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log.daum.net/thddudgh7/16534183?category=1425252

 

<서경>(20)우서(虞書)(20)대우모편(大禹謨篇)(6) 우가 순의 명을 받아 천자에 오르다.

            <서경(書經)>(20) 우서(虞書)(20)         우서(虞書)는 요순(堯舜)의 치적을 기록한 것이라 한다. 우(虞)는 유우(有虞)씨라는 순(舜)의 씨족명(氏   族名)에서부터 유래했다. 내..

blog.daum.net

 

<서경(書經)>(20) 우서(虞書)(20)       

   우서(虞書)는 요순(堯舜)의 치적을 기록한 것이라 한다.

우(虞)는 유우(有虞)씨라는 순(舜)의 씨족명(氏族名)에서부터 유래했다.

내용은 요순의 치적을 위주로 하여 그 당시 큰공을 세웠던 신하들의 말이나 업적도 함께 수록하였다.

수록된 편으로는 요전(堯典),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 익직(益稷)등으로 나뉘어 져 있는데,

실제로는 순(舜)의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사가(史家)들의 추기(追記)라고 한다.

이 중에서도 대우모(大禹謨)는 보다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기원전 2333년 부터 2184년 까지로 잡고 있는데,

세계적으로는 바빌론의 건국시기와 인구민족(印歐民族)의 대이동기(大移動期)에 해당한다.

당시의 대륙은 씨족 사회의 발전단계에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황하(黃河)의 범람이었다.

우리는 우서(虞書)로 통하여 요순(堯舜)을 비롯한 대정치가들이 어떻게 이를 극복했으며,

백성들을 어떻게 아꼈는가를 차근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제3편 대우모(大禹謨)(6)

                                               

   이 편은 앞의 두편과는 달리 <위고문상서>에만 수록이 되어 있다.

우(禹)는 곤의 아들로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홍수를 다스린지 30년 만에 마침내 성공하였다.

이에 순임금은 우를 사공(司空)의 벼슬에 임명하고 사(娰)라는 성(姓)을 하사 하였으며, 하백(河伯)에 봉하였다.

뒤에 우는 옛부터 중원을 침범하여 소란케 했던 묘족을 평정하고,  장강의 중류지역을 안정시켰으며, 

다시는 묘족의 북침이 없게 하였다.

그래서 그도 대우(大禹) 라고 하는 존칭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모(謨)는 모(謀)와 통용자로, ‘좋은 말씀, 훌륭한 정책의 계책’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우모는 우(禹)가 순임금의 신하로 있을 때 진언한 여러가지 계책, 곧 정치에 관한 의견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순임금과 우, 그리고 익과 고요의 정치적인 대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대우모는 중국의 고전인 <좌전(左傳)>, <국어(國語)>, <맹자(孟子)>등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앞에 나온 두편보다 문장의 구성이 훨씬 짜임새가 있고, 또한 유려한 필치로 엮어져 있다. 

 

 [6] 우가 순의 명을 받아 천자에 오르다.

 

   禹曰(우왈) : 우가 말하였다.

   枚卜功臣(매복공신) : "모든 공신들을 하나하나 점치시어,

   惟吉之從(유길지종) :오로지 길함에 따르도록 하십시오."

 

   帝曰(제왈) : 순임금이 말하였다.

    (우),官占(관점) 惟先蔽志(유선폐지)

   "우여! 관아의 점은, 먼저 뜻을 결정한 뒤에,

   昆命于元龜(곤명우원구) 朕志先定(짐지선정)

   큰 거북에게 명하는 것이오. 짐의 뜻은 이미 이미 결정이 되었고,

   詢謀僉同(순모첨동) 鬼神其依(귀신기의)

   물어서 의논하여 모두 동의한 바이며, 신령도 이에 따랐으며,

   龜筮協從(구서협종)

   거북과 시초의 점도 모두 이를 따랐으니,

   卜不習吉(복불습길)

   점을 쳐서 길함을 묻지 않는 바이오"

   禹拜稽首固辭(우배계수고사)

   우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며 굳이 사양하였다.

 

   帝曰(제왈) : 그러자 순이 말하였다.

   (무) 惟汝諧(유여해)

   "그러지 마시오. 오로지 그대만이 이룰 수가 있소이다"

   正月朔旦(정월삭단) 受命于神宗(수명우신종)

   정월 삭일(朔日) 아침에, 우는 신종(神宗)의 묘 앞에서 명을 받고,

   率百官若帝之初(솔백관약제지초)

   모든 백관들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순임금의 처음 때와 같았다.

 

 

 

 

   *이 절에서는 끝내 순임금이 우에게 모든 정권을 맡긴 것을 설명하고 있는 대목 이다. 곧 순임금은 우에

    게 제위를 선양한 셈이다. 우는 이를 극력으로 사양하여, 점을 쳐서 물을것을 주장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곧 천명사상에서 우러 나온 행위인 것이다. 당시의 정치는 종교와 일치하였다. 모든 대사(大事)에

    는 반드시 하늘의 뜻을 묻고 또 알렸는데, 점을 치는것 역시 한 종교적 의식임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마침내 우는 치수의 큰 공을 세운 까닭에 재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를 섭정

    하게한 것이고, 17년 후에 순임금이 붕어한 후에야 정식으로 제위에 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요순 이후의 하(夏), 은(殷), 주(周) 세 왕조를 합쳐서 삼대(三代) 라고 부르

    며, 이 3대의임금은 제(帝)라 하지않고, 왕(王)으로 호칭하였다. 따라서 우(禹) 역시 우왕(禹王)이라 기

    록되어 있으며, 제우(帝禹) 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는 우(禹)의 시대에서 부터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세습제도가 확립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