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너머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 source: http://www.qtessay.or.kr/n34a1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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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장시집 『기상도』] 김기림(金起林, 1908~?)은 모더니즘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지만, 특히 이론적으로 관심을 두고 파고든 분야는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다. 더러 그는 이 두 개념을 구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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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ㅡ 김기림

여보
내 마음은 유리인가 봐, 겨울 하늘처럼
이처럼 작은 한숨에도 흐려버리니…
만지면 무쇠같이 굳은 체 하더니
하로밤 찬 서리에도 금이 갔구료

눈포래 부는 날은 소리치고 우오
밤이 물러간 뒤면 온 뺨에 눈물이 어리오

타지 못하는 정열 박쥐들의 등대
밤마다 날아가는 별들이 부러워 쳐다보며 밝히오

여보
내 마음은 유리인가 봐
달빛에도 이렇게 부서지니

 

바다와 나비
ㅡ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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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 시 <기상도(氣象圖)>

기상도(氣象圖) 【시 전문】- 김기림(金起林) <제1부 : 세계의 아침>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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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도(氣象圖)

- 김기림(金起林)

 

제1부 <세계의 아침>

비늘

돋힌

해협(海峽)은

배암의 잔등

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둘른 젊은 산맥들.

바람은 바닷가에 사라센의 비단폭처럼 미끄러웁고

오만(傲慢)한 풍경은 바로 오전 칠시(七時)의 절정(絶頂)에 가로누었다.

헐덕이는 들 우에

늙은 향수(香水)를 뿌리는

교당(敎堂)의 녹쓰른 종(鍾)소리.

송아지들은 들로 돌아가렴으나.

아가씨는 바다에 밀려가는 윤선(輪船)을 오늘도 바래 보냈다.

국경 가까운 정거장(停車場).

차장(車掌)의 신호(信號)를 재촉하며

발을 굴르는 국제열차.

차창마다

잘 있거라를 삼키고 느껴서 우는

마님들의 이즈러진 얼골들.

여객기들은 대륙의 공중에서 티끌처럼 흩어졌다.

본국(本國)에서 오는 장거리 라디오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하야

쥬네브로 여행하는 신사(紳士)의 가족들.

샴판. 갑판. 안녕히 가세요. 다녀오리다.

선부(船夫)들은 그들의 탄식을 기적(汽笛)에 맡기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두에 달려 팔락이는 오색의 테잎

그 여자의 머리의 오색의 리본

전서구(傳書鳩)들은

선실의 지붕에서

수도(首都)로 향하여 떠난다.

… 스마트라의 동쪽. … 5 킬로의 해상(海上) … 일행 감기(感氣)도 없다.

적도(赤道) 가까웁다. … 20일 오전 열 시. …

                                                                    - <기상도(氣象圖)> 제1부(1936) -

 

2부 시민행렬

넥타이를 한 흰 식인종은
니그로의 요리가 칠면조보다도 좋답니다
살결을 희게 하는 검은 고기의 위력
의사 콜베―르 씨의 처방입니다
헬맷를 쓴 피서객들은
난잡한 전쟁 경기에 열중했습니다
슬픈 독창가인 심판의 호각소리
너무 흥분하였으므로
내복만 입은 파씨스트
그러나 이태리에서는
설사제는 일체 금물이랍니다
필경 양복 입는 법을 배워낸 송미령(宋美齡) 여사
아메리카에서는
여자들은 모두 해수욕을 갔으므로
빈집에서는 망향가를 부르는 니그로와
생쥐가 둘도 없는 동무가 되었습니다
파리의 남편들은 차라리 오늘도 자살의 위생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하고
옆집의 수만이는 석달 만에야
아침부터 지배인 영감의 자동차를 부르는
지리한 직업에 취직하였고
독재자는 책상을 때리며 오직
`단연히 단연히' 한 개의 부사만 발음하면 그만입니다
동양의 아내들은 사철을 불만이니까
배추장사가 그들의 군소리를 담아 가져오기를
어떻게 기다리는지 모릅니다
공원은 수상 막도날드 씨가 세계에 자랑하는
여전히 실업자를 위한 국가적 시설이 되었습니다
교도(敎徒)들은 언제든지 치울 수 있도록
가장 간편한 곳에 성경을 얹어 두었습니다
기도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마님 한 푼만 적선하세요
내 얼굴이 요렇게 이즈러진 것도
내 팔이 이렇게 부러진 것도
마님과니 말이지 내 어머니의 죄는 아니랍니다'
`쉿! 무명전사의 기념제 행렬(記念祭行列)이다'
뚜걱 뚜걱 뚜걱……

