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http://blog.daum.net/mahatop7/5483

이전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겠습니다.

"나"라고 여기는게 바로 오온인데, 그 오온의 자성이 없어 실체가 공함을 조견했고,

그러므로써 색은 공을 여의지 않으며, 색은 공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의 실상입니다.

색의 실상이 곧 공이다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 입니다.

오온은 있되, 그 오온에 자성이 없어서 空입니다.

그리고나서 설명되어진 것이 그 空의 모습인데,

그것이 바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입니다.

그 후부터는 그 空 자체에 뭐가 있는지 설명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위에서 공중(空中)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이 뜻은 空 가운데...쉽게 말하면 空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온의 실체가 공한데, 그 공의 모습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며,

이젠 그 공 자체에 뭐가 있냐.....이걸 설명하는 것 입니다.

딱 공 그것만을 분석하는 내용인거죠.

비유하자면, 도자기의 재료가 흙인데...그 흙만을 분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떤 실체가 없이 텅 빈 것이 空입니다.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空이 아닌 것 입니다.

그러므로 空 그 자체엔 실체라고 여길 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습니다. 또한 그 어떤 모습/형상도 없습니다.

是故 : 그래서

空中 : 공 가운데에는.......즉 공 그 자체에는

無色 : 색이 없고,

無受想行識 : 수상행식도 없다.

空 그 자체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전에는 <공즉시색>이란 문구가 나오는데,

그것의 뜻은 이전 편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공이 곧 색의 실상이다라는 뜻입니다.

공이 곧 색이다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완전히 도로묵이 됩니다.

색은 모습/형체가 있고, 공은 형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똑같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물론 따로 따로 살펴볼 때 색도 실체가 없어 공하고, 공도 역시 실체가 없어 공하기에 같다라고 한다면 그건 맞는 말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색과 공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한 것 입니다.)

(색과 공은 따로 분리될 수 없으므로 色不離空 空不離色이며)

(그러므로써 색과 공이 다르지 않아 色不異空 空不異色이니)

(색의 본질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의 본질이라 色卽是空 空卽是色 입니다.)

색즉시공이라고 해서 단순히 색과 공이 똑같다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색즉시공에서의 卽은 똑같다라는 게 뜻이 아니고, 분리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공중무색>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과 색을 단순히 같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즉시색>의 뜻은 위에 설명한대로 공이 곧 색의 실상..즉 본래 모습이다..라는 뜻 입니다.

반야심경에 설해진 순서를 대단히 잘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 몇번을 반복해서 써놨듯이..

오온의 자성이 없어 공하며, 그 공의 모습이 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이며,

이제부터는 그 공 자체에 뭐가 있냐를 따지는 것 입니다.

왜 이걸 따지냐 하면, 공에도 뭐가 있는 줄 착각하는 경향이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고정관념을 박살내기 위해서 공 가운데는 그 무엇도 없다는 걸 줄줄이 길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 空을 비유할 때, 가장 많이 비유하는 게 바로 허공입니다.

허공이란 텅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바로 허공인거죠.

空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空인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오온 및 만물의 실상이 空임을 깨닫고, 그 空에 집착해버립니다.

다른 걸 버리고, 또 다른 것에 집착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空을 깨닫고 나서, 그 空조차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이걸 설명하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그래서 空 그 자체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설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계속 없다. 없다..없다....무지 역무득까지 계속 없다...없다....그렇게 나갑니다.

공 그 자체엔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자기의 비유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는 굉장히 여러 종류입니다.

그러나 도자기의 성품은 흙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게 도자기입니다.

이제부터는 흙 그 자체의 성품을 알아보겠습니다.

흙 그 자체에 둥근 도자기가 있을까요? 아니면 네모난 도자기가 있을까요?

흙속에 기다란 도자기가 있습니까?

흙 그 자체엔 그 어떠한 형태의 도자기도 없습니다.

주전자도 없고, 밥그릇도 없고, 컵도 없고, 항아리도 없고, 수저도 없습니다.

흙은 그냥 흙일 뿐 입니다.

그러므로 空에는 무상/고/무아가 먹히질 않습니다.

