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체 蒼巖精舍(창암정사) - 해서체 鳴玉臺(명옥대)

한문읽기 방향은 우에서 좌로

 

https://www.youtube.com/watch?v=gcuhUl-Fy50 

蒼巖精舍(창암정사) - 鳴玉臺(명옥대)

 

鳳停寺 西樓

(봉정사서루)

 이황(李滉 1501~1570)


梵宮西畔一樓橫 
범궁서반일루횡, 법당 서쪽에 누각하나 가로질러 있는데 

創自新羅幾毁成 
창자시라기훼성, 신라시대 때 창건됐으니 몇 번이나 세우고 무너지고 했을고?

佛降天燈眞是幻 
불강천등진시환, 하늘에서 등불이 내려온 동굴에서 부처 되었다는 말 참으로 허황하구나 

胎興王氣定非情 
태흥왕기정비정, 왕기가 흥해 태를 묻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구나 

山含欲雨濃陰色 
산함욕우롱비정, 산은 비를 머금어 그림자색 더 짙어지고 

鳥送芳春款喚聲 
조함욕우롱음색, 향기로운 봄을 보내는 새는 지극히 우는구나 

漂到弱齡栖息處 
표도약령서식처, 어릴 때 깃들던 곳에 떠돌다 돌아와

白頭堪歎坐虛名 
백두감탄좌허명, 흰머리가 되고 보니 헛된 이름에 안주하던 때가 슬퍼진다

[출처]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1785 

 

[정자] 81. 안동 명옥대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天燈山, 576m)이다. 이 산의 한 바위굴에서 의상대사의 제자능인대사가 득도했다. 능인대사가 바위굴에서 수도할 때 하늘에서 천녀가 내려와 불을 밝히며 득도를 도

www.kyongbuk.co.kr

 

명옥대(鳴玉臺)

명옥대는 현종6년(1665)에 사림(士林)에서 옛날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후학들에게 강도(講道)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누각형(樓閣形) 정자(亭子)다.

고사찰인 봉정사 어귀의 좌측 석간수가 흐르는 계곡 건너 방형 일곽의 흙담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정자이다. 봉정사의 동문에 여러 층으로 된 기암이 있는데 그 높이가 두어 길이 쏟아지는 것이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다.

′낙수대(落水臺)′였으나  육기(機,261-303)의 초은시(招隱詩)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내리네(飛泉漱鳴玉)

라는 글귀를 따라 ′명옥대(鳴玉臺′로 개칭했다고 한다.

60여년전에도 중수한 했는데 재목은 비교적 좋은 상태이고 기둥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서 있던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이 전면적으로 개방된 루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봉정사를 찾는 불자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게실 역할을 하고 있다.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2리 산 72-1번지)

 

 

도산서원

https://www.youtube.com/watch?v=lchoJiSzElE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9%A9

 

이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황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

ko.wikipedia.org

 

사상과 신념

 
이황의 저서 《퇴계문집

그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와 양명학은 이단이자 화(禍)로 간주하고, 임금에서부터 동료,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불교 배척, 양명학 배척을 한결같이 말하였다.

이기 이원론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9]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식과의 논쟁

이황은 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10]했다.

그러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11]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번 재현된다.

臣(鄭仁弘)이 젊어서 조식(曺植)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体)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成運)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읍니다. 신이 일찍이 故 찬성 이황(李滉)이 조식(曺植)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中道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 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중략) 曺植과 成運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읍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중략)...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道에 살았읍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읍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읍니다. 이황은 과거(科擧)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中道)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滉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老莊의 道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 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出仕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中道)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老莊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과 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1]

기대승과의 논쟁 ; 47 논쟁

추만 정지운이 [천명도설]을 지었고, 이를 우연히 본 이황이 몇 구절을 고쳤다. 정지운이 "4단 = 發於理, 7정 = 發於氣" (4단은 리에서 드러나고, 7정은 기에서 드러난다"고 한 것을 이황이 "4단 = 理之發, 7정 = 氣之發" (4단은 리의 드러남이고, 7정은 기의 드러남)이라고 고쳤다. 우연히 이것을 본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는 편지를 이황에게 보내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황은 당시에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황에게 편지로 문의했다. 기대승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황과 논쟁을 했다. 기대승은 리와 기가 '함께 있음, 붙음'(不相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주장했다. 이황의 명제는 리와 기를 서로 갈라놓는다.

