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현지가이드가 중학교 유니온 영어교과서 표지에 나왔던 다리라고 총기를 자랑한

런던의 템즈강 다리를 배경으로 한 방 박았습니다. 큰배가 통과하면 부산 영도다리처럼

다리 한가운데가 갈라져 위로 들린다는군요. 한 관광객이 제일 높은 곳이 들리냐고 물어

한바탕 웃었습니다. 가운데다리 말고요. 맨아래쪽 다리가 들리겠지요. 저 다리에 가운데

다리는 본시없었군요. 해거름에 찍어 너무 어두워 다른 사진 한 장 펌했습니다.

강 반대편에서 찍었군요.

[주]운영자님이 자기 아명이 '실갱이'라고 소개한 데 힘입어 관심있는 다른 독자를 위해,

그리고 꼬리글이 너무 무거워 답글로 이사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명문 호서남 출신들은 '시렁'을 '실강'이라 하는군요.
함창에서는 '살강, 실강, 설강 "을 두루 다 씁니다. 그 왜 있잖아요.

동요 "살강 밑에 다람쥐"라구요.
아니, "살강 밑에 새양쥐"군요.

달강달강 달강달강우리애기 잘도 잔다
서울 가서 산 밤 한되 살강 밑에 묻었더니
머리 감은 새양쥐가들락날락 다까먹고
껍데기만 남았구나.

이런 자장가 들었거나 불렀던 기억 안 나나요?
'살강'의 표준말은 '시렁'입니다.

사전의 풀이를 옮깁니다.

설강 (정지에서 설거지를 한후) [그릇을 엎어 두는곳]을 이르는 경상도 사투리.

시렁 [명사]물건을 얹어 놓기 위하여 방이나 마루 벽에 두 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사전에서, '토박이 이름과 한자 이름' 에 대한 설명을 옮긴다.


http://100.naver.com/100.nhn?docid=728896


처음에는 토박이말로 지었던 이름이 한자의 유입과 함께 한자 이름으로 지어지면서

오늘에 이른다. 이름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아명(兒名) ·관명(冠名) ·자(字) ·

호(號) ·시호(諡號) 등이 그것이다.

아명은 어린아이 때의 이름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경우 이(珥)는 관명이지만,

아명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꿈에 용을 보았다 하여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 외에도 석담(石潭) ·우재(愚齋) 등이 있다.

관명은 장성해서 그 집안의 항렬에 따라 짓는 이름이고, 자는 대체로 혼인한 후에

본이름 대신 부르는 이름으로 일상생활에서는 어른 아닌 사람들이 이 자를 불렀다.

--[편자주]字는 혼인과 상관없이 관례 시에 부여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꼬리글에서 처리한다.
그러나 자는 남자에게만 주어지고 역(役)도 관명도 없는 여자에게는 자가 없다.

편자는 과문하여 여성의 자를 본적이 없다.--

호는 자 이외에 쓰는 아명(雅名)으로 학자 ·문인 ·서화가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이름이었고, 시호는 경상(卿相)이나 유현(儒賢) 등이 죽은 뒤 임금이 그 행적을

칭송하면서 추증하는 이름이었다.

오늘날에는 그 중에서 아명 등은 거의 없어지고 관명 ·호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아명은 대체로 무병장수를 염원하면서 천하게 짓는 경향이 있어 개똥이 ·

쇠똥이 ·말똥이 등의 이름도 흔했다. 관명이 ‘熙’였던 고종 황제의 아명이

개똥이였고, 황희(黃喜)의 아명은 도야지(都耶只)였음이 그 사례이다.

아명이 그대로 관명으로 되어 한자로 ‘介東 ·啓東 ·召東 ·蘇同 ·馬銅 ·馬東’으로

되기도 하였다.

--위의 이름은 모두 개똥, 쇠똥, 말똥을 한자로 음사한 것임다--

이상은 사대부 집안 남자의 경우이고, 서민들은 아명으로 평생을 살다 가기도 하였다.

여성의 경우, 특별한 사례 외에는 출가와 함께 아명은 없어지고 대신 택호(宅號)가

따랐다. 이름을 한자로 지을 경우의 성명 3자 가운데에서 선택권은 1자밖에 없다

(외자이름도 있지만).

성과 항렬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남은 1자도 같은 항렬의 동명이인을 피해야 하고

가까운 조상의 이름에 나오는 글자도 피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의 이름은 토박이말이었으나, 한자의 유입과 성(姓)의 보급에

따라 한자식 이름으로 차츰 바뀌어 내려오는 현상은 땅이름의 경우와도 상통한다.

사람의 이름이 한자로 바뀌는 것은 땅이름이 한자화했던 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부터 심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이름에서도

그것이 토박이 이름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다.

가령 신라의 시조왕 ‘赫居世’부터가 그렇다. ‘불거뉘’의 한자 표기이기 때문이다.

또 3대왕 ‘儒理’와 14대왕 ‘儒禮’는 똑같은 ‘누리’의 음사(音寫)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고, 백제의 3대왕 ‘己婁’나 20대왕 ‘蓋鹵’도 같은 토박이말의 다른 표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의 상류계급에도 토박이 이름이 있으면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한자식 이름을 썼던 듯하다.

박제상(朴堤上)의 경우, 또다른 이름인 ‘毛末’이 그 토박이 이름이었다고 하고,

김유신(金庾信)의 두 누이동생인 보희(寶姬) ·문희(文姬)에게도 ‘阿海’ ‘阿之’와 같은

토박이 이름이 있었음이 이를 말해 준다.

백제왕의 경우도 시조왕 ‘溫祚’로부터 23대 ‘三斤’까지는 토박이 이름의 한자

표기이고, 24대 ‘東城’부터가 한자식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토박이 이름과 한자 이름의 혼재(混在)는 고려시대로 이어지고, 다시 조선시대까지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와서 성이 더 많이 보급되고, 한자식 이름 또한 그에 따라

많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1910년 5월 10일에 완성된 사상 최초의 민적부(民籍簿)에

의할 때, 그때까지 성이 없는 사람의 수가 있는 사람에 비하여 1.3배였으니,

토박이 이름인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까지의 토박이 이름은 주로 하층계급 사람들의 것이었다.

그 토박이 이름의 기준은

① 출산 장소에 따른 것(부엌손 ·마당쇠),

② 간지(干支)나 달 이름에 따른 것(갑돌이 ·정월이),

③ 성격에 따른 것(억척이 ·납작이),

④ 기원을 곁들인 것(딸고만이 ·붙드리),

⑤ 순서에 따른 것(삼돌이 ·막내),

⑥ 복을 비는 천한 것(개똥이 ·돼지),

⑦ 동식물 ·어류 이름에 따른 것(강아지·도미)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이 동물 이름이다.

아래의 글에서 옮겼습니다.

http://www.munjung13.com/board/read.php?table=m13sarang&no=2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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