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517화 - 어리석은 벼슬 자랑 (荷印矜爵)
한 고을에 매우 어리석은 관장이 있었다.
하루는 이 관장이 감영으로
관찰사를 만나러 가면서,
누구나 그러는 것처럼
통인에게 인(印)을 지운 채
자신은 홀몸으로 말을 타고 갔다.
그러다가 도중에 마주 오는
사냥꾼 세 사람을 만났는데,
가만히 보니
한 사람은 화살에 맞아 죽은
사슴을 짊어지고
힘겹게 걷고 있는 반면,
나머지 두 사람은 맨 몸이었다.
이에 관장은
사슴을 짊어진 사람을 보고 물었다.
"너희들 세 사람이 함께
사냥을 한 것 같은데,
그 사슴은 누가 잡았는고?
왜 그리 혼자 힘들게 지고 가느냐?"
"예, 사또! 이 사슴은
소인이 활을 쏘아 잡은 것이옵니다.
소인이 잡았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뽐내려고
이렇게 힘이 들어도
제가 직접 짊어지고 가는 것이오며,
어찌 다른 사람을 시켜
지고 가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자 관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사슴을 짊어지고 가는 것은,
사람들에게 사슴을
자신이 잡았다는 능력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로다.
그렇다면 나도
관장임을 증명하는
내 인을 통인에게
지우고 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사람들이 통인을 관장으로
오인할 것이 아니겠는가?
내 직접 지고 가며,
사람들에게 내가 관장임을
분명히 알게 해야겠노라.'
이러고서 관장은 곧 통인을 불렀다.
"통인은 듣거라!
네가 짊어지고 가는 인은
네 소용이 아니고,
내가 사용하는 것이니라.
그러니 어서 그 인을 내려놓아라.
내 직접 짊어지고 가겠노라."
이에 통인이 인을 내려놓으니,
관장은 스스로 짊어지고
말에 올라앉는 것이었다.
이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쑤군거렸다.
"저 행차를 보면 관장이
직접 인을 짊어지고
갈 리는 없는데,
그 행색은 관장처럼 보이니
정말 이상하구나.
앞에는 나장(羅將)이 전도하고
뒤에는 통인이 따르며,
좌우로 구종(驅從)이 호위한 것을 보면
분명히 말을 탄 사람은 관장일 텐데,
어찌하여 관장이
직접 인을 짊어지고 있단 말인가?
그러니 아마도
인을 짊어진 사람은 통인이고,
그 뒤 맨 몸으로 따르는 사람은
분명히 관장이로다."
이런 말을 들은 관장은
자신이 관장임을 뽐내려고
인을 직접 짊어지고 가다가
오히려 통인으로 오인되어
망신을 당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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