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바다여 파도여!

 

~~~~~~

하늘이여 바다여 파도여!

너는 보았느냐? 그 날의 일들을

너는 들었느냐? 그 날 최후 님의, 말씀을

너는 아는냐? 그 날의 자상한 이야기를

~~~~~~

 

아펜젤러 최초의 한국 감리교 선교를 기념하며

2009. 6. 9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9369

 

성서(聖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우리나라에서의 성서 번역은 1790년대에 초기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4복음서 번역에 그쳤으며, 본격적인 성서 번역은 개신교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1884년 이수정(李樹廷)은 비록 복음서와 「사도행전」만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한문에 토를 단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를 출간했는데,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 올 때 이 성서를 들고 입국한 것이다.

다른 한편, 만주에서는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인 로스(Ross,J., 羅約翰)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인 청년 김진기·이응찬(李應贊)·서상륜·백홍준(白鴻俊) 등의 도움을 받아 1882년부터 <누가복음>의 번역을 시작하여 1887년에 『예수셩교젼서』라는 신약성서를 완역 간행하였다.

그러나 한글 최초의 공인 역 신약성서가 출간된 것은 1906년이었고, 구약은 1910년에 번역이 완성되어 1911년에 『성경젼서』로 합본 간행되었다.

천주교에서는 4복음서『사사셩경(四史聖經)』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는데, 라틴어 성서(불가타)를 대본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1922년에는 『종도행전(宗徒行傳)』이라는 이름으로 「사도행전」이 간행되었고, 1941년에 신약성서의 나머지 부분이 모두 번역되었다. 그 뒤 1959년부터 1963년까지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13권으로 나뉘어 번역되어 1971년까지 천주교회의 공인 역본으로 사용되었다.

 

https://christianlife.nz/archives/4428

 

한국에 전래된 성경의 발자취 - 크리스천라이프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대로, 주님의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후에 성령의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복음을 전해 듣고 믿은 사람들 중

christianlife.nz

초기 한반도의 복음전래
오래 전 서기 635년부터 845년, 통일신라 시대에 당나라를 통해서 경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말한다. 서기 1253년에는 몽고를 통해서 로마 선교사인 ‘루브루크’에 의해 고려(Core’e)시대에 카톨릭이 접촉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인 서기 1592년과 1598년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종군신부인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1627년과 1653년에는 당시 기독교 국가였던 화란인 ‘벨트브레’(박연)와 ‘하멜’이 무역하던 배가 파선되어 조선에서 활동한 일이 있었다.

18세기는 한국 천주교 형성기로 실학운동이 왕성하였고, 이승훈(세례명; Peter)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해인 1784년부터 1884년까지 100년 기간을 조선시대의 ‘천주교 선교세기’라고 부른다.

조선 조정에서는 1784년 4월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여, 1791년(신해박해)와 1801년(신유박해)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천주교도인 수 천명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천주교 일부 지도자들은 ‘텬쥬공경가’, ‘성교요지’, ‘성교전서’, ‘쥬교요지’ 같은 신앙서적을 저술하여 민간에게 널리 알렸다.

1815년부터 1839년(기해박해)1866년(병인박해)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여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1845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평안도 의주로 월경하여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그 이듬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하면서도 전달한 성경과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https://www.youtube.com/watch?v=BLhpG8_TwV8

 

개신교 및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토라 두루마리의 십계명

  1.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3. 주(야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5.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해서는 안 된다.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하지 말라.)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서는 안 된다.(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십계명

천주교 십계(천주교 교리 제1권, 제28절)

  1.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여 높이고,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 천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불러 헛 맹세를 발하지 말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3. 주일을 지키고,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 부모를 효도하여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5. 사람을 죽이지 말고,
    (사람을 죽이지 마라.)
  6. 사음을 행하지 말고,
    (간음하지 마라.)
  7. 도적질을 말고,
    (도둑질을 하지 마라.)
  8. 망령된 증참을 말고,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9. 남의 아내를 원치 말고,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2148

 

[역사기획/ 충청의 기독교역사사적지] (1)마량진 한국최초성경전래지

“성경전래 긍지의 역사 기억하고 계승해요”서천교계 기념사업 결실, 2016년 문 열어 … 다양한 성경 자료 전시 ‘큰 호응’충청노회(노회장:이효섭 목사)는 제106회 총회에 100년 이상의 역사를

www.kidok.com

 

 

https://www.youtube.com/watch?v=RfSGs_yjuEk

 

 

https://www.youtube.com/watch?v=cSKBLHnvsTU

 

https://www.youtube.com/watch?v=l1pelsbDdXA

 

https://www.youtube.com/watch?v=Mi2jYmR5eMU

 

 

 

https://m.blog.naver.com/cyberbinpol/221141474708

 

충남 서천 가볼만한곳 마량포구(대한민국최초의 성경전래지, 서해일출명소, 동백나무숲)

고향 앞 바다 마량포구 북서풍빈폴의 고향에도 유명한 바다낚시의 메카가 있었으니 바로 마량포구와 홍원항...

blog.naver.com

 

 

https://www.youtube.com/watch?v=F_plYIbfths

 

 

https://www.youtube.com/watch?v=6QGfbINqADQ

 

