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이의 불타는 영혼
-시인들이 좋아하는 노랫말 2위,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 선 영 | 시인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처럼 타올라야지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킬리만자로의 표범>(작사:양인자, 작곡:김희갑, 노래:조용필) 중에서

시詩와 달리 가요가 끄는 매력이란 그것이 가사를 가진 음악이자 또한 동시에 곡조가 있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음악이 말하지 않는 시이고 시가 소리나지 않는 음악이라고 할 때, 음악과 시가 서로를 위해 조금씩 자신을 희생함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 가요라고 한다면 그럴싸한 말이 될까. 시가 ‘노리는’것이 언어의 무제한 확장이자 해방, 헤게모니 획득이라고 한다면 가요의 노랫말은 주어진 멜로디 안에서 어찌 보면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양 날개가 꺾인 새장 속 새의 지저귐에는 새장을 찢고 날아오르고자 하는 의지의 날카로운 발톱이란 이미 거세된 것이다. 새장 속 무력하지만 길들여진 새의 지저귐이 야생의 새의 울음보다, 시보다 행복할 수 있다. 달콤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 시와 가요가, 시와 노랫말이 마치 연적戀敵처럼 서로 묘하게 끌리면서도 서로를 징그럽게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시인이 광대무변廣大無邊을 거침없이 내뱉는 래퍼(rapper)라고 할 때, 랩과 랩송으로서의 시와 가요의 근친관계도 맺어질 여지가 있지 않으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자극하는 것 또한 고독하고 더러 장렬하기까지 한 래퍼로서의 시인의 자의식과 멀지 않다. 중간 중간에 독백 형식을 삽입한 노래의 편곡조차 그 극적인 효과를 한층 배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미 제목부터가 어떤 의미를 암시하는 상징인 데서 짐작되지만,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기존 가사 문법에서 벗어난 과감한 수사적 표현이다. 수사의 출발이 ‘낯설게 하기’에 다름아닐 때,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와 “굶어서 얼어죽는 눈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대비는 비천한 생에의 집착과 도리어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도달하고자 하는 생에의 초탈로서 극적인 상징성을 획득한다. 하이에나와 표범의 은유로써도 이토록 서정적일 수 있는 노래가 있던가.

높은 산정의 표범이고 싶어하는 ‘나’라는 페르소나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도저한 허무의식이다. 그 허무의식은 그가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가는’ 그의 존재의 기투성棄投性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질지언정 ‘빛나는 불꽃으로 타오르고자’ 하는 열망은 허무라는 무덤에서 솟아오른 커다란 봉분과도 같다.

‘나’라는 페르소나가 삶을 향한 비극적 정열의 소유자임을 증거하는 심상치 않은 씨니피앙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화가 고흐이다. 고흐가 ‘불행한 사나이’였던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비범한 정열의 소유자였던 까닭이다. 고흐는 또한 예술적 투혼의 메타포로서 <킬리만자로의 표범> 어느 구석엔가 예술가적 정열과 광기를 냄새맡을 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 고독한 이의 불타는 영혼’이란 다름아닌 예술가의 초상 아님에랴.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흥행 요인, 대중가요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중요한 미덕을 용케도 놓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노래가 그 어느 연가 못지않은 절절한 사랑노래라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모두를 잃어도/사랑은 후회 않는 것/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라고 노래 불릴 때 거기에서 사랑의 맨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었음을 어찌 실토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그러나, ‘굶어 얼어죽는’ 표범인 것만은 아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21세기가 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야’라고 마치 <개그콘서트>에서처럼 제법 ‘깜찍한’ 대사를 내뱉는 그런 표범이기도 한 것이다.

가요가 시보다 직접적인 호소력을 갖는 것은 그것이 정서 또는 감정의 직접적 표출이며 직접적 언어로써 수행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언어가 그에 걸맞은 멜로디와 더불어 한층 돋보이기까지 한다면.

바람처럼 왔다가/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사랑이 외로운 건/운명을 걸기 때문이지/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이런 노랫말이 귓가에 들려온다면 어떻게 단번에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읊조려 보고 싶은, 부르짖어 보고 싶은 생각이 어찌 간절해지지 않겠는가!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그런 내밀한 욕망, 내밀한 …을 건드리는 노래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조용필 노래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 지고 자고나면 초라해 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힘들게 살아간 고흐라는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살아가는 일이 허전하고 등이 시릴 때

그것을 위안해줄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세상을

그런 세상을 새삼스럽게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지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사랑만큼 고독해 진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너는 귀뚜라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귀뚜라미를 사랑한다

너는 라일락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라일락을 사랑한다

너는 밤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도 밤을 사랑한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찬것 같으면 서도 텅 비어있는 내 청춘에 건배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렬

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

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

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아무리 깊은 밤이 지나도 한 가닥 불빛으로 나는 남으리

메마르고 타버린 땅일지라도

한 줄기 맑은 물소리로 나는 남으리라

거센 폭풍으로 초목을 휩쓸어도 꺽이지 않는 한 그루 나무되어 나는 남으리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 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가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베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면서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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