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願往生歌 -광덕의 처

광덕과 엄장

廣德 嚴莊 -삼국유사 感通 第七

[은자주] 앞 꼭지의 노힐부득 달달박박의 이야기와 동궤[同軌]의 설화이다.

“노힐부득:달달박박:낭자”의 캐릭터는 “광덕:엄장:분황사비(광덕의 처)”에 대응하여 재현된다.

이름도 관대한 성격의 광덕에, 계율에 빛나는 엄장이 수도승이고, 여성인 광덕의 아내는 수도의 조력자

로서 두 수도승을 차례로 극락왕생케 한다. 원효 이후 민중불교시대의 매력적인 설화라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광덕이 부르던 <원앙생가>가 있어 설화의 매력은 배가된다.

본문의 “盖十九應身之一德嘗有歌云,”에서 종전의 “一德, 嘗有歌云”로 구두점을 찍어오던 것을

고 김동욱님은 “一, 德嘗有歌云”로 구두점을 찍어 노래의 작가를 광덕에서 광덕의 처로 바로잡은

공적을 남겼다. 더군다가 ‘作歌’가 아니고 ‘有歌’인 점도 이론(異論)의 문제제기를 차단했다.

그 문맥만으로도 광덕이 이 노래의 작가가 아님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文武王代 有沙門名廣德嚴莊二人友善. 日夕約曰

문무왕 때에 중 광덕과 엄장 두 사람은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했다.

“先歸安養者須告之.”

“먼저 안양[극락]으로 돌아가는 이는 마땅히 서로 알리도록 하자.”

德隱居芬皇西里(或云 皇龍寺有西去房. 未知孰是) 蒲鞋爲業 挾妻子而居.

광덕은 분황 서리에 숨어서 신 삼는 것을 업으로 하면서 처자와 함께 살았으며,

莊庵栖南岳 大種力耕.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대종도경(大種刀耕)하면서 살았다.

一日日影拖紅 松陰靜暮 窓外有聲 報云

어느 날 해그림자가 붉게 노을지고 솔그늘이 고요히 저무는데 창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某已西往矣. 有君好住 速從我來.”

‘나는 이제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지내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나.’

莊排闥而出顧之 雲外有天樂聲 光明屬地.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밝은 빛은 땅까지 드리웠다.

明日歸訪其居 德果亡矣.

이튿날 엄장은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었다.

於是乃與其婦收骸 同營蒿里 旣事.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광덕의 유해를 거두어 함께 호리(蒿里)에 장례지냈다.

乃謂婦曰

그리고 그 부인에게 말했다.

“夫子逝矣. 偕處何如?”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어떻겠소?”

婦曰“可.”

부인 : “좋습니다.“

遂留 夜將宿欲通焉.

드디어 머물며 밤에 잠자리에 들어 욕정을 통하고자 했다.

婦慚之曰.

부인은 그것을 부끄러워했다.

“師求淨土 可謂求魚緣木.”

“스님께서 서방정토를 구하는 것은 물고기를 구하면서 나무에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莊驚怪問曰

엄장이 놀라서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德旣乃爾 予又何妨?”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 또한 득도에 어찌 방해가 되겠는가?”

婦曰

광덕의 아내는 말했다.

“同居十餘載 未嘗一夕同床而寢.

“남편은 나와 십여 년을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침대를 같이하여 잔 적이 없었거늘,

況觸汚乎?

어찌 몸을 더럽혔겠습니까?

但每夜端身正坐 一聲念阿彌陀佛號.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을 염송했습니다.

或作十六觀. 觀旣熟

혹은 16관을 만들어 달관하여

明月入戶 時昇其光 加趺於上

밝은 달빛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 위에 올라 가부좌하였습니다.

竭誠若此 雖欲勿西奚往?

정성을 쏟음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에 가지 않으려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夫千里者 一步可規

대체로 천리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 있으니,

今師之觀可云東矣 西則未可知也.”

지금 스님의 관법은 동쪽으로 간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서방으로 가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莊愧赧而退.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왔다.

便詣元曉法師處 懇求津要.

그 길로 원효법사의 처소로 가서 득도의 요체[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曉作鍤(주,‘淨’일 듯.이동환)觀法誘之.

원효는 삽[정]관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藏(주,莊)於是潔己悔責.

엄장은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一意修觀 亦得西昇.

한 뜻으로 도를 닦았으므로 또한 서방정토로 승천했다.

鍤觀在曉師本傳與海東僧傳中.

삽[정]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과 해동고승전 속에 있다.

