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견인해 가는 안개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3위, <북한강에서>
성 귀 수 | 시인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북한강에서>(작사, 작곡, 노래: 정태춘) 중에서

나는 원래 노래를 들을 때 가사에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니다.

“노래란 음송吟誦된 시詩”라는 통설에 그리 공감하는 편도 아니지만, 어떤 노래가 내 귓바퀴로 흘러 들어와 감흥을 유발할 때, 그 가사의 내용보다 먼저 곡의 음과 박자가, 늦어봤자 노래하는 자의 음성이, 그 음색音色이 이미 내 감성을 호릴 대로 호려, 더 이상 그것에 실려오는 가사의 의미 따위는 아예 돌아볼 여유가 없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매우 좋아하는 노래는, 일단 좋아해 놓고 보면, 아주 형편없는 가사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좋아하는 노래의 아무리 기교적인 멜로디도 한 줄기 휘파람으로 너끈히 소화해낼 수 있으면서, 가사 한 소절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게 다반사인 것 또한 다 그런 사정 때문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정태춘이 부른 이 <북한강에서>는 내 뒤통수를 친 몇 안 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노래 역시 어두운 멜로디에 휘감겨 전해오는 비분절非分節적인 분위기에서 이미 독특한 매력이 감지되지만, 그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야말로 안개의 음역音域으로까지 내려간 듯, 신음처럼 깔려 흐르는 가사 그 자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삶에 지친 한 사내의 소외된 실루엣이라도 떠오를 것 같은 이 노래의 가사는, 실은 무척 심오한 신화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1절에서 3절에 걸쳐, 물에 몸을 담근다는 테마의 진도進度에 비례해, 그 물의 흐름에 있어 하류가 아닌 상류로 거슬러 오른다는 테마가 중첩되는 가운데, 정화淨化와 재생再生의 코드가 만드는 신화적 자장磁場이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2절에 집중된 반복성과 그로 유발된 절묘한 운율감은 전체 자장에 없어서는 안 될 긴장의 축軸을 형성한다. 그러고 보면, ‘짙은 안개’ 속에서 나와 내가 ‘서로 부딪치며’ 뒤섞이는, 그래서 만물의 상응 교감(correspondance)마저 가능할 것 같은 2절의 카오스적 분위기야말로, 1절에서 3절로 의식意識을 건너가게 해주는 무의식의 통로인 셈이다. 그것은 시간의 퇴적으로 짓눌린 오늘을 어느새 ‘신선한’ 시원始原으로 되돌릴 수 있게 해주는 즉, ‘거슬러’ 올라가게 해주는 마법의 통로, 안개의 통로이다.

그래서일까, ‘안개가 가득 피어’났다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때까지, 시간처럼 마냥 하류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강물의 흐름과는 어딘지 다른 느낌으로 안개가 움직인다고 느껴지는 것은? 실제 강물 위로 안개가 어찌 이동하는지는 차치且置하고, 오!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저 ‘안개가, 안개가’ 나를 이끌어 저기 어디, 부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이 지친 사내를 견인牽引해 가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북한강에서 - 정태춘

(1)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릴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빈 거릴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2)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 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릴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3)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거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