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rV0RzazykD8 

 

 

 

https://www.youtube.com/watch?v=ScZtQIupJ7Q 

 

 

수국을 보며

ㅡ 이해인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푸른

한 다발의 희망이 피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무더기로 쏟아지네     

 

 '수국'의 꽃말

  • 하얀: 관용
  • 분홍색 : 강한 사랑, 건강한 여인
  • 보라색  : 참을성, 지적, 인내, 신비, 단란
  • 초록색 : 한결같은 사랑
  • 푸른색: 변덕, 바람기

 

https://www.youtube.com/watch?v=tEPN5I68fXc 

 

 

https://www.youtube.com/watch?v=bQTc2gNrhpM 

 

 

https://www.youtube.com/watch?v=Dafc4wy-i_w 

 

 

https://www.youtube.com/watch?v=7dLWIntkzqo 

 

 

https://www.youtube.com/watch?v=7H5fbpL131s 

 

 

https://www.youtube.com/watch?v=j9FOwROW8yY 

 

 

https://www.youtube.com/watch?v=WpO73CRVBL0 

 

 

 

김정희 세한도

 

 

집앞의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정희"

그림을 해석하면, 내 마음은 벗님들 덕분에 한겨울에도 춥지 않아! 오두막이야 썰렁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 원문- 번역

https://blog.naver.com/bhjang3/140036533615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 원문- 번역문.

발문이 적힌 세한도. 발문을 자른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발문(歲寒圖 跋文) 원문- 번역문. 번역문 ...

blog.naver.com



https://kydong77.tistory.com/18044

 

추사 김정희, 세한도 발문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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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명화가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이한철[1]이 그린 초상화. 보물 547호.
이름
김정희(金正喜)
본관
경주 김씨 상촌공파[2]
출생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3]
사망
1856년(철종 7) 10월 10일 (70세)
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리 과지초당[4]
원춘(元春)
완당(阮堂)·추사(秋史) 등[5]

 

https://namu.wiki/w/%EA%B9%80%EC%A0%95%ED%9D%AC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관련 항목

 

2. 생애

1786년(정조 10년)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양되었다.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지 24개월(혹은 1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젖을 떼자마자 붓을 가지고 놀았는데 부친 김노경이 붓을 빼앗으려 하자 사력을 다해 붓을 쥐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붓에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변에서는 훗날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 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보고는 명필이라고 칭찬했다는 영재로 그의 영특한 재능을 보고 감탄한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정조 때 집안 친척들이 많이 죽었지만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아버지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채제공과 관련된 야사가 있는데 정치적 반대파라 평상시에 말도 섞지 않던 채제공이 자신의 집에 온 것에 놀라서 김정희의 아버지가 연유를 물으니 체재공은 김정희의 글을 보고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오. 허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하고 예언했다고 한다. 예언이 적중하기라도 했을까? 김정희는 부모를 일찍 잃고 아내들과도 사별하며 고문당하고 귀양을 2번이나 가는 등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어머니를 결혼 직후인 16살(1801년)에 잃고 20살 때 아내, 계모, 스승 박제가도 잃었다. 3년상 후 순조 9년(1809) 생원시에 장원 급제한다. 1810년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 군관으로 따라갔다. 60일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최고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6] 이후 벼슬에 나오지 않으면서 <실사구시론>과 같은 책을 썼으며 1816년 무학대사나 고려 태조 왕건의 비로 알려졌던 북한산 비봉의 비를 신라 시대의 진흥왕 순수비라고 고증했던 선대 학자들의 고증이 올바름을 확실하게 했다.[7] 그리고 또다른 순수비인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도 머나먼 개마고원에 있어서 직접 찾아가 수습하지는 못했지만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깨진 것을 수습하고 원위치를 부탁, 비각을 세우고 현판을 만들어 보내는 등 황초령비의 보존에도 김정희의 공이 컸다.

