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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_IT_K0549_T_020 URL복사 통합뷰어 014_0695_c_01L대지도론 제20권 014_0695_c_01L大智度論釋初品中三三昧義第三十二卷第二十 통합뷰어 용수 지음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014_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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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智度論釋初品中三三昧四禪義第三十二 (卷第二十)

32. 초품 중 세 가지 삼매[三三昧]의 뜻을 풀이함

 

【經】空三昧無相三昧無作三昧。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八背捨八勝處九次第定十一切處。 

  [經] 공삼매1) · 무상(無相)삼매2) · 무작(無作)삼매3)와 4선(禪) · 4무량심(無量心) · 4무색정(無色定) · 8배사(背捨) · 8승처(勝處) · 9차제정(次第定) · 10일체처(一切處)[를 구족해야 하느니라.]

【論】問曰。何以故次三十七品。後說八種法。

  [論] [문] 무슨 까닭으로 37품에 이어 여덟 가지 법을 말하는가? 

答曰。三十七品是趣涅槃道。行是道已得到涅槃城。涅槃城有三門。所謂空無相無作。已說道次應說到處門。

  [답] 37품은 열반에 나아가는 길이다. 이 길을 행하면 열반의 성에 이르게 된다.

열반의 성에는 세 문이 있으니, 이른바 공?무상?무작이다.  · 

  이미 길을 말했으니 다음에는 이르른 곳의 문을 말해야 하리라.

四禪等是助開門法。復次三十七品是上妙法。欲界心散亂。行者依何地何方便得。當依色界無色界諸禪定。

於四無量心八背捨八勝處九次第定十一切處中試心知得柔軟自在隨意不。

  4선 등은 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되는 법이다. 또한 37품은 높고 묘한 법이니, 욕계의 마음이 산란하면 행자는 어떤 지위와 어떤 방편을 의지하여야 되는가? 곧 색계ㆍ무색계의 여러 선정에 의지해서 4무량심ㆍ8배사ㆍ8승처ㆍ9차제정ㆍ10일체처 가운데 머물러서 마음이 보드랍고 자재하고 마음대로 되는가를 시험해야 한다. 

譬如御者試馬曲折隨意然後入陣。十一切處亦如是。觀取小許靑色。視一切物皆能使靑。一切黃一切赤一切白皆如是。

  비유하건대 말을 타는 이가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진중(陣中)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10일체처도 그와 같아서 약간의 푸른 빛을 보고서 일체의 물건을 모두 푸르게 하니, 모든 누런빛, 붉은빛, 흰빛도 모두 이와 같이 한다.

復次於八勝處緣中自在。初二背捨觀身不淨。第三背捨觀身還使淨。

  또한 8승처의 반연에 대하여 자재하나니, 처음의 두 배사에서는 몸의 부정함을 관찰하고, 셋째 배사에서는 몸이 도리어 깨끗한 것으로 관찰한다. 

四無量心慈觀衆生皆樂。悲觀衆生皆苦。喜觀衆生皆喜。捨是三心但觀衆生無有憎愛。

  4무량심이란, 자(慈)는 중생 모두가 즐겁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비(悲)는 중생 모두가 괴롭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희(喜)는 중생 모두가 기쁘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사(捨)4)는 이러한 세 가지 마음을 버리고 단지 중생들에 대하여 미움도 사랑도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復次有二種觀。一者得解觀二者實觀。實觀者。是三十七品。以實觀難得故。次第說得解觀。得解觀中心柔軟易得實觀。用實觀得入三涅槃門。

  또한 두 가지 관법이 있으니, 첫째는 견해를 얻는 관법[得解觀]이요, 둘째는 진실한 관법[實觀]이다. 

  진실한 관법이라 함은 이 37품이다. 진실한 관법으로는 얻기 어려우므로 차례로 견해를 얻는 관법을 말하는 것이다. 

  견해를 얻는 관법에서 마음이 유연해져 진실한 관법을 얻기 쉽고, 진실한 관법에 의해서 세 가지 열반의 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問曰。何等空涅槃門。

  [문] 무엇이 공열반의 문인가? 

答曰。觀諸法無我我所空。諸法從因緣和合生。無有作者無有受者。是名空門。

復次空門。如忍智品中說。知是無我我所已。衆生云何於諸法中心著。

  [답] 모든 법은 나와 내 것(我所)이 없어서 공하며, 모든 법은 인연의 화합으로 생긴 것이어서 짓는 이[作者]도 없고 받는 이도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공의 문이라 한다. 

  또한 공의 문은 인지품(忍智品)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나와 내 것이 없는 줄 안 뒤에 중생들이 어찌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이 집착되겠는가. 

行者思惟作是念。

  수행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諸法從因緣生無有實法。但有相。而諸衆生取是相著我我所我今當觀是相有實可得不。審諦觀之都不可得。若男相女相一異相等。是相實皆不可得。何以故。諸法無我我所故空。空故無男無女。一異等法我我所中名字。是一是異。以是故男女一異法實不可得。

  ‘모든 법은 인연으로 부터 생긴 것이어서 진실한 법이 없고, 오직 모습만 있거늘 중생들이 그 형상을 탐내어 나와 내 것에 집착되는구나. 나는 이제 이 모습에서 실로 얻을 것이 있는가를 관찰하리라.’

