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Jeju Gotjawal)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로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원시림의 숲을 이룬 곳을 이르는 제주 고유어이다.[1]
삼성혈(三姓穴)은 제주시의 제주 칼 호텔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사이의 송림 가운데에 위치한 3개의 구멍이다. 1964년6월 10일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모흥혈'이라고도 한다. 탐라국 개국의 전설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태고 시대에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의 3신이 이 세 웅덩이에서 태어나 사자(使者)가 데려온 3처녀를 배필로 맞아 살면서 탐라국을 세워 제주도의 개조가 되었다 한다. 현재도 3웅덩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사당(祠堂)·비석이 있다. 1526년 제주목사 이수동이 양·고·부씨의 후손들에게 혈제를 지내게 하면서 치제가 시작되었다. 1698년 삼을나묘를, 1827년전사청을, 1849년숭보당을 세웠다.
첫째는 중국고사를 살펴보면 당나라 중원 땅에 주(朱)씨 성을 가진 사람들과 진(陳)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마을에 수백호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공동묘지도 함께 사용하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해도 서로 다툼 없이 살아가는 우애(友愛)가 대단한 군자(君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일컬어 주진촌(朱陳村)이라 하였다. 이들 중 주씨성을 가진 아들과 진씨성을 가진 딸이 한마을에서 혼인(婚姻)을 하게 되었는데 주씨 성을 가진 아들의 이름이 사(査)이고, 진씨 성을 가진 딸의 이름이 돈(頓)이였다. 그래서 사돈(査頓)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하는 고사이다.
당나라 천재시인 백거이(호 낙천) 선생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주진촌을 방문하여 보니 과연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이 사는 곳이라 감탄하여 장문(長文)의 5언 고시형 시(詩) 주진촌시를 지어 오늘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교산 허균은 점필재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꼰 것을 두고 김종직론이라는 글을 통해 조롱한다. 허균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그 밑에서) 벼슬을 했다면 그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라고 비꼬았다.
김종직론(金宗直論) - 교산 허균
천하에 이록(利祿)이나 취하고 자신의 명망을 훔치는 자가 있는데, 세상에서 군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믿을 것인가? 나는 믿지 못한다고 말하겠다.왜 그게 믿어지지 않을까? 자기 것으로 해버리거나 훔친다면, 비록 도덕(道德)과 인의(仁義)에서 나왔더라도 거짓 짓임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록과 명망이겠는가. 이미 이록을 취하였고 명망을 훔쳐서 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의 영화와 녹봉을 누린다면, 정말로 자기의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자기의 직분으로 당연히 할 일에 맞도록 하여야 그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보완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영화와 녹봉은 나의 뜻이 아니다.” 하면서, 능청스럽게 한갓 그 수레를 붉게 꾸미고 그 인끈을 붉게 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그의 죄악은 죽음을 당해도 용서받지 못하리라. 김종직은 근세에 이른바 대유(大儒)다. 젊은 시절에는 벼슬하려고도 않더니, 세조(世祖)가 과거에 응시하도록 다그치니 부득이해서 과거에 올랐으며, 또한 시종(侍從)의 직책에 드나들더니 벼슬이 높아졌다. 그러면서는 모친이 늙었으므로 억지로 벼슬한다고 일컬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세상을 마쳤으나, 오히려 벼슬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그의 문인(門人) 김굉필(金宏弼)이 더러 그가 시정책을 건의하지 않음을 간(諫)하면, 이어서, "벼슬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건의하고 싶지 않다."라고 하였다. 김종직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치며 능청스럽게 한갓 수레를 붉게 하고 인끈을 붉게 한다고 말해지는 바의 사람이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을 당하여, 김종직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 무리들처럼 녹을 먹던 사람이 아니었고, 김시습(金時習)처럼 평소에 은택(恩澤)을 입었던 것도 없었다. 다만 시골의 변변찮은 한 선비여서 옛 임금 단종(端宗)을 위하여 죽어야 할 의리도 없었으니, 그가 벼슬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본래 위선이었다. 비록 위선이었지만 이미 뜻을 세웠다면, 임금이 아무리 다그치더라도 죽기를 맹세하고 가지 않았어야 옳았다. 그런데 화(禍)를 두려워하여 억지로 나온 것처럼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해서는 붓을 귀에 얹고 임금의 말을 기록했으며, 사책(史策)을 끼고 고운 털자리에 엎드리기도 하였다. 또 고을을 맡아서 그의 어머니를 봉양했으니, 그가 이록을 취했던 것은 정도를 넘었었다. 또 명호(名號)를 훔치고 싶어 남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어버이가 있다. 그러나 끝내는 서산(西山)의 뜻을 지키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미 어머니의 복제(服制)를 벗고도 응교(應敎) 벼슬을 받았었고, 10년 동안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뛰어올랐다. 그만 쉴 만도 하나 오히려 더 탐내며 떠나가지 않았다. 책임을 완수치 못하면서 직책상 당연히 해야 할 것도 하지 않다가, 문인(門人)이 그 점을 지적해 주면 모면하려고 꾸며대는 말로써 대답하였다. 이게 과연 군자라고 여길 만한가? 이런 속임수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지금까지 계속하여 그 사람을 칭찬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일까? 내가 가만히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았더니, 가학(家學)을 주워모으고 문장 공부를 해서 스스로 발신(發身)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하고 마음은 교활하여 그의 명망을 높이려고 한 세상 사람을 용동(聳動)시켰고, 임금의 들음을 미혹되게 하여 이록을 훔치는 바탕으로 삼았다. 이미 그러한 꾀를 부렸지만 자기의 재능을 헤아리니 백성을 편하게 하고 구제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넉넉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는 자신의 졸렬을 감추는 수단으로 하였으니 그것 또한 공교로웠다. 그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짓고 주시(酒詩)를 기술했던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 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기나 하였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 죽은 뒤에 화란을 당했던 것은 불행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그의 간사하고 교활했던 것에 화내서 사람의 손을 빌어다가 명백하게 살륙한 것이 아닐는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그의 형적(形迹)은 살펴보지 않고, 괜스레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치켜 올려 대유(大儒)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때문에 특별히 나타내어 기록한다.
허균의 풍자는 당대의 논란거리가 되어 정조 때까지 허균의 서적이 불온서적으로 몰리는 원인이 된다.
「홍길동전」은 작품 경향, 사회의식, 역사의식에 있어서 「금오신화」에서 마련된 현실주의적 경향, 강렬한 사회 비판적 성격,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이어받아, 후대의 연암소설(燕巖小說)과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넘겨주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소설사적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