 

https://www.youtube.com/watch?v=i74n_Nu_wnY

 

 

https://kydong77.tistory.com/22353

 

이수정, 최초의 한글성서 번역서『현토한한(漢韓)신약전서』/한문본> 국한문본> 한글본

누가복음 https://www.bskorea.or.kr/prog/trans_feature.php 대한성서공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기독교 단체 www.bskorea.or.kr:443 개정 배경 1961년에 최종적으로 개정하여 사용하고 있는 「성경전

kydong77.tistory.com

 

마량진에 성경이 전래되었다는 점과 관련, 한국 개신교사에서 중요하게 살펴야 할 것은 한국이 외국인과의 접촉을 통해 개신교나 성경을 어느 때에 수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 중․후기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인이 한국 해안에 와서 조선인과 접촉한 예가 더러 있고 그들 중에는 개신교 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개신교인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그들과 함께 성경이 보급되었다는 것은 아직껏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 중․후기에 기독교 국가인 네델란드에서 조선에 도래한 사람으로 벨테브레(J.J.Weltevree, 朴淵)와 하멜(H.Hamel) 등이 있었다. 벨테브레는 1627년(인조 4)에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 동료 두 사람(D.히아베르츠, J.피에테르츠)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서 근무했다. 그들은 병자호란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했다. 박연은 ‘매양 선악화복의 이치를 말하고 툭하면 하늘이 갚는다고 말하니 그 말이 도(道) 있는 자에 유(類)하더라’고 한 데서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자료모음

한국의 성경 전래와 영국

 
한국의 성경 전래와 영국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1. 머리말 한국은 그리스도교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뤄온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세 세계 선교사를 돌이켜 볼 때, 한국 그리스도교만큼 급격한 양적 성장을 이룬 나라가 없다는 것이 그 평가의 한 측면이다. 외형적인 성장이 반드시 그리스도교를 위해서 긍정적인가 하는 점은 논외로 하고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중에 몇 개가 한국 그리스도교회이며 그 숫자 또한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우선 이런 점을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징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징에는 수용초기부터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해외에 진출하고 있는 700만 한국인 중에서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울 때 거의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사실이다. 한말 국권수호를 염원하면서 그리스도교회에 의해 시작된 이 새벽기도 운동은 국권이 상실된 일제강점기와 6.25의 참변이 있던 시기에 더욱 강열하게 한국 교회의 전통으로 확립해 갔던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성경과 관련해서도 지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중의 하나는 외국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성경이 한글과 쉬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세계 그리스도교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대체적으로 외국에서 선교사가 찾아가 현지 언어를 공부하고 그런 언어실력을 토대로 성경을 번역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외국 선교사가 한국에 정착하기 전에 한국 바깥에서 성경이 먼저 번역되었다. 더 극적인 것은 이렇게 번역된 성경이 당시 선진적이고 용기있는 한국 그리스도교 선진들에 의해 한국으로 옮겨졌고, 국내에서 그것을 읽은 사람들은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개종의 역사를 이뤄갔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세계의 다른 나라의 그리스도교 전도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주목할만한 특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경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연구자들은 이 점을 거의 간과해 왔다. 성경이 전수되는 과정에서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서 특별하게 공헌한 주체가 있음에도 그 점이 외면되어 왔다. 더구나 성경의 한국 전래와 번역에서 영국이라는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가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는 이 점이 강조되지 않았고 거의 간과되어 왔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 한국에 성경을 전수시켜 주려고 노력한 이들이나 기관이 대부분 영국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필자가 이라는 이 글을 쓰게 되는 중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한국이 그리스도교의 성경과 접촉하게 되는 대부분의 과정에서 영국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시대별로 정리하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영국인이 해외에서 번역하여 전수시킨 성경에 의해 한국에서는 개종의 역사가 이뤄지고 그리스도교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글의 형편상, 한국이 고대의 경교(景敎)나 조선 중기의 가톨릭교, 그리고 다른 외국인과 접촉한 데 대해서 먼저 언급하지 않고, 영국인과의 접촉부터 시작하겠다. 2. 마량진 성경 전래 
 
