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 제 5 권

송대 사문 혜엄 등이 니원경에 의거하여 덧붙임

7. 네 가지 모양 ②

그 때에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존에게 비밀한 장(藏)이 있다 하였으나, 그렇지 아니하옵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들께서는 비밀한 말만 있고 비밀한 장은 없으니, 마치 환술쟁이가 기관으로 만든 나무 사람과 같아서 구부리고 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만 속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지 못하는데, 부처님 법은 그렇지 아니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보고 알게 하시나니, 어찌하여 부처님들의 비밀한 장이 있다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가섭을 칭찬해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의 말과 같이 여래는 실로 비밀한 장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가을의 보름달이 허공에 떴을 적에 깨끗하게 드러나 가리움이 없음을 사람마다 보는 것같이, 여래의 말도 그와 같아서 환하게 드러나고 깨끗하여 가리움이 없건만, 어리석은 사람은 알지 못하여 비밀한 장이라 하거니와, 지혜로운 이는 분명히 알고 장이라 하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마치 사람이 한량없는 금은 보배를 쌓아 두고도, 아끼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에게 보시하여 구제할 줄을 모른다면 그것은 비밀한 장이라 하려니와, 여래는 그렇지 아니하여 그지없는 오랜 세월에 한량없는 법의 보배를 쌓아 놓고 아끼는 마음이 없이 모든 중생에게 항상 보시하나니, 어찌하여 여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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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한 장이라 하겠느냐.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몸이 불구가 되어 눈이 없거나 손이나 발이 없으면 부끄러워서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것인데, 사람이 보지 못하므로 비밀하게 감춘다 하겠지만, 여래는 그렇지 아니하여 가지고 있는 법을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거늘, 어찌하여 여래의 비밀한 장이라 하겠느냐. 선남자여, 어떤 가난한 사람이 남의 빚을 많이 지고는 빚쟁이가 무서워서 숨고 나오지 아니하므로 비밀히 숨었다 하려니와, 여래는 그렇지 아니하여 모든 중생의 세간법을 빚지지 아니하였고, 중생의 출세간법을 빚졌다 하더라도 숨지는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중생을 대하여 항상 외아들이란 생각을 가지고 위없는 법을 연설하는 연고니라.
선남자여, 마치 장자가 재물이 많은데 외아들을 두고는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잠시도 떠나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보배를 모두 보이나니, 여래도 그러하여 중생을 외아들같이 여기느니라. 선남자여, 세상 사람들은 남근(男根)과 여근이 흉하고 부끄럽다 하여 옷으로 가리므로 감춘다 하겠지만, 여래는 그렇지 아니하여 영원히 이 근(根)이 없으므로 감추지 아니하느니라. 선남자여, 바라문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論理)는 찰리나 비사나 수타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 논리에는 허물이 있는 연고지만, 여래의 바른 법은 그렇지 아니하여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 훌륭하므로 비밀한 장이라 이름하지 않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장자가 외아들을 두고 항상 사랑하고 그리워서 스승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하려다가 빨리 성취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도로 데려다가 밤낮으로 반쪽 글자만 가르치고 성명론(聲明論)은 가르치지 못하나니, 나이가 어려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연고니라. 선남자여, 그 장자가 반쪽 글자만 가르쳐도 그 아들이 능히 성명론을 알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장자가 아들에게 비밀히 감추는 것이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아들의 나이가 어려서 말하지 않았을지언정, 아끼느라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오니, 만일 아끼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으면 멈춘다 하려니와, 여래는 그렇지 아니하옵거늘, 어찌 여래의 비밀한 장이라 말하오리까?”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의 말과 같이 미워하고 질투하며 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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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마음이 있으면 감춘다 하려니와, 여래는 그런 마음이 없거늘 어찌 감춘다 하겠느냐. 선남자여, 장자는 여래를 비유한 것이, 외아들은 모든 중생을 비유한 것이니, 여래가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생각하느니라. 외아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성문 제자를 말함이요, 반쪽 글자는 아홉 종류 경전을 말함이요, 성명론이란 것은 방등(方等) 대승경전을 말함이니, 성문들이 지혜가 없으므로 여래가 반쪽 글자인 아홉 종류 경전만을 말하고, 성명론인 방등 대승경전은 말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저 장자의 아들이 자라서 글을 배울 만하여도 성명론을 가르치지 않으면 장이라 하는 것과 같이, 성문들이 대승 성명론을 배울 만한 힘이 있어도 여래가 아끼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여래는 비밀한 장이 있다고 말하려니와, 여래는 그렇지 아니하므로 여래는 비밀한 장이 없느니라. 그 장자가 반쪽 글자를 가르치고 다음에 성명론을 말하듯이, 나도 그와 같이 제자들에게 반쪽 글자인 아홉 종류 경전을 말하고, 다음에 성명론을 연설하노니, 그것이 여래가 항상 머물고 변역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니라.