 

3부 태풍의 기침시간

<3 : 태풍의 기침시간(起寢時間)

‘바기오’의 동(東) 쪽

북위(北緯) 15도(度)

푸른 바다의 침상(寢牀)에서

흰 물결의 이불을 차 던지고

내리쏘는 태양(太陽)의 금(金)빛 화살에 얼굴을 얻어맞으며,

남해(南海)의 늦잠재기 적도(赤道)의 심술쟁이

태풍(颱風)이 눈을 떴다.

악어(鰐魚)의 싸흠동무

돌아올 줄 모르는 장거리선수(長距離選手)

화란선장(和蘭船長)의 붉은 수염이 아무래도 싫다는

따곱쟁이

휘둘리는 검은 모락에

찢기어 흩어지는 구름빨

거츠른 숨소리에 소름치는

어족(魚族)들

해만(海灣)을 찾아 숨어드는 물결의 떼

황망히 바다의 장판을 구르며 달른

빗발의 굵은 다리

‘바시’의 어구에서 그는 문득

바위에 걸터앉아 머리수그린

헐벗고 늙은 한 사공(沙工)과 마주쳤다.

흥, ‘옛날에 옛날에 파선(破船)한 사공(沙工)’인가 봐.

결혼식(結婚式) 손님이 없어서 저런게지

‘오 파우스트’

‘어디를 덤비고 가나.’

‘응 북(北)으로.’

‘또 성이 났나?’

‘난 잠잫고 있을 수가 없어 자넨 또 무엇땜에 예까지 왔나?’

‘괴테를 찾어 다니네.’

‘괴테는 자네를 내버리지 않었나.’

‘하지만 그는 내게 생각하라고만 가르쳐 주었지.

어떻게 행동(行動)하라군 가르쳐 주지 않었다네.

나는 지금 그게 가지고 싶으네.‘

흠, 막난이 파우스트

흠, 막난이 파우스트.

중앙기상대(中央氣象臺)의 가사(技師)의 손은

세계(世界)의 1500여(餘) 구석의 지소(支所)에서 오는

전파(電波)를 번역하기에 분주하다.

(第一報)

저기압(低氣壓)의 중심(中心)은

‘발칸’의 동북(東北)

또는

남미(南美)의 고원(高原)에 있어

690밀리

때때로

적은 비 뒤에

큰 비

바람은

서북(西北)의 방향(方向)으로

35미터

(第二報) 폭풍경보(暴風警報)

맹렬(猛烈)한 태풍(颱風)이

남태평야(南太平洋) 상(上)에서

일어나

바야흐로

북진(北進) 중(中)이다.

풍우(風雨) 강(强)할 것이다.

아세아(亞細亞)의 연안(沿岸)을 경계(警戒)한다.

한 사명(使命)에로 편성(編成)된 단파(短波)ㆍ단파(短波)ㆍ장파(長波)ㆍ단파(短波)ㆍ장파(長波)ㆍ초단파(超短波)ㆍ모-든 전파(電波)의 동원(動員)ㆍ시(市)의 게시판(揭示板)

‘산사(紳士)들은 우비(雨備)와 현금(現金)을 휴대(携帶)함이 좋을 것이다.’

 

 

4부 자최

<제4부 : 자최>

‘대(大)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번영(繁榮)을 위하야-’

슬프게 떨리는 유리컵의 쇳소리

거룩한 환담(歡談)의 불구비 속에서

늙은 왕국(王國)의 운명(運命)은 흔들리운다.

‘솔로몬’의 사자(使者)처럼

빨간 술을 빠는 자못 점잖은 입술들

색깜한 옷깃에서

쌩그시 웃는 흰 장미(薔薇)

‘대(大)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분열(分裂)을 위하야-’

찢어지는 휘장 저편에서

갑자기 유리창(窓)이 투덜거린다…….

