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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사 와불]

반야심경 해설 7.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② 공(空)의 중요성

http://blog.daum.net/mahatop7/5466

 

공(空)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공(空)이 곧 해탈문(解脫門)이기 때문입니다.

공(空)이라는 해탈문(解脫門)을 통해 열반에 도착합니다.

무엇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일까요?

온갖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번민,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해탈하려면......반드시 이 공(空)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 공(空)의 뜻은 이전에 설명했듯이, 연기법의 실체를 말합니다.

모든 번뇌를 박살내 버리는 게 바로 공(空)입니다.

무명도 역시 박살내 버리는 게 바로 공(空)입니다.

집착하는 이유는 무명 때문이며,

무명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독립적인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공(空)이란 모든 것은 인연화합, 즉 연기적으로 존재하므로 거기엔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집착할 꺼리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무명도 박살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온갖 번뇌도 다 박살나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空)이 곧 해탈문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모조리 다 실체가 없습니다.

인간이건 그 어떤 존재건 사물이건 모조리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조리 다 공한 것입니다.

눈에 보여지고 들려지지만, 그 이면에는 그 어떠한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다 모양이 없습니다. 그래서 無相입니다.

모습이 없으므로 단 하나의 모양입니다. 그래서 一相입니다.

그러므로 一相이 無相입니다.

이것이 평등성입니다. 그 어떠한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분별하거나 따져서 헤아릴게 없게 됩니다.

이걸 알면 마음이 쉬게 됩니다. 더이상 분별하고 따질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쉽니다.

번뇌란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그걸 모두 쉬게 된다면, 바로 이 상태가 해탈이요, 마음의 평안입니다.

마음은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한, 계속 분주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주히 움직이며 이것저것에 집착하고 욕심내고, 욕심이 안이루어지면 화를 내면서 죄를 짓습니다.

이런 게 다 모든 것의 존재방식인 제법실상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게 사실처럼 보여지니까 그걸 실제라고 믿는 건데 여기에 다 속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게 실체가 있다고 여기고 집착해봐야, 생겨나는 것은 결국 고통뿐입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부처님께서 알려주셨으며, 그 핵심이 바로 空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말씀하셨습니다.

삼해탈문이란 空/無相/無願입니다.

대승경전쪽에서는 無願을 無作으로도 한역해 놨습니다. 그래서 空/無相/無作입니다.

空 : 실체가 없이 텅 비었다는 뜻.

無相 : 텅 비어서 거기에는 그 어떤 모습/형체/형상이 없다는 뜻.

無願(無作) : 공하고 텅 비어 형상이 없으니 지음도 바램도 없다는 뜻.

이 삼해탈문은 결국은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다만 자비로써 각자 중생의 특성에 따라 들어오도록 두개를 더 설명해 놓으신 것입니다.

진리는 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입니다.

空에는 어떤 모습이 없기 때문에 無相이며, 상이 없으니 뭘 바라거나 짓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無願입니다.

無相/無願은 空의 다른 이름입니다.

마치 집안의 가장이 부인에겐 남편으로 불리고,

아이들에겐 아빠로 불리고,

다른 사람에겐 아저씨로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배우려면, 또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이 空을 배워야만 합니다.

空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연기법을 배우는 게 순서입니다.

그리고 나서 실제 내 마음속에서 연기와 공을 직접 깨달아야 합니다.

근래 한국에 남방불교가 들어오고, 남방불교 경전인 니까야 등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부작용이 있는데,

몇몇 소승불자들과 대승불교를 욕하려는 타 종교인들이 空을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인들이야 뭐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만, 소승불자들도 몇몇이 이런데 휩쓸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뭘 모르는 소승불자들이 주로 외치는 게 삼법인, 즉 무상/고/무아로써 해탈하는 줄 착각한다는 겁니다.

무상/고/무아는 삼법인입니다.

해탈이란 삼해탈문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삼법인은 삼해탈문에 도착하게 하는 연결다리일 뿐이지, 그 자체로써는 해탈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진제와 속제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런 걸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상(無常)이니 이런 망언을 해댑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상(無常)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만,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 곧 진제가 아닙니다.

만약 무상(無常)이 절대진리라면, 열반도 무상하다고 봐야 합니다.

열반도 무상하다면, 무상한 건 곧 고통이므로, 열반이 열반이 아닌 게 됩니다.