  자세히 관찰하여도 전혀 얻을 수 없으니, 남자와 여자의 모습, 하나와 다름의 모습 등 이러한 모습을 실로 모두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나와 내 것이 없으므로 공하며, 공하기 때문에 남자도 여자도 없고, 하나도 다름 등의 법도 없건만 나와 내 것 가운데서 이름하여 하나다 다르다 한다. 이런 까닭에 남자?여자ㆍ하나?다름의 법을 얻을 수 없다.

 

復次四大及造色。圍虛空故名爲身。是中內外入因緣和合。生識種身。得是種和合。作種種事言語坐起去來。於空六種和合中强名爲男。强名爲女。

若六種是男應有六男。不可以一作六六作一。亦於地種中無男女相。

  또한 4대(大)와 그로 인해 지어진 물질이 허공을 둘러쌌기 때문에 몸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안팎의 입(入)의 인연이 화합해서 의식의 종자[識種]를 내거늘 몸은 이 종자와 화합하므로써 갖가지 일을 하여 말하고 이야기하고 가고 오고 앉고 일어서나니, 허공 가운데 여섯 가지가 화합한 것에다 굳이 남자라 여자라 이름할 뿐이다. 

  만일 여섯 가지가 남자라 하면 마땅히 여섯 남자가 있어야 하리니, 하나를 여섯이라 할 수 없고, 여섯을 하나라 할 수도 없다. 

乃至識種亦無男女相。若各各中無。和合中亦無。如六狗。各各不能生。師子和合亦不能生。無性故。

  또한 땅 가운데도 남녀의 모습이 없고, 나아가서는 의식의 종자에도 남녀의 모습이 없다. 만일 개체 가운데에 없다면 화합한 가운데에도 없다. 마치 여섯 마리의 개가 제각기 사자를 낳을 수도 없고 화합해서 사자를 낳을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問曰。何以故無男女。雖神無有別。卽身分別有男女之異。是身不得離身分。身分亦不得離身。如見身分足。知有有分法名爲身。足等身分異身。身卽是男女相。

  [문] 무슨 까닭에 남녀가 없는가? 정신은 비록 차별이 없지만 신분(身分)은 차별이 있어서 남녀의 차이가 있다. 이 몸은 신분을 여의지 않고, 신분도 몸을 여의지 않는다. 

  예컨대 신분을 보면 부분이 있는 법[有分法], 즉 몸?발 등이 있음을 족히 알 수 있나니, 신분은 몸과는 다르지만 몸은 남녀의 모습이 될 것이다. 

答曰。神已先破身相亦壞。今當重說。若有是有分名身。爲各各分中具足有爲身分。分在諸分中。若諸分中具足有身者。頭中應有脚。何以故。頭中具足有身故。若身分分在諸分中。是身與分無有異。有分者隨諸分故。

  [답] 신(神)은 이미 먼저 파하였고, 몸의 상(相)도 역시 무너졌거니와 이제 다시 설명하리라. 

  만일 이러한 부분 있는 법을 몸이라 한다면 제각기의 부분 안에 갖추어져 있는가, 아니면 신분이 모든 부분 안에 나뉘어져 있는가? 

  만일 모든 부분 가운데에 갖추어 몸이 있는 것이라면 머리 가운데에도 다리가 있어야 한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머리 가운데 몸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몸의 부분이 모든 부분 가운데 나뉘어져 있다면 이 몸은 부분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부분 있음[有分]이란 것은 모든 부분을 따르기 때문이다. 

 

問曰。若足等身分與有分異。是有咎。今足等身分與有分身法不異故無咎。

  [문] 만일 발 등 몸의 부분이 부분 있음과 다르다면 허물이 되겠지만 지금은 발 등 몸의 부분이 부분 있음, 즉 몸이란 법과 다르지 않다고 하므로 허물이 없을 것이다. 

答曰。若足等身分。與有分不異。頭卽是足。何以故。二事是身不異故。又身分多有分一。不應多作一一作多。復次因無故果無。非果無故因無。身分與有分不異。應果無故因無。何以故。因果一故。若一若異中求身不可得。身無故何處有男女。若有男女爲卽是身爲異身。身則無可得。若在餘法餘法非色故。無男女之別。但二世因緣和合。以顚倒心故。謂爲男女。如說。

  [답] 만일 발 등 몸의 부분이 부분 있음과 다르지 않다면 머리가 곧 발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두 가지 경우가 모두 몸이어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몸의 부분은 많고 부분[有分]은 하나인데, 많음이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많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원인이 없어지므로써 결과가 없어지는 것이요, 결과가 없어지므로써 원인이 없어지는 것인데 이제 몸의 부분이 부분 있음과 다르지 않다면 응당 결과가 없어지므로써 원인이 없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와 다름 가운데서 몸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은 몸이 없기 때문이거늘 어떻게 남녀의 모습이 있으랴. 만일 남녀가 있다면 이 몸 그대로인가? 아니면 이 몸과는 다른 것인가? 몸에서는 얻을 수 없다. 만일 다른 법에 있다면 다른 법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남녀의 차별이 없거늘 다만 두 세상의 인연이 화합한 곳에 뒤바뀐 마음으로써 남녀라고 말할 뿐이다.

