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부사의품(不思議品)

          그 때 사리불(舍利弗)은 이 방안에 앉을 자리[牀座]가 없는 것을 보고 이렇

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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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많은 보살과 수많은 대제자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 것인가?'
      장자 유마힐은 그러한 마음을 알고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도대체 그대는 진리[法]를 구하기 위하여 온 것입니까, 아니면 앉을 자리를 원하는 겁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저는 진리를 위해서 왔지, 앉을 자리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유마힐은 말하였다.
      "알았습니다, 사리불이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신명[軀命]도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앉을 자리에 집착해서야 되겠습니까? 또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구하지 않으며, 계(界)나 입(入) 따위를 구하지 말아야 하며, 욕계·색계·무색계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여,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부처[佛]에게 집착하여 구하지 말고, 부처의 가르침[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승단[僧]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괴로움을 알고자[見苦] 함이 없이 구하고, 집착을 끊음[斷集] 없이 구하며, 깨달음을 다함[盡證] 없이 구하고, 깨달음에의 길을 닦고자[修道] 함이 없이 구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진리에는 무의미한 희론(戱論)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는 당연히 괴로움을 알고, 집착을 끊고, 깨달음의 경계에 이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닦는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의미한 희론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진리[法]는 적멸(寂滅, upanta)입니다. 만약 생멸(生滅)을 (반복하면) 이는 생멸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번뇌에 물듦이 없는[無染] 것입니다. 만일 진리 내지는 열반에 집착해 물들면[染] 그것은 오염

된 집착[染着]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대상[行處]이 없습니다. 만약 진리를 대상으로서 취급하면 이는 곧 대상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취사(取捨)가 없습니다. 만약 진리를 얻거나 버린다고 하면 이는 곧 취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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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는 (그를 거두어들이는) 처소가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처소에 집착하면 그것은 처소에 집착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형상이 없는 것[無相]입니다. 만약 형상[相]으로서 이를 분별하고자 하면 그것은 형상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머물 만한 곳이 없습니다 . 만약 진리에 머물고자 한다면 이는 진리에 머물고자 하는 것[住法]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보고, 듣

고, 지각(知覺)하며, 식별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보고, 듣고, 지각하며, 식별해 알고자 하면, 그것은 보고, 듣고, 지각하며, 식별해 아는 (것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인연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 것[無爲]입니다. 만약 만들고자 하면 이는 만들어지는 것[有爲]을 구하는 것이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리불이여, 그러므로 만약 진리[法]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법에서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같이 말했을 때 5백 명 천자들 모두는 모든 사물[法]에 있어서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는) 법안이 청정해짐[法眼淨]을 얻었다.
      그 때 장자 유마힐은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문수사리여, 그대는 무량천만억(無量千萬億) 아승기(阿僧祇)나 되는 부처님의 나라를 돌아보았는데, 어느 부처님의 나라에 말할 수 없이 훌륭한 공덕이 이루어진 사자좌(師子座, Si

hsana)가 있습니까?"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거사님, 동쪽으로 36항하(恒河)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나라들을 지나서 수미상(須彌相, Merudhvaj)이라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 나라 부처님은 수미등왕(須彌燈王, Merupradparaja)이라 이름하고, 지금 현재 그 부처님의 신장은 8만4

천 유순(由旬)이며, 그 사자좌(師子座)의 높이도 8만 4천 유순으로 장엄된 아름다움이 제일입니다."

      그 때 장자 유마힐이 신통력을 발휘하자마자 그 나라의 부처님께서 3만 2천의 사자좌를 유마힐의 방에 들여보내셨는데, 그 사자좌들은 한결같이 높고 넓고 장엄하고 깨끗하였다. 여러 보살과 대제자들과 제석천·범천·사천왕 등이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 방은 넓고도 커서 이 3만 2천의 사자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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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를 다 받아들이고도 거리끼거나 궁색함이 없었다. 그리고 비야리성과 염부제(閻浮提, Jambudvpa) 사천하(四天下)도 좁아지거나 답답해짐 없이 어디를 보아도 전과 같았다.
      그 때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말했다.
      "문수사리여, 보살과 대제자들과 함께 사자좌에 올라앉으십시오. 저 사자좌에 앉으신 부처님 크기만큼 그대의 몸을 갖추어야 합니다."
      신통력을 얻은 보살은 곧 스스로의 몸을 바꿔서 4만 2천 유순으로 변하게 해서 사자좌에 앉았으나, 새로 발심한 보살[新發意菩薩]이나 대제자들은 아무도 올라갈 수 없었다. 그 때 유마힐은 사리불에게 권하였다.
      "사자좌에 오르시오."
      사리불이 말하였다.
      "거사여, 이 자리는 높고 넓어 제가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유마힐이 말하였다.
      "알았습니다, 사리불이여. 수미등왕여래(須彌燈王如來)에게 예배하면 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 발심한 보살과 대제자들이 수미등왕여래에게 예배하자 곧 사자좌에 앉을 수 있었다.
      사리불이 말하였다.
      "거사님, 전에 없던 희귀한 일입니다. 이렇게 작은 방에 이같이 높고 넓은 사자좌를 수용하여도 비야리성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고, 또 염부제의 마을과 성읍과 그리고 사천하의 제천·용·귀신의 궁전이 좁아지거나 답답해 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마힐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제불보살에게는 불가사의(不可思議)라는 이름의 해탈이 있습니다. 만약 보살이 이 해탈에 머무르면, 높고도 넓은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어도 그 겨자씨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고, 수미산도 예전과 같기 때문이며, 사천왕이나 도리천(忉利天)과 같은 제천(諸天) 자신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장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10)만이 수미산이 겨자씨 안에 든 것을 알 뿐입니다
      . 이것을 불가사의한

 

      10) 나집은 '응도자(應度者),' 지겸은 '이인(異人),' 현장은 '신통력(神通力)의 조복자(調伏者),' 티베트 역에서는 '신통에 의하여 화한 타인(他人)들'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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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탈법문에 머문다고 합니다.
      또 사대해(四大海)의 바닷물을 하나의 털구멍에 넣어도 물고기와 자라와 큰 자라, 악어 그 밖의 물에 사는 동물을 괴롭히는 일이 없고, 그 대해는 본래 모습 그대로이며, 용·귀신·아수라들도 자신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이들을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또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는 보살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움켜쥐기를 마치 도공이 흙덩이를 오른쪽 손바닥에 움켜쥐고 항하(恒河)의 모래알과 같이 수많은 세계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안에 사는 중생은 자기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며,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도 그 사람들에게는 갔다 왔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지 않고, 이 세계의 본래 모습은 예전과 같습니다.
      또한 사리불이여, 혹 어떤 중생이 이 세상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기를 좋아하고 제도해야 할 사람이라면, 그 보살은 곧 7일을 1겁으로 늘려 그 중생에게 1겁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혹은 중생이 오래도록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제도해야 할 자가 있으면 보살은 곧 1겁을 7일로 줄여서 그 중생에게 7일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사리불이여,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르는 보살은 일체 불국토의 장엄을 한 나라에 모아 중생에게 보여 줍니다. 또 보살은 한 불국토의 중생을 오른쪽 손바닥에 올려놓고 시방세계를 날아다니며 일체의 불국토를 보여 주지만, 본래 있던 곳을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리불이여, 시방의 중생들이 제불께 드릴 공양거리를 하나의 털구멍 속에 다 볼 수 있게 하며, 또 시방의 세계에 있는 태양·달·성좌(星座)를 하나의 털구멍 안에 나타나게 하여 널리 보여

줍니다.

            또 사리불이여, 보살은 시방세계의 모든 바람을 남김없이 입 안에 빨아들여도 몸을 상하는 일이 없으며, 수많은 나무들이 넘어지거나 꺾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 또 시방세계의 세월이 다하여[劫盡]11)

불타 없어질 때, 모든 불길을

 

      11) 이 말은 세계의 성립과 괴멸의 과정이 끝났다고 하는 뜻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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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뱃속에 넣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길이 자기 뱃속으로 들어오지만, 아무런 해를 입지는 않습니다. 또 아래쪽[下方]으로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제불 세계를 지나 한 불국토를 들어 위[上方]로 항하의 모래알보다도 수많은 불국토를 지나 (그 부처님 나라를 그곳에) 두는 것이 마치 대추나무 잎사귀 하나를 바늘 끝 위에 올려놓아도 흔들리는 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 사리불이여,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는 보살은 신통력으로 부처님의 모습[佛身]을 나타낼 수가 있고, 성문의 모습을 나타내거나, 벽지불의 모습을 나타내거나, 혹은 제석천의 모습을, 혹은 범천의 모습을, 혹은 세주천(世主天)12)의 모습을, 혹은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n)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이 내는 높은 소리[高音]·중간 소리[中音]·낮은 소리[低音] 등 (온갖 소리를) 부처

님의 음성[佛音]으로 바꾸어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공(空)하고, 무아[無我]를 말하는 소리로 변하게 하고, 또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온갖 가르침을 그 소리를 통해 널리 들을 수 있게 합니다.

