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潭스님강설 金剛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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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行無住分 第四

묘행무주분 제사 

 

復次須菩提야 菩薩이 於法에 應無所住하야 行於布施니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며 不住聲香味觸法布施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應如是布施하되 不住於相이니 何以故오 若菩薩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

 

 不住相布施하면 其福德을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야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수보리

  

於意云何오 東方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라 世尊하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提야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을 可思量不아 不也니이다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世尊하 須菩提야 菩薩의 無住相布施福德도 亦復如是하야

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不可思量이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제4 머무름 없이 행하라(묘행무주분)

   “또 수보리야, 보살은 온갖 법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를 할 것이니, 빛이나 모양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이치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지만 현상에 머물지 말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이 만일 현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과 네 간방과 아래위 허공을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못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현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가르친 그대로 머물지니라.”

  

Section IV. Even the most beneficent practices are relative

 

Furthermore, Subhuti, in the practice of charity a bodhisattva should be detached.

That is to say, he should practise charity without regard to appearances; without regard to

sound, odour, touch, flavour or any quality. subhuti,

thus should the bodhisattva practise charity without attachment. Wherefore?

in such a case his merit is incalculable.

Subhuti, what do you think? can you measure all the space extending eastward?

No, world-honoured one, i cannot. Then can you, Subhuti, measure all the space extending

southward, westward, northward, or in any other direction, including nadir and zenith?

No, world-honoured one, I cannot.

Well, Subhuti, equally incalculable is the merit of the bodhisattva who practises

charity without any attachment to appearances. subhuti, bodhisattvas should persevere

one-pointedly in this instruction.

  

[科 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이란 불교의 오묘한 법으로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묘행(妙行)은 수행(修行)한다는 말이고, 무주는 마음을 닦을 때 어떤 조건 어떤 법에도 머물러서 집착하고 걸리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곧 대승의 진리인데 세 번째로 묘행 무주의 도리를 말한다고 해서 제 사분(第四分)이라 한 것인데 그 내용의 요의(要義)를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깨쳐서 성불(成佛)하고서야 비로소 생사를 초월한 것이 아니고 깨치기 전부터 마음은 안 죽는 것이고 천당지옥(天堂地獄)의 윤회(輪廻)를 하고 돌아다니며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갖가지 몸뚱이를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온갖 것이 다 되기도 했지만 이 마음만은 문둥이도 아니고 재주 있는 것도 아니고 질량(質量)의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체의 현상계(現象界)에 걸릴 것도 없고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學問). 지식(知識). 돈. 권력(權力). 육체생활(肉體生活) 등에 얽매어 아무리 애써서 죽도록 해봐도 죽음 앞에 다다르면 다 헛것입니다. 온 세계 권력을 가지고 세계 돈 다 모아 봐도, 또 도서관(圖書館)의 지식 다 알아봐도 제일 큰 인생문제(人生問題)인 죽음만은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 밥 세 그릇 때문에 “밥 못 먹으면 죽는다. 육체가 죽으면 내가 죽는다.”고 착각(錯覺)을 하여 가지고 “하루 밥 세 그릇 가운데 한 그릇이라도 못 먹으면 영원히 못 먹는다 죽은 뒤에라도 찾아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보살은 이런 마음을 다 쉬라는 것입니다. 세 그릇 먹든 거 두 그릇 먹고 나머지 한 그릇 배고픈 사람 주자, 배고픈 사람 배를 채워 주었으니 복이 되고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 생명, 이것을 찾아 우주에 자유해 보자, 그래서 생사(生死)도 없어지고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오직 남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면 이익 되고 저걸 버리면 손해가 클 테니 절대로 그렇게 할 이유는 없다.”하는 등의 망상을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망상을 지니기 때문에 소위 업(業)이란 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살은 보고 듣는 거 꼭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무심(無心)이 되어 생각이 없으면 하루 종일 다녀도 남과 싸우거나 장난을 하거나 하나도 마음에 남지를 않습니다. 어제 내가 저물도록 얘기해 놓고도 오늘 만나면 또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재미있는 일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업(業)이 녹는 것입니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첫 구절(句節)에 나오는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란 말은 비록 팔만사천계율(八萬四千戒律)을 다 지키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고 육도만행(六度萬行)을 하지만 그런 모든 걸 다 마음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농사를 뼈 빠지게 짓더라도 그 농사지어 뭘하겠다는 생각 버리고 그냥 농사만 지어라 장사를 해도 이 돈 벌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없이 아무 잡념(雜念) 없이 뼈빠지게 하라, 그래서 아껴 먹고 남는 것은 없는 사람에게 몽땅 다 베풀어 줘라” 그런 뜻입니다. 이런 보살의 보시하는 마음씨와 그 공덕(功德)을 말씀한 것이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입니다.

  

原文 復次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解義 부처님께서 수보리 에게 거듭 말씀하시기를 “또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어떤 법에든지 머무른 바 없이 보시를 행하라.(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應無所住 行於布施)” 하심은 아무 조건 없이 남을 위해 내 것을 주고 아무 생각 없이 남에게 무엇이든지 도와주고 기분 내지 말고 사회봉사(社會奉仕)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했다 해도 말이 안되고 안했다 해도 말이 안되고 그저 중생을 위해서 노력한 것뿐입니다. 중생(衆生)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해서 잘 했다는 서투른 생각을 할 수도 없으니 자연히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성인(聖人)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법(於法)이라 함은 모든 법이란 뜻이니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 어떤 환경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그런 말입니다. 남자 건 여 자건 노인이건 젊은이건 한국사람 외국 사람을 가릴 것 없이 다 잘 살게 해 주고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해 주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 한 방울만 떠 주어도 은혜(恩惠)를 베풀어주었다 하여 공치사(功致辭)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굴레에다가 뒤집어 씌워서 구속을 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본래 있으니까 나를 준 것이지 네 것을 주었느냐.” 하고 감정적(感情的)으로 말을 해도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러니저러니 하고 시비(是非)가 분분(紛紛)해집니다. 그래서 생사번뇌(生死煩惱)가 질펀하게 벌어져서 고통(苦痛)의 세계가 됩니다. 그러니 무신경(無神經)이 되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면서 남을 도와주기도 하고 남에게 받기도 하고 해야 합니다.

  보시(布施)에 대해서 시수물삼륜(施受物三輪)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이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해야 합니다. 출가(出家)해서 처음 절에 들어가면 이것부터 배웁니다. 곧 수레는 여기 있는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는 도구(道具)로서 세 가지 바퀴는 첫째 시륜(施輪). 수륜(受輪). 물륜(物輪)의 셋입니다. 시륜(施輪)은 남에게 무엇을 주는 것을 뜻하고 수륜(受輪)은 주는 물건 받는 것을 뜻하고 물륜(物輪)은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주고받는 돈이나 밥이나 물건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건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본래 면목(本來面目)이 공적(空寂)하고 청정(淸淨)함을 알아서 주고받는 자리가 없는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으면 빚 갚을 사람이 생기고 빚 받을 사람이 생깁니다. 땅 위에 공공연(公公然)히 있는 물건을 도둑질해서 이쪽 물건을 저쪽으로 옮긴 것뿐이니, 주는 생각 없이 주어야 완전한 인간이 됩니다. 내 것을 남에게 주었거니 하고 생각하면 이것이 지옥 갈 시초(始初)가 되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도 아무 게한테 무엇을 받았으니 큰 빚을 졌구나 하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보다 더 급한 사람 있으면 생각 없이 또 주기도 합니다. 은혜를 졌다 해서 고맙다 감사하다는 생각으로 받으면 이 사람은 물건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야 수륜이 청정한 것입니다(受輪淸淨).

  천지(天地)에 공공연하게 있는 땅을 마음대로 금을 그어 놓고 압록강(鴨綠江) 이쪽은 중국 땅이니 못 온다 하여 국경(國境)을 만들고, 물건은 아무개 것이라고 소유권(所有權)을 인정하며, 농사를 지어 추수(秋收)해 자기 집 곳간에 쌓아 두고는 이것은 내 것이니 아무도 가져가지 말라 합니다. 이런 것이 다 잘못이고 중생살이입니다. 그러지 말고 입 있는 사람 배고픈 사람 다 오라고 해서 농사를 지어야 바로 하는 농사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잘못된 근본 생각이고 생사를 윤회(輪廻)하게 된 근본 착각(錯覺)입니다. 나를 내 세워서 소유권(所有權) 행사를 하려하고 끝없는 욕심(慾心)을 내어 점령(占領)하려는 착각(錯覺)이 삼차전쟁(三次戰爭)을 일으키려는 근본망상(根本妄想)입니다. 천지(天地)에 공공연히 있는 청정한 물건을 아무 윤리(倫理)도 도덕(道德)도 없이 대포알이 한 개만 더 있어도 먼저 기습해서 점령하려고 하니 모두가 도둑의 심보입니다.

  그러므로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한 도리를 잘 배워서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상 없는 무상(無相) 무소주(無所住)로 아무 생각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청정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첫째 나부터 내 가정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나절 일해 주고 밥만 한 그릇 달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시킬 겁니다. 옷은 쓰레기통에서 주어 깨끗이 빨아 꿰매 입을 요량(料量)하면 됩니다. 이것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를 배우는 태도입니다.

 

原文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解義 남을 위해서 보시(布施)하는 데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지식보시(知識布施)이고 돈이나 재물(財物)을 보시하는 재보시(財布施), 어려움을 당했을 때, 외로울 때, 도와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보시를 함에 있어서 아무데도 머무름 없이 조건 없이 불교의 올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법보시(法布施), 재물로 남을 구제해 주는 재보시(財布施), 외로움 두려움을 보살펴 주는 무외시(無畏施) 등의 보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눈으로 보아서 보기 좋은 것은 좋다고 집착하고, 더럽고 거칠면 싫다고 미워하여 좋아하는데 집착하든지 싫은데 집착하든지 합니다. 미인(美人)은 좋아하고 추녀(醜女)는 싫어하며 집도 크고 아름답게 지었으면 좋다고 집착하고 모양 없이 지은 초가삼간(草家三間)은 추하여 싫다는 생각에 집착됩니다. 이와 같이 눈을 통해서 집착될 수 있는 객관(客觀). 시각(視覺)의 대상(對象)으로 받아들이는 물질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여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 쓰는 빛색자(色)는 빛깔이나 물질의 모양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객관을 뜻하는 글자이니 부주색(不住色)이란 말은 곧 눈에 끄달리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입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聲)나 코로 맡는 향기(香)나 혀로 아는 맛(味)이나 몸으로 아는 촉감(觸)이나 어떤 사상. 지식. 도덕. 윤리. 신앙. 종교 등의 법(法)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성악(聲樂)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나는 성대(聲帶)가 좋다 학급에서는 내가 제일이다.”하는 자존심(自尊心). 아만심(我慢心)을 가지고 남에게 노래를 들려주려면 잘 안 됩니다. 또 말을 잘한다고 해서 청중(聽衆)을 무시(無視)하고 강연(講演)을 해도 그것은 안 됩니다. 더구나 불법(佛法)을 설명하는 법사로서 “나 같은 법사 또 있을 수가 있나, 나 말고는 법사가 또 없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큰 탈입니다. 아상(我相)이 꽉 차서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 밑에 마당가에서나 설법을 하는 사람이지 방안에서 올바른 설법은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소리가 좋다든지 말을 잘 한다든지 하는 등의 소리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不住聲布施).

  또 의복(衣服)을 한다던가, 아들을 처녀한테 장가를 보낸다던가, 자기 딸을 어떤 총각한테 시집보낸다던가 하는 것을 다 보시(布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좋은 촉(觸)을 수용(受用)하도록 해 준다는 뜻입니다(不住觸布施). 또 일체 만법(萬法)을 다 설명해서 세상 지식을 다 알고 불법도 다 알아 이런 것을 다 이해시켜 주지만 그 진리가 꼭 이런 것이라는 결정적인 고집(固執)을 버리고 그런 생각에 머물지 말고 가르쳐 주고 보시해 주라는 것입니다(不住法布施).

 

原文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解義 부주색보시(不住色布施), 부주성향미촉법보시(不住聲香味觸法布施)를 해석할 때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 “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기는 경우와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고 풀이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의 해석은 “보시하라”는 뜻이 있지만 뒤의 해석은 “보시하지 말라”는 뜻이 되므로 뒤의 해석에 따르면 중생을 제도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고 불법도 전할 자비심이 없는 독성나한(獨聖羅漢)이 되어 소승불교(小乘佛敎)에 가깝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證得)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불과(不果)를 증득하지 못 하게 됩니다.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해석해야 대승불교(大乘佛敎)로 되고 잘했다는 생각, 고맙다는 생각까지 버리고 설명하는 동시에 “발심(發心)하라, 일일이 활동하라, 생사가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생사인 대승심(大乘心)을 가지고 대승행(大乘行)을 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 앞에서처럼 새기면 소승이고 뒤의 해석대로 새기면 대승이 된다고 잘라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새기든지 뜻은 바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 “색에 머물러서 보시하지 말라”는 말도 곧 “색에 머무르지 말고 보시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고집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하므로 “색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경문(經文)을 계속해서 새겨 봄으로서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보살은 빽빽이(마땅히) 이렇게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수菩提菩薩應如是布施不住於相)” “이와 같이 보시하고 상에 머물지 말라”한 말씀이 분명히 있으니 앞의 구절도(句節)도 <보시하라>는 뜻으로 긍정적(肯定的)인 해석을 해야 할 것입니다.

 

原文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解義 왜 그러냐 하면 만일 보살이(若菩薩) 상에 머물지 않고, 객관의 현상에 대해 아무 욕심이 없이 집착하지 않고 남을 위해 도와주고 보시하면(不住相布施), 그 복과 덕이 한량없이 많기 때문이니라(其福德不可思量) 하셨는데, 가령 농사(農事)를 짓되 추수(秋收)를 해서 내 곳간에만 쌓아 두지 말고 누구든지 배고픈 사람 있으면 먼저 먹으라고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마침내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없어지고 정말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되어 버립니다.

  금강경이 상하권(上下卷) 두 권인데 이 금강경만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경보는 힘이 생겨서 다른 경전(經典)을 볼 때에도 다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경보는 눈이 열렸다고 하여 경안(經眼)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장가들면 신랑 노릇 잘 할 수 있고 시집가도 요조숙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라에는 충신(忠臣)이 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게 됩니다. 금강경의 도리로 무심하게 아무 생각 없이 상대를 위해서 봉사했기 때문이고 나 없는 마음으로 인아산(人我山)을 부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에 그 복덕이 한량없어서 헤아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뚱이가 내가 아니므로 이 한 몸을 다 바쳐서 하나뿐 아니라 열 백 천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남을 위해 보시할 수 있고, 생각 없이 하므로 상대의 뜻에 맞추어서 남을 가장 잘 위하는 방법으로 온 정성을 다 해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강경의 말씀을 해설해 주고 육신이 내가 아니고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온갖 보살행(菩薩行)을 할뿐이므로 그 복덕이 한량없다고 한 것입니다.

原文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

       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 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解義 부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하는 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허공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동쪽의 허공이 얼마나 되겠느냐. 허공의 끝이 있겠느냐(東方虛空 可思量不)”하고 수보리존자에게 물으셨던 것이다. 허공은 제일 큰 공간(空間)이어서 그 크기가 무한대(無限大)입니다. 끝이 없고 시작이 없는 무한(無限)이니 동쪽의 허공도 무한이고 서쪽의 허공도, 남쪽의 허공도, 북쪽의 허공도 무한입니다. 동남. 서남. 동북. 서북의 간방(間方)도 그렇고 상하(上下) 아래위의 공간도 무한하여 끝이 간 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사방팔방만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렇게 평면적인 공간세계만을 말하지 않고 방위(方位)를 말할 때에도 입체적으로 생각하여 동서남북의 사방과 4간방(間方)에다 상하방(上下方)을 합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말합니다. 경문(經文)에 남서북방사유상하(南西北方四維上下)라고 한 말들이 곧 그 말씀인데 사유(四維)는 네 간방을 가리킨 말입니다. 허공의 크기가 본래 한계(限界)가 없는 것이므로 얼마나 큰지를 비교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끊어져서 무심으로 하는 도심(道心)은 헤아릴 수 없고, <나라는 생각(我相)>. <남이라는 생각(人相)>. <중생이라는 생각(衆生相)>. <오래 산다는 생각(壽者相)>이 없어져서 머무는 것 없는 마음으로 아무 조건 없이 중생을 위해 보시하는 공덕은 무한대(無限大)의 허공처럼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한 것입니다.

 

原文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解義 부처님께서 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의 결론으로 “보살은 다만 가르쳐 준 그대로 머무르라(菩薩但應如所敎住)”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보리존자께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처음에 부처님께 법문(法門)을 청(請)하여 여쭈어 볼 때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云何應住) 어떻게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이까(云何降伏其心)”한 물음에 대한 마지막 대답이십니다.

  부처님의 경전(經典)에는 언제든지 나중 물은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물은 것은 뒤에 대답하십니다. 마치 회의(會議)하는 규칙(規則)에 개의(改議). 재개의(再改議)가 나오며 재개의, 개의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문제를 낸 동의(動議)는 맨 나중에 결정하는 논리(論理)와 같습니다. 이 금강경에서도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을 나중 물었으므로 잘난 체하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없애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마음을 항복하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하시고 나서, 운하주(云何住)에 대한 말씀을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지 않고는 마음을 바로 가지고 바로 머무는 일(住)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먼저 말씀하시고 운하주(云何住)를 나중에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열 가지든 백 가지든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말씀해 주셨으며, 49년 동안 이순서(順序)를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제삼장 대승정종뿐(大乘正宗分)에서는 먼저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으로서 중생심(衆生心)을 가지고 내가 잘하거니 하는 생각 아예 하지 말고 설법(說法)을 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서 마음을 머무르는 법을 말씀하시기를, “보시를 하되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주하는 방법이 “주하지 말고 하라”는 것이고 또 만일 “주하지 않는데 주한다”, 그러면 그것 역시 주하는데 떨어진 것이 됩니다. 마음을 주한다 함은 우리말로 마음먹는다는 소리인데 “이렇게 마음을 먹어라”하는 말도 마음먹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곧 열반을 향해서 보시를 꾸준히 행하라, “내가 본래 부처이니 부처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라”는 것입니다.

 

[說義]

(1) 처음부터 끝까지 여시의 숙제

  금강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여시>(如是)가 자주 나옵니다. 이 “여시”가 어떤<여시>인가. 누구든지 자신 있으면 내가 묻기 전이라도 얘기하십시오. 경산림(經山林)을 다 마칠 때까지 이 여시(如是)가 숙제(宿題)가 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참말로 깨칠는지도 모릅니다. 뉴우톤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류 인력(萬有引力)의 원리를 발견(發見)하듯이 법문 듣고 오고가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깨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스님들 깨친 얘기를 들어보면 닭 우는소리를 듣고 깨치고, 물 내려가는 소리 듣고 깨치고, 복숭아꽃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보고 깨치고, 사람들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치기도 하고 상여 나가는데 상주(喪主)가 “아이고”하고 우는소리 듣다가 깨치기도 합니다.

  이 “여시”에 금강경의 내용 전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을 숙제로 해서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뉴우톤처럼 자나 깨나 오거나 가거나 법문을 들을 때나 식사(食事)를 할 때나 이 숙제만 가지고 있으면 홀연히 깨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여시”를 완전히 대답할 수 있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다같이 눈 둘 있고 코 하나 있고 하니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지만 설사 우리가 그 분이 도인(道人)인 줄 모르고 산다 하더라도 이런 분이 우리나라에 계신 것만 해도 우리한테는 큰 은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용심(用心)이나 행동이 나만도 못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보살(菩薩)이라 한 말은 보리(菩提)와 살타(薩埵)가 합해진 말인데 보리 곧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밑에 살타 곧 중생은 아직 중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니 용심이 이러니 행동이 저러니 하고 함부로 말하다가는 까딱 잘못하면 큰 죄를 짓기 쉽습니다. 견성(見性)을 해서 깨달았다 해도 중생 놀음하던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것을 당장 떼어 낼 수는 없습니다.

  이번의 금강경 산림 가운데 정말 깨쳐서 <여시>에 대한 도리를 아는 사람이 생기고 경을 알고 대답할 사람이 생기면 참으로 경사(慶事)지만 그렇게는 못된다 하더라도 알음알이의 분별로라도 알 수 있는 데까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경을 혼자서만 보는 것보다는 남하고 이렇게 저렇게 토론(討論)을 하고 같이 연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강원(講院)에서도 나 혼자서는 밤새도록 보고 새벽에 보고 아침에 보고 낮에 보고 해도 이해가 잘 안되다가도 서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정신이 번쩍 나서 풀리어집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기(傲氣)로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주의(注意)를 집중하는 바람에 정신이 통일되어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정신을 희미하게 가지니까 그렇지 정신을 일념으로 통일하여 마음자리에 가깝게 접근하면 <여시>의 지혜가 열리게 마련입니다.

