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자주] 계간 '시인세계' 가을호 특집에서 44명의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시인 개인의 시에 대한 정의를 요구했는데, 오탁번 시인은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라고 정의했다.

주제넘게 내가 개입한다면 동심의 세계를 자극하는 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동화로 공식적인 문학을 출발한 그의 문학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곧 에로티시즘의 해학성을 시에서 어떻게 녹여냈는가, 하는 점인데, 그의 시어들은 언어구사가 전혀 생경하지 않고 고담을 듣는 듯하다.

조선후기 설화를 시화한 <굴비>와 오늘날의 성풍속을 희화화한 <방아타령>을 함께 읽어본다.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불렀다

방아타령

-오탁번

- 여보, 카섹스가 뭐래유?

요즘의 성풍속이 티브이에 방송되자

계집이 사내에게 물었다

-병신, 자동차 안에서 방아 찧는 것도 몰러?

마당의 모깃불이 시나브로 사위어갔다

이튿날 사내는 계집을 경운기에 태우고

감자밭으로 감자 캐러 나갔다

산비둘기가 싱겁게 울고

암놈 등에 업힌 메뚜기는

뙤약볕이 따가워 빰 부볐다.

-여보, 우리도 카섹스 한 번 해 봐유

-뭐여?

-경운기는 차 아니래유?

사내는 경운기를 냅다 몰았다

계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소쿠리 가득 감자를 캐면서

계집이 사내를 핼긋핼긋 할겨보았다

- 저, 병신!

사내는 욕을 하며

구들장보다 뜨거워진 경운기에

계집을 태웠다

- 아유, 아유, 나 죽네

솔개그늘 아래 경운기 위에서

계집은 숨이 넘어갔다

뻐꾹뻐꾹 울던 뻐꾸기가

울음을 딱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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