영국이 한국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것은 1600년에 출간된 Richard Hakluyt의 (George Bishop, Ralfe Newberie and Robert Baker, London, 1600)에서다. 이 책의 저자 하클루이트는 탐험가로서 동북아 일대를 탐험하고 귀국하여, Coray라는 나라가 중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는 알았다고 썼다. 그 뒤 영국은 1604년에 중국 한국 일본 등 극동제국과 통상무역을 열기 위해 동인도회사의 Michelborne에게 특허를 주기도 했고, 10년 후인 1614년에는 Sayer에게, 1618년에는 Cocks에게 한국 등에 접촉토록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거기에 비해 한국이 영국을 처음 인지하게 된 것은 1614년에 간행된 이수광(李睟光)의 에서다. 지봉유설에서 영길리국(永結利國)으로 표현되어 있는 영국은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바다 가운데 있으며, 낮이 매우 길어서 이경이면 날이 밝게 되고, 보릿가루를 먹고 가죽옷을 입으며, 배를 집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 나라는 쇠로 만든 튼튼한 배를 네겹으로 제조하며 전쟁에는 대포를 사용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겁탈을 감행함으로 여러 나라가 대항하지 못한다고 했다.   
1634년에 최초로 동인도회사가 상선 런던호를 중국에 파견한 이래, 영국의 함선이 황해를 통과하여 북경으로 항해한 것은 1793년이었으나, 한국 해안에 나타난 것은 1797(正祖 21)년 9월(양력)이었다. 영국의 해군 중령 W.R.Broughton이 이끄는 포함 Providence호가 동해로 진입하여 원산만을 거쳐 시베리아 동쪽까지 탐사하고 부산 용당포 앞에서 표착한 적이 있었다. 이 때 경상도 관찰사 이원형(李元亨)이 역관을 보내어 중국어 만주어 일본어 몽고어 등으로 문정했으나 전혀 의사가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1816년 9월에 이르러 영국의 함선 두 척이 충청도 비인만(庇仁灣) 마량진(馬梁鎭) 앞 갈곶(葛串)에 도착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 함선은 영국의 Alceste호(함장 Murry Maxwell)와 Lyra호(함장 Basil Hall)로서 중국에 파송하는 특명전권대사인 암허스트(J. Wm. Amherst) 일행을 천진(天津)에까지 안내한 후, 맥스웰 대령의 지휘 아래 요동만과 직예만, 조선 서해안 및 유구열도의 탐사에 나섰다가 이 곳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8월 29일 위해위(威海衛)를 출발하여 9월 1일에는 대청군도(大靑群島)에 접근했고, 9월 4일(純祖 16년 음 7월 18일)에 마량진에 도착, 10여 시간 정박하는 동안 적어도 두 차례나 조선관리들의 문정을 받은 후 떠났다. 이들 두 척의 배가 마량진에 도착했을 때 마량진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비인현감 이승열(李升烈)이 문정(問情)차 두 배에 승선, 검사하고 모두 세 권의 책을 받았는데, 뒷날 영국인의 기록에 의해 그 받은 책 중 한 권이 다름 아닌 성경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Alceste호와 Lyra호가 마량진에 도착한 후 조선인 관원과의 교섭과정이나 성경을 건네준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한국측과 영국측이 남긴 기록이 각각 있다.
한국측의 기록은 순조실록(純祖實錄) 권 19(조선왕조실록 제 48권, 국사편찬위원회) 순조 16(丙子年, 1816년)년 7월 19일 병인(丙寅)조의 충청수사(水使)  이재홍(李載弘)의 장계에서 보인다. 이재홍은 이양선 두 척이 마량진에 ‘임의대로 두류(逗留)하고 환거(還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열의 죄상을 상신하면서 비교적 자세히 정황을 설명하고 이들이 책을 받은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영국측의 기록은 이 때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함장과 군의관에 의해 항해기로 남겨졌다. 리라호의 함장인 Basil Hall은 An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o the Great Loo-Choo Island: With Two Charts (John Murray, London, 1818)를 남겼고, 알세스트에 승선했던 군의관 John McLeod는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 to the Island of Lewchew: With An Account of the Her Subsequent Shipwreck (John Murray, London, 1818)를 남겼다. 이 두 책에 보이는 관련 기록은 앞서 말한 순조실록의 이재홍의 장계와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서로를 보완해주는 측면도 있다.  우선 두 함선이 마량진 근해에 정박하여 한국인에게 성경을 건네준 경위에 대해서는 이미 선학들의 자세한 연구가 있어서 이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겠다.
앞서 언급한 대로 8월 29일 산동반도의 위해위를 출발한 두 함선이 9월 4일 비인만에 들어와 마량진 갈곶에 정박하자 마량진 첨사 조대복이 문정하기 위해 군졸을 거느리고 해상으로 출동했다. 노대관(老大官) 조대복은 먼저 리라호에 올라 문정에 필요한 의전절차를 밟은 후 시종한 부하들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는가?” “진중에 한자를 알고 교섭의 일을 맡을 문필인은 없는가?” 등의 질문들이었다. 이런 질문들은 언어 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문정문을 교환했기 때문에 뒷날 맥스웰이 광동으로 돌아가 모리슨으로부터 그 문정 내용을 들어 알게 된 것이다. 조대복은 처음에 한문으로 물었으나 한문을 전혀 모르는 맥스웰은 모르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답답해진 첨사는 다시 한글로 물어 보았으나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 한문과 한글로 묻고 손을 들어 꽤 오래 동안 힐난하는 이런 광경은 조선측 기록에도 그대로 보이고 있다.
문정을 통해 특별한 정보를 얻지 못했지만,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첨사는 알세스트호로 가서 다시 문정을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첨사는 역시 부하를 통해 문정했으나 맥스웰 대령은 그들이 내민 글을 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라고 영어로 써서 그들에게 보였다. 그러나 첨사 일행도 역시 ‘전자인 듯하면서 전자가 아니고(似篆非篆), 언문 비슷하면서도 언문이 아닌(似諺非諺)’ 글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국 함선에는 중국인이 동승하고 있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첨사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제대로 문정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문정문을 교환했다. 그 때문에 뒷날 문정의 내용이 영국인들의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조대복은 4일 저녁에 행해진 제 1차 문정의 과정을 기록하여 충청수영(水營)에 전달했고, 수사 이재홍은 이 사실을 조정에 급히 보고하여 회답을 기다렸다. 성경이 전해진 것은 9월 5일이다. 첫 문정이 있었던 그 이튿날이다. 바실 홀과 맥레오드는 다 같이 성경이 9월 5일에 전해졌고, 마량진 첨사 조대복이 그것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두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9월 5일 마량진 첨사 조대복은 비인현감 이승열을 대동하고 리라호를 다시 방문했다. 이날 현감 이승열은 영국 군의관으로부터 진찰을 받았다. 눈과 혀를 검사하고 손목을 진맥하였으며 청진기를 가지고 가슴을 진찰하고 손을 대어 두드리기도 하며 진찰대 위에 눕히고 배를 눌러보는 등 매우 면밀하게 진찰했다. 군의관이 정성스럽게 ‘서양식 진찰의 정상적 순서’를 밟는 동안 현감은 전 과정을 잘 참아냈다. 이날 현감 이승열이 먼저 한 권의 책을 선사 받았고, 얼마 후에 마량진 첨사 조대복이 한 권의 성경을 선물로 전해 받게 되었다.
