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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옹주(雍州)의 치수(治水)와 부세(賦稅)
黑水西河惟雍州(흑수서하유옹주)
흑수(黑水)와 서하(西河) 사이가 옹주(雍州)이다.
弱水旣西(약수기서)
약수(弱水)를 서쪽으로 흐르게 하고,
涇屬渭汭(경속위예)
경수(涇水)를 모아 위수(渭水)가 굽이치는 곳으로 흘러 들게 하였다.
漆沮旣從(칠저기종) 灃水攸同(풍수유동)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유통시키고, 풍수(灃水)도 위수로 합쳤다.
荊岐旣旅(형기기려)
형산(荊山)과 기산(岐山)을 정리하고,
終南惇物(종남돈물)
종남산(終南山)과 돈물산(惇物山)을 거쳐,
至于鳥鼠(지우조서)
조서산(鳥鼠山)까지 이르게 되었다.
原隰底績(원습저적) 至于豬野(지우저야)
평원과 진펄에서 공을 이루고, 저야호(豬野湖)까지 다스렸다.
三危旣宅(삼위기댁)
삼위산(三危山) 지방도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어,
三苗丕叙(삼묘비서)
삼묘족(三苗族)도 크게 질서가 잡혔다.
厥土惟黃壤(궐토유황양)
그곳의 흙은 누렇고 부드러웠으며,
厥田惟上上(궐전유상상) 厥賦中下(궐부중하)
그 밭은 상상(上上)의 1등인데, 부세(賦稅)는 중하(中下)의 6등이었다.
厥貢惟球琳琅玕(궐공유구림랑간)
공물은 옥경(玉磬)의 옥(玉) 구슬과 푸른 옥과 옥돌이었다.
浮于積石(부우적석)
그들은 적석산(積石山) 기슭에서 배를 띄우면,
至于龍門西河(지우룡문서하)
용문산(龍門山) 서하(西河)에 이를 수 있었고,
會于渭汭(회우위예)
위수(渭水)가 굽이치는 북쪽에 이를 수 있었다.
織皮(직피)
짐승의 털가죽으로 짠 융단은,
崑崙析支渠搜(곤륜석지거수)
곤륜(崑崙)과 석지(析支)와 거수(渠搜) 지방에서 났으며,
西戎卽叙(서융즉서)
이들 서융(西戎)도 잘 다스려져 질서가 잡혔다.
*옹주(雍州)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에 해당하며,
지금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곳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곳을 수천 년 전에 우(禹)가 개발하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써 우(禹)는 9주(九州)의 물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안주 시킨 사실을 차례로 더듬어 보았다.
이미 서술한바 있거니와, 옛날 중국의 홍수는 매우 극심하여 백성들의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거의 해마다 황하가 범람하였고 물길을 바꾸면서 천하를 휩쓸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물길을 우(禹)가 천신만고 끝에 다스려 백성들을 안주시키니,
자연 민심은 우(禹)에게로 쏠리게 되었고,
순임금이 재위를 물려 주려고 할 때 고요(皐陶)를 천거하였으나,
순임금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아홉 절에서 치산치수의 공적은 물론 이려니와,
여러 옥구슬에서 그 당시의 조각술(彫刻術)을 엿볼 수가 있고,
여러금속으로 제련술(製鍊術)이 발전했음을 알수가 있다.
당시의 문명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늘날에 와서 그 정교함을 자랑하는 수많은 공예품들이 이미 수천년 전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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