이에 이황은 기대승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4단 = 理發而氣隨之, 7정 = 氣發而理乘之" (4단은 리가 드러나면 기가 그것을 따르고, 7정은 기가 드러나면 리가 그것을 올라탄다)고 명제를 바꾸었다. 이 명제는 '而' 이하의 뒷부분을 빼면 "4단-리발, 7정-기발"이고, 이황의 원래 명제와 다를 것이 없다. 이황은 리와 기의 '떨어짐, 분리됨, 구별됨'(不相雜; 서로 섞이지 않음)을 주장했다. 붙음과 떨어짐, 이것은 기대승과 이황의 기본적 차이이다.

기대승은 붙음을 주장해서 리와 기를 하나로 만든다. 그 결과 리가 드러남을 부정하고 기만 드러남을 주장한다. 이황의 두 명제 가운데 氣發만 인정한다. 반면 이황은 리와 기를 분리시킨다. 따라서 리발과 기발을 다 인정한다. 2원론이다. 이렇게 되면 논쟁은 리발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나간다.

이황은 주희의 강의록 모음인 [주자어류]를 읽다가, 주희가 "4단 = 理之發, 7정 = 氣之發" 이라 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가 틀리지 않았으며, 주희의 말을 따르자고 기대승에게 제안한다. 기대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 기대승의 입장은 뒤에 율곡 이이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이이 성혼과 논쟁하면서 기대승의 입장을 반복한다. 성혼은 약간 양자 절충을 한 이황의 입장에 선다. 이후 이이가 창시한 서인들은 기발 하나만 인정하는, 리와 기의 붙음을 당로로 정한다. 나아가 한원진은 {주자 언론 동이고}를 써서, 주희가 "4단 = 理之發, 7정 = 氣之發" 이라 한 것은 제자들이 잘못 기록한 말이라 부정한다. 호승심에 사로잡혀 이기려고 집착하다 보니 원문까지 부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 이이는 너무 어려서 이황과 논쟁한 적이 없다. 이황이 죽기 전에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방문해서 며칠 머물며 가르침을 받았다. 돌아가서 편지를 몇통 주고 받는다. 60대 대학자에게 20대 학생이 묻는 것 이상이 아니다.

 

 

 

초은시(招隱詩)의 주제 변천과정

이규일*(국민대 중문과 조교수)

  [출처] 中國學55(2016.06) DOI http://dx.doi.org/10.14378/KACS.2016.55.55.3

pp.43-58

機, 초은시(招隱詩) 부분을 인용함.

  *위 논문에서 '육기의 초은시' 번역을 인용함. 운영자는 한자의 독음을 달고 읽기 편하게 재편집함.

육기의 초은시(招隱詩) 

<문선>에는 좌사초은시 2육기초은시 1가 수록되어 있는데 은자에 대한

시인의 시각이 회남소자, 장화의 작품과는 다르다. 다음은 육기의 초은시1수이다.

 

明發心不夷,

명발심불이- 새벽빛에 마음은 즐겁지 않고

振衣聊躑躅.

진의료척촉- 옷깃을 떨치며 주저하고 있네

躑躅欲安之,

척촉욕안지- 주저하여 장차 어디로 가리

幽人在浚谷.

유인재준곡- 은자는 깊은 계곡에 있네

朝采南澗藻,

조채남간조- 아침엔 남간의 마름을 따고

夕息西山足.

석식서산족- 저녁엔 서산 끝에서 쉰다

輕條象雲構,

경조상운횡- 가벼운 나뭇가지는 높은 누각 같고

密葉成翠幄.

밀엽성취악 - 우거진 잎은 비취빛 휘장을 만들었네

激楚佇蘭林

격초저란림 - 격초 들으며 난초 숲에 섰다가

回芳薄秀木.