순조 19년(1819)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병조참판에까지 올랐는데 순조 27년(1827)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인 19세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되었다. 하지만 순조 30년(1830) 효명세자가 죽자 안동 김씨인 김우명이 탄핵하여 파면되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다. 아마도 김우명이 공주목 비인현감으로 있을 때 파직된 일로 앙갚음을 한 듯하다. 김정희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순조가 죽던 해에 복귀되어 아버지와 함께 조정으로 돌아온다. 순조는 귀양을 보낼 때도 '조정에서 나오는 말이 쫓아내라 몰아내라 이딴 거밖에 없구나.'하는 투로 말했다. 안동 김씨 기세에 눌렸지 순조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헌종 1년(1835)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복귀해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8] 하지만 관직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복귀한지 5년이 지나 헌종 6년(1840) 윤상도의 옥에 관련되어 고초를 겪었다.[9] 이때 김정희는 고문을 심하게 받아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친구인 우의정 조인영이 '추사를 살려달라.'는 상소를 올린 덕분에 죽음을 면한 대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8년간 유배당하는데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지 "저번에 보내온 음식들은 태반이 썩었다. 좋은 음식 좀 보내라."하고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먼 제주도까지 보내야 했으니 음식이 제대로 도착하는게 이상하다. 설상가상으로 재혼한 부인도 헌종 8년(1842) 11월에 죽었다. 부인이 병들었다는 소식에 김정희는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편지를 썼을 때는 이미 부인이 죽은 뒤였다. 2달이 지나 뒤늦게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정희는 슬퍼하며 '내생에 다시 부부가 되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죽어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게 하고 싶다.'는 애절한 를 쓰기도 하였다. 유배 기간에 추사체를 만들었는데 2014년 1월 28일 방영된 KBS 다큐공감에서 위의 일화가 소개되었다. # 당시 김정희가 먹었을 음식인 강조밥(좁쌀만으로 지은 밥)과 생된장을 백종원이 직접 먹어보는데 거칠고 먹기 힘든 음식이라는 반응이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대립 사이에서 일종의 중간 관리자 역을 하던 영의정 권돈인과도 친했는데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로 철종 2년(1851) 같이 파직되어[10] 함경도 북청부로 유배를 갔다. 67살 늙은 나이였는데 유배 기간 동안 고대 석기를 연구했다. 「석노가」(石砮歌)에서 그는 귀신의 조화로 보던 돌도끼나 돌화살촉을 생활 도구이자 무기임을 밝혀내고 토성 유적과 갈라서 보자고 주장했다.[11] 그렇게 한 해를 보내고 철종 3년(1852) 겨울에야 풀려났다. 이로써 3년+8년+1년으로 도합 12년 유배.

북청부에서 돌아온 뒤 김정희는 과거 아버지가 과천에 마련해둔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71살되던 철종 7년(1856)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1856년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했다고 하는데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은 봉은사의 판전 현판으로 세상을 떠나기 4일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김정희가 얼마나 작품에 열정적이었던지 평생 동안 벼루 열 개에 구멍을 내고 붓 천 자루를 닳게 했다고 한다.[12]

 

 

 

https://www.youtube.com/watch?v=iS1dQDPxTo8 

 

https://www.youtube.com/watch?v=IlzHVJP5Qqg&t=7s 

 

https://kydong77.tistory.com/20844

 

秋史 金正喜, 歲寒圖와 그 발문& 예산 추사고택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었다. 제사를 번역하면, "세한도를 우선 이상적은 감상하시게. 완당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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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8087

 

추사 김정희 선생 유배지/서귀포

금란지교 (金蘭之交) 지란지교 (芝蘭之交) 추사 김정희(1786-1856) 초의 의순(1786-1866) 집앞에 소나무 2그루[초의(노송)와 이상적] , 집뒤에도 잣나무 2그루 우측 상단의 題辭에는 "歲寒圖 藕船是賞 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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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mas(크리스마스)의 뜻은 "그리스도를 위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Christ(구세주)와 mass(예배)의 합성어

https://www.youtube.com/watch?v=Jyx9oAoq54E&t=60s 

 

https://www.youtube.com/watch?v=0mGoYySWw_0 

 

https://www.youtube.com/watch?v=UPRrqigHtq0 

 

 

https://kydong77.tistory.com/20839

 