其婦乃芬皇寺之婢 盖十九應身之一.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여자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19응신 가운데 하나였다.

德嘗有歌云,

광덕에게는 일찍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多-可-攴 -白-遣-賜-立

誓 -音-深-史-隱-尊-衣-希-仰 -攴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 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邪, 此-身-遺 -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양주동 역[아래아는 'ㅏ'로 바꿈]

달하 이뎨 달님이시여,

西方까장 가샤리고 이제 서방까지 가셔서

無量壽佛前에 무량수불 전에

닏곰다가 삷고샤셔 일러다가 사뢰소서.

다딤 기프샨 尊어 울워러 “다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러

두손 모도호 살바 두 손을 올려

願往生 願往生 ‘원왕생 원왕생‘

그릴사람 잇다 삷고샤셔 그리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소서.

아으, 이몸 기텨 두고 아, 이 몸을 남겨 두고

四十八大願 일고샬가 사십팔대원을 이루실까.


◇願往生歌 해설

󰋬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던 광덕이 서방정토에 가다. 귀족불교에서 민중불교로 이동.

미천한 백성들은 신라가 불국토임을 내세우거나 미륵이 下生해서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자부심을 귀족과 함께 느끼기엔 불리한 처지였다. 그렇다고 화엄사상의 오묘하고 치밀한 체계에 기대를 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현세에서 관음이 출현하여 구원을 해주는 기적을 기다리거나 내세에는 서방정토에 태어나도록 열심히 염불을 하면서 나날의 고통을 잊고자 했다.(통사1, p155.)

󰋬수도의 두 방법: 진실한 신앙과 계율에 의존하는 신앙.

󰋬광덕은 부부로 살았지만 한 번도 동침하지 않은 생활의 실상과 정신적 지향을 함께 표현함. 노힐부득 달달박박의 이야기와 同軌임.

󰋬(1구)月下伊 底亦:①(소창)달애 믿예.

②(양주동)갈하 이제

[김완진]다랄-아래-이 엇뎨-역 다라리 엇뎨역. 底엇뎨:어찌하여

󰋬(7구)[김완진] ‘三句六名’은 1․3․7행의 세 句가 6音節로 되어 있음을 말함.

󰋬‘三句六名’은 향가, 려요, 시조에 이어지는 형식. 시조의 3章6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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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과 계율

[은자주]유사 본문의 구절을 원용하면 불심이란 중구삭금(衆口鑠金)과

수순중생(隨順衆生)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수로부인조에 후자는 본조에 나온다, 많은 사람들의

입은 쇠도 녹인다는 말과 중생의 바램을 따라 순응한다는 뜻이다.전자는 여론의 힘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근래 월령제한을 푼 미국소고기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 투표자의 절반에 가까운 득표를

하고도 무릎을 꿇은 이명박 정부의 무력해지는 모습을 목도해야만 하는 가슴 아픈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다. 지지가 대선 당시의 여론이었다면 반대도 작금의 여론이었다.

본조의 수행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불심과 계율을 대표한다. 부득은

고유어로 '붙들이'이니 노힐부득은 계율에서 놓여나[방임되어, 벗어나,

자유로운] 불심을 붙든, 心行에 장애가 없는 '등등(騰騰)'한수행자라는

말쯤으로 이해되고, 달달박박은 ‘고절(苦節)’이라는 일연의 주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괴롭게도 절도[계율]를 지키고 계율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고 걱정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 안달복달하는 인물로 보인다.

계율이란수행자가 흔히 범하기 쉬운 사안에 대하여 금기한 것이니 금기

에 대한 매력은 무의식의 심층에 자리하여 단절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

운 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자가 계율만

으로 득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이 설화는 웅변적으로 증명하였다.

말하자면 불심은 계율을 초극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南白月二聖 努肹不得 怛怛朴朴

-삼국유사 塔像 第四

白月山兩聖『成道記』云,

백월산 양성 <성도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白月山在新羅仇史郡之北(古之屈自郡, 今義安郡),

'백월산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있었다.

峯巒奇秀, 延袤數百里, 眞巨鎭也.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그 산 줄기는 수백리에 연무(산맥이 남북으로 뻗어있는 모양)하니

참으로 큰 진산이다.'

古老相傳云,

옛 노인들은 서로 전해 말했다.

昔唐皇帝嘗鑿一池,

'옛날에 당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팠는데,

每月望前, 月色滉朗,

매월 보름 전에 달빛이 밝으면,

中有一山, 嵓石如師子,

못 가운데 산이 하나 있는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隱映花間之影, 現於池中.