또한 무상(無常)하다면 그건 곧 영원하지 않다라는 것인데, 영원하지 않다면 내생도 없고 과보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무상(無常)이란 상대적인 진리, 곧 속제이지, 진제가 아닙니다.

속제라는 것은 인과적으로 돌아가는 우리가 사는 이런 드러난 현실세계에서의 상대적인 진리이며,

진제라는 것은 진실된, 불멸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무상(無常)은 상대적인 이런 세계에서는 백퍼센트 맞는 진리, 즉 속제입니다만,

불멸의 진리, 곧 진제에는 먹히질 않는 것입니다.

차후에 이 진제와 속제 및 삼법인과 삼해탈문에 관한 내용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진제와 속제, 그리고 삼해탈문은 대승이나 소승이나 다 똑같이 공통적입니다.

아함경/니까야에도 역시 지런 진제와 속제가 나와 있고, 삼해탈문도 엄연히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불교를 공부하려면 대승과 소승을 막론하고 반드시 이 空을 핵심적으로 배워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이 空을 깨닫게 되면 모든 번뇌가 사라집니다.

그야말로 이 空은 모든 번뇌를 작살내 버리는 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空이 곧 해탈의 門인 것입니다.

 

 

 

 

반야심경 해설 6.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① 공(空)의 뜻

http://blog.daum.net/mahatop7/5465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조견>은 비추어 보다라는 의미이며,

<오온>이란 색수상행식을 의미하며,

<개공>이란 모두 다 공하다라는 뜻입니다.

우선 공(空)의 뜻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1.공(空)은 후기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공(空)을 후대의 용수보살이 만들어낸 사상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용수보살이 따로 만들어낸 것은 없습니다.

모두 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더 명확하게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공(空)이란 대승불교의 것이 아닙니다.

공(空)이란 소승불교 경전에도 엄연히 나와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아함경에는 이 공(空)이란 용어가 그래도 가끔씩 등장합니다.

또한 요즘 번역된 니까야에서도 엄연히 이 공(空)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니까야 :팔리어로 '아함'의 뜻임. 팔리어는 당시 평민들의 언어를 지칭함.

상류계층에서는 산스크리트를사용했음.

 

아함경/니까야/청정도론에서 이 공(空)의 위치는 어떠할까요?

가장 핵심입니다.

즉, 해탈문이 바로 이 공(空)이라고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을 믿지 못하는 분들은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대승이나 소승이나 심지어 밀교(티벳불교)나 다 똑같이 해탈의 문은 동일합니다.

다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空)입니다.

 

2. 공(空)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공(空)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연기(緣起法)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연기(緣起法)이란 인(因) 연(緣)화합함으로 인해 법(法)생겨난다는 뜻 입니다.

존재 및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이 바로 연기(緣起)입니다.

하지만 중생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독립적인 실체가 있어서 영원한 줄 압니다.

영원한 줄 알기 때문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집착하더라도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잃게 되니까 그 때 큰 고통이 생깁니다.

인간이나 또는 다른 모든 존재 및 사물들은 모조리 다 이 연기(緣起)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즉, 인(因)과 연(緣)이 화합함으로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인(因)이란 원인이고,

연(緣)이란 조건입니다.

인(因) + 연(緣) = 법(法)

인과 연이 화합해서 법이 생기는 것이 바로 연기(緣起法)입니다.

 

법(法)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인과 연이 서로 의지해서 법이 생겨나므로, 이 연기법이란 <상호의존성>이라고 간단히 설명됩니다.

연기법이란 곧 상호의존성입니다.

혼자 독립적으로 생겨난 게 아니라, 서로 인과 연이 의지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조리 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인(因)과 연(緣)이 화합했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법이 생겨났는데, 그 법이 생긴 이유가 딱 하나가 아니고 바로 둘이기 때문입니다.

원인과 조건, 즉 인과 연입니다.

새의 날개도 두 개가 있어야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양쪽 날개가 서로 의지해야만 날 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도 인연화합에 의해, 즉 연기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끝도 없이 윤회한다고 하셨죠.

그걸 표현하신 것이 바로 12연기법인데,

12연기에서 두번째인 식(識)이 엄마/아빠의 정자/난자에 의지해서 잉태가 됩니다.

식(識)이란 제8식을 의미합니다.

보통 제8식을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식(識)이 곧 인(因)이며,

엄마/아빠가 곧 연(緣)이 됩니다.