 

(2) 견성해도 대승행 닦아야

  그래서 반야경(般若經)의 실상반야(實相般若),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을 깨달았으면 그런 다음에는 보시(布施)를 하라, 그리고 육바라밀을 다 행하라, 하는 것은 실상 반야만 지키고 있으면 그것은 소승(小乘)의 나한(羅漢)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은 초견성(初見性)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이런 잘못은 없습니다.

  요새 참선(參禪)하는 수좌(首座)들이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은 하지 않고 참선 하나만 제일이라고 해서 복을 짓지 않고 중생제도(衆生濟度)할 줄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경지(境地)에 들어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 된 것인 줄로 알고 공(空)에 떨어질 것을 염려(念慮)하여 육조대사께서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의 경지를 체득(體得)했으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중생의 제도를 위해 전념(專念)하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일체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도하라. 제도를 하되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천당(天堂) 사람도 되고 태생(胎生). 난생(卵生)도 되고 지옥(地獄)도 되고 한 것이니, 그 사람을 근본적(根本的)으로 내가 고쳤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지도(指導)했다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그런 것 느끼지 말고 저건 내가 제도한 중생이거니 저건 내 신도(信徒)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그런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문(法門)을 듣고 배우는 중생들에게도 듣고 배운 건 다 알고 나면 잊어버리고 들을 줄 아는 그것도 깨치도록 해서 지도를 받았거니 배웠다 거니 하는 아상. 인상이 없어지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시(布施)하고 계행(戒行)도 잘 지키고 인욕(忍辱)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辱)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남이 욕한다고 야단 치고 보복(報復)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煩惱)의 생사심(生死心)만 늘지 언제 보리(菩提)를 성취(成就)합니까. 그래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근본이지만 반야를 깨친 다음에는 그래서 나의 업보(業報). 망상(妄想)을 쉬고 녹이는 데는 인욕(忍辱)이 중심이 됩니다. 남이 칭찬을 해도 들은 체 만 체할 것도 없고 남이 욕을 하고 때려서 반죽음이 되었어도 “왜 그러냐”고 한마디 따질 것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이 마음자리는 어제도 이 모양이고 오늘도 이 모양이고 내일도 이 모양이고 여려 천만 년 전에도 지옥에 갔을 때나, 천당에 갔을 때나, 성불(成佛)한 뒤나 똑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다른 건 모두 다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생겨나고 하는 갈팡질팡하는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존재이지만 이 마음자리는 중생이나 부처나 다 같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자리이기 때문에 온 중생이 두루 다 평등한 것이므로 내가 깨우쳐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정말 따르는 사람이라면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내가 부처 되는 방법이고 번뇌를 해탈하는 방법인 줄 알아야 하고 당장 천하태평객(天下泰平客)이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거나 실패를 했다 성공을 했다.” 그런 것이 없는 생활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현실(現實)은 마음에서 생긴 꿈이니 이런 식으로 알고 내일부터라도 흉내 내어 살아 봅시다. 오늘 저녁부터라도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하면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어도 능률이 더 나고 근심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제는 죽고 살고 흥망성쇠(興亡盛衰). 시간세계(時間世界)를 다 초월(超越)해서 망각(忘却)했기 때문입니다. 공포증(恐怖症)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있고 욕심이 앞서 있으면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정구장(庭球場) 앞을 지나치던 정구선수가 친구의 권유(勸誘)로 아무 부담 없이 잠깐 쳐보려는 생각으로 몇 번 친 것이 선수 생활 십년 동안에 한 번도 쳐 본 일이 없는 아주 훌륭한 볼을 칩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꼭 이기겠다는 욕심이나 지면 큰 일 이라는 공포심이 없이 아무 생각 없는 무심(無心)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부처가 정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심(無心)한 근본 자성 자리에 합하기만 하면 이런 묘한 기술(技術)이 나옵니다. 권투나 축구나 검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연습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본래 만능(萬能)하던 마음자리가 안심(安心)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만 되면 세계 최고의 기술이 나옵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잘 써야 되겠다는 공포증(恐怖症) 때문에 잘 안 써집니다. 왕희지(王羲之) 같은 이도 어느 날 친구의 연회(宴會)에 초대되어 만취(滿醉)하여 돌아와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 줄 썼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 보니 자기로서는 십년 백년이 걸려도 쓸 수 없는 명필(名筆)이 있어서 “어느 신선(神仙)이 와서 나를 깨우쳐 주려고 써 놓은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며칠 뒤에야 자기가 취중(醉中)에 썼다는 것이 기억(記憶)이 됐는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글씨의 십분의 일도 따라 갈 수가 없었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글씨도 무심하면 자연히 명필이 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 조건 없이, 어디에고 이끌림 없이, 남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應無所住) 남을 도와주고 보시를 행한다면(行於布施) 큰 보람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능력을 내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에 머무름 없이 부주상으로 보시(不住相布施)하면 그 복덕이 한량없이 많아서 생각으로는 헤아려 볼 수 없는 무한대한 복덕을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3) 불입문자 교외별전의 자리

  그러면 머무른 데 없이 보시를 행한다(應無所住 行於布施)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시하는 것을 뜻하는가. 앞에서도 말한바 있는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리는 생활. 육체 생활을 정리해서 하루 종일 나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차차 돌리고 탐욕만을 위해 살던 생활을 정리해서 참을 위해서 사는 생활로 돌리며 오직 남만을 위해서 사는 보살행을 하라는 말입니다. 보살행은 본래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고 하여 위로는 부처님의 보리. 열반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니 보리라 함은 생사도 열반도 없고 시간도 공간도 남자도 여자도 부처도 중생도 초월하여 초월한 그것까지 없는 자리를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보리를 깨쳐서 무심한 마음으로 오직 남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보살행이라 합니다.

  내가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은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니고 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몇 시간 얘기를 계속해도 피로가 안 오는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마음은 글이나 지식으로 분별해서 알아질 수 없는 자리이므로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도리라 합니다. 말이나 문자를 가지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석가세존께서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이심전심의 법으로 전법하셨으므로 교 밖에 따로 전했다 하여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합니다. 또 이 자리는 말이나 글로 가르치는 것은 오히려 간접적인 방편에 불과하므로 마음을 직접 가르쳐서 그 본성을 깨우치게 함으로 응무소주(應無所住)해서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도리로 성불하게 하는 법이 바로 선종(禪宗)입니다.

  그래서 대선사(大禪師)에게 법문을 청할 때나 주요한 의식을 할 때면 늘 이런 게송(偈頌)을 외웁니다 “아유일권경 불인지묵성 개권무일자 상방대광명(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開卷無一字 常放大光明)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사람마다 다 이 경전이 있지만 그러나 이 경전은 종이나 먹으로 쓴 글씨거나 인쇄 제본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므로 펴 봐야 한 글자도 없다. 이렇게 종이나 먹으로 된 책이 아니어서 한 글자도 없는 이런 경전이 나에게 한 권이 있는데 상방대광면(常放大光明)”이라, 항상 큰 광명을 발하여 전 우주를 환히 비추고 있다. 이것이 곧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금강경의 믿음으로 보면 반야(般若)고 내가 항상 말하는 마음입니다. 이 반야. 마음을 얻어서 중생제도를 위해 필요할 때면 손이고 발이고 눈이고 목숨이고를 돌보지 않고 다 보시하는데 지기를 희생했다는 생각도 중생이 구제됐다는 생각도 없이 하는 것이 보살행입니다. 이것이 “응무소주”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4) 부처님의 설법순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는 제자들이 대개 청법을 해 오는데 무엇은 어떻게 해야 하고 그 뜻은 무엇인지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때로는 열 가지 백 가지로 여쭈어 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처음 물은 것부터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맨 나중에 물은 것부터 먼저 한 문제 한 문제 설명해 주십니다.

  금강경도 제2절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에서 수보리존자가 먼저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오며(應云何住)”를 여쭈었고 나중에 “마음을 어떻게 항복하겠사옵니까(云何降伏其心)”하고 두 가지를 여쭈었는데,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제3 대승정종분에서 나중에 여쭈어 온 “마음 항복 받는 법”을 먼저 말씀하셨고 먼저 여쭈어 온 “마음 머무는 법”에 대해서는 제4 묘행무주분에서 나중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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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스님강설 金剛經

http://blog.naver.com/badre/30107217094

 

大乘正宗分 第三

대승정종분 제삼

 

佛告 須菩提하사되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불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을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아개영입무여열반

 

而滅度之하리니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하되

이멸도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實無衆生得滅度者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실무중생득멸도자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일세라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제3 대승불교의 진수(대승정종분)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시킬 것이다. 무릇 일체 중생의 종류인 <알로 생긴 것>. <태로 생긴 것>. <습기로 생긴 것>. <화하여 생긴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 있는 것>. <생각 없는 것>. <생각 있는 것도 생각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남김없이 다 부처되는 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 하여 이와 같이 한량없이 많은 중생을 다 제도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된 바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나라는 생각>. <남이라는 생각>. <중생살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Section III. The real teaching of the great way

Buddha said: subhuti, all the bodhisattva-heroes should discipline their thoughts as

follows: All living creatures of whatever class, born from eggs, from wombs, from moisture, 

or by transformation, whether with form or without form, whether in a state of thinking or exempt 

from thought-necessity, or wholly beyond all thought realms-all these are caused by me to attain 

unbounded liberation nirvana. yet when vast, uncountable, immeasurable numbers of beings

have thus been liberated, verily no being has been liberated. Why is this, Subhuti? it is because no 

bodhisattva who is a real bodhisattva cherishes the idea of an ego-entity, a personality, a being, 

or a separated individuality.

 

[科 解]

대승정종분 제삼(大乘正宗分第三)이라 함은 대승의 골수를 말하는 제삼장이란 뜻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 소승불교(小乘佛敎)하는데 소승불교는 자기 하나만 열반(涅槃)을 얻어 가지고 이 세상에 근심. 걱정 없이 나 홀로 편안하게 지내는 불교를 말합니다. “열반의 대해탈(大解脫)을 증득(證得)했으므로 지구(地球)가 깨지거나 우리 민족 다 죽거나 정치 거꾸로 하거나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이 육신(肉身) 잡아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런 것 때문에 신경 쓸 것 하나도 없다. 말도 안 듣는 중생들한테 타이르고 가르쳐 줘 봐야 말 안 들으면 욕하고 야단하고 똑같이 해야 되니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중생들 시비에 나 까지 말려들어서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다시 일어나고 말겠다.”고 하여, 자기 본위(本位)로만 생각하고 중생들 구제(救濟)할 생각을 안하는 것이 소승불교(小乘佛敎)의 태도이고 나한(羅漢)님들의 용심(用心)입니다. 그러니 이런 열반은 옳은 열반이 아니고 옳은 깨달음이 되지 못하므로 소승불교라 이름 했고,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염세주의(厭世主義)라고 지탄합니다.

대승보살(大乘菩薩)은 자비심을 일으켜서 고약한 중생에게 이런 법을 얘기해 주고 그들을 괴로움으로부터 건져주는 일에 헌신하는 구세주의(救世主義)입니다. 내 옳은 것을 남에게 옳다고 인식시키는 설교 시간이 나에게 가장 철저(徹底)하는 시간입니다. 나 혼자 독경(讀經)을 일 년 내 또는 평생 하는 것보다도 금강경을 한 번 읽고 단 반시간만이라도 남을 위해 해설하는 그 공덕(功德)이 참으로 비유도 안 되는 정도로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남이 알도록 설법하는 그 시간이 정말 불법이 자기 뼈 속에 골수 속에 박혀 자리 잡는 시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에게 법문 해 주는 공덕이 가장 크다고 한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나쁜 중생 이것이 나를 부처로 만드는 좋은 부처로구나, 도가 되는구나.”하고 부처와 중생과 마음을 하나로 봅니다. 그러니 가령 신부나 목사나 유교의 선비나 누구나 간에 몇 달 며칠이 걸리든지 그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는 걸 봐야 안심하고 가만히 있지 그전에는 밥을 얻어먹어 가면서 매일 자꾸 얘기만 합니다. “내 얘기 안들으면 못가겠다, 죽여도 좋다, 죽이려면 죽여라, 귀신이라도 당신에게 설교하고 말겠다.” 이렇게 까지 적극적이고 중생과 나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대원력(大願力)의 수행을 목적으로 하여 마침내 성불하려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이와 같은 대승(大乘)의 참 불교가 여기서부터 나오게 된다는 뜻으로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라 한 것이며, 또한 이것이 금강경의 요긴(要緊)한 대의를 밝힌 대문(大文)이라 할 것입니다. 금강경의 정종분(正宗分)은 서분(序分)과 맨 끝의 끝 부분인 유통분(流通分)을 뺀 전부이지만 그러나 금강경의 정종분(正宗分)을 다시 삼십일분으로 나누어서 볼 때에도 정종분 중의 정종분이 된다는 뜻으로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이라고 한 것입니다.

 

原 文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解 義 부처님께서 수보리존자에게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應如是住) 이와 같이 번뇌망상을 항복받으라(降伏其心)”하신 <이와 같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말씀하시려는 차례입니다.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보살은 인도 말로 보리살타(菩提薩埵), 곧 보리의 보(菩)자와 살타의 살(薩)자를 줄여서 합친 말입니다. 보리는 <깨달음>이란 말이고 <살타>는 중생이란 말이니 <보리살타>의 뜻을 번역하면 <깨친중생(覺有情)>이 됩니다. “마음을 깨쳤는데 아직 업이 남아 있어서 이성(異性)끼리 만나면 딴 생각이 나고 좋은 음식 봐도 먹고 싶고 그런 오욕업(五欲業)이 남아 있어서, 요새말로 덜 떨어진 걸로 봐선 중생이고 깨친 것으로 봐선 보리고 그래서 부처도 중생도 아닌 도인이다.” 이런 뜻을 가진 말이 보살입니다. 또 <마하살>(摩訶薩)이라고 하는데 마하(摩訶)는 크다는 뜻이며, 큰 보살이란 뜻으로 씁니다.

우리가 도인이란 말을 흔히 쓰는데 부처가 다 됐느냐 하면 아직 그렇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마구잡이 중생이냐 하면 중생도 아니란 뜻입니다. 참 중생도 참 부처도 아니고 부처가 되려가는 그런 중생, 부처에 가까워 가는 선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직 성인은 아니고 부처가 되지 못한 보살들, 마음이 완전히 밝게 드러나지 못한 도인은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받아라.” 그렇게 말씀하고는 여기서부터 조금씩 풀어 나가며 어찌해야 부처가 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다 같이 동냥해서 밥 먹고 똥오줌 누고 부처나 비구나 누구나 대중과 함께 앉았으니 표면상(表面上)으로는 똑 같은 것 같습니다.

수보리존자는 여기서 부처님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이며 우리가 부처님을 어떻게 따라 배우겠습니까. 부처님께 여쭌 것입니다. 아란존자가 경 첫머리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한 “이렇게”와 여기서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이와 같이 항복하라고 한 이렇게는 같은 말입니다. 곧 자세한 내용이 그 경안에 들어 있다는 뜻을 암시합니다. 하나의 전제로써 “이와 같이”란 말씀을 해놓고 이제 그 부처되는 길, 마음 항복 받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原 文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解 義 소유일체 중생지류”(所有一切 衆生之類)란 광대무변한 우주에 무수한 중생들이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 많은 중생들은 그 종류와 수가 많아서 사람. 벌레. 물고기. 날짐승 등 온갖 것이 다 있는데, 금강경에서는 이 중생들을 대체로 아홉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난생(卵生)인 알로 까는 중생이 있고, 둘째 태로 나온 태생(胎生)이 있고 셋째 습생(濕生)은 습하고 썩은 데서 나오는 세균 같은 벌레들을 말합니다. 또 화생(化生)이란 꿈의 몸뚱이, 지옥천당의 몸을 말합니다. 꿈에 있는 몸뚱이는 아버지 어머니한테 받는 몸뚱이가 아니고 우리 마음으로 만든 몸뚱이 인데 이 몸뚱이는 기억에 의해 생겨 나온 기억의 몸뚱이며, 이것은 난생. 태생도 아니고 습생도 아니며 이 몸뚱이는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지옥 중생의 몸뚱이도 영혼이 바로 지옥으로 들어가 받는 몸으로 꿈에 있는 몸뚱이와 똑 같습니다. 그곳에는 부부 생활을 통해 태어나는 난생, 태생류의 출생(出生)이 아니고 영혼이 바로 천당 지옥에 가서 태어나는 출생 입니다. 천당사람은 영혼이 그대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며 극락세계는 빨간 연꽃이 피어 나와 가지고 그 속에서 사람이 저절로 생깁니다.

일정(日政) 때 원산서 있던 실화로서 화생의 실제를 말해주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번뇌가 있어서 크게 고민하고 있던 한 청년이 밝은 달밤에 명사십리(明沙十里)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한 쪽에 자리를 잡고 눈을 감은 채 이 생각 저 생각 얼마를 고민하다가 눈을 떠보니 달도 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없는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은 집에나 들어가 보자 생각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나이도 자기와 비슷하고 키도 비슷한 웬 처녀가 자기 앞을 지나갑니다. 이 깊은 밤에 처녀가 혼자 가는 것을 보니 저 처녀도 나처럼 번뇌가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이야기나 해 보려는 마음으로 자꾸 가까이 붙어 따라가는데 그 여자는 뒤도 보지 않고 급히 가기만 합니다. 이 처녀는 무슨 번뇌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동지적 입장일 것이라는 호기심에 끝까지 따라가기로 마음 먹고 가는데 나중에는 어떤 집으로 들어가더니 마루에 올라서서 건너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닭 쫓던 개처럼 그 집 마당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여러 사람이 나와서 “너 이놈 웬 놈인데 밤중에 남의 집에 왔느냐. 도둑놈 아니냐.”하고 끌어내어 파출소로 붙들려 갔습니다. 청년은 범인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사실을 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떤 고민이 있어서 명사십리에 나갔다가 정신없이 저녁 늦게까지 있게 되었는데, 마침 깊은 고민에 잠기어 걸어가는 처녀를 보고 나와 같은 입장인가 싶어 동정하는 뜻에서 끝까지 따라 왔을 뿐입니다.” “이놈아 우리 집 딸은 몸이 아파 석 달째나 몸 져 누어서 바깥출입을 못하고 지금도 미음을 못 마시는데 명사십리를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하며 그 딸의 아버지가 호통을 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딸이 아버지하고 그 청년을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보니 딸의 이야기가 “아버지 제가 조금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평소에도 명사십리 한번 나가 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밝은 달이 창문에 비춰 오는 바람에 명사십리생각을 몹시 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 꿈 가운데서 명사십리로 나갔습니다. 꿈속에서 저도 너무 늦도록 오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지런히 집으로 오는 중인데 웬 청년이 제 뒤를 자꾸 따라 왔습니다. 저는 걸어가는 사람들도 없는 밤중에 가뜩 무서운데 청년이 따라 오므로 더 무서워져서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꿈이 깨었는데 지금 그 청년이 꿈에 본 청년인 것 같습니다.”하는 꿈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처녀의 꿈은 단순한 꿈이 아닙니다. 여러 달 명사십리만 자꾸 생각 하다 보니 자기 화신(化身:마음으로 화하여 된 자기의 분신(分身))이 꿈으로 나타나서 그 화신이 명사십리로 가게 된 것이고 그 청년과 만났던 것입니다. 이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자기 생각이 자기 몸으로 나타난 것인데, 꿈의 경우보다 한층 더 강한 마음의 힘에 의해 나타난 화신의 현실적 예라 할 것입니다. 요새 미국이나 영국이나 독일 일본의 심령학계(心靈學界)에서는 자기 화신을 외국에 보내서 같이 말도 하고 같이 일도 보고 그런 사람도 있고 말은 못하고 나타나서 얼마동안 있다가 없어지는 것도 있고 그런 화신이 있습니다. 부처님도 백억화신(百億化身)을 나타내시어 교화하셨습니다. 실달다태자도 사실은 부처님의 천억 백억의 몸 가운데 해당하는 화신입니다. 그래서 화신 보신(報身:공덕의 과보로 받는 불신의 하나) 하는 것이 다 꿈에 육신이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듯 다 같은 이치로 나타난 몸입니다. 인도의 실달다태자(悉達太子)는 천백억 분의 일의 화신으로서 정반왕(淨飯王)의 아들로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뱃속에 들어가서 열 달 동안 커가지고 나오느라 애썼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제일성(第一聲)을 하신 것 그것이 다 마치 화신이 나타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꼭 엄마 뱃속에서 나온 역사적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역사적 인물 그대로가 화신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화신(化身)이란 꿈에 그 몸뚱이가 단순한 죽은 물질이 아니어서 꼬집으면 아프고 참으로 육신이 있는 것으로 느끼듯이 그런 마음으로 화해서 나서 사는 생명을 말합니다.