회방박수목 - 회방 들으며 나무에 기댄다

山溜何泠泠,

산류하랭랭 - 산을 흐르는 물소리는 얼마나 맑은가

飛泉漱鳴玉.

비천수명옥 - 나는 듯 샘솟아 옥구슬 소리 울린다  

哀音附靈波,

애음부령파 - 낮은 물소리 신령스런 물결에 젖어들고

頹響赴曾曲.

퇴향부회곡 - 감도는 메아리는 층층의 구비를 도네

至樂非有假,

지락비유가 - 참 즐거움은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나니

安事澆淳樸.

안사요순박 - 어찌 참된 본성을 씻어내리  

富貴久難圖,

부귀구란도 - 부귀는 실로 구하기 어려우니

稅駕從所欲.

 세가종소욕 - 굴레를 벗고 원하는 바를 따라야 하리

 

육기

陸機 (261-303) 중국 서진(西晋)시대의 시인. 자는 사형(士衡). 오군(吳郡=장쑤성)의 명가 출신. 조부 손(遜)은 3국 오(吳)의 승상(丞相), 부친 항(抗)은 대사마(大司馬)였다. 일찍이 오나라에서 벼슬했으나, 20세 때에 오가 멸망하자 10년간을 향리에서 은거했다. 태강 말(太康末=289 ?)에 아우 육운(陸雲, 262-303)과 함께 수도 낙양(洛陽)으로 나와 장화(張華=6조 진의 文人)(232-300)에게 재질을 인정받았다. 정치적 야심으로 권력자에게 접근했으나 그것이 화근이 되어, 8왕의 난 때 아우와 함께 처형되었다.

의고(擬古)악부체(樂府體)의 시에 뛰어나 당시 제일이라고 칭해졌다. 그 세련된 수사(修辭)는 육조시(六朝詩)풍의 개척자로 지목된다. 또한 <문부>는 문학에서는 수사·정의(情意)·독창(獨創)을 중시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한 획기적인 문학평론으로서 이름이 높다.

 

[참고] 魏 晋 南 北 朝 시대 문학

http://www.zoglo.net/blog/read/kim631217sjz/286892/7737/680

 

시지기-죽림

魏晋南北朝時代-文學 이 시대의 문학은 한(漢)의 문학이 달의(達意)의 실용적 문학이었던 것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인위적 형식을 중시하는 수사(修辭)주의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위(魏)의

www.zoglo.net

 

https://kydong77.tistory.com/20932

 

육기(陸機), 탄서부(歎逝賦) - 죽음을 한탄하노라!/ 公無渡河歌

信松茂而柏悅,嗟芝焚而蕙歎。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에 타면 혜초가 한탄하네. *붓글씨의 '悲'字는 '歎'字의 잘못. https://www.youtube.com/watch?v=EylB6b7TCCk 公無

kydong77.tistory.com

 

陸機(261-303)

<歎逝賦 (탄서부)> (죽음을 한탄하노라)

 

昔每闻长老追计平生同时亲故,

옛날에 나이든 사람들이 어릴 적에 친했던 이들을 손꼽으며

 

或凋落已尽,或仅有存者。

‘아무개는 벌써 죽고 없고,

살아 있는 이는 얼마 안 되는구나’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余年方四十,

내가 이제 마흔인데

 

而懿亲戚属,亡多存寡;

친한 친척들 중

죽은 이가 많고 살아 있는 사람은 적다.

 

昵交密友,亦不半在。

가까운 친구들 역시 절반도 안 남았구나.

 

或所曾共游一途,同宴一室,

일찍이 함께 놀던 무리들, 한방에서 함께 연회하던 이들도

 

十年之外,索然已尽,

10년이 지나면 모두 죽을 테니

 

以是哀思,哀可知矣,乃作赋曰:

슬픈 생각이 들어 시를 짓노라.”

 

육기(陸機, 261년 ~ 303년)는 중국 서진의 관리이다. 자는 사형(士衡)이며, 오군(吳郡) 사람이다.

육손의 손자이며, 육항의 넷째 아들이다.

