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원군의 별장 '석파정 (石坡亭)'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산 16-1서울 성곽의 북쪽 밖에 위치한 이곳은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암(巨巖)과 오래된 장송(長松)이 많아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될 정도로 한양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석파정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제26대 고종 연간에 영의정 등 고위직을 지낸 안동김씨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소유한 별서(別墅)였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집권한 후 몰수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원래 석파정 서북쪽 뒤 바위 앞면에 '三溪洞'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어 김흥근이 소유하며 살고 있을 당시에는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라고도 불렸다가, 훗날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면서 '석파정'으로 불렸다. 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坡)'라고 한 뒤, 정자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 1권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곧 대권을 손에 넣은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을 미워하며 그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는데,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락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김흥근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후손인 이희(李熹), 이준(李埈), 이우(李?)의 별장으로 세습되며 사용되어오다가 6·25 전쟁 후에는 천주교가 경영하는 코롬바고아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석파정 입구를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인왕산의 자연 암석을 타고 흐르는 계곡이 있으며, 이 계곡의 물이 흘러들어 연못을 이루는 곳 바위 면에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 물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 구름으로 발을 친 암자) 이라고 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계곡을 왼편으로 끼고 경사진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석파정 건물들이 나타난다.
안채 언덕 뒤에 있는 별채는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문을 통해 왼편으로 담을 끼고 석파정 전면 오른쪽인 동쪽에는 안채, 그 서쪽에는 사랑채, 안채 뒤 언덕 위에는 별채 등 건물들이 있다. 계단을 오르다가 별채 문을 지나면 그 오른쪽 앞에 자리잡고 있다.화강석 기단 위에 선 정면 6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5량가 건물로, 이곳에 서면 앞으로 멀리 인왕산과 북악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채 서쪽 뜰에는 잘생긴 노송(老松,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60호, 1968. 7. 3)이 옆으로 가지를 길게 펼치며 차일 치듯 드리워져 있고, 그 뒤 언덕 위 바위에 '三溪洞'이라 새겨져 있으며, 노송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 속에 정자가 있다.
안채 맞은 편 언덕 위에는 망원정(望遠亭) 터가 남아 있고, 사랑채와 '三溪洞'이 새겨진 바위 사이에 위치했던 건물은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1958년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로 옮겨갔는데, 그 후 1974년 '대원군별장'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남향〔癸坐丁向〕하며 'ㅁ'자형 평면으로 구성된 안채는 건물 서남쪽 모퉁이에 낸 대문간을 통해 동북쪽으로 한번 꺾여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안마당에서 봐서 안채는 동서 방향으로 5칸, 남북 방향으로 4칸 규모로 조영되어 있고, 안마당 동남쪽에는 동쪽 밖으로 통하는 편문이 나있다.
석파정안의 이 오솔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해주는 산책로이며 사랑채는 안채 서쪽에 역(逆)'ㄱ'자형 평면을 이루며 위치하였는데, 세벌대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반 규모로 지은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쪽 끝 칸 전면에 누마루 1칸이 돌출되었는데, 뒤로 이어지는 2칸 반 모두 누마루이며 아래 부분은 벽을 막고 문을 내어 광으로 쓰고 있다. 정면에 유리문을 내어 원형에서 변형된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채에서 서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는 작은 계곡과 계곡 사이에 세워졌는데, 사방 3칸 규모의 사모지붕 건물이다.
좌우 툇칸 기둥 간격이 매우 좁고, 사각기둥의 부재가 매우 가늘어서 마치 사방 1칸 정자 같이 보인다. 가운데 칸은 모두 개방되었으나, 툇칸은 모두 창호무늬처럼 꾸며 공간이 투과되게 하였다.
기둥 위에는 자그마한 익공을 결구하여 건물 전체가 하나의 공예품처럼 느껴지게 조영되었다. 지붕은 기와를 씌우지 않고 동판을 얹었으며, 장대석으로 만든 누대(樓臺)의 한 면에는 정자로 들어갈 수 있도록 '之'자 모양을 하며 세 번 꺾인 돌다리를 계곡 위에 설치했다.
건물 바닥은 그 아래에 사면으로 쌓은 전벽돌 아취 벽 위에 길게 걸친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이 정자는 홍지동으로 이건된 '대원군별장'과 함께 조선말 유입된 청(淸)나라식 건축의 한 유형을 보여주며,
이 일대의 계곡과 소나무를 중심으로 조성된 정원은 전통적인 산수정원에 인공미(人工美)를 가미한 예를 보여준다.
경매정보업체 디지털태인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경매1계에서 경매가 진행된 ’석파정’은 용산구 이태원동에 거주하는 A씨에게 63억1천만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이다
참고 : 김흥근(金興根)은 어떤 인물인가?1796 (정조 20) ∼ 1870 (고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기경(起卿), 호는 유관(游觀).아버지는 이조참판 명순(明淳)이고, 형은 좌의정 홍근(弘根)이다.1825년(순조 25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대교(待敎)·겸보덕(兼輔德)·이조참의·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837년(헌종 3년)에 동지부사로 동지정사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그뒤, 이조참판·규장각직제학·홍문관부제학·평안도관찰사 등을 거쳐, 1841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대사헌·한성부판윤 및 공조·호조·예조의 판서와 규장각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46년에 좌참찬이 되었다.1848년에 다시 예조판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안동김씨의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하였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광양현에 유배되었다.이듬해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여 다시 안동김씨의 세도가 확립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한성부판윤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1851년(철종 2년)에 좌의정에 오르고 '헌종실록' 편찬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다. 판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1862년에 이정청총재관(釐整廳摠裁官)이 되었고, 1864년(고종 1년)에 '철종실록' 편찬 때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었다.이듬해 영돈녕부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충문(忠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