인(因)만 있고, 연(緣)이 없으면 절대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잉태가 되어 엄마 뱃속에 들어가 있어도

역시 마찬가지로 엄마 뱃속이라는 조건, 즉 연(緣)에 의지해서 커갑니다.

엄마 뱃속에 든 태아가, 자기 스스로 혼자서 자라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엄마에게 의지해서 엄마의 영양분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에는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언제나 변해가다가 결국 늙어서 죽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다 큰 성인이 돼서도 이 몸이라는 것은 음식물에 의지해야만 생존이 가능합니다.

몸이 독립적인 실체라면, 아무것도 안 먹어도 몸은 살아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몸뿐만이 아니라, 이 마음도 역시 인과 연이 화합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연기법과 空은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정체를 몰라서 집착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3. 공(空)을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로 착각하지 말라.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있습니다.

그걸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있되, 거기에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없습니다.

이게 공(空)의 뜻입니다.

 

왜 실체가 없는가 하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영원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모든 것에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모조리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것은 무상(無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몸도 변해가고, 마음도 항상 변해갑니다.

 

시계!

그 시계도 역시 수많은 부품들이 서로 결합돼서 하나의 시계를 이룬 것입니다.

그냥 보기엔 시계가 독립적인 것 같지만,

사실 수많은 부품들의 결합체가 바로 시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따져보면 시계에는 영원한 독립적인 하나의 실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계가 오래되면 어느 부품 하나가 망가졌을 때는 멈춰 버리게 됩니다.

인간이건 사물이건 모든 것이 생겨나려면, 이렇게 인과 연이 화합하는 상호의존으로 발생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이며, 그러므로 공(空)한 것입니다.

공(空)을 직접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대다수가 이 공(空)을 아무것도 없는 무(無)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은 대단히 큰 실수이며, 오류입니다.

공(空)은 중도(中道)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단멸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에 사람을 비유해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존재하되 몸과 마음엔 독립적인 실체가 없습니다.

눈에 보여질 땐 모든 게 영원한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제는 안 그렇잖습니까?

시간 지나보면 다 아시듯이 변화합니다.

변화해 간다라는 의미는 영원하지 못하다라는 뜻이며,

영원하지 못하다라는 뜻은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걸 말합니다.

 

시계!!!

시계라는 것도 없다고 하면 안됩니다.

당연히 있죠. 만질 수도 있고 볼 수도 있는 게 바로 시계입니다.

그러나 그 시계에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망가질 수 있죠.

이런 것이 공(空)의 뜻입니다.

존재하지만, 거기에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것....그러므로 텅 빈 것입니다.

 

인간이나 삼라만상!!!

영원한 것입니까?

안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존재하되, 독립적인 실체가 없어서 변해가므로 공(空)하다고 표현하는 게 가장 올바른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다 마찬가지로 그 본질이 공(空)한 것입니다.

 

 

 

 

반야심경 해설 5.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http://blog.daum.net/mahatop7/5464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이 뜻은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라는 뜻입니다.

심(深), 즉 깊다라는 것은 반야바라밀다가 깊다는 뜻입니다.

왜 깊을까요?

공하며, 모양이 없고, 작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계도 없고, 끝도 없고, 시작도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깊다라고 한 것입니다.

 

행(行)은 곧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하여 닦는 행을 말합니다.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방법은 뭘까요?

바로 空입니다.

그래서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이라는 단어가 뒤에 나옵니다.

空을 관하는 것이 바로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방법입니다.

반야경에는 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방법에 대해서 엄청나게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짧게 나와 있습니다만, 반야경은 엄청나게 세밀하게 많은 분량으로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 방법을 제대로 모르면, 성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경에서는 보살들이 이 반야바라밀을 두 종류로 행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유사 반야바라밀이고 또 하나는 정통 반야바라밀입니다.

유사 반야바라밀이란 비슷하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즉, 제대로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반야바라밀에도 뭔 실체가 있는 줄 알고 집착한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반야바라밀에도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역시 공한 것입니다.

 

이 空하다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無로 착각합니다.

사실 대다수가 空을 無로 여기는 단멸론에 빠져듭니다.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방법은, 보통 세속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또 세속적인 그런 방법으로는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합니다.

연기법과 空을 깨닫거나 또는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만이 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있다 없다라는 이 두 가지 양변에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방법이 바로 空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공관(空觀)입니다.

 

어디에서 공을 관할까요?

일단 우선은 바로 내 몸과 마음입니다.

내 몸과 마음이 바로 오온입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다와 空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空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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