‘자려므나 자려므나.’

‘꽃 속에 누워서 별에게 안겨서-’

‘쁘람스’처럼 매우 슬픕니다.

꽃은커녕 별도 없는 벤취에서는

꿈들이 바람에 흔들려 소스라쳐 깨었습니다.

하이칼라한 쌘드윗취의 꿈

빈욕(貧慾)한 ‘삐-프스테잌’의 꿈

건방진 ‘햄살라드’의 꿈

비겁한 강낭족의 꿈

‘나리사 나게는 꿈꾼 죄밖에는 없습니다.

식당(食堂)의 문전(門前)에는

천만에, 천만에 간 일이라곤 없습니다.

‘…………’

‘나리 저건 묵시록(黙示錄)의 기사(騎士)ㅂ니까.’

산빨이 소름 친다.

바다가 몸부림 친다.

휘청거리는ㄴ 전주(電柱)의 미끈한 다리

여객기(旅客機)는 태풍(颱風)ㅡ이 깃을 피하야

성층권(成層圈)으로 소스라쳐 올라갔다.

경련(痙攣)하는 아세아(亞細亞)의 머리 우에 흐터지는 전파(電波)의 분수(噴水) 분수(噴水)

고국(故國)으로 몰려가는 충실(充實)한 에-텔의 아들들

국무경(國務卿) ‘양키’씨는 수화기(受話器)를 내던지고

창고(倉庫)의 층층계를 굴러 떨어진다.

실로 한모금의 소-다수(水)

혹은 아모러치도 아니한 ‘이놈’ 소리와 바꾼 증권(證券)들 우에서

붉은 수염이 쓰게 웃었다.

‘워싱톤은 가르치기를 정직(正直)하여라.’

십자가(十字架)를 높이 들고

동란(動亂)에 향하야 귀를 틀어막던

교회당(敎會堂)에서는

‘하느님이여 카나안으로 이르는 길은

어느 불ㅅ길 속으로 뚤렸습니까.‘

기도(祈禱)의 중품에서 예배(禮拜)는 멈춰섰다.

아모도 ‘아-멘’을 채 말하기 전에

문(門)으로 문(門)을 쏟아진다……

도서관(圖書館)에서는

사람들은 거꾸로 서는 ‘소크라테쓰’를 박수(拍手)합니다.

생도(生徒)들은 ‘헤-겔’의 서투른 산술(算術)에 아주 탄복(歎服)하빈다.

어저께의 동지(同志)를 강변(江邊)으로 보내기 이하야

자못 변화자재(變化自在)한 형법상(刑法上)의 조건(條件)이 조사(調査)됩니다.

교수(敎授)는 지전(紙錢) 우에 인쇄(印刷)된 박사논문(博士論文)을 낭독(朗讀)합니다.

‘녹크도 없는 손님은 누구냐.’

‘…………’

‘대답이 없는 놈은 누구냐.’

‘………’

‘예의(禮儀)는 지켜야 할 것이다.’

떨리는 조계선(租界線)에서

하도 심심한 보초(步哨)는 한 불란서(佛蘭西) 부인(婦人)을 멈춰 세웠으나,

어느새 그는 그 여자(女子)의 스카-트 밑에 있었습니다.

‘베레’ 그늘에서 취한 입술이 박애주의자(博愛主義者)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붕산(硼酸) 냄새에 얼빠진 화류가(花柳街)에는

매약회사(賣藥會社)의 광고지(廣告紙)들

이즈러진 알미늄 대야

담뱃집 창고(倉庫)에서

썩은 고무 냄새가 분향(焚香)을 피운다.

지붕을 베끼운 골목 우에서

쫓겨난 공자(孔子)님이 잉잉 울고 섰다.

자동차(自動車)가 돌을 차고 넘어진다.

전차(電車)가 개울에 쓰러진다.

‘삘딩’의 숲 속

네거리의 골짝에 몰켜든 검은 대가리들의 하수도(下水道)

멱처럼 허우적이는 가-느다란 팔들

구원(救援) 대신에 허공(虛空)을 부짭은 지치인 노력(努力)

흔들리우는 어깨의 물결

불자동차(自動車)의

날랜 ‘사이렌’의 날이

선뜻 무딘 동란(動亂)을 잘르고 지나갔다.