또 선남자여, 마치 여름철에 큰 구름과 우레가 일어나고 큰비가 오면, 농부들 가운데 씨를 심은 이는 열매를 많이 거두고, 씨를 심지 않은 이는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으니, 거둘 것이 없음은 용왕의 허물이 아니며, 그 용왕도 감추는 것이 없느니라. 나도 그와 같아서 대열반경인 큰 법비를 내리거든, 중생들로서 선근의 씨를 심은 이는 지혜의 열매를 거두고, 선근의 씨가 없는 이는 거둘 것이 없나니, 거둘 것이 없음은 여래의 허물이 아니며, 여래는 감추는 것이 없느니라.”
“저는 지금 여래께서 비밀한 장이 없음을 알았사오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성명론에서 여래께서 항상 머물며 변역하지 않는다 함은 그렇지 않나이다. 왜냐 하면 옛적에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 연각들과
여러 성문 제자들도
무상한 몸 버리거든
하물며 범부들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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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데 지금에는 항상 머물고 변역하지 않는다 하시니, 무슨 이치입니까?”
“선남자여, 나는 모든 성문 제자들에게 반쪽 글자를 가르치느라고 그런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또 선남자여, 바사닉왕이 어머니가 죽은 뒤에 슬프게 울고 부르짖으며 나에게 왔길래 ‘대왕은 어찌하여 이렇듯이 서러워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왕은 대답하기를 ‘나라의 태후가 돌아가셨는데 누구든지 어머니의 명을 도로 살릴 이가 있다면 나는 나라와 코끼리와 7보와 목숨까지 버려서 은혜를 갚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왕은 그렇게 서러워하고 통곡하지 마시오. 모든 중생의 목숨이 다한 것을 죽었다 하나니, 부처님이나 연각이나 성문 제자들도 이 몸을 버리거늘 하물며 범부이겠소?’ 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바사닉왕에게 반쪽 글자를 가르치느라고 이 게송을 말하였거니와, 지금은 성문 제자들에게 성명론을 말하는 터이므로 여래는 항상 머물러서 변역함이 없다고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무상하다고 말하면 어찌 그 사람의 혀가 빠지지 아니하랴.”
가섭보살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 쌓아 두지 말고
음식에 만족할 줄 알며,
새들이 허공에 날아도
자취를 찾을 수 없도록.

그런데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세존이시여, 이 대중 가운데 누가 쌓아 둠이 없다 이를 만하며, 누가 음식에 만족한다 이를 만하며, 누가 허공에 행하매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만하며, 이렇게 가는 이는 어느 곳에 이르겠습니까?”
“가섭이여, 쌓아 두는 것은 재물이니라. 선남자여, 쌓아 두는 일이 두 가지니, 하나는 함이 있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함이 없는 것이니라. 함이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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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 둠은 성문의 행이요, 함이 없게 쌓아 둠은 여래의 행이니라. 선남자여, 스님도 두 가지니, 함이 있는 스님과 함이 없는 스님이니라. 함이 있는 스님은 성문이라 하며, 성문인 스님은 쌓아 두는 일이 없나니, 종이나 법답지 아니한 물건이나 광이나 미곡이나 소금·메주·참깨·콩·팥 따위니라.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래가 종이나 하인 따위의 물건들을 쌓아 두도록 허락하셨다 하면, 혀가 말려 들어가게 될 것이니, 나의 성문 제자들은 쌓아 두는 일이 없다 할 것이며, 음식에도 만족할 줄을 안다 할 것이니, 음식을 탐하는 이는 만족한 줄을 모르는 것이요, 음식을 탐하지 않는 이라야 만족한 줄을 안다고 이름하리라. 자취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위없는 보리에 가까운 것이니, 이 사람은 비록 가더라도 이를 곳이 없다고 하느니라.”
