이룬다는 구절을 신봉하지 않다가 산 채로 지옥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兩者(양자)의 대립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신라불교에서 法相宗(법상종) 내지 瑜伽派(유가파)가 발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불교는 본래 說一切有部(설일체유부)를 비롯하여 律宗(율종), 瑜伽(유가), 華嚴(화엄) 등의 다양한 흐름이 수입 전파되기 시작했다. 중국에 흥했던 攝論宗(섭론종)이 新羅(신라)에 전래되어 발전하게 된 것은 圓光(원광)과 慈藏(자장)에 의해서였다.
中國(중국)의 攝論宗(섭론종)이 처음으로 신라에 도입된 것은 眞平王(진평왕; 579∼631)의 시기로 보인다. 眞平王(진평왕) 때는 신라불교의 황금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로서, 이 시기에 新羅人(신라인)으로서 攝論宗(섭론종)을 수용한 최초의 인물은 황룡사의 圓光(원광; 532∼630)이다.
圓光(원광)에 의하여 攝論宗(섭론종)이 도입됨에 따라 신라불교는 진평왕 中期(중기) 이후에는 그 영향을 받게 된다. 圓光(원광)의 뒤를 이은 慈藏(자장)은 황룡사에서 攝大乘論(섭대승론) 및 瑜伽(유가)의 菩薩戒(보살계)의 이론을 가르친다.
慈藏(자장)의 唯識學(유식학)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그의 唯識學(유식학)이 華嚴思想(화엄사상)과 갖는 관계이다. 그는 華嚴(화엄)에도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華嚴思想(화엄사상)에의 관심은 이후 元曉(원효)와 義相(의상)에 의해서 계속 이어져 신라 華嚴(화엄)의 源流(원류)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元曉(원효), 義相(의상)은 본래 唯識(유식)에 주된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로 華嚴(화엄) 쪽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의상과 원효가 '玄장'의 法相宗(법상종)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들은 본래 瑜伽僧(유가승)이었지 華嚴僧(화엄승)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많다.
원효가 당나라로 가는 도중에 귀국하게 된 사건은 너무나 잘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거니와, 義相(의상)은 중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신라에 화엄학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義相(의상)이 귀국하여 華嚴(화엄)을 전파하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를 '東家丘(동가구)' 以上(이상)으로는 간주하지 않았다.
신라 中代(중대)에 화엄종은 법상종과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 화엄종의 세력은 문무왕 때까지만 하더라도 미약한 수준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文武王(문무왕)은 義相(의상)이 唐(당)의 침략을 알리는 급보를 가지고 귀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책은 明朗(명랑)과 같은 神印宗(신인종) 계통 瑜伽僧(유가승)들에게 맡기고 있다.
또 문무왕은 임종시 神文王(신문왕)에게 유식학승인 憬興(경흥)을 國師(국사)로 삼을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문무왕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라불교계는 瑜伽(유가)일변도이던 것이, 태현이 활약하던 신라 제35대 景德王(경덕왕)대에 이르면 상황이 바뀌게 된다.
景德王(경덕왕; 742∼764) 때는 화엄종이 새로이 부상하는 종파로서 瑜伽派(유가파)의 강력한 세력을 견제하면서 王權(왕권)세력에 결탁하게 되는 시기이다.