입마다 불길을 뿜는

마천루(摩天樓)의 턱을 어루만지는 분수(噴水)의 바알

어깨가 떨어진 ‘마르코 폴로’의 동상(銅像)이 혼자

네거리의 복판에 가로 서서

군중(群衆)을 호령(號令)하고 싶으나,

모가지가 없습니다.

‘라디오 비-큰’에 걸린

비행기(飛行機)의 부러진 죽지

골작을 거꾸로 자빠져 흐르는 비석9碑石)의 폭포(瀑布)

‘소집령(召集令)도 끝나기 전에 호적부(戶籍簿)를 어쩐담.’

‘그보다는 필요(必要)한 납세부(納稅簿)’

‘그보다도 봉급표(俸給表)를’

‘그렇지만 출근부(出勤簿)는 없어지는 게 좋아.’

날마다 갈리는 공사(公使)의 행렬(行列)

승마구락부(乘馬俱樂部)의 말발굽 소리

‘홀’에서 돌아오는 마지막 자동차(自動車)의 고무바퀴들

묵서가행(墨西哥行)의 ‘쿠리’들의 ‘투레기’

자못 가벼운 두 쌍의 ‘키드’와 ‘하이힐’

몇 개의 세대(世代)가 뒤섞이어 밟고 간 해안(海岸)의 가도(街道)는

깨어진 벽돌조각과

부서진 유리조각에 얻어맞아서

꼬부라져 자빠져 있다.

날마다 홍혼(黃昏)이 쳐여주는

전등(電燈)의 훈장(勳章)을 번쩍이며

세기(世紀)의 밤중에 버티고 일어섰던

오만(傲慢)한 도시(都市)를 함부로 뒤져놓고

태풍(颱風)은 휘파람을 높이 불며

황하강변(黃河江邊)으로 비꼬며 간다.………

 

보랏빛 구름으로 선을 둘른
회색의 칸바쓰를 등지고
꾸겨진 빨래처럼
바다는
산맥의 突端에 걸려 퍼덕인다.

삐뚤어진 성벽 우에
부러진 소나무 하나……

지치인 바람은 지금
표백된 풍경속을
썩은 탄식처럼
부두를 넘어서
찢어진 바다의 치마자락을 걷우면서
화석된 벼래의 뺨을 어루만지며
주린 강아지처럼 비틀거리며 지나간다.

바위틈에 엎디어
죽지를 드리운 물새 한 마리
물결을 베고 자는
꺼질 줄 모르는 너의 향수.

짓밟혀 늘어진 백사장 우에
매맞어 검푸른 빠나나 껍질 하나
부프러오른 구두 한짝을
물결이 차던지고 돌아갔다.
海邊은 또 하나
슬픈 전설을 삼켰나보다.

황혼이 입혀주는
회색의 수의를 감고
물결은 바다가 타는 장송곡에 맞추어
병든 하루의 임종을 춘다……
섬을 부등켜안는
안타까운 팔.
바위를 차는 날랜 발길.
모래를 스치는 조심스런 발꼬락.
부두에 엎드려서
축대를 어루만지는
간엷힌 손길.

붉은 향기를 떨어버린
해당화의 섬에서는
참새들의 이야기도 꺼져버렸고
먼 등대 부근에는
등불도 별들도 피지 않었다……

 

6부 올배미의 주문(呪文)

<제6부 : 올빼미의 주문(呪文)>

태풍(颱風)은 네거리와 공원(公園)과 시장(市場)에서

몬지와 휴지(休紙)와 캐베지와 연지(臙脂)와

연애(戀愛)의 유향(流行)을 쫓아버렸다.

헝크러진 거리를 이 구석 저 구석

혓바닥으로 뒤지며 다니는 밤바람

어둠에게 벌거벗은 등을 씻기우면서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전선주(電線柱)

엎드린 모래벌의 허리에서는 물결이 가끔 흰 머리채를 추어든다.