꽃 사이로 은은하게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上命畵工圖其狀, 遣使搜訪天下,

황제는 화공에게 명하여 그 모양을 그리게 하고, 사자를 보내 천하를 돌며 찾게 했다.

至海東 見此山有大師子嵓.

해동에 이르러 이 산을 보니 큰 사자암이 있고

山之西南二步許有三山,

산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이 있는데

其名花山(其山一體三首, 故云三山), 與圖相近.

그 이름이 화산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然未知眞僞,

그러나 그 산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므로

以隻履懸於師子嵓之頂, 使還奏聞,

신발 한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놓고 사자가 돌아와 아뢰었다.

履影亦現池. 帝乃異之,

그런데 신발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賜名曰白月山(望前白月影現, 故以名之),

그 산의 이름을 백월산이라고 했다.

然後池中無影.

그 후로는 못가운데 나타났던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山之東南三千步許, 有仙川村,

이 산의 동남쪽 3천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이 있고,

村有二人,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其一曰努肹夫得(一作等), 父名月藏, 母味勝;

한 사람은 노힐부득 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이라고 했고, 어머니는 미승이었다.

其一曰怛怛朴朴, 父名修梵, 母名梵摩.

또 한사람은 달달박박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이라고 불렀고, 어머니는 범마라 했다.

(『鄕傳』云雉山村, 誤矣.

(향전에 치산촌이라 함은 잘못이다.

二士之名方言,

두 사람의 이름은 방언이니

二家各以「二士心行, 騰騰苦節」二義, 名之爾.)

두 집이 각각 두 사람의 심행이 등등하고 고절하다는 두 뜻으로 이름했을 뿐이다.)

皆風骨不凡, 有域外遐想, 而相與友善.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으며 역외하상(域外遐想-속세를 초월한 높은 사상)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年皆弱冠, 往依村之東北嶺外法積房, 剃髮爲僧.

20세가 되자 생의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절이름)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未幾, 聞西南雉山村‧法宗谷‧僧道村有古寺, 可以拪眞,

그 얼마 후 서남쪽의 치산촌 법종곡 승도촌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정신을 수련함)할만하다는

말을 듣고,

同往大佛田‧小佛田二洞各居焉.

함께 가서 대불전과 소불전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夫得寓懷眞庵, 一云壤寺(今懷眞洞有古寺基, 是也);

부득은 회진암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라고도 했다.

朴朴居瑠璃光寺(今梨山上有寺基, 是也), 皆挈妻子而居.

박박은 유리광사에 살았는데 모두 처자를 거느리고 와 살면서

經營産業, 交相來往, 棲神安養,

산업을 경영하였으며, 서로 왕래하며 정신을 수양하여

方外之志, 未常暫廢.

방외지지(方外之志-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 방외는 세상밖)를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觀身世無常, 因相謂曰: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腴田美歲良利也,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으나,

不如衣食之應念而至, 自然得飽煖也;

의식이 생각대로 생기고 저절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婦女屋宅情好也,

또한 부녀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不如蓮池華藏千聖共遊, 鸚鵡孔雀以相娛也.

연지화장(蓮池花藏-비로사나불이 있는 功德無量 廣大莊嚴의 세계)에서 여러 부처나 앵무새 공작새와

함께 놀며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况學佛當成佛, 修眞必得眞!

하물며 불도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필연코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今我等旣落彩爲僧,

이제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當脫略纏結, 成無上道,

마땅히 몸에 얽매여 있는 것을 벗어버리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할 터인데,

豈宜汨沒風塵, 與俗輩無異也!」

이 풍진속에 파묻혀서 세속 무리들과 함께 지내서야 되겠는가?"


遂唾謝人間世, 將隱於深谷.

이들은 마침내 인간 세상을 떠나 장차 깊은 산골에 숨으려 했다.

夜夢白毫光自西而至,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光中垂金色臂, 摩二人頂.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及覺說夢, 與之符同,

꿈에서 깨어 이야기하니 두 사람이 똑같은 꿈을 꾼지라

皆感嘆久之.

이들은 모두 오랫동안 감탄했다.

遂入白月山無等谷(今南洞也),

드디어 백월산 무등곡으로 들어 갔다.


朴朴師占北鎭嶺師子嵓,

박박사는 북쪽 고개에 있는 사자암을 차지하여

作板屋八尺房而居, 故云板房;

판자집 8자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이라고 하고,


夫得師占東嶺磊石下有水處,

부득사는 동쪽 고개의 돌 무더기 아래 물이 있는 곳에서

亦成方丈而居焉, 故云磊房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이라 했다.