      또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이 내는 높은 소리[高音]·중간 소리[中音]·낮은 소리[低音] 등 (온갖 소리를) 부처님의 음성[佛音]으로 바꾸어 무상(無常)하고, 괴롭고[苦], 공(空)하고, 무아[無我]를 말하는 소리로 변하게 하고, 또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온갖 가르침을 그 소리를 통해 널리 들을 수 있게 합니다.
      사리불이여, 내가 지금 보살의 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에 관하여 간략하게 이야기하였지만, 만약 자세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영원한 세월[劫]이 다하여도 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 대가섭(大迦葉)이 보살의 불가사의한 해탈법문을 설하는 것을 듣고 미증유하다고 찬탄하며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어느 사람이 장님 앞에 여러 가지 색상(色像)을 그려 보여 주어도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모든 성문은 이 불가사의한 해탈의 법문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그 누가 이를 듣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어찌하여 이 마음[根]을 영원히 끊고서, 이 대승에 있어서 이미 썩은 종자[敗種]13)와 같아져 버렸습니까? 일체의 성문은 누구

나 이 불가사의한 해탈의

 

      12) 사천왕, 혹은 범천, 대자재천이라고도 한다. 색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세계의 주(主)라고도 하며, 혹은 욕계의 제6천(第六天)이라고도 한다.
      13) 자기만의 깨달음에 정진한 성자나, 깨달았어도 남에게 설하려고 하지 않는 부처를 이에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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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문을 들으면 반드시 큰 소리로 목놓아 울고, 그 울음소리는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며, 일체의 보살은 반드시 기쁨에 넘쳐 이 가르침[法]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보살로서 불가사의한 해탈의 법문을 믿고 아는 사람이 있으면 모든 마군의 무리로 이를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가섭이 이같이 설하였을 때 3만 2천의 천자들은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
      그 때 유마힐은 대가섭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시방의 무량아승기의 세계에서 마왕이 된 자의 대부분은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르는 보살들입니다. 그들은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마왕의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 가섭이여, 시방의 무량한 보살에게 손·발·귀·코·머리·눈·뇌수(腦髓)·피·살·가죽·뼈를 구걸하고, 마을·거리·아내·자식·하인·하녀와 코끼리·말수레나 온갖 탈것들, 금·은·유리·차거(車)·마노(馬瑙)·산호·호박·진주·의복·음식 등을 구걸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불가사의한 해탈에 머무는 보살들입니다. 그들은 훌륭한 방편으로 당

신들을 시험하고, 이로 하여금 마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계에 머문 보살에게는 위엄과 덕의 힘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온갖 핍박당하는 모습을 나타내 이 같은 곤란한 일을 중생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범부는 하열하기 때문에 힘이 없으므로 이같이 구도자에게 강요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비유하자면 용이나 코끼리가 땅을 차며 힘차게 달려올 때 당나귀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계에 머무는 보살의 지혜의 방편인 것입니다."

 

 

유마힐소설경 중권

 

      요진삼장 구마라집 역



5. 문수사리문질품(文殊師利問疾品)

      그 때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文殊師利, Majur)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 웃어른[上人]을 저는 상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실상(實相)에 깊이 통달하고, 진리의 요지를 훌륭하게 설하며, 변재에 걸림이 없고, 지혜는 막힘이 없습니다. 모든 보살에게 필요한 작법[法式]을 모두 알고 있으며, 모든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공덕[秘藏]을 모두 다 간직하고 있으며, 온갖 마군을 항복시키고 신통력을 마음대로 부리며, 그 지혜와 방편을 모두 원만히 이루었습니다.1)

그렇지만 부처님의 거룩한 뜻[聖旨]을 받들어 그를 찾아가 문병하겠습니다. 이에 모인 많은 보살과 대제자들·제석천·범천(梵天)·사천왕(四天王) 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모인 많은 보살과 대제자들·제석천·범천(梵天)·사천왕(四天王) 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제 두 보살[大士]이신 문수사리와 유마힐이 함께 이야기하면 반드시 묘법을 설할 것이다.'
      이 때에 8천의 보살들과 5백의 성문(聲聞)들, 백천의 천인들 모두가 뒤따라가고자 원하였다. 그래서 문수사리는 수많은 보살과 대제자와 천인들이 공경

 

      1) 이하에 현장 및 티베트 역에 있는 구절이 빠져 있다. 현장 역에 의하면 "이미 어떠한 문답에도 매듭을 지을 수 있으며, 자신이 있으며, 자유자재하여 어리석은 자의 변설로써 대적할 수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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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둘러싼 가운데 비야리 대성으로 들어갔다.
      그 때 장자 유마힐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문수사리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으니, 신력(神力)으로 방을 깨끗이 비워야겠다.'
      그리고는 방안에 있는 것을 치우고 시자(侍者)들까지도 내보내고, 텅 빈 방안에는 오직 하나의 침상(寢床)만을 놓아두고, 앓는 몸을 눕혔다. 문수사리가 그 집에 들어가자 방안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고, 뎅그라니 침상 하나만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때 유마힐은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문수사리여. 온다고 하는 상(相)이 없이 왔고, 본다고 하는 상이 없이 보았습니다."
      문수사리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거사님. 만약 와 버렸다면 다시는 오지 않고, 만약 가 버렸다면 다시는 가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온다고 하지만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고, 간다고 해도 어디로든 가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보이는 것은 또다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이야기는 그만두겠습니다.
      거사님, 이 병은 어찌 견딜 만하십니까? 치료가 되어 병이 덜함이 있습니까, 더하지는 않았습니까? 세존께서는 매우 걱정하시며 문병하라 저를 보내셨습니다. 거사님, 이 병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또 얼마나 오래되었고,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겠습니까?"
      유마힐이 말했습니다.
      "어리석음[痴]과 탐심[有愛]으로부터 나의 병은 생겼습니다. 일체 중생이 병들어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일체 중생의 병이 사라진다면 그 때 나의 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生死)에 들어섰으니,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생이 병에서 떠난다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장자(長者)에게 외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병에 걸리면 그 부모도 병을 앓고, 만약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도 낫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사랑하기를 내 자식 대하듯 합니다. 중생이 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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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앓으면,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의 병도 낫습니다."
      또 말했습니다.
      "이 병이 무엇으로 인하여 생겨났느냐면, 보살이 병든 것은 드넓은 자비[大悲]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거사님, 이 방은 어째서 텅 비어 있으며, 시자도 없습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모든 부처님의 불국토도 모두 공합니다."
      또 물었다.
      "무엇을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하였다.
      "공(空)하기 때문에 공하다2)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공(空)하다고 합니까?"
      "공을 분별할 수 없기[無分別] 때문에 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까?"
      "분별하는 것도 공합니다."

 

      "그렇다면 공은 어디서 구해야만 합니까?"
      "그릇된 62견(見)에서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62견은 어디서 구해야 합니까?"
      "모든 부처님들께서 해탈하신 곳에서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부처님들의 해탈은 어디서 구해야만 합니까?"
          "일체 중생의 마음가짐[心行, cittaprva-carita]에서 구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 그대는 왜 시자가 없느냐고 물었지만, 모든 마군과 온갖 외도들이 모두가 나의 시자입니다. 왜냐 하면, 온갖 마군들은 생사를 좋아하지만,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고, 외도는 여러 가지 그릇된 견해를 좋아하지만, 보살은 이 그릇된 견해에 동요되지 않기 때문입니

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2) 이 부분의 티베트 역은 "공성(空性)이므로 공이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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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사님의 병세는 어떤 상(相)이 있습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나의 병은 병상이 없으므로[無形]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병은 몸과 관계된 병입니까, 아니면 마음과 관계된 병입니까?"
      "몸과는 관계된 병이 아니니, 몸과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과 관계된 병도 아니니, 마음은 허깨비[幻]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地)·수(水)·화(火)·풍(風) 4대(大)에서 어느 것이 병든 것입니까?"
      "이 병은 지대(地大)의 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대를 떠나서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수대·화대·풍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병은 4대로부터 생기며, 중생에게 이러한 병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도 병든 것입니다."
      그 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은 병든 보살을 어떻게 위로해야만 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몸은 무상하다고 설하여도 그 몸을 싫어하고 버리도록[厭離] 설하지 않고, 몸에는 괴로움이 있다고 설하여도 열반만 좋아하도록 설하지 않으며, 이 몸은 무아(無我)라고 설하여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 것을 설하고, 이 몸은 공[空寂]하다 설하여도 언제까지나 영원토록 공하다[畢竟寂滅]고 설하지는 않습니다. 전에 범한 죄를 뉘우치도록 설하여도 먼 과거에 몰입하라고는 설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병을 헤아려 남의 병을 마음 아파하고, 과거 무수겁(無數劫)에

걸친 괴로움을 알고서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마음먹습니다. (자신의 병을 헤아려) 지난날 닦은 공덕을 생각하며, 바른 생활을 염원합니다. 근심과 괴로움이 생기지 않도록 해서 항상 정진하는 마음을 내며, 훌륭한 의왕(醫王)이 되어서 온갖 중생의 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발원합니다. 보살은 이같이 병든 보살을 위로하고 기쁨에 넘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거사님, 병든 보살은 어떻게 해서 그 마음을 다스리고 항복 받아야[調伏] 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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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든 보살은 반드시 이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가 전생의 망상(妄想)·전도(顚倒)·여러 가지 번뇌로부터 생긴 것이지 (나의 몸에는 병을 앓을 만한) 실체로서의 존재[實法]는 없다는데, 어떻게 병이 걸렸단 말인가? 왜냐 하면, 이 몸은 4대(大)가 결합한 것이므로 몸이라고 임시로 이름[假名]하였을 뿐이지, 이 4대에 주인[主, adhipati]은 없고, 또한 몸에는 나[我,

tman]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병이 생기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著我,tmbhinivea]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이같이 병의 근본을 알았으니, 곧 나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我想]도, 중생이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衆生想]도 없애 버리고, 물질이라는 생각[法想, dharma-saja]을 일으켜야겠구나.'

