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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불교논집 2집.1992.
方仁* , 新羅 佛敎思想史의 太賢 唯識學의 意義
*경북대 철학과 교수
Ⅰ. 서론
Ⅲ. 相宗(상종)과 性宗(성종)에의 귀속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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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계속>첫 번째 중간 ㉯>두 번째 중간 ㉰>세 번째
Ⅳ. 新羅唯識思想史(신라유식사상사)에서의 太賢(태현)의 위치 중간>元曉(원효)는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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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①>화엄종의 융성은 ~ 중간 ②>서명학파에는 ~ 중간 ③>유식론의 대표적 ~
Ⅴ. 결론
화엄종의 융성은 섭론종의 쇠퇴를 불러왔고 이는 곧 舊唯識(구유식)의 소멸을 불러왔던 것이다. 유식은 舊唯識(구유식)과 新唯識(신유식)으로 나누어지는 바, 우리가 유식의 발달사를 이해하려면 현장의 新唯識(신유식)뿐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 신라에 舊唯識(구유식)이 전승된 과정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舊唯識(구유식)은 중국에서는 攝論宗(섭론종)과 地論宗(지론종)에 의해서 전개되어 왔다.
신라의 舊唯識(구유식)이 갖고 있던 몇 가지 특징은 이후 신라의 新唯識(신유식)의 전개와 비교해보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중국의 攝論宗(섭론종)에는 安慧(안혜)의 영향이 感知(감지)되는 바 이는 신라의 唯識學(유식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眞諦는 52년에 攝大乘論(섭대승론)을 번역한 바 있는데, 眞諦의 이론에는 安慧(안혜)의 영향이 여러 방면에서 보여지고 있다. 眞諦(진제)에게서 보이는 安慧(안혜)의 영향은 후에 전개된 신유식의 경향과 비교해볼 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舊唯識(구유식)이 安慧(안혜)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新唯識(신유식)은 安慧(안혜)와는 많은 면에서 대비되는 것으로 알려진 護法(호법)에 의해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신라유식의 발전과정에서 본다면 圓測(원측)은 舊唯識(구유식)의 전개와 신유식의 전개 과정을 모두 反映(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도기적 성격의 인물이다.
중국의 玄장에 의한 새로운 唯識學(유식학)의 흐름은 신라에도 흘러오기 시작했거니와 현장불교의 영향은 慈藏(자장)의 경우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경향이었으나, 元曉(원효)와 義寂(의적)의 경우에는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圓測(원측)은 신라의 불교학자로서는 현장불교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신라불교사상사의 발전과정 중에서 태현은 최고 정점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태현은 당대 신라불교의 주류였던 신라 유식의 사상사적 발달과정을 그의 이론 속에 종합하였다. 즉 그는 圓光(원광), 慈藏(자장), 圓測(원측), 道證(도증) 등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유식불교의 흐름, 그 중에서도 특히 유식불교의 이론불교적 측면을 집대성한 인물로 판단된다.
三國遺事(삼국유사)는 태현을 '海東(해동)의 瑜伽祖(유가조)'라고 부름으로써 신라 유식사상사에서 태현의 위치를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삼국유사의 평가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태현이 이론적 측면에서 신라 유식학의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왜 圓測(원측)과 같은 신라 유식의 대학자를 '海東(해동)의 瑜伽祖(유가조)'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단순한 데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태현을 흔히 法相宗(법상종)의 인물이라고 하거니와 法相宗(법상종)이라는 단어는 유식사상 전체 내지는 舊唯識(구유식)의 흐름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玄장과 窺基(규기)에 의해서 시작된 新唯識(신유식)의 사상가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태현을 '海東(해동)의 瑜伽祖(유가조)'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라의 신유식의 대표자 혹은 신라 법상종의 진정한 대표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舊唯識(구유식)의 흐름이 원측 이후 정리된 이후 태현은 신유식, 즉 法相宗(법상종)의 한국적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태현의 구유식에 대한 견해를 살피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태현의 구유식에 대한 견해는 그의 眞諦(진제;Paramartha)에 대한 견해를 통해 엿볼 수 있다.
護法(호법)이 신유식의 흐름을 대표한다면 眞諦(진제)는 구유식의 흐름에 더 가깝다. 그런데 태현은 아주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眞諦(진제)를 인용하지 않는다.