  이런 게송이 있다. 

 

 俯仰屈申立去來  視瞻言語中無實

 風依識故有所作  是識滅相念念無

  구부렸다 폈다 하는 곳에 과거와 미래를 세우나

  우러러보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실체가 없다. 

  바람이 식에 의지하므로 작용이 있으나

  이 식은 모습이 없어서 잠시도 있지 않다. 

 

 彼此男女有我心  無智慧故妄見有

 骨鎖相連皮肉覆  機關動作如木人

  너와 나, 남자와 여자는 나란 마음 있기 때문이니

  지혜가 없으므로 허망하게 있다고 여긴다. 

  뼈마디가 서로 이어진 곳에 가죽이 덮이었고

  신체 기관 움직임은 허수아비 같도다.

 

 內雖無實外似人  譬如洋金投水中

 亦如野火焚竹林  因緣合故有聲出

  실체는 없으나 겉만 사람 같으니

  금을 녹여 물속에 던질 때 같고

  들불이 대숲을 태울 때 같아서

  인연이 화합하면 소리도 난다.

 

如是等諸相如先所說。此中應廣說。

是名無相門。無作者旣知無相。都無所作。是名無作門。

  이러한 갖가지 모습은 전에 이미 말했거니와 여기에서 다시 자세히 말하리라. 

이것을 모습 없음의 문[無相門]이라 하며,

지을 이 없음[無作者]이라 하나니,

이미 모습 없음이어서 짓는 바가 없음을 도무지 없음을 알면 이것을 지음 없는 문[無作門]이라 한다. 

 

問曰。是三種以智慧觀空觀無相觀無作。是智慧何以故名三昧。

  [문] 세 가지는 지혜로써 공을 관찰하고, 모습 없음을 관찰하고, 지음 없음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 지혜를 어찌하여 삼매라 하는가? 

答曰。是三種智慧若不住定中則是狂慧。多墮邪疑無所能作。若住定中則能破諸煩惱。得諸法實相。復次是道異一切世間。與世間相違。諸聖人在定中得實相說。非是狂心語。復次諸禪定中無此三法。不名爲三昧。何以故。還退失墮生死故。如佛說。

  [답] 이 세 가지 지혜가 선정에 머무르지 않으면 이는 미친 지혜로서 대개는 삿된 의혹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만일 선정에 머무르면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또한 다시 이 모든 온갖 세간과 다르고 세간과 서로 맞지 않거니와 모든 성현들이 선정에 머물러 실상을 얻고서 말씀하신 것은 미친 마음의 말씀이 아니다.

  또한 다시 모든 선정 가운데 이 세 가지 법이 없으면 삼매라 하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도리어 물러나서 생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다. 

 

 能持淨戒名比丘  能觀空名行定人

 一心常懃精進者  是名眞實行道人

  청정한 계율을 지키면  비구라 부르고

  공을 관하면  선정을 닦는 이라 한다. 

  일심으로 항상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는 이는 

  이를 일러 진실한 도인이라 부른다. 

 

 於諸樂中第一者  斷諸渴愛滅狂法

 捨五衆身及道法  是爲常樂得涅槃  

  모든 즐거움 중에서 으뜸가는 것으로는 

  모든 애욕을 끊고 미친 법을 없애는 일이니

  5중(衆)의 몸과 도법(道法)까지 버리면

  이를 일러 항상하고 즐거워 열반을 얻었다 한다

以是故三解脫門。佛說名爲三昧。

이런 까닭에 세 가지 해탈문을 부처님께서는 삼매라 하신다.

 

問曰。今何以故名解脫門。

  [문] 이제는 무슨 까닭에 해탈문(解脫門)이라 하는가? 

答曰。行是法時。得解脫到無餘涅槃。以是故名解脫門。無餘涅槃是眞解脫。於身心苦得脫。有餘涅槃爲作門。

[답] 이 법을 행할 때에 해탈을 얻어서 무여열반(無餘涅槃)5)에 이르게 된다. 이런 까닭에 해탈문이라 한다. 

  무여열반이야말로 참해탈이어서 몸과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반면 유여열반은 그 문호(門戶)가 된다. 

此三法雖非涅槃。涅槃因故名爲涅槃。世間有因中說果果中說因。是空無相無作是定性。是定相應心心數法。隨行身業口業。此中起心不相應。諸行和合皆名爲三昧。

  이 세 가지 법은 비록 열반은 아니지만 열반의 원인이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 세간에도 원인에서 결과를 말할 때도 있고, 결과에서 원인을 말할 때도 있는데 이 공ㆍ모양 없음?지음 없음은 정의 성품이요, 이 정과 상응하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의 법과 몸의 업과 입의 업과 여기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 모든 행의 화합은 모두가 삼매라 불린다. 