義相(의상)과 元曉(원효)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唯識(유식)의 교리를 배우기 위해 떠날 정도로 唯識(유식)이 주류였던 사상계의 동향은 義相(의상)이 중국에서 화엄학을 배워와서 이를 전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태현은 당시 浮石寺(부석사)와 皇龍寺(황룡사)를 중심으로 한 화엄종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三國遺事(삼국유사)] 賢瑜伽 海華嚴條(현유가 해화엄조)에 따르면 瑜伽(유가)학승 태현은 가뭄을 맞이해서 궁정의 우물물을 7丈(장) 정도 솟구치게 한 데 반해서,
華嚴(화엄)학승 法海(법해)는 東海(동해)의 바닷물을 기울여 感恩寺 佛殿(감은사 불전) 계단 가까이까지 들어오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 명백히 유가승인 태현과 화엄승인 法海(법해)가 힘겨루기를 한 증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金福順(김복순)은 그의 [신라화엄종연구]에서 文武王(문무왕)대까지만 하더라도 신라 사상계의 동향은 瑜伽(유가) 일변도였으나 景德王(경덕왕)대에 이르러서는 瑜伽(유가)와 華嚴(화엄)이 교체되는 양상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써 신라 下代(하대)에 이르면 華嚴宗(화엄종)은 왕실에 의해서 존경을 받게 되고 法相宗(법상종)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신라불교의 主流(주류)는 唯識(유식)이었으므로 義相(의상)의 傳敎(전교) 활동은 법상종의 세력으로부터 저항에 부딪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義相(의상)이 浮石寺(부석사)를 세울 때 그가 부딪쳤던 저항은 이를 시사해 준다. 아마도 元曉(원효)는 義相(의상)의 화엄사상이 확산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元曉(원효)는 본래부터 국제적인 학문감각이 있었고 중국의 학계동향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옛 친구 義相(의상)의 귀국은 그의 화엄사상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원효와 의상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신라불교에는 화엄종의 영향이 강해져 갔으며, 그러한 현상은 圓光(원광), 慈藏(자장)의 시대에 나타났던 경향이 강화된 것이기도 하였다.
元曉(원효)는 그의 敎相判釋(교상판석)에서 불교를 ① 三乘別敎(삼승별교) ② 三乘通敎(삼승통교) ③ 一乘分敎(일승분교) ④ 一乘滿敎(일승만교)로 분류한 바 있었다.
첫째는 四諦(사제)의 교리를, 둘째는 般若經(반야경)과 解深密經(해밀심경)의 진리를, 셋째는 [쫴珞經(쫴낙경)]·[梵網經(범망경)]의 진리를, 넷째는 華嚴經(화엄경)의 진리를 뜻한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원효는 華嚴(화엄)을 최상의 진리형태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元曉(원효)의 三界唯心(삼계유심), 萬法唯識(만법유식)의 偈(게)는 그가 유식학에 깊이 傾倒(경도)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그가 瑜伽(유가)불교의 기반 위에서 無着(무착), 世親(세친)의 사상을 繼承(계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법상종과 화엄종은 眞如觀(진여관)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法相宗(법상종)에서는 阿賴耶識緣起(아뢰야식연기), 華嚴宗(화엄종)에서는 法性緣起(법성연기)를 주장한다. 法相宗(법상종)에서는 無爲(무위)와 有爲(유위)의 다르마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즉 無爲(무위)의 眞如(진여)는 아무리해도 有爲(유위)의 諸法(제법)이 되지 않는다. 眞如(진여)는 應然(응연)하여 不作諸法(불작제법)하는 것이다.
반면에 華嚴宗(화엄종)에서는 眞如(진여)는 緣(연)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자신의 고유한 自性(자성)을 간직하지 않는다(隨緣不守自性; 수연불수자성). 이러한 眞如觀(진여관)에서 본다면 有爲(유위)와 無爲(무위)는 相卽(상즉)한다.
또 法相宗(법상종)에서는 五性各別(오성각별)을 주장하지만 화엄종에서는 攝論宗(섭론종)과 동일하게 一切皆成佛(일체개성불)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교리적으로 華嚴宗(화엄종)은 法相宗(법상종)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緣起(연기)하는 本性(본성)에는 차이가 있지만 법상종의 아뢰야연기를 화엄종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화엄종은 섭론종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고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섭론종은 眞諦(진제)가 인도로부터 와서 無着(무착), 世親(세친)의 瑜伽佛敎(유가불교)를 계승한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攝論宗(섭론종)은 법상종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유식학의 전개에 포함된다. 따라서 원래 신라의 유식불교가 섭론종으로부터의 발달과정을 겪었고, 화엄종이 그 발달과정에서 攝論宗(섭론종)의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면
태현이 비슷한 경향을 내포한 華嚴(화엄)과 法相(법상)의 교리에 동시에 관여한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華嚴經(화엄경)에 관한 註疏(주소)는 거의 신라의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인데,
이것은 華嚴經(화엄경)에 관한 新羅人(신라인) 講究者(강구자)가 많은 것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攝論宗(섭론종)의 전개과정과 병행해서 나타나기 시작한 華嚴思想(화엄사상)의 융성이 이후의 유식사상의 전개에 미친 영향이다.
화엄종의 융성은 섭론종의 쇠퇴를 불러왔고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45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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