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시인과 함께
길
ㅡ김기림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잊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40336
김기림 시인은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 때 납북되었기 때문에 타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모두가 분명하지 않다. 본명은 김인손, 편석촌(片石村)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 대학을 거쳐 도호쿠 제국대학 영어영문과를 졸업했다. 1930년대 초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김기림의 문학 활동은 창작과 평론 활동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문학 활동은 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시작했으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이론을 자신의 詩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로로 꼽힌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대학교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는데 납북인지 월북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저서로는 시집 <기상도>,<태양의 풍속>,<바다와 나비>,<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다.
출처 : 시니어매일(http://www.seniormaeil.com)
길
ㅡ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낡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 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6부 올배미의 주문(呪文)
<제6부 : 올빼미의 주문(呪文)>
태풍(颱風)은 네거리와 공원(公園)과 시장(市場)에서
몬지와 휴지(休紙)와 캐베지와 연지(臙脂)와
연애(戀愛)의 유향(流行)을 쫓아버렸다.
헝크러진 거리를 이 구석 저 구석
혓바닥으로 뒤지며 다니는 밤바람
어둠에게 벌거벗은 등을 씻기우면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전선주(電線柱)
엎드린 모래벌의 허리에서는 물결이 가끔 흰 머리채를 추어든다.
요란스럽게 마시고 지껄이고 떠들고 돌아간 뒤에
테블 우에는 깨어진 진(盞)들과
함부로 지꾸어진 방명록(芳名錄)과……
아마도 서명(署名)만 하기 위하여 온 것처럼
총총히 펜을 던지고 객(客)들은 돌아갔다.
이윽고 기억(記憶)들도 그 이름들을
마치 때와 같이 총총히 빨아버릴 게다.
나는 갑자기 신발을 찾아 신고
도망할 자세를 가춘다, 길이 없다
돌아서 등불을 비틀어 죽인다.
그는 비둘기처럼 거짓말쟁이였다.
황홀한 불빛의 영화(榮華)의 그늘에는
몸을 조려없애는 기름의 십자가(十字架)가 있음을
등불도 비둘기도 말한 일이 없다.
나는 신자(信者)의 숭내를 내서 무릎을 꿀어본다.
믿을 수 있는 신(神)이나 모신 것처럼
다음에는 기(旗)빨처럼 호화롭게 웃어버린다.
대체 이 피곤(疲困)을 피할 하룻밤 주막(酒幕)은
‘아라비아’의 ‘아라스카’의 어느 가시밭에도 없느냐.
연애(戀愛)와 같이 싱겁게 나를 떠난 희망(希望)은
지금 또 어디서 복수(復讐)를 준비하고 있느냐.
나의 머리에 별의 꽃다발을 두었다가
거두어간 것은 누구의 변덕이냐.
밤이 간 뒤에 새벽이 온다는 우주9宇宙)의 법칙(法則)은
누구의 실없는 장난이냐.
동방(東方)의 전설(傳說)처럼 믿을 수 없는
아마도 실패(失敗)한 실험(實驗)이냐.
너는 애급(埃及)에서 돌아온 ‘씨-자’냐.
너의 주둥아리는 진정 독수리냐.
너는 날개 돋친 흰 구름의 종족(種族)이냐.
너는 도야지처럼 기름지냐.
너의 숨소리는 바다와 같이 너그러우냐.
너는 과연(果然) 천사(天使)의 가족(家族)이냐.
귀 먹은 어둠의 철문(鐵門) 저 편에서
바람이 터덜터덜 웃나보다.
어느 헝크러진 수풀에서
부엉이가 목쉰 소리로 껄껄 웃나보다.
내일(來日)이 없는 칼렌다를 쳐다보는
너의 눈동자는 어쩐지 별보다 이쁘지 못하고나.
도시 십구세기(十九世紀)처럼 흥분(興奮)할 수 없는 너
어둠이 잠긴 지평선(地平線) 너머는
다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음악(音樂)은 바다 밑에 파묻힌 오래인 옛말처럼 춤추지 않고
수풀 속에서는 전설(傳說)이 도무지 슬프지 않다.
페이지를 번지건만 너멋장에는 결론(結論)이 없다.
모퉁이에 혼자 남은 가로등(街路燈)은
마음은 슬퍼서 느껴서 우나.
부릅뜬 눈에 눈물이 없다.
거츠른 발자취들이 구르고 지나갈 때에
담벼락에 달러붙는 나의 숨소리는
생쥐보다도 커본 일이 없다.
강아지처럼 거리를 기웃거리다가도
강아지처럼 얻어맞고 발길에 채어 돌아왔다.
나는 참말이지 산량(善良)하려는 악마(惡魔)다.
될 수만 있으면 신(神)이고 싶은 짐승이다.
그렇건만 밤아 너의 썩은 바줄은
왜 이다지도 내 몸에 깊이 친절(親切)하냐.
무너진 축대(築臺)의 근방에서는
바다가 또 아름다운 알음소리를 치나보다.
그믐밤 물결의 노래에 취할 수 있는
‘타골’의 귀는 응당 소라처럼 행복(幸福)스러울 게다.
어머니 어머니의 무덤에 마이크를 가져갈까요.
사랑스러운 해골(骸骨) 옛날의 자장가를 기억해내서
병신 된 나의 귀에 불러주려우.
자장가도 부를 줄 모르는 바보인 바다.
바다는 다만
어둠에 반란(反亂)하는
영원(永遠)한 불평가(不平家)다.
바다는 자꾸만
헌 이빨로 밤을 깨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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