이날, 첨사는 부하 관리로 하여금 리라호를 실측토록 하는 한편 승무원의 총수도 조사했고 함포사격 시범도 관람했으며 식사에도 초대를 받았다. 첨사의 이날 예의바른 행동과 태도는 낯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다음의 증언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도 색다른 인종의 습관을 잘 소화해 나가는 그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는 정말 놀랄 만했다. 더구나 그가 지금까지 우리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으리라 생각할 때에 그의 그 훌륭한 태도는 그 사회에 있어서의 그의 지위를 짐작케 할 뿐 아니라, 우리와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있는 그 사회의 문화 정도가 무시하지 못하리만큼 높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는 연구심이 매우 왕성하여 사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애써서 실험해 보고 성공하게 되면 아주 통쾌하게 웃어댔다. 그는 결코 터무니없이 놀라거나 과도한 찬사를 하는 일이 없고 세계 어느 곳에 갖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훌륭한 교양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앞서의 우호적인 상황을 근거로 일행이 육지로 상륙하려 했을 때였다. 조대복이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며 반대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는 일행이 상륙하여 마을을 향해 가려하자 ‘종자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마을을 향해 가면서 방성통곡’했다. 이날 그는 ‘목베이는 동작’을 여러 번 되풀이했고 손을 목에다 대며 ‘형집행의 의식을 흉내’내기도 했다.
조대복의 이런 난처하고 강경한 태도로 일행은 더 이상 마량진에 정박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며칠 있으면 중앙정부로부터 통고가 와서 입국이 허가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남방으로 발행하기로 하고 먼저 리라호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 곧 출발할 예정이었던 알세스트호가 주민들의 선박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어서 조대복이 알세스트호에 올라 다시 맥스웰 함장을 만났다.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제시할 수 없었겠지만, 알세스트호를 정선시킨 것은 아마도 중앙정부의 회시 없이 이양선을 ‘임의대로 두류(逗留)하고 환거(還去)’한 데 대한 책임문제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경색된 분위기 속에서 성경이 전수되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맥스웰 함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던 첨사 조대복은 배안의 서재에 들어가 서가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자를 보면서 호기심을 발동한 것이다. 장정이 유달리 크고 아름다운 책자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 책자를 손에 든 그는 ‘좋다’는 소리를 연발했다. 그 책이 성경이었다. 조금 전까지 경색된 표정을 거두지 않던 그가, 비록 호화로운 장정 때문에 쉽게 눈에 띄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성경을 보고 그렇게까지 탄성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순간적으로나마 그의 마음을 감동시킨 성령의 역사 때문이 아니었을까.
맥스웰이 첨사의 이런 심정을 간파한 듯, 첨사에게 이 성경을 선사하겠다고 건넸지만 첨사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하선 때에 맥스웰이 다시 ‘그렇게도 진지하게’ 권하자 그는 거절하지 않고 “아주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성경을 받고 상당히 기분 좋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각각 다른 시기의 홀의 증언은 이 미지의 세계에 성경을 전한 증언자 자신의 감동이 어려 있는 듯하다.  그[조대복]는 어떤 선물도 받지 않으려 했으나 그가 받은 예기치 않은 친절로 상당히 안도하는 것 같았다. 그가 배를 떠날 때에는 어느 정도는 그의 본래의 정신들이 회복되었다. 그가 선실에 있는 서적들을 구경한 후 그는 성경(a Bible)의 장정에 상당한 마음이 끌렸으나 막상 그에게 성경을 권하자 비록 대단히 마지못해서지만[주저하면서]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가 배를 막 떠나려할 때 다시 건네주자 이제는 아주 감사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성경]을 받고 상당히 기분 좋게 돌아갔다.  그[僉使]에게 많은 선물들이 주어졌으나 그는 그것들 모두를 거절했다. 그러나 드디어 그가 배에서 막 떠나려 할 때에 맥스웰 함장이 커다란[대형] 성경 한 권을 받아달라고 그렇게도 진지하게 권하니 그 노인은 거절하지 못했으며, 그리고 그들은 서로 우정을 나누었다. 이렇게 조대복이 받은 성경을 두고, 김양선은 그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지적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전달된 성경은 “우리나라에 성서가 전래된 최초의 사실로서 한국 기독교사상에 있어서나 일반 문화사상에 있어 대서특필해야 할 중대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홀의 항해기에 나타난 성경이 대형 호화판이라는 점에 비추어, 이 성경은 1611년에 초판된 ‘King James 역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3. 귀츨라프와 토마스 그리고 윌리암슨 [요약] 마량진 성경 전래 후에 한국에 성경을 전해주려는 노력은 복음전파를 위해 동양에 왔던 몇 몇 선교사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郭實獵, 1803-1851)와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崔蘭軒, 1840-1866)는 한국에 와서 성경을 전해 주려 했다. 한국을 직접 방문한 두 사람과는 달리 19세기 후반기에 중국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 선교를 지원하고 성경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등 보이지 않게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 선교사가 바로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韋廉臣, 1829-1890)이다. 이 세 선교사의 한국 성경전수 노력도 영국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먼저 귀츨라프다. 1832년에 서해안 장산곶과 홍주만 고대도에 상륙한 바 있는 귀츨라프는 자신이 유태계 독일인이었지만, 그가 한국을 방문하여 성경을 전수하는 데는 영국 기관과 영국인의 도움이 컸다. 이를 몇 가지로 설명하겠다.