譬如王來必有大臣營從。三昧如王智慧如大臣餘法如營從。

餘法名雖不說必應有。何以故。定力不獨生。不能獨有所作故。是諸法共生共住共滅共成事互相利益。

  비유하건대 왕이 가면 대신과 들러리[營從]가 반드시 있는 것 같으니, 삼매는 왕과 같고 지혜는 대신과 같으며, 다른 법은 들러리와 같다. 

  다른 법의 명칭은 말하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선정의 힘은 홀로 생길 수 없고, 혼자서는 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법은 함께 생기고, 함께 머무르고, 함께 일을 이루어서 서로가 이익을 이룬다. 

  

是空三昧二行。一者觀五受衆一相異相無故空。二者觀我我所法不可得故無我。

이 공의 삼매에는 두 가지 행이 있으니, 첫째는 5수중(受衆)이 같은 모습도 다른 모습도 없는 것이라 관찰하는 까닭에 공이요, 둘째는 나와 내 것이란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다. 

無相三昧四行。觀涅槃種種苦盡故名爲盡。

三毒等諸煩惱火滅故名爲滅。一切法中第一故名爲妙。離世間故名爲出。

  모습 없는 삼매[無相三味]의 네 가지 행으로 열반에는 갖가지 괴로움이 다한 것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다함[盡]이라 하고, 3독 등 모든 번뇌의 불길이 사라졌으므로 사라짐[滅]이라 하고, 모든 법 가운데서 으뜸이기 때문에 묘함[妙]이라 하고, 세간을 여의었기 때문에 벗어남[出]이라 한다. 

無作三昧二行。觀五受衆因緣生故無常。身心惱故苦。觀五受衆因四行。煩惱有漏業和合能生苦果故名爲集。以六因生苦果故名爲因。四緣生苦果故名爲緣。不多不少等因緣生果故名爲生。

  지음 없는 삼매[無作三昧]의 두 가지 행으로 5중(五衆)이 인연 따라 생겼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몸과 마음이 번거롭기 때문에 괴롭다고 관찰하고, 5수음[五受衆]의 네 가지 행이 번뇌와 유루의 업과 화합함으로 인하여 능히 괴로운 결과를 내기 때문에 집(集)이라 하고, 여섯 가지 원인으로 괴로운 결과를 내기 때문에 인(因)이라 하고, 네 가지 대상[緣]이 괴로운 결과를 내기 때문에 연(緣)이라 하고, 많지도 적지도 많은 인연들이 결과를 내기 때문에 생(生)이라 한다. 

觀五不受衆四行。

是八聖道分能到涅槃故道不顚倒故正。一切聖人去處故迹。愛見煩惱不遮故必到。

 5불수중(不受衆)을 관찰함에 네 가지 행이 있다. 

  이 8성도분은 능히 열반에 이르기 때문에 도이고, 뒤바뀌지 않기 때문에 바름[正]이며, 일체의 성인의 가는 곳이기 때문에 자취[迹]이며, 애견(愛見)의 번뇌가 가로막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른다고 한다. 

是三解脫門在九地中。

四禪未到地禪中間三無色。無漏性故。 

  이 세 가지 해탈문은 아홉 지위 가운데 있다.

곧 4선(禪)ㆍ미도지(未到地)ㆍ선중간(禪中間)ㆍ3무색(無色)이 그것으로, 무루의 성품이다.

或有說者。三解脫門一向無漏。三三昧或有漏或無漏。以是故三昧解脫有二名。

  어떤 이는 말하기를 “3해탈문은 오로지 무루이고, 3삼매는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삼매와 해탈이라는 두 명칭이 있다”고 한다. 

如是說者在十一地。六地三無色欲界及有頂地。若有漏者繫在十一地。無漏者不繫。

  이와 같이 말한다면 11지(地)에도 있게 되니, 곧 6지(地)와 3무색(無色)과 욕계와 유정지(有頂地)6)가 그것이다. 

  만약에 유루라면 얽매여 11지에 있고, 무루라면 얽매이지 않는다.

喜根樂根捨根相應。初學在欲界中。成就在色無色界中。如是等成就不成就修不修。如阿毘曇中廣說。

  희근(喜根)?낙근(樂根)?사근(捨根)에 상응하는 초학자는 욕계에 속하고, 성취한 이는 색계와 무색계에 속한다. 이와 같이 성취함과 성취하지 못함, 닦음과 닦지 않음 등은 아비담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다. 

復次有二種空義。觀一切法空。所謂衆生空法空。衆生空如上說。法空者諸法自相空。如佛告須菩提。色色相空受想行識識相空。

  다시 두 가지의 공한 이치가 있어서 일체법의 공함을 관찰하나니, 이른바 중생의 공함과 법의 공함이다. 

  중생의 공함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법의 공함이란 모든 법의 자상이 공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색과 색의 모습은 공하며, 수?상?행?식과 식의 모습이 공하니라” 하셨다.