空 그 자체엔 그 무상/고/무아가 먹힐만한 실체가 단 하나도 없는 것 입니다.

그래서....

空은 항상(영원)한 것도 아니요,

空은 즐거움도 아니며,

空은 나가 있다고 따질만한 것도 없습니다.

空은 무상한 것도 아니요,

空은 고통도 아니며,

空은 무아라고 따질만한 것도 없습니다.

이런게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무상/고/무아가 먹히는 것은 속제입니다.

오온에서나 먹히는 것이지, 진제인 空 그 자체에서는 그 무엇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空이 곧 해탈의 문인데,

空이 무상하다면 그게 해탈입니까?

空이 고통이라면 그게 해탈문일까요?

空은 내가 있다고 따지거나 내가 없다고 따질만한 것 자체가 없으므로 무아라고 할 수 조차 없습니다.

반야심경에 무상/고/무아라는 용어는 전혀 안 나옵니다만, 그 내용이 없는 게 아닙니다.

색이 곧 무상한 것이며, 무상해서 고이며, 그러므로 무아입니다.

수상행식도 실체가 없어 무상한 것이며, 그러므로 고이며, 무아입니다.

다만 대승에서는 곧바로 空에 대해서 설명이 시작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소승이 맞는 자들을 위해서 주로 무상/고/무아를 주로 설하셨지만,

지혜가 큰 대승 보살들에게는 곧바로 열반의 본체인 空을 설하셨습니다.

왜냐면, 그만큼 보살들은 지혜가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반야심경은 대단한 경전입니다.

짧지만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반야바라밀다>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그 <반야바라밀다>가 완성된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바로 <일체종지>이며 그걸 성취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이 반야심경은 비방해서도 안되고, 흠을 잡아서도 안됩니다.

반야바라밀을 비방하는 것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는 오역죄보다 수천억 배 더 큰 죄입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소승불자들이 반야심경에 대해서 비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모르면 아무말없이 그냥 지내는게 상책입니다.

그렇다고 대승도 또한 소승을 얕잡아보고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도 큰 죄입니다.

소승이나 대승이나 모두 다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반야심경은 많이 읽고 외워야 합니다.

그 공덕이란 상상할 수 없이 큽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 그러한 내용이 아주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물론 공을 깨닫고 이해하면서 읽는 게 가장 좋습니다만,

몰라도 그냥 읽으면 그 인연으로 모든 고액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반야심경 해설 22. 부증불감(不增不減)

http://blog.daum.net/mahatop7/5482

 

이전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겠습니다.

"나"라고 여기는게 바로 오온인데, 그 오온의 자성이 없어 실체가 공함을 조견했고,

그러므로써 색은 공을 여의지 않으며, 색은 공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의 실상입니다.

색의 실상이 곧 공이다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오온은 있되, 그 오온에 자성이 없어서 空입니다.

그리고나서 설명되어진 것이 그 空의 모습인데,

그것이 바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입니다.

그 후부터는 그 空 자체에 뭐가 있는지 설명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위에서 공중(空中)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이 뜻은 空 가운데...쉽게 말하면 空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온의 실체가 공한데, 그 공의 모습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며,

이젠 그 공 자체에 뭐가 있냐.....이걸 설명하는 것입니다.

딱 空 그것만을 분석하는 내용인거죠.

비유하자면, 도자기의 재료가 흙인데...그 흙만을 분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어떤 실체가 없이 텅 빈 것이 空입니다.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空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空 그 자체엔 실체라고 여길 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습니다. 또한 그 어떤 모습/형상도 없습니다.

是故 : 그래서

空中 : 공 가운데에는.......즉 공 그 자체에는

無色 : 색이 없고,

無受想行識 : 수상행식도 없다.

空 그 자체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전에는 <공즉시색>이란 문구가 나오는데,

그것의 뜻은 이전 편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공이 곧 색의 실상이다라는 뜻입니다.

공이 곧 색이다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완전히 도로묵이 됩니다.

