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587- 이름을 둘러대고 교생을 구제하다 (校生濟困)

해학에 능한 이항복이

관북 지역으로 귀양 갔을 때의 일이다.

한 교생(校生)1)이 자주 방문하여

여러 가지 자잘한 일들을 도와주곤 하기에

무척 고마워했다.

1)교생(校生 : 향교에서 독서하는 선비.

 

그 때 마침 향교에서 글 읽는

유생들의 학습 정도를 시험하는

고강(考講) 담당 관리,

곧 도사(都事)가 이 고을에 내려왔다.

그리하여 차례로 교생들을 불러

시험을 하는데,

이항복을 자주 방문하던

이 교생 차례가 되어

'천자문'을 옆에 끼고 들어가

도사의 앞에 앉았다.

곧 도사가

'기러기 안(雁)'자를 짚으면서

읽어보라고 하니,

교생은 그저 우두커니 있었다.

도사가 다시 큰 소리로 독촉했으나

이 교생이 글자를 몰라 대답을 못하니,

주위에서 보고 있던 친구들이

낙방을 걱정하여

작은 소리로 가르쳐 주는데도,

이 교생은 끝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보고 있던

한 친구가 다소 큰 소리로,

"저 자식 정말

'노련충(盧連蟲)'이네, 그려,

망할자식!"

이라고 화를 내면서 돌아앉았다.

'노련충'이란 말은 방언으로서

곧 '못된 상놈'이라고

욕하는 말이었는데,

도사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교생이 이 소리를 듣고

번쩍 고개를 들며

'노련충 안'하고 소리를 질렀다.

시험을 보던 도사는

크게 화를 내고 이 교생을 낙방시켜,

군역(軍役)에 종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교생은 곧 귀양을 와 있는

이항복을 찾아와

낙방 사실을 고하고,

어떻게 손을 써서

군역에 나가지 않게 구제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이항복이 시험 본 과정을 자세히 물으니,

교생은 '노련충 안'이라고 대답해 낙방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화를 내면서,

"네가 독서를 게을리 하여

잘못 대답해 놓고

날더러 어떻게 해달란 말이냐?

썩 물러가거라!"

하고 크게 호통을 쳤다.

이에 교생은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얼굴을 가리고 물러갔다.

 

이튿날이었다.

시험을 마친 도사가

이항복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방문했다.

그러고는 인사말로,

"이렇게 멀리 떨어져

귀양살이를 하시면서

어떻게 식사는 거르지 않으시는지요?"

라고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항복은 시치미를 뚝 떼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 여기서 '기사(己沙)' 말고는

고기 구경하기가 어렵다네."

"옛? 대감!

그 '기사'라는 것이 무엇인지요?"

"아, 도사는 이 지역 말을 모르겠군.

'생치(生雉)'를

이 지방에서는 그렇게 부른다네.

지방말은 서울말과 많이 다르거든."

"예, 알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고기는

얻기가 어렵겠습니다."

"아, 간혹 '노련충' 고기도

먹기는 하는데,

한 달에 한두 번이나

맛보는 정도라네.

그것도 얻기가 쉽지 않거든."

"대감! '노련충'이라니요?

'노련충'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아, 도사는 이곳 방언을 모르지.

서울말과는 많이 달라서,

기러기를 노련충이라 한다네."

이항복의 설명에

도사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한참 만에,

어제 어떤 교생을 시험하여

낙방시킨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항복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도사! 도사는 아직 젊어

전도가 창창한데,

사람들에게 원통한 일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된다네.

어떤 시정이 있으면 좋겠군."

이항복의 말을 들은

도사는 곧장 관아로 달려가서,

어제 시험했던 교과를 다시 정정하여

그 교생을 합격시킨 다음

군역에서 제외시켜 주었다.

그러나 교생은 영원히 이 일을 알지 못했더라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