유색(有色)이란 사람이든 짐승이든 벌레이든 간에 몸뚱이가 있는 중생세계를 말하고, 무색(無色)이란 정신만 있는 것 마음으로만 사는 중생을 말합니다. 하늘나라의 경우와 귀신의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유상(有想)은 정신활동을 하고 있는 중생세계, 무상(無想)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하늘나라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없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잠재의식 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 무색계천(無色界天)에 가면 현상계를 초월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어떤 근본적인 번뇌, 잠재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상이란 잠재의식만 있는 상태의 생활, 다시 말하면 잠재의식이 근본적으로 끊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비하면 잠재의식까지도 끊어진 거나 한가지인 세계를 말합니다.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중생세계는 무슨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있고 없고를 다 초월하고 나면 마음속에 저절로 이런 경지가 나옵니다. 인간세상에서도 공부를 해서 무아지경(無我地境)에 들어가면 자꾸 깊이 들어갈수록 재미납니다. 마치 고단할 때 잠이 푹 들어 깊어지면 그럴수록 재미있어서 잠을 깨기가 싫은 것처럼 선정(禪定)도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닌 상태에 사는 하늘나라의 중생을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중생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의 가장 높은 최고의 하늘나라에 가면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이 있는데 이곳의 하늘나라가 바로 그런 정신의 경지에서 사는 중생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나라도 생사(生死)를 완전히 해탈(解脫)한 것은 아닙니다.

 

原 文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 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解 義 이렇게 각양각색 각종의 모든 중생의 수는 실로 무량무수이어서 한강모래의 천만억 배나 되는 그런 모래 수의 몇 억 제곱보다도 훨씬 더 많습니다. 그 많은 중생들을 “아개영입 무여열반(我皆令入 無餘涅槃), 내가 모두 부처님이 들어가시는 열반에 들어가도록 공부를 가르쳐 한 중생도 남김없이 부처가 되게 하고 말겠다.” 보살은 이렇게 원(願)을 세우고 그 원을 끝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중생들을 다 제도해서 그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적멸열반(寂滅涅槃)에 들어가도록 했고, 번뇌망상을 남김없이 없애서 절대의 행복을 얻게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내가 인연 따라서 그들이 수도할 수 있도록 가르친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는 동안 무수한 나의 목숨을 저들을 위해 희생했고 그래서 그들이 다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실무중생득멸도자(實無衆生得滅度者), 곧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생으로서 너 한테 배워 발심하고 네가 지도해서 마음 깨쳐 부처 된 중생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에만 있고 다른 데는 없는 법문(法門) 입니다. 어느 중생도 제도(濟度)했다는 생각이 없는 이것은 일체 번뇌가 없기 때문이니 만일 그 생각이 남아 있으면 그 생각을 하는 것이 곧 번뇌가 되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다 떨어져서 열반의 경지에 마음이 합하면 그런 생각 낼 필요도 없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말이나 이치로만 그렇고 실제로 안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치도 실제도 완전하게 그렇다는 뜻입니다. 중생이니 부처니 선(善)이니 악(惡)이니 하는 것은 다 중생의 현실이라고 하는 꿈속에만 있는 번뇌이기 때문입니다.

 

原 文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解 義 한없이 많은 중생을 네가 실제로 제도했지만 제도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너는 보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모든 중생을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기만 하면 이것은 곧 아상(我相)이 되고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이 되고 수자상(壽者相)이 되는 때문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 여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금강경에서 중요한 대문이니 역시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을 깨칩니다. 내가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 그것도 아상이 됩니다.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아무 딴 조건 없어도 이것이 주관(主觀)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인정하게 되고 무정. 유정 등의 온갖 객관(客觀)이 있게 됩니다. 객관을 전제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인상(人相)입니다. 더욱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하면 “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육체가 나다.”라고 하는 그 나라고 하는 생각 그것이 아상이고 또 나 아닌 모든 것, 현상계. 객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허공도 다 나는 아닙니다. 이것이 인상입니다. 중생상(衆生相)이란 “결혼해야겠다, 돈을 벌어 살림살이 장만해서 아들 딸 대학까지 졸업시켜야겠다. 우리도 남들처럼 뭣도 하고 뭣도 해야겠다.”하여 모든 살림살이를 차리는 것이 중생상입니다. “장가가려면 부잣집 딸한테 가서 처갓집 덕을 좀 봐야겠다, 부잣집 총각한테 시집가서 호강 좀 해야겠다.” 하는 등의 이런 생각 내는 게 다 중생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살림살이에 대한 번뇌 망상을 중생상이라 합니다.

수자상(壽者相)이란 남도 칠십 팔십 사는데 나도 적어도 칠십 팔십은 살겠지, 금방 아파 죽을지도 모르면서 만날 오래 살기 위한 준비하느라고 온갖 애를 다 쓰다 준비도 못다 하고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술 먹은 깡패에게 맞아 죽을는지, 마누라하고 싸움하다 죽을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인데 칠십 팔십 나도 살 거니 안심하고 삽니다. 또 칠십 팔십 살았다 해서 만족하냐 하면 그렇지 못하고 몇 억만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을 적에 이 약 먹어야 산다고 하면 쓴 약을 자꾸 받아먹습니다. 이것이 삶에 대한 애착이고 수자상입니다. 산삼을 보면 한 뿌리 사먹었으면 해서 침 안 삼키는 사람 없습니다. 난 복이 없어 산삼 구경도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좋은 약 비타민 영양제 나왔다면 다만 한 병이라도 사먹고 싶어 하는 것, 이게 모두 수자상입니다.

그런데 만일 보살이 “어떤 중생 내가 제도했다” 그러면 그것이 아상입니다. 대승불교 하는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살림살이 걱정하든지 아들 딸 걱정하면 안 됩니다. 전 중생이 모두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 어머니이고 우리 딸이고 아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 중생제도 하겠다고 나선 보살이 내가 지도해서 깨달은 중생이 있거니, 제도 받은 중생이 있거니, 생각하면 이것이 인상(人相)입니다. 그래서 나는 선생이고 너는 제자라고 하면 이것이 중생상(衆生相)이고 그러면 자연히 수자상(壽者相)도 따라오게 됩니다.

 

[說 義]

(1) 육신 생활 떠난 보살의 세계

무량무변 중생을 모두 내 식구로 삼고, 이 식구를 모두 불문(佛門)에 들어오게 하여 자기 자신의 인간성(人間性)을 개발해 가지고 생사를 초월하게 합니다. 이렇게 인간성(人間性)을 깨달아서 전지전능해 놓으면 아무 근심 걱정 없습니다. 내 앞에 죽은 귀신이 다 대들어도, 세계 깡패 다 모여들어도 내가 손톱 하나만 까딱하면 다 떨어지는 그런 완력(腕力)이 생깁니다. 그런 신통(神通)도 있을 뿐 아니라 지혜로도 모르는 게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마음 하나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데서 과오(過誤)가 있고 전생(前生)이고 후생(後生)이고가 있지, 마음이 나인 줄 깨달아 놓고 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고 이 전체가 마음 하나뿐이므로, 허공이 한없이 무한허공(無限虛空)이라고 하지만 마음한테 비하면 무한대의 허공도 역시 내 털구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깨치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아무 근심걱정 일어날 조건이 없어지고 번뇌가 일어날 아무 이유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음만 깨치면 의식주(衣食住)가 필요 없고 권리(權利)도 돈도 필요 없고 꼭 살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죽을 수 없는 산 것이니까 영원히 자유한 것이고 그리고 남녀노소가 없는 평등한 것이니 오직 마음자리만이 전 우주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것이 <나>이거니 생각하고 우리의 육체생활(肉體生活)을 조금씩 축소시켜야 하며 하루 밥 세 그릇 가지고 세 끼 먹던 것을 두 그릇 먹고 한 그릇 남겼다가 불쌍한 사람, 거지 오면 밥 한술 더 주는 이것이 자기 육신생활 포기(抛棄)하는 것인 동시에 참 자기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차차 “한 그릇 가지고 하루 먹고 두 그릇 남 주자” 그렇게 할수록 한 그릇 먹고 사는 때가 세 그릇 먹고 사는 때보다 욕심이 없으니, 그래서 욕심이 떠나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잠 안 자도 정신이 깨끗해지고 편해집니다. 밥 세 그릇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염불이나 참선해 봐야 큰 공부 할 수 없습니다. 아침 먹고 얼마 있다가 배고프면 또 점심 먹어야 하니 “이 밥 왜 안 주나. 왜 목탁(밥 먹는 신호)을 안치나”하는 생각으로 화두(話頭)고 참선이고 다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나라고 하는 생각을 떼어 버리는 생활, 이런 사고방식(思考方式)으로 나아가면 차차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적어지고 조금 먹어도 건강이 유지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참 우리 생활개선(生活改善)입니다. 꼭 잘 먹어야 하는 줄 알고 영양가치 있는 것만 찾고 이런 것은 몸에 해로운 것인 줄로만 알았던 것도 마음이 편하고 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양잿물을 먹어도 독소(毒素)가 안 됩니다. 실지로 해 본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 잘 먹고 못 먹는 것이 없어집니다. “항복기심”(降伏其心)을 이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육체 생활만 치중(置重)하는 것에서 차차 육체 생활을 감축(減縮)해가면 편안하고 잠 잘 오는 음식을 조금 먹어도 몸이 건강해지고 이렇게 마음 세계로 들어가서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 완전히 마음을 깨쳐 불보살 지경(地境)에 들어서면 전지전능해집니다. 집도 밥도 없는 게 승려생활입니다. 남이 해 놓은 밥 얻어먹고 그저 만나는 대로 애나 어른이나 자꾸 따라다니며 <마음>을 일러주고 알아들었으면 또 딴 사람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를 모른다면 하나를 일러 주고 누워 자도 설법해 주고 죽어 송장이 되어도 가르쳐 주고 “죽어도 네가 죽은 것이 아니다. 네가 왜 죽느냐 너는 죽을 수 없다” 우리 불교법문 전부가 이런 소립니다. 경전이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모를 뿐 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이 만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하신 것입니다.

 

(2) 중생교화(衆生敎化)가 곧 나의 완성

불교는 말하기는 쉬운 것 같아도 실천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왜정 때 개운사(開運寺)에 시골서 큰 대법사(大法師)가 한 분 올라왔습니다. 그 법사가 법화경(法華經). 화엄경(華嚴經) 설명을 하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우주관. 인생관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부처가 다 된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생긴 것도 그런 법문을 할 때 보면 얼굴이 꼭 부처님 닮았습니다. 밑에서 쳐다보면 세상에 사람이 저렇게 잘 생길 수가 있나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법문 다 듣고 신도들이 다 돌아갔는데 어느 한 선비가 그 법사님을 개인적으로 찾아뵙고 하는 말이 우리 조모님이 한 분 계신데 돋보기가 없습니다. 스님께서도 우리 조모님과 나이가 같으신 것 같은데 그 돋보기가 좋아 보이니 그것을 주시면 참 고맙겠습니다.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 스님은 “내가 이것 없이는 설법도 못하고 큰일 납니다. 다른 것은 다 줘도 이것만은 안됩니다.”하자 그 선비는 코웃음 치며 “안경도 못 내놓는 사람이 딴 걸 어떻게 내놓겠는가. 돈이 있어도 혼자만 쓰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껄껄 웃으며 “입으로만 부처 노릇 하면 됩니까”하고는 절한 뒤 물러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부처님의 뜻을 요약하면 “수보리야 발심한 보살은 이와 같이 네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이다. 네 마음 가운데 죽 끓듯이 일어나는 태평양 파도 같은 번뇌를 항복받는 방법이 무엇이냐. ‘이와 같이’란 ‘여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이제 무량한 중생을 다 제도하리라 원을 세워가지고 동대문 시장도 가고 남대문 시장도 가고 남산도 올라가고 한강. 해운대. 금강산 어디에도 가서 길에서나 차안에서나 어디 가다가 아무데서나 사람 모인데 있으면 설법해 주고 그래서 실지로 미쳤다고 젊은 놈이 저런다고 쫒아내면 달아나다 안 쫒아오면 또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어라. 이렇게 확실히 미쳐야 하는데 여러 평생 미쳐 따라다니며 이렇게 하지만, 그래서 실지로 내가 많은 중생을 발심(發心)시켜서 성불시키지만 내 마음에는 내 설법 듣고 발심해 부처된 사람 하나도 없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너의 번뇌를 꺼 버리는 항복기심(降伏其心)하는 법이다.” 그러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뜻을 잘 모르면 염불(念佛). 참선(參禪)해 가지고 그 뜻을 알 때까지 하여 그 말을 알아들으면 부처가 됩니다. 사실은 우리가 몰라서 중생이지 불법을 다 알아듣고 나면 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그러니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정말 부처님 말씀을 못다 알고 덜 닦아서 보살이 아니라 중생을 다 건지기 위해 일부러 하는 보살입니다. 그러나 일체 중생이 그 법문을 듣고 깨달아도 문수보살에게는 부처 된 중생 한 중생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번뇌가 끊어지느냐. 왜 그렇게 똑바로 생각하는데 팔만 사천 번뇌를 일시에 다 해결 할 수 있느냐.”하는 그 뜻을 짐작이라도 바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3) 사상(四相)은 육체를 나로 삼는 데서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四相)을 중시하는 것은 이것만 떨어지면 <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상>이라 함은 내가 항상 말하는 육체를 <나>라 하고, 생각을 <나>라고 하는 <가아(假我)>를 말합니다. 이 <가아>인 <아상>이 있기 때문에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해서 사상(四相)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무엇인가. 발심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안다는 말은 인생을 바로 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本性)을 발굴해서 자기가 갈 수 있는 길을 깨달은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깨달은 이인데, “이런 사람은 어떻게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어떻게 백팔번뇌 팔만사천 번뇌를 항복받아야 하겠습니까.”하고 수보리가 질문을 하셨는데 그 뜻을 한 번 더 풀어보면 이런 것입니다.

“인생이 꿈속이란 것은 알지만 그러나 이해가 앞설 때는 욕심도 나고 남녀 이성끼리 만나면 이상한 생각이 일어나고 이런 쓸데없는 꿈속의 일에 시달립니다. 태평양 바다 보다 더 복잡하고 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나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니 옳지 않은 이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하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항복 받아라.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도 제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만일 중생을 교화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 <나다> <남이다> <중생이다> <부처다> <오래 산다> 하는 분별심(分別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발심한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중생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집니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얼마 안가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일 수는 없고 그런 것을 좋다 싫다 하고 생각 내는 주체가 <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항상 말한 바와 같이 물질도 허공도 아닌 산 생명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동그라미도 네모 세모도 아닙니다. 마음자리는 모나고 둥근 게 아닌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물은 본래 검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먹을 다 갈아도 하얗게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물질이나 허공은 본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뭉치고 천층만층 높이 쌓아 봐도 그것이 듣고 보고 생각할 줄은 모릅니다. 그와 같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도 무엇을 보고 들을 줄은 모릅니다. 마음이 보고 싶어야 보고 듣고 싶어야 들립니다. 육체는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육체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자리, 차원이전(次元以前)이고 태초이전(太初以前)이며 질량이전(質量以前)입니다. 이것이 온갖 생각의 주체(主體)이고 진아(眞我)입니다. 따라서 진아의 상대가 가아(假我)이며, 생각의 <나>입니다. <진아>니 <가아>니 해도 실제 마음은 <진아> <가아>를 초월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아닌 만사의(萬事)의 주체(主體)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설명으로 될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쳐야 합니다,

깨달았다 견성(見性)했다는 말은 소위 밥 먹고 자고 일어나고 할 줄 아는 그 자기를 깨친 것이니 깨달았다고 해도 말이 안 됩니다. 부처님이 깨쳐 놓고 보니 출가(出家)하려고 할 때 애쓰던 그 마음 그대로고 실달태자(悉達太子) 그대로입니다. “육체 말고 자기 마음 그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닌 진실상(眞實相) 그대로의 마음이 있겠구나”하고 이해가 될 때 그래서 우주에 대자유(大自由)있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 마음을 깨쳤다고 하는 것이 밥 먹고 똥 싸는 그 마음, 산모(産母)가 아기 어서 나가라고 힘주는 마음 그대로이니 이것은 깨쳤다고 해도 안 됩니다. 본래 미(迷)한 것도 아닌 게 어떻게 깨칩니까. 그런데 육체를 <나>라고 하는 데서 <아상(我相)> <가아(假我)>가 생기고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술에 미친 사람, 아편에 미친 사람이 되고 정치에 미친 사람, 문학에 미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인간의 본성(本性)이 개발(開發)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인간성(人間性)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을 뜻하며 선한 것 악한 것이 인간성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걱정 말고 깨치지 못한 것만 걱정하라는 것입니다. 망상을 안 일으키려면 더 일어납니다. 망상 일어나려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망상도 내가 일으키는 것이지 망상 저 혼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망상은 가만두고 염불이든 참선이든 그것만 하면 오늘밤에 깨칠지 금생에 깨칠지 여하튼 깨치게 됩니다. 사람이 전생에 공이 많으면 금생에 깨치고 공이 적으면 내생에 깨치게 됩니다. 하여튼 깨치게 될 그 시간을 바라고 금생에 못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염불이나 하고 참선하고 마치면 그러면 내생에는 깨칩니다. 복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복을 가지고 태어나고 머리도 지금보다 몇 억 만 배 좋게 태어납니다. 다만 공부하는 데는 깨치려 해도 안 되고 안 깨치려 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다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될 그런 요소가 나한테 있구나, 오온(五蘊)이 내가 아니구나, 말하는 여기에 배고프면 밥 먹는 여기에 있겠구나.” 여기서 자기 관혁(貫革)을 깨치게 됩니다. 그 부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까 하고 말씀하신 것이 49년 설법입니다. 그러니 경전마다 다 다른 것 같아도 이 이야기입니다. 온갖 세상 학문의 원리가 다 나옵니다. 그걸 모르고 경을 들여다보면 불교의 핵심(核心)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마음이 부처란 소리가 어떤 뜻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 입니다. 평생 강사(講師) 노릇해서 제자가 수천 명이 돼도 자기가 모르고 가르치니 제자도 모르고 듣습니다. 마치 눈먼 장님에게 매달려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것도 그렇고 염불도 그렇고 다른 어떤 공부를 해도 불교의 근본진리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 생사를 어떻게 해서 해탈할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9년간의 기나긴 설법을 하셨던 것입니다.