색은 모습/형체가 있고, 공은 형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똑같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물론 따로 따로 살펴볼 때 색도 실체가 없어 공하고, 공도 역시 실체가 없어 공하기에 같다라고 한다면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색과 공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색과 공은 따로 분리될 수 없으므로 色不離空 空不離色이며)

(그러므로써 색과 공이 다르지 않아 色不異空 空不異色이니)

(색의 본질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의 본질이라 色卽是空 空卽是色 입니다.)

색즉시공이라고 해서 단순히 색과 공이 똑같다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색즉시공에서의 卽은 똑같다라는 게 뜻이 아니고, 분리될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공중무색>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과 색을 단순히 같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즉시색>의 뜻은 위에 설명한대로 공이 곧 색의 실상..즉 본래 모습이다..라는 뜻 니다.

반야심경에 설해진 순서를 대단히 잘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 몇 번을 반복해서 써놨듯이..

오온의 자성이 없어 공하며, 그 공의 모습이 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이며,

이제부터는 그 공 자체에 뭐가 있냐를 따지는 것 입니다.

왜 이걸 따지냐하면, 공에도 뭐가 있는 줄 착각하는 경향이 대단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고정관념을 박살내기 위해서 공 가운데는 그 무엇도 없다는 걸 줄줄이 길게 설명하시는 것 니다.

이 空을 비유할 때, 가장 많이 비유하는 게 바로 허공입니다.

허공이란 텅비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바로 허공인거죠.

空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空인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오온 및 만물의 실상이 空임을 깨닫고, 그 空에 집착해버립니다.

다른 걸 버리고, 또 다른 것에 집착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空을 깨닫고나서, 그 空조차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이걸 설명하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그래서 空 그 자체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설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계속 없다. 없다..없다....무지 역무득까지 계속 없다...없다....그렇게 나갑니다.

공 그 자체엔 실체라고 여길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자기의 비유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는 굉장히 여러 종류입니다.

그러나 도자기의 성품은 흙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게 도자기입니다.

이제부터는 흙 그 자체의 성품을 알아보겠습니다.

흙 그 자체에 둥근 도자기가 있을까요? 아니면 네모난 도자기가 있을까요?

흙속에 기다란 도자기가 있습니까?

흙 그 자체엔 그 어떠한 형태의 도자기도 없습니다.

주전자도 없고, 밥그릇도 없고, 컵도 없고, 항아리도 없고, 수저도 없습니다.

흙은 그냥 흙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空에는 무상/고/무아가 먹히질 않습니다.

空 그 자체엔 그 무상/고/무아가 먹힐 만한 실체가 단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空은 항상(영원)한 것도 아니요,

空은 즐거움도 아니며,

空은 나가 있다고 따질만한 것도 없습니다.

空은 무상한 것도 아니요,

空은 고통도 아니며,

空은 무아라고 따질 만한 것도 없습니다.

이런게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무상/고/무아가 먹히는 것은 속제입니다.

오온에서나 먹히는 것이지, 진제인 空 그 자체에서는 그 무엇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空이 곧 해탈의 문인데,

空이 무상하다면 그게 해탈입니까?

空이 고통이라면 그게 해탈문일까요?

空은 내가 있다고 따지거나 내가 없다고 따질 만한 것 자체가 없으므로 무아라고 할 수조차 없습니다.

반야심경에 무상/고/무아라는 용어는 전혀 안 나옵니다만, 그 내용이 없는 게 아닙니다.

색이 곧 무상한 것이며, 무상해서 고이며, 그러므로 무아입니다.

수상행식도 실체가 없어 무상한 것이며, 그러므로 고이며, 무아입니다.

다만 대승에서는 곧바로 空에 대해서 설명이 시작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소승이 맞는 자들을 위해서 주로 무상/고/무아를 주로 설하셨지만,

지혜가 큰 대승 보살들에게는 곧바로 열반의 본체인 空을 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보살들은 지혜가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반야심경은 대단한 경전입니다.

짧지만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반야바라밀다>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그 <반야바라밀다>가 완성된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바로 <일체종지>이며 그걸 성취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이 반야심경은 비방해서도 안 되고, 흠을 잡아서도 안 됩니다.

반야바라밀을 비방하는 것은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는 오역죄보다 수천억 배 더 큰 죄입니다.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소승불자들이 반야심경에 대해서 비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모르면 아무말없이 그냥 지내는 게 상책입니다.