 

歎逝賦

昔每聞長老追計平生同時親故,或凋落已盡,或僅有存者。

옛날에 나이든 사람들이 어릴 적에 친했던 이들을 손꼽으며

' 아무개는 벌써 죽었고 ,

보이는 이는 얼마 안되는구나 '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

 

余年方四十,而懿親戚屬,亡多存寡;昵交密友,亦不半在。

내 나이가 이제 마흔인데

그러나 훌륭한 친척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거의 살아 남아 있지 않다.

친한 친척들 중

죽은이가 많고 살아있는 사람은 적다 .

가까운 친구들 역시 절반도 안 남았구나 .

 

或所曾共遊一塗,同宴一室,十年之外,索然已盡。

일찍이 함께 놀던 무리들 , 한방에서 함께 연회하던 이도

10 년이 지나면 모두 죽을 것이다.

 

以是思哀,哀可知矣!乃作賦曰:

그래서 그것을 애도하노니 애도함은 자명한 일이다.

슬픈 생각이 들어 이 賦[시]를 짓노라 . "

 

伊天地之運流,紛升降而相襲。

하늘과 땅의 운행과 흐름의 작용은 상호작용으로 인해

서로를 들어 올리기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한다.

 

日望空以駿驅,節循虛而警立。

허공 중의 해와 달의 흐름을 보면 준마(骏马)가 내달리듯하여

시간과 절후는 허공의 순환으로 놀랍도록 바뀐다. 

 

嗟人生之短期,孰長年之能執?

아, 인생의 짧음이여!

뉘라서 장수(長壽)를 누릴 수 있나?

 

時飄忽其不再,老晼晚其將及。

시간은 질풍처럼 지나가 다시 오지 않건만

늙음[老化]은 더딘 듯하나 오게 마련이다.

 

懟瓊橤之無徵,恨朝霞之難挹。

꽃봉오리 따낼 것 없고

아침 노을은 떠낼 일 없어 아쉽네.

 

望湯谷以企予,惜此景之屢戢。

해 돋는 탕곡(湯谷)을 바라보며 세운 뜻

거듭 이루지 못하여 아쉽기 짝이 없네.

 

*탕곡 : . "동쪽 끝 탕곡(湯谷)에 부상(扶桑)의 나무가 있다. 10일간 햇빛을 받는데, 9일은 하지(下枝)에 받고 1일은 상지에 받는다."(<해외동경>)란 태양에 관한 이야기.

 

悲夫!

슬프도다!

 

川閱水以成川,水滔滔而日度。

물은 냇물을 이뤄 날마다 도도히 흐르건만

 

世閱人而為世,人冉冉而行暮。

인간들은 세상을 이뤄 나날이 저물어 가네.

 

人何世而弗新,世何人之能故。

인간은 어느 세상에서나 젊어질 수 없는데

세상에 뉘라서 젊어질 수 있나?

 

野每春其必華,草無朝而遺露。

들판엔 봄마다 꽃을 피우고

풀들은 아침마다 이슬이 맺히건만 남은 이슬 없네.

 

經終古而常然,率品物其如素。

예로부터 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건 이치일 뿐.

 

譬日及之在條,恒雖盡而弗寤。

비유컨대, 해가 나무가지에 걸려 있지만

언제나 사라지지만 깨닫지 못해.

 

雖不寤其可悲,心惆焉而自傷!

그 슬픔 깨닫지  못해도 

마음은 슬퍼하여 아프기만 해.

 

亮造化之若茲,吾安取夫久長?

밝은 조화 이와 같으니

내 어찌 장구함을 취하랴.

 

痛靈根之夙隕,怨具爾之多喪。

부모 형제  이른 죽음이 마음 아프고

이웃 사람들의 잦은 상이 원망스럽네.

 

悼堂搆之隤瘁,慜城闕之丘荒。

집과 담장 허물어지니 슬프고

성과 둔덕 황폐해지니 걱정이네.

 

親彌懿其已逝,交何戚而不忘。

만남과 사귐의 아름다움을 어찌 잊을손가

 

咨余今之方殆,何視天之芒芒。

닥칠 위험을 알고, 어찌 넓은 하늘을 이고 살겠는가?