육조(六祖)대사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을 듣고 깨치셨는데, 그 뜻은 “번뇌 망상 없이 살아라. 아무 모양. 주의. 사상 그런 거 개의치 말고 지금까지 배운 거 다 청산(淸算)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라.” 그런 뜻입니다. 욕심이 없어지고 아무 생각 없이 되면 물건이 제대로 보입니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판해 치워 버립니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 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리고 기분 나쁠 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妄想)입니다. 그것은 결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말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 없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 늘 이것을 앞세워서 <나>다, <남이다.> 하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병원에 어떤 보살을 문병 갔다 온 일이 있는데 별안간 사람이 와서 스님 좀 꼭 보자고 해서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가서 한 시간이나 이야기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복잡해져서 마음을 쉴 수 없다며 눈물을 자꾸 흘립니다. 가정불화(家庭不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因果) 얘기를 해주고 관세음보살님 자꾸 부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불안해지면 대번에 이것이 독소(毒素)로 변해서 온갖 병을 일으키는 때문입니다. 그래 당신이 그 마음을 풀기 전에는 천하 없이 기도(祈禱)를 하고 한국 돈 다 갖다 바치고 기도해도 천 년 만 년 해도 그 병이 낫질 않습니다. 당신이 전생에 첩이 되어 남편에게 곤란을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마누라가 되어가지고도 남편 번 돈으로 자꾸 딴 놈과 쓰고 다니고 나쁜 짓했기 때문에 이생에 와서 남편이 그러는 것이지 모든 것이 다 인과법(因果法)인데 아무 까닭 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 시간 정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그러냐”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 꼭 믿겠다고 하면서 안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인과를 안 믿으면 죽는다. 암(癌)은 아무리 째고 해봐도 별 수 없어 다른데 또 생긴다. 기분이 만든 암이기 때문에 뇌가 또 나빠지기도 해 그러니 마음부터 항복 받으라”고 말해 주고 온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바로 안정이 되어야 병도 낫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도 “병원에 가면 의사가 우리 병을 책임지고 고쳐준다”고 믿는 마음의 안정이 있기 때문에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치료하기 전에 벌써 자기 마음이 반은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체는 마음이고 이 현실은 꿈이어서 꿈은 다 마음이 꾸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서부터 백까지가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主宰神)의 피조물(被造物)이라 믿어 구속(拘束)되고 자연계(自然界)의 물리 화학(物理化學)의 원리가 절대적이라 하여 그것에 구속되고 무당이나 점장이에 구속되고 그러지만 중생들의 마음자리 불성자리는 본래부터 완전한 부처이어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실존(實存)이어서 가사 우주를 창조(創造)한 신(神)이 온다 해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항복(降伏)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 자기 마음이 만들었던 망상(妄想)이었으니 망상이 천 리 만 리 사라진 본 마음자리가 나타나면 자연히 신이니 과학이니 신앙이니 미신이니 불교니 유교니 하는 따위의 제2의 산물(産物)인 그야말로 피조물(被造物)들은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主宰神)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自然科學)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支配)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실은 우리가 평소 아무것도 모르고 불법도 모르는 이런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개. 소. 도야지 같은 금수(禽獸)까지라도 산보고 높다는 말은 안하지만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 보고 깊은 줄은 압니다. 이렇게 말은 없어도 알 줄 아는 이 자리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시간(時間)이나 공간(空間)이 아닌 실재(實在)이고 물질(物質)이나 에너지처럼 죽은 존재(存在)가 아닌 산 생명(生命)입니다. 이것이 눈을 통해서 내다보고 귀 구멍을 통해서 듣고 이러지 다른 놈은 다 죽은 것들이므로 그럴 놈이 없습니다. 보인다 들린다 하는 생각 그것이 보고 들을 줄 아는 게 아니고 일체 보는 마음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며,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아무 생각도 없는 실재(實在)이고 실존(實存)이고 실상(實相)이고 한 이것이 직접 눈구멍으로 내다보고 귀 구멍으로 듣는 것입니다. 생각 그것도 이 실상의 반야(實相般若)인 마음으로부터 생각되어진 만들어진 피조물(被造物)임이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며칠 동안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인식(認識)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맨 처음 절에 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들을 때에도 실상(實相)인 적멸(寂滅) 그것이 귀를 통해서 잘 듣지 못하는 대로 들었지 딴 놈이 들을 놈은 없습니다. 허공이 들을 수 없고 고기 덩어리인 육체는 물질일 뿐이니 역시 못 알아들을 것이고 다른 귀신이나 도깨비가 와서 듣고 알려 준 것도 아닙니다. 설사 도깨비라 할지라도 그 실상은 역시 불성자리인 마음입니다. 지옥에 가서 두드려 맞고 아픈 줄 아는 것도 알고 보면 역시 실상자리인 그것이 알지 이것 빼 놓고는 무엇이 아픈 줄 알고 재미있는 줄을 깨달을 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들은 그때도 완전히 부처가 돼 가지고 들었고 차차 법문(法門)을 들어서 “세상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참선(參禪)을 해야겠구나”하고 말을 알아들을 때에도 역시 본래 완전히 부처가 되어서 듣습니다. 그러니 제도(濟度)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번뇌 망상이 다 없어졌다고 해서 별것이 아니고 내내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 보고 깊은 줄 아는 그대로이고 다른 면목(面目)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가 다 돼 있는 것이므로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實無衆生得滅度者)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멀쩡한 부처가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술 취해서 길 가는 것 붙들어 준 폭 밖에 안 됩니다. 술 취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고 술이 깨도 그 사람, 취해도 그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이 탐진치(貪瞋痴) 삼독주(三毒酒)에 취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해타산(利害打算)하고 온갖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집착(執着)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탐진치의 삼독주(三毒酒)에서 깨어나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다 남이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없는 것이다.”하는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공(我空)입니다. 번뇌. 망상. 온갖 지식(知識)과 경험(經驗)을 쌓아 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고 인간 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 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없고 그런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있는 게 아닌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법공(法空)입니다. 부처님의 법공(法空)의 진리를 듣고 나서 여태까지의 지식을 다 놓아 버리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寂滅) 그 자리가 나타납니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난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구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아아 이제 알았구나!”하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깨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 버리는 이것이 구공(俱空)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해서 본래 부처자리인 마음 바탕이 더 밝아진 것도 아니고 알 줄 아는 성품은 잘못된 착각을 품었다고 해서 손상(損傷)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근본 마음자리는 버러지나 굼벵이가 되었다고 해서 더러워진 것도 아니고 하나도 증감(增減)이 없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불변(不變)하는 일여평등체(一如平等體)입니다. 그러니 애당초에 이렇게 완전한 부처가 되어 있으므로 제도(濟度)한다는 생각이 성립(成立)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내가 제도 하겠다, 깨우쳐 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사람은 중생 제도할 자격(資格)이 없는 사람이고 보살(菩薩)이 될 수는 더욱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고 전체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법사(法師)거니, 내가 누구를 가르쳐 주었거니, 계(戒)를 내가 일러 주었거니, 내 제자(弟子)거니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 주지도 않고 제도 하지도 않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제도 하기는 하되 그런 생각이 없이 무심(無心)으로 하고, <하는 것> 없이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소승이고 공(空)에 떨어진 것이며, 대승(大乘)이 아니고 금강경의 말씀을 바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말씀은 공의 사상을 철저히 말하지만 거기에 집착하여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고 상 없는 마음으로 머무름 없이 중생을 제도하고 인류의 구제를 위해 공의 원리로 백 천억의 육신을 바치고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중생을 발심 시켜서 일일이 지도를 해서 견성(見性)을 하게하고 보살만행(菩薩萬行)을 잘 하도록 호념(護念)해 주고 부촉(付囑)해서 정각(正覺)을 이루고 성불(成佛)을 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다 꿈속에서 하는 일이고 관념(觀念)일 뿐 꿈을 깨고 보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거기까지 가는 길인 노정기(路程記)만을 말씀하신 것이지 그 당처(當處) 자리는 시방제불(十方諸佛)이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그곳은 말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꿈속에 들어가서 꿈으로 꿈같은 이야기를 해서 꿈으로 꿈을 깨도록 하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꿈밖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못했고 실상(實相)의 소식에 대해서는 입을 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만 하셨지 사실로 중생이 제도 받은 일은 없습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 하는 자리이고 본래부터 그렇게 완전한 자리이므로 제도 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 자리는 일체 사상. 인륜도덕(人倫道德)이 용납(容納)되지 않습니다. 선방(禪房)에서 참선(參禪)할 때 조금만 허술하면 방망이가 막 내려옵니다. 망상이나 피우는 그런 머리통은 부서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체 중생을 실제로 제도했다 하더라도 제도했거니 하는 생각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곧 중생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고 동시에 불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은 보살일 수 없고 중생을 제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굶는 사람에게 쌀말이나 주었다 하더라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我相). 인상(人相)이 있는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나선 보살이 제도를 했거니 제도를 받았거니 하는 생각이 있어서 선생이니 제자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고 불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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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스님강설 金剛經

http://blog.naver.com/badre/30106774785

 

善現起請分 第二

선현기청분 제이

 

時에 長老須菩提 在大衆中하시다가 卽從座起하사 偏袒右肩하시며

시    장로수보리 재대중중              즉종좌기        편단우견        

 

右膝着地하시고 合掌恭敬하시와 而白佛言하사대 希有世尊하 如來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           희유세존    여래

 

善護念諸菩薩하시며 善付囑諸菩薩하시나니 世尊하 善男子善女人이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세존     선남자선여인  

 

發阿耨多羅三邈三菩提心하니는 應云何住며 云何降伏其心하리잇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佛言하시되 善哉善哉라 須菩提야 如汝所說하야 如來 善護念諸菩薩하며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여래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善付囑諸菩薩하나니 汝今諦聽하라 當爲汝說하리라 善男子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선남자

 

善女人이 發阿耨多羅三邈三菩提心하니는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여시항복

 

其心이니라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기심          유연세존     원요욕문            

 

제2 선현보살이 법문을 청하다(선현기청분)

그때 대중 가운데 계시던 장로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어,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잘 당부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그 마음을 지녀야 하오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겠아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갸륵하고 갸륵하도다. 수보리야, 너의 말과 같이 여래가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고 잘 당부하느니라. 너희가 이제 자세히 들으라. 너를 위하여 말해 주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지니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 것이니라.”

  

Section Ⅱ.Subhuti makes a request

Now in the midst of the assembly was the venerable Subhuti. Forthwith he arose,

uncovered his right shoulder, knelt upon his right knee, and, respectfully raising his hands

with palms joined, addressed buddha thus : world-honoured one, it is most precious

How mindful the tathagata is of all the bodhisattvas, protecting and instructing them so well!

world-honoured one, if good men and good women seek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by what criteria should they abide and how should they control their thoughts?

Buddha said : very good, subhuti! just as you say, the tathagatha is ever-mindful of all the

bodhisattvas, protecting and instructing them well. Now listen and take my words to heart:

i will declare to you by what criteria good men and good women seeking the consummation

of incomparable enlightenment should abide, and how they should control their thoughts.

Said subhti : pray, do, world-honoured one. With joyful anticipation we long to hear.

 

[科 解]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은 선현(善現)이 법을 청한 대문(大文)이란 뜻입니다. 선현(善現)이란 수보리(須菩提) 존자를 가리키는데 금강경은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묻고 부처님께서 대답하신 내용이므로 수보리존자가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 설법 가운데 제일 어려운 법문(法門)인 공(空)의 진리,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지나서 구공(俱空)의 경지인 실상반야(實相般若)를 가장 잘 체득(體得)하고 있기 때문에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라고 합니다. 아공(我空)은 우리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나>가 아니라 이것은 공하여 없는 것(空無)이란 진리를 체득한 것을 말하며, 법공(法空)은 물질적 현상이나 객관을 대상으로 한 상대적 정신작용은 다 인연으로 모인 거짓 존재로서 만유(萬有)의 본체가 본래 공무(空無)한 것이란 진리를 말 하며, 구공(俱空)은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다 초월하여 공했다는 생각까지도 없어져서 비로소 마음자리의 본성(本性)에 계합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공의 진리를 잘 깨달았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 또는 혜명수보리(慧命須菩提)라고 하는데, <수보리>란 말은 본래 인도의 고대어(古代語)입니다. 그 말이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가지 뜻을 따라 번역하게 되면 나머지 두 가지 뜻은 묻혀 버리게 되므로 인도 말 그대로 <수보리. 수보리>하고 부릅니다. 세 가지 뜻은 선현(善現). 선길(善吉). 공생(空生)이니 출생할 때에 창고. 상자. 그릇들이 텅 비어서 공의 도리를 잘 알 상서를 보였었고, 그 뒤 상보는 이(相師)가 <오직 착하고 오직 길할 것이다>고 예언(豫言)했으므로 그렇게 이름 했던 것입니다.

이 수보리존자께서 대중가운데 계시다가 일어나셔서 금강반야의 법문을 청하셨으므로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이라 한 것입니다.

 

原 文 時 長老 須菩提 在 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而白 佛言

解 義 수보리존자(須菩提尊者)는 없는 것도 없고 없는 것 없다는 것도 없는 공(空)의 진리를 제일 잘 알아듣는 제자이므로 10대 제자 가운데 해공제일(解空第一)이십니다. 그래서 공의 진리인 금강경은 수보리존자가 먼저 발기해서 법을 청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과 함께 공양을 마치시고 발을 씻고 자리에 앉아서 정진하실 시간이 됐습니다. 수보리께서 대중 가운데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웃옷을 벗어 메어 어께를 드러내고 공경한 뜻으로 합장을 합니다(合掌恭敬). 우리는 가사를 입을 때 도포 입듯 막 입는데 그러나 인도의 승려나 달마대사(達磨大師)는 그대로 뒤집어써서 입습니다. 날이 좀 추우면 가사를 위에서부터 뒤집어쓰고 덜 추우면 양 어깨를 걸쳐서 입습니다. 부처님이나 국왕 대신을 만나러 갈 때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입는데 왼쪽 어깨는 그대로 걸쳐 입고 오른쪽 어깨만 드러냅니다. 이것을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 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왼쪽 무릎을 세웁니다(右膝着地). 또 열 손가락을 모아 가지고 합장하고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옛날에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불경에 이백불언(而白佛言)이 자주 나오니까 이것을 우습게 새긴 일화가 있습니다. 백불언(白佛言)을 <흰 부처님>이 말씀했다고 새기면서 부처님도 흰 부처. 누런 부처가 있다고 해석한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而白佛言> 이것은 부처님께 어떤 말을 묻든지 대답할 때를 가리킵니다.

 

原 文 稀有世尊 如來 善護念 諸菩薩 善付囑 諸菩薩

解 義 희유세존(稀有世尊)이라 한 희유는 드물다, 거룩하다, 그런 뜻입니다. “거룩하십니다. 희유하십니다. 여래(如來)께서는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잘못 될까, 힘이 들까 보살님들을 잘 보살피십니다.”

부모가 어린 자식이 다칠까 어떨까 보살피는 것을 호념(護念)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여행을 간다든지 소풍을 간다든지 하면 “어디 가서 다치지 않을까. 혹은 돈이 모자라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마음대로 사먹지 못하지나 않나.”하고 애태우며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가짐을 호념(護念)이라 합니다. 보살(菩薩)은 아직 부처가 되기 전 모든 중생을 위해 고행(苦行)과 만행(萬行)을 닦는 이들이므로 어려운 수련(修鍊)에 부딪쳤을 때, 또는 마음을 더욱 완전하게 깨쳐 나감에 있어 힘에 겨워 너무 벅차지나 않나 하고 보살피는 부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이란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 “이런 것은 하지 말고 이런 일은 이렇게 하라”하고 구체적(具體的)으로 수행요체(修行要諦)를 가르쳐 주시는 당부를 말합니다. 보살의 만행도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호념과 부촉(付囑)아래 더욱 가속도로 성취되어 갑니다.

 

原 文 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解 義 선남자 선여인은(善男子善女人)은 거룩한 남자, 거룩한 여인들이 인생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알려고 발심(發心)해 들어서는 사람들, 그런 남자와 그런 여인들을 가리킵니다. 마음을 깨친 반야의 지혜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 됩니다.

아(阿)는 무(無) 없다는 뜻이고 뇩다라(耨多羅)는 상(上) 최고란 뜻이며 삼(三)은 정(正), 바르다, 틀림없다는 뜻이며 먁(藐)은 두루하다(邊), 전 우주에 꽉 찼다, 보편타당하다는 뜻이니, 진리는 있는 데 없는 데가 있어서는 안 된다, 두루 꽉 차 있어야 하며 불공평하게 어디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며 삼보리의 삼은 역시 정(正), 바르다는 뜻이고 보리(菩提)는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이란 깨닫는 마음이 생겼다, 보리심을 발했다, 또 더 줄이면 발심(發心)했다는 말이 됩니다. 마음이 <참 나>라는 불법의 원리에 대해 조금도 의심 없는 사람, 생사에 얽매이지 않고 부동하게 실천하는 것을 발심이라 합니다.

“이렇게 발심을 해서 모든 것이 환각임을 확실히 깨닫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선남자 선여인이 내 생각 내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며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안 해야겠습니까. 내 마음 가운데 죽 끓듯이 일어나는 이 번뇌, 나만 살겠다는 욕심, 이 욕심이 우주에 가득차서 남이야 죽건 말건 내 육신이 내라 하여 끝없이 짓는 죄와 번뇌를 어떻게 하여야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 번뇌의 마음을 쉬는 방법이 무엇이옵니까.”하고 수보리존자가 부처님께 피눈물 나는 호소를 했고 청법(請法)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로 반복되어 있습니다.

 

原 文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設 如來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解 義 부처님은 수보리존자의 물음을 칭찬하시고 “네 말대로 여래는 모든 보살을 잘 호념해 주시고 우리 마음을 알뜰히 생각해 주느니라. 어디가 다칠까 하여 행여나 계를 파(破)할까 하여 모든 보살들에게 할 일 안 할 일을 분명히 구별해 주시고 이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이런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말라 하고 가르쳐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승려들은 계도(戒刀)를 가지고 다닙니다. 본의(本意)아니게 계를 파하게 될 때는 자결(自決)이라도 해야 합니다. 가령 여승이 어떤 산중에서 혼자 공부하다 강제로 겁탈(劫奪)당하게 될 때는 파계(破戒) 당하기 전에 할복(割腹)해 죽어 버려야 합니다.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를 정도면 괜찮지만 내가 겁탈을 당하면서 흥미를 알게 되는 정도이거든 동맥(動脈)만 끊으면 됩니다. 이런 때 쓰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칼이 계도입니다. 계를 살리기 위해, 육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참 자기를 지키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참 나>를 완성하기 위해 <거짓 나>를 서슴없이 버리기로 발심한 이 에게는 당연합니다.

 

原 文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 如是住 如是降伏其心

解 義 수보리야, 너와 여기 있는 천 이백 대중들은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마땅히 해야 할 일, 예컨대 2백 50계를 받을 때는 마땅히 해야 할 당위성(當爲性)이 있는 것이니, 인간을 동물로 보지만 짐승과 다른 것은 법 도덕을 안 지키면 안 된다는 것 입니다. 선남자. 선여인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발심한 사람은 참으로 똑바른 소견(所見)이 난 사람이니, “이와 같이 살고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마음을 항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란 말을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의 <마음> 그대로 살라는 뜻이니 <이와 같이 살라>는 이것으로써 금강경은 여기서 일단 다 설명된 것입니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이 된 것입니다. 금강경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권, 하권으로 나누어졌고 이십 일 년 동안 반야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육백부 반야경 가운데 보면 인왕반야(仁王般若)니 금강반야(金剛般若)니 반야심경(般若心經)등 방대한 경전이 있으나 그 구체적인 설명방법은 다르긴 하지만 결론적인 핵심은 <여시주 여시항복기심>하라는 여기에 귀결(歸結)됩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도 되풀이해서 설명한 것이고 육백부 모든 반야경에서도 되풀이한 것입니다.

<여시주 여시항복기심>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수보리 존자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합니다.

 

原 文 唯然世尊 願樂欲聞

解 義 세존이시여, 원컨대 기꺼이 듣고자 합니다.” 해공제일인 수보리존자는 반야제경(般若諸經)의 요의를 가장 잘 알고 계신 어른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 말씀을 곧 알아들으시고 부처님께 말씀합니다. “기꺼이 듣겠아오니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시작해서 법문이 나온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심한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 가운데 쓸데없는 번뇌망상을 항복받겠습니까. 육체가 <나>라는 이 마음을 뿌리 채 뽑아서 잠재의식조차 다 없어지도록 수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는 이 물음에 대한 부처님의 이차적인 법문을 목마르게 재촉하는 뜻에서 “기꺼이 듣고자 하오니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한 것입니다. 또 결국 말하자면 우리가 옳은 불법을 알고 그대로만 살아 나가면 그것이 곧 한량없는 복을 짓는 것이 되는데, 고해(苦海)에 빠진 중생을 건지려면 복이 많아야 되기 때문에 보살의 복 짓는 수행법을 자주 말씀하십니다.