그렇다고 대승도 또한 소승을 얕잡아보고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그것도 큰 죄입니다.

소승이나 대승이나 모두 다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반야심경은 많이 읽고 외워야 합니다.

그 공덕이란 상상할 수 없이 큽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에 그러한 내용이 아주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물론 공을 깨닫고 이해하면서 읽는 게 가장 좋습니다만,

몰라도 그냥 읽으면 그 인연으로 모든 고액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f_uYDub_j8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 가, 깨달음에 뿌리를 내리자.)


*위 주문(呪文)산스크리트어[범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범어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 억양을 부드럽게 했을 때

(한자 음역)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한국말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영   어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해   석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라. 가라. 
피안으로 건너가라.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2912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093

 

 

[참고]

옴마니반메훔 (OM MA NI PAD ME HUM)

'옴마니파드메홈'의 뜻

-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주문으로 '옴 마니반메훔(산스크리트어)'의 여섯 자를 말함. [六字眞言]

이 주문을 위우면 관세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온갖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함.

- 산스크리트어로 지혜와 함께하는 방편이자 방편과 함께하는 지혜라는 뜻으로도 해석됨.

- 또는 '참다운 우주적인 근본 지혜와 자비가 마음에 깃들기를'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됨.

 

 

https://www.youtube.com/watch?v=N6-P1Wl7B2w 

 

 

 

 

반야심경 해설 21. 불구부정(不垢不淨)

 

http://blog.daum.net/mahatop7/5481

제법실상(諸法實相)이 곧 空입니다.

제법(諸法)이란 인과 연이 화합해서 생겨난 모든 것들을 뜻합니다.

즉 모든 존재를 포함한 삼라만상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존재하려면.... 생겨나려면.... 무조건 연기법에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생겨난 법들(諸法)의 본래 모습(實相)이 바로 空입니다.

그 空의 모습이 바로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는 말입니다.

空에는 그 어떤 형체나 모습이 없으므로, 더러움이나 깨끗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空을 청정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불경에 청정하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대지도론에는 왜 청정하다라는 표현을 부처님께서 쓰셨는가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중생이 그저 空하다고 하면 두려워하기 때문에 청정하다는 표현을 쓰셨다고 합니다.

더러움(垢)이란 윤회이며, 깨끗함(淨)이란 열반을 의미하는데...

空 그 자체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습니다.

즉 空 그 자체엔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8空 중에 <제일의공>이 있는데 이 뜻은 바로 열반도 실체가 없어 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空 그 자체엔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空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디에도 집착할 대상도 없고, 집착할 꺼리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열반인 것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空 그 자체엔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다. 그러므로 열반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온에는 스스로의 성품(실체)이 없어서 공한데, 그 공한 오온으로 열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세속법에 따라서 열반을 얻었다라고 할 뿐이지, 실상은 얻을 수 없는 걸 얻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뭘 얻을 수 있다면, 그건 空과는 반대인 것입니다.

뭘 얻는다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므로, 그것이 곧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은 세간에 적용되는 게 아니고, 출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간에서야 더러움도 있고 깨끗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그 이면에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간에서도

더러움이나 깨끗함에 어떤 정해져 있는 법(규칙)이 없습니다.

딱 이건 더럽고, 이건 깨끗하다고 정확하게 구분 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똥을 아주 더럽게 여깁니다만,

똥을 먹는 똥개는 그 똥이 아주 깨끗해 보이고 좋아 보이니까 그 똥을 먹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신선한 돼지고기를 아주 깨끗하다고 여기지만,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걸 더럽다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선이지만, 그게 또 어떤 사람에겐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속에서도 사실상 정해져 있는 법은 없습니다.

空과 가장 유사한 것이 바로 허공입니다.

허공 그 자체엔 그 어떤 것도 없으니, 깨끗하다고도 할 수 없고 더럽다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空이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우리는 더럽다거나 깨끗한 것이 없이 그저 청정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걸 불성, 진여, 여여, 법성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공/불성/진여/여여/실제/법성 등은 모두 반야바라밀에 포섭됩니다.