道證(도증)이 眞諦 譯의 攝大乘論(섭대승론)의 舊說(구설)을 인용하여 학설을 제기하는 데 대하여 태현은 "但眞諦語不可爲依(단진제어불가위의)"라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眞諦의 無相무상(思慮;사려)論(론)에 대해서 "無相論眞諦謬也(무상론진제류야)"라고 말함으로써 진제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成唯識論(성유식론)은 護法(호법)의 저서이며 태현은 [성유식론]의 연구가이므로 그가 新唯識(신유식)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일본 普寂(보적)과 같이 護法(호법)의 입장을 비판하면서도 成唯識論(성유식론)을 연구하는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유식론]의 연구자는 대부분 신유식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태현은 護法(호법)을 거론할 때 종종 護法正宗(호법정종)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니와 이것은 그가 유식이론의 정통성을 護法(호법)의 이론에 두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태현은 좀더 구체적으로 유식학파의 사상적 계보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申賢淑(신현숙)은 그의 글, [新羅唯識相承論(신라유식상승론)-圓測(원측)의 道證(도증), 太賢(태현)의 繼承(계승)에 대해서]에서 圓測(원측)→道證(도증)→太賢(태현)으로 이어지는 계승관계를 확인하려고 한다.
즉 태현의 스승은 道證(도증)이고 道證(도증)의 스승은 圓測(원측)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태현은 원측학파, 즉 西明(서명)학파에 속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신현숙은 照遠(조원)의 [梵網經下卷古迹記述迹抄(범망경하권고적기술적초)](1333)가 玄장(현장;600∼664)→圓測(원측; 613∼696)→道證(도증; 692)→太賢(태현)의 相承(상승)관계를 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신현숙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三者(삼자)의 繼承(계승)관계를 확증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道證(도증)의 傳記(전기)에 대해서 명확한 자료가 결핍되어 있고, 또한 태현의 年代(연대)도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道證(도증)이 원측의 제자라는 것은 圓測(원측)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慧沼(혜소)의 저서에서 道證(도증)이 圓測(원측) 계통의 사상가로 공격을 받고 있음으로 해서 그가 圓測(원측)의 제자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원측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신라에는 귀국하지 않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고 있지만 그가 末年(말년)에 귀국하였다는 설과 잠시 신라에 귀국하였다가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는 설 等(등)이 있어 주의를 요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道證(도증)이 唐(당)으로부터 歸國(귀국; 692)하고 나서 태현이 道證(도증)으로부터 직접 유식학을 배웠는가의 문제이다. 자료에 의한다면 太賢(태현)은 二十(이십)세에 出家(출가)하여 三十(30)세에 저서를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宮中(궁중)에서 [金光明經(금광명경)]을 강의하며 활약(753)한 시기로부터 약 삼십년 내지 사십년은 활약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신현숙은 圓測(원측) → 道證(도증) → 太賢(태현)의 相承論(상승론)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신현숙의 주장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692년 道證(도증)이 귀국한 때로부터 태현이 753년 궁중에서 金光明經(금광명경)을 강의하기에 이르기까지의 61년 동안에 태현이 道證(도증)으로부터 배웠어야 한다는 추론이 나온다.
이 61년의 기간 사이에 이미 상당한 나이에 귀국한 道證(도증)은 젊은 제자를 키우고 죽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기간은 조금 길게도 생각될 수 있지만 道證(도증)이 언제 臨終(임종)하고 太賢(태현)이 언제 출생했느냐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보여진다.
태현은 그의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에서 道證(도증)을 간혹 老和上(노화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필자의 所見(소견)으로는 老和上(노화상)이란 용어는 스승과 제자가 아주 직접적이고 친근한 관계에 있을 때 弟子(제자) 쪽에서 스승에게 흠모의 情(정)을 갖고 사용할 수 있는 명칭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더 이상 직접적인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道證(도증)으로부터 太賢(태현)이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하겠다. 만일 圓測(원측) → 道證(도증) → 太賢(태현)의 師承(사승)관계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태현은 西明學派(서명학파)의 인물인가 ?
여기서 필연적으로 문제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西明學派(서명학파)의 존재이다. 원측 문하에는 일부 중국인과 상당수의 신라인들이 많았고 玄장(현장) 문하에 입문하였다가 원측 문하로 전향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명학파는 분명히 성립한다.
그러면 서명학파에는 도대체 누가 속하는 것일까 ?