모자람이 없는 지혜, 어떤 것을 물어도, 어떤 학자가 어떤 사상 어떤 진리를 물어도, 어느 철인 어느 종교인이 어떤 진리를 물어도 그것을 다 풀어 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 네가 꿈꾼 이야기고 네 소식이 아니다. 그것을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려면 그 준비를 갖추어야 되는데, 그것은 남을 일러 주는 것보다 우선 내가 완전히 의심이 없어져야 되기 때문에 보살들의 마음가짐, 번뇌 항복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되풀이되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說義]

⑴ 조건 없는 마음의 생활

진리는 하나지 둘일 수 없습니다. 우주의 핵심(核心)이 하나지 둘일 수 없으니 따라서 그것은 허공일 수도 진공일 수도 없고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물질도 허공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인 핵심을 어디로부터 어디로 찾아가느냐. 허공으로 아무리 끝까지 간다해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물질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기서 생명은 안 나옵니다. 그러면 어디서 찾느냐. 지금 말하고 말 듣고 앉아 있는 이 <생명>.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이 말이 이론에 맞나 안맞나 생각하는 그 생각의 주체, 그 주체를 찾아 캐어 들어가 보면 거기에 너도 나도 아니고 남녀도 선악도 아닌 것이 살아서 분명히 주고받고 얘기할 줄 알고 일체의 주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부처님. 하느님. 공자님. 여기 가면 다 만납니다.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객관세계에는 아무리 찾아 봐도 진리는 찾을 수 없고 진리가 될 수 있는 사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아무 생각 없이 남과 얘기하고 음식을 잡수셔도, 누가 무엇을 물어도 사실대로 받아들입니다. 아무 조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기분에 따라 싸우고 이해에 끌려 남과 통할 수 없습니다. 제일 가까운 내외 사이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통할 수 있습니까. 모든 생각을 초월 했을 때, 아무 생각도 없을 때, 또는 그 이상 더 신선할 수 없을 때, 모든 죄악도 복도 초월했을 때, 기분을 떠난 때, 이때가 정말 참 자기이니 이 때야 비로소 서로 이해가 되고 모든 것이 다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오고가고 밥 얻으러 나가고 공양 자시고 하는 것이 다 마음 그대로의 인생 전체이며 더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진지 다 잡수시고 큰 가사 벗어 걸고 선상(禪床)에 올라 앉으셨다.”하는 거기까지 법문 다 했다 하지만 밥 얻으러 나가는 거나 바리때 챙기는 거나 다 불법이고 인생 전체가 거기서 다 나옵니다. 한 생각 한 행동이 전부 생명 전체 그대로고 불법 전체가 생명전체이어서 진실한 인간인 부처님은 일거일동이 조작이 없는 본래 마음자리 그대로의 발로(發露)입니다. 또 생사를 자유하여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으니 어떤 조건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습니다. 아무 근심 걱정 없고 모든 것을 초월해 있으니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마음을 대할 수 있는 이는 부처님 밖에는 없습니다. 중생은 모두 조건이 있습니다. 나한테 이가 되나 해가 되나, 시집을 가도 장가를 가도 안심이 안 되고 돈을 모으면 모을수록 권리가 높아지면 질수록 위험과 괴로움이 더 많아 집니다. 이것을 초월 하려면 일체가 공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⑵일체의 핵심은 공한 것

공한 것까지 공한 것을 공이라 하는데 이것도 그냥 공이라 하면 알기 어렵지만 내가 항상 말하는 <마음>. <나>를 찾아 가면 됩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도 하나의 생각인데 이 생각의 주체가 무엇인가. 그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마음 불성(佛性)자리. 열반 자리이고 이것이 하루도 천번 만번 생각을 냅니다. 나라는 생각부터 내어 가지고 모든 조건을 내세웁니다.

“육체는 하루에 밥 세 그릇 잘 먹어야겠다, 맛있는 것을 먹어야겠다.” 이것이 온갖 사고와 번뇌를 다 일으키고 저만 잘 살기 위한 사고방식. 육체를 나라 하여 35억 인류가 내 밥 세 그릇에 방해를 한다면 35억이 다 나의 적이 됩니다. 가령 이 조계사(曹溪寺) 법당(法堂)에 어떤 사고(事故)가 나서 무너지게 됐다든지 불이 났다든지 하여 그대로 있다간 당장 죽게 되었다면 서로 먼저 나가려고 앞에 있는 사람을 밟아 버리고 뛰어 나가려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육체를 나로 하여 사는 한 그 생활은 모두 뱃속에 독사가 들어 앉아 있는 무서운 생활입니다. 배가 고프면 정든 남편이라도 버려야 할 판입니다. 배고픈 남편 옆에 있으면 죽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육체가 나라는 생각이 붙어서 육체아(肉體我)가 생기고 사상아(思想我). 지식아(知識我), 예술아(藝術我)라는 제2의 가짜 나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 생각이 근본이 되어 나는 예술이 좋다, 나는 정치가 좋다, 나는 술이, 나는 아편이 좋다, 술 안먹는 사람과는 말도 안하겠다, 이래가지고 온통 저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의 주체. 모든 생각의 실상인 <나>는 의식주도 권리도 돈도 필요 없고 생사(生死) 그것도 나에게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식도 허공도 아닌 여기에 들어서 보면 만사가 다 이것에 통해 있고 모를 것이 없고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진아(眞我)라 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가아가 진아고 진아가 가아행세를 합니다. 이것이 들어서 착각을 했고 육체를 <나>라 하여 육체 이놈을 앞세우고 이놈 살리겠다고 하루 밥 세 그릇 먹이고선 온갖 전쟁을 다 해야 합니다. “힘이 진리다, 철두철미하게 싸워 이기는 것이 행복이다, 다른 사람 입에 들어간 음식이 내 입에 들어 갈 때 행복하다, 무엇을 하든지 싸워 이기는 것이 행복이다” 이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이상 남북통일 아니라 세계통일을 해 봐도 저만 살려는 독사가 되어 싸움만 하게 됩니다.

 

⑶ 산것과 죽은 것

모든 것을 초월한 이것이 진아 행세도 하고 가아 행세도 하는데 우주의 핵심이 이것이고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주를 나누면 죽은 것 한쪽과 산 것 한쪽으로 구별됩니다. 여하튼 어떻게 살아있든 산 것은 산 것이다. 지금 말하고 말을 듣는 자리는 산 것이며, 무정물(無情物)인 돌. 막대기는 들을 줄도 생각을 낼 줄도 모르는 죽은 것입니다. 죽은 것 가운데는 있는 물질과 없는 진공(眞空) 허공이 있습니다. 에너지 자체도 죽은 것이며 생명이 없습니다. 과학이다,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등의 문화는 살아 있는 생명세계의 산물(産物)입니다. 물질계가 죽은 것이고 진공. 허공이 무생명체(無生命體)이고 그러므로 산 것은 있는 물질도 없는 허공도 아닐 터이니, 유무(有無)를 초월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본질입니다. 본래 생길 수도, 없어질 수도 없는데 진공마저 초월한 이 마음자리는 모든 것을 초월 했고 그러니 영원히 살아 있으며, 대 자유하며, 절대 평등한 것입니다. 인류문화가 오천년이 아니라 앞으로 오억만 년을 진보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각으로부터 나는 것일 뿐 생각 외 주체인 <나>. 생명 자체의 주인공을 밝힌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말은 네가 아니란 뜻으로 상대적인 일체를 부정합니다. 선도 악도 아니고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것 이전이고 동시에 일체를 초월한 것이 <나>라는 뜻으로 됩니다. <나>는 오직 <나>일뿐 나에게는 무슨 조건을 붙일 수 없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한 것이며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⑷ 우주(宇宙)는 오직 이것의 발로(發露)

<나> 이전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가 다 <나> 이전에는 없습니다. 현상계의 모든 것은 생각의 발로이며 환상일 뿐 다 실제가 아닙니다. 이 마음은 본래 평등하고 자유롭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세계에서 완전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없습니다. 이 <마음>은 신령하고 산 생명이며 우주의 본체이므로 있는 것 없는 것을 다 창조해 냅니다. 그 증거가 바로 꿈에서 꿈인 줄 모르는 그것입니다. 꿈에 꿈인 줄 모르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생시의 현실과 꿈이 백퍼센트 같기 때문입니다. 마누라. 남편. 아들. 딸 다 똑같고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다 똑 같다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는 둘째 이유는 꿈 자체가 내 기억 내 주관이 객관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며, 이 주관과 객관은 둘이 아니고 고정된 자리가 없는 때문입니다.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다는 그 자기 주관이 꿈속의 객관으로 나타난 것이니 주관과 객관은 본래 거리가 없습니다. 생각의 본체인 내가 이렇게 서서 얘기를 하고 얘기 듣고 있었고 이것을 내 놓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거짓말이고 천당 가나 지옥 가나 단지 육체를 나라고 하는 착각 때문에 좀 분주했을 뿐이지, 그러나 분주 했다고 해서 마음의 본체가 달라진 건 또 아닙니다. 이것은 사상도 지식도 신앙도 아니니 질량(質量)을 초월한 것이므로 에너지도 아닙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세상의 정신, 물질 온갖 것 가운데 마음자리, 불성자리인 <참 나>가 제일이어야 합니다.

 

⑸ 이것만이 현대의 구세주

마음을 깨치면 전 우주에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全知), 모든 근심걱정 다 떨어내고 일체를 다 포기하여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즐거움을 얻습니다(全能). 그래서 모르는 세상을 바로 깨우쳐 주고 중생을 바른 길로 이끌어 누구에게나 모든 고통을 해탈할 수 있는 환한 길이 있음을 일러 주고 개발해 주자는 것입니다. 이 보살정신(菩薩精神)을 현대의 젊은이에게 하루빨리 가르쳐 주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의 청소년선도(靑少年善導) 내지 참다운 인간 교육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직 육체가 나인 줄 알고 물질문명에서 참다운 자아(自我)를 찾으려 하는 것은 마치 파초(芭蕉)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벗겨도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뿐이며 그러한 인간사회는 아무 실상(實相)이 없기 때문입니다.

 

⑹ 발심한 이의 마음가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발심을 한 사람은 누가 죽여도 죽지 않고 매를 때려도 가만히 맞고 있을 뿐 대항이 없지만 안 죽습니다. 일본에 백은선사(白隱禪師)라는 거룩한 스님이 있는데 지금 한국에도 그보다 더 거룩한 노장이 살아 계십니다.

지리산(智異山)에 법계토굴(法界土窟)이 있는데 거기 올라가 보면 전주시내 불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본래 이곳에는 선방(禪房)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백 년 전에 공부하는 두 스님들이 이 절에 와서 있게 됐습니다. 두 스님들이 동냥을 해서 양식을 준비해 가지고는 절에 일찍 올라가서 다음해 삼월까지 땔 나무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노장(老丈) 두 분이 지리산 꼭대기에서 공부를 하는데 동지섣달 한참 추운 어떤 날 오후 힘센 장정 네 명이 와 가지고 “너희들이 며칠 전에 돈 5백냥 가져온 일이 있지”하고 위협을 합니다. 그래서 한 스님이 나가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없습니다.”“다 알고 왔다. 내 눈으로 봤는데 무슨 잔소리냐. 돈을 지고 이리 들어오는 것을 봤다. 생명이 아깝거든 돈을 내놔라.” “돈 그까짓 것 있다가 없어지는 것인데 있으면 내놓지 사실 없으니까 못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노장을 끌고 나가 타작하는 식으로 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스님은 사실상 장사입니다. 힘으로 따지면 이 네 사람 아니라 열 네 사람이라도 쓰러뜨릴 힘이 있지만 잠자코 얻어맞기만 합니다. 맞다가 맞다가 하도 맞아서 나중에는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노장이 가만히 생각하니 살아나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이 도둑놈한테 맞아 죽게 생겼으니 큰 걱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과(因果)를 믿고 있다. 모든 것이 다 인과로 오는 것이니 목숨을 바쳐 그 빚을 갚자, 세상이 좋아한다고 환영하지 말고 어떤 역경(逆境)에 처하더라도 거기 반발(反撥)하지 말자, 누가 어떤 곤란한 죽음을 준다 해도 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내자, 우리가 아득한 전생을 돌이켜 보면 부모도 잡아먹고 자식도 잡아먹고 죄란 죄는 다 지었을 것이니 그 죄로 말하면 몇 천만겁 곤란한 <죽음>을 당해도 마땅할 것이다. 누가 어떠한 어려움을 준다 해도 하나도 대항 말자”하는 약속이었습니다. 다른 한 노장이 때려 주지 못하게 거들어 주면 되고 그 노장 혼자라도 안 맞으려면 안 맞을 수 있지만 한 노장은 방에 가만히 앉아서 자기 공부만 하고 있습니다. 한 노장이 맞다 맞다 원체 다급하니, “이사람 이것을 어찌할까”하고 물었습니다. 방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그 노장이 하는 말이, “이 사람아 인과를 믿게, 공부하는 마음 움직이지 말아. 정각(正覺)에서 움직이지 말아. 네가 그 사람 죽여 놓으면 그 사람한테 천번 만번 죽음을 당해,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달게 맞아 죽게나.” 그럽니다. 그래서 이 노장님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돈이 없는 것을 달라고 그랬음을 알게 된 도둑들은 그냥 돌아갔습니다. 방에서 혼자 공부하던 노장님은 소변을 보러 나갔다가 쓰러져 있는 노장을 일으켜 안고 방에 들어가서 참선하는 것같이 가부좌를 틀어 앉혀 놓고는 “이 사람아 금생에 인연은 그것뿐이야. 자네는 빚을 다 갚고 갔네, 나는 빚을 못 갚았으니 자네보다도 나는 더한 업을 지었는지 아나, 아무것 괘념하지 말고 화두(話頭:참선하는 공부)나 잘하게.”하면서 윗목에 앉혀놓고 자기는 아랫목에 앉아 공부를 합니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송장을 들여 놓았으니 썩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자 썩는 소리가 꿀꿀 납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 “아 그 사람 참선이나 하지, 그까짓 일 가지고 뭘 마음이 상해 그러나.” 이렇게 나무라고는 돌아앉아서 또 공부만 합니다. 이렇게 자꾸 경고를 하면서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화장하고 혼자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맞는 사람은 맞아 죽을 각오(覺悟)를 하고 죽었지만 그것을 보고도 친구의 참된 공부를 위해 조금도 마음이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은 본래의 발심(發心)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발심한 사람의 수행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이의 마음가짐입니다. 육체생활(肉體生活) 때문에 한 생각이라도 까딱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과를 믿고 불법을 믿는다면, 저녁에 남자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남편 못살게 굴면 안 됩니다. 내가 전생에 나쁜 일을 많이 해서 남편이 저러는 것이니 머리 깎고 중 된 요량만 하고 꿀꺽 참고서 남편에게 전보다 더 잘해 줘야 합니다. 마누라가 또 잘못 되어 남편이 벌어준 돈 갖고 하룻밤 안 들어와도 왜 어디 갔었느냐고 야단만 하지 말고 잘 보살펴 주고 받아 주어야 이것이 참 불교식입니다. 이 세상일을 불평하고 원망하다 보면 탐진치(貪瞋痴)만 늘 뿐이지 일 초도 마음 편할 도리가 없습니다. 원망하기로 말하면 원망이 이 허공에 꽉 찰 것입니다. 이래가지고야 무슨 염불이나 참선이 되고 복 닦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원망하는 마음뿐인데 무슨 복이 됩니까. 백일기도 천일기도 만일기도 해도 죄가 사하지 않습니다. 남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천지가 꽉 차서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잠깐 생각하는 것이라도 전 세계로 퍼지고 우주에 가득 찹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라디오, 텔레비전의 원리와 같아서 지금 말하는 이것도 전 우주에 가득 찹니다. 그리고 잠깐 생각하는 것이 죄거나 복이거나 선악 차이 없이 우주 전체에 영향을 주고 인과를 가져옵니다. 가령 짐승이라도 몽둥이로 매질을 하든지, 다리를 분질러 놓든지, 또는 바위나 나무 같은 무정물(無情物)이라도 함부로 하면 나중에 어느 때엔가 어느 곳에서 그 나무나 돌맹이에 다리를 다치거나 합니다. 이렇게 인과라는 것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입니다. 그러니 무정을 천대하면 무정이 오고, 유정을 해치면 유정의 인과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 내 그림자이기 때문이고 내 환각(幻覺)으로 있는 바윗돌이기 때문입니다. 사물(事物)과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거일동은 이것이 그대로 원인이 되어 고스란히 그 결과인 보(報)를 다 당해야 하고 빚을 다 갚아서 저쪽 원수들 완전히 풀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빚 갚을 생각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작정하면 이 사람은 그 날부터 아주 행복해지고 마음이 편해져서 잠도 잘 오고 소화도 잘 됩니다.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마음가짐입니다..

 

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세 단계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라는 말을 줄이면 발보리리심(發菩提心)하라는 넉 자로 되고 이것을 더 줄이면 발심(發心)하라는 두 자로 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보리도 다 깨달은 마음자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범부중생이라도 이런 법문을 듣고 “내 마음자리가 본래 생사가 없는 이렇게 위대한 존재였구나, 나도 마음을 어서 깨쳐서 생사를 해탈해야겠고 본래 내가 부처인 자리를 찾아야겠구나.”하고 결심을 했다면 이것도 중생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입니다. 또 수행을 해서 마음이 밝아지므로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원리를 깨닫고 주관 객관이 떨어져서 실상반야가 오롯이 드러나면 이것이 아무 생각 없는 적멸(寂滅)의 본심(本心)자리를 깨달은 것이니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것이며 중간 발심인데 이것이 곧 견성(見性)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첫째 마음을 어떻게 가지고 마음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아무리 견성을 해서 마음을 가지고 두는 법을 알았다 하더라도 다생겁(多生劫), 무량겁(無量劫)으로 남을 못살게 하고 나만 잘 살겠다고 욕심으로 살던 버릇 때문에 8만4천 번뇌가 죽 끓듯이 하므로 이것을 완전히 항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합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중생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발심을 했고 그 다음에는 아공. 법공. 구공의 3공을 체득해서 공리(空理)를 증득하게 되면 이것도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체득한 것이고 참으로 발심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오던 여습(餘習)이 제8장식(第八藏識)으로 남아 있어서 그 뿌리까지 다 녹아 없어져서 정말 자기 정신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차차차차 공부가 될수록 아는 것도 많아지고 신통도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허공도 녹고 진공까지도 녹아서 근본무명(根本無明)이 다 녹아 없어지면 완전한 부처님의 불과(佛果)를 성취하게 되는데 그러면 열반이 생사고, 생사가 곧 열반이고 만법(萬法)하고 나하고 둘이 아닌 그때는 정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완전히 체득한 때입니다.

 

⑻ 먼저 올바른 발심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면 그렇겠다, 내 마음이 본래 부처라하는 것을 똑 바로 알고 들어가야 갑니다. 그러니 먼저 정신(正信) 성취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 내가 법을 체득하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믿는 것이 신심인데 그 신심에 사신(邪信)이 있고 정신(正信)이 있습니다. 사신은 지금 우리가 어느 곳을 향해서 견성성불한다고 하는 건지 그것도 모르고 그냥 하는 것, 무엇을 하는 것인지 방향 없이 마구잡이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 먼 장님이라도 눈 밝은 사람이 앞장 서 가지고 끌고 가면 그건 틀림없이 제대로 가는 겁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런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채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 참선하고 견성할 거라고 아무나 따라다니면서 하다가 보면 대개 미친 사람이 되거나 도깨비 되거나 하다가 중간에 도로 불교비방이나 하고 그럽니다. 신통조화나 하나 얻어 볼까, 도통이나 해서 견성하고 선지식이나 한번 되어볼까. 선지식이 되면 신도들한테 절도 받고 공양도 좀 받으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이런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발심이니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남이 한다니까 해보는 것이고 한번 해 봐서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본전이다 하는 생각, 이건 다 사신(邪信)입니다. 그렇더라도 옳은 선지식을 만나 의지해 놓으면 괜찮습니다. 끝까지 믿고 이렇게 들어가면 그이가 경전이요 바로 부처님이니까 그이가 지도하는 대로 하면 글자 하나 몰라도 됩니다. 글자를 몰라도 된다는 소리는 글을 잘 아는 선지식 공부를 잘하시는 큰스님이 내내 팔만대장경이니까 그이한테 직접 가서 법문 듣는 것이 역시 경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무식한 영웅은 있을 수 없고 모르고는 천하없어도 남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 또 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혜가 근본인데 그러므로 먼저 발심(發心)을 똑바로 해야 하고 가는 길, 견성해서 부처 되는 길을 먼저 알고서 참선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조(五祖)스님, 삼조(三祖)스님께서도 다 이 “금강반야바라밀경”<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하는 법으로 지도 하셨고 금강경에 의지 하도록 법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발심하는 법을 차례대로 자세히 말씀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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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스님강설 金剛經

http://blog.naver.com/badre/30106722269

 

法會因由分 第一

법회인유분 제일

 

如是我聞하오니 一時에 佛이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하사 與大比丘衆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千二白五十人으로 俱러시니 爾時에 世尊이 食時라 着衣持鉢하시고

천이백오십인       구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入舍衛大城하사 乞食하시되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사

입사위대성       걸식           어기성중    차례걸이           환지본처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座하시다

반사흘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제1 법회가 열린 인연(법회인유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기수급고독원>이란 절에서 천 이백 오십인과 함께 계시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진지 잡수실 때가 되어, 가사 입으시고 바리 들으시고 사위 서울에 들어가시와 성 안에서 차례대로 비시었다. 그리고 절로 돌아오셔서 진지 잡수시고는 가사와 바리를 거두시고 발 씻으신 뒤 자리 펴고 앉으시었다.

  

[科 解]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은 이 금강경을 부처님께서 설법(說法)하시게 된 동기(動機)를 아란존자(阿難尊者)께서 설명하신 대문(大文)입니다. 법회가 열리게 된 인유라 하여 법회인유(法會因由)라 했고, 과목(課目) 장절(章節)이란 뜻으로 분(分)이라 했고, 제일장(第一章) 또는 제일과(第一課)란 뜻으로 제일(第一)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사이 말로 고치면 “제일장 법회가 열리게 된 인연”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은 어느 경이거나 대개 삼분(三分)으로 나누어 그 뜻을 이해합니다. 처음이 서분(序分)이고 다음은 정종분(正宗分) 마지막은 유통분(流通分)이라 합니다. 서분은 서론(序論)이란 뜻이고 정종분은 본론(本論)이란 뜻이며 유통분은 결론(結論)과 아울러 후세에 길이 전해져서 인류사회에 큰 이익이 되도록 널리 펴라고 당부하신 대문입니다. 이 가운데 서분은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문이 아니고 정종분과 유통분만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유통분 가운데도 “맨 끝에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고 나니 누구누구가 어떻게 듣고 기뻐하며 받아 지니었다(佛說是經已 長老須菩提及諸比丘 比丘尼 優婆塞 優婆尼一切世間天人阿修羅 聞佛所說皆大歡喜信受奉行)”하는 이 경문(經文)도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고 역시 아란존자의 말씀입니다.