      또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몸은 수많은 물질적인 것[法]이 합쳐져 이루어져 있다. 생겨날 때에는 다만 물질적인 것만이 생기고, 멸할 때에도 물질적인 것만이 멸한다. 또 이 물질적인 것(에는 마음이 없으므로) 서로 아는 일도 없으며, 생할 때에도 내가 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멸할 때에도 내가 멸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병든 보살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생각[法想]을 떠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생각도 그릇된 집착[顚倒, viparysa]이다. 이 그릇된 집착이야말로 마음의 커다란 병이니, 나는 반드시 이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어떠한 것을 떠난다 하는가? 그것은 나라고 하는 것과 내 것[我所]이라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라는 것과 내 것이라는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가? 그것은 두 개의 (상대

적인) 법(法)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두 개의 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인가? 그것은 주관[內]·객관[外]의 온갖 존재를 마음에 두지 않고 평등한 마음을 행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평등인가? 나[我]와 열반(涅槃)과 함께 평등하다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라는 것과 열반의 둘은 모두가 자성(自性, svabha)이 공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공하다 하는가? 다만 이름과 문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 같은 두 가지 것[法]은 변함이 없는 실체성[決定性]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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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함을 얻으면 다른 병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공한 병[空病]만이 남지만, 이 공(空)과 병(病)도 또한 공인 것이다.'
          이 앓고 있는 보살은 (이미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感受)하는 일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여) 온갖 괴로움과 즐거움을 감수하며, 또 부처님의 모든 공덕[佛法, pariprabuddha dharma]을 아직 다 갖추지 않고, 또 모든 감수작용[受, v

edana]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 열반을 증득해야 합니다. 설령 자기의 몸이 괴로움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죄의 과보로) 괴로운 삶의 길에 떨어져 있는 중생[惡趣衆生]들을 생각하고 무한한 자비심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미 (괴로움을) 조복하였으므로, 일체 중생들의 고통도 조복해야만 한다.'
          다만 그 병은 제거하지만 물질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으며, 병의 근원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이를 가르쳐 이끌어야 하니, 무엇을 병의 근원이라고 하는가 하면, 대상을 따라 마음이 일어나는 것[攀緣, adhylambana]이니, 마음이 대상을 따라 일어나면, 곧 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마음이 일어나는 대상으로 삼는가? 삼계를 대상으로 삼습니

다. 어떻게 이 마음이 일어나는 대상을 끊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아야[無所有, anupalabdhi] 합니다. 만약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으면, 그 때 마음은 대상을 따라서 일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요? 상대적인 생각[二見, ddvaya]을 떠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상대적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주관을 보는 견해[內見, adhytmadi], 객관을 보는 견해[外見, bahirdhd<IMGSRC="http://ebti.dongguk.ac.kr/images/k0216.gif"/>i]이니, (이들을 떠나는 것이)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無所得]입니다.

      문수사리여, 이것을 앓고 있는 보살이 그의 마음을 조복한다고 하는 것이며, 또 노·병·사의 괴로움을 끊어 없앤다고 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깨달음[菩提]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미 닦고 다스렸던 것이 지혜로운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 비유하면 원수와 싸워 이겨야만 용사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나와 남의) 늙음과 병과 죽음을 함께 없애는 자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앓고 있는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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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이 병이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닌 것과 같이, 중생의 병도 진실한 것도 실제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할 때에 모든 중생들에 대해서 애욕에 물든 마음[愛見]으로 자비심을 일으켰다면 곧 그러한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살은 밖으로부터 주어진 번뇌[客塵煩惱]3)를 끊어 없애고 자비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애욕으로 물든 자비[愛見悲]에는 생사에 피곤해 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만약 이 (애욕에 물든 마음을) 떠날 수가 있으면 피곤해 하고 싫어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어떠한 곳에 태어나더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愛見]에 덮이지 않을 것입니다. 태어나는 곳에 속박되는 일이 없고, 중생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하고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만약에 자기가 (번뇌에) 결박되어 있으면서 남의 결박을 풀어 준다는 것,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결박되어 있지 않아야 남의 결박을 풀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반드시 (번뇌의) 결박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속박이라 하며, 무엇을 해탈이라고 합니까? 참선의 기쁨[禪味]에 집착하는 것이 보살의 속박[無方便慧縛, upynu ptta-praj

="http://ebti.dongguk.ac.kr/images/k0223.gif"/>]이요, 훌륭한 방편을 가지고 (참선의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이 보살의 해탈입니다.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며, 방편이 있는 지혜는 해탈입니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속박이며, 지혜가 있는 방편은 해탈입니다.무엇을 가지고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고 합니까?

            보살이 애욕에 물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공(空,

unyat), 무상(無相, nimitta), 무작(無作, apraihita)의 (세 가지 해탈문)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조복하는 것을 방편이 없는 지혜는 속박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有方便慧解, upyoptta-prja]이라고 합니까?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공·무상·

3) 사람의 본성은 청정하며, 번뇌는 실제로는 본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번뇌를 마치 주인에 대해 손님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무작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스스로를 조복시키지만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음을 방편을 갖춘 지혜의 해탈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無慧方便縛, prajnupttopya]이라고 합니까?
      보살이 탐욕과 분노와 사견(邪見) 등 온갖 번뇌에 얽혀 있으면서 많은 선근(善根)을 심고자 하는 것을 지혜가 없는 방편의 속박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지혜를 갖춘 방편의 해탈[有慧方便解, prajopttopya]이라 합니까?
      탐욕과 분노와 사견 등 온갖 번뇌를 떠나서 많은 선근을 심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회향(廻向)하는 것을 지혜를 갖춘 방편의 해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수사리여, 저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은 반드시 제법(諸法)에 대해 이같이 바르게 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몸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공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아는 없다[非我]고 관하는 것, 이를 지혜라고 이름합니다. 이 몸은 병들었어도 항상 생사 속에 있으면서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며, 피곤해 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 이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또 자기 몸을 관하기를, 몸에서 병이 떠나지 않고 병이 몸을 떠나지 않아 이 병이나 이 몸이 새로 생긴 것도, 오래 묵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관하는 것, 이를 지혜라고 이름합니다. 설령 몸은 병들

었어도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 이를 방편이라고 합니다.

      문수사리여, 병을 앓고 있는 보살은 마땅히 이같이 그 마음을 조복해야 합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마음을 다스리지 않겠다는 마음[不調伏心]에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만약 조복되지 않는 마음에 그대로 머문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의 법이며, 만약 조복한다는 마음에 머문다면 이는 성문(聲聞)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언제나 조복하는 마음에도, 조복하지 않는 마음에도 머물러 집착[住]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법을 떠나는 것이 보살행이고, 생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더러운 행위[汚行]를 하지 않고, 열반에 머물러 있어도 영원히 멸도해 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보살행이며,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자나 어진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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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고, 때묻은 행도 아니고, 청정한 행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며, 모든 마군을 초월한 행이지만, 아직도 여러 마군을 항복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4)이 보살행이고, 일체를 남김없이 아는 지혜[一切智, sarvaj

/>jna]를 구하지만, 때가 아닌 때에 얻고자 바라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또 비록 제법이 공하여 불생(不生)이라고 관하고는 있지만, 깨달음의 경계[正位]에 들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12연기[因緣]를 관하고 있으면서도 온갖 사견을 가진중생들 속에 들어가는 것5)이 보살행이며, 중생을 자비심으로 감싸안고는 있어도 애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멀리 떠나 있기[遠離]를 즐겨 하지만 몸과 마음의 업이 다한 경계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삼계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법성(法性)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공을 관하면서 수행하지만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는 것이 보살행이며, 무상(無相)의 도리를 알고 행하지만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무작(無作)의 도리를 알고 행하지만 생(生)을 받아 세간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무기(無起, anabhisaskra)의 도리를 알고 살지만, 온갖 선행(善行)을 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6바라밀(波羅蜜)에 정진하지만 중생의 마음[心]과 그 마음의 작용[心數法]6)을 두루 아는 것이 보살행이며, 6통(通)을 행하면서도 번뇌[漏]를 끊어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4무량심(無量心)을 행하지만, 범천의 세계에 태어나려고 탐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며, 선정과 해탈과 삼매7)를 행하면서도 선의 즐거움만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4념처(念處, smtyupasthna)를 행하면서 신체[身, kya]와

 

      4) 보살행이 모든 장애를 극복했다고 하는 것에는 번뇌의 극복과 수도하여 성불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의 소행이 있다. 이 두 가지를 극복하였음에도 계속해서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은 본래 보살은 중생의 제도에 뜻이 있고 자기만의 수행에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장애는 자신의 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장애이며, 후자의 장애는 중생제도 과정에서 생기는 장애이다. 따라서 이 후자의 장애는 중생이 있는 한 무한히 계속된다.
      5) "사견 속에 들어간다"를 지겸·현장·티베트 역은 나집과 반대로 번역하고 있다. 지겸 역을 예로 들면 "온갖 견해를 가졌음에도 무욕(無欲)하다" 하였다.
      6) 심소(心所)와 같은 것, 즉 마음에 소속된 여러 가지 정신작용이다.
      7) 선정 이하를 나집은 "선정(禪定)·해탈(解脫)·삼매(三昧)"라고 번역했고, 현장은 "정려(靜慮)·해탈(解脫)·등지(等持)·등지제정(等至諸定)," 티베트 역은 "선정(禪定)과 평등(平等)과 삼매(三昧)에 드는 것"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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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受, vedan]과 마음[心, citta]과 존재[法, dharma]를 영원히 떠나고자 하지 않는 것8)이 보살의 행이며, 4정근(正勤, samyakpradhna)행하면서도 (그 과보를 받지 않고) 심신의 노력을 버리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4여의족(如意足,ddhipda)을 얻고자 행하면서도 이미 자유자재한 신통을 얻고 있는 것이 보살행이고, 5근(根)을 행하면서도 중생의 제근(諸根)의 예리하고 둔함을 아는 것이 보살행이며, 5력(力)을 발휘하면서도 부처님의 10력(力)을 구하는 것이 보살행이고, 7각지(覺支, saptabodhyanga)에 정진하면서도 부처님의 지혜를 잘 분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8정도(正道, ryangi-kamrga)를 수행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불도(佛道, buddhamrga)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지관(止觀) 37도법을 수행하면서도 결코 적멸(寂滅, praamana)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고, 제법(諸法)은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뛰어난 상호(相好)로 스스로의 몸을 장엄하는 것이 보살행이며, 성문이나 벽지불에게 갖추어져 있는 위의(威儀)를 나타내면서도 (중생을 버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 보살행이고, 제법이 궁극적으로는 공이라는 청정상[諸法究竟淨相, atyantavisddhalakana]9)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연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며, 또 제불의 국토는 영원히 적정(寂靜)하며 공임을 알고 있으면서도갖가지 청정한 불국토를 나타내는 것이 보살행이고, 불도를 얻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의 경계에 들면서도 더욱 보살의 수행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이같이 설했을 때, 문수사리가 데리고 온 많은 대중과 그 중에서 8천의 천자들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

 

        8) 이 부분을 현장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멀리하는 행위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 일치하고 있으나, 티베트 역에서는 "신·수·심·법을 진실로 행처(行處)로 하지 않는다" 하여 뜻이 반대다.

