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Uh7-RJKkf0g 

 

 

https://www.youtube.com/watch?v=UbGDexnI4QQ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412

 

임꺽정(林巨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홍명희(洪命熹)가 지은 장편소설.

* (초기)임꺽정전 林巨正傳>(재개시) '임꺽정'으로 변경.

홍명희(洪命熹)가 지은 장편소설. 대표적인 역사소설의 하나이다.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연재되다가, 일제의 ≪조선일보≫ 강제 폐간 조처로 다시 ≪조광 朝光≫에 옮겨 연재했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미완성으로 끝난 부분은 화적편(火賊篇)의 마지막 일부로 작품 전체 분량에 비추어 대략 10분의 1 정도 분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표제는 연재 초기에 <임꺽정전 林巨正傳>이었으나 1937년 연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면서 <임꺽정>으로 바뀌었다. <임꺽정>은 전체 구성이 봉단편(鳳丹篇)·피장편(皮匠篇)·양반편(兩班篇)·의형제편(義兄弟篇)·화적편(火賊篇) 등 모두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꺽정>은 작품 전체가 단행본으로 간행된 적은 한 번도 없고, 광복 전에는 조선일보사에서 의형제편과 화적편 일부가 4권으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광복 후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역시 의형제편과 화적편 일부가 출간된 바 있다.

1992년 사계절출판사가 봉단편·피장편·양반편을 포함하고 광복 전에 간행된 단행본과의 대조과정에서 발견된 누락 부분을 되살려 전체 10권으로 새롭게 펴내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연산군시대와 명종시대에 이르는 16세기 중반 전후의 조선 중기의 역사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 특히 이 시기에 봉건적 질곡을 뚫고 일어선 평민 이하 하층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 근대 역사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첫째, 종래의 역사소설이 철저히 왕조사 중심이거나 근거 없는 야사에 의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역사 왜곡과 함께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 주었던 것에서 벗어나, 충실하게 민중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 준다. 둘째, 당시의 상·하층에 두루 걸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관습을 충실히 재현해 내고 있다.

셋째, 소설 속에 부려쓰고 있는 낱말과 문체에서 우리 고유어를 풍부히 되살려 내고 있으며, 일본어 번역투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 입말[口語]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 내고 있어, 연재 당시에도 ‘조선말의 무진장한 노다지’라고 평가받기도 하였던 소설 문체의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넷째, 봉건적 요소에 저항하는 반봉건적 움직임의 강한 생명력을 드러냄으로써 건강하고 낙천적인 민중정서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소설은 당시 역사소설의 양대 흐름을 지배하던 이광수(李光洙)류의 교훈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나, 박종화(朴鍾和)·김동인(金東仁) 류의 야사에 기댄 영웅주의적이고 부정확한 역사소설의 경향을 뛰어넘어 민중 정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역사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역사소설의 전통은 최근 황석영(黃晳暎)의 <장길산 張吉山>이나 김주영(金周榮)의 <객주 客主> 등을 낳게 하는 문학사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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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 소설 <임꺽정(林巨正)>

 <임꺽정(林巨正)> 【해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장편소설.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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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골 백정인 임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놈’인데 부모를 걱정시킨다고 하여 ‘걱정’이라고 하던 것이 ‘꺽정’으로 되었다.

   꺽정은 열 살 때 갖바치(가죽신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아들과 결혼한 누이를 따라 서울로 와서 갖바치와 같이 살면서 그에게 글을 배웠다.

   양주팔은 본래 학식이 높은 데다 묘향산에 가서 도인 이천년에게 천문 지리, 음양 술수를 배우고 와서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학문에 두루 통달하여 당대의 명망 높은 조광조 등과 교유했다.

   꺽정이는 글공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검술을 익혔다. 이때 박유복과 이봉학은 임꺽정과 의형제가 되었다.

   갖바치는 기묘사화를 보고 나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예견하며 임꺽정을 데리고 전국을 유랑했다. 꺽정은 곳곳에서 백성들의 고난에 찬 삶의 모습들을 접하게 되며, 백두산에 가서 황천왕동이 남매를 만나고 황천왕동이의 누이 운총과 결혼하여 양주로 돌아와 아들 백손을 낳고 평범하게 살았다.

   임꺽정은 서른다섯 살이 되어 여러 도적과 합세하여 봉산 황주 도적이 되며, 38세 때 6명의 산적 두령과 함께 의형제 결의를 맺었다. 그들은 황해도 산적들의 소굴인 청석골을 차지해서 도적질을 했다. 평산에서 관군과 접전해서 승리하고 그러는 가운데 한양 나들이를 갔다가 여러 첩을 맞이하여 방탕하게 지냈다.