問曰。衆生空法不空是可信。法自相空是不可信。何以故。若法自相空則無生無滅。無生無滅故無罪無福。無罪無福故何用學道。

  [문] 중생이 공하고 법이 공하지 않다면 이는 믿을 수 있겠지만, 법의 자상이 공하다 함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법의 자상이 공하다면 생도 멸도 없을 것이요, 생멸이 없다면 죄도 복도 없을 것이요, 죄와 복이 없다면 어찌 도를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答曰。有法空故有罪福。若無法空不應有罪福。何以故。若諸法實有自性則無可壞。性相不從因緣生。若從因緣生便是作法。若法性是作法則可破。若言法性可作可破。是事不然。性名不作法。不待因緣有。諸法自性有。自性有則無生者性先有故。若無生則無滅。生滅無故無罪福。無罪福故何用學道。若衆生有眞性者。則無能害無能利。自性定故。如是等人則不知恩義破業果報。法空中亦無法空相。汝得法空心著故而生是難。是法空諸佛以憐愍心。爲斷愛結除邪見故說。復次諸法實相能滅諸苦。是諸聖人眞實行處。若是法空有性者。說一切法空時。云何亦自空。若無法空性汝何所難。以是二空能觀諸法空。心得離諸法知世間虛誑如幻。如是觀空。若取是諸法空相。從是因緣生憍慢等諸結使言。我能知諸法實相。是時應學無相門。以滅取空相故。若於無相中生戲論。欲分別有所作著是無相。是時復自思惟。我爲謬錯。諸法空無相中。云何得相取相作戲論。是時應隨空無相行身口意。不應有所作。應觀無作相滅三毒。不應起身口意業。不應求三界中生身。如是思惟時。還入無作解脫門。是三解脫門。摩訶衍中是一法。以行因緣故。說有三種。觀諸法空是名空。於空中不可取相。是時空轉名無相。無相中不應有所作爲三界生。是時無相轉名無作。譬如城有三門。一人身不得一時從三門入。若入則從一門。諸法實相是涅槃城。城有三門。空無相無作。若人入空門不得是空。亦不取相。是人直入事辦故不須二門。若入是空門取相得是空。於是人不名爲門。通塗更塞。若除空相是時從無相門入。若於無相相。心著生戲論。是時除取無相相。入無作門。阿毘曇義中。是空解脫門。緣苦諦攝五衆。無相解脫門緣一法。所謂數緣盡。無作解脫門。緣三諦攝五衆。摩訶衍義中。是三解脫門。緣諸法實相。以是三解脫門觀世間卽是涅槃。何以故。涅槃空無相無作。世間亦如是。

  [답] 법의 공함이 있는 까닭에 죄와 복이 있다. 만일 법의 공함이 없다면 죄와 복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이 실로 자성이 있다면 가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성품과 모습이 인연을 따라 생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라면 이것은 만들어진 것[作法]이니, 만일 법성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는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법성이 지을 수 있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옳지 않다. 성품이란 지어지지 않는 법을 이르는 말이니, 인연을 기다려서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법에는 자성이 있고, 자성이 있다면 곧 날 것이 없으리니, 성품이 먼저부터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남이 없으면 멸함도 없고, 남과 멸함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고,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도를 배울 필요도 없다. 

  만일 중생에게 참성품이 있다면 능히 해칠 이도 없고 이롭게 할 수도 없나니, 자성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은혜도 의리도 알지 못하고, 업도 과보도 파괴한다. 법의 공함 가운데에는 법이 공하다는 모습도 없거늘 그대는 법의 공함을 얻으려는 마음에 집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 법공은 부처님들께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애욕의 매듭을 끊고 삿된 소견을 제해 주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은 능히 모든 괴로움을 멸하나니, 이는 모든 성인들의 진실한 수행처이다. 만일 이 법공에 성품이 있다면, 일체법의 공을 말할 때 어떻게 자신마저도 공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법공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면 그대는 무엇을 힐난하려는가?

  이 두 가지 공으로써 모든 법의 공함을 관찰하여 마음이 모든 법을 여읠 수 있고, 세간이 거짓되어 허깨비 같은 줄도 알게 된다. 이렇게 공을 관찰하고서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을 집착한다면 이러한 인연으로 교만 등 번뇌를 일으키고는 말하기를 “나는 능히 모든 법의 실상을 아노라” 한다.

  이럴 때에는 무상문(無相門)을 배워야 하나니, 공의 모습을 취하려는 마음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만일 무상(無相) 가운데에서 희론을 일으키면 분별하여 지은 바 있기를 원해 이 무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때는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착각했구나. 모든 법은 공하고 모습도 없거늘 어찌하여 모습을 얻고 모습에 집착되어 희론을 하는가. 이럴 때엔 공과 모습 없음을 따라 몸?입?뜻으로 짓는 바가 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지음 없는 모습을 관찰하여 삼독을 멸하고, 몸?입?못의 업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며, 삼계 안에 태어나기를 구하지 않아야 하리라.’

  이렇게 생각할 때에 도리어 지음 없는 해탈문에 들어가나니, 이 3해탈문은 마하연 가운데서는 동일한 법이건만 수행의 인연에 따라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법이 공하다고 관찰함이 공이다. 공 가운데서는 모습을 취할 수 없나니, 이때 공은 모습 없음이라 바뀌어 불린다.

  모습 없음에는 어떤 작위(作爲)나 삼계에 태어날 일이 있을 수 없나니, 이때 모습 없음은 작위 없음[無作]이라 바뀌어 불린다. 