 9) 색(色)이나 형(形)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4. 보살품(菩薩品)

      그 때에 부처님께서 미륵보살(彌勒菩薩)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미륵보살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도솔천왕(兜率天王)과 그 권속들을 위하여 불퇴전지(不退轉地)의 수행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미륵이여, 세존께서는 그대에게 수기(授記)를 주시기를 이제 한 생(生)만 더 태어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다는데, 어느 생(生)에서 수기를 받으렵니까? 과거의 생입니까, 미래의 생입니까, 현재의 생입니까? 만약 과거의 생이라고 한다면, 그 과거의 생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만약 미래의 생이라고 한다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만약 현재의 생이라고 하여도 그 현재의 생은 (끊임없이 流動하고 있어서) 한 군데 머무르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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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비구여,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고 늙으며 죽어가고 있지36)않습니까? 만약 무생(無生)37)의 경지에서 수기를 받은 것이라면, 정위(正位)38)이므로, 이 정위에서는 수기를 받는 일도 없을 것이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미륵이여, 어느 생에서 수기를 받으려 합니까? 여여(如如)한 경지가 생기는 것으로부터 수기를

받으렵니까, 아니면 여여한 경지가 멸(滅)하는 것으로부터 수기를 받으려 합니까? 만약 여여한 경지가 생기는 것으로써 수기가 이루어진다면 여여는 거기에는 생기는 일이 없으며, 만약 여여한 경지가 멸하는 것으로써 수기가 이루어진다 해도 여여에는 멸(滅)이 없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여여하고,39)일체법이 여여하며, 모든 성인과 현자도 여여하니, 그대 미륵까지도 여여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 미륵이 수기를 얻었다고 하면, 일체 중생도 예언을 얻은 것이 됩니다. 왜냐 하면 여여에 있어서는 두 가지 다른 것이 아니기[不二不異] 때문입니다. 만약 그대 미륵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면, 일체 중생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일체 중생 그대로가 깨달음의 실상[菩提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대 미륵이 깨달음의 경계[滅度, parinirvna]에 이른다고 한다면, 일체 중생도 깨달음의 경계에 이를 것입니다. 왜냐 하면 제불(諸佛)께서 일체 중생이 필경 깨달음[寂滅]을 얻고,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며, 다시는 멸하는 일이 없다40)고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륵이여, 이러한 (나는 장차 깨달음을 얻으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것을 설하여 천상(天上)의 신들을 유혹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다는 것도 없고, 또한 그러한 마음이 후퇴한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36) 티베트 본에서는 "이와 같이 한 찰나에 그대는 태어나고, 죽고, 가고, 다시 온다"고 되어 있다.
      37) anutpda로 생멸(生滅)하는 미혹의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38) niymvakrnti로 생멸을 초월하는 것은 영원불변한 깨달음을 얻는 경지이다.
      39) 이 부분은 티베트 본에 의하면 "일체 중생이 여여하다(Sarva Sattvatathat)"이다.
      40) 이 대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역본을 보면, 지겸은 "불(佛)은 중생을 버리고 혼자만 깨닫지[滅度] 않는다. 반드시 어리석은 중생을 깨닫게 한다" 했으며, 티베트 역에서는 "중생이 모두 깨닫지[涅槃] 않으면 불은 깨닫지 않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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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이여, 이 모든 천상의 신들로 하여금 보리(菩提, bodhi)를 분별하는 생각[見]을 버리게 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보리라는 것은 몸[身]으로 얻을 수도 없는 것이며, 마음으로도 얻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멸(寂滅)이야말로 보리이니, 모든 모습[相]을 멸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관하지 않는 것이41)

보리이니, 온갖 대상과의 관계[緣]를 떠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보리이니,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憶念]이 없기 때문입니다. 끊어 없애는 것[斷]이 보리이니, 모든 그릇된 견해[邪見]를 끊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떠나는 것[離]이 보리이니, 모든 망상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장애(障碍)가 보리이니, 모든 잘못된 바람[願]을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들지 않는 것[不入]이 보리이니, 탐착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르는 것[順]이 보리이니, 여여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머무는 것[住]이 보리이니, 법성(法性)'42)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르는 것[至]도 보리이니, 실제(實際)43)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아닌 것[不二]이 보리이니, 마음과 대상[法]으로부터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등함[等]이 보리이니, 허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위(無爲)44)가 보리이니, 생(生)하고 머무르며, 멸(滅)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知]이 보리이니, 중생의 심행(心行)을 명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만나지 않음[不會]이 보리이니, 마음과 그 행을 알게 하는 대상[諸入]이 만나 결합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합하지 않음[不合]이 보리이니, 번뇌의 습기(習氣)45)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자리함이 없는 것[無處]

 

          41) 승조(僧肇)는 『주유마경(注維摩經)』에서 "관(觀)은 연(緣)으로부터 생(生)하고 연(緣)을 떠나면 즉 관(觀)이 없다"고 주석(註釋)하고 있다. 따라서 승조는 다음의 '불행(不行)'에 대해서 "행(行)은 염(念)으로부터 생(生)하고 염(念)이 없기 때문에 행(行)이 없다," '장(障)'에 대해서는 "진도(眞道)에는 욕(欲)의 온갖 원(願)을 막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불입(不入)'에 대해서는 "입(入)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불이(不二)'에 대해서는 "마음[意]과 그것의 대상[法] 둘이 있다. 그러나 보리에는 마음마저 없다. 어찌 법(法) 따위가 있겠는가," '불회(不會)'에 대해서는 "제입(諸入)이란 것은 내외(內外)의 6입(入 : 6根·6境)이다. 내외(內外)가 함께 공하므로 제입이 만나지 않는다. 제입이 만나지 않음은 보리이다. 즉 보리의 근(根)이다"고 주역(註譯)하고 있다.

      42)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본성(本性)이다.
      43)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극한(極限) 또는 변제(邊際)이다.
      44)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절대한 경지이다.
      45) 번뇌로 인하여 몸에 배었던 습성의 나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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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이니, 형색(形色)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명(假名)이 보리이니, 이름과 문자[名字]가 공(空)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깨비[幻]와 같은 것이 보리이니, 취(取)하고 버리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혼란이 없는 것[無亂]이 보리이니, 항상 스스로 고요하기 때문입니다. 미혹을 떠난 경계[善寂]가 보리이니, 그 성품이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취하지 않음[無取]이 보리이니, 마음이 대상에 의하여 움직임[攀緣]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다르지

않음[無異]이 보리이니, 모든 존재[法]는 동등(同等)하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길이 없음[無比]이 보리이니, 비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묘함이 보리이니, 제법(諸法)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46)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같이 설법하였을 때, 2백의 천상의 신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같이 설법하였을 때, 2백의 천상의 신들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동자(童子)인 광엄(光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하도록 하라."
      광엄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비야리 대성을 나가려 하였을 때에 유마힐이 마침 성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물었습니다.
      '거사님, 어디서 오십니까?'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도량(道場)에서 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도량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46) 여기서 이 이야기의 내용은 끝났다(나집·지겸의 번역도 같다). 그러나 현장과 티베트 역에는 다음 절의 한 구절이 더 있어서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첨가한다. "깨달음은 허공과 같은 성질이며, 모든 곳에 빈틈없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몸으로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신체는 풀이나 나무, 석벽(石壁), 길, 그림자와 같은 것이며, 마음은 비물질적인 것, 들에 나지 않는 것,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 표상하

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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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121] 쪽

      그는 답하였습니다.
          '올곧은 마음[直心]이 도량이니,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올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發行]이 도량이니, 만사를 판별[辦]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마음[深心]이 도량이니, 공덕을 증대시키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이 도량이니, 잘못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시(布施)가 도량이니, 보답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계(持戒)가 도량이니, 바람[願]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욕(忍辱)이 도량이니, 모든 중생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진(精進)이 도량이니, 게을러 물러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정(禪定)이 도량이니, 마음이 조화롭고 부드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지혜(智慧)가 도량이니, 눈앞에 있는 제법을 환히 보기 때문입니다. 자(慈)가 도량이니,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비(悲)가 도량이니, (중생을 구제하는데) 피곤함과 괴로움을 잘 참아 내기 때문입니다. 희(喜)가 도량이니,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사(捨)가 도량이니, 사랑과 미움을 끊어 버리고 평등하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신통(神通)이 도량이니, 6신통[通]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해탈(解脫)이 도량이니, 8배사(背捨 : 8解脫)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편이 도량이니,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입니다. 4섭(攝)이 도량이니, 중생을 아우르기[攝]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듣는 것[多聞]이 도량이니, 들은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伏心]이 도량이니, 제법을 바르게 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37도품이 도량이니, 유위법(有爲法)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4제[諦]가 도량이니, 세간을 속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기(緣起)가 도량이니, 무명(無明)에서 늙음과 죽음까지, 그 모두가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갖 번뇌가 도량이니, (무명번뇌의 본바탕이 불성임을) 여실하게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도량이니, 중생이 무아(無我)임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일체법이 도량이니, 제법의 실성이 공함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항마(降魔)가 도량이니, (악마로 인하여 마음이) 움직이고 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계가 도량이니, (마음이 업에 얽매이지 않아)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자후가 도량이니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10력(力), 4무소외(無所畏), 18불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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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121] 쪽

      (不共法)이 도량이니, 모든 잘못이 없기 때문입니다. 3명(明)이 도량이니, 천안통(天眼通)·숙명통(宿命通)·누진통(漏盡通)으로 3세의 이치에 통달해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一念]으로 일체법을 아는 것이 도량이니,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온갖 바라밀에 따라서 중생을 교화하고 모든 일을 하면 일거수일투족[擧足下足], (그 모든 말과 행동이) 모두가 도량으로부터 나와서 불법에 머물게 되는 것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이같이 설할 때 5백 명의 천인들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지세보살(持世菩薩, Jagati

dhar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지세보살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저는 조용한 방에 있었는데, 그 때 마왕 파순[魔波旬]47)이 1만 2천의 천녀를 거느리고 마치 제석천과 같이 꾸며서 북을 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는, 제 발에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두 손을 합장하고 나서 한쪽에 늘어섰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들을 제석천이라고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잘 오시었소, 교시가(憍尸迦, Kauika)48)여. 그대에게 비록 복덕이 마땅히 갖추어져 있다 해도 스스로 방자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5욕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이로써 공덕의 근본[善本]을 구하며, 신체와 목숨과 재물49)

이 세 가지를 견고하게 간직할 수 있는 수행[堅法]을 닦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제 말에 그가 곧 말하였습니다.