요란스럽게 마시고 지껄이고 떠들고 돌아간 뒤에

테블 우에는 깨어진 진(盞)들과

함부로 지꾸어진 방명록(芳名錄)과……

아마도 서명(署名)만 하기 위하여 온 것처럼

총총히 펜을 던지고 객(客)들은 돌아갔다.

이윽고 기억(記憶)들도 그 이름들을

마치 때와 같이 총총히 빨아버릴 게다.

나는 갑자기 신발을 찾아 신고

도망할 자세를 가춘다, 길이 없다

돌아서 등불을 비틀어 죽인다.

그는 비둘기처럼 거짓말쟁이였다.

황홀한 불빛의 영화(榮華)의 그늘에는

몸을 조려없애는 기름의 십자가(十字架)가 있음을

등불도 비둘기도 말한 일이 없다.

나는 신자(信者)의 숭내를 내서 무릎을 꿀어본다.

믿을 수 있는 신(神)이나 모신 것처럼

다음에는 기(旗)빨처럼 호화롭게 웃어버린다.

대체 이 피곤(疲困)을 피할 하룻밤 주막(酒幕)은

‘아라비아’의 ‘아라스카’의 어느 가시밭에도 없느냐.

연애(戀愛)와 같이 싱겁게 나를 떠난 희망(希望)은

지금 또 어디서 복수(復讐)를 준비하고 있느냐.

나의 머리에 별의 꽃다발을 두었다가

거두어간 것은 누구의 변덕이냐.

밤이 간 뒤에 새벽이 온다는 우주9宇宙)의 법칙(法則)은

누구의 실없는 장난이냐.

동방(東方)의 전설(傳說)처럼 믿을 수 없는

아마도 실패(失敗)한 실험(實驗)이냐.

너는 애급(埃及)에서 돌아온 ‘씨-자’냐.

너의 주둥아리는 진정 독수리냐.

너는 날개 돋친 흰 구름의 종족(種族)이냐.

너는 도야지처럼 기름지냐.

너의 숨소리는 바다와 같이 너그러우냐.

너는 과연(果然) 천사(天使)의 가족(家族)이냐.

귀 먹은 어둠의 철문(鐵門) 저 편에서

바람이 터덜터덜 웃나보다.

어느 헝크러진 수풀에서

부엉이가 목쉰 소리로 껄껄 웃나보다.

내일(來日)이 없는 칼렌다를 쳐다보는

너의 눈동자는 어쩐지 별보다 이쁘지 못하고나.

도시 십구세기(十九世紀)처럼 흥분(興奮)할 수 없는 너

어둠이 잠긴 지평선(地平線) 너머는

다른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음악(音樂)은 바다 밑에 파묻힌 오래인 옛말처럼 춤추지 않고

수풀 속에서는 전설(傳說)이 도무지 슬프지 않다.

페이지를 번지건만 너멋장에는 결론(結論)이 없다.

모퉁이에 혼자 남은 가로등(街路燈)은

마음은 슬퍼서 느껴서 우나.

부릅뜬 눈에 눈물이 없다.

거츠른 발자취들이 구르고 지나갈 때에

담벼락에 달러붙는 나의 숨소리는

생쥐보다도 커본 일이 없다.

강아지처럼 거리를 기웃거리다가도

강아지처럼 얻어맞고 발길에 채어 돌아왔다.

나는 참말이지 산량(善良)하려는 악마(惡魔)다.

될 수만 있으면 신(神)이고 싶은 짐승이다.

그렇건만 밤아 너의 썩은 바줄은

왜 이다지도 내 몸에 깊이 친절(親切)하냐.

무너진 축대(築臺)의 근방에서는

바다가 또 아름다운 알음소리를 치나보다.

그믐밤 물결의 노래에 취할 수 있는

‘타골’의 귀는 응당 소라처럼 행복(幸福)스러울 게다.

어머니 어머니의 무덤에 마이크를 가져갈까요.

사랑스러운 해골(骸骨) 옛날의 자장가를 기억해내서

병신 된 나의 귀에 불러주려우.

자장가도 부를 줄 모르는 바보인 바다.

바다는 다만

어둠에 반란(反亂)하는

영원(永遠)한 불평가(不平家)다.