或者(혹자)는 遁倫(둔륜)이 서명학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遁倫(둔륜)(혹은 道倫;도륜)이 서명학파라는 증거가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道證(도증)이 圓測(원측)의 제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窺基(규기)의 제자인 慧沼(혜소)가 成唯識論了義燈(성유식론료의등)을 저술하여 그 속에서 원측의 학설을 비난할 때 [要集(요집)]을 함께 비난한 것을 본다면 그의 학설이 원측과 노선을 같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측의 제자에는 道證(도증) 이외에도 勝莊(승장)이 있다. 勝莊(승장)은 [圓測法師舍利塔碑銘(원측법사사리탑비명)]에 언급되어 있으므로 원측의 제자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하겠다. 勝莊(승장)은 처음에는 현장 문하에 있다가 나중에 圓測(원측) 문하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원측의 사리를 西明寺(서명사) 住持(주지)인 慈善(자선)법사와 함께 같이 모신 것으로 본다면 그의 제자가 아니라면 있기 힘든 사실라고 하겠다. 그러면 道證(도증), 勝莊(승장)과 함께 태현도 이 서명학파에 속하는 것일까?
그러나 필자는 태현이 道證(도증)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道證(도증)이 圓測(원측)의 충실한 사상적 후계자임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태현을 원측사상의 계승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태현이 西明(서명)학파의 人的(인적) 계보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학문적 계통의 계승을 뜻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원측과 태현 사이에는 학문적 경향성에 있어서도 큰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태현을 西明(서명)학파에 귀속시키려는 시도는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태현은 道證(도증)의 견해이거나 圓測(원측)의 경우이건간에 때로는 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하기도 하고 있다. 찬성과 반대의 빈도는 거의 같은 정도로 나타나며 窺基(규기)에 대한 태현의 태도도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태현을 西明(서명)학파에 귀속시킬 수는 없다.
圓測(원측)의 견해는 窺基(규기)의 견해와 더불어 그의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에서 제일 빈번히 인용되고 있는 학설이다. 그런데 태현은 규기와 원측 兩者(양자)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태현이 원측학파의 다른 구성원들, 예를 들어 勝莊(승장)이나 道證(도증) 등과 더불어 학설을 共有(공유)하기가 힘들다면 태현을 같은 西明學派(서명학파)에 귀속시키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태현은 따라서 신라출신으로서 중국에서 활동한 神(신)꾼·遁倫·勝莊·順璟(신꾼·둔륜·승장·순경) 등과는 사상적 경향을 상당히 달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神(신)꾼의 경우는 圓測(원측)보다는 玄장 門下(현장 문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태현이 圓測(원측)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다고는 할 수 없다. 태현이 그의 스승 道證(도증)을 통해 圓測(원측)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현은 西明學派(서명학파)에 속한다고는 볼 수 없어도 원측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으며 圓測(원측)과 窺基(규기) 사이에 이론적 균형을 형성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新羅(신라)의 유식학 및 因明學(인명학)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으므로 圓光·慈藏·元曉·憬興·義寂·道證·慧觀(원광·자장·원효·경흥·의적·도증·혜관) 等(등)에 의해 전개된 신라유식학의 이론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以上(이상)에서 우리는 태현 당시의 유식학의 흐름을 살펴보았거니와 태현의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를 통해서 신라 유식사상사의 흐름을 재구성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시도일 것이다.
태현은 그의 [성유식론학기]에서 중국의 玄장과 窺基(규기)의 학설은 물론이고 圓測(원측)과 道證(도증)을 포함한 다수의 신라 유식학승들의 학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한다.
道證(도증) 및 圓測(원측)과 관련해서 道證(도증)의 [成唯識論(성유식론)] 관계 저술인 [成唯識論要集(성유식론요집)]과 圓測(원측)의 유식관계 主著(주저)라고 할 수 있는 그의 [成唯識論(성유식론)] 관계 저술들
[成唯識論疏(성유식론소)] 二十卷, [成唯識論別章(성유식론별장)] 三卷, [成唯識論算要(성유식론산요)] 二十卷, [成唯識論應妙(성유식론응묘)] 五卷, [成唯識論光妙(성유식론광묘)] 八卷 등이 하나도 현존하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 태현의 [성유식론학기]는 道證(도증)과 圓測(원측)의 사상을 재구성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義寂(의적), 慧觀(혜관), 玄範(현범) 등은 太賢(태현)이 그의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 중에서 언급한 인물들로서 신라유식의 계보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들의 저서가 거의 다 逸失(일실)된 상황에서 우리는 태현의 저술을 통해서 이들의 사상의 편린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유식사상사를 재구성하는 기초자료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태현의 [성유식론학기]의 자료적 가치는 다시 한번 확인된다고 하겠다. 