          '보살[正士]이여, 이 1만 2천의 천녀를 받아 주셔서 씻고 닦는 일을 시켜 주

십시오.'

 

          47) Mrah Ppyn의 음사(音寫)가 잘못되어 파순

(波旬)으로 되었다. 악애(惡愛), 살인자(殺人者), 악자(惡者)라고 번역한다. 불제자(佛弟子)를 괴롭히는 마왕으로 욕계(欲界)의 제6천(第六天)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이기도 하다.

      48) 제석천의 성(姓)이다.
      49) 여기서 말하는 신체와 목숨과 재물의 세 가지를 수행을 통하여 끝이 없는 영원한 것으로 이루는 것을 삼견법(三堅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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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121] 쪽

      저는 교시가에게 말했습니다.
      '교시가여, 이는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라 제게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제자[釋子]인 사문으로 이는 저에게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제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때에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이는 제석천이 아닙니다. 마군이 와서 당신을 희롱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곧 마왕 파순을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이 천녀들을 나에게 주시오. 나와 같은 사람이나 받을 만하오.'
      마왕은 두려움으로 떨면서, '유마힐이 나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곧 모습을 감추어 달아나려 했지만, 도무지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신력(神力)을 다해 보았지만, 달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곧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파순(波旬)아, 천녀들을 그에게 주어야만 도망갈 수가 있느니라.'
      마왕은 두려운 나머지 용서를 빌며 천녀들을 주었습니다.
      그 때 유마힐은 천녀들에게 말했습니다.
      '마왕은 그대들을 나에게 주었으니, 이제는 그대들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야만 하오.'
      곧 그들 각자에게 마땅한 가르침을 설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道意]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또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이미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으므로 각자가 즐길 만한 법락(法樂)이 있을 것이니, 다시는 (天上의) 5욕락(欲樂)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리라.'
      천녀들은 물었습니다.
      '무엇을 가리켜 법락(法樂)이라고 합니까?'
      유마힐이 답하였습니다.
      '항상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즐기고, 그 가르침을 듣고자 원함을 즐기며, 스님[衆]들을 공양함을 즐기고, 5욕을 떠남을 즐기며, 5온[陰]을 관하기를 원수나 도둑과 같다고 즐기고, 4대(大)를 관하기를 독사와 같다고 즐기며, 마음[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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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121] 쪽

          入]을 관하기를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마을과 같다고 즐기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道意]을 지키겠다고 즐기며, 중생들에게 이익을 베풀기를 즐기고, 스승을 존경하며 공양하는 것을 즐기며, 널리 보시를 행하기를 즐기고, 굳게 계를 지키기를 즐기며, 인욕하고 부드럽게 조화하기를 즐기고, 부지런히 선근을 쌓고, 모으기를 즐기며, 선정에 들어 흐트러지지 않기를 즐기고, 번뇌를 떠나 지혜를 밝게 하기를 즐기며,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菩提心]을 넓히는

것을 즐기고, 수많은 마군을 항복시키기를 즐기며, 온갖 번뇌를 끊기를 즐기고,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기를 즐기며, 상호(相好)를 성취하기 위하여 많은 공덕을 닦기를 즐기고, 도량을 장엄하기를 즐기며, 대승(大乘)의 심원한 가르침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기를 즐기고,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3해탈문(解脫門)50)을 즐기며, 때가 아닌 때[非時]51)를 즐기지 않는다.

      동학(同學)을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동학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어도 분노와 미움을 갖지 않음을 즐기며, 악지식(惡知識)도 거느려서 지킴을 즐기며,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마음으로 깨끗함을 기뻐함을 즐기며, 깨달음을 위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행을 닦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진리[法]를 익히는 즐거움인 법락(法樂)이라고 하는 것이다.'
      동학(同學)을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동학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어도 분노와 미움을 갖지 않음을 즐기며, 악지식(惡知識)도 거느려서 지킴을 즐기며,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사귀는 것을 즐기며, 마음으로 깨끗함을 기뻐함을 즐기며, 깨달음을 위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행을 닦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진리[法]를 익히는 즐거움인 법락(法樂)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때 마왕이 천녀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 하늘의 궁전[天宮]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천녀들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이미 우리들을 거사(居士)님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법락(法樂)을 알고서 대단히 즐기고 있습니다. 다시는 5욕락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악마가 말했습니다.
      '거사님, 이 여인들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모든 소유(所有)를 남에게 보시하는 자가 보살인 것입니다.'

 

      50) 또는 3해탈(解脫)·3삼매(三昧)라고 한다. 티베트 역에는 이 3해탈을 설하고, "열반의 관상(觀想)을 즐긴다"는 한 구절이 더 있다.
      51) 또는 때가 아닌 때의 식사이다. 비시(非時)는 보통 식사 시간을 지난 정오 이후, 또는 정오 이후의 식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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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121] 쪽

      유마힐은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버렸느니라. 그대가 곧 데리고 가거라. 그대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여라.'
      그 때에 천녀들이 유마힐에게 물었습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마왕의 궁전에 머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유마힐이 말했습니다.
        '자매들이여, 꺼지지 않는 등불[無盡燈]이라고 하는 법문이 있으니, 그대들은 이 법문을 배워야만 하오.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한 등불로 백천(百千)의 등불에 불을 밝혀 어둠이 모두 밝아지고 그 밝음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오. 자매들이여, 이같이 한 사람의 보살이 백천의 중생의 마음을 열고 이끌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도록 하고, 그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모든 선법(善法)이 자꾸만 늘어나게 하는 것을 꺼지지 않는 등불이라고 하는 것이오. 그대들이 비록 마왕의 궁전에 있다 하더라도 이 꺼지지 않는 등불로써 무수한 천자의 천녀들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한다면, 이야말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 또 모든 중생들에게 큰 이익을 베풀어 주는 것이 될 것이오.'

      그 때 천녀들은 유마힐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다음 마왕을 따라 마궁으로 돌아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유마힐은 이 같은 자유자재한 신통력과 지혜와 변재(辯才)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장자의 아들 선덕(善德, Sudatt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선덕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저는 아버지의 집에서 성대한 보시 모임[大施會]을 열고, 모든 사문과 바라문, 그리고 수많은 외도와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의지할 데 없는 사람[孤獨], 거지들에게 공양하였습니다. 마지막 7일째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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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121] 쪽

      날, 그 때 마침, 유마힐이 찾아와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장자의 아들이여, 성대한 보시의 모임이라는 것은 그대가 하고 있는 것처럼 열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마땅히 법을 설해 주는 모임[法施]을 해야지, 어찌하여 이같이 재물을 베푸는 모임을 열고 있는 것이오?'
      저는 말했습니다.
      '거사님, 어떻게 하는 것을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 합니까?'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는 것은, 앞뒤의 차이가 없이 일시에 일체 중생을 공양하는 것이니, 이것이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는 것이오. 무슨 말인가 하면, (중생에게) 깨달음[菩提]으로써 대자심(大慈心, mah-maitri)을 일으키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비심(大悲心, mah-karua)을 일으키며, 정법(正法, Saddharma)을 지니려는 대희심(大喜心, mah-mudit)을 일으키고, 지혜를

간직하려는 대사심(大捨心, mah-pek)을 행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그것은 인색함과 욕심을 거두어들임으로써 보시바라밀[檀波羅蜜, dC="http://ebti.dongguk.ac.kr/images/k0209.gif"/>na-pramit)을 일으키고, 계율을 범한 자를 교화하는 것으로써 지계바라밀[尸波羅蜜,la-pramit]을 일으키며, 무아(無我)의 진리[法]를 알게 함으로써 인욕바라밀[提波羅蜜, ksnti-pramit]을 일으키고, 몸과 마음의 겉모양[相]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정진바라밀[毘梨耶波羅蜜, vrya-pramit]을 일으키며, 보리의 경계[相]로써 선정바라밀[禪波羅蜜, dhyna-pramit]을 일으키고,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는 지혜[一切智]로써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a-pramit)을 일으키는 것이오.

