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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인전(張山人傳)-허균(許筠)
張山人名漢雄
(장산인명한웅) : 장산인(張山人)의 이름은 한웅(漢雄)인데
不知何許人也
(불지하허인야) : 어떠한 내력을 지닌 사람임은 알 수 없다.
自其祖三世業痬醫
(자기조삼세업痬의) :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3대에 걸쳐 양의(외과의사) 업무에 종사했었다.
其父嘗餌商陸
(기부상이상륙) : 그의 아버지는 전에 상륙(한약재 이름)을 먹고서
能視鬼而役使之
(능시귀이역사지) : 귀신을 볼 수도, 부릴 수도 있었다 한다.
年九十八
(년구십팔) : 나이 98세 때
如四十許人
(여사십허인) : 40 정도로 보였는데,
出家去莫知所終
(출가거막지소종) : 출가(出家)하여 가신 곳도 알지 못했다.
臨行
(림행) : 그분이 집을 떠날 때,
以二卷付之
(이이권부지) : 2권의 책을 아들에게 주었으니
乃玉樞經及運化玄樞也
(내옥추경급운화현추야) : 바로 <옥추경>과 <운화현추>였다.
山人受之
(산인수지) : 산인(山人 장한웅(張漢雄))이 그걸 받아
讀數萬遍
(독수만편) : 수만 번을 읽고나자,
亦能呼召神鬼
(역능호소신귀) : 역시 귀신을 부릴 수 있었고
治瘧癘
(치학려) : 학질(瘧疾)도 낫게 할 수 있었다.
輒已之
(첩이지) : 그런데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는,
四十出家入智異山
(사십출가입지이산) : 마흔살에 출가(出家)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입산하였다.
嘗逢異人
(상봉이인) : 그곳에서 곧 이인(異人)을 만나
受煉魔法
(수련마법) : 연마법(煉魔法)을 배웠고.
又讀修眞十書
(우독수진십서) : 또 도교(道敎)의 진리에 관한 10권의 책을 읽었다.
坐空菴
(좌공암) : 빈 암자(菴子)에 앉아
不食三年餘
(불식삼년여) : 거의 먹지도 않으면서 3년을 보냈다.
一日行峽中
(일일행협중) : 하루는 계곡을 지나는데,
二僧隨之
(이승수지) : 두 사람의 중[僧]이 그를 따랐다.
至林薄間
(지림박간) : 우거진 숲 사이에 이르자,
有雙虎出而伏迎
(유쌍호출이복영) :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나 엎드려서 맞아 주고 있었다.
山人叱之
(산인질지) : 산인이 꾸짖자,
虎弭耳搖尾
(호미이요미) : 호랑이들은 귀를 내리고 꼬리를 흔들며
若乞命者
(약걸명자) :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태도를 보였다.
山人自騎其一
(산인자기기일) : 산인 자신이 한 호랑이에 올라타고,
令二僧竝跨其一
(령이승병과기일) : 두 중으로 하여금 함께 다른 하나에 타게 하여
至寺門虎伏而退去(지사문호복이퇴거) : 절[寺] 문 앞에 이르자 호랑이들이 내려 놓고 물러가 버렸다.
住山十八年(주산십팔년) : 산에서 머문 지 18년 만에
而回至洛居于奐仁門外
(이회지락거우환인문외) : 서울로 돌아와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살았다.
六十而貌不衰
(륙십이모불쇠) : 나이가 60세였으나 용모는 정정하였다.
隣有空宅
(린유공댁) : 이웃에 비워 둔 집이 있는데,
凶不可入
(흉불가입) : 흉측하여 거처할 수가 없자,
其主請禳之
(기주청양지) : 그 집의 주인이 귀신을 물리쳐 달라고 그에게 청했다.
山人夜詣之
(산인야예지) : 산인이 밤에 그 집으로 가 보았다.
有神二人來跪曰
(유신이인래궤왈) : 두 명의 귀신이 와서 꿇어 앉아 말하기를,
吾門竈神也
(오문조신야) : "우리는 문(門) 귀신과 부엌 귀신입니다.
有妖蛇據之
(유요사거지) : 요사스러운 뱀이 이 집을 차지하고서
售其奸
(수기간) : 사한 짓을 하고 있으니
請誅之
(청주지) : 제발 그것을 죽여 주십시오."하면서,
卽指庭中大槐根
(즉지정중대괴근) : 곧 뜰 가운데의 큰 홰나무 밑둥을 가리켰다.
