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원( 曺光源 : 1492 ~ 1573)은 창녕 사람으로,
말년의 벼슬이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그가 천추사(千秋使) 사신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관서 지방의 어느 큰 고을에 이르러
날이 저무니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한데 사신을 인도하는
전도(前導) 아전들이
객사의 정관(正館)으로 인도하지 않고,
한쪽에 있는 별관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조광원은
수행 아전들을 꾸짖었다.
"너희는 왕명을 받들어
중국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 행차를 별관으로 안내하다니,
그런 무례가 어디 있느냐?"
이에 아전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황송하옵니다.
객관에 요귀가 나타나
여러 사신들이 갑자기 죽는
변고가 발생하니,
관사를 폐쇄하고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사옵니다."
"뭐라고? 요귀가 있어서
폐쇄해 두었단 말이냐?
왕명을 받드는 사신이
요귀에 의해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내 마땅히 객관에서 머물 것이니,
관사를 열고 청소하여
깨끗이 정돈할지어다."
이렇게 명령을 했는데도
아전들은 머뭇거리면서
선뜻 관사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 이 고을의 관장이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와
알현을 하고는,
역시 만류하며 말했다.
"앞서 여러 사신이 참변을 당해
어쩔 수 없이 폐쇄한 것이오니,
깊이 헤아려
별관에서 유숙해 주소서."
"무슨 소리냐?
봉명사체(奉命使體)를
어떤 요괴가 해친단 말이냐?
내 오늘밤
꼭 객관에서 머물 것이니
속히 준비할지어다."
조광원은 여러 아전들과
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청소를 한 뒤
객관에 들어가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으니,
밤이 이슥해지자
관장이 보낸 기생이며 아전들이
모두 무서워 도망을 치면서
저희들끼리 쑤군거렸다.
"이제 밤도 깊어
곧 요귀가 나올 텐데,
오늘밤 천추사는
역시 화를 당할 것이로다."
이리하여 모두 달아나고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밤중이 되자,
조광원이 앉아 있는 방에
한줄기 음산한 바람이 불더니
촛불이 꺼질 듯 흔들렸다.
이에 조광원은 바야흐로
요귀라는 것이 나타나는가 보다
생각하면서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 때였다.
천장 들보 사이에서
판자를 뜯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조금 후 사람의 두 팔과 다리가
차례로 떨어져 내렸다.
이어서 사람의 몸뚱이가
떨어져 내리고,
마지막으로 머리가 떨어지면서
이것들이 한데 붙어
여인으로 변했다.
그 여인은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얇은 비단 천으로 몸을 감쌌는데,
하얀 속살 여기저기로
붉은 혈흔이 보였다.
이 여인은 조광원 앞을
오락가락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이에 조광원이 큰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어떤 요귀냐?
듣자하니 앞서
여러 사신들을 해쳤다고 하던데,
그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느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타나서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게냐?
무슨 원통한 일이 있으면 속히 고하고,
그렇지 않다면 엄하게 다스릴 것이니라."
그러자 여인은 울면서 고하는 것이었다.
"소녀에게는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한 사정이 있사옵니다.
앞서 그 원통함을 호소하러 오면
사객(使客)들이 미리 놀라 죽는 바람에
아뢰지 못했사오며,
소녀가 죽인 것이 결코 아니옵니다.
오늘 마침 하늘이 준 은혜를 입어
아뢰게 되었사오니,
어찌 원한을 씻을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여인은 다시 울다가
말을 이었다.
"소녀는 이 고을 기생이었던
아무개이옵니다.
어느 해 어느 때
이 방에서 사신으로 오신 분을
천침(薦枕)했사온데,
밤이 깊은 뒤
소변이 마려워 밖으로 나가니,
마침 대령 중이던 아전 아무개가
저에게 덤벼들어 끌어안고
겁탈을 하려 했사옵니다.
소녀가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자,
그 아전이 소녀를 위협해
옷을 찢어 입을 막은 뒤
소녀를 안고 후원으로 가서,
큰 바위 밑에 밀어 넣고
그 위를 눌렀사옵니다.
그리하여 소녀의 몸은
짓눌려 으깨졌으니,
이 어찌 천하에
지극한 원통함이 아니겠습니까?"
조광원이 이 호소를 듣고는
여인을 위로하고 가엾게 여기면서,
"내 즉시 처치하여
원한을 갚아줄 테니
물러가도록 하라."
라고 일렀다.
그러자 여인은 울면서 절을 하고
사례하며 물러나는데 흔적이 없었다.
곧 조광원은 소리쳐 아전들을 부르니,
응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옷을 벗고 누워 잠을 잔 뒤,
새벽에 고을 관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생 명부인
기안(妓案)을 가져오라고 하여
그 기생이 행방불명된
사실을 확인한 다음,
아전 아무개를 지목하여
잡아 묶으라고 명령했다.
이어서 사람들을 동원해
후원의 바위 밑을 뒤져 보라고 하니,
그 안에서 여인의 몸이 나오는데
바위에 짓눌리기는 했으나
조금도 썩지 않고 그대로였다.
이에 아전 아무개를
엄하게 추궁하니,
마침네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사실을 실토하는 것이었다.
곧 조광원은 그 아전을
매로 쳐서 죽게 한 다음,
관장에게 명했다.
"저 여인의 시체를 거두어
염습(殮襲)해 주고,
가족을 찾아서 관에 넣어
좋은 곳에 묻어 주도록 하시오."
조광원은 이렇게 처리하고
중국으로 갔는데,
그 뒤로 이 객사에는
아무 일 없이 평온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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