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주엘라 엔젤폭포]
[주]안철수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종교인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삼국유사 설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욱면비 연불서승>을 다시 읽어 본다.
욱면비 염불서승
郁面婢 念佛西昇 -삼국유사‘感通 제7’
-여종 욱면이 법당에서 염불하다 대들보를 뚫고 서방정토[극락]로 승천하다
[은자주]
불교의 평등사상과 고난의 정진과 육신을 가진 인간이 곧바로 부처가 되어 극락왕생하는
신비체험 등 감동의 물결은 끝없이 파도쳐온다.
일연은 감동받은 인물이 있으면 어김없이 칠언절구 찬(讚)으로 전(傳)을 마무리한다.
이런 패턴의 글쓰기는 중국의 양고승전(梁高僧傳)에서 비롯되어,
각훈의 <해동고승전>을 거치며 승전쓰기의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나는 우스개소리로, 삼국유사를 읽을 때 찬이 붙은 작품을 만나면
일연이 감동받은 설화작품으로 보면 틀림없다고 말한다.
景德王代康州(今晉州, 一作剛州, 則今順安)
善士數十人, 志求西方,
於州境創彌陀寺, 約萬日爲契.
경덕왕 때 강주에
남자 신자 수십명이 서방정토를 정성껏 구하여
주의 경계에 미타사란 절을 세우고 만일(萬日)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時有阿干貴珍家一婢名郁面,
隨其主歸寺, 立中庭, 隨僧念佛,
主憎其不職,
그 때 아간 귀진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욱면이라 불렀다.
욱면은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가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은 그녀가 자신의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每給穀二碩, 一夕舂之.
婢一更舂畢, 歸寺念佛.
(俚言「己事之忙, 大家之春促」, 盖出乎此.)
日夕微怠,
곡식 두 섬을 하룻밤 동안에 다 찧게 했는데,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했으며,
(속담에 “자기일 바빠 큰집 방아찧기 서두른다.”는 말은 대개 여기에서 나왔다.)
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庭之左右, 竪立長橛,
以繩穿貫兩掌,
繫於橛上合掌,
左右遊之激勵焉.
그녀는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고는 합장하면서
좌우로 흔들어 자신을 스스로 격려했다.
時有天唱於空
"郁面娘入堂念佛",
그 때 하늘에서 외치기를,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고 했다.
寺衆聞之, 勸婢入堂, 隨例精進.
절의 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정진하게 했다.
未幾, 天樂從西來,
婢湧透屋樑而出, 西行至郊外,
捐骸變現眞身. 坐蓮臺,
放大光明 緩緩而逝,
樂聲不撤空中.
얼마 안 있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욱면은 몸이 솟구쳐 집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 교외로 가더니
유해(遺骸)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큰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가버렸는데,
음악소리는 오랫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其堂至今有透穴處云.(已上『鄕傳』.)
그 법당에는 지금도 뚫어진 구멍자리가 있다고 한다.
按『僧傳』:
「棟梁八珍者觀音應現也.
승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동량 팔진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結徒有一千, 分朋爲二,
一勞力, 一精修,
무리들을 모으니 천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노력을 다하고, 한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彼勞力中知事者不獲戒,
墮畜生道, 爲浮石寺牛.
그 노력하던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얻지 못하고
축생도에 떨어져서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嘗駄經而行, 賴經力,
轉爲阿干貴珍家婢, 名郁面.
일찍이 소가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아간 귀진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했다.
因事至下柯山, 感夢遂發道心.
阿干家距惠宿法師所創彌陀寺 不遠,
욱면은 일이 있어 하가산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마침내 불도을 닦을 마음이 생겼다.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가 세운 미타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阿干每至其寺念佛,
婢隨往, 在庭念佛云云.」
아간은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했으므로
계집종인 욱면도 따라갔고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如是九年, 歲在乙未正月二十一日,
禮佛撥屋梁而去,
이와 같이 9년 동안을 했는데, 을미년 정월 21일에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올라갔다.
至小伯山, 墮一隻履,
就其地爲菩提寺.
至山下棄其身, 卽其地爲二菩提寺,
소백산에 이르러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 곳에 보리사란 절을 지었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 곳에는 제2보리사를 지었다.
榜其殿曰「勗面登天之殿」.
그 전당에 편액하여 ‘욱면등천지전’이라 했다.
屋脊穴成十許圍,
雖暴雨密雪不霑濕.
대들보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이나 되었지만,
폭우나 세찬 눈에도 전각 안은 젖지 않았다.
後有好事者範金塔一座,
直其穴, 安承塵上,
以誌其異,
今榜塔尙存.
후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 1좌를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위에 모시고
그 이적(異跡)을 기록했는데,
지금도 그 편액과 탑은 그대로 남아있다.
勗面去後,
貴珍亦以其家異人托生之地,
捨爲寺曰法王, 納田民,
久後廢爲丘墟.
욱면이 간 후에,
귀진도 또한 그의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하여,
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어 이름을 법왕사라 하고, 전민(田民)을 바쳤다.
오랜 후 절은 허물어져 쓸쓸한 빈터가 되었다.
有大師懷鏡, 與承宣劉碩‧小卿李元長, 同願重營之.
鏡躬事土木, 始輸材,
夢老父遺麻葛屨各一.
대사 회경이 승선 유석, 소경 이원장과 함께 발원하여 절을 중건하였는데,
이 때 회경이 친히 토목공사를 맡아 재목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그날 회경의 꿈에 노부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례씩 주었다.
又就古神社, 諭以佛理,
斫出祠側材木, 凡五載告畢.
또 회경은 옛 신사에 나아가 불교의 이치를 깨우치고
신사 옆의 재목을 베어다가 5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又加臧獲, 蔚爲東南名藍,
人以鏡爲貴珍後身.
또 노비까지 더하여 이 절은 매우 융성해졌으며
이 후 동남지방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이라 했다.
議曰:
논평한다.
按鄕中古傳, 郁面乃景德王代事也,
據徵(「徵」字疑作「珍」. 下亦同)本傳, 則元和三年戊子, 哀莊王時也.
고을 안의 고전을 살펴보면 욱면의 일은 경덕왕 시대의 사실이다.
징(徵)의 본전에 따르면 원화 3년 무자(808) 애장왕 때의 일이라 했다.
景德後歷惠恭‧宣德‧元聖‧昭聖‧哀莊等五代, 共六十餘年也.
徵先面後, 與鄕傳乖違,
然兩存之闕疑.
경덕왕 이 후에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년이나 된다.
귀징이 먼저가 되고 욱면이 뒤가 되므로 그 차례가 향전과 어긋난다.
여기에다 이 두 가지를 다 실어 의심을 없앤다.
讚曰: 예찬한다.
西隣古寺佛燈明, 서편 이웃 옛 절에는 불등 밝은데
舂罷歸來夜二更. 방아 찧고 갔다 오면 밤은 깊어 이경이네.
自許一聲成一佛, 한 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어지고,
掌穿繩子直忘形. 손바닥에 줄을 뀀은 그 몸 바로 잊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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