“함이 있는 스님도 쌓아 두는 일이 없거늘, 하물며 함이 없는 스님이리이까? 함이 없는 스님은 여래이오니 여래가 무슨 쌓아 둠이 있사오며, 쌓아 두는 것은 감춘다는 것이니, 여래의 말씀하심은 감추거나 아낌이 없거늘, 어찌하여 장이라 하리이까?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열반이니, 열반 가운데는 해·달·별, 차고 더움, 바람과 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따위의 25유가 없으며, 모든 근심과 번뇌를 여의었으며, 이러한 열반이야말로 여래의 머무는 곳이며, 항상 변역하지 않는 것이오니, 이런 인연으로 여래께서 이 사라나무 밑에 이르러 대열반에 드시나이다.”
“가섭이여, 대(大)라는 것은 성품이 넓고 많음을 말함이니, 사람이 한량없이 오래 사는 것을 대장부라 하고, 이런 사람이 바른 법에 머물면 사람 중에 훌륭한 이라 하는 것 같으니라. 내가 말한 큰 사람이 깨달을 여덟 가지[八大人覺]는 한 사람이 가질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가질 수도 있나니, 만일 한 사람이 여덟 가지를 모두 갖춘다면 가장 훌륭한 것이니라. 열반이라 함은 헌 데[瘡疣]가 없다는 뜻이니라.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고 고통을 받을 적에 좋은 의사를 만나 독화살을 빼고 약을 발라서 고통을 여의고 낙을 받게 한다. 그 의사가 다시 다른 도시나 시골로 다니면서 병환이 있고 부스럼을 앓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병을 치료하나니, 여래도 그와 같아서 등정각을 이루고 훌륭한 의사가 되어 염부제에서 괴로움 받는 중생들이 한량없는 세월에 음욕, 성내는 일, 어리석은 번뇌의 화살을 맞고 크게 고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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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고, 이런 이를 위하여 대승 경전의 감로 법약을 말하여 병을 치료하여 마치고는, 다시 다른 곳으로 다니면서 번뇌의 화살이 있는 곳에서 부처가 되어 병을 치료하나니, 그러므로 대반열반이라 하느니라. 대반열반은 해탈하는 곳이니, 조복받을 중생이 있는 곳을 따라서 여래가 그곳에 나타나는 것이며, 이런 진실하고 깊은 뜻으로써 대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이 세상 의사들이 모든 중생의 헌 데를 치료할 수 있습니까?”
“선남자여, 이 세상의 헌 데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치료할 수 있고 하나는 치료할 수 없나니,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의사가 치료할 것이요, 치료할 수 없는 것은 의사가 고치지 못하느니라.”
“부처님의 말씀이 여래가 염부제에서 중생의 병을 치료하였다 하시니, 만일 치료하였다면 모든 중생들 가운데 어찌하여 열반을 얻지 못한 이가 있습니까? 만일 다 열반을 얻지 못하였으면 여래께서 어찌하여 치료하여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간다 하십니까?”
“선남자여, 염부제의 중생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신심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신심이 없느니라. 신심이 있는 이는 치료할 수 있다 하나니, 왜냐 하면 결정코 열반을 얻어 헌 데가 없는 까닭으로 염부제의 중생들을 치료하여 마쳤다는 것이요, 신심이 없는 중생은 일천제라 하나니, 일천제는 치료할 수 없느니라. 일천제를 제하고는 모두 치료하였으므로 열반에는 헌 데가 없다고 이름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열반이라 합니까?”
“선남자여, 열반은 해탈이라 하느니라.”
“해탈이라고 말하는 것은 색(色)입니까, 색이 아닙니까?”
“선남자여, 혹은 색이기도 하고 혹은 색이 아니기도 하니, 색이 아니라 말함은 성문과 연각의 해탈이요, 색이라 말함은 부처님의 해탈이니라. 선남자여, 그러므로 해탈은 색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여래는 성문 제자들을 위하여 색이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이 만일 색이 아니라면 어떻게 머뭅니까?”