   그러다 다시 청석골로 돌아와서 위기에 처했다. 부하와 부인이 잡히자 전옥을 파괴하고 위험을 느끼자 소굴을 여러 군데로 나눠만들었다. 그 해 관군과의 접전을 벌인 평산 싸움에서 관군이 패하고 임꺽정이 승리했다. 이것이 이 작품의 마지막으로, 임꺽정이 잡혀서 처형되는 생애의 마지막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을 꼽았다. 성호가 3대 도적으로 이들을 꼽은 것은 비단 대도(大盜)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은 이들을 도적떼로 몰고 갔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위정자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자 신분해방의 부르짖음이 담긴 의적(義賊)이라는 시각이 담겨있다고 본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A%BA%BD%EC%A0%95

 

임꺽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임꺽정(林巪正, 문화어: 림꺽정, 1521년 ~ 1562년 음력 1월 3일)은 조선 명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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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林巪正,  림꺽정, 1521~1562)은 조선 명종  때의 황해도 지방의 백정 출신 도적이다. 홍길도,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임거정(林巨正), 임거질정(林巨叱正) 등으로도 쓴다.

백정이었으나 성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 중에 임씨(林氏) 성을 가진 사대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지는 않다, 

백정이었으나 성씨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 중에 임씨(林氏) 성을 가진 사대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하지는 않다. 홍길동장길산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이라 칭하기도 하고, 여기에 전우치를 포함해 4대 도적으로 보기도 한다.

경기도 량주(楊州)의 백정으로, 정확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양주군 주내 지역의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백정이라 마을 사람들에게 천대당했고, 동네 우물물도 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꺽정은 집에서 좀 거리가 있는 양주 불곡산*까지 가서 흘러내리는 물을 떠다 마셨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지방관의 탐학으로 살해되면서 의적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도적이 된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그와 비견되는 인물들인 홍길동은 그보다 2세대 전에 활동하던 인물이고, 전우치는 그와 동시대였으며, 장길산  숙종 무렵에 활동했다.

그는 중종, 명종시기 양주 일대와  철원, 황해도 봉산군과 해주보, 구월산 일대에서 폭넓게 활동하였다.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아전과 백성들이 도와 잡지 못하였다. 1559년(명종 14년)부터는 황해도 구월산 등의 산채를 은신처로 정하고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고을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해하는 한편, 관아의 창고를 털어 양곡과 패물을 훔치는 한편 빈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다. 황해도 장연(長淵)· 옹진(甕津)· 풍천(豊川) 등지에서 관군이 토벌을 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내응하거나 미리 알려주어 이를 피했다.

개성의 포도관 이억근(李億根)과 남지근 , 이흠례 등 당시 조선의 장수들은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그는 번번히 체포되지 않고 달아났다. 1560년(명종 15년)부터 점차 세력이 위축되던 중 1562년(명종 17년) 음력 1월에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인해 구월산(九月山)으로 철수하여 항전하다가 남치근 등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1]

 

https://kydong77.tistory.com/6994

 

불곡산에서 임꺽정을 만나다

[은자주]경기도 양주골 불곡산에서 임꺽정을 만났다. 1호선 전철역 양주역에서 하차하여 양주군청 건물 왼쪽에 만든 계단을 이용하여 불곡산에 올랐다.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상봉은 바위산이

kydong77.tistory.com

 

 

[동경(東京)3才]  벽초 홍명희 · 육당 최남선 · 춘원 이광수 …‘조선 3대 천재’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7415.html

 

[영상+] 육당·춘원·벽초…‘조선 3대 천재’의 엇갈린 운명

백 투 더 1919 에피소드 2 ‘동경삼재’

www.hani.co.kr

 

 

 

 

https://www.youtube.com/watch?v=prAJ_trtxOM 

 

 

 

https://www.youtube.com/watch?v=k-wK0l0UBB0 

 

 

[동경(東京)3才]  벽초 홍명희 · 육당 최남선 · 춘원 이광수 …‘조선 3대 천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074

 

홍명희(洪命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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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고종 25) 충북 괴산 출생 ~ 1968년 사망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37

 

최남선(崔南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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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서울 출생, 1957년 10월 10일 사망

1919년 3 · 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제에 체포되어 2년 8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688

 

이광수(李光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1892년(고종 29) 평안도 정주군 출생~ 1950년 10월 25일

 

https://www.youtube.com/watch?v=HCiIKW5LH4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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