(『鄕傳』云, 夫得處山北瑠璃洞, 今板房;

향전에 이르기를,부득은 산의 북쪽 유리동에 있었으니 지금의 판방이요,

朴朴居山南法精洞磊房,

박박은 산의 남족 법정동 뇌방에 있었다 하니

與此相反. 以今驗之,『鄕傳』誤矣),

이와 상반되나 지금 상고해 보면 향전이 잘못이다.)

各庵而居.

이들은 각기 암자에 살았는데,

夫得勤求彌勒, 朴朴禮念彌陁.

부득은 미륵불을 성심껏 구했으며, 박박은 미타불(아미타불)을 경례 염송(念誦)했다.

未盈三載, 景龍三年己酉四月八日, 聖德王卽位八年也,

3년이 채 못되어 경룡 3년 기유(709) 4월 8일은 성덕왕 즉위 8년이다.

日將夕, 有一娘子年幾二十,

날이 저물어가는데 나이 20세에 가까운 한 낭자가

姿儀殊妙, 氣襲蘭麝,

매우 아름다운 얼굴에, 난초와 사향의 향기를 풍기면서

俄然到北庵(『鄕傳』云南庵), 請寄宿焉,

문득 북암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며 ,


因投詞曰:

그녀는 글을 지어 바쳤다.

「行逢日落千山暮, 갈 길은 아득한데 해지니 온 산이 저물고,

路隔城遙絶四隣. 길 막히고 성은 먼데 사방이 고요하네.

今日欲投庵下宿, 오늘 밤 이 암자에 자려 하오니,

慈悲和尙莫生嗔.」 자비하신 스님이시여 노하지 마오.


朴朴曰:

박박은 말했다.

「蘭若護凈爲務, 非爾所取近.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行矣, 無滯此處!」

다른 데 가보시고, 이곳에서 지체하지 마시오. " 하고는

閉門而入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記』云: 「我百念灰冷, 無以血囊見試.」)

(『記』云:“나는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싸늘하니 젊은 육신으로 시험치 말라.)


娘歸南庵(『傳』曰北庵), 又請如前,

낭자는 남암으로 가서 또 전과 같이 청했다.

夫得曰:

부득이 말했다.

「汝從何處, 犯夜而來?」

"그대는 어디서 이 밤중에 왔는가?"

娘答曰:

낭자가 답했다.

「湛然與太虛同體, 何有往來!

"담연(湛然-정적의 경지, 즉 우주의 근원)함이 태허(太虛-역시 우주의 근원)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감이 있겠습니까?

但聞賢士志願深重, 德行高堅,

다만 어진 선비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將欲助成菩提.」

장차 도와서 보리를 이루고자 합니다."

因投一偈曰:

그리고는 게송(偈頌) 하나를 주었다.

「日暮千山路, 깊은 산길 해는 저문데

行行絶四隣. 가도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竹松陰轉邃, 松竹의 그늘은 한층 그윽하고,

溪洞響猶新. 골짜기의 시냇물 소리 더욱 새로워라.

乞宿非迷路, 길 잃어 갈 곳을 찾음이 아니라,

尊師欲指津. 尊師의 뜻 인도하려 함일세.

願惟從我請, 부디 나의 청만 들어 주시고,

且莫問何人.」 길손이 누군지는 묻지를 마오.


師聞之驚駭, 謂曰:

부득사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此地非婦女相汚,

"이 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닙니다.

然隨順衆生, 亦菩薩行之一也.

그러나 중생의 바람을 따라 순응함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것이오.

況窮谷夜暗, 其可忽視歟!」

하물며 깊은 산골에서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乃迎揖庵中而置之.

이에 그를 맞아 읍하고 암자 안에 있도록 했다.

至夜淸心礪操,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조를 닦아

微燈半壁, 誦念厭厭,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及夜將艾, 娘呼曰:

날이 새려 할 즈음에 낭자는 부득을 불렀다.

「予不幸適有産憂, 乞和尙排備苫草.」

"내가 불행히도 마침 산고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夫得悲矜莫逆, 燭火殷勤,

부득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들고서 은근히 대했다.

娘旣産, 又請浴.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弩肹慚懼交心,

부득은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으나,

然哀憫之情有加無已, 又備盆槽,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 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하였다.

坐娘於中, 薪湯以浴之.

낭자를 통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는데

旣而槽中之水春氣郁烈,

잠시 후에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풍기면서

變成金液.

