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소총 제280화 - 기생을 여우로 알다 (認妓爲狐)
성여필(成汝必)은 상주 사람인데,
성품이 치밀하지 못한 편이라
사리 판단에 어두운 면이 많았다.
하루는 멀리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체되어,
날은 저물고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사방은 어둑어둑해졌다.
'해가 짧아졌나?
벌써 이렇게 어두워지다니,
빨리 가야겠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말을 재촉해 가고 있는데,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 여자를 만났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평소에 안면이 있는
고을 관아의 관기(官妓)였다.
이에 기생이 그를 쳐다보고는
아는 척하면서 청하기를,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
좀 늦어졌습니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아직 먼데
발이 부르터서 걷기가 어렵습니다.
생원님 말 뒤에
좀 앉아 가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애원하는 것이었다.
이 때 성여필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외딴 곳에서
여자 혼자 걷고 있다는 게
아무래도 여우가 둔갑하여 나타난 것 같아
도무지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워낙 울다시피 간청을 하니,
다시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만약 여우라고 한다면,
내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이 기회에 여우를 잡아
가죽을 벗기면
쓸모가 있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성여필은 그 기생을
자기 뒤에 올라타라고 허락했다.
그리고는 띠를 풀어
기생과 자기 몸을
단단히 동여맸다.
이 때 기생은
성여필의 행동이 매우 이상하여
속으로는 우스웠지만
하는 대로 가만히 두고서,
여하간 고을까지
무사히 태워다 주기만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의 등에 몸을 딱 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고 한참이 지나
그의 집 대문에 이르니,
성여필은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모두들 빨리 나오너라!
속히 횃불을 밝히지 않고
뭣들 하느냐?
사냥개도 데리고 나와야 한다.
내 여우 한 마리를 잡아왔으니
모두 나와 잡도록 해라."
이 말을 들은 기생은
비로소 자기를 완전히
여우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잡아당기며,
"생원님, 소녀를 지금껏
여우로 알고 계셨습니까?"
하고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성여필은
더욱 의심을 하면서 계속 소리쳤다.
"얘들아! 어디 있느냐?
속히 몽둥이를 갖고 나오지 않고?
내 휘항(揮項)1)이 없어 고생했느니라.
1)휘항(揮項) : 겨울에 목 뒤를 덮는 목도리.
그 휘항을 만들
좋은 여우 가죽이 생길 것이니라."
밤중에 크게 외치는 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들었다.
그리고 말 위에서
그와 함께 묶여 있는 여자를
자세히 보고는,
고을 관아의 관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 띠를 풀고 기생을 안아 내리는 동안에도,
성여필은 계속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여우 잡으라는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말에서 내린 기생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생원님! 나는 여우가 아니랍니다.
이 고을 관기로 이름이 아무개입니다.
생원님도 일찍이 소녀를 아시면서
왜 자꾸 여우라고 하십니까?
휘항 감이 될 여우 가죽은
뒤에 다시 구하셔야겠습니다.
여하간 여기까지
태워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러면서 인사를 하고 떠나니,
나와 있던 마을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웃고는
모두 돌아갔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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