“선남자여,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이 색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하므로, 나는 색이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어떤 이가 묻기를 ‘비상비비상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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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아니라면 어떻게 머물며 가고 오고 행동하느냐? 하면, 이런 이치는 부처님들의 경계요,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알 바가 아니니, 해탈도 그러하여 색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기도 하므로 색이 아니라 말하고, 생각이기도 하고 생각이 아니기도 하므로 생각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니, 이런 이치는 부처님들의 경계요, 성문이나 연각으로는 알 바가 아니니라.”
이 때에 가섭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저희를 어여삐 여기시어 대반열반의 행과 해탈의 뜻을 거듭 널리 말씀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가섭보살을 찬탄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참 해탈은 모든 속박을 여의었다고 이름하나니, 참으로 해탈하여 모든 속박을 여의었으면 남[生]도 없고 화합함도 없느니라. 비유컨대 부모가 화합하여 아들을 낳거니와, 참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므로 남이 없다 하느니라. 가섭이여, 마치 제호의 성품이 청정함같이 여래도 그러하여 부모의 화합으로 난 것이 아니며, 성품이 청정하건만 일부러 부모가 있는 것을 보였음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함이니라. 참 해탈은 곧 여래니, 여래와 해탈은 둘이 아니요 다름도 없나니, 비유컨대 봄철에 심은 씨가 따뜻하고 축축한 기운을 얻으면 나게 되거니와, 참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니라. 또 해탈은 허무(虛無)라 하나니, 허무는 곧 해탈이요 해탈은 곧 여래요 여래가 곧 허무이어서 지어서 만드는 것이 아니며, 짓는 것은 성곽이나 누각이어니와, 참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므로 해탈이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함이 없는 법이니, 비유컨대 옹기장이는 만들었다 도로 부수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니라. 참 해탈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니, 그러므로 해탈이 곧 여래며, 여래도 그러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깨어지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아니하여 함이 있는 법이 아니니, 이런 뜻으로 여래라 하느니라.
대열반에 들어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 늙은 것은 변천한다고 하나니, 머리카락이 세고 낯이 쭈그러짐이요, 죽는 것은 몸이 식고 목숨이 끊어짐이니, 해탈한 가운데는 이런 일이 없으며, 이런 일이 없으므로 해탈이라 하느니라. 여래도 머리카락이 세고 낯이 쭈그러지는 함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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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법이 아니므로 여래는 늙지 아니하며, 늙지 아니하므로 죽지도 않느니라. 또 해탈은 병이 없다고 이름하나니, 병이라 함은 404병과 밖으로부터 와서 내 몸을 침해하는 것인데, 이런 일이 없으므로 해탈이라 하느니라. 병이 없는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며, 여래는 병이 없으므로 법신도 병이 없나니, 이렇게 병이 없는 것이 곧 여래니라. 죽는 것은 몸이 식고 목숨이 끊어짐이니, 여기에는 죽음이 없으므로 곧 감로며, 감로는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니, 여래는 이런 공덕을 성취하였거늘, 어찌하여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하겠느냐. 무상하다는 말은 옳지 못한 것이니, 금강 같은 몸이 어찌하여 무상하랴. 그러므로 여래는 목숨이 마친다고 이름하지 않느니라. 여래는 청정하여 때가 없으며 여래의 몸은 태(胎)에 더럽혀진 바가 아니어서 백련화의 성품이 청정한 것 같나니, 여래의 해탈도 그와 같아서 해탈이 곧 여래며, 그러므로 여래는 청정하여 때가 없느니라. 또 해탈은 번뇌의 헌 데가 영원히 남아 있지 않나니, 여래도 그와 같아서 온갖 번뇌의 헌 데가 없느니라. 또 해탈은 다툼이 없나니, 굶주린 사람은 남의 음식을 보고는 빼앗을 생각을 내지만,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니라.