그 물이 금액(金液)으로 변했다.

弩肹大駭, 娘曰:

이에 부득은 크게 놀라니 낭자가 말했다.

「吾師亦宜浴此.」

"우리 스님께서도 이 물에 목욕해야 합니다."

肹勉强從之,

마지못해 부득이 그 말에 좇았다.

忽覺精神爽凉, 肌膚金色,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짐을 느끼게 되고 피부가 금빛으로 변했다.

視其傍忽生一蓮臺.

그 옆을 보니 문득 연대(蓮臺)가 있었다.

娘勸之坐, 因謂曰: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며 말했다.

「我是觀音菩薩, 來助大師, 成大菩提矣.」

"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言訖不現.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朴朴謂肹今夜必染戒,

한편 박박은 생각했다.

'부득이 지난밤에 반드시 계를 더럽혔을 것이므로

將歸听之, 旣至,

가서 비웃어 주리라.' 하고 도착했다.

見肹坐蓮臺, 作彌勒尊像,

보아하니, 부득이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었고

放光明, 身彩檀金,

금빛으로 단장된 몸에서는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不覺扣頭而禮曰: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했다.


"何得至於此乎?"

'어떻게 이 경지에 이르렀습니까?'

肹具叙其由,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朴朴嘆曰:

박박은 탄식하며 말했다.

"我乃障重, 幸逢大聖, 而反不遇.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중첩되어 요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大德至仁, 先吾著鞭,

큰 덕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군요.

願無忘昔日之契, 事須同攝.」

부디 지난 날의 약속을 잊지 마시고 부처되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거두셔야죠."

肹曰:

부득이 말했다.

"槽有餘液, 但可浴之."

"통 속에 남은 금액이 있으니 다만 거기에 목욕할 수있습니다."

朴朴又浴, 亦如前成無量壽,

박박이 또 목욕을 하여, 또한 전과 같이 무량수를 이루니,

二尊相對儼然.

두 부처가 상대함이 엄연했다.

山下村民聞之, 競來瞻仰, 嘆曰: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자 다투어 달려와 우러러 보며 감탄하였다.

"希有, 希有!"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

二聖爲說法要, 全身躡雲而逝.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의 요체를 설명하고는 온 몸이 구름을 올라타고 가버렸다.


天寶十四年乙未, 新羅景德王卽位

천보 14년 을미(755) 신라 경덕왕이 즉위하여

(古記云, 天鑑二十四年乙未法興卽位,

고기에 이르기를, 천감24년 을미에 법흥왕이 즉위했다고 하니,

何先後倒錯之甚如此),

어찌 선후의 뒤바뀜이 이와 같이 심할까?)

聞斯事,

이 일을 듣고

以丁酉歲遣使創大伽藍, 號白月山南寺,

정유(757)에 사자를 보내어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라 했다.

廣德二年(古記云大曆元年, 亦誤)甲辰七月十五日, 寺成,

광덕 2년 갑진(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므로,

更塑彌勒尊像, 安於金堂,

다시 미륵존상을 만들어 당금에 모시고

額曰「現身成道彌勒之殿」,

액자를 <현신성도미륵지전> 이라했다.

又塑彌陁像安於講堂,

또 아마타불상을 만들어 강당에 모셨다.

餘液不足, 塗浴未周,

그러나 남은 금액이 모자라 몸에 골고루 바르지 못한 탓으로

故彌陁像 亦有斑駁之痕,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額曰「現身成道無量壽殿」.

그 액자에는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 했다.

議曰,

사론(史論)해 보건대,

娘可謂應以婦女身攝化者也.

낭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 섭화(攝化-중생을 자비심을 가지고 보호하여 교화함)하였다 할만하다.

『華嚴經』摩耶夫人善知識, 寄十一地生佛如幻解脫門,

화엄경이 마야부인 선지식(善知識-부처님의 교법)이 십일지(十一地)1)에 살며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

을 여환(如幻)2)한 것과 같다.

[주1):十一地: 十地와 等覺을 말함.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인 52位중 41위로부터 50위까지를 십지라 한다.

이 10위는 佛智를 생성하고 능히 住持하여 흔들리지 않고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 이익되게 함이

땅이 만물을 낳고 키움과 같아서 地라고 한다. 등각은 보살이 수행하는 순서로서 그 지혜가 부처님과

거의 같으므로 등각이라 한다. 여기서는 보살을 마야부인과 비교하고 있다.]

[주2):如幻: 환은 여러 방법으로 코끼리 말 인물등을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느끼게 하는 것.]