성읍민속마을/ 서귀포 추사유배지& 세한도 발문

https://www.youtube.com/watch?v=33gzvAwupMw https://www.youtube.com/watch?v=jf9q4kntSUg https://www.youtube.com/watch?v=mXg8C3xVJe0 "혼저옵서예"는 "어서오세요"란 뜻 https://www.youtube.com/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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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5iPUvhIR1uc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D%98%B8

 

한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같은 이름을 가진 중국 후한 말의 무장에 대해서는 한호 (후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석봉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12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에 대해서는 한효섭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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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 서체의 특징 및 평가

 
한호의 증류여장서첩

한호는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혔으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뛰어난 평필가들의 필법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뛰어나게 되었다. 석봉 서체의 특징은 그가 조송설(趙松雪)체를 쓰면서도 자기 독특한 체풍(體風)을 세운 데 있다. 그렇게 한호는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석봉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

엄주(弇州) 왕세정(王世貞)은 〈필담(筆談)〉에서 석봉의 글씨를 가리켜 “성난 사자가 바위를 갉아내고, 목마른 천리마가 내로 달리는 것같이 힘차다.”라고 했으며, 명나라 한림 주지번(朱之番)은 “석봉의 글씨는 능히 왕우군(王右軍)·안진경(顔眞卿)과 어깨를 겨눌 만하다.”라고 하였다.

선조도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찬탄하면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그 집에 연회를 베풀었다. 이어 선조는 한벽(閑僻)한 고을 군수에 임명하면서 “필법을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도 말고 서둘지도 마라.”라고 타일렀으며, 선조 친필로 〈醉裡乾坤 筆奪造化(취리건곤 필탈조화)〉의 8자를 써 주었다.

그는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양사언(楊士彦)과 함께 조선 초기의 4대 서가(四大書家)로 꼽힌다. 또한 한호의 글씨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친필 진본이 거의 없으나 석봉서법이라든가 석봉천자문과 같은 책이 모간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의 흔적들 더듬어 보게 한다. 그러나 그의 글씨로 비문이 많이 남아 있어 탁본으로 유행하고 있다.

작시(作詩)에 능한 차천로, 작문에 능한 최립과 함께 송도삼절로 불린다.

 

내가 좋아하는 이 해녀 조각품은 없어진 듯함. 모형 돼지도 치우고.

 

https://www.youtube.com/watch?v=mXg8C3xVJe0 

 

 

 

 

 

https://www.youtube.com/watch?v=6RHab-PuwCI 

 

 

https://www.youtube.com/watch?v=N-6wlbTmoKA 

'설문대할망(雪门黛婆婆)'의 뜻은 제주도를 만든, 텁수룩하게 난 흰 눈썹을 휘날리는 거인 여신인 '할망'을 일컫는 말로 짐작된다. 화산의 용암이 치솟던 천지창조 시절, 그 할매는 한라산에 한 발을 걸치고 우도를 빨래판 삼을 만큼 거대한 몸집의 여신이다. 여신을 할망으로 설정한 것은 태초부터 존재했음을, 특히 여신의 몸집 크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여신이 천지와 같이 위대한 존재임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굶주린 500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모정은 너무나 인간적인 측면까지 확보한 감동적인 신화다.

 

설문대할망(雪门黛婆婆)

https://folkency.nfm.go.kr/kr/topic/detail/5362

 

설문대할망

바다 속의 흙을 삽으로 떠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제주 여성신에 관한 설화.

folkency.nfm.go.kr

바다 속의 흙을 삽으로 떠서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제주 여성신에 관한 설화.

줄거리

태초에 탐라에는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누워서 자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앉아 방귀를 뀌었더니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 불꽃 섬은 굉음을 내며 요동을 치고, 불기둥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할머니는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퍼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날라 부지런히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 치마폭의 흙으로 한라산을 이루고 치맛자락 터진 구멍으로 흘러내린 흙들이 모여서 오름들이 생겼다. 또 할망이 싸는 오줌발에 성산포 땅이 뜯겨 나가 소섬이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몸속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풍요로웠다. 탐라백성들은 할머니의 부드러운 살 위에 밭을 갈았다. 할머니의 털은 풀과 나무가 되고, 할머니가 싸는 힘찬 오줌 줄기로부터 온갖 해초와 문어, 전복, 소라, 물고기들이 나와 바다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물질하는 잠녀가 생겨났다.