먼저 태현이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에서 빈번히 언급하고 있는 義寂(의적)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義寂(의적)을 신라 유식학의 계보에 올려놓아야 할지 아니면 그를 화엄학의 계보에 위치시켜야 할지는 논란의 문제이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서 義寂(의적)은 義相(의상)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표현된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대부분이 唯識(유식)에 관한 것이고 華嚴(화엄)에 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
均如(균여)의 [釋華嚴敎分記圓通(석화엄교분기원통)?]에는 義寂(의적)이 義相(의상)의 極果廻心(극과회심)의 뜻에 대해 의심을 품고 法相宗(법상종)으로부터 와서(從法相來;종법상래)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義寂(의적)이 義相(의상)을 만난 것은 대개 69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하나는 義寂(의적)이 法相宗(법상종)의 인물인데 三國遺事(삼국유사)의 저자가 錯誤(착오)를 일으켰거나,
아니면 義寂(의적)이 원래는 法相宗(법상종)의 사람이었으나 義相(의상)을 만나 華嚴宗(화엄종)으로 개종하였을 가능성이다. 金相鉉(김상현)은 그의 저서에 화엄관계의 저술이 없다는 이유로 前者(전자)의 說(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三國遺事(삼국유사)]에서 義寂(의적)을 義相(의상)의 弟子(제자)로 분류한 데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痔(치)든간에 義寂(의적)이 주로 唯識(유식)관계의 저술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義寂(의적)은 入唐(입당)해서 玄장에게 배우고 [唯識未詳決(유식미상결)]을 지었으며, 慈恩(자은), 西明(서명) 등과 함께 唯識六家(유식육가)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增明記(증명기)]에 인용되어 있는 바로서 알 수 있는 道證(도증)의 [成唯識論要集序(성유식론요집서)]에 의하면 吩陽(분양)의 義寂(의적)은 穿(천)빈에 의해 공부하였고, 未詳決寂法師(미상결적법사)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道證(도증)의 [要集序(요집서)]에 따르면 唯識論(유식론)의 대표적인 주석자에는 六人이 있는 바, 즉 그 六人(6인)은 有說基法師(유설기법사) · 有釋測法師(유석측법사) · 有초光法師(유초광법사) · 有解觀法師(유해관법사) · 有云範法師(유운범법사) · 未詳決寂法師(미상결적법사)라는 것이다.
그가 未詳決寂法師(미상결적법사)라고 불리워진 것은 아마도 그의 유식관계 주요 저술인 唯識未詳決(유식미상결)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태현은 義寂(의적)에 대해 아마도 부정적인 평가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義寂(의적)에 대해 [성유식론학기]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寂師(적사)가 논란을 벌였다. 그러나 論(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텅빈 말을 망령되게 지어낸 까닭에 서술하지 아니한다(寂師設難 然 不解論意 妄作虛語 故不敍之;적사설난 연 불해론의 망작허어 고불서지)."
이것은 義寂(의적)의 極微(극미)에 관한 논의에 대해 태현이 평가한 것이다.
다시 말해 義寂(의적)은 極微(극미)에 관한 論議(논의)의 본질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妄作虛語(망작허어)하고 있으므로 언급의 가치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태현의 다른 유식학승에 대한 태도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혹평이므로 특히 주목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에서 가끔씩 인용되는 觀法師(관법사)에 대해서이다. 이 觀法師(관법사)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觀法師(관법사)로 추정될 수 있는 인물에는 觀智(관지)와 慧觀(혜관)이 있으나 觀法師(관법사)는 아마도 慧觀(혜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道證(도증)의 [要集序(요집서)]에서 唯識論(유식론)의 대표적인 주석자 六人(6인)을 들고 있는 바, 그 중에서 有解觀法師(유해관법사)라고 한 것은 바로 慧觀(혜관)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로는 唯識論疏(유식론소) (四卷;4권)가 있다. [增明記(증명기)]에서 인용한 바의 [要集(요집)]의 序(서)에 의해 阿曲(아곡)의 宗師(종사)로 불리워졌다. 태현은 도증의 저서를 통해서 慧觀(혜관)에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 다음으로 太賢(태현)이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에서 範云(범운)이라고 하며 인용하고 있는 사람은 추측컨대 玄範(현범)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玄範(현범)을 신라 唯識思想史(유식사상사)의 대열에 합류시켜야 할지는 의문이다.
一說(일설)에는 그가 신라인이라는 학설도 있으나, 道證(도증)의 [要集(요집)]에 山東(산동)의 範(범)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山東(산동)사람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範法師(범법사)라고도 불리우는 그의 傳記(전기)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玄範(현범)은 700년에 '실차난다'가 楞伽經(능가경)을 번역하였을 때에 筆受(필수)를 담당하였다고 전해진다. 玄範(현범)은 大唐內典錄(대당내전록) 卷五에 의하면 소년시대에 출가하여 젊은 시대에 敎學(교학)의 공부를 달성하였다고 한다.