今娘之桷産微意在此.

이제 낭자의 각산[順産]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觀其投詞, 哀婉可愛, 宛轉有天仙之趣.

그녀가 준 글은 슬프고 간곡하며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旨趣)가 있다.

嗚呼! 使娘婆不解隨順衆生語言陁羅尼,

아, 만일 낭자로 하여금 중생의 바램을따르는 다라니를 해득할 줄 모르게 했다면

其能若是乎?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其末聯宜云「淸風一榻莫予嗔!」,

그 글의 끝에는 당연히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오.”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然不爾云者, 盖不欲同乎流俗語爾.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리라.

讚曰:

滴翠嵓前剝啄聲, 푸른 빛 드리운 바위 앞에 문소리 똑똑똑,

何人日暮扣雲扃.뉘신데저문 날애 구름 속빗장문 두드리나.

南庵且近宜尋去, 남암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요,

莫踏蒼苔汚我庭. 푸른 이끼 밟아 나의 뜨락 더럽히지 마오.

右北庵.

이것은 북암을 기린 글이다.


谷暗何歸已暝煙 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오,

南窗有簟且流連 南窓 빈 자리에 머물고 가오.

夜闌百八深深轉 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只恐成喧惱客眠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두려워라.

右南庵.

이것은 남암을 기린 것이다.


十里松陰一徑迷 솔그늘 십리길 한 길을 헤매다가

訪僧來試夜招提 밤되어 招提(중들을 쉬게 만든 절)로 스님 찾아 시험했네

三槽浴罷天將曉 세 번통에 목욕 끝나 새벽이 오려할 때

生下雙兒擲向西 두 아이 낳아 놓고 서쪽으로 가셨네.

右聖娘.

위의 성랑(聖娘)을 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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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면비 염불서승

郁面婢 念佛西昇 -삼국유사‘感通 제7’

-여종 욱면이 법당에서 염불하다 대들보를 뚫고 서방정토[극락]로 승천하다


[은자주] 불교의 평등사상과 고난의 정진과 육신을 가진 인간이 곧바로 부처가 되어 극락왕생하는

신비체험 등 감동의 물결은 끝없이 파도쳐온다.

일연은 감동받은 인물이 있으면 어김없이 칠언절구 찬(讚)으로 전(傳)을 마무리한다. 이런 패턴의

글쓰기는 중국의 양고승전(梁高僧傳)에서 비롯되어, 각훈의 <해동고승전>을 거치며 승전쓰기의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나는 우스개소리로, 삼국유사를 읽을 때 찬이 붙은 작품을 만나면 일연이 감동받은 설화작품으로

보면 틀림없다고 말한다.


景德王代康州(今晉州, 一作剛州, 則今順安)

경덕왕 때 강주에

善士數十人, 志求西方,

남자 신자 수십명이 서방정토를 정성껏 구하여

於州境創彌陀寺, 約萬日爲契.

주의 경계에 미타사란 절을 세우고 만일(萬日)을 기약하여 계(契)를 만들었다.

時有阿干貴珍家一婢名郁面,

그 때 아간 귀진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욱면이라 불렀다.

隨其主歸寺, 立中庭, 隨僧念佛,

욱면은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가 마당에 서서 중을 따라 염불했다.

主憎其不職,

주인은 그녀가 자신의 직분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每給穀二碩, 一夕舂之.

곡식 두 섬을 하룻밤 동안에 다 찧게 했는데,

婢一更舂畢, 歸寺念佛.

계집종은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했으며,

(俚言「己事之忙, 大家之春促」, 盖出乎此.)

(속담에 “자기일 바빠 큰집 방아찧기 서두른다.”는 말은 대개 여기에서 나왔다.)

日夕微怠,

밤낮으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庭之左右, 竪立長橛,

그녀는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以繩穿貫兩掌,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繫於橛上合掌,

말뚝 위에 매고는 합장하면서

左右遊之激勵焉.

좌우로 흔들어 자신을 스스로 격려했다.

時有天唱於空

그 때 하늘에서 외치기를,

"郁面娘入堂念佛",

‘욱면랑은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고 했다.

寺衆聞之, 勸婢入堂, 隨例精進.

절의 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계집종을 권해서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정진하게 했다.

未幾, 天樂從西來,

얼마 안 있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婢湧透屋樑而出, 西行至郊外,

욱면은 몸이 솟구쳐 집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 교외로 가더니

捐骸變現眞身. 坐蓮臺,

유해(遺骸)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에 앉아

放大光明 緩緩而逝,

큰 빛을 발하면서 천천히 가버렸는데,

樂聲不撤空中.