  비유하건대 성에 세 문이 있는데 한 사람이 동시에 세 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들어가려면 한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이 열반의 성인데, 그 성에 공ㆍ모습 없음?지음 없음이라는 세 개의 문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공의 문으로 들어가서 이 공을 얻거나 모습에 집착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곧장 들어가 일을 마치기 때문에 나머지 두 문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이 공의 문으로 들어가서 모습을 취하여 이 공을 얻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문이라 할 수 없고, 트인 길이 도리어 막힌다. 

  만일 공의 모습을 제하면 이때에 모습 없음의 문을 통해 들어가게 된다. 

  만일 모습 없음의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희론을 일으키면 이때에 무상의 모습을 제하고 지음 없음의 문[無作門]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비담의 이치에서는 이 공의 해탈문은 고제(苦諦)를 반연하고 5중을 포섭한다. 모습 없음의 해탈문은 한 법을 반연하나니, 이른바 수효와 반연의 다함이다. 지음 없음의 해탈문은 세 가지 진리[三諦]를 반연하고 5중을 포섭한다.

  마하연의 이치에서는 이 3해탈문은 모든 법의 실상을 반연하며, 이 3해탈문으로써 세간이 곧 열반이라고 관찰한다. 왜냐하면 열반은 공ㆍ모습 없음?지음 없음이며, 세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問曰。如經說涅槃一門。今何以說三。

  [문] 경에서는 말하기를 “열반은 한 문이다” 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셋이라 하는가?

答曰。先已說。法雖一而義有三。

[답] 법은 하나지만 이치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먼저 이미 말했다. 

復次應度者有三種。愛多者見多者愛見等者。見多者爲說空解脫門。見一切諸法從因緣生無有自性。無有自性故空。空故諸見滅。愛多者爲說無作解脫門。見一切法無常苦從因緣生。見已心厭離愛卽得入道。愛見等者爲說無相解脫門。聞是男女等相無故斷愛。一異等相無故斷見。佛或一時說二門。或一時說三門。菩薩應遍學知一切道。故說三門。更欲說餘事故。三解脫門義略說。

  다시 제도해야 할 이에 세 종류가 있으니, 애욕이 많은 이와 사견이 많은 이와 애욕과 사견이 균등한 이이다. 

  사견이 많은 이에게는 공의 해탈문을 말해 준다. 곧 일체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겨서 자성이 없음을 보게 한다.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고, 공하므로 모든 사견이 사라진다.

  애욕이 많은 이에게는 지음 없음의 해탈문을 말해 준다. 곧 일체법이 무상하고 괴로우며 인연을 따라 생긴다는 것을 보게 한다. 본 뒤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애욕을 여의고 곧 도에 들어간다. 

  애욕과 사견이 균등한 이에게는 모습 없음의 해탈문을 말해 준다. 곧 이러한 남녀 등의 모습이 없다고 듣기 때문에 애욕을 끊고, 같음과 다름 등의 모습이 없다고 듣기 때문에 사견을 끊는다.   

 부처님께서는 일시에 두 문을 말씀하시고 혹은 일시에 세 문을 말씀하셨다. 보살은 두루 배워서 일체의 길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세 문을 말해 주시고, 다시 다른 일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3해탈문의 이치를 간략히 말씀하신 것이다.

  

四禪有二種。一者淨禪。二者無漏禪。云何名淨禪。有漏善五衆是。云何名無漏。無漏五衆。是四禪中所攝身口業是色法。餘殘非色法一切不可見無對。或有漏或無漏。有漏者善有漏五衆。無漏者無漏五衆。皆是有爲。有漏者色界繫。無漏者不繫。禪攝身業口業及心不相應。諸行是非心非心數法非心相應。禪攝受衆想衆及相應行衆。是心數法亦心相應。禪攝心意識但心。四禪或有隨心行。非受相應。或受相應非隨心行。或隨心行亦受相應。或非隨心行非受相應。隨心行非受相應者。四禪攝身業口業隨心行心不相應諸行及受。受相應非隨心行者。四禪攝心意識。隨心行亦受相應者。四禪攝想衆及相應行衆。非隨心行亦非受相應者。除四禪中攝隨心行心不相應諸行。餘殘心不相應。諸行想行相應亦如是。

4선(禪)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정선(淨禪)이요, 둘째는 무루선(無漏禪)이다. 

  무엇을 정선이라 하는가? 곧 유루의 선한 5중(衆)이다. 

  무엇을 무루선이라 하는가? 곧 무루의 5중이다. 

  4선에 포섭되는 몸과 입의 업은 색법(色法)이요, 나머지 비색법은 일체가 볼 수도 없고 대할 수 없다.

  혹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다. 

  유루라 함은 선한 유루의 5중이요, 무루라 함은 무루의 5중이다. 모두가 유위이다.

  유루는 색계에 얽매이고 무루는 얽매이지 않는다. 

  선(禪)은 몸ㆍ입의 업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心不相應行]을 포섭하나니, 이는 마음도 아니요, 마음에 속하는 법도 아니요, 마음과 서로 응하는 법도 아니다. 

