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금소총 제281화 - 바둑에 적수를 구하다 (圍棋求敵)
어떤 고을에 사는 사람이
바둑을 매우 좋아하고
또한 잘 두었다.
그리하여 인근에서
바둑깨나 둔다는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몰려와
대국을 해도,
누구 하나 이기는 사람이 없었다.
곧 이 사람은
바둑에 있어서 자기를 당할 적수는
이 세상에 없다고 항상 큰소리를 쳤다.
게다가 누구와 두어도 항상 이기니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 집에 앉아서는
나의 적수가 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재미가 없으니,
이제부터 집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적수가 될 사람을 찾아
재미있게 바둑을 두어야겠다.'
이러고는 집을 나와
이 마을 저 마을로 돌면서,
사랑방에 들어가 바둑판이 있으면
한 판 두기를 청했다.
그러나 여러 달이 지나도록
자기를 이기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마침내 이 사람은 명실공히
자신이 바둑의 일인자임을 자처하게 되었다.
'이제 세상에서 나를 이길
적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노라.'
이렇게 자만하면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산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다시 산 하나를 넘어가니
아담한 외딴집 한 채가 보였는데,
사랑방이 따로 있어
뜻이 높은 선비가 속세를 등지고
피해 와서 사는 집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마음이 쏠린 이 사람은
그 집으로 가서 사랑채를 들여다보니,
어린 동자가 혼자 독서를 하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뜰에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독서를 하고 있는
동자 옆에 놓인
바둑판이 눈에 띄었다.
'옳거니, 이 동자의 스승이
바둑을 두는 분이로구나.
그렇다면 내 심심하던 차에
여기서 바둑 한 판
두고 갈 수가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서 동자에게 물었다.
"얘야! 이건 누가 두는 바둑판이냐?"
"예, 소생의 사부님께서 심심할 때
두시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네 사부님께서는
바둑을 잘 두시느냐?"
"예, 소생의 사부님께서는
바둑에 관한 한 천하무적이십니다."
그 말에 이 사람은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
바둑에 있어서는
자신이 천하무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인데,
누가 또 그렇다고 하니
꼭 한 판을 두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얘야, 네 사부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냐?"
"어르신, 사부님께서는
이 산속에 계시기는 합니다만,
구름 속이 깊어
어디 계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곧 돌아오시겠지요."
그러자 이 사람은 속으로,
'시간이 얼마가 가더라도
내 기다렸다가 바둑 한 판 두어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마루에 앉아 기다리니,
한참이 지나도록
동자의 사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무척 심심해지니,
혹시 동자도 바둑을 둘 줄 아는지
물어 보고 싶어졌다.
"얘야, 혹시 너도 바둑을 좀 배웠느냐?"
"예, 소생도 둘 줄은 압니다만
매우 서툴답니다."
"그러면 잘 됐다,
내 심심하니 바둑 한 판 두자꾸나."
"아닙니다, 어르신!
어린 아이가 감히 어르신과 어찌
대국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나 실례되는 말씀이십니다."
"그렇지 않단다.
어른과 아이의 대국은
예로부터 있었던 거란다."
이렇게 대화가 오간 끝에
그들은 마침내
바둑판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런데 채 반도 두기 전에
이 사람의 흰 돌은
몰사를 당하고 말았으니,
그는 정신을 잃고
먼 산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다시 한 판을 더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여전히
이 사람은 동자에게 대패를 당한 뒤
부끄럽기도 하여 물었다.
"얘야, 네 사부님께서는
너와 바둑을 두어 어느 정도시더냐?"
"예, 사부님께서는
소생에게 10점을 더 주고 두셔도
소생이 당하질 못합니다.
따라서 어르신은
소생의 사부님과
적수가 되지 못하오니
그냥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에 기가 죽은 이 사람은
그 곳을 떠나왔는데,
수십 보를 걸어나와 돌아보니
조금 전의 외딴집은 간 곳이 없었다.
"거 참, 이상한 일이로다.
분명히 내 그 집에서 나왔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돌아가 보니
외딴집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돌부처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에 작은 동자부처가 서 있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옳거니, 내 바둑을 잘 둔다고 자만하여
적수를 만나겠다고 돌아다니는
이 거만한 행동에
일침을 놓으려는 신령의 조화로다.'
라고 크게 반성하면서
부처를 향해 절을 하고는
집에 돌아와.
다시는 바둑을 잘 둔다고
자랑하지 않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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