반야바라밀에도 그 어떤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일체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C%95%BC

 

반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प्रज्ञा prajñā) 또는 팔리어 빤냐(paññā)를 가리키는 낱말인데, 뜻에 따라 지혜(智慧)로 번역하고, 간단히 지(智) 또는 혜(慧)라고도 한다.[1] 불교

ko.wikipedia.org

불교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 혹은 팔리어 빤냐를 '지혜'라고 번역하지 않고 음역인 '반야'를 사용한 것은 불경의 한역(漢譯)시 적용했던 원칙인 5종불번(五種不翻: 5가지 번역하지 않는 원칙) 가운데 존중불번(尊重不翻)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반야를 지혜라 번역하면 그 본래의 뜻은 깊고 심대하나 번역함으로 인해 그 뜻이 얕아지고 가벼워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 하지만, 불교 논서들에서는 흔히 반야를 (慧)로 번역하고 있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반야(般若) 즉 (慧, prajñāpaññā)는 택법(擇法) 즉 간택(簡擇: 정확히 식별하여 판단함)[3][4][5] · 판단작용 · 판단력 또는 식별력으로,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의 대지법(大地法: 마음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항상 함께 일어나는 마음작용들)에 속한다.[6][7][8]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慧)는 부파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택법[9][10] 즉 간택[11][12] · 판단작용 · 판단력 또는 식별력이지만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의 별경심소(別境心所: 특정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마음작용들)에 속한다.[13][14][15][16][17] 상좌부 불교의 교학에서는 8정도를 크게 (戒) · (定) · (慧)의 3학(三學)으로 분류하여 보는데,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를 로 분류한다.[18][19] 이와 관련하여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구사론》 등에 따르면, (智) · (見) · (明) · (覺) · (解) · (慧) · (光) · (觀)을 통칭하여 혜의 8가지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20][21] 이 때문에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과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慧)라는 명칭의 은 있어도 (智) · (見) · (明) · (覺) · (解) · (光) · (觀)이라는 명칭의 은 없는데, 이들의 본질[自性, 自相]이 모두 (慧)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993

 

십바라밀(十波羅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 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행(菩薩行)이며,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연장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의 일반 보살행은 처음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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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행(菩薩行)이며,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연장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의 일반 보살행은 처음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의 육바라밀로 완성시켰으나

뒤에 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의 네 가지를 더하여 십바라밀을 만들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십바라밀(十波羅蜜))]

 

https://www.youtube.com/watch?v=MuUoqyAX3BQ 

 

https://www.youtube.com/watch?v=XBAc-i17CaM 

 

 

https://kydong77.tistory.com/category/%ED%95%B4%EC%99%B8%EC%97%AC%ED%96%89/%EC%A1%B1%EC%9E%90%EC%B9%B4%EB%A5%B4%ED%8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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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RyZ2WadfSPc 

 

 

 

https://kydong77.tistory.com/11984?category=612190 

 

극락세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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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1984?category=612190 

 

극락세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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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qdnskbraNgY 

 

 

https://kydong77.tistory.com/11927?category=612190 

 

[해설] 보로부드르 사원

먼저 사원 탑신의 광대한 규모와 1,460면에 달하는 탑신 부조물들의 정교한 조각에 압도당한다.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3&aid=0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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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__kKH3qk0Rg 

 

 

https://kydong77.tistory.com/12021?category=612190 

 

보로부두르 사원을 떠나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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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동안 화산재에 묻혀있던 세계 최대의 불교사원,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https://www.youtube.com/watch?v=tlM3e-tGrAc 

 

 

반야심경 해설 20. 불생불멸(不生不滅)

http://blog.daum.net/mahatop7/5480

 

空은 대승과 소승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해탈문입니다.

그만큼 이 空은 중요한 것입니다.

空은 모습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無相입니다.

모든 법의 공한 모습(諸法空相)이 곧 불생불멸(不生不滅)이죠.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생겨난 게 없으므로 소멸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자주 설명드렸다시피, 空은 아무것도 없는 無가 아닙니다.

空은 아무것도 없는 無도 아니며, 그렇다고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空을 여여(如如)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있되 그 오온에 고정불변의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없어서 空입니다.