바다는 자꾸만

헌 이빨로 밤을 깨문다.

 

하나

이윽고
태풍이 짓밟고 간 깨어진 메트로폴리스에
어린 태양이 병아리처럼
홰를 치며 일어날 게다
하룻밤 그 꿈을 건너다니던
수없는 놀램과 소름을 떨어버리고
이슬에 젖은 날개를 하늘로 펼 게다
탄탄한 대로가 희망처럼
저 머언 지평선에 뻗히면
우리도 사륜마차에 내일을 싣고
유량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처음 맞는 새 길을 떠나갈 게다
밤인 까닭에 더욱 마음 달리는
저 머언 태양의 고향

끝없는 들 언덕 위에서
나는 데모스테네스보다도 더 수다스러울 게다
나는 거기서 채찍을 꺾어 버리고
망아지처럼 사랑하고 망아지처럼 뛰놀 게다

미움에 타는 일이 없을 나의 눈동자는
진주보다도 더 맑은 샛별
나는 내 속에 엎드린 산양(山羊)을 몰아내고
여우와 같이 깨끗하게
누이들과 친할 게다

나의 생활은 나의 장미
어디서 시작한 줄도
언제 끝날 줄도 모르는 나는
꺼질 줄이 없이 불타는 태양
대지의 뿌리에서 지열(地熱)을 마시고
떨치고 일어날 나는 불사조
예지의 날개를 등에 붙인 나의 날음은
태양처럼 우주를 덮을 게다
아름다운 행동에서 빛처럼 스스로
피어나는 법칙에 인도되어
나의 날음은 즐거운 궤도 위에
끝없이 달리는 쇠바퀼 게다

벗아
태양처럼 우리는 사나웁고
태양처럼 제 빛 속에 그늘을 감추고
태양처럼 슬픔을 삼켜 버리자
태양처럼 어둠을 사뤄 버리자

다음날
기상대의 마스트엔
구름조각 같은 흰 기폭이 휘날릴 게다


태풍경보해제(颱風警報解除)

쾌청(快晴)
저기압(低氣壓)은 저 머언
시베리아의 근방에 사라졌고
태평양(太平洋)의 연안(沿岸)서도
고기압은 흩어졌다
흐림도 소낙비도
폭풍도 장마도 지나갔고
내일도 모레도
날씨는 좋을 게다


시(市)의 게시판(揭示板)

시민은
우울과 질투와 분노와
끝없는 탄식과
원한의 장마에 곰팽이 낀
추근한 우비일랑 벗어버리고
날개와 같이 가벼운
태양의 옷을 갈아입어도 좋을 게다

 

 

故 이상의 추억
저자김기림

상(箱)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은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라도 손수 길러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과 같은 환경과 종족과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상의 시에는 언제든지 피가 임리(淋漓)한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파선(破船)에서 떨어져 표랑(漂浪)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船體) 조각이었다.

다방 N, 등의자(藤椅子)에 기대앉아 흐릿한 담배 연기 저편에 반나마 취해서 몽롱한 상의 얼굴에서 나는 언제고 '현대의 비극'을 느끼고 소름 쳤다. 약간의 해학과 야유와 독설이 섞여서 더듬더듬 떨어져 나오는 그의 잡담 속에는 오늘의 문명의 깨어진 메커니즘이 엉켜 있었다. 파리에서 문화 옹호를 위한 작가 대회(作家大會)가 있었을 때 내가 만난 작가나 시인 가운데서 가장 흥분한 것도 상이었다.

상이 우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없다. 그는 세속에 반항하는 한 악한(?) 정령(精靈)이었다. 악마더러 울 줄을 모른다고 비웃지 말아라. 그는 울다울다 못해서 인제는 누선(淚腺)이 말라 버려서 더 울지 못하는 것이다. 상이 소속한 20세기의 악마의 종족들은 그러므로 번영하는 위선(僞善)의 문명에 향해서 메마른 찬웃음을 토할 뿐이다.