또 해탈은 안정(安靜)이라 이름하나니, 범부들은 안정이라 하면 마혜수라를 말하지만, 그런 말은 허망한 것이며, 참말 안정은 끝까지 해탈함이니, 끝까지 해탈한 것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안온(安穩)이라 하나니, 마치 도둑이 많은 데는 안온치 않다 하고 청평[淸夷]한 데를 안온하다 하는 것같이, 해탈 가운데는 공포가 없으므로 안온이라 하며, 그래서 안온한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며, 여래는 곧 법이니라. 또 해탈은 동무가 없음이니, 동무가 있다는 것은 마치 나라 임금이 이웃 나라가 있음 같거니와, 참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며, 동무가 없음이 마치 전륜왕이 대등할 이가 없음 같나니, 해탈도 그와 같아서 동무가 없으며, 동무가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한 이는 곧 여래인 전법륜왕(轉法輪王)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동무가 없으며 동무가 있다는 것은 옳지 아니하니라. 또 해탈은 근심이 없다고 하나니, 근심이 있는 것은 어떤 임금이 강한 이웃 나라가 무서워서 근심함과 같지만, 해탈은 그런 일이 없으며, 마치 원수를 없애 버리면 두려움이 없는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두려움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는 이는 곧 여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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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해탈은 근심과 기쁨이 없나니, 어떤 여인이 외아들을 부역으로 멀리 보냈을 적에 중도에서 죽었단 말을 듣고 크게 걱정하다가 다시 살았단 말을 들으면 한없이 기뻐하거니와, 해탈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으며, 근심과 기쁨이 없음이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티끌이 없나니, 마치 봄철 해가 진 뒤에 흔히 바람이 티끌을 일으키거니와, 해탈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나니, 티끌이 없는 것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마치 임금의 상투에 꽂는 진주 동곳에는 때가 없는 것과 같이 해탈의 본성에도 그와 같이 때가 없다. 때가 없다는 것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순금에는 돌이 섞이지 않았으므로 참 보배라 하며, 순금을 얻은 사람은 훌륭한 재물이라 생각하나니, 해탈의 성품도 그와 같아서 참 보배라 하며, 참 보배는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비유컨대 옹기병이 깨어지면 뎅그렁 소리가 나거니와, 금강병은 그렇지 아니하며, 해탈은 뎅그렁 깨어지지 않나니, 금강병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 그러므로 여래의 몸은 깨뜨릴 수 없느니라. 뎅그렁 소리가 나는 것은 피마자를 뜨거운 데 넣으면 튀어나면서 소리를 내는 것 같거니와 해탈은 이런 일이 없나니, 마치 금강의 진실한 병은 뎅그렁 하는 이런 일이 없나니, 마치 금강의 진실한 병은 뎅그렁 하고 깨지는 소리가 없는 것 같으며, 설사 백천 명 사람들이 한꺼번에 쏘더라도 깨뜨리지 못하나니, 뎅그렁 소리가 없음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가난한 사람이 남의 빚을 지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얽어매이거나 매를 맞거나 하여 무수한 괴로움을 받거니와, 해탈한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고, 빚을 지지 아니하나니, 마치 장자는 억만의 보배가 있고 세력이 자재하여 남의 빚을 지지 않는 것처럼, 해탈도 그와 같아서 한량없는 법의 보배가 있고 세력이 자재하여 빚진 것이 없나니, 빚진 것이 없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어떤 것을 핍박이다, 핍박이 아니다라하는가. 비유컨대 범부가 교만한 마음으로 내가 제일인 체하면서 생각하기를 온갖 물건 중에는 나를 해할 이가 없다 하면서 독사나 호랑이나 독한 벌레를 손으로 잡는다면, 이 사람은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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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기 전에 횡사할 줄을 알 것이니, 참 해탈에는 이런 일이 없느니라. 핍박이 아니라 함은 마치 전륜왕이 가진 신주(神珠)가 말똥구리 따위의 아흔여섯 종류의 독한 벌레들을 항복받음과 같으니, 이 진주의 향기를 맡으면 모든 독기가 소멸되느니라. 참 해탈도 그와 같아서 25유를 모두 멀리 여의나니, 독기가 소멸됨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핍박치 않음은 허공과 같나니 해탈도 그러하며, 허공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핍박이라 함은 마른 풀 곁에서 불을 켜는 것 같아서 가까이하면 곧 타려니와, 참 해탈에는 그런 일이 없느니라. 