할머니는 헌 치마 한 벌밖에 없었기 때문에 늘 빨래를 해야만 했다. 한라산에 엉덩이를 깔고 앉고, 한쪽 다리는 관탈섬에 놓고, 또 한쪽 다리는 서귀포시 앞바다 지귀섬에 놓고서, 성산봉을 빨래바구니 삼고, 소섬은 빨랫돌 삼아 빨래를 했다. 가끔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워 발끝은 바닷물에 담그고 물장구를 쳤다. 그때마다 섬 주위에는 하얀 거품이 파도와 물결을 이루었고, 몸을 움직이고 발을 바꿀 때마다 거대한 폭풍처럼 바다가 요동쳤다. 한라산에서 엉덩이를 들고일어나 한 발로 한라산을 딛고, 또 한 발로 성산봉을 딛고, 관탈섬을 빨랫돌 삼으면, 세상은 또 한 번 다른 세상으로 바뀐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풍요로움의 근원인 설문대할망도 거대함으로 인해 불행했다. 할머니는 키가 너무 커서 옷을 제대로 입을 수가 없었다. 터지고 헌 치마를 입고는 있었지만 고래굴 같은 자신의 음문을 가릴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항상 탐라백성들을 위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 주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속옷 한 벌만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했다. 할머니의 속옷을 만드는 데는 명주 100통이 필요했다. 탐라 백성들이 명주를 다 모아도 99통밖에 안 되었다. 99통을 베어 짜서 속옷을 만드는데, 속옷 한 벌을 다 만들지 못했다. 인간 세상에 명주가 별로 없을 때라서, 사람들은 모자람과 안타까움 탓에 속이 상했고, 할머니는 음문이 살며시 드러난 미완성의 속옷에 부끄럽고 화가 났다. 할머니는 육지까지 다리 놓는 걸 포기해 버렸고, 그때부터 제주는 물로 막힌 섬이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키가 큰 것을 늘 자랑하였다. 용연물이 깊다고 하기에 들어섰더니 발등에 겨우 닿았고, 홍리물은 무릎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한라산 물장오리물은 밑이 없는 연못이라 나오려는 순간 빠져죽고 말았다.

할머니의 죽음과 오백장군의 이야기가 결합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설문대할망은 오백장군을 낳아 한라산에서 살고 있었다. 식구는 많고 가난한데다 마침 흉년까지 겹쳐 끼니를 이어갈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들들에게 밖으로 나가 양식을 구해 오라고 했다. 오백 형제들은 모두 양식을 구하러 나가고, 할머니는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백록담에 큰 가마솥을 걸고 불을 지핀 다음, 솥전 위를 걸어 돌아다니며 죽을 저었다. 그러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어머니는 죽 솥에 빠져죽어 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백 형제는 돌아와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 여느 때보다 죽 맛이 좋았다. 맨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가 죽을 뜨려고 솥을 젓다가 이상한 뼈다귀를 발견했다. 다시 살펴보니 어머니의 뼈가 틀림없었다. 동생은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불효한 형들과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통탄하며 멀리 한경면 고산리 차귀섬으로 달려가 한없이 울다가 그만 바위가 되어 버렸다. 이것을 본 형들도 그제야 사실을 알고 여기저기 늘어서서 한없이 통곡하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졌다. 그러니 영실(靈室)에는 499장군이 있고, 차귀섬에 막내 하나가 외롭게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sHoBv3RUDc 

 

<도로남> 2절 가사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되어 버리는 인생사
정을 주던 사람도 그 마음이 변해서
멍을 주고 가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정 때문에 울고 웃는다
정 때문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https://www.youtube.com/watch?v=c5P8avoITjA 

 

https://www.youtube.com/watch?v=3QHGZ4D-T90 

 

 

 

 

https://www.youtube.com/watch?v=tW6H12C1u8k 

 

 

https://www.visitjeju.net/kr/detail/view?contentsid=CNTS_000000000021615 

 

