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o.wikipedia.org/wiki/%ED%97%A8%EB%93%9C%EB%A6%AD_%ED%95%98%EB%A9%9C
<하멜 표류기>
하멜의 14년간에 걸친 억류 기록인 《란선 제주도 난파기》(蘭船濟州道難破記[2])는 부록 《조선국기》와 통칭해서 《하멜 표류기》로 많이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어 원제는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이다.
문맹이었던 선원 대다수와 달리,[3] 하멜은 유일하게 글을 교육받은 서기라 조선에서 억류 당해 체험한 사건을 날짜, 마을 이름, 거리, 언어 등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고, 기록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소속된 피고용인으로서 하멜이 해야 하는 노동이기도 하였다. 하멜이 남긴 기록은 《하멜표류기》와 《조선왕국기》로 나뉘어 세상에 나왔는데 조선의 정치·외교·교육·종교[4]·문화·사회상·언어를 대상으로 해 서구인의 시각에서 당시 조선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하멜표류기》를 근거로 조선에서 무역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반대 때문에 이를 포기하였다. 한국어판은 서해문집에서 펴낸 《하멜표류기》가 있다. 번역은 물론 각주도 있어서 읽기 좋도록 편집하였다.
*[이 블로그 운영자]
용머리해안은 공항 근처의 용두암과는 구분된다,'용머리'의 한자어는 '용두(龍頭)'이지만.
1918년 1월 중순경, 기이한 용암의 형태에 반해서 마음 먹고 해안길을 따라가며 사진으로 남긴 것을 몇 장 골라서 재정리한다. 사암단층을 살린 동영상도 너튜브에서 한 꼭지 골라 보았다.
*'蘭船(란선)'은 '화란(和蘭,네델란드)의 상선(商船,무역선)'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출발한 이 배의 서기(書記)인 하멜은 선부(船夫) 2명과 함께 거센 바람에 난파당해 제주도에 착륙했다가 14년후 조선 탈출에 성공하여 귀국했다.
*[운영자 생각]
1653년엔 네델란드 서민들도 먹고 살기 참 힘들었나 보다. 이 작은 배를 타고 일본까지 장사에 나선 걸 보면.
나는 TV 화면에 소형 어선을 타고 물길 나가는 서민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삶이란 게 목숨을 건 투쟁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농부들이야 논바닥에 넘어져 봤자 옷 갈아 입으면 상황끝이지만, 어부가 바다에 빠지는 건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그일 말고는 생계를 꾸려갈 다른 방도가 없어 날이 밝으면 또다시 소형 어선에 시동을 건다.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그가 귀가할 때까지 가족들은 노심초사다. 그래서 가족이다.
조선 최초의 귀화인은 박연(朴淵)
일본(日本[니혼:にほん]:BC660[단군조선 매륵44, 마한 동기17, 번한 아갑3, 탐라국1677, 일본 神武 원년].2.11-현재)으로 향(向)하던 중(中) 제주도(濟州島)로 휩쓸려온 화란(和蘭[네덜란드,Netherlands]:1579[조선 선조12, 네덜란드 원년,에스파냐支配期64].1.23-현재) 무역선(貿易船) 우배얼개얼극(禑焙爾個爾克[우베르케르크:Ouwerkerk])는 세 명(名)의 화란인(和蘭人[네덜란드인:Netherlands人])들은 제주 바다의 거센 바람에 난파당해 조선에 억류당한다.
하지만 “그들을 붙잡아 왜관(倭館)에 보냈으나 왜관인(倭館人)은 이들이 일본(日本[니혼:にほん])의 표류자(漂流者)가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ㅡ “접왜사목초록(接倭事目抄錄)”
서양인(西洋人)이 표류(漂流)할 경우(境遇) 중국(中國[중궈:Zhōngguó])으로 송환(送還)하던 관례(慣例)와 달리 정묘호란(丁卯胡亂:1627[조선 인조4, 明 천계제7,숭정제 원년, 後金 천총제1].3.1-1627[조선 인조4, 明 천계제7,숭정제 원년, 後金 천총제1].5)으로 어수선했던 조선(朝鮮)은 선원(船員)들을 체류(滯留)하도록 한다.
대포(大砲) 만드는 재능(才能)이 있던 이들은 한양(漢陽)으로 후송(後送)되어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일하게 되고 1636년(千六百三十六年[조선 인조13]) 병자호란(丙子胡亂:1636[조선 인조13, 明 숭정제9, 後金 천총제10,淸 숭덕제 원년].12.28-1637[조선 인조14, 明 숭정제10, 淸 숭덕제1].2.24)에 참전(參戰)해 두 명(名)은 목숨을 잃는다.
(....중략....)
고국(故國)을 떠난 지 26년(二十六年) 만에 제주도(濟州島)에 표류(漂流)한 동족(同族) 형득리극‧하매얼(亨得利克‧河梅爾[亨德里克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조선 인조7, 네덜란드共和國51,에스파냐支配期115].8.20-1692[조선 숙종18, 네덜란드共和國113].2.12)과 조우(遭遇)
박연(朴淵)은 하매얼(河梅爾[하멜:Hamel]) 일행(一行)의 통역(通譯)을 맡으며 조선(朝鮮)의 언어(言語)와 풍속(風俗)을 가르친다.
“고향(故鄕)을 떠난 지 5년(五年),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우리를 보내준다면 화란(和蘭[네덜란드:Netherlands]) 상선(商船)이 (일본으로) 올 것이므로 당신(當身)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ㅡ “하매얼표류기(河梅爾漂流記[하멜표류기:Hamel漂流記])[원제: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조선국기(朝鮮國記: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하매얼(河梅爾[하멜:Hamel])의 말.
“일본(日本[니혼:にほん]) 교역(交易)이 이전(以前)과 달라 자국인(自國人)도 타국(他國)에 왕래(往來)하고자 하면 반드시 죽인다. 하물며 너희 같은 타국인(他國人)은 당연(當然)하다. 차라리 조선(朝鮮)에서 사는 것만 못할 것이다.”
ㅡ “하매얼표류기(河梅爾漂流記[하멜표류기:Hamel漂流記])”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박연(朴淵)의 말
그러나 표류(漂流) 13년(十三年) 후(後) 하매얼(河梅爾[하멜:Hamel])은 탈출(脫出)에 성공(成功)해 고국(故國)으로 돌아갔으나, 대외적(對外的) 위기(危機)인 조선(朝鮮)의 핵심(核心) 관료(官僚)였던 박연(朴淵)은 돌아갈 수 없었다
↓ 하멜 상선(무역선) 전시관
↓우측 대불(大佛)은 산방산 보문사 약사여래 좌상
https://www.youtube.com/watch?v=gxuhUoMJdHE
https://www.youtube.com/watch?v=wkm6WgxUDG8&t=15s
https://www.youtube.com/watch?v=JZtmnrEzIl8
https://www.youtube.com/watch?v=HPATOuwxrxE
용머리해안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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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7646?category=485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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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7610?category=485792
동아시아 전설의 영수 "룡(龍)"의 종류
https://www.youtube.com/watch?v=QUGKA4ew2wY
용(龍) vs 드래곤
https://www.youtube.com/watch?v=2QHgfS0Tz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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