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268화 - 패랭이를 쓴 도인 (平凉道人)

 

서울에 한 사람이 있어,

늘 패랭이 삿갓을 쓰고 돌아다니면서

신이(神異)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이며

어디에 사는지,

그리고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평량자(平凉子),

곧 늘 패랭이 삿갓을 쓰고 다니니

그저 이평량(李平凉)이라고만 불렀다.

 

이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로 사람들이 먹는

익힌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술과 과일을 먹었으며,

특히 벌꿀과 해송(海松) 씨앗을 즐겨 먹었다.

 

둘째로 사람을 만나도 인사하는 법이 없이

연기처럼 구름처럼 떠돌아 다녔으나,

어디서 바둑 두는 소리만 들어면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들어가

함께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사람과 바둑을 두게 되면,

잘 두는 사람이건 못 두는 사람이건

으레 두세 집 차이로 지는 것이었다.

국수로 이름난 바둑꾼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누구도 이 사람을 이기는 자가 없었다.

 

때때로 내기 바둑을 두어

재물을 얻게 되면,

그 돈으로 모두 술을 사마시고

돌아가곤 했다.

또한 시도 잘 지었으나

그것을 자랑하는 일이 없었다.

 

이 사람이 지었다고 하는

시 몇 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늙은 노기(老妓)에 대하여

이렇게 읊고 있다.

 

一片殘花畵閣東 한 조각 시들은 꽃 동쪽에 있어

(일편잔화화각동)

幾回經雨又經風 비바람에 시달리기 몇 바퀴나 돌았는가?

(기회경우우경풍)

遊蜂戱蝶無消息 같이 놀던 벌과 나비 소식마저 끊어지고

(유봉희접무소식)

虛送光陰寂寞中 적막한 가운데서 허송세월 하는구나.

(허송세월적막중)

 

또 백로(白鷺)를 읊은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軒軒人立夕陽時 우뚝하게 서 있는 석양 때에

(헌헌인립석양시)

芳草晴紗倦睡宜 꽃다운 풀 맑은 모래 잠들기에 알맞구나.

(방초청사권수의)

意到忽然飜雲去 무슨 생각이 날 때면 훨훨 구름 속에서 나니

(의도홀연번운거)

靑山影裏更誰期 푸른 산 그림자 속에서 누구와 약속을 했는고?

(청산영리갱수기)

그리고 우연히 읊는다는 우음(偶吟)이라는 시가 있다.

白髮愁同約 백발이 근심과 함께 약속을 하여

(백발수동약)

愁來白髮多 근심이 찾아오니 백발도 많아지네.

(수래백발다)

還家愁可已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근심은 이미 사라졌건만

(환가수가이)

其奈白髮何 어찌하여 백발은 그대로 남았는가?

(기나백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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