山人呪水噴之
(산인주수분지) : 산인(山人)이 주술(呪術)의 물을 뿜어내자
有頃大蛇人面者目如鏡蜿蜒
(유경대사인면자목여경완연) : 조금 뒤에 사람 얼굴 모습의 큰 뱀이 번쩍거리는 눈빛으로
以出其半而斃
(이출기반이폐) : 절반도 나오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令焚之
(령분지) : 그것을 태워버리게 하자
宅遂淸
(댁수청) : 집은 마침내 깨끗해졌다.
與人游箭串捉魚
(여인유전관착어) : 사람들과 어울려 놀면서 화살로 꽂아 물고기를 잡으면,
山人擇死者盛於水盆
(산인택사자성어수분) : 산인이 죽은 것만 골라서 물동이에 넣고는
以匙藥投之
(이시약투지) : 숟갈로 약을 떠 넣는다.
魚更活洋洋然
(어경활양양연) :그러면 물고기가 다시 살아나 유유히 헤엄치곤 하였다.
人試以死雉
(인시이사치) : 사람들이 죽은 꿩으로 시험해 보라고 하자,
又以七藥納口中
(우이칠약납구중) : 또 숟갈에 약을 묻혀 입 속으로 넣으면
卽奮迅而活
(즉분신이활) : 훨훨 날개를 치며 살아나곤 하였다.
人皆怪之曰
(인개괴지왈) : 사람들이 모두 이상스럽게 여겨 이르기를
死人亦可蘇否
(사인역가소부) :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낼 수 있습니까?"물으면,
山人曰
(산인왈) : 산인(山人)이 말하기를
凡人生而咨其情
(범인생이자기정) : "일반 사람들이란 태어나면서 그 정(情)이 방자하여
三魂七魄
(삼혼칠백) : 삼혼과 칠백이
離宅舍者三年
(리댁사자삼년) : 택사(宅舍)에서 떠난 사람도 3년이 지난 뒤에야
然後方絶
(연후방절) :끊어지니
不可以藥返之也
(불가이약반지야) : 약으로써는 살려낼 수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山人繆爲不解文而文自好
(산인무위불해문이문자호) : 산인(山人)은 사실과는 다르게 글자를 해독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글만 잘 지어 냈고,
且稱雀眼夜不出
(차칭작안야불출) : 또 밤눈이 어둡다고 말하며 밤에 바깥 출입을 않으면서도
而能於昏讀細字
(이능어혼독세자) : 어두운 곳에서 잔 글씨도 읽을 수 있었다.
其他雜技戲如布甁盛酒
(기타잡기희여포병성주) : 그 이외의 잡기(雜技) 놀이로, 베로 만든 병에 술을 담는 거나
紙罐構火等事
(지관구화등사) : 종이로 만든 그릇에 불을 피우는 것과 같은 일 등
眩耀世人者不可紀
(현요세인자불가기) : 세상 사람의 눈을 휘둥거리게 한 것들이 모두 기록할 수 없이 많았다.
卜人李和方有名
(복인리화방유명) : 점쟁이[卜人] 이화(李和)란 사람이 점 잘 치기로 한창 유명했었는데,
山人第視之
(산인제시지) : 산인은 자기보다 아랫수로 여겼다.
常觀其算命有謬
(상관기산명유류) : 그가 점치는 것을 볼 때마다 잘 맞히지 못하면
則山人輒改之
(칙산인첩개지) : 산인이 고쳐서 말해주는데
言皆中
(언개중) : 모두 적중되는 말이어서
和不敢贊一辭
(화불감찬일사) : 이화가 한마디도 감히 보태질 못했다.
和曰
(화왈) : 이화가 이르기를
山人左右
(산인좌우) : "산인(山人)의 좌우에는
常有三百神衛之
(상유삼백신위지) : 항상 3백 명의 귀신들이 호위하고 있으니
眞異人也
(진이인야) : 참으로 이인(異人)이다."하였다.
壬辰亂日
(임진란일) : 임진 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山人年七十四
(산인년칠십사) : 산인의 나이는 74세였다.
處其家分與諸姪
(처기가분여제질) : 그는 가산(家産)을 처리하여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一衲携筇
(일납휴공) : 승복(僧服)에 지팡이 하나만 짚고
五月入逍遙山
(오월입소요산) : 5월에 소요산(逍遙山)으로 입산하였다.
語僧曰
(어승왈) : 그곳의 중에게 이르기를,
今年命當訖
(금년명당흘) : "금년은 나의 명(命)이 다하는 해이니
須焚葬之
(수분장지) : 반드시 화장(火葬)해 달라."고 말하였다.