첫째 그는 선교사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과 중국 선교에 주력하게 된 데에는 영국과의 관련이 깊다. 그가 처음에 선교사로 결심하게 된 데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영국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의 영향이 컸다. 귀츨라프가 할레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의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을 때에는 네델란드 선교회 소속으로 주로 태국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자신보다 먼저 동양에 선교사로 파송된 선교사들을 접하면서 중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麥道思) 등의 권유로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둘째 귀츨라프가 1832년 중국과 한국, 오키나와 및 타이완 등을 항해하게 된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동인도회사는 1천톤 급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마련하여 귀츨라프를 통역 겸 선의(船醫)로서 동승하기를 요청했다. 순방의 목적은 영국과의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는 것과 그 지방 관민의 통상개시에 관한 관심을 살피는 데에 있었다. 귀츨라프는 이런 제의를 받으면서 선교사로서의 자기의 포부가 이뤄질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고, 선교사를 지망하면서 공부해 두었던 몇 개의 외국어가 이때 큰 도움이 되었다.    
셋째 귀츨라프는 1832년 한국 서해안에 도착하여 성경을 전파했는데, 이 때 전파된 성경은 1807년에 중국 광동에 와서 번역 선교에 주력하고 있던 모리슨이 번역하여 제공한 것이었다. 그는 1832년 7월 17일에 한국 해안에 나타나 장산곶 부근에 정박하여 주민들에게 성경을 전했다. 7월 23일 홍주만 고대도에 이르러서도 그는 먼저 국왕에게 보내는 선물 가운데 성경 한 질을 넣었다. 갑판 위를 방문한 한국인들에게도 성경을 건넸다. ‘많은 관리와 서기들’에게도 지리 역사책과 함께 생명을 말씀(성경)을 건넸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성경은 영국인 선교사 모리슨이 직접 번역한 것이었고 항해에 앞서 모리슨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1807년에 중국에 들어간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외국인 거주제한의 어려움을 뚫고 1810년부터 ‘사도행전’을 번역 출판하였다. 1819년에 신구약 성경을 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그는 1823년에 이를 출간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귀츨라프의 한국 방문과 성경전수의 배경에는 영국과의 관련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는 영국인으로 한국에서 희생된 첫 개신교 선교사다. 1863년에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송된 토마스는 아내의 사망과 선임 선교사와의 불화 등으로 1884년 12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중국 해관에 취직했다. 중국어 러시아어 및 몽고어에 능통했던 그는 지푸(芝罘)에 근무하면서 해관 업무에 종사하는 한편 스코틀란드 성서공회 중국 주재원인 윌리암슨과 가까이 하면서 성서연구반 운영과 중국인들을 위한 주일예배, 영어사용 교회운영 등의 선교사업을 힘껏 도왔다.
1865년, 해관을 사임하고 윌리암슨의 후원으로 9월 초에 한국으로 출발한 토마스는 이 달 13일에 서해안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2개월 반 동안 한국어를 습득하는 한편 윌리암슨으로부터 받아온 성경을 배포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당시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고집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태풍으로 목숨을 겨우 건진 채 만주를 거쳐 1866년 1월 초에는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 무렵 런던선교회로부터 북경이 새임지로 정해졌다는 통고를 받았다.
토마스는 그 해 4월까지 북경에 체재하면서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접촉, 자기가 전파한 성경이 평양에까지 흘러 들어갔음을 확인했다. 이런 소식을 드었던 토마스는 기회만 있으면 한국에 가고자 했다. 이 무렵 프랑스는 자국 신부를 살해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 함대를 한국에 원정시키고자 논의했는데, 이 때 그는 통역으로 동행할 것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인도지나에 긴급하게 출동할 문제로 프랑스 함대의 한국 원정은 무기연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중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통역 겸 향도로 동승하여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토마스와 관련, 1866년에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는 여기서 상론하지 않고 성경과의 관계만 말하는 것으로 하겠다. 우선 그는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윌리암슨이 제공한 성경을 가지고 한국으로 갔다. 그러나 ‘제너럴 셔만호 사건’으로 1866년 9월 2일, 토마스는 2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죽음에 앞서 성경을 한국인에게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평양에 선교사로 왔던 마페트(Samuel A. Moffett, 馬布三悅)는 1893년 11월 학습교인반을 조직할 때에 토마스 목사로부터 중국어 신약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을 발견했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윌리암슨은 한국 교회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다. 그 역시 영국인으로, 그가 한국에 선교사로 오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대한 성경 보급을 통해 한국 선교를 지원했던 분이다. 그는 1855년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활략하다가 과로로 2년만에 귀국했고, 1863년에 스코틀란드 성서공회 중국주재 책임자로 다시 중국으로 왔다.
그가 한국 선교를 지원한 것으로는 우선 토마스 목사를 한국에 파송한 것을 들 수 있다. 토마스는 윌리암슨의 도움으로 다량의 성경을 얻어 제 1차 한국 방문길에 나서게 되었다. 윌리암슨은 또한 만주를 통한 한국 선교에 노력했다. 1867년 한만 국경 지역의 개시(開市) 때에는 만주를 방문, 한국 상인들과 동지사 일행도 만났다.
윌리암슨은 중국 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소속의 의료선교사 다우드웨이트(Arthur W. Douthwaite)로 하여금 1883년 말에서 1884년 초에 걸쳐 한국을 방문토록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오군란 후의 중국군이 한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에 이같은 선교의 기회를 포착했던 것이다. 윌리암슨 박사의 요청에 따라 한국을 방문한 다우드웨이트는 “아주 많은 양의 ‘하나님의 말씀’을 반포했”던 것이다.