  선은 느낌[受衆]과 생각[想衆]과 그리고 서로 응하는 법을 포섭하나니, 이는 마음에 속하는 법이며, 마음과 서로 응하는 법이기도 하다. 

  선은 마음?뜻?의식을 포섭하나니, 마음뿐이다. 

  4선(禪)에는 마음은 따르나 느낌에는 서로 응하지 않는 것도 있으며, 혹은 느낌과는 서로 응하나 마음은 따르지 않는 것도 있으며, 흑은 마음을 따르기도 하고 느낌과 서로 응하는 것도 있으며, 혹은 마음을 따르지도 않고 느낌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 것도 있다. 

  마음은 따르나 느낌과는 서로 응하지 않는다 함은 4선이 몸ㆍ입의 업과 마음을 따르는 행과 마음과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 및 느낌[受]을 포섭한다는 것이다.

  느낌과는 서로 응하나 마음을 따르지 않는다 함은 4선이 마음?뜻?의식을 포섭함을 말한다.

  마음을 따르고 또한 느낌과도 서로 응한다 함은 4선이 생각[想衆] 및 상응하는 지어감[行衆]을 포섭함을 말한다.

  마음을 따르지도 않고 느낌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다 함은 4선에 포섭되는 마음을 따르는 행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행과 생각과 행과 상응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是四禪中三禪非隨覺行。亦非觀相應。初禪或有隨覺行。非觀相應。或觀相應非隨覺行。或有隨覺行亦觀相應。或有非隨覺行非觀相應。隨覺行非觀相應者。初禪攝身業口業及隨覺行心不相應諸行及觀。觀相應非隨覺行者。謂覺隨覺行。亦觀相應者。覺觀相應諸心心數法。非隨覺行亦非觀相應者。除隨覺行心不相應諸行。餘殘心不相應諸行。四禪皆有因緣亦與因緣。四禪中初禪。或次第非與次第緣。或次第亦與次第緣。或非次第亦非與次第緣。次第非與次第緣者。未來世中欲生心心數法。

  4선ㆍ3선 가운데 2선은 각행(覺行)을 따르지도 않고 또한 관(觀)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다. 초선은 각행을 따르나 관과 서로 응하지 않기도 하고, 혹은 관과 서로 응하나 각행을 따르지 않기도 하며, 혹은 각행을 따르면서 또한 관과 서로 응하기도 하며, 혹은 각행을 따르지도 않고 관과 서로 응하지 않기도 한다. 

  각행은 따르나 관과 서로 응하지 않는다 함은 초선이 신업ㆍ구업과 각을 따르는 행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행 및 관을 포섭함을 말한다.

  관과 서로 응하나 각의 행을 따르지는 않는다 함은 각(覺)을 이르는 말이다. 

  각의 행을 따르기도 하고 관과 서로 응하기도 한다 함은 각과 관이 서로 응하는 모든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다. 

  각의 행을 따르지도 않고, 관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다 함은 각의 행을 따르는 것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이다.

  4선에는 모두가 인연이 있고, 또한 인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4선에서 초선은 차례대로 연(緣)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하며, 혹은 차례대로 연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기도 하며, 혹은 차례대로 연이 되지도 않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한다. 

  차례대로 연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요, 차례대로 연이 되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준다 함은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요, 차례대로 연이 되지 않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제외한 나머지인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으로  서 몸과 입의 업, 그리고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이다. 

  제2선과 제3선도 이와 같으며, 제4선의 차제연이 되고 또한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 그리고 무상정(無想定)을 이미 낸 것과 내려는 것이다. 

  차제연이 되고 또한 차제연이 되어 주기로 한다 함은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다. 

  차례대로 연이 되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제외한 나머지 미래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 그리고 다음에 일어날 마음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과 몸?입의 업들이다. 

  4선에 포섭되는 몸 입의 업, 그리고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은 연이 되어 주지만 연은 되지 않고, 나머지는 연도 되고 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이 4선은 증상연(增上緣)이기도 하고 증상연이 되어 주기도 하나니, 이러한 일들은 아비담에서 자세히 분별한 것과 같다. 

  보살이 선의 방편과 선의 모습과 선의 가닥[支]을 얻는 일은 선바라밀에서 이미 자세히 말한 바이다. 

次第亦與次第緣者。過去現在心心數法。非次第亦不與次第緣者。除未來世欲生心心數法。餘殘未來世中心心數法。身業口業及心不相應諸行。第二第三禪亦如是。第四禪次第不與次第緣者。未來世中欲生心心數法。及無想定若生若欲生。次第亦與次第緣者。過去現在心心數法。非次第亦非與次第緣者。除未來世中欲生心心數法。餘殘未來世心心數法。除心次第心不相應諸行。餘殘心不相應諸行。及身業口業。四禪中攝身業口業及心不相應諸行與緣非緣餘殘亦緣亦與緣。是四禪亦增上緣。亦與增上緣。如是等阿毘曇分中廣分別。菩薩得禪方便及禪相禪支禪波羅蜜中已廣說。

  각의 행을 따르기도 하고 관과 서로 응하기도 한다 함은 각과 관이 서로 응하는 모든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다. 