未久
(미구) : 오래지 않아
賊至
(적지) : 적군이 들어와
坐而受刃
(좌이수인) : 앉은 채로 칼에 찔렸는데,
其血如白膏
(기혈여백고) : 그의 피는 하얀 기름 같았으며
立不僵
(립불강) : 시체가 엎어지지도 않았다.
俄而大雷雨
(아이대뢰우) : 잠시 후에 큰 뇌성을 치며 비가 내리자
賊懼而去
(적구이거) : 적군은 겁이 나서 가버렸다.
山僧茶毗
(산승다비) : 산승(山僧)이 다비(茶毗)를 하자
則瑞光瞩天三晝夜
(칙서광촉천삼주야) : 서광(瑞光)이 3일 동안 밤낮으로 하늘에 잇대어 있었고
得舍利七十二粒
(득사리칠십이립) : 사리(舍利) 72개를 얻었다.
其大如芡實也
(기대여검실야) : 그 중에서 큰 것은 가시연[芡] 열매만큼 컸었고,
紺碧
(감벽) : 감청(紺靑)의 빛깔을 띠었다.
藏之塔中
(장지탑중) : 모두를 탑(塔) 속에 매장해 두었다.
是年九月
(시년구월) : 이 해 9월에
山人至江華鄭䨜家
(산인지강화정붕가) : 산인(山人)은 강화도(江華島)에 사는 정붕(鄭䨜)의 집에 왔었는데,
䨜不知其死
(䨜불지기사) : 정붕은 그의 죽음을 몰랐으며
留三日去
(류삼일거) : 3일이나 머물다가 가면서
自言往金剛山
(자언왕금강산) : 금강산으로 간다고 말하더란다.
明年方知其死
(명년방지기사) : 다음 해에야 비로소 그가 죽었음을 알았는데,
人謂劍解也
(인위검해야) :사람들은, 죽은 뒤에
䨜亦遇異人
(붕역우이인) : 신선(神仙)이 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善占侯風鑑
(선점후풍감) : 정붕(鄭䨜)이란 사람 또한 이인(異人)을 만나서 점(占)을 잘 치고
象律家
(상률가) : 관상을 잘 보던 상률가(象律家)였다.
言多奇中
(언다기중) : 하는 말마다 대부분 기이하게 적중하였으며
爲齋郞不受
(위재랑불수) : 재랑(齋郞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했으나 받지를 않았다.
或言其能役鬼
(혹언기능역귀) : 혹자는, 그가 귀신을 부릴 수 있었는데
早卒
(조졸) : 젊어서 죽었다고 하였다
허균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문인이였다. 또한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였다. 조선시대 사회모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집필하였다. 그외 작품으로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엽(曄)이다.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봉(篈)과 난설헌(蘭雪軒)과 형제이다.
허균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기렸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으로 물러났다. 명나라에 여러차례 다녀오면서 수천권의 서적을 가져왔는데 이때 양명학을 접하게 되었고 특히 양명학 극좌파에 속하는 태주학파 이탁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외의 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허균은 주자학(성리학)의 허구성을 비판하였고 예학이 중심이 된 외곡된 학문을 개혁하고 민중을 위한 실용적 학문으로 조선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시문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불교에도 심취하였다.
광해군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렸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바로 이전 해 12월 기준격이 비밀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기준격의 상소로 인해 시작된 허균과 관련된 논란은 본인 스스로 무고함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해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 10년 남대문에 한 장의 격문이 나붙었는데 이것이 결국 허균의 외가 서얼인 현응민의 소행으로 판명되면서 더 이상 허균은 역모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허균의 죄상으로 거론되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침범이 있자. 중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자 조선이 여진의 본고장인 건주(建州)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서울 도성 안 사람을 공갈하였다. 또한 허균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琉球國)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하였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노래를 지어, “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니만 못하다.” 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人家)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허균이 했다는 것 등이다.
허균을 둘러싼 이같은 의혹에 대해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오늘날 이 옥사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광해군 10년 8월 24일 인정전 문에서의 국문은, 허균이 자신이 비록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국문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로부터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하지 않고 사형이 결정된 문서도 받지 않은 채 단지 죄인의 범죄 사실을 진술한 말로만 사형에 처한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은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수시화(惺叟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남궁선생전》 등이 있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우리 국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홍길동전]하면 허균, 허균하면 [홍길동전]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는 아니다. 그런 만큼 [홍길동전]은 허균의 생애와 사고를 응축해 놓은 결정판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물론 최근에 [홍길동전]의 찬자와 관련해서 이견이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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