 

傷懷悽其多念,戚貌瘁而尠歡。

수심 많아 슬프고, 기쁜 일 없으니 얼굴이 수척해지네.

 

幽情發而成緒,滯思叩而興端。

아득한 마음 피어나고, 답답한 생각 끝이 없다네.

 

慘此世之無樂,詠在昔而為言。

아무 즐거움 없이 잠깐인 세상,

옛 일이나 읊조리고 말한다네.

 

居充堂而衍宇,行連駕而比軒。

많은 사람들이 집과 방에 가득 차고

말과 가마 타고 다니네.

 

彌年時其詎幾,夫何往而不殘。

한 해 한 해 몇 해인가?

어디 가고 남은 해는 없는고?

 

或冥邈而既盡,或寥廓而僅半。*寥廓(요학) 하늘, 허공.

누군 이미 어두운 모습이니 이미 목숨 다해 뵈지 않고,

누군 반쯤 남은 몰골이네.

 

松茂柏悅,嗟芝焚蕙歎。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불에 타면 혜초가 한탄하네.

 

苟性命之弗殊,豈同波而異瀾。

생명에 차이가 없다면

어찌 같은 세상 또다른 세상을 살 수 있나

 

瞻前軌之既覆,知此路之良難。

앞 수례가 엎어진 걸 보면

이 길이 참으로 험난한 걸 안다네.

 

啟四體而深悼,懼茲形之將然。

손발을 내밀어 깊은 애도를 보내며

또한 이 몸도 그리될까 두려워하네.

 

毒娛情而寡方,怨感目之多顏。

즐길 마음과 방법이 부족해 안타깝고

원망하는 낯빛만 눈에  어른거리네.

 

諒多顏之感目,神何適而獲怡。

죽음이 눈 앞에 선한데

어느 정신에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리

 

尋平生於響像,覽前物而懷之。

평생 만남과 사귐의 목소리와 모습을 찾고

옛일을 찾아 보고 그리워하네

 

步寒林以悽惻,翫春翹而有思。

쓸쓸한 겨울숲을 거닐며 애처로이

봄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네

 

觸萬類以生悲,歎同節而異時。

스쳐가는 모든 게 쓸쓸해지고

계절은 같아도 시절은 같지 않네.

 

年彌往而念廣,塗薄暮而意迮。

나이가 들수록 생각은 넓어지고

늙어갈수록 뜻은 옹색해지네.

 

親落落而日稀,友靡靡而愈索。

친척은 해가 갈수록 적어지고

친구는 점점 찾기 힘들어지네.

 

顧舊要於遺存,得十一於千百。

남아 있는 친구를 찾는 것은

아는 이 천 명에 하나나 있을런지.

 

樂隤心其如忘,哀緣情而來宅。

마음에 남은 기쁨 잊혀진 듯한데

슬픔은 정에 끌려 되살아나네.

 

託末契於後生,余將老而為客。

마지막 인연을 자손에게 의탁하면

나는 늙어지면 나그네 된다네.

 

然後弭節安懷,妙思天造。

안주하려는 마음 버리고

하늘의 뜻을 곰곰히 생각하네.

 

精浮神淪,忽在世表。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니

갑자기 세상 밖에 나가 있는 듯.

 

寤大暮之同寐,何矜晚以怨早。

아주 오랜만에 잠들었는데, 늦었다고 원망할 일인가?

指彼日之方除,豈茲情之足攪?

죽을 날이 다가오는데, 어찌 내 마음이 흔들릴까?

 

感秋華於衰木,瘁零露於豐草。

고목나무 위 가을꽃 애닯고, 무성한 풀 위엔 마른 이슬지네.

 

在殷憂而弗違,夫何云乎識道。

깊은 시름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찌 가는 길을 안다 할까?

 

將頤天地之大德,遺聖人之洪寶。

하늘과 땅의 덕을 기리고

성인됨의 큰 보물 남기고.

 

解心累於末跡,聊優遊以娛老。

쌓인 소소한 일들 풀어나가고

늙어서 유유자적 놀다 가려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0932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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