경문의 내용을 장절(章節)로 나누는 것을 과목(科目). 과판(科判)이라 하는데, 중국 위나라 때 위제(魏帝)가 대덕법사(大德法師)들을 초청하여 경 강의하는 것을 듣고 묻기를 “공자의 유교나 노자의 도교는 경문(經文)에 장단(章段)이 있는데 불경에는 왜 과단(科段)이 없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대덕(大德) 스님 네가 경문에 과목 나누는 것을 대답을 잘 못했는데, 양양(襄陽)에 계시던 도안법사(道安法師)가 이 말을 듣고 경문에 서(序) 정종(正宗). 유통(流通)의 3분(分)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경문에 3분으로 과판(科判)하는 것이 통례가 되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문(經文)을 3분으로 나누는 것은 어떤 경이든 거의가 다 이렇게 분석(分析)하여 공부할 수 있는 공통(共通)의 과판법(科判法)일 뿐이지 그 이상은 나눌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금강경도 32분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나누어 공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도 3분 가운데 서분(序分)이면서 32분 가운데 제일분(第一分)이 됩니다. 

 

原 文 如是我聞

解 義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해인사(海印寺)의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입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엮어 낸 것인데, 그 때 아란존자(阿難尊者)가 부처님의 말씀을 외워내는 중역(重役)을 했습니다.

아란존자는 부처님께서 아침에 샛별 보고 마음 깨쳐 도통(道通)하신 그 시간에 태어났다 하여 아란을 한문자로 경희(慶喜:경사스럽고 기쁘다)라고 번역합니다. 이 아란존자가 스무살이 되어서 부처님께 왔습니다. 그때 아란존자는 중이 되는데 세 가지 조건으로 “첫째, 부처님은 당시 최고의 대접을 받는 분이었으므로 임금님도 못 먹는 음식을 대중들이 갖다 드리고 하는데 부처님이 잡수시다 남은 음식을 나에게 먹으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위신에 관계됩니다. 둘째, 부처님은 옷을 해다 드리는 일이 많아서 당시 입던 옷을 제자에게 주고 또 부자들이 사서 입고하는데 나에게 부처님의 헌옷을 입으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제가 출가하기 전에 부처님께서 20년 동안 설법하신 것을 새로 한번 낱낱이 개인 교수(個人敎授)해 주셔야 합니다.”하고 사뢰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다 받아 주고 그의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여가 나는 대로 밤이고 낮이고 아란존자 출가하기 전 이십년 동안 설법하신 내용을 다시 일러 주셨습니다. 아란존자는 한 번 들은 것은 무엇이나 기억하는 좋은 기억력(記憶力)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분 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란존자는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문 제일 (多聞第一 : 제일 많이 들었다는 뜻)이 되셨습니다.

이 아란존자가 부처님 열반하실 때 “경전 맨 첫머리에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여시아문(如是我聞) 이라 하라”고 하셨으니,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내가 들은 대로 쓴다." "이렇게 쓰라고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 첫머리에는 어느 경에나 “여시아문”이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만드신 제도입니다. "누구도 이 제도를 어기지 말고 경전에 찾아보라. 부처님의 말씀이 그대로 다 있다." 는 뜻입니다.

 

原 文 一時佛

解 義 "불법은 역사가 없다. 역사를 무시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실제로 불교사상이 그런 경향이 있고 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한 평생 내가 걸어온 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으며 구태여 사람 이름도 기억하려 하지 않고 장소도 사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애착해 보았자 마음공부에 도움이 안 되는 까닭입니다. 박 누구라고 하지만 참말로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역사성을 전연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교 수행에 있어서는 장점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고찰을 한다든지 하는 때에는 불편이 많습니다. 그래서 경전(經典)에도 일시(一時)에 어느 때, 각설 이 때 그런 식으로 돼있고 아무 날 아무시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있습니다. 첫째, 시간은 없는 거다. "서기 몇 해다 불기 얼마다 해 봤자 그것은 어림없고 말 도 안 된다. 왜냐하면 시간은 그 자체가 본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중생 따라 시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천당이 스물여덟 하늘이나 되는데 맨 아래 천당인 사왕천(四王天)의 하루가 우리 인간의 오십년이 되고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면 그 하늘 일주야가 우리의 백년이나 되며, 또 더 올라가면 우리 이백년, 사백년이 거기 하루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역사적인 시간을 말해봤자 천당사람에게는 안 맞으며 또 다른 세계에도 역시 시간이 맞지 않습니다. 한국의 열시는 유럽에서는 밤 한 시가 되고 인도의 아침 열시는 미국에서는 역시 밤이 될 것입니다. 또 달나라의 시간이 다르고 하루의 시간도 다릅니다. 자전(自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달나라의 일 년, 수성(水星), 금성(金星)의 일 년은 지구의 일 년과 크게 다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세계가 다 시간이 다르므로 완전한 시간을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인간계뿐만 아니라 전 중생계(衆生界)를 구제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셋째, 불타(佛陀)의 경지에서는 시간 공간을 초월했기 때문에 인간 세상의 시간 개념에 얽매이는 것은 경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나무꾼이 산에 나무하러 올라가서 나무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노인들이 바위 위에 앉아서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노인들은 수염을 날리면서 얼굴이 하도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신선 같은 거룩한 풍채에 마음이 끌린 나무꾼은 정신을 잃고 영감들을 쳐다보는 동안에 바둑 한 판이 다 지났습니다. 그래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생각한 나무꾼은 자기 지게 있는 데로 가보니 그 동안 벌써 몇 백 년이 지나갔는지 지게도 없어지고 도끼 자루도 다 썩어서 조금만 남았더라는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꿈에 한 이십년 삼십년 사는 때가 있습니다. 아들 딸 다섯 여섯 낳고 온갖 사업을 다 하고 한국 갑부가 되어 택시를 여나무대 놓고 밤이나 낮이나 재미나게 호강을 하면서 살았는데 깨고 보면 꿈입니다. 그래서 깨어서 시계를 보면 일분도 안 되었는데 꿈에 들어가서는 이십 년의 생활이 지난 것입니다.

이렇게 꿈에 들어가 몇 십 년을 살았다는 것도 우리의 한낱 생각일 뿐 사실 이십년이 아니며 손목시계가 일초가 안 됐다고 하는 것도 우리 생각 일뿐 역시 일초는 아닙니다. 일초란 생각 그것이 꿈에 이십년이란 생각으로 된 것이며 아들 딸 낳고 살림 산 것도 내 생각이 그렇게 나타나 보인 것뿐입니다.

꿈이 우리의 생각으로 부터 창조된 것이듯 시간과 공간은 우주와 인생의 근본인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진 현상이며 그 실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공(時空)을 완전히 초월한 부처님 세계에서는 반드시 어느 나라 몇 년 갑자년 을축년 등을 기록 하는 것이 오히려 부처님 법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들었노라. 한때 어느 때...” 그렇게만 기록했던 것입니다.

 

原 文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圓

解 義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고 했는데, 사위국은 가비라국 옆에 있던 나라 이름입니다. <기수급고독원>이란 그 나라 서울에 남산공원, 탑골공원 같은 큰 공원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기수와 급고독원의 두 말이 합해진 말입니다. 사위국의 기타태자(祇陀太子)가 본래 참 좋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방 한 오십 리쯤 되고 큰 정원에 온갖 나무와 꽂이 다 있고 온갖 정자가 있고 온갖 시설이 다 있는 정원 중의 정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기타태자가 자기 공원에 심은 나무를 뜻하여 기수(祇樹)라 한 것입니다. 또 급고독(給孤獨)이라는 장자(長者)는 부처님을 만나 불법을 듣고 세상에 없는 거룩한 법임을 알고 나서는 그는 "만일 이 부처님과 같은 이가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영원히 고민과 번뇌를 해탈하지 못하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자 못할 뻔했구나, 내가 이제 부처님을 만나서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하고 진리를 배우게 됐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하고 환희심을 내면서 부처님 거처를 하나 만들어 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장소를 물색한 끝에 기타태자가 가지고 있는 공원이 인도에서 제일 좋다고 생각하여 그 공원을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기타태자는 온 정성을 다해서 가꾼 정원이고 보니 매우 애착하여 팔지 않을 뜻으로 "그렇게 꼭 사고 싶으면 손바닥 두께의 순금을 내정원에 꽉 채우시오, 그렇게 깔아 주면 내가 팔겠오." 했습니다.

본래 급고독장자는 불쌍한 이 도와주기 좋아하는 큰 부자였으므로 고독한 사람이나 없는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잘 준다고 하여 급고독(給孤獨)이라고 이름 한 것입니다. 밥이 없으면 밥을 갖다 주고 옷이 없으면 옷을 대 주고 병이 났으면 병을 낫게 해 주고 불우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도와 주는 큰 자선사업가(慈善事業家)였고 큰 부자였습니다. 급고독장자는 인도 천지의 금이란 금은 다 모았습니다. 그래서 절 지을 자리를 깔아 들어 가다가 금이 모자라 한쪽을 못 깔았는데 급고독은 그 자리에 앉아서 울었습니다. 기타태자는 이 광경(光景)을 보고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인도 천지의 금을 다 사들였는데도 이렇게 못다 채워서 부처님 계실 정사(精舍)를 세우지 못하게 됐으니 이 소원을 어떻게 이루나 하고 슬퍼서 웁니다." 하였습니다. "석가여래가 어떤 분입니까. 나도 듣기는 들었지만 얼마나 거룩하기에 그렇게 지극정성을 다해서 받드십니까."

"제가 인도의 모든 도인 철인을 다 만나 보았지만 부처님에게는 지혜로나 수도력으로나 무엇으로나 비교할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참으로 진리중의 진리이고 완전무결한 인생을 처음으로 밝혀 주시는 분입니다. 나는 재산뿐 아니라 이 몸뚱이까지 다 공양을 바친다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기타태자는 "그렇게 위대한 도인이 나왔습니까. 그러면 나머지는 동산의 모든 나무들과 함께 내가 시주(施主)하겠습니다. 장자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하고 다 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타태자와 급고독장자의 두 힘으로 이 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절을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누가 개인으로 절을 지으면 그 사람 개인으로 절 이름을 지어 기념하는 예가 많습니다. 도선사도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하여 지은 이름인데, 이것이 비석보다도 더 큰 기념이 됩니다. 고려 때 조성한 팔만대장경은 다 목판(木版)인데 경책 가운데에 시주 이름을 함께 새겨 둡니다. 가령 돈을 만량 냈다면 만 장에다가 이름을 하나씩 다 적어서 영원히 그 경전의 법문과 함께 기념하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 이름을 창건공덕주(創建功德主)의 이름으로 짓는 예는 일본이나 중국, 인도에도 다 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기수급고독원>은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있었던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原 文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解 義 “큰 비구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계셨다.”함은, 부처님 당시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큰 스님네를 일컫는 말입니다. 계지키는 것이나 수행하는 신심이나 마음을 깨달은 법력(法力)이나 아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비구 대중의 모범이 될 만하고 부처님의 제자다운 도인(道人)이란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일 처음으로 제도하신 제자는 사실은 5비구입니다. 이 5비구는 세존께서 싣달태자의 몸으로 몰래 밤중에 성을 넘어 출가(出家)하시자 부왕(父王)이 다섯 사람에게 명하여 태자를 잘 보살피도록 하였던 아야교진여(阿若僑陳如)등입니다. 이 5비구는 석존(釋尊)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여 유명한 녹야원(鹿野苑)에서의 첫 법문하실 때 제자가 되므로 비로소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를 갖추게 한 인연 깊은 제자입니다.

그 다음에 또 중인도(中印度)의 비사리성(毘舍離城)의 선각장자(善覺長子)의 아들로서 그 일족(一族)과 친구들 오십 인이 함께 출가한 야사장자(耶舍長子)가 있으니 이렇게만 해도 오십오 인이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섭존자(迦葉尊者)가 네 분인데 첫째는 부처님의 심법(心法)을 바로 전해 받은 제일 상좌(上佐)인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삼가섭이라고 하는 삼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처음에 녹야원에서 부처님 제자가 된 五비구중에 십력가섭(十力迦葉)이란 분이 계셨으므로 이분까지 합하면 다섯 분의 가섭이 되는 턱입니다. 그 가운데 삼형제의 삼가섭은 가야성(迦倻城)이라는 지방에서 천명이나 되는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불을 숭상하는 외도(事火外道)로서 맏형인 우루빈나가섭(優樓頻螺迦葉)은 오백인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 둘째인 나제가섭(那堤迦葉)이 이백오십 인, 막내인 가야가섭(迦耶迦葉)이 이백오십인과 함께 수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삼형제가 부처님을 만나서 그 위대한 인격과 법력(法力)에 귀의(歸依)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健連)이 각각 자기의 제자 일백 인씩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 했으므로 천이백 오십오 비구가 되는데, 야사비구(耶舍比丘)와 함께 출가한 도중(徒衆)도 자세히는 오십사 인이라고 하므로 이렇게만 해도 천이백오십구인의 비구가 됩니다.

그뿐 아니라 이분들 말고도 마하가섭존자(摩訶迦葉尊者)나 수보리존자(須菩堤尊者)나 우바리존자(優婆離尊者), 아란존자(阿難尊者)같은 십대제자(十代弟子)와 또 십대제자의 제자가 있고 그밖에도 많은 비구가 있으며 비구니(比丘尼)만 해도 부처님을 길러주신 부처님의 이모 대애도비구니(大愛道比丘尼)는 많은 여인과 함께 출가하여 비구니의 시조(始祖)가 되었으며 부처님이 태자로 계실당시 태자비(太子妃)였던 야수다라(耶輸陀羅妃)도 오백의 여인을 이끌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이백오십 인이라 한 것은 부처님을 늘 모시고 다니며 처음부터 사십팔 년간 법문을 들은 제자 가운데 큰 수만을 따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경의 처음에 대개 이 천이백오십 인이 나오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많은 것을 뜻합니다.

 

原 文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解 義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번 씩만 공양(供養) 식사를 하시는데 그 시 시간은 사시(巳時=9시~11시)로 됐습니다. 사시에서 일분 전도 안 되고 일분 후에도 안 잡수십니다. 아침이나 저녁에 누가 부처님께 음식을 바치고 드시라고 하면 이것은 부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때가 아닌데 식사를 하라고 하면 이것은 죄가 되면 됐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신도들은 밤중 새벽 가리지 않고 음식만 차려 놓고 빌고 하는데 부처님은 허기져서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사시 이외에 불공하는 데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한국 불교는 부처님 욕보이는 불교로 됐습니다. "내가 음식을 많이 드렸으니 나한테 복을 많이 주시오." 하는 식의 무식한 미신불교(迷信佛敎)로 전락했습니다. 여기서 식시(食時)라 함은 부처님이 하루 한 끼 사시(巳時)에만 공양하시는 그 시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착의>(着衣)는 큰 가사를 입었다는 말입니다. 마을에 외출하거나 유명한 학자를 만나거나 점잖은 사람을 대한다든지 국왕 대신을 만난다거나 법문을 할 때는 꼭 큰 가사를 입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입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큰 가사를 입으시고 바리때를 가지시고 사위성 가운데에서 밥을 비십니다.

 

原 文 入舍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解 義 사위성(舍衛城)은 사위국(舍衛國)의 수도 서울입니다. 부처님은 복잡한 시내(市內)를 피하여 교외(郊外)에 계시는데 그렇지만 시내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고 성안의 출입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침이면 성안으로 들어 가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질서 정연하게 밥을 비시는 이것이 곧 법을 행하시는 것이 됩니다.

차제걸이란(次第乞已)란 부잣집만 가고 가난한 집을 빼어 놓아서도 안 되며 꼭 순서대로 다니며 일곱 집만 얻어먹게 돼 있는 제도를 말합니다. 똑같이 일곱 집을 얻어 가지고 기원정사로 돌아와서(還至本處) 적게 얻어온 사람은 많이 얻어온 사람이 나누어 주고 반찬이 좋은 것이 있으면 나이 많은 노장도 드리고 젊은이는 아무렇게나 먹습니다.

그런데, 가섭존자는 가난한 집만 다니며 밥을 얻어 오고 아란존자는 부잣집만 다니며 밥을 얻어 오므로 부처님이 아란존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왜 부잣집만 다니며 밥을 얻느냐”고 하니 부잣집에 가면 밥 얻기가 좋고 가난한 사람은 자기 먹을 것도 모자라니 딱해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가섭존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왜 가난한 집만 다녔느냐” “가난한 집은 가난해서 복을 못 짓게 되므로 그래서 가난한 집을 골고루 다닙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돈 없는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가난한 사람이다. 저 가난한 사람이 밥이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니고 불교를 믿고 곧 자기 마음을 믿으면 이것이 부자다. 장차 우주를 다 차지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 그것도 차별 말고 똑같이 불법에 인연 맺어주고 똑 같이 복을 짓도록 해 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남에게 무엇을 주고 좋은 일 한 것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니까 가난한 집일수록 빼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부터는 부잣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골고루 평등하게 일곱 집씩 빌게 되었습니다. 다만 기생집이나 창녀(娼女). 음녀(狀女)가 있는 집에는 가지 않도록 했는데 여기에도 연유(緣由)가 있습니다.

아란존자가 한번은 밥을 빌러 나왔는데 기생 딸이 반해서 아란존자에게 최면술을 걸어서 불러 들여 가지고 옷을 벗기고 끌어안고 누워서 막 음행을 하려는 찰나에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두 남녀를 잡아 들였습니다. 수천 명 대중 가운데 끌어내어 놓았더니 아란존자는 얼굴이 빨개가지고 고개도 못 들었고 그 기생 딸도 결국은 참회 발심해서 불법에 귀의한 일이 있었는데 아란존자가 비록 최면술에 그렇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하튼 그런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술집 같은 곳에 밥 얻으러 갔다 여럿이 끌어 들여 술도 자꾸 먹이고 여자도 데려다 놓으면 술기운에 또 파계(破戒)할 위험이 있으니 애당초 그런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동남아시아에는 한 집만 얻어먹어도 배가 터질 정도로 많이 줍니다. 시주들이 미리 준비를 잘 해가지고 있다가 주니 지금은 한 집만 해도 먹습니다. 그것은 저만 복 짓고 나만 복을 많이 달라는 욕심이니 복을 고루 나누어 짓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도 시주할 기회를 주어야 더 큰 복이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原 文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解 義 밥을 얻을 때는 바리때를 잡는 법이 군대 무기 다루듯 일정한 법칙(法則)이 있어야 하고 밥 먹을 때는 대중이 함께 단체 행동을 해야 하는데 지금 동남아시아에서는 식당이 따로 있어 가지고 가끔 얻어다 먼저 오면 먼저 먹고 하니 불교의 방법은 무너진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는 또 큰 가사를 꼭 입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공양을 제공한 시주에게 복이 되라는 뜻입니다. 물 마시는 소리, 수저소리 하나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모두 벗어 버리고 맨 몸뚱이 러닝 바람으로 모두 공양을 하고 있으니 시주한 사람에게 복이 안 갑니다.

대중들은 서로 음식을 똑같이 하고 의식주(衣食住)를 절대평등하게 해야 합니다. 그 대신 지식과 수행은 어디까지나 계급을 찾아서 아는 것이 많고 수행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부처님같이 섬기고 절하고 그 지식 앞에 꼼짝 못하니 그것이 정말 이상적입니다. 부처님께서 만든 이 대중 사회제도를 소위 원융제도(圓融制度)라 합니다. 네 것 내 것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고 꼭 평등하며 좋은 개성(個性)을 인정하면서 또 평등을 유지하고 평등사상(平等思想)을 가지고 개성을 인정하고 용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밥도 한 그릇 가지고 안 될 사람에겐 더 주어라, 그래서 똑 같이 나누어 먹고 절대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철저한 수련을 합니다.

이렇게 찌는 삼복더위에도 화로를 피워 놓고 겨울옷을 서너 벌 끼어 입고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과 같은 수련도 요사이 같이 안일한 생활만을 찾는 세상에는 필요합니다. 몸뚱이 훈련이 아니라 마음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결정하면 더운 줄도 모르고 몸에 병도 안 납니다. 이런 훈련이 특히 우리나라에는 꼭 필요합니다. 한국 사람같이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고 믿을 수 없어서는 큰 탈입니다. 우리나라는 화랑정신(和合精神)이 다시 부활해야 민족혼(民族魂)이 살아나지 지금 이대로는 게을러빠지고 욕심만 꽉 차 있어서는 나라가 안 됩니다.

