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 원귀의 원한 호소 (寃鬼雪恨)

*원귀설한:(직역하면) 원귀가 원한을 씻다

 

옛날 영남에 있는 한 고을에 갑자기 괴변이 생겨 흉읍(凶邑)으로 변했다.

곧 임명되어 내려오는 관장마다

부임 첫날밤에 사망하는 괴이한 일이 발생하니,

비록 물산(物産)이 풍부하여 넉넉한 고을이었으나,

관리들이 이곳으로 부임되는 것을 꺼려서

오래도록 관장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 때 서울에 사는 한 사람이 관직을 얻지 못해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어서,

사흘에 한 끼 밥도 못 먹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조판서를 찾아가서 아뢰었다.

"영남 모 고을에 괴변이 있어 아무도 관장으로

나아가지 않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소관(小官)이 감히 바랄 바는 못 되는 줄 아오나,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일이기에

한번 죽기로 결심하고 내려가서 은총에 보답하고자 하옵니다.

대감의 의향은 어떠하신지요?"

이렇게 그 고을 관장으로 자원하는 뜻을 밝히니

 

이조판서는,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데

그대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원하니 그 뜻이 가상하도다.

곧바로 임명을 주선하겠노라."

라고 대답하고 그 날로 부임하게 해주었다.

 

이에 그 고을 관장으로 부임해 가보니, 과연 넉넉하고 큰 고을이었다.

관장은 대강 부임 인사를 받고 난 다음에, 

밤이 되어 하인들을 일찍 퇴청하라고 명령했다.

 

그러고는 청사(廳舍)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서 칼을 뽑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다.

그리하여 4경(四更 : 밤 2시경)이 지날 무렵

모두가 잠들고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한데,

갑자기 뜰에서 여자의 슬픈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그리고는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대청으로 올라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바라보니 어떤 여인이었다.

 

관장은 모른 척하고 계속 주역을 읽으면서

슬금슬금 곁눈질로 살피니,

녹의 홍상을 곱게 차려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머리를 산발하고는 머리에 칼이 꽂힌 채 흐느끼며

책상 앞에 앉아서 관장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관장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고 글만 읽다가,

시간이 꽤 오래 지난 뒤에 책을 덮고는 크게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귀신인지 사람인지 정체를 밝힐지어다."

 

"나리! 소녀는 이 고을 기생 아무개로서,

어느 해 어느 때 본관의 수청 기생이 되었사옵니다.

그랬는데 마침 본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방안에 혼자 있으니,

당시 통인(通人)으로 있던 젊은이가 몰래 방으로 들어와서

소녀에게 통간하자고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소녀는 본관의 수청 기생에게 이 무슨 무례한 행동이냐고 꾸짖고는,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알려지면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속히 나가라고 꾸짖었사옵니다.

 

그러자 통인은 화를 내면서 이 칼로 소녀를 찌른 후,

흔적을 없애려고 소녀의 시신을 문루(門樓)에 있는

큰북 속에 던져 넣었사옵니다.

이렇게 되니 소녀의 부모 형제 또한 소녀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아직도 소녀는 그 큰북 속에 있으며 염습도 되지 못한 상태이옵니다.

 

또한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그 원한을 호소하려 오면

모두들 놀라 사망하였으니,

수년 동안 어디다 호소할 길도 없었사옵니다.

지금 마침 나리를 만나 비로소 원통함을 호소하오니

이 원한을 풀어 주옵소서."

 

여인의 말을 들은 관장은 비로소 한 맺힌 원귀임을 알고,

마음을 진정하면서 다시 물었다.

"저런! 가엾어라.

그렇다면 당시 통인의 성명이 무엇이더냐?"

"예, 나리. 그 사람의 성명은 아무개이며

지금 형방(刑房)의 직을 맡고 있는 자이옵니다."

"알았노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처리하겠으니 물러가거라."

 

관장의 약속에 그 여인은 일어나 절을 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는데, 흔적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이 밝았다.

아전과 관노들이 이번에도 관장이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장례 이야기를 하며 모여들었다가

꼿꼿이 앉아 있는 관장을 보고 모두 놀라 달아났다.

 

이에 관장은 다시 아전들을 불러들여

정상적으로 공무를 처리한 다음,

이방을 따로 불러 

형방이 지금 관아로 들어왔느냐고 물으니,

출근하여 대령해 있다고 아뢰는 것이었다.

관장은 즉시 형방을 잡아오라 하여 꿇여 놓고 엄하게 호령했다.

"네 죄는 설명하지 않아도 네가 알 것이니,

엄벌을 받기 전에 지체없이 이실직고함이 옳을 것이니라."

 

그리고는 한편으로는 관노들에게 명령을 내려,

문루 안에 있는 큰북 속을 살펴 시체를 찾아오라고 했다.

이윽고 어젯밤 그 여인과 동일한 시체가 등장하는데,

머리에 칼이 꽂힌 채 얼굴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

살아있는 사람이 잠자는 것 같았다.

 

이리되자 형방은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고

자신이 한 짓을 일일이 자백했고,

관장은 명령을 내려 형방을 매로 쳐서 죽게 했다.

 

이어서 그 기생의 부모를 불러 돈과 비단을 후하게 내리고

시신을 좋은 곳에 안장하도록 처리하니,

이후로 고을에는 아무 변고도 없었다.

 

조정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칭찬했다.

그 뒤로 관장은 임기를 잘 마치고,

여러 고을 관장을 거쳐 퇴임한 다음 행복한 일생을 마쳤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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