윌리암슨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원군 시대의 쇄국정책을 염두에 둔 듯, 그는 선교사가 직접 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성서공회의 중요역할인 성경전파를 통해 한국 선교의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같은 노력은,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회 소속의 로스(John Ross, 羅約翰)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를 적극 지원하여 성경사업을 통해 한국의 복음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 선교사가 이르기 전에 한국에서는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 보급되었고 그 보급된 성경에 의해 개종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4.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성경 번역과 반포 - 한국 개신교의 시작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한국에 외국어 성경이 전래되는 데는 영국의 역할이 컸다. 이런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영국은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 간행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외국에서 번역 간행된 한국어 성경은 한국으로 전래되었고 개종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 그리스도교는 영국에 빚진 바 크다고 할 것이다.
한국에서 개신교사가 시작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한국에 입국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의 복음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이뤄졌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복음선교사가 도래하기 전에 성경이 한국어로 먼저 번역되고 번역된 성경이 용감한 한국인 선배 신자들에 의해 한반도 안으로 전래되어 개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 간행된 역사는 만주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만주지역과 관련해서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PC)의 선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교단은 1860년대부터 산동반도 지푸를 중심으로 중국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1870년대에 들어서서 이 교단 선교사 로스는 지푸로 파송되지 않고 처음부터 만주의 우장(牛莊)·영구(營口)로 들어왔고 그 뒤에 봉천(奉天, 일명 심양)으로 옮겨 선교활동을 펴게 되었다. 로스는 선교지로 출발하면서부터 한국의 영혼들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한국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고자 동(東)만주의 한만국경지대를 순례하기도 했다. 로스 선교사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매부가 된 매킨타이어도 산동반동에서 만주로 옮겨 동역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매킨타이어와 합류한 로스는 1870년대 중반에 만주에 왔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 한국인 청년들을 만나 한국어를 교습받는 한편 이들을 한글성경 번역에 동참시켰다. 이어서 1879년에는 네 사람의 의주청년이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그 뒤 1882년에는 성경번역과 출판에 참여한 김청송과 서상륜도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성경의 한국어번역사업은 1882년 3월에는 누가복음서가, 5월에는 요한복음서가, 그 이듬해에는 사도행전이 각각 출판되었다.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로스의 이같은 번역사업은 1887년에 신약성경인 의 간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출판된 누가·요한 복음은 1882년부터 세 루트로 한국에 도입되어 개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첫째는 일본에 있는 스코틀란드성서공회의 책임자에게 전달되어 그 이듬해에는 일본에서 파송한 권서가 부산과 대구, 원산에서 그것을 판매하였다. 둘째는 김청송 등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여러 차례 한만(韓滿) 국경지대인 서간도에 성경을 보급하였다. 당시 압록강 북쪽의 서간도 지역에는 가렴주구와 흉년을 피해 3만여명의 한국인이 이주해 와서 28개의 계곡에서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복음서가 전해지자 세례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로스와 그의 동료는 1884년 겨울 영하 40도의 추위를 무릅쓰고 600마일의 여행길에 나서서 여러 마을에서 75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이듬해 여름에는 25명의 한국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무렵 압록강 주위의 만주지역에서는 600여명의 한국인이 수세를 희망하고 있었다. 셋째, 1882년말부터 성경의 번역과 출판에 조력했던 백홍준 이응찬 서상륜이 한국으로 들어와 성경보급에 나섰다. 이응찬과 백홍준이 의주와 압록강 남안을 따라서 성경보급에 나섰고, 서상륜은 1882년 10월 로스 목사 부부와 하직하고 성경을 가지고 의주로 왔다가 그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남하하였다.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를 황해도 장연군 소래(松川)로 보내고 자신은 서울로 들어가 전도활동에 나섰다. 1883년 초에 서울에 도착하여 성경 전파에 나섰던 서상륜은 이 해 말에는 13명의 개종자가 세례받기를 원한다는 보고를 로스에게 보냈다. 그 보고서에서 서상륜은 로스 목사가 서울에 와서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세울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로스는 서울에 가지 않았다.
1885년 초에 만주로 돌아온 서상륜은 자신의 2년간의 활동을 보고하면서, 서울에 70여명의 수세 희망자가 있으며 서울에서 떨어진 곳에서는 몇 주 전부터 설교당(preaching hall)을 만들어 20여명이 주일마다 모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사실은 1885년 3월 8일자로 로스가 대영성서공회 본부에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85년 3월 8일이라면, 복음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1885.4.5)하기 전에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외국의 복음선교사가 이 땅에 이르기 전에 번역된 성경이 보급되었고 그 성경에 의해 자발적인 개종자가 일어났던 것이다.