  각의 행을 따르지도 않고, 관과 서로 응하지도 않는다 함은 각의 행을 따르는 것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이다.

  4선에는 모두가 인연이 있고, 또한 인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4선에서 초선은 차례대로 연(緣)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하며, 혹은 차례대로 연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기도 하며, 혹은 차례대로 연이 되지도 않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기도 한다. 

  차례대로 연이 되기도 하고,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요, 차례대로 연이 되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준다 함은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요, 차례대로 연이 되지 않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제외한 나머지인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으로 

  

 

[781 / 2071] 쪽 

  서 몸과 입의 업, 그리고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이다. 

  제2선과 제3선도 이와 같으며, 제4선의 차제연이 되고 또한 차제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 그리고 무상정(無想定)을 이미 낸 것과 내려는 것이다. 

  차제연이 되고 또한 차제연이 되어 주기로 한다 함은 과거와 현재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다. 

  차례대로 연이 되고 또한 차례대로 연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함은 미래에 내려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을 제외한 나머지 미래의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 그리고 다음에 일어날 마음과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과 몸?입의 업들이다. 

  4선에 포섭되는 몸 입의 업, 그리고 마음에 서로 응하지 않는 모든 지어감은 연이 되어 주지만 연은 되지 않고, 나머지는 연도 되고 연이 되어 주기도 한다. 

  이 4선은 증상연(增上緣)이기도 하고 증상연이 되어 주기도 하나니, 이러한 일들은 아비담에서 자세히 분별한 것과 같다. 

  보살이 선의 방편과 선의 모습과 선의 가닥[支]을 얻는 일은 선바라밀에서 이미 자세히 말한 바이다. 

 

 

問曰。是般若波羅蜜論議中。但說諸法相空。菩薩云何於空法中能起禪定。

  [문] 이 반야바라밀의 논리에서는 모든 법의 공한 모습만을 말했거늘

보살은 어찌하여 공한 법 가운데서 능히 선정을 일으키는가?

 

答曰。菩薩知諸五欲及五蓋從因緣生無自性空無所有。捨之甚易。

  [답] 보살이 5욕(欲)과 5개(蓋)가 모두 인연 따라 생긴 것이어서 자성이 없으며,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줄을 안다면, 그것을 버리기가 매우 쉽다.

衆生顚倒因緣故。著此少弊樂。而離禪中深妙樂。

菩薩爲是衆生故。起大悲心修行禪定繫心緣中離五欲除五蓋入大喜初禪。

  중생들은 뒤바뀐 인연 때문에 이러한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즐거움에 집착되어 선정 가운데의 깊고도 묘한 즐거움을 여읜다.

보살은 이러한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에 대비심을 일으켜 선정을 닦나니, 그는 마음을 대상에 매어 두고 5욕을 여의고 5개를 제거해 커다란 기쁨이 있는 초선에 들어간다. 

滅覺觀攝心。深入內淸淨得微妙喜。入第二禪。

  다시 각관을 멸하고 마음을 거두어 깊은 내면의 청정함에 들어가 미묘한 기쁨을 얻는 제2선에 들어간다.

以深喜散定故。離一切喜得遍滿樂入第三禪。

  다시 깊은 기쁨이 집중을 산란시키기에 일체의 기쁨을 여의고 두루 가득한 즐거움을 얻는 제3선에 들어간다. 

離一切苦樂。除一切憂喜及出入息。以淸淨微妙捨而自莊嚴。入第四禪。

다시 일체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여의고 일체의 근심과 기쁨 및 들고나는 호흡을 제하여 청정미묘한 무관심[捨]으로 스스로를 장엄하는 제4선에 들어간다. 

是菩薩雖知諸法空無相。以衆生不知故。以禪相敎化衆生。

이 보살은 모든 법이 공하여 모습이 없는 줄 알지만 중생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의 모습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若實有諸法空。是不名爲空。亦不應捨五欲而得禪。無捨無得故。今諸法空相亦不可得。不應作是難言。

만일 모든 법의 공함이 실제로 있다면 이는 공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또한 5욕을 버리고서 선을 얻을 수도 없으니, 버릴 수도 없고 얻을 수 없는 까닭에 지금 모든 법의 공한 모습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若諸法空云何能得禪。  

  그러므로 “만일 모든 법이 공하다면 어떻게 능히 선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다. 

復次是菩薩不以取相愛著故。行禪如人服藥欲以除病不以美也。爲戒淸淨智慧成就故行禪。

  또한 다시 이 보살은 모습을 취해 애착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약을 먹는 것과 같으니, 병을 제하기 위함일 뿐 아름다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곧 계를 청정히 하고 지혜를 성취하기 위한 까닭에 선을 행하는 것이다.

菩薩於一一禪中。行大慈觀空。於禪無所依止。以五欲麤誑顚倒故。以細微妙虛妄法治。譬如有毒能治諸毒。

  보살은 하나하나의 선 가운데에서 대자(大慈)를 행하고 공을 관하면서도 선에 의지하지 않는다. 5욕이 거칠고 거짓되고 뒤바뀐 까닭에 미묘하고 허망하다는 법으로 다스리니, 비유하건대 독으로써 능히 독을 다스리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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