공양을 끝내신 세존은 대중과 함께 가사를 벗어 놓고 발을 씻고 선상(禪床:앉는 자리)에 좌선(坐禪)을 하는 자세로 올라 앉으셨습니다. 그 당시 수행하는 비구들은 맨발로 다니게 돼 있었기 때문에 식사가 끝나면 발을 씻습니다. 이렇게 발을 씻고 선상에 올라 앉아 참선(參禪)을 하는 데까지 말을 했으면 이것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한번 다 설명 한 것입니다. 이렇게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앉으면 이제부터는 일체 정진에 들어가는 것이 참선을 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대중을 거느리고 계시다가 때가 되니 밥을 얻어와 가지고 선상에 올라와 앉으시더라,” 여기까지가 이것도 금강경 법문에 큰 문제가 됩니다. 금강경 가운데 어느 구절이 가장 중요한 구절인가가 첫째 문제이겠지만, 금강경은 이 구절까지에서 일단은 다 설법해 마친 것입니다. 부처님과 스님들의 하루생활은 밥 한 끼 빌어서 먹는 생활이니 그 날 한 끼 먹으면 하루 다 마쳤고 다른 일 없으니 대소변 볼 것 제외하면 선상에 가만히 가부좌 틀고 앉아서 설법 듣고 하는 것으로 마친 것입니다.

천 이백 대중이 마음을 깨치신 부처님을 따라 질서정연(秩序整然)하고 장엄 거룩하게 내일도 모레도 죽을 때 까지 이 육신이 죽은 다음 내생까지도 계속될 것입니다. 부처님이 천여 명 대중을 거느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참선(參禪)하고 사시(巳時)가 되면 부처님이 맨 앞에 바리때를 들고 나가 거지대장이 되어 수천 명이 질서 장엄하게 밥을 빌어다가 나누어 먹고 참선하며 불법으로 사는 생활은 정말 멋진 생활입니다. 아무 근심, 걱정 없고 친하고 먼 것도 없고 자유스런 생활, 이상적인 생활입니다. 육체를 초월하여 여자 걱정 남자 걱정 없고 풍년들거나 흉년들거나 아무 상관없고 굶어 죽는다 해도 걱정이 안 되며 배가 터져 죽을 걱정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예술적인 생활이고 신성한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불법의 진리를 실현하는 일과(日課)는 곧 불법의 설명을 마친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說義]

(1) 중생은 죽기 싫어한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다 서슴지 않고 생명이라고 대답합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 우주를 다 준다 해도 자기 생명과는 바꿔 주지 않을 것은 물론이며 생명은 손톱만큼도 안 떼어 줍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이 생명이지만 그 생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이 안 나옵니다. 요새 무슨 가치(價値), 가치하고 떠들지만 우리의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사람의 참 다운 가치를 논 합니까. 속담에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하지만 만일 먹으면 죽인다고 총을 갖다 대면 아무리 먹고 싶은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을 마음을 내지 못 합니다. 먹는 것은 오직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농사를 하든가 장사를 하든가 정치를, 철학을, 과학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아무리 농사를 짓기 싫다 하더라도 부득이 농사를 지어야 하겠고, 부득이 장사를 해야겠고, 부득이 정치인이 되고 경제인이 되고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산다는 말은 "누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살려고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으로 살아야 만족한 것입니다.

현대인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어냐." 제일 중요한 이 두 가지를 확실히 모르고 삽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셈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지만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이 생명을 어떻게 어디에 바쳐야 할 것인가."가 있어야 하고 확실히 내가 있는데 나는 무엇인가. 이것이 제일 큰 선결문제(先決問題)입니다. 다른 것은 다 아나마나입니다. 알아 보았자 별수 없고 철학박사 돼 보았자 별수 없습니다. 먹고 똥 싸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똑같습니다. 착하다고 더 나은 것도 아니고 악하다고 더 못한 것도 아니고 미련하다고 더 못한 것도 아니고 먹고 똥 싸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기는 똑 같습니다. 누가 그걸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도록 되었을 따름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경전(經典)입니다. 석가여래(釋迦如來)는 49년 동안을 꼭 이 문제를 다루었고 글자 한 자도 딴 목적을 가르쳐 보이신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철학이니 과학이니 뭐니 해 보아도 깊은 내용을 파 보면 속이 비어 있습니다. 아무내용도 없는 걸 껍데기로 싸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자기로 똥 싸놓은 것과 같습니다. 파초(芭蕉)대를 까보면 꼭 그 안에 기둥이 있을 것 같은데 껍데기뿐이지 알맹이도 기둥도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그 근원(根源)을 캐고 보면 파초 껍데기 까놓은 거나 한가집니다. 그것은 부처님에게서와 같이 "무엇 때문에 사느냐. 누가 사느냐."하는 이 문제가 해결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 어느 한 글자도 이 문제를 떠나서 이야기된 글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들이나 모두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만약에 내가 못 생겼다고 확실하게 확정만 되면 너도 나도 자살하는 사람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데 가서 제 혼자지만 저 잘난 멋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네가 무엇인데 그렇게 잘났단 말이냐."하고 물으면 얼른 대답 못합니다.

 

(2) 나는 일체가 아니다.

<나>라는 말은 첫째 "내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객관(客觀)이 없으면 나라는 생각 안 납니다. 상대가 있으니까, 나라는 생각을 내고 나라는 행동을 합니다. 이 법당 안에 있는 물건을 낱낱이 열거(列擧)해 봐도 <나>는 아니고 서울 시내사람 다 대봐도 내가 아닙니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事物) 모든 동물을 다 쳐들어도 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 하는 말은 일체가 다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면 일체를 부정하는 <나> 이 자체는 무엇입니까. 다음 문제로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면 일체가 아니란 말은 일체를 부정하다 보니 결국 나는 일체를 초월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나>는 우주 이전부터 있었던 긍정적(肯定的)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3) 나는 육신이 아니다.

셋째는, 나는 살았다. 우주도 아니다. 모든 걸 초월한 게 나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다 들어 봐도 아니다. 선과 악을 초월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나다. 물질도 허공도 아니다. 허공이 생각을 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허공은 그 자체가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렇게 보면 나란 생각을 뚜렷이 내어서 모든 것을 구별하고 일체를 부정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에서 모든 것을 비판도 하고 주재도 하는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이냐 하는 뜻은 살았다 이 소립니다. "모든 것이 아니고 다 초월했으면서 살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공간이 크지만 생명이 없어 생각할 줄 모르고 지구 태양과 저 수 많은 별들과 같이 엄청난 물질이 뭉쳐 있지만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우주는 커다란 한 개의 송장입니다. 따라서 우주에서는 어디에서고 생각이 나올 데가 없습니다. 생각의 주체는 이 우주에는 없습니다. 나는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그것이 일체가 아니지만 일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분명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무한대(無限大)의 공간이 죽어 있고 한없는 물질의 현상계가 죽어 있고 그러니 허공도 물질도 아닌 것이 있다 하면 그것은 산 것일 것이다. 그것은 생명일 것이다. 그것이 다름 아닌 <나>다. 즉 말을 듣는 이 것이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허공이 얘기할 줄 모르고 지구덩이가 얘기할 줄 모릅니다. "오늘 오후 네 시 반부터 설교를 한다. 우리가 약속을 했으니 그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약속을 지킬 줄 아는 것도 허공. 물질은 못합니다. 육체도 물질적 요소들이 모인 것뿐이므로 그걸 못 합니다. 그러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허공도 물질도 아닌 쉬운 말로 생명이고 우리말로 마음입니다. 육체의 오장육부(五臟六腑)는 말할 것도 없고 신경(神經)이나 모든 세포(細胞), 뇌신경(腦神經)까지라도 그것들은 하나의 물질적 요소에 의해 구성(構成)된 것이며, 그 신경 자체가 아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의 경우와 같아서 엔진이 스스로 가고 바퀴가 알아서 구르고 서는 것이 아니라 운전수가 세우고 발동(發動)시켜서 가고 오고하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육체는 자동차와 같고 마음은 운전수와 같은 것입니다.

 

⑷ 마음은 모든 것의 주체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생각이 아닙니다. 지식. 사상. 정치. 경제. 예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할 줄 압니다. 얘기하다가 하기 싫으면 집어치우고 하는 이런 자유행동(自由行動)을 합니다. 그런데 결국 이 <나>라는 것도 한 개의 생각입니다. 그런 것이 일체를 부정하고 모두를 초월했으며 우주의 태초이전(太初以前), 지구이전부터 실재(實在)한 것이라고 긍정하며 동시에 영원불멸(永遠不滅)의 긍정체(肯定體)로서의 뜻을 내포(內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나>라는 글자 한 자로 말한 것인데 그러므로 <나>라 하는 것도 결국 한 개의 생각임을 면치 못합니다. 객관을 상대로 나라는 생각이 성립된 것이고 상대가 없으면 나라는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의 주체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과학의 주체. 종교의 주체. 온갖 학문. 사상의 주체는 될지언정 생각 그것이 본래부터 과학. 철학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 까닭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할 필요 없이 만들면 자꾸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⑸ 제2의 가아(假我)

<나>라는 이것이 한 개의 생각이라면 나라는 생각도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라는 생각을 내는 본체(本體)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생각도 아니고 <나>라는 생각을 내기 전부터 <나>라는 말입니다. 생각을 낸 주체(主體)인 <나>는 <나>라는 생각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글자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 아무 생각도 아닌 이것이 <나>라는 생각을 냈다면 <나>라는 생각은 제2의 가아(假我)입니다. 거짓 <나>이기 때문인데 그러나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우주의 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이 한 생각 때문에 전체가 다 생긴다. 생각의 나. 육체의 나. 우주 현상계의 이 모든 것이 가아인 한 개의 생각으로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 이것은 제1의 진아(眞我)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나>라는 생각을 낼 수는 있지만 <나>라는 생각은 아니니까 이것은 진짜 자기입니다. 모든 망아(忘我), 가아를 건설하기 전에 가아를 건설할 수 있는 <나>이기 때문에 진아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 이전에, 진아(眞我) 이전에 그 무엇도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런 진리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란 이름을 지으면 그것은 벌써 생각 뒤가 되고 하느님이다 부처님이다 해봤자 다 생각 이후가 되는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아 이것은 현상이 아닙니다. 빈 것도 진공조차도 아닙니다. 진공도 산소도 공기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진공인데 그것이 진아(眞我)일 수 없습니다. 진공은 아무 생명이 없는 것이고 <진아>인 <나>는 살아 있으면서 아무 것도 아니어서 진공조차도 초월한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조차도 아닙니다. 유무(有無)를 다 초월한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이것 오직 살아서 말하고 듣고 있는 이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환인(桓因). 하느님. 일본의 가미사마.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느님. 인도의 옥황상제(玉皇上帝) 중국의 천(天)등등 나라마다 자기네 민족고유의 신앙대상(信仰對象)이라고 하는 신(神)이 있지만 이것들이 모두 <진아> 밑에서 나온 것입니다. 종교도 그렇고 정치. 과학. 사상이 전부 생각 뒤이고 생각 이하에서 벌어진 것이 모든 학문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학문 이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언가"하는 것을 찾자는 것입니다. “살아도 내가 살아야 하고 또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느냐" 이것을 밝히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입고 자고 늙고 병들어 죽는 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육체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사람이 백 년의 명을 타고 났다면 오늘 하루를 살았다 하는 것은 24시간 목숨을 잘라 버렸다는 뜻이 됩니다. 산삼 하나를 달여서 쭉 들이마시는 그 시간도 자꾸 죽어 가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워서 자는 것도 죽어 가는 것이고 오면서 죽어가고 가면서 죽어가고 사는 것이 다 죽어가는 것뿐입니다. 아무 사정도 없이 만분의 일초도 정지함이 없이 자꾸 가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간다는 소리는 죽어간다 소립니다. 농사를 뼈가 빠지도록 지어도 자꾸 가는 것이고 장사를 해서 한국 돈을 다 모아 놓아도 그것도 자꾸 가는 것이니 하루하루 백 원, 백 원 돈을 모으는 것이 가는 것일 뿐 아무것도 남는 것은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지만 빈손도 갖고 가지 못하고 통째로 다 버리고 내버릴 것도 없이 갑니다. 차라리 본래 죽어간다고 말이나 바로 했더라면 그렇게 각오(覺悟)라도 하고 사니까 죽어도 섭섭한 마음이 덜했을 터인데 살아간다고 해놓으니까 별수 없이 시집가고 장가가려고 죽기 살기로 애를 써서 시집. 장가가고 첫날 저녁부터 서로 맞지 않아서 속고 마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파초 껍데기 벗기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살아 봤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살았다는 우리나라의 어원도 옳은 이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간다 하는 소리는 곧 태워간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살았다 하는 말은 오늘 하루 태웠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죽어간다는 소리와 같은 뜻입니다. 한국 사람의 말은 진리에 꼭 맞는 말이 많습니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이고 그리고 종교적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치를 생각하면 자살(自殺)할 마음이 안 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전세계 청소년들이 전부 히피족으로 돼 가고 미쳐서 날 뛰는 것도 까닭이 깊은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개. 돼지처럼 살면 백년 살아도 지루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도 먹고 똥 싸고 늙고 병들고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살 수 있겠지만, 본래의 인간은 삶의 가치를 찾으려 하고 동물과는 다릅니다.

현재 서양의 물질문명이 진보하여 가다가 마침내 벽에 부딪쳐서 이제 더 찾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청년들이 적어도 심리적으로는 전부 히피족이 되는 것인데 히피란 환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머리는 뒤집혔고 알맹이는 없는 거품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 지를 발견 할 수 없고 자기를 발견 할 수 없으니 히피족이 안 되고 어떻게 합니까. 히피족이라도 되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고 히피족도 못되는 것은 비 맞은 쇠똥 한가지의 썩은 청년들입니다. 비 맞은 쇠똥은 거름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히피족도 못되는 그것은 개만도 못합니다. 개는 보신탕이라도 하지마는 히피족도 안 되는 인간은 곰탕도 못 됩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그 만큼 밝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청년들은 무언가 생명의 애착이 있어 환각제(幻覺劑)를 먹을지언정 자살은 하지 않습니다. 죽기는 뭔가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덴마크 청년들은 미국사람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육도 완전히 의무교육이고 교통도 무료. 의료기관도 무료고 전부 공짜로 살 수 있는 극락세계고 지상천국(地上天國)입니다. 성(性)도 개방(開放)을 해서 여자로 생긴 것은 전부 친척이건 누구건 다 자기 마누라고 남자는 전부 영감이고 자기 남편입니다. 성을 개방해서 법률에 저촉되지 않도록 돼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놓고 나니 지극히 고독한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면 결혼해서 내 남편 내 아내가 결속(結束)되고 임자가 있어야 할 터 인데 개방을 해 놓고 나니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마음대로 뛰어다녀도 어디가 죽어도 아무도 간섭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덴마크 처녀 총각은 처녀 총각도 아니고 옛날 우리 습관(習慣)대로 하면 잡년, 잡놈들이 되어 버려서 이 사람들은 삶에 염증(厭症)이 난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은 아직 삶에 대한 염증은 안 났기 때문에 생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습니다. 덴마크 청년들은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여러 백길 되는 데 막 떨어져 죽기까지도 합니다. 병들어 죽고 똥만 싸다 죽으면 남도 괴롭고 나도 괴롭고 할 텐데 통쾌한 처녀들 통쾌한 청년들이라 할 것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이상 무엇 때문에 병이 나서 죽도록 기다릴게 있느냐, 맹렬하게 한번 죽어 보자,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유물사상(唯物思想)이 찾아가는 생의 말로라 할 것입니다. 전쟁할 필요도 없지만 전쟁하고 싶으면 한번 해보자 이런 식으로 미국 히피족들 월남 가서 싸우면 제일 잘 싸웁니다. 그것도 미친 히피족들의 행각(行脚)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걱정 없이 싸우는 그것뿐이기 때문에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십 세 이상 사람 다 죽고 나면 이 지구상은 뭐가 되고 인간세상은 뭐가 되겠나, 온 인류는 좌익이나 우익이나 이 걱정은 똑 같습니다. 다행히 서양 사람은 뒤 늦게나마 동양의 정신문화(精神文化)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정신문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불교인데, 불타의 정법(正法)인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중국. 한국. 일본입니다. 그런데 또 중국은 공산당의 유물교육(唯物敎育)을 받고 있으니 불교는 없고 지금 한국과 일본만 남았는데 또 일본 불교는 학문적. 형식적인 내용으로 전락했고 대승불교의 참 골수(骨髓)를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불교 뿐 입니다.

내가 이번에 일본에 가서 그 요지(要旨)를 밝혔습니다. 일본불교는 껍데기고 우리 한국불교는 알맹이라고 내가 그 증거를 댔더니 자기들도 긍정을 했습니다. 한국에 태어난 것을 가장 행복스럽게 생각하고 불교의 정신으로 언젠가 인류를 한번 지도할 때가 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손으로 인류평화를 건설할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불교정화(佛敎淨化)한다고 근 20년 동안 애쓴 목적도 여기 있습니다. 비구 비구니가 잘 살아 보려고 절 뺏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약소민족(弱小民族)이 강대국(强大國)에 압제(壓制)를 당하는 36년간을 절실히 느껴 본 사람입니다. 독립만세(獨立萬歲)운동을 했다고 왜병(倭兵)에게 고생을 치르고 나서 헤매다가 마침 불교를 만나 중이 된 것입니다. "인류가 불교에 돌아오면 전쟁이 없어지고 약소민족들은 완전히 해방이 되어 영원한 독립을 얻을 수 있는 사상이 불교에 있다."고 기뻐하며 불교에 귀의(歸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사상을 바로 한다, 불교정화(佛敎淨化)한다는 말은 한국독립이요 동시에 인류의 해방(解放)이다, 그래서 시간이 모자라면 내생에 또 와서 하자." 이것이 우리의 뜻입니다. 실제로 죽어도 또 한국에 태어납니다. 이 좋은 이론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류평화를 위해 약소민족이 일어나는 횃불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⑹ 생명은 생명, 허공은 허공

나라고 하는 가아(假我)를 상대하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생각도 아닌 나라는 생각이전의 진아(眞我)를 말했지만 사실 이것도 부득이해서 이걸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설(假說)한 것뿐입니다. <참 마음 참 내>가 이런 생각을 일으킨 것인데 <진아>니 <가아>니 하는 분별도 다 떨어진 그 이전의 <나>, 나도 아닌 내가 이걸 상대해서 <진아>니 <가아>니 하는 가짜를 부쳤을 뿐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참 피눈물 나게 서러운 말입니다. 유물사상으로 찾아 봐도 자기가 없으니까 <나>라는 생각 이것이 <나>가 아닌가 해서 한 말입니다. 이것이 소위 동서의 철학을 대표했다 하니 참 불쌍한 일입니다. 그것은 죽도 살도 못 해서 자살하기는 무언가 아깝고 그러니 그런 소리를 해서 위안하고 있을 뿐이니, 마치 한강 건너에서 사람이 많이 빠져 죽는데 "잠깐만"하고 외쳐서 우선 위급(危急)을 구하는 격(格)입니다. 일본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느냐고 현상을 걸었는데, <죠또맛데>가 당선이 됐습니다. “잠깐만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요사이 실존철학(實存哲學)이란 바로 이 <잠깐만> 철학인데 이런 법 가지고는 이번엔 안 죽을는지 몰라도 다음엔 죽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 가지고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철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미 생각조차도 아닌 <나> 이것이 실재(實在)임을 밝혀 주셨습니다.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다." 그것들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허공이 바위로 될 수 없고 진공이 바위 돌로 될 수는 영원히 없을 겁니다. 바위 돌은 고사하고 모래도 안 될 것입니다. 모래뿐 아니라 산소도 수소도 안 될 것이고 전자도 에너지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허공은 태초(太初)부터 없는 것으로 영원토록 없을 것입니다. 없는 것까지도 될 수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에너지 자체가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물질 그것은 어떠한 상태에 놓인다 해도 생명으로 변할 수도 없고 거기서 생명이 생겨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요새 무기물질(無機物質)이 유기물질(有機物質)로 화(化)했다는 소리를 하지만 무기물질이 유기물질로 화 했다는 소리는 “새 물질의 세포가 이루어져서 이것이 생명으로 된 것이다." 이런 뜻으로 한 말인데, 그러나 세포 아니라 세포보다 더 정밀한 조직이 된다 해도, 그것이 근본적으로 여하한 구조(構造)가 된다 해도 생명으로 변화 할 수 없는 것은 허공이 바윗돌로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일 허공이 바위로도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됐다 한다면 허공이라 할 수도 없고 바윗돌을 바윗돌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말도 못 만들고 생각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허공은 영원히 허공이고 물질은 영원히 물질입니다. 생명은 영원히 생명이고 죽음은 영원히 죽음입니다.