그의 유식관계 저술로는 [辯中邊論疏(변중변론소)](三卷), [攝大乘論疏(섭대승론소)](七卷), [深密經疏(심밀경소)](三卷), [唯識論疏(유식론소)](二十卷) 등이 있다.
이상으로 태현이 그의 學記(학기)에서 인용하고 있거나 언급하고 있는 신라의 유식학자들인 圓測(원측), 道證(도증), 義寂(의적), 慧觀(혜관), 玄範(현범)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들 이외에도 태현의 [學記(학기)]에서 적지 않게 인용되며 비중을 차지하는 학자로서 元曉(원효)가 있다.
元曉(원효)의 경우 그를 유식학자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元曉(원효)를 如來藏(여래장) 계통 및 起信論(기신론) 계통의 사상가로 볼 때는 元曉(원효)를 性宗(성종)의 인물로 보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如來藏(여래장) 사상이나 기신론 계통이라고 하더라도 唯識(유식)의 이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원효를 유식이론과의 관련하에서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元曉(원효)에게는 成唯識論宗要(성유식론종요) 一卷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태현의 學記(학기)에서 인용되고 있는 원효의 유식이론의 출전은 아마도 상당부분이 이 成唯識論宗要(성유식론종요)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태현은 원효의 [判比量論(판비량론)]을 因明(인명) 및 유식이론과 관련하여 종종 인용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태현은 그밖에 順璟(순경)을 空宗(공종)과 有宗(유종)의 대립여부에 관해서 거론하고 있는 바, 順璟(순경) 또한 신라의 唯識家(유식가)이다.
順璟(순경)은 因明(인명)에도 조예가 깊어 玄장의 因明(인명)이론을 비평한 것으로 유명하며 窺基(규기)도 그의 識見(식견)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렇지만 태현이 順璟(순경)의 유식이론을 존중하고 있는 증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순경은 [成唯識論料簡(성유식론료간)](逸失;일실)의 저자이므로 만일 태현이 그의 이론을 존중했다면 보다 더 인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신라불교의 흐름은 적어도 신라 中代 景德王(중대 경덕왕) 때까지는 유식학이 그 主流(주류)였다.
玄一, 惠景, 憬興, 圓測, 道證, 太賢, 義寂, 慧觀, 玄範(현일, 혜경, 경흥, 원측, 도증, 태현, 의적, 혜관, 현범) 등 신라의 유식학자는 상당한 수에 달하고 있다. 以上(이상)의 인물들 이외에도 신라의 유식학자 중에는
法位(법위), 靈因(영인), 行達(행달), 玄一(현일) 등이 있거니와 이들과 태현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이들 신라의 유식학자 가운데 태현의 유식학은 圓測(원측)과 더불어 최고의 이론적 수준에 올라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신라의 유식학은 태현을 정점으로 해서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되면서 실천적 신앙계통인 眞表(진표)의 法相宗(법상종) 계통에 자리를 내어주거니와, 우리는 태현이 신라불교사상사 및 유식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태현을 중심으로 해서 신라유식의 전개사를 재구성해볼 필요를 갖게 된다.
Ⅴ. 결론
종합해 본다면, 신라유식의 흐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다양하였다.
신라유식의 왕성한 발전은 圓測, 義寂, 道證, 玄範, 慧觀, 順璟, 神昉, 憬興, 遁倫(원측, 의적, 도증, 현범, 혜관, 순경, 신방, 경흥, 둔륜) 등 많은 唯識學者(유식학자)들을 量産(양산)하였거니와 이들 중에는 圓測(원측), 遁倫(둔륜) 등처럼 중국에서 주로 활약한 유학승들도 있다.
사실 이들은 신라의 유식 사상의 흐름을 순수하게 대변해주지는 못한다.
어痔(치)든 우리는 이들 대부분의 학자들은 新唯識(신유식)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임을 발견하게 되는데 태현은 新唯識(신유식)의 展開史(전개사)에 있어 그 頂点(정점)에 위치해 있다.
태현은 원측으로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신유식의 흐름에 있어서 그 이전의 유식학의 흐름을 집대성하였던 것이다. 태현의 방대하던 저술은 이제는 거의 逸失(일실)되어 태현의 학문적 세계의 전체적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있지만 다행히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가 현존하여 당시 유식학의 최고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는 成唯識論(성유식론)에 관해 현존하고 있는 한국인의 주석서 중에서 유일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현의 成唯識論學記(성유식론학기)는 신라의 유식불교사상사에서 귀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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