          또 중생을 교화하면서 공(空, snyat)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유위법(有爲法, sa

skta)을 버리지 않고서도 무상(無相, animitta)의 실상을 바르게 알며, 이승에 생을 받는 모습을 나타내더라도 무작(無作, apranihita)이라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오. 정법을 잘 지키고 간직하면서 방편의 힘을 발휘하고, 중생을 제도하면서 4섭법(攝法, sagraha-vastu)을 행하며,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몸[身]과 생명[命]과 재산[財]에 있어서 (法身과 慧命과 法財의) 3견법(堅法)을 얻도록 노력하며, 6념(念)하면서 올바른 사념[正思念, samyaksmti]을 잊지 않고, 6화경(和敬)을 행하면서 순박하고 올곧은 마음[質直心]을 가지며, 착한 일을 바르게 행하기를 노력하여 청정한 생활[淨命]을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인과 어진 이를 가까이하며, 악인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고, 출가하는 마음으로 깊은 마음[深心]을 늘 간직하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기 위하여 보다 많이 듣고자 하고, 다툼이 없는 회합을 위하여 고요하고 한적한 수도장을 마련하며,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좌선[宴坐]을 행하고, 중생을 번뇌의 속박[縛]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수행의 단계[修行地,yogcra bhmi]대로 올라가는 것이지요.

          상호를 다 갖추고 불국토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복덕을 짓는 업을 행하고, 일체 중생의 마음속 생각을 알고, 각자에게 마땅한 가르침[法]을 설하여 지혜의 업[智業]52)을 일으키며, 일체법을 취하거나[取] 버리지[捨] 않고서 일상문(一相門, ekanaya)에 들어가기 위해 지혜의 업[慧業]을 일으키고, 일체의 번뇌, 일체의 장애, 일체의 불선(不善)도 모두 끊어 버리고, 일체의 바른 일[善業]을 모두 행하며,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공덕을 얻음으로써 불도(佛道)에 도움이 되는 일체의 보조적인 수행법을 빠짐없이 행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법을 설해 주는 모임이라고 하오. 만약 보살이 이 같은 법을 설해 주는 모임에 머무른다면 그는 대시주(大施主)가 되고, 일체 세간의 복전(福田)이 될 것이오.'
      세존이시여, 유마힐이 이러한 가르침을 설했을 때, 바라문들 중의 2백 명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 저는 마음이 깨끗해지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라 감탄하고 그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다음 곧 몸에 두르고 있던 몇 십만[百千]이나 되는 값비싼 영락(瓔珞)을 풀어서 바쳤으나 받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거사님, 원하오니 아무쪼록 받으시어 당신의 뜻대로 주고 싶은 이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유마힐은 곧 영락을 받아 들고 반으로 나눈 뒤 그 모임에 온 사람 중에 가장

 

      52) 지(智)는 jna의 역어(譯語), 혜(慧)는 prajna의 역어. 일반적으로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따로 떼어서 말하면, 혜는 사물·도리(道理) 등을 알고 추리·판단하는 정신작용이며, 지는 그러한 사물·도리에 대하여 시비를 결정하고 단정하는 것으로서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 따위는 이 지의 작용이 중심이다. 또 여기에서 밖을 향하여 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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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121] 쪽

          비천한 거지에게 절반을 주고, 나머지 반은 저 광명국토(光明國土)의 난승여래(難勝如來, Duprasaha-Tathgata)에게 바쳤습니다. 그 모임의 모든 대중[會衆]은 난승여래를 우러러보았으며, 또 그 부처님께 바친 영락이 부처님 주위에서 네 개의

보배로운 대좌와 기둥이 되어 4면을 거룩하게 장식했는데도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유마힐은 신통한 변화[神變]를 나타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 보시를 하는 사람이 평등한 마음으로 가장 비천한 거지에게 보시하면서 여래복전(如來福田)에 대하듯이 분별함이 없이 평등하게 대비심을 드리우고 과보를 바라지 않고서 보시한다면, 이를 빠짐없이 법을 설해 준다[具足法施]고 부르오.'
      비야리성에서 가장 비천한 거지도 이 신력을 보고, 그 설법을 듣고 (다른 사람들과)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들도 저마다 부처님께 그들의 지난 경험[本緣]을 이야기하며 유마힐이 말한 것을 칭찬하면서 모두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3. 제자품(弟子品)

      그 때 장자 유마힐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내가 몸져 누워 있는데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큰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실까?'
      부처님께서는 유마힐의 그러한 마음을 아시고 곧 사리불(舍利弗)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사리불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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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121] 쪽

              하면 생각해 보니, 저는 예전에 숲 속 나무 밑에서 좌선[宴坐, phatisa

layana]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사리불이여, 반드시 이렇게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좌선이란 것은 몸과 마음의 (작용이) 삼계(三界)에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멸정(滅定)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온갖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좌선입니다. 진리의 법[道法]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세속의 일상 생활[凡夫事]을 나타내는 것이 좌선이며, 마음이 안으로 닫혀 있(어서 고요함만을 탐닉하)지 않고 밖을 향하(여 혼란하)지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온갖
      견해에도 요동하지 않으면서도 37도품(道品)을 닦는 것이 좌선이며, 번뇌를 끊지 않고서도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입니다. 만약 이같이 앉을 수 있는 자라면 부처님께서는 인가하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러한 말을 듣고서도 말문이 막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목건련(大目犍連, Mahmaudgalyyan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라."
      목련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저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저도 비야리 대성으로 들어가 거리에서 많은 거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다시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대목련이여, 백의거사(白衣居士)를 위해서 설하는 설법은 그대가 설하듯이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여법(如法)17)하게 설해야 합니다. 법에는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번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자아의 존재[有我]가 없으니, 나[我]의 번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수명(壽命)이 없으니, 생사를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인(人)이 없으니, 과거의 생과 미래의 생이 끊어졌기 때문

입니다.18)

 

      17) 여기서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즉 실상(實相)이라는 뜻이다.
      18) "법(法)에는 중생이 없으니 미래의 생(生)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까지는 중생의 공(空)을 설한 것이며, 다음 절(節) "법(法)은 항상 고요하니……" 이하는 법의 공함을 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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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121] 쪽

      법은 항상 고요하니[寂然], 모든 상(相)19)을 없애 버렸기 때문이며, 법은 상을 떠나 있으니, 인식의 대상[所緣]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이름이 없으니, 언어(로 미칠 수 있는 길이) 끊겼기 때문이며, 법은 말[說]이 없는 것이니, 크고 작은 생각[覺觀]20)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법은 모양이 없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 법은 부질없는 말[虛論]이 없으니,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내 것[我所]이 없으니, 내 것, 네 것을 다 떠났기 때문이며, 법에는 분별이 없으니, 식별(識別)하는 작용[識]21)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비교할 수가 없으니, 상대(相對)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은 근본적인 원인[因]에 속한 것이 아니니, 간접적인 원인[緣]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존재에 골고루 나타나 있으므로 법성(法性),22)과 같기 때문입니다. 법은 여여(如如)함을 따

르니, 다른 것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법은 실제(實際)에 머무르니, 어떠한 환경[邊]에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에는 동요함이 없으니, 6경[塵]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은 오고 감[去來]이 없으니, 시간[常] 속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은 공(空)을 따르고 무상(無相)을 따르고, 작위함이 없어야[無作] 하니, 법은 아름다움과 더러움의 (차별을) 떠났으며, 법은 더하거나 덜함이 없으니, 법은 생멸(生滅)이 없기 때문이며, 법은 돌아가야 할 바도 없으니, 법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心]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며,23)

 

      19) 하나의 사물을 특징 짓는 그 사물의 특질, 모습, 모양, 형태 등이다. 이곳에서 주의할 것은 '상(相)'이라고 했으나 티베트 역에서는 '탐욕(貪慾),' 현장은 '탐착(貪着),' 그리고 나집의 다른 책에서는 '상(想)'이라 했다.
      20) 각(覺, vitarka)은 치밀하지 못한 생각이며, 관(觀, vicra)은 치밀한 생각, 자세하게 살피는 것이다.
      21) 식(識)을 흔히 '알음알이'라고 번역한다. 본래의 뜻은 '꾀바른 수' 또는 '서로 가까이 아는 사람'이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식별(識別)하는 것' 또는 '식별하는 작용'까지를 포함한 말이다.
      22) 이 대문에서는 법성(法性), 진여(眞如), 실제(實際) 등이 이야기되고 있으나, 법신(法身)을 비롯한 진여의 이명(異名)이다. 이 대목을 나집은 "법동법성입제법고(法同法性入諸法故)"라고 했다. 의역하면, "법이 사물의 진실한 본성(本性 : 法性)과 같음은 모든 제법(諸法)에 빠짐없이 사무쳤기[入] 때문이다"이다.
      23) 사물의 진실한 모습 자체인 법에 있어서는 일상적인 상황은 무의미한 것이며, 그러한 법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통상적인 6정(情)을 초월하여 6정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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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니, 법은 상주(常住)하여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24)

법은 일체의 분별하는 관찰(觀察)과 소행에서 떠났습니다. 대목련이여, 법상(法相)은 이와 같은데, 어찌 설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법을 설하는 것은 설함도 없고, 가리킴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것도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마술사[幻士]가 마술로 만든 인형[幻人]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이러한생각을 갖고서 법을 설하여야 합니다. 마땅히 중생의 능력[根]에 예리하고 무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만 하며, 중생을 보고 지견(知見)이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하고, 커다란 자비심으로 대승(大乘)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염원하여 3보(寶)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 다음에 설법해야 합니다.'

            대목련이여, 법상(法相)은 이와 같은데, 어찌 설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법을 설하는 것은 설함도 없고, 가리킴도 없으며, 그 법을 듣는 것도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마술사[幻士]가 마술로 만든 인형[幻人]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갖고서 법을 설하여야 합니다. 마땅히 중생의 능력[根]에 예리하고 무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만 하며, 중생을 보고 지견(知見)이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

어야 하고, 커다란 자비심으로 대승(大乘)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염원하여 3보(寶)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 다음에 설법해야 합니다.'