 

⑺ 마음이 보고 듣는다.

그런데 요사이 현대사조(現代史潮)의 영향을 따라 누구나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거의가 서양의 유물적인 사상만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 없으면 보지 못하고 귀가 없으면 듣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확실히 상식으로는 육안(肉眼)이 성하고 신경(神經)이 성해야 하고 대뇌(大腦)가 성해서 이 세 가지 구조가 건전(健全)할 때 비로소 뭐가 보입니다. 눈을 감아도 안 보이고 눈이 탈이 나도 안보이고 신경이 조금 고장이 나도 안보이고 대뇌가 조금 고장 나도 판단을 못 합니다. 중생들은 꼭 그런 줄만 알지만 부처님은 이걸 반대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보나. 마음이 본다. 어째 마음이 보나. 네 마음이 보고 싶은 생각을 할 때는 보이지만 네 마음이 딴 생각만을 하고 보려는 생각을 안 하면 눈을 똑 바로 뜨고 있고 아무리 건전한 신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육체적인 구조가 무엇을 보는 것이 라고 하면 마음이 아무리 딴 것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눈만 뜨면 안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카메라와 한가지 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20시간, 한 달 동안 꼬박 밤을 새우며 책만 보려는 마음만 먹으면 책을 꼬박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딴 생각을 골똘하게 하면 한 시간도 책속의 글자가 한 자도 안보입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어떤 사람은 재미있는 영화가 있으면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하루 열 번씩 그것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쳐 보는 영화라도 딴 걱정을 크게 하거나, 어떤 사람을 생각하던지, 원수를 생각하면 금방 안보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마음이 보는 것이고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눈을 감으면 안 보이는가. 그것은 내가 눈이 본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려 할 때 이제부터 안 보인다는 확정(確定)을 내렸으므로 눈 감기 전에 벌써 보려는 생각을 없앴다는 것입니다.

생각 잡념이 흐트러진 실처럼 복잡한 망상을 네 마음에서 다 없애고 오롯이 마음만 남아 있으면 눈을 감기는커녕 두 눈을 다 빼 버린다 해도 뒤 꼭지로도 보입니다. 내가 마음만 어지럽지 않아서 마음만 순수(純粹)하면 그래서 본심(本心) 그대로 <참 나>만 드러나면 땅속의 밑바닥까지 투시(透視)가 되고 여기서 아폴로 타고 달나라까지 갈 것 없이 다 보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을 감았다고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았다고 하는 것은 안 보기로 마음 정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과 같이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으로 뭘 들으려고 할 때는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확실히 들립니다. 그러나 마음이 딴 걸 골똘하게 생각할 때는 시장 복판에 저물도록 서 있어도 사람 소리 하나 안 들립니다. 또 들으려고 하기만 하면 세상 분주한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옵니다. 또 금방 안 들으려고 하면 심할 때는 옆에 대포가 터져도 안 들립니다. 큰 대포가 터지면 목조건물 같은 것 여간 잘 지어놔도 무너지고 두꺼운 유리창도 가루가 되지만 마음이 딴 걸 생각하기 때문에 고막도 안 터집니다. 소리는 못 듣더라도 고막은 터져야 하는데 고막조차 안 터졌다는 말은 물질이 진공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됩니다.

다른 오관(五官)도 똑 같습니다. 코도 냄새를 맡고 싶어 해야 냄새가 나지 마음이 딴 걱정을 하거나 깊은 연구에 몰두(沒頭)할 때는 똥을 갖다 코밑에 발라 놔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독한 냄새가 두 코에 가득 찼는데 아무리 딴 생각을 했다 해서 모른다면 말이 안 됩니다. 냄새는 모르지만 두통(頭痛)이라도 나야 할 게 아닌가. 육체는 한 개의 기계니까 확실히 두통이 나야 할 텐데 두통도 안 납니다. 그것도 물질이 진공으로 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통이 대번에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맛을 알려는 생각을 안 할 때는 또 큰 걱정 큰 기쁨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 백 가지를 입에 넣어 주어도 아무 맛을 모릅니다. 씹어서 꿀떡 넘기기는 넘겼지만 나중에 물어 보면 씹은 것도 넘긴 것도 모릅니다. 혓바닥이나 목구멍이 맛을 안다는 소리는 거짓말이 됩니다.

 

⑺ 생각이 아프다.

오관(五官)과 우리 마음은 서로 관계는 있을망정 전혀 별개의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오관은 물질로 구성된 기계이므로 마치 전자계산기(電子計算機)가 사람보다 억만 배나 정확한 성능(性能)을 갖고 있지만 전자계산기는 맞게 했는지 빨리 했는지 그걸 모릅니다. 왜냐하면 무정물(無情物)로 만들어진 기계이므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과학이 발달하여 아주 치밀한 인조인간(人造人間)을 만들어서 이 육체 인간 보다 억만 배나 훌륭한 인간이 나오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가치 없는 기계인간인 때문이니 우리에겐 이용가치가 있겠지만, 기계 그 자체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는 무기물질(無機物質)로 구조한 한 개의 기계이고 이 마음은 살아 있는 운전사입니다. 육체는 죽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옛날 말로 영혼이 이 육체를 떠나기 전 까진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송장인 무기물질입니다. 그런데 손톱 끝에 가시가 들어 놓으면 참 아픕니다. 다른데 아픈 것보다도 손톱 밑에 가시가 조금 박혀놓으면 마누라도 귀찮고 남편도 싫고 자식도 돈도 싫고 다 귀찮아 집니다. 아무리 대통령 하라 해도 그것도 싫고 아픈 것밖에 모릅니다. 그러면 육체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아픈가. 그것은 육체가 요것 하나뿐이다, 이것이 나의 전 생명이라고 이걸 애착하고 아끼기 때문에 아파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른 것만 생각하면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마치 이놈의 세상 더러운 세상 안 살겠다고 크게 결심하고 이 몸뚱이 탁 버리고 나면 도끼를 가지고 이 몸뚱이를 끊더라도 아픈 줄 모릅니다.

기미년(己未年) 삼일운동 독립만세운동(三一運動 獨立萬歲運動)할 때 그런 청년 많았습니다. 그때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 졸업하면 나이가 많아서 요새 대학 다니는 처녀 총각보다 더 컸습니다. 그런 청년들을 옷을 발가벗겨 가지고 유치장(留置場)에 갖다 넣습니다. 밤 열두 시만 되면 하나씩 하나씩 불러내서 부젓가락을 뻘겋게 달구어 가지고 전신만신을 쑤십니다. 사람이 참 참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고함지르는 소리에 오장(五臟)이 다 녹아 버립니다. 그래서 한 청년이 결심하기를 "저렇게 두들겨 맞다가 내가 병신이 될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니 이렇게 살면 뭘 하느냐. 그러니 개자식들한테 매 맞는다 해서 다리가 부러져도 아프다고 고함지르면 내가 항복하는 것이나 다름없구나. 나는 나가서 소리 지르고 하지 않겠다. 너희야 나를 죽이든지 가루를 만들든지 톱으로 썰든지 맘대로 해라." 하고 차례가 되어 나갔습니다. 이 짓 저 짓 다 하고 마지막으로 부젓가락으로 여기저기 쑤십니다. 처녀들한테도 가슴 양쪽에 젓가락을 뻘겋게 달구어 허벅다리고 어디고 안 쑤시는 데가 없습니다. 별짓을 다 해도 나는 결심을 한 것이 있어서 눈도 깜짝 안하고 눈물도 안 흘립니다. 그 당시는 죽을 작정하고 몸을 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취재하는 사람은 더 미칩니다. "이 자식 입을 딱 다물고 상도 안 찌푸리니, 에라 요놈의 자식 네가 참으면 얼마나 참나 두고 보자. 조센징(朝鮮사람) 요놈의 자식."하고는 이를 갈며 별짓을 다 합니다. 그래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나중에는 일본순사고 한국순사고 겁이 나서 곁에 보지를 못하고는 "세상에 독하다독하다 해도 이렇게 독한 건 처음이다. 만일 죽어 귀신이 있다 하면 이 귀신한테 다 죽을게다." 그러면서 먼저 그 사람을 내 놨습니다. 다른 사람 일 년 내내 고문한 것보다 더 했으니 그만하면 독립만세 부른 값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뼈가 다 부서지고, 살이 다 뭉개져서 거의 못 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치료도 안했는데 얼마 안가서 건강해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아픈 줄 모르고, 몸을 버리고 당했기 때문에, 다친 데가 없어서 쉽게 나은 것입니다. “이거 크게 다쳤다. 이거 큰일 났다." 하면 금방 신경(神經)이 죽기 때문에 한 달 갈게 일 년도 더 갑니다. 그러니 아픈 것을 못 참을 수록에 인욕(忍辱)을 하지 않을수록 병은 오래 가게 마련이고 겁을 낼수록 병은 오래 가게 마련입니다.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병이 쉽게 낫고 뼈가 부서져도 그게 갑작스레 나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몸뚱이를 버리고 나면 그렇게 됩니다.

몸뚱이를 버리면 아픈 줄 모릅니다. 그러니 몸뚱이를 챙긴다든지 하는 수양이 필요 합니다. 애착하기 때문에 내가 살을 잡으면 아프지만 사실 제가 몸뚱이 생명이 없으니 아플 수 없고 감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또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아픔이 생길 수 없습니다. 살이 아픈 것도 물질이 아픈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픔이 생길 수 없습니다. 살이 아픈 것도 마음이 아픈 것도 아니고 육체가 아픈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뭐가 아프냐. 마음으로 생각을 내서 아픈 것뿐입니다.

오직 <마음>이 <나>입니다. 몸뚱이도 내가 아니고 나는 순수한 <나>라는 생각조차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고 내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면서 얘기 할 줄 알고 얘기를 시켜놓고 저게 된소리인지 안 된 소리인지를 비판할 줄 알고 그리고도 아무 생각 없는 이것이 만사의 주체인 <나>입니다. 이 <나>가 생각으로 과학을 만들어 내고 철학을 만들어 내고 뒤집어 엎어버리려면 엎어 버릴 수 있고 이것이 만사의 주체이며 우주의 핵심(核心)입니다. 이것보다 앞서는 사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여기서 다 나왔고 진리 진리 해도 그것은 생각 밑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앞설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이 우주의 주체입니다.

이걸 발견한 이가 싣달 태자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에 나오면서 제일성(第一聲)으로 부르짖은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했는데, 그 뜻은 온 우주에 <나> 곧 <자아(自我)>가 오직 위대한 생명임을 외친 것입니다.

 

⑻ 육체를 정리하는 생활

"육체가 나라는 착각을 버려 보자." 다시 말하면 "육체생활을 좀 정리해 가지고 하루 밥 세끼 먹던 것을 노력하여 두 끼 먹고 수양하자. 더욱 더 자아 완성을 위해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 자세에서 보면 무슨 지식이니 신앙이니 하는 것은 흙탕물처럼 된 것이고 헝클어진 실 같이 번잡한 망상입니다. 도서관의 서적을 다 마음에서 떨어놓으면 사람의 제 생명. 본 면목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무슨 귀중품이다, 보물이다, 잘 보관하자, 이 사람 무슨 병이냐, 어려서 애들과 장난을 하다 피가 많이 날 정도로 피부가 상했어, 그때 균이 들어가 지금 파먹고 있다." 이 생각이 병이 되고 이 관념이 몸뚱이를 지배 합니다. 이런 관념이 절대원리라 믿고 중생심(衆生心)으로 얽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마음을 탁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고 육체의 주인공. 우주의 핵심. 생각의 주체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을 자꾸 버리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 들어가서 마음이 뚜렷이 드러나면 나중에는 우주에 모를 일이 하나도 없이 모두가 내 목전(目前)입니다. 마음을 깨쳐 놓으면 내 눈이 하나가 아니라 오관(五官)이 다 눈이 되고 귀가 됩니다. 귀라면 귀고 코라면 코고 거리가 없어집니다. 거리가 없다는 말은 둘이 아니라는 말이고 주관 객관이 통일됐다는 뜻입니다. 육체를 나라고 하다 보니 주관 객관의 거리를 인정하게 되고 둘로 생각하지만 마음도 아닌 마음이 나인 줄 어느 정도 깨달으면 이 우주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대목(大目)이 나옵니다. 그 때 비로소 사람이 살 기분이 생깁니다. "나는 영원히 죽을 방법이 없구나.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불에 탈 수도 없다, 내 몸뚱이는 두들기면 깨지지만 이건 자살도 못 한다, 자살할래야 방법이 없다, 세계의 수소탄이 다 내 몸에 맞는다 해도 육체는 죽을지 모르고 지구는 다 녹아 없어질지 모르지만 나는 죽을 수 없구나." 하는 진리를 환하게 보게 됩니다.

이렇게 불교를 알고 나면 죽음에 대한 공포(恐怖)가 그 시간부터 없어집니다. 동서 어디에도 구속된 데가 없고 이것 이전에 어떤 진리도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을 구속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모두 이렇게 앉아서 말 듣고 있습니다. 절대 자유인인 것이 이 마음입니다. 내가 가령 어떤 사람을 일어나라 해서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사람 몸뚱이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일으킨 것도 아니며, 오직 그 사람 마음이 정한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의 마음에 그런 결정이 안 나면, 일어설 생각이 안 나면 칼로 목을 쳐도 안 일어섭니다. 절대 자유인 게 생명입니다. 아무리 시집가라 해도 안 가고 장가를 오라 해도 안 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영원한 것이며 절대 자유인 것이며 그리고 남녀노소 똑같이 평등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이 마음을 내 놓고는 상대가 다 있고 대조(對照)가 다 있으며 완전한 게 없습니다. 가령 이 막대기는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닌데 긴 것이 나타나면 짧아지고 짧은 것이 나타나면 길어집니다. 저 혼자 자유롭게 뜻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내 놓고는 모든 것이 완전한 게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불이 뜨겁고 태양이 뜨겁다고 하지만 우리가 만일 태양 가운데 살고 전 우주가 태양으로 돼 있다고 하면 뜨거운 게 없습니다. 뜨겁지 않은 게 있기 때문에 불이 뜨겁지 불 그놈 자신은 뜨거운 걸 모르고 태양도 제가 뜨거운 걸 모릅니다. 이것이 상대성 원리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원리입니다. 나는 너 때문에 있고 여자 때문에 남자가 있고 나쁜 놈 때문에 착한 놈이 있습니다. 모두 악한 사람이라면 악한 사람 없고 모두 착하면 착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현상세계의 모든 것은 연기의 원리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이런 상대성원리로(相對性原理)로 이루어진 현상계(現象界)를 초월하고 육체 본위의 생활을 포기(抛棄)하여 오직 남을 위해 아무 조건 없는 생활을 하는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과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천이백대중의 수행생활을 보인 것이 이 일장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교단도 부처님의 정신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지계(持戒)를 하고 인욕(忍辱)하고 정진(精進)하고 실천하는 교단이 되어야 합니다.

 

⑼ 부처를 배우는 수행 생활

마음을 깨친 부처님은 무슨 조건부(條件附)로 사건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합니다. 인생의 최대문제(最大問題)인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초월했고 지식으로도 부족한 게 없이 완전하여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없이 전능(全能)하고 또 그리고 의식주(衣食住)가 필요 없으니 그야말로 부처님은 편한 분이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고 말씀한 그대로 원자탄이고 뭐고 눈썹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 위에 누가 있을 수 없는 분입니다.

또한 부처님은 자기 기분에서 보고 들은 판단력(判斷力)이 아니라 그건 완전하고 깨끗한 마음이 사실 그대로를 보고 듣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깨친 정각(正覺) 그대로입니다. 바리때를 들고 밥을 얻어먹으러 나가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합니다. 그것은 복이 없어서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선 진리를 모르는 사람 . 삐딱걸음으로 걸어가는 인간들을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앞서서 시범(示範)을 하는 것입니다.

"비구승은 반드시 거지가 되라, 얻어먹어라, 왜냐하면 많은 중생을 고루 대해야 하는 것이니 가난한 사람이나 거지나 국왕(國王)이나 어떤 권리층(權利層)도 어떤 천한 사람도 조금도 차별 없이 대하려면 얻어먹어야 한다. 꼭 얻어먹어라, 모든 사람에게 기회(機會)를 균등(均等)히 주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 고루 듣게 하기 위해서 평등하게 빌어먹어라."한 것입니다. 한 군데 따로 장소를 정해 놓고 "쌀 가져 오너라, 돈 가져 오너라, 불공 가져 오너라." 하면 부자나 오고 권리층이나 오고 가난한 사람은 오지 못하니 그런 짓 하지 말고 나르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운수생활(雲水生活)을 하라 하셨습니다.

인도는 나무 밑에서 참선하고 비만 안 오면 거기서 자고 거기가 집입니다. 그런데 또 부처님은 "한 나무 밑에 사흘 저녁을 계속 자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면 거기 정이 생긴다, 사흘 밤 자고는 다른 나무 밑으로 옮겨가라. 이게 다 공동소유물(共同所有物)인데 이게 내거라고 생각 말라는 것입니다.

전에 윤보산스님이라는 분이 중 되기 전후해서 그가 나와 2년 꼬박 같이 있은 일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집안이어서 집에 가면 붙들릴 것이 뻔하므로 나에게 글을 하나 써 달라면서 편지 쓸 용지를 내놓는데 보니 윤가용전(尹家用箋)이라 윤가집에서만 쓴다는 글이 인쇄돼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천지의 공공물로 있는 종이를 너희 윤씨네만 쓰려고 도장을 찍어 놨는가. 인쇄를 했는가. 천지만물이 다 공공 된 공물인데 윤가는 공인이 아니기 때문에 글 쓸 자격이 없다." 하고 농 삼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하는 일이 왜 내 것 네 것 가리어 그러는가 하고 한탄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먼저 먹어야 할 게고 배부른 사람은 나중 먹어야 할 게 아니냐." 이것이 불교의 공(空)한 진리로 사는 생활원칙입니다.

 

⑽ 공양하는 법

불교의 대중생활제도(大衆生活制度)는 원융제도(圓融制度)이며 내 것 네 것이 없고 서로가 위하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資本主義)도 아니고 사회주의제도(社會主義制度)도 아닙니다. 신도들이 어떤 물건을 공양하는 데 있어서도 가령 "양말 몇 켤레 가져왔습니다. 스님 나누어 신으십시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요새는 잘못 타락되어 기지고 "이것은 큰 스님부터 신고 이것은 아무스님 이것은 아무스님 신으십시오."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불법을 아는 신도가 아닙니다. 누구누구 신도라 하는 것은 그 양말 신은 사람도 죄가 됩니다. 대중평화도 깨집니다. 그것은 내 신도다, 그것은 네 신도다, 하고 싸우게 됩니다. 쌀이나 돈을 가지고 와도 옷을 가져왔어도 어쩌고저쩌고 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소리 말고 들여 넣고 가는 것이 참 공양입니다. 그러면 여기는 중이 먼저 된 사람은 먼저 앉고 나중 된 사람은 나중 앉는 순서가 다 있고 모든 것을 다 평등하게 합니다.

그런 의식주는 절대 평등을 주장하지만 지식이나 도(道)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시간 먼저 중이 된 사람과 한 시간 나중에 된 사람과의 차이를 엄격히 하고 앉는 차례까지 순서가 정확하지만 먼저 도통(道通)한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그 사람은 최고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리고 최고의 대우를 하고 그의 지도를 따라 법을 배웁니다.

 

⑾ 내가 없는 구도 생활

금강경은 실재(實在)의 나, 얘기하고 얘기 듣는 마음자리, 실재(實在)의 자기, 쉽게 말해서 육체가 지닌 영혼, 영원히 불멸하는 영혼을 깨우쳐 줍니다. 이것만 깨달으면 의식주가 필요 없고 만 가지 소원을 한꺼번에 성취해 버리는 것입니다. 돈도 밥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부처님을 배우는 승려도 절도 집도 없이 하는 것입니다. 절은 중이 거처하는 곳인 줄 알지만 지나가다 하룻밤 자고 가는 곳입니다. 더군다나 구름 같은 운수생활(雲水生活)이 곧 성직자(聖職者)의 생활입니다. 아무 욕심이 없어야 그게 성직(聖職)이지 남에게 대우나 받고 호강이 필요하든지 하면 그 시간부터 그 사람은 타락(墮落)하는 것이고 탐진치(貪嗔癡)의 업보(業報)에 떨어지는 것이며, 종교는 멸망(滅亡)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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