흐리고 어지럽고 게으른 시단(詩壇)의 낡은 풍류에 극도의 증오를 품고 파괴와 부정에서 시작한 그의 시는 드디어 시대의 깊은 상처에 부딪혀서 참담(慘憺)한 신음 소리를 토했다. 그도 또한 세기의 암야(暗夜) 속에서 불타다가 꺼지고 만 한 줄기 첨예(尖銳)한 양심이었다. 그는 그러한 불안 동요 속에서 동(動)하는 정신을 재건하려고 해서 새 출발을 계획한 것이다. 이 방대(尨大)한 설계의 어귀에서 그는 그만 불행이 자빠졌다. 상의 죽음은 한 개인의 생리의 비극이 아니다. 축쇄(縮刷)된 한 시대의 비극이다.

시단과 또 내 우정의 열석(列石) 가운데 채워질 수 없는 영구한 공석을 하나 만들어 놓고 상은 사라졌다. 상을 잃고 나는 오늘 시단이 갑자기 반세기 뒤로 물러선 것을 느낀다. 내 공허를 표현하기에는 슬픔을 그린 자전(字典) 속의 모든 형용사가 모두 다 사치하다. 고 이상―내 희망과 기대 위에 부정의 낙인(烙印)을 사정없이 찍어 놓은 세 억울한 상형 문자야.

반년 만에 상을 만난 지난 3월 스무날 밤, 도쿄 거리는 봄비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왔다는 상의 편지를 받고 나는 지난겨울부터 몇 번인가 만나기를 기약했으나 종내(終乃) 센다이를 떠나지 못하다가 이날이야 도쿄로 왔던 것이다.

상의 숙소는 구단(九段)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2층 골방이었다. 이 날개 돋친 시인과 더불어 도코 거리를 만보(漫步)하면 얼마나 유쾌하랴 하고 그리던 온갖 꿈과는 딴판으로, 상은 날개가 아주 부러져서 기거(起居)도 바로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있었다. 전등불에 가로 비친 그의 얼굴을 상아(象牙)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엽이 코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하다.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어두운 표정이 가뜩이나 병들어 약해진 벗의 마음을 상해 올까 보아서 나는 애써 명랑을 꾸미면서,

"여보, 당신 얼굴이 아주 피디아스의 제우스 신상(神像) 같구려"

하고 웃었더니 상도 예의 정열 빠진 웃음을 껄껄 웃었다. 사실은 나는 듀비에의 〈골고다〉의 예수의 얼굴을 연상했던 것이다. 오늘 와서 생각하면, 상은 실로 현대라는 커다란 모함에 빠져서 십자가를 걸머지고 간 골고다의 시인이었다.

암만 누우라고 해도 듣지 않고 상은 장장 두 시간이나 앉은 채 거의 혼자서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엘먼을 찬탄하고 정돈(停頓)에 빠진 몇몇 문운(文運)을 걱정하다가 말이 그의 작품에 대한 월평에 미치자 그는 몹시 흥분해서 속견(俗)을 꾸짖는다. 재서(載瑞)의 모더니티를 찬양하고 또 씨의 〈날개〉 평은 대체로 승인하나 작자로서 다소 이의(異議)가 있다고도 말했다. 나는 벗이 세평(世評)에 대해서 너무 신경과민한 것이 건강을 더욱 해칠까 보아서 시인이면서 왜 혼자 짓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세상이야 알아서 주든 말든 값있는 일만 정성껏 하다가 가면 그만이 아니냐 하고 어색하게나마 위로해 보았다.

상의 말을 들으면, 공교롭게도 책상 위에 몇 권의 상스러운 책자가 있었고, 본명 김해경(金海卿) 외에 이상이라는 별난 이름이 있고, 그리고 일기 속에 몇 줄 온건하달 수 없는 글귀를 적었다는 일로 해서, 그는 한 달 동안이나 ○○○에 들어가 있다가 아주 건강을 상해 가지고 한 주일 전에야 겨우 자동차에 실려서 숙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상은 그 안에서 다른 ○○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수기(手記)를 썼는데 예의 명문(名文)에 계원(係員)도 찬탄하더라고 하면서 웃는다. 니시간다 경찰서원 속에조차 애독자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시인으로서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하고 나도 같이 웃었다.