같은 역사가 일본에 유학하러 갔던 이수정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은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그가 일본에 건너가 개종한 후 성경번역을 권고받고 출판한 성경이 한국에 온 최초의 복음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이사짐 속에 함께 들어왔다는 점이다. 한국이 외국 선교사를 맞을 때에는 이렇게 성경의 일부가 번역되고 그 번역된 성경이 한국에 도입되어 개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초기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씨를 뿌리러 왔으나 추수하게 되었다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같이 선교사의 입국에 앞서 번역되고 도입된 성경은 한국인들의 ‘울부짖는 요구’에 의해 더 빨리 더 광범하게 번역 출판 보급되었다. 출판된 성경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데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한 권서들의 귀한 봉사가 있었다. 성경이 보급되자 이를 읽기 위한 한글보급운동이 기독교에 의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성경 번역․성경 읽기 등의 성경 사업은 한글을 민족․민중의 문자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한글을 오늘날의 국민문자의 위치로 올려놓게 되었다. 성경이 출판․보급되자 각처에서는 사경회(査經會)로 불리는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나 한국의 부흥운동과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선교 초기에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가 성경에 의해 개종의 역사가 일어나고 부흥 성장하고 있던 점을 주목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끼친 이같은 성경의 역할을 목도한 선교사들이 한국의 기독교를 Bible Christianity로, 한국 기독교인들을 Bible-loving Christian, Bible Lover 등으로 불렀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이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성경은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양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경은 한국에서 제일 공부가 많이 되는 책이다. 교회생활의 매우 뚜렷한 특징은 성경공부에 있다. 성경공부반은 겨울에 열흘에서 2주일 동안 중심지에서 열린다. 겨울마다 족히 12만 5천명의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하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목적은 단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배운 것을 출신교회에 전달해 주기 위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주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때문이라는 것이 충분히 관찰한 사람들의 확신이다. 한국 기독교가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하게 된 데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번역 출간 보급되었던 이같은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바로 그런 역사는 마량진 성경전래 사건 이래 영국이 관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다 한국에서 성서공회 사업은, 한 때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 ABS)가 관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간은 바로 대영(영국)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BFBS)와 스코틀란드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NBSS)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또한 한국의 성경사업이 영국에 힙입은 바 크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성장 발전에 성경의 보급과 성경 공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영국의 공헌은 당연히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마량진 성경전래 이래 영국이 쏟은 이같은 성경 보급의 역할은 한국 그리스도교 성장 발전에 밑거름이 되고 자신을 희생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한 밀알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5. 맺는말 - 마량진 성경전래의 역사적 위치 1816년 9월 마량진에 일시 정박한 영국함선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을 전해주고 갔다. 그 성경의 전수가 한국사 및 한국기독교사에서 갖고 있는 역사적인 위치는 어떤 것일까. 이 점은 한국에 기독교의 전래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과 관련하여 그 동안 경교(景敎)의 전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E.A.Gorden과 김양선(金良善), 오윤태(吳允台) 등이 이런 문제를 제기하였다. 경교는 당(唐: 618-907)나라 초기(635)에 전래되어 회창멸법(會昌滅法: 845) 때까지 번창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 나라와의 왕래가 빈번하여 신라방․신라소․신라원 같은 것이 중국 안에 설치되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경교는 당 나라와 이렇게 국제적인 교류를 빈번히 했던 신라(新羅: BC 57-AD 935)에 어떤 형태로든 소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을 근거로 본다면 경교의 경전이 신라에 전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 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에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781년에 세워졌는데, 그 비문에는 진경(眞經: 성경전서), 구법(舊法: 구약), 경류이십칠부(經留二十七部: 신약27권) 등의 구절이 있다. 또 마태복음 6장이 ‘세존보시론’(世尊布施論)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볼 때 경교가 신라에 소개된 것이 확실하다면, 경교에서 사용한 성경이 그 일부라도 신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경교가 신라에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추정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자료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한국에 천주교회가 전래된 것과 관련하여 성경의 전래를 상정할 수 있다. 천주교의 전래와 관련,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부터 스페인 신부 Cespedes가 조선에 들어온 적이 있으나 그가 조선인에게 포교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대신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약 5만명 내외의 조선인 중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 뒤 그들로부터 성경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아직까지는 확인된 바 없다.   