음악소리는 오랫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其堂至今有透穴處云.(已上『鄕傳』.)

그 법당에는 지금도 뚫어진 구멍자리가 있다고 한다.

按『僧傳』:

승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棟梁八珍者觀音應現也.

동량 팔진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結徒有一千, 分朋爲二,

무리들을 모으니 천명이나 되었는데, 두 패로 나누어

一勞力, 一精修,

한 패는 노력을 다하고, 한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彼勞力中知事者不獲戒,

그 노력하던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얻지 못하고

墮畜生道, 爲浮石寺牛.

축생도에 떨어져서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嘗駄經而行, 賴經力,

일찍이 소가 불경을 등에 싣고 가다가 불경의 힘을 입어

轉爲阿干貴珍家婢, 名郁面.

아간 귀진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했다.

因事至下柯山, 感夢遂發道心.

욱면은 일이 있어 하가산에 갔다가 꿈에 감응해서 마침내 불도을 닦을 마음이 생겼다.

阿干家距惠宿法師所創彌陀寺 不遠,

아간의 집은 혜숙법사가 세운 미타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阿干每至其寺念佛,

아간은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했으므로

婢隨往, 在庭念佛云云.」

계집종인 욱면도 따라갔고 뜰에서 염불했다고 한다.

如是九年, 歲在乙未正月二十一日,

이와 같이 9년 동안을 했는데, 을미년 정월 21일에

禮佛撥屋梁而去,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대들보를 뚫고 올라갔다.

至小伯山, 墮一隻履,

소백산에 이르러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就其地爲菩提寺.

그 곳에 보리사란 절을 지었고,

至山下棄其身, 卽其地爲二菩提寺,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 곳에는 제2보리사를 지었다.

榜其殿曰「勗面登天之殿」.

그 전당에 편액하여 ‘욱면등천지전’이라 했다.

屋脊穴成十許圍,

대들보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이나 되었지만,

雖暴雨密雪不霑濕.

폭우나 세찬 눈에도 전각 안은 젖지 않았다.


後有好事者範金塔一座,

후에 호사자(好事者)들이 금탑 1좌를

直其穴, 安承塵上,

그 구멍에 맞추어서 승진(承塵)위에 모시고

以誌其異,

그 이적(異跡)을 기록했는데,

今榜塔尙存.

지금도 그 편액과 탑은 그대로 남아있다.


勗面去後,

욱면이 간 후에,

貴珍亦以其家異人托生之地,

귀진도 또한 그의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하여,

捨爲寺曰法王, 納田民,

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어 이름을 법왕사라 하고, 전민(田民)을 바쳤다.

久後廢爲丘墟.

오랜 후 절은 허물어져 쓸쓸한 빈터가 되었다.


有大師懷鏡, 與承宣劉碩‧小卿李元長, 同願重營之.

대사 회경이 승선 유석, 소경 이원장과 함께 발원하여 절을 중건하였는데,

鏡躬事土木, 始輸材,

이 때 회경이 친히 토목공사를 맡아 재목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夢老父遺麻葛屨各一.

그날 회경의 꿈에 노부가 삼으로 삼은 신과 칡으로 삼은 신을 각각 한 켤례씩 주었다.

又就古神社, 諭以佛理,

또 회경은 옛 신사에 나아가 불교의 이치를 깨우치고

斫出祠側材木, 凡五載告畢.

신사 옆의 재목을 베어다가 5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又加臧獲, 蔚爲東南名藍,

또 노비까지 더하여 이 절은 매우 융성해졌으며 이 후 동남지방의 이름있는 절이 되었다.

人以鏡爲貴珍後身.

사람들은 회경을 귀진의 후신이라 했다.


議曰:

논평하여 본다.

按鄕中古傳, 郁面乃景德王代事也,

고을 안의 고전을 살펴보면 욱면의 일은 경덕왕 시대의 사실이다.

據徵(「徵」字疑作「珍」. 下亦同)本傳, 則元和三年戊子, 哀莊王時也.

징(徵)의 본전에 따르면 원화 3년 무자(808) 애장왕 때의 일이라 했다.

景德後歷惠恭‧宣德‧元聖‧昭聖‧哀莊等五代, 共六十餘年也.

경덕왕 이 후에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등 5대까지는 도합 60여년이나 된다.

徵先面後, 與鄕傳乖違,

귀징이 먼저가 되고 욱면이 뒤가 되므로 그 차례가 향전과 어긋난다.