음식은 그 부근에 계신 허남용 씨 내외가 죽을 쑤어다 준다고 하고, 마침 소운(素雲)이 도쿄에 와 있어서 날마다 찾아 주고 주영섭(朱永涉), 한천(韓泉) 여러 친구가 가끔 들려 주어서 과히 적막하지는 않다고 한다.

이튿날 낮에 다시 찾아가서야 나는 그 방이 완전히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인 것을 알았다. 지난해 7월 그믐께다. 아침에 황금정(黃金町) 뒷골목 상의 신혼 보금자리를 찾았을 때도 방은 역시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캄캄한 방이었다. 그날 오후 조선일보사 3층 뒷방에서 벗이 애를 써 장정을 해준 졸저(拙著) 《기상도》(氣象圖)의 발송을 마치고 둘이서 창에 기대서서 갑자기 거리에 몰려오는 소낙비를 바라보는데, 창전(窓前)에 뱉는 상의 침에 빨간 피가 섞였었다. 평소부터도 상은 건강이라는 속된 관념은 완전히 초월한 듯이 보였다. 상의 앞에서 설 적마다 나는 아침이면 정말(丁抹) 체조(體操) 잊어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늘 부끄러웠다. 무릇 현대적인 퇴폐에 대한 진실한 체험이 없는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늘 상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면서도 그를 아끼는 까닭에 건강이라는 것을 늘 너무 천대하는 벗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상은 스스로 형용해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하면서 모처럼 도쿄서 만나 가지고도 병으로 해서 뜻대로 함께 놀러 다니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미진(未盡)한 계획은 4월 20일께 도쿄서 다시 만나는 대로 미루고 그때까지는 꼭 맥주를 마실 정도로라도 건강을 회복하겠노라고, 그리고 햇볓이 드는 옆방으로 이사하겠노라고 하는 상의 뼈 뿐인 손을 놓고 나는 도쿄를 떠나면서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캄캄했다. 상의 부탁을 부인께 아뢰려 했더니, 내가 서울 오기 전날 밤에 벌써 부인께서 도쿄로 떠나셨다는 말을 서울 온 이튿날 전차 안에서 조용만(趙容萬) 씨를 만나서 들었다. 그래 일시 안심하고 집에 돌아와서 잡무에 분주하느라고 다시 벗의 병상을 보지도 못하는 사이에 원망스러운 비보(悲報)가 달려들었다.

"그럼 다녀오오. 내 죽지는 않소"

하고 상이 마지막 들려준 말이 기억 속에 너무 선명하게 솟아올라서 아프다.

이제 우리들 몇몇 남은 벗들이 상에게 바칠 의무는 상의 피 엉킨 유고(遺稿)를 모아서 상이 그처럼 애써 친하려고 했던 새 시대에 선물하는 일이다. 허무 속에서 감을 줄 모르고 뜨고 있을 두 안공(眼孔)과 영구히 잠들지 못할 상의 괴로운 정신을 위해서 한 암담(暗澹)하나마 그윽한 침실로서 그 유고집(遺稿集)을 만들어 올리는 일이다.

나는 믿는다. 상은 갔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오늘도 내일도 새 시대와 함께 동행(同行)하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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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장시집 『기상도』] 김기림(金起林, 1908~?)은 모더니즘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지만, 특히 이론적으로 관심을 두고 파고든 분야는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다. 더러 그는 이 두 개념을 구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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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출생지

1908년 5월 11일 ~ 미상

함경북도 성진

[네이버 지식백과] 김기림 [金起林] - 모더니즘의 깃발을 높이 세우다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장석주)

아래의 내용은 1930년대 한국현대시의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지식 내용들입니다.

모더니즘, 주지주의, 이미지즘, 이상이 보여주는 초현실주의 등은 이 시기에 등장한 문학용어들입니다.

목차

  1. 장시집 『기상도』
  2. 구인회
  3. 모더니즘의 성과

 

[참고]

kydong77.tistory.com/19551

 

이상(李箱), 날개 · 오감도(烏瞰圖)

www.youtube.com/watch?v=Woad3Y7UkAQ ko.wikipedia.org/wiki/%EC%9D%B4%EC%83%81_(%EC%9E%91%EA%B0%80) 이상 (작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출생 1910년 9월 23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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