제주 신화를 찾아서 <설문대 할망의 흔적들>

눈을 행복하게 해주는 제주의 자연. 분주함을 피해 여행 온 이의 마음을 비워주려는 듯 바람이 건네는 위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하늘. 마치 나를 지켜주는

www.visitjeju.net

 

https://ko.wikipedia.org/wiki/%EC%84%A4%EB%AC%B8%EB%8C%80%ED%95%A0%EB%A7%9D

 

설문대할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이다. 지역에 따라 선문대할망, 설문대할망, 설명두할망, 세명뒤할망 등으로 나타나며,《탐라지(耽羅誌)》<담수계편>에는 설만두고(雪慢頭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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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여신이다. 지역에 따라 선문대할망, 설문대할망, 설명두할망, 세명뒤할망 등으로 나타나며,《탐라지(耽羅誌)》<담수계편>에는 설만두고(雪慢頭姑)라고도 표기되어 있다.[1] 또한 18세기 장한철(張漢喆)이 지은 <표해록(漂海錄)>에 사람들이 한라산을 보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선마고(詵麻姑)이다. 마고에 빌었다는 의미로 설문대할망이 한자 선마고로 표기된 것이다.

한국구비문학(韓國口碑文學)에서는 한국에 내려오는 설화 등을 모아 신이담으로 분류하는데 신이담에는 기원담(起源譚) · 변신담(變身譚) · 응보담(應報譚) · 초인담(超人譚) 등의 설화가 전해온다. 설문대할망의 전설은 신이담(神異譚) 중 초인담(超人譚)으로 분류하는 설화이다. 제주에서는 묻혀 죽은 노파라는 뜻에서 `매고(埋姑)할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화와 함께 마고와 비교되는 할망으로 전해진다.[2]

전설

제주에는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이라는 설화가 있다. 설문대할망은 키가 엄청나게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한 발은 성산일출봉에, 또 한발은 현재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졌다. 관탈섬에 빨래를 놓고 팔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빨래를 문질러 빨았다고 한다.

제주의 360여 개의 많은 오름(側火山)들은 설문대할망이 제주를 만들기 위해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를 때 치마의 터진 구멍으로 조금씩 새어 흘러 된 것으로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날라다 부은 것이 한라산이 됐다는 이야기다.

또 설문대할망은 500명의 아들이 있었다. 어느날 설문대할망은 500명의 아들들에게 죽을 끓여주다 그만 발을 헛디뎌 죽에 빠지고 말았다. 저녁에 돌아 온 형제들은 잘 익은 죽을 먹으며 오늘따라 유난히 맛있다며 아우성이었다. 막내아들만은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게 이상해 죽을 먹지 않았다. 죽을 다 먹고나서 밑바닥에서 사람의 뼈가 나온 후에야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게됐다. 어머니의 살을 먹은 형제들과는 같이 살 수 없다며 막내아들은 서귀포 삼매봉 앞바다로 내려가서 슬피울다 외돌개가 되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그 자리에 늘어서서 한없이 울다 지쳐 몸이 굳으면서 기암괴석의 군상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 바위들을 '오백장군' 또는 '오백나한'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곳을 '영실'이라고하고 바위들은 '영실기암'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설문대할망이 제주 사람들에게 명주 100동 (1동은 50필)을 모으면 목포를 잇는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했다.

죽음

설문대할망은 태초에 제주섬 곳곳의 지형을 형성시키는 제주도의 여성 거인신으로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이라는 설화에 따르면 500아들(오백장군 설화)이 먹을 음식(죽)을 만들다가 그 죽에 빠져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큰 키를 자랑한다고 한라산에 있는 물장오리(오름)에 들어섰다가 끝없는 깊이에 빠져 그만 죽고 말았다는 설화도 있으며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도 전해진다.[2]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504100001 

 

살아 숨쉬는 생태공원, 제주 돌문화공원

살아 숨쉬는 생태공원, 제주 돌문화공원

monthly.chosun.com

 

 

 

https://www.youtube.com/watch?v=KkayIGJMe6Q 

 

[군말]

여신이 자기만한 몸집의 할아방을 만나 500명의 장군을 낳아 생계 걱정하다 희생당한 여신을 보며

최재천,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은 이상한 겁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XAvkmaut5g&t=21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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