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록 선생은 1927년 10월 18일 있었던 일제 수탈의 상징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때 수감번호 264가 시인 이육사가 된 계기가 됐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여러 번 고쳐 쓰다 이영우님의 권고로 李陸史로 고정하였다 한다. 하단에 상설함.
이육사[李陸史, , 1904년 5월 18일 (1904년 음력 4월 4일) ~ 1944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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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로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ㅡ <자유신문>에 시 ‘광야(曠野)’, ‘꽃’ 사후 발표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청포도(靑葡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ㅡ 1939년 8월호<문장>에 ‘청포도(靑葡萄)’ 발표
‘호수(湖水)’
내어달리고 저운 마음이련마는
바람에 씻은 듯 다시 명상하는 눈동자
때로 백조를 불러 휘날려 보기도 하건만
그만 기슭을 안고 돌아누워 흑흑 흐느끼는 밤
희미한 별 그림자를 씹어 놓이는 동안
자주빛 안개 가벼운 명상(暝想)같이 나려 씌운다
ㅡ 1939 <시학>에 ‘호수(湖水)’ 발표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황혼’
내 골ᆺ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것에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어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긴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ㅡ 1933년 귀국하고 1935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
1. 시
발표연도/ 제목
1930 <조선일보>에 첫 시 ‘말’ 발표
1935 <신조선>에 시 ‘춘수삼제(春愁三題)’, ‘황혼(黃昏)’ 발표
1936 신조선>에 시 ‘실제(失題)’, <풍림>에 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1937 <풍림>에 시 ‘해조사(海朝詞)’, <자오선>에 시 ‘노정기(路程記)’ 발표
1938 <비판>에 시 ‘초가(草家)’, ‘강 건너간 노래’, ‘소공원(小公園)’, ‘아편(鴉片)’ 발표
1939 <시학> 시 ‘연보(年譜)’, <비판>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시학>에 ‘호수(湖水)’, <문장>에 ‘청포도(靑葡萄)’ 발표
1940 <문장>에 시 ‘절정(絶頂)’, <인문평론>에 ‘반묘(班描)’, <조선일보>에 ‘광인의 태양(狂人의 太陽)’,
<문장>에 ‘일식(日蝕)’, <인문평론>에 ‘교목(喬木)’, <삼천리>에 ‘서풍(西風)’ 발표
1941 <인문평론>에 시 ‘독백(獨白)’, <문장>에 ‘아미(娥眉)’, ‘자야곡(子夜曲)’, <춘추>‘에 파초(芭蕉)’ 발표
1944 1월 16일 순국
1945 <자유신문>에 시 ‘광야(曠野)’, ‘꽃’ 사후 발표
1946 [육사시집]에 시 ‘소년에게’, ‘나의 뮤즈’, ‘해후(邂逅)’ 수록
미상 시 ‘바다의 마음’, ‘편복(蝙蝠)’
1949 <주간서울>에 시 ‘산(山)’, ‘화제(畵題)’, ‘잃어진 고향(故鄕)’ 발표, 2002년 발굴
www.topstar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720762
이원록 선생은 1927년 10월 18일 있었던 일제 수탈의 상징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의거의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때 수감번호 264가 시인 이육사가 된 계기가 됐다.
이원록 선생은 이육사 외에도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이원록 선생이 사용한 필명은 이활과 한자를 달리한 3가지 뜻의 이육사가 있다. 이육사의 첫 번째 뜻은 죽을 육의 역사 사를 사용해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집안 어른의 권유로 바꾼 육지 육에 역사 사라는 한자를 사용하는 '이육사'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시인 이육사의 뜻이다. 마지막 이육사의 뜻은 고기 육에 설사 사다. 고기 먹고 설사 한다는 뜻의 이름은 기자 활동할 때 일제를 비아냥대는 뜻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ko.wikipedia.org/wiki/%EC%9D%B4%EC%9C%A1%EC%82%AC
주요독립운동활동
-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1927년 10월 18일)
- 장진홍 의사 사건 연루
- 대구격문사건 (1931년 1월)
- 1929년 11월에 터진 광주학생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사건임.
- 1930년 1월 중순에 동맹휴학이 시도되었고 6월에도 동맹휴학이 단행되었으며, 대구에서도 10월에 대구농림학교, 1931년 1월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가게 되었음.
- 이육사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름.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졸업 (1931년~1933년)
- 관련인물 : 김원봉, 윤세주
- 서대문감옥 수감 (1934년 6월)
-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됨.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음. 일본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으며, 체포 후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남.
-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보고내용은 육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 기록내용 : "배일사상, 민족자결 , 항상 조선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음 .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 베이징 소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1944년 1월 16일)
- 1943년 7월, 모친과 형의 소상(小喪)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 후,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 및 베이징으로 압송됨.
-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뚱(東廠胡同, 일제시기에는 東昌胡同) 1호에서 순국.(이곳에는 당시 일제의 문화특무공작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있었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가 시신 거두어 화장하고,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됨(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
李陸史로 고정함
원록의 필명은 여러 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1gugLEJmN4
https://www.youtube.com/watch?v=ZJOHcbOMR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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