      유마힐이 이와 같이 법을 설하였을 때, 8백 명의 거사들이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러한 말재주[辯才]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가섭(大迦葉, Mahkyap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가섭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저는 옛날 가난한 마을에서 걸식을 하였는데,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대가섭이여, 자비심을 가지면서도 널리 펴지 못하고, 이같이 부잣집을 내버려두고 가난한 사람만 쫓아가 걸식을 하니, 가섭이여, 평등한 법에 머물러 마땅히 차례대로 걸식해야 합니다. 먹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걸식을 해야 하며, (5온에 의해 임시적으로) 뭉쳐진 (육신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24) 앞에서 "법이 오고 감이 없는 것은 시간 속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고 한 것은 법을 실재론적(實在論的)으로 보는 것을 부정한 것이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상주(常住)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함은 이법(理法) 그 자체의 절대적인 불변성(不變性)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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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함이니, 마땅히 주먹밥[揣食]을 먹어야 하며, (생사의 과보를) 받지 않기 위한 까닭으로 마땅히 그 음식을 받아야 하며, (이 몸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라는 생각으로 마을에 들어가야 합니다.
      형상[色]을 보아도 장님과 같이 보아야 하며, 소리를 들을 때는 메아리를 듣는 것과 같이 하며, 향내음을 맡아도 바람과 같이 맡고, 먹고도 맛을 분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온갖 감촉을 느낄 때에도 지혜를 증득하듯이 해야 합니다. 또 존재하는 모든 것[諸法]을 환상(幻相)같이 알며, 법에는 자성(自性)과 타성(他性)도 없으므로 그 자체로는 생기지 않으므로 지금도 멸(滅)하는 일이 없습니다.
            가섭이여, 능히 여덟 가지 사도(邪道 : 8正道에 반대되는 것)를 버리지 않고서도 8해탈(解脫)에 들어가고, 사악한 모습을 지닌 채 정법(正法)에 들어가며, 한 끼의 밥으로도 모든 중생에게 베풀며, 모든 부처와 온갖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에야 먹을 만합니다. 만약 이와 같이 먹는 사람은 번뇌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번뇌가 없기 때문도 아니며, 또 선정의 삼매에 들어서도 아니고, 선정에서 나와서도 아니며, 이 미혹한 세간에 머물러서도 아니고, 열반

(涅槃)에 머물러서도 아닙니다.

      그 보시하는 사람에게는 큰 복도 없고 작은 복도 없으며,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니, 이같이 (손익을 생각하지 않고) 하는 것이야말로 바르게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것이며, 성문(聲聞)의 길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섭이여, 이같이 먹는다면 남의 보시를 헛되이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같이 설하는 말을 듣고서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 생각하고는 모든 보살들에 대해서 깊이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며, 또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재가에 있으면서 변재와 지혜가 이럴 수가 있는데, 그 누가 이를 듣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저는 이 때부터 다시는 성문(聲聞), 벽지불(辟支佛)의 수행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須菩提, Subhti)에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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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121] 쪽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최후의 단계에 이르면,

수보리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저는 옛날 그의 집에 들어가 걸식하였는데, 그 때 유마힐은 저의 발우를 들고 밥을 가득 채워 주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먹는 것에서 평등할 수가 있으면 모든 법(法)에서도 평등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법에서 평등할 수가 있으면 먹는 것에도 평등합니다. 이같이 걸식(乞食)을 하고 다닐 수가 있으면 주어진 것을 먹어도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탐욕[淫]25)과 성냄[怒]과 어리석음[癡]을 끊어 버리지 않고서도 그것들과 함께 하는 것도 아니며, 내 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서도 일상(一相)을 따를 수가 있으며, 어리석음과 탐욕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도 지혜와 해탈을 일으킨다면, 5역죄(逆罪)를 범하는 모습으로도 해탈을 얻고, 해탈된 것도 결박된 것도 아니면, 4성제[四諦]를 보는 것도 아니면서도 4성제를 보지 않는 것도 아니라면, 범부(凡夫)도 아

니면서도 범부의 법을 떠난 것도 아니라면, 성인도 아니면서 성인(聖人) 아닌 것도 아니라면, 비록 일체법(一切法)을 성취(成就)했으면서도 제법의 상(相)에서 떠났다면 먹어도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부처를 만나지도 못하고 가르침도 못 듣고, 저 육사외도(六師外道)인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 Prana kyapa)·말가리구사리자(末伽梨拘

梨子, Maskarin Golputra)·산자야비라지자(刪闍夜毘羅子, Sajayin Vairatiputra)·아기다시사흠바라(阿耆多翅舍欽婆羅, Ajita Keakambala)·가라구태가전연(迦羅鳩駄迦旃延, Kakuda Kty- yana)·니건타야제자(尼犍陀若提子, Nirgrantha Jtiputra) 등을 그대의 스승으로 삼아 그를 따라서 출가하고, 그 스승이 떨어지는 곳에 역시 그대가 따라서 떨어진다면 이 밥을 먹어도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대가 만일 온갖 사견을 받아들여서 피안에 이르지 못하고, 8난

 

      5) 탐욕 이하의 성냄, 어리석음은 탐(貪)·진(瞋)·치(痴)의 3독(毒)이라 한다. 나집은 이 '탐'을 '음(淫)'으로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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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121] 쪽

              (難)에 머물면서 장애가 없는 경계를 얻지 못하며, 번뇌와 함께 있으면서 청정한 법을 떠나고, 그대가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얻으면서도 모든 중생도 역시 그러한 삼매를 얻는다면, 그대에게 보시하는 자에게 그대가 복전(福田)이 되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공양을 올리는 자가 3악도(惡道)에 떨어져 많은 악마와 더불어 손을 잡아 온갖 번뇌[勞]의 벗이 되고, 그대는 온갖 악마와 모든 번뇌[塵勞]와 똑같이 하나가 되고, 모든 중생에게 원한을 품고, 모든

부처를 비방하며 정법[法]을 훼손하고, 승가[衆數]에 동참하지 않고 마침내 깨달음[滅度]을 얻지 않는다면 그 때 밥을 먹어도 좋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때 저는 이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여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라서 곧 발우를 내려놓고 그 집을 나오려 했습니다.
      그러자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수보리여, 두려워하지 말고 발우를 드시오. 그대 생각은 어떠하오? 여래께서 만드신 꼭두각시[化人]가 만약 이러한 일로 나무랐다면 그래도 두려워하겠소?'
      저는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일체제법(一切諸法)은 꼭두각시의 모습[幻化相]과 같으니, 그대는 지금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모든 말[言說]도 이 꼭두각시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에 이르러서는 문자(文字)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문자(文字)는 자성(自性, svabhva)을 여의었기 때문(에 실상이 空

한 것)이니, 문자(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이 곧 해탈입니다. 해탈의 모습이란 것은 곧 제법인 것입니다.'

      유마힐이 이러한 법을 설하고 있을 때, 2백의 천자(天子)들은 진리를 바르게 보는 눈[法眼]이 맑아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루나(富樓那, Pramaitryanput

r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가서 유마힐을 문병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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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121] 쪽

      부루나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커다란 숲 속의 한 나무 아래에서 새로 출가한[新學] 비구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부루나여, 먼저 선정에 들어[入定] 이들의 마음을 살핀 다음에 설법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음식을 보배로운 발우[寶器]에 담지 마십시오. 마땅히 이들 비구들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귀한) 유리(琉璃, vairya)를 (한낱)

수정(水精, kcakamai)과 같게 보지 마십시오. 그대는 중생의 근기[根源]도 알지 못하고, 소승(小乘)의 가르침으로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자신들은 부스럼이 없는데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큰 길[大道]을 가려고 하는 이들에게 작은 오솔길을 가르쳐 주지 마십시오. 큰 바닷물을 가져다 소 발자국에 넣으려 하지 마십시오. 햇빛을 저 반딧불과 함께 비교하지 마십시오.

      부루나여, 이들 비구는 대승의 마음을 일으킨 지 오래지만, 도중에 이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잊은 것인데, 어떻게 소승의 가르침으로써 이를 가르쳐 이끌고자 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소승(小乘)은 지혜가 미천함이 마치 장님과 같아 모든 중생의 근기의 예리하고 우둔한 것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유마힐은, 곧 삼매에 들어 이 비구들이 스스로의 과거[宿命]를 알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전생에) 5백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온갖 선근(善根, kualamla) 공덕을 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로 회향(廻向)하고, 즉시 곧바로[豁然] 본

래의 마음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여러 비구들은 유마힐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였습니다. 그 때 유마힐은 그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다시는 물러서지 않도록 설법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생각하기를, '성문은 중생의 근기를 정확히 살피지 않고서 설법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 Mahktyyan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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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121] 쪽

      가전연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을 위하여 간략히 가르침의 요점을 설하셨을 때, 저는 곧 이어서 그 뜻을 자세하게 설하였습니다. 저는 '무상의 뜻이며, 괴로움의 뜻이며, 공의 뜻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주체는 없다[無我]는 뜻이며, 적멸(寂滅)의 뜻26)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가전연이여, 생멸(

生滅)하는 마음으로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實相]을 설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전연, 제법은 끝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무상의 뜻이요, 5온[五受陰]은 공하여 생기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괴로움의 뜻입니다. 제법이 구경에 가서도 존재[所有]하지 않으니, 이것이 공의 뜻이며, 아(我)와 무아(無我)에 있어서 둘이 아닌[不二] 것, 이것이 무아의 뜻이며, (존재하는) 법(法)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곧 멸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적멸(寂滅)의 뜻입니다.'가전연이여, 생멸(生滅)하는 마음으로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實相]을 설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전연, 제법은 끝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무상의 뜻이요, 5온[五受陰]은 공하여 생기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괴로움의 뜻입니다. 제법이 구경에 가서도 존재[所有]하지 않으니, 이것이 공의 뜻이며, 아(我)와 무아(無我)에 있어서 둘이 아닌[不二] 것, 이것이 무아의 뜻이며, (존재하는) 법(法)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곧 멸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적멸(寂滅)의 뜻입니다.'