이 空은 그 어떠한 표현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 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표현도 맞지 않습니다.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허공을 그 어떤 단어나 설명으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空을 허공에 비유합니다.

허공엔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허공을 알 수 있습니다. 물건으로 알 수 있죠. 물체가 없는 곳이 곧 허공입니다.

허공처럼 불생불멸한 것이 우리 마음의 본래 모습입니다.

이 생멸하며 찰라생 찰라멸하는 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 공한 것이며, 불생불멸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의 몸도 죽고, 마음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걸 반복하지만,

몸과 마음엔 원래 자체가 실체가 없어 공한 것이라, 공 그 자체엔 태어난 것도 없고 소멸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죽습니다만,

이 몸과 마음의 본질은 텅 빈 허공과 같아서 본래 죽는게 없는 것입니다. 생겨난 게 없으므로 죽을 것도 없죠.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생사를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외도의 종교나 도닦는 것들과는 정반대죠.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불변한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 영혼을 나의 본체라고 여기는 것 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오로지 오온에 의지해서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그저 명칭상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그 오온은 空한데, 그 空한 오온에 의지해서 나가 있으니,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란 개념은 이 오온 이외에 어떤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영원불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죠.

만약 영원불멸이라면, 그 어떠한 변화가 없어야 합니다.

그 어떤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과연 나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또 영혼이 괴롭다느니...뭐 이런 소리를 하는데...

영혼이 괴롭다는 것은 곧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곧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불변의 영혼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죠. 변하니까 말입니다.

또 괴로운 것은 오온 중에서 느낌입니다.

괴로움은 느낌이지, 그게 영혼은 아닙니다.

그래서 소승이든 대승이든 밀교든, 불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가끔 영혼이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해탈은 불가능합니다.

영혼이 있다라고 설법해주는 부류들은 해탈할 부류가 아니고, 선업을 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이 있다고 얘기해야, 내생을 믿고, 그로 인해 내생이 잘되길 바래서 선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이것은 희망의 말씀입니다. 소멸이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왜 소멸이 안 되느냐 하면 본래 생겨난 게 없으므로 소멸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죽음조차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인들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멸도...즉 열반에 드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라한이 되신 비구니 스님들이 너도 나도 미리 열반에 들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열반에 들겠다라는 얘기는 세속적으로 죽겠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 석가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께서 열반에 들어버렸습니다.

또 석가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나서도 수많은 아라한들이 앞을 다퉈 열반에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상태라서 그렇죠.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생노병사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걸 설명한 것이 바로 12연기법입니다.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고....

이 뜻이 과연 뭘까요?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결국은 안 죽었다는 뜻이고, 결국은 태어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죽고나서 다시 또 태어났다는 것은 결국 안 죽었다는 뜻이고,

태어났다가 죽었다라는 것은 결국 태어난 게 없다는 뜻입니다.

계속 죽고 또 죽고를 반복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따져 봤을 때 안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계속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따져봤을 때 태어난 게 없다는 의미입니다.

불생불멸이므로 윤회가 가능합니다.

본질이 空하기 때문에 윤회가 가능합니다.

우리의 몸에 정말로 영원한 실체가 있다면 죽을 수 없습니다.(상주론)

또한 정말 몸에 영원한 실체가 있는데도 죽었다면

그 실체도 또한 몸이 죽을 때 소멸돼서 없어져 버려야 하니 그것은 단멸론입니다.

空(불생불멸)이 곧 중도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아주 소멸되지 않습니다.

왜 소멸되지 않는가 하면, 소멸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후세계가 있고, 내생이 있고, 내생에 또 전생에 지은 업력을 받게 됩니다.

귀신영화/공포영화/전설의 고향같은 걸 보면 아주 웃긴 게 하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정말 웃긴데, 이걸 잘 안 따지고 보죠.

귀신이 멀쩡히 살아있으면서도 <나는 죽었어, 원수를 갚아야 해>하면서 복수하는 장면입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죽었다라고 여기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모습은 사실 꽤 웃긴 겁니다.

도를 닦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면,

아, 난 안 죽었잖아...아 신나네..이러면서 춤을 출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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