중국 천주교에서 성경이 번역, 수용되는 것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J.Basser, Louis de Poirot 등]에 의해서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기는 했으나 출간되지 못한 실정이어서 18세기까지는 한문성경은 중국이나 한국에 없었던 셈이다. 따라서 한문본 성경이 한국에 들어오게 되는 것은 성경이 한문본으로 번역 출판된 1823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중에서 성경의 본문을 담은 것으로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이 있었다. 성경직해는 예수회의 Emmanuel Diaz(1574-1659) 신부가 1636년에 펴낸 14권의 책으로, 각 주일 및 대축일의 복음 및 해당 본문에 대한 주해이며 성경본문 이해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성경광익은 예수회의 de Mailla(1669-1748) 신부가 1740년에 펴낸 한문본 ‘주일복음해설서’인데, 성경의 생활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에 한문으로 번역된 이 전례서들이 조선에 전래되면서 한글로도 번역되거나 필사되었다. Ch.Dallet(1829-1878)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이 한문본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역관 출신인 최창현(崔昌顯, 1754-1801)으로, 그는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합쳐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고 재구성하여 ‘성경직해광익’으로 펴냈으며 그 시기는 대략 1790년대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성경이 1795-1800년경 이가환(李家煥)․정약종(丁若鍾) 두 사람에 의해 번역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 사실여부는 알 수 없고 기록으로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조선조에는 중국에서 유포되고 있던 서책들이 생각보다 빨리 조선에 보급되어 지식인에게 읽혀졌다. 이 점은 천주교의 한역서학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한 예로 명(明) 나라 때에 선교사로 왔던 Matteo Ricci(利瑪竇)가 1603년에 북경(北京)에서 간행한 ‘천주실의(天主實義)’의 내용이 1614년에 간행된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소개되고 있다. 이수광은 천주실의를 직접 보지 않고 천주실의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 ‘속이담(續耳譚)’이라는 책을 보고 그 내용을 소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중국에서 유포된 서적과 문명기기들이 조선에 소개되는 것이 오랜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마량진에 성경이 전래되었다는 점과 관련, 한국 개신교사에서 중요하게 살펴야 할 것은 한국이 외국인과의 접촉을 통해 개신교나 성경을 어느 때에 수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 중․후기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인이 한국 해안에 와서 조선인과 접촉한 예가 더러 있고 그들 중에는 개신교 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개신교인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그들과 함께 성경이 보급되었다는 것은 아직껏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 중․후기에 기독교 국가인 네델란드에서 조선에 도래한 사람으로 벨테브레(J.J.Weltevree, 朴淵)와 하멜(H.Hamel) 등이 있었다. 벨테브레는 1627년(인조 4)에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 동료 두 사람(D.히아베르츠, J.피에테르츠)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서 근무했다. 그들은 병자호란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했다. 박연은 ‘매양 선악화복의 이치를 말하고 툭하면 하늘이 갚는다고 말하니 그 말이 도(道) 있는 자에 유(類)하더라’고 한 데서 ‘기독교인’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할 것이다.
하멜 역시 네덜란드인 선원으로 1653년(효종 4)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는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과 여수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등에 배치되었다가 1666년(현종 7)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하였다. 그들은 일본을 거쳐 1668년 귀국, 그 해에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하였다. 김양선은 하멜이 ‘기독교인’임을 선언했다고 했다. 이렇게 벨테브레와 하멜은 모두 프로테스탄트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들에 관한 조선측 기록은 그들이 조선에 성경을 전해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여기까지 간략하지만, 마량진 성경전래 사건 이전에 한국에 성경이 전래되었을 가능성과 실제로 남겨진 기록의 유무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량진 사건 이전에 성경이 한국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성경이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연구나 기록의 발견으로 봐서, 마량진 사건은 기록으로 확인된, 한국 최초의 성경전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이 성경전수 사건은 그 뒤에 열매를 맺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최초의 성경전래’에 값하는 영예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며, 다만 단회적인 역사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마량진 성경전래를 계기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성경전래사에서 영국이 갖는 위치라고 할 것이다. 1816년 마량진 성경전래 사건 이래 한국의 모든 성경전래 사업은 거의 영국과 관련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1832년 귀츨라프의 성경전래 사건, 1865년과 66년의 토마스의 성경전래, 1860년대부터 시작된 윌리암슨의 성경보급 지원, 1870년대 말에서 1880년대에 이르는 로스와 매킨타이어에 의한 한국어성경번역과 그 보급, 그리고 대영성서공회와 스코틀란드성서공회를 통한 체계적인 성경번역과 보급 등, 이 모든 한국의 성경 전래와 사업이 영국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과 한국은 이같은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바탕 위에서 양국의 정치 문화 사회 관계는 물론 교회관계도 더욱 성숙시켜 가야 할 것으로 기대한다.   자료출처/한국교회사연구소:www.1907revival.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