然兩存之闕疑.

여기에다 이 두 가지를 다 실어 의심을 없앤다.


讚曰:

西隣古寺佛燈明, 서편 이웃 옛 절에는 불등 밝은데

舂罷歸來夜二更. 방아 찧고 갔다 오면 밤은 깊어 이경이네.

自許一聲成一佛, 한마디 염불마다 부처가 되어지고,

掌穿繩子直忘形. 손바닥에 줄을 뀀은 그 몸 바로 잊음이네.

[베네주엘라 엔젤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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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주]설화의 세계에는 금기가 없다. 현대판으로 고치면 이 설화는 대물왕 강쇠와 대물왕비 옹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 무엄하게도 왕의 음경 길이를 기록하고 왕비의 똥자루 크기를 기록하다니. 그것도 지증왕이라면 4년 10월에 '王'이라는 왕호를 최초로 사용하고, 나라 이름도 국제표준어를 사용하여‘新羅’로 고치고 시호도 처음으로 쓴 국제화, 세계화를 표방한 신라의 위대한 왕인데...

시호 지증은 “지절로” 내지 "지대로"의 한자 표기로 추정된다. 한자로 표기한 "지철로"도 역시 고유어 "지절로"의 음사로 보인다.

현대어로는 부사 "저절로 " 또는 “제대로”인데 그 말뜻은 아래와 같다.


저절로

"다른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제 스스로. 또는 인공의 힘을 더하지 아니하고 자연적으로."

제대로

1 제 격식이나 규격대로. 2 마음먹은 대로. 3 알맞은 정도로. 4 본래 상태 그대로.


보통 사람들의 음경은 해면체에 혈액이 충혈되어 있어야 발기하지만 이 지절로왕은 한 자 다섯 치 되는 대물이 언제나 그 모양이 그 모양인 모양이다.

이 설화 서술자의 위대성 표현방법 또한 기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성기숭배가 오로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이니, 성기라면 오로지 쾌락만을 연상하는 편협한 사고를 강요하는 현대인의 안목 으로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서술자의 태도에는 경탄과 찬사와 희열과 진지함으로 충만해 있었을 것이다. 신라 삼대 중 국가의 표준을 갖춘 중대의 문을 열고보니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 또한 높았을 것이다 이에 호응하여 왕과 왕비의 성기가 월등하게 크다는 점을 강조하여-사실은 알 수 없음- 성기신앙에 기대어 국가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한 신라인들의 발상은 특기할 만하다.


중국에서는 사천성 단샤[단하]산의 양원석(陽元石)과 음원석(陰元石)

을 관광자원화하였는데, 양원석은 높이 28m, 직경이 7m 되는 암석

이고, 음원석은 길이 10m, 너비 4m 되는 암벽인데, 음원석 동굴의

길이는 4.8m, 가장 넓은 틈이 74cm, 동굴의 깊이는 4m라고 한다.

 

 아래 주소창 참고.

http://blog.naver.com/khlee1959/50109372022

 

지철로왕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제 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이며

名智大路, 又智度路,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라 하였다.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시호는 지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은 이 때부터 시작하였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이라고 한 것은 이 왕 때부터 시작하였다.

[은자주]

마립간을 처음 사용한 왕은 第十七奈勿麻立干이다. 왕통이 김씨로 자리잡고 새시대를

연 것을 공포한 것이다.지증마립간/지증왕 4년 10월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뀐 것을 설화[역사]

기술자가 착각한 듯하다. 일연이 주석을 달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麻立干과 王의 위치를 맞바꾸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辛巳則三年也.)

왕은 영원 2년(500년)에 왕위에 올랐다.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되어 배필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 冬老樹下,

그래서 사자를 三道에 보내어 배필을 구하였는데, 사자가 모량부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니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 한덩어리 하나를 물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개들은 양끝을 물고 싸웠다.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했다.

「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누고 간것입니다."

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보니 그녀의 신장이 일곱자 다섯치나 되었다.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封爲皇后, 群臣皆賀.

책봉하여 황후로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경하했다.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有于陵島(今作羽陵),

또 아슬라주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가 있었다.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이 섬은 둘레가 2만6천7백30보였다.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아니했다.

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

왕은 이찬 박이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박이종(신라장군 이사부)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위협했다.

「不降則放此獸」,

"너희가 항복을 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 버리겠다."

島夷畏降. 賞伊宗爲州伯.

섬의 오랑캐는 두려워서 항복을 하였다. 이에 왕은 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그 주의 장관인 주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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