      이러한 법을 들었을 때, 여러 비구들이 마음속 깊이 해탈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나율(阿那律, Aniruddh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라."
      아나율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제가 어느 곳을 경행(經行)하였는데, 그 때 엄정(嚴淨)이라는 범왕(梵王)이 1만을 헤아리는 범천(梵天)과 함께 밝은 빛을 발하면서 제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저의 발에 머리를 대고 예배한 다음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나율이여, 그대는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는데 어느 정도까지 볼 수가 있습니까?'

 

      26) 이 부분을 티베트 역에서 살펴보면 "제행은 변화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운 것이며, 제법은 공한 것이고, 제법은 무아이며, 열반은 적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4법인(法印)보다 하나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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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121] 쪽

      저는 곧 대답하였습니다.
      '대범천이여, 저는 이 석가모니부처님의 불국토를 포함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손바닥에 있는 암마륵(菴摩勒, Amra)의 열매를 보듯이 봅니다.'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로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나율이여, 천안으로 보는 것은 작용[作相]27)입니까, 무작용[無作相]입니까? 만약 작용일 것 같으면, 그 때 그것은 외도들의 5통(通)28)과 같을 것이고, 만약 무작용이라면, 무위(無爲)29)이니 본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때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범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말이라 하고 유마힐에게 예배하고는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때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범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말이라 하고 유마힐에게 예배하고는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참다운 천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유마힐은 대답하였습니다.
      '부처님이신 세존만이 참다운 천안을 지니고 계셔서 항상 삼매에 드셔서 모든 부처의 나라를 빠짐없이 2상(相)30)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이 말을 들은 엄정대범왕(嚴淨大梵天)과 그 권속 5백의 범천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유마힐의 발에 예배한 다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엄정대범왕(嚴淨大梵天)과 그 권속 5백의 범천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고 유마힐의 발에 예배한 다음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우바리(優波離, Upli)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하라."
      우바리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에게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두 사람의 비구가 계율을 범하고 부끄러움에 못 이겨 감히 부처님께 여쭙지도 못하고 저를 찾아와 말하였습니다.

 

              27) abhi-sa

sktalakana. 인연으로 해서 만들어진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28) 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숙명동(宿命通)·타심통(他心通)·신족통(神足通)이다. 여기에 누진통(漏盡通)을 더하면 6통이 된다.
      29) 인연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닌 존재라는 뜻이다.
      30) 상대적인 차별을 가진 관념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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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121] 쪽

      '우바리 존자여, 저희들은 계율을 범하였습니다.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하여 감히 부처님께 나아가 여쭙지 못하오니, 바라옵건대 부디 저희들의 의심과 뉘우침을 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허물을 면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법대로[如法]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바리여, 이 두 사람의 비구에게 죄를 더 무겁게 키우지 마십시오. 곧장 그 죄를 없애서 두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게 하지 마십시오. 왜냐 하면 저 죄라는 본성은 (그들 자신의) 안에 있지 않고, 밖에도 없고, 또 그 중간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과 같이 마음이 더러우므로 중생도 더럽고, 마음이 깨끗하므로 중생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또 이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 마음이 그러하듯이 죄도 또한 그와 같고, 제법도 그와 같으며,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如如, tathat]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바리여, 마음의 본래 모습[心相]으로 해탈을 얻었을 때, 그 때에도 (그 마음은) 더러움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없습니다.'

그러자 유마힐은 말하였습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의 본래의 모습의 더럽지 않음[無垢]도 이와 같습니다. 우바리여, 망상(妄想)이 더러움[垢]이요, 망상이 없는 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그릇된 생각[顚倒]이 더러운 것이지만 그릇된 생각이 없으면 곧 깨끗한 것입니다. 취아(取我)31)가 더러운 것이지만, 취아라 생각하지 않으면 깨끗한 것입니다. 우바리여, 일체법이 생멸(生滅)하며 머무르지 않는 것[不住]이 허깨비[幻]나 번갯불과 같으며, 제법은 서로 기다리는

일이 없어[不相待]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제법은 모두 망견(妄見)이며 꿈과 아지랑이 같고, 물 위에 뜬 달,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 같이 망상으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라 이름할 수 있으며

          31)

tmasamropa로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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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같은 도리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잘 깨달은 사람[善解]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의 비구가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높은 지혜를 가진 분이군요. 이는 우바리 존자가 감히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계율을 잘 지킨다 해도 이렇게 설하지는 못합니다.'
      저도 대답하였습니다.
      '여래를 제외하고는 어떤 성문이나 보살도 이 유마힐의 걸림없는 훌륭한 말솜씨[樂說之辯]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그 지혜가 밝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의 비구는 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다고 발원(發願)하고, 일체 중생이 모두 이러한 말솜씨를 얻을 수 있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라후라(羅羅, Rhul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 문병을 하도록 하라."
      라후라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비야리성의 여러 장자의 아들들이 저를 찾아와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라후라여, 당신은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깨달음을 위하여 출가하셨으니, 그 출가에는 어떠한 이익이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법하게 출가의 공덕과 이익에 대해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 때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라후라여, 출가의 공덕이나 이익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 하면 아무런 이익도 공덕도 없는 것이 출가이기 때문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이라면 이익이나 공덕이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출가는 무위법(無爲法)을 구하는 것으로서 무위법에는 이익이나 공덕이 없습니다. 라후라여, 출가에는 깨달음[彼]도 미혹[此]도 없고 그 중간도 없습니다. 62견(見)32)을 멀리 떠나 열반(涅槃)에 처하는 것이니 지혜로운 이가 누리는 것이며

, 성인이 닦는 길인 것입니다.

      32) 불교 이외에서 설해지고 있는 사상으로는 정통 바라문교의 사상 이외에도 쟈이나교 등 6명의 유명한 사상가도 있다. 이들을 육사외도라고 하는데, 이들 외에도 이러한 사상을 62종(種)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으로는 과거나 미래에 관한 문제, 자아의 불변불멸(不變不滅)에 관한 문제, 사후(死後)의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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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마군을 항복시켜 5도(道)33)를 넘어서 5안(眼)을 맑게 하고, 5력(力)을 얻었고, 5근(根)을 바르게 세워 그 어떤 것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온갖 잡다한 악을 떠나고 모든 외도들을 꺾었으며, 가명(假名)34)에 집착하지 않으며, 애욕의 진흙탕을 벗어나 온갖 속박을 벗어났으며,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고, 집착하는 마음[所受]도 없고, 마음의 혼란이 없고, 안으로 늘 기쁨을 간직하고 중

생들의 마음을 지켜 주며, 선정(禪定)을 따르며 온갖 잘못을 다 떠나 버립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이 때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때 유마힐은 장자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정법(正法)을 받아들여 함께 출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기회를 만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아들들은 말하였습니다.
      '거사(居士)님, 저희들이 듣기에는 부모님의 허락이 없으면 출가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만…….'
      그러자 유마힐이 말하였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대들이 지금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곧 출가이며, 구족(具足)35)입니다. 그 때 서른두 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서른두 명의 장자의 아들들은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

nanda)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유마힐을 찾아가서 문병을 하도록 하라."

 

      33) 지옥·아귀·축생·인간·천상의 윤회하는 세계를 말한다.
      34) 가설(假說)·가(假)·시설(施說)이라고도 한다. 사물을 승의제(勝義諦)의 입장에서 보면 공(空)이지만, 세속제(世俗諦)의 입장에서 보면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이다. 이처럼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35) 교단이 정하는 완전한 계율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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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난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세존께서 몸이 조금 불편하시던 때에 저는 우유를 잡수시면 좋으리라 생각하고, 발우를 들고 큰 바라문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곳에 유마힐이 와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난이여, 무슨 일로 이런 이른 아침에 발우를 들고 여기에서 있습니까?'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세존께서 몸이 좀 불편하셔서 우유를 잡수시면 좋을 것 같아서 이곳에 왔습니다.'
      유마힐은 말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아난이여.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래의 몸은 금강석과 같은 몸으로,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을 빠짐없이 몸에 지니고 계시는데, 어떤 병이 있겠으며, 어떤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잠자코 돌아가십시오. 아난이여, 부처님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그같이 설익은 말[麤言]을 누구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뛰어난 위엄과 덕을 갖춘 제천(諸天)과 다른 곳의 불국토에서 온 보살들도 이런 말을 듣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난이여, 전륜성왕은 약

간의 복덕으로도 병에 걸리지 않는데, 하물며 어떻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덕을 모두 모아 몸에 지니시고, 모든 것을 이기신 분[勝者]인 부처님께서 어찌 병을 앓겠습니까? 아난이여, 우리들이 이 같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 만약 외도인 바라문[梵志]이 이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병도 고칠 수 없는 주제에 남의 병을 고칠 수 있다니.)
      그대는 빨리 돌아가서 남이 듣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난이여, 모든 여래의 몸은 진리 그 자체[法身]이지, 미혹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몸이 아니며, 부처님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世尊]으로서 삼계에서 벗어나셨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부처님의 몸에는 번뇌가 없고[無漏], 어떠한 번뇌도 이미 사라져 없으며, 부처님의 몸은 무위(無爲)이니 세상의 온갖 도리[諸數]에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몸에 어떻게 병이나

고뇌가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그 때 참으로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을 가까이 모셨으면서 부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잘못 알아듣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공중에서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아난이여, 거사의 말과 같다. 다만 부처님은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나타내셨기에 실제로 이 가르침을 드러내심으로써 중생을 해탈하게 하기 위해서 행하고 계실 뿐이다. 아난이여,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유를 가지고 돌아가라.'
      세존이시여, 유마힐의 지혜와 변재(辯才)는 이같이 뛰어납니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가 문병을 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5백의 제자들은 각각 부처님께 그들이 전에 경험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유마힐이 했던 말을 칭찬하여 모두 말하였다.
    "저희들은 그를 찾아가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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