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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44)하서(夏書)(14)우공편(禹貢篇)(14) 우(禹)가 오복(五服)을 설정하였다.

             <서경(書經)>(44) 하서(夏書)(14)         하(夏)는 우(禹)를 비롯한 그의 자손들이 중국을 다스렸던 왕조를 가리킨다. 하서(夏書)는 하 왕조(夏王   朝)의 사관(史官)이 기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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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禹)가 오복(五服)을 설정하였다.  

 

   五百里甸服(오백리전복) 

   도읍지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 100리의 땅을 전복(甸服)이라 했다. 

   百里納總(백리납총) 

   100리의 안은 부세로 볏단을 바치게 하고,

   二百里納銍(이백리납질) 

   두번째의 100리 안은 이삭을 바치게 하였다.

   三百里納秸服(삼백리납갈복) 

   세번 째의 100리 안은 짚과 수염을 딴 낟알을 바치게 하였고,

   四百里粟(사백리속) 

   넷째의 100리 안은 찧지 않은 낟알만 바치게 하였으며,

   五百里米(오백리미) 

   다섯째 100리 안은 쌀을 바치게 하였다.

   五百里侯服(오백리후복) 

   전복 밖의 사방 5백리 땅은 후복(侯服)이라 하였다.

   百里采(백리채) 

   첫 100리 안의 땅은 경대부(卿大夫)들이 봉함을 받은 땅이고,

   二百里男邦(이백리남방) 

   두 번째 100리는 남작(男爵)들이 봉함을 받는 나라이며,

   三百里諸侯(삼백리제후) 

   나머지 3백리 안의 땅은 제후(諸侯)들이 다스리는 땅이다.

   五百里綏服(오백리수복) 

   후복 밖의 5백리를 수복(綏服)이라 하였다.

   三百里揆文敎(삼백리규문교) 

   첫 3백리 안의 땅은 교화를 원칙으로 삼았으며,

   二百里奮武衛(이백리분무위) 

   나머지 2백리 땅은 무위(武衛)을 떨쳐 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五百里要服(오백리요복) 

   수복 밖의 5백리를 요복(要服)이라 하였다.

   三百里夷(삼백리이) 

   첫 3백리 안의 땅은 이족(夷族)들이 살게 하였고,

   二百里蔡(이백리채) 

   나머지 2백리 땅은 가벼운 죄인을 귀양보내는 채(蔡)이다.

   五百里荒服(오백리황복) 

   요복 밖의 5백리를 황복(荒服)이라 핬다.

   三百里蠻(삼백리만) 

   첫 3백리 땅은 만족(蠻族)을 살게 하였고,

   二百里流(이백리류) 

   나머지 2백리 땅은 중죄인을 귀양보내는 유형지인 류(流)이다.

   東漸于海(동점우해) 西被于流沙(서피우류사)

   이리하여 동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로는 유사(流沙)까지 닿았다.

   朔南曁(삭남기) 聲敎訖于四海(성교흘우사해) 

   북녘에서 부터, 남녘까지 명성과 교화가 온 세상에 퍼졌다.

   禹錫玄圭(우석현규) 

   우(禹)는 검은 구슬로 만든 홀인 현규(玄圭)를 바치고,

   告厥成功(고궐성공) 

   모든 일이 이루어 졌음을 아뢰었다.      

   

    *여기에서는 우(禹)가 치산치수(治山治水)와 행정적인 체계를 확립하는 정책으로 나라의땅을 오복(五

     服) 으로 나눈 업적을 서술하고 있다. 

본래 오복(五服)의 명칭과 순서는, 중국 요순(堯舜) 시대의 제도에서는,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를 매복(每服) 5백리씩 순차적으로 나눈 다섯 구역을 말하던 것인 데, 

     상고에는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을 오복 이라 하였으나,

대(周代)에는 후복(侯服)·전복(甸服)·남복(男服)·채복(采服)·위복(衛服)을 오복이라 칭하게 되었다.

로써 우(禹)의 업적을 치수(治水)와 부세(賦稅)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하여 대략 살펴보았다.

물론 이 편에서 존 산이나 가으 혹은 호수가 오늘날의 어느곳을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은곳도 있으며,

우(禹)가 자신의 혼자 힘으로 중국이라는 방대한 지역을

이와 같은 대사업을 완수 했다고 하는 점은 조금 과장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의 시대부터 근대국가로 발전할수 있었으며,

민생의 안정과 행정 구역과 세제(稅制)의 확립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는 처음 정사를 맡게되자, 고요(皐陶)를 중용하였으나, 곧 고요가 죽게 되었으므로, 

다시 백익(伯益)을 등용하여 그를 돕도록 함으로써 중국을 잘 다스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 우(禹)는 백익(伯益)에게 그의 자리를 계승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禹)의 공적이 너무나 위대했기 때문에

제후와 백성들은 모두 우(禹)의 은덕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한편 우(禹)의 아들인 계(啓) 역시 현명하였으므로,

제후들과 백성들이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라고 한다. 

     우(禹)는 제위 8년 만에 죽었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우현(禹縣)인 양적(陽翟)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다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안읍현(安邑縣)부근인 안읍(安邑)으로 옮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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