또 핍박하지 아니함은 마치 해와 달이 중생을 핍박하지 않는 것같이, 해탈도 그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핍박함이 없나니, 핍박이 없음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동하지 않는 법이라 하나니, 마치 원수와 친한 이와 같은 것, 참 해탈 가운데는 그런 일이 없느니라. 또 동하지 않음은 마치 전륜왕이 다른 왕으로 친구를 삼는 일이 없음 같으니, 만일 다시 친한 이가 있다면 옳지 아니한 것처럼 해탈도 그와 같아서 다시 친한 이가 없으며, 만일 친한 이가 있다면 옳지 아니하니라. 전륜왕이 친한 이가 없음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며, 여래는 곧 법이니라. 또 동함이 없다 함은 비유컨대 흰 옷이 물들기는 쉽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며, 또 동함이 없음은 마치 바사꽃[婆師花]을 냄새가 있게 하거나 푸른 빛이 있게 할 수 없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냄새가 있게 하거나 모든 빛이 있게 할 수가 없나니, 그러므로 해탈이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희유한 것이라 하나니, 비유컨대 물 속에서 연꽃이 남은 희유가 아니거니와, 불 속에서 연꽃이 남은 희유한 일이어서 사람들이 보고는 기뻐함같이 참 해탈도 그와 같아서 보는 이는 기쁜 마음을 내나니, 희유한 것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고, 참 해탈은 곧 여래며, 여래는 곧 법신이니라. 또 희유한 것은 비유컨대 아기가 이가 나지 않았다가 점점 자라서야 이가 나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나고 나지 않음이 없느니라.
또 해탈은 비고 고요함이라 이름하며 결정되지 않음이 없나니, 결정되지 않은 것은 마치 일천제는 끝까지 변하지 못한다거나 중대한 계를 범한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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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를 이루지 못한다 함과 같아서 옳지 아니하니라. 왜냐 하면 이 사람이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깨끗한 신심을 내면 곧 일천제를 소멸할 것이요, 또 우바새가 되더라도 일천제를 없앨 것이며, 중대한 계를 범한 이도 그 죄를 멸하면 불도를 이룰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끝까지 변하지 못한다거나 불도를 이루지 못한다 함이 옳지 아니하며, 참 해탈 가운데는 이렇게 없어지는 일이 없느니라. 또 비고 고요함은 법계에 떨어지나니, 법계의 성품과 같은 것이 곧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일천제가 만일 없어지면 일천제라 할 수 없느니라. 무엇을 일천제라 하는가? 일천제는 온갖 선근이 아주 끊어져서 마음에 모든 선한 법을 반영하지 아니하며, 한 생각도 선한 마음을 내지 아니하거니와, 참 해탈에는 그런 일이 없으므로 곧 참 해탈이니,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헤아릴 수 없음을 이름이니, 비유컨대 곡식 더미는 그 수량을 알 수 있거니와, 참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며, 마치 바닷물은 헤아릴 수 없는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헤아릴 수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한량없는 법이라 하나니 마치 한 중생에게 업보가 많은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한량없는 과보가 있으며, 한량없는 과보는 곧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넓고 큼을 이름이니, 마치 큰 바다는 견줄 데가 없듯이 해탈도 그와 같아서 견줄 데가 없으며, 같을 것이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가장 높다 하나니 마치 허공이 가장 높아서 견줄 수 없으며, 높아서 견줄 수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지나갈 수 없음을 이름이니, 마치 사자가 있는 데는 모든 짐승이 지나갈 수 없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지나갈 수 없으며, 지나갈 수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위가 없음을 이름이니, 마치 북쪽이 여러 방위에서 가장 위가 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위가 없으며, 위가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위가 없는 위[無上上]를 이름이니, 마치 북쪽이 동쪽에 대하여 위가 없는 위가 되듯이, 해탈도 그와 같아서 위가 없는 위가 되며, 위가 없는 위는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항상한 법이라 이름하나니, 비유컨대 인간이나 천상에서 몸이 부숴지고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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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치어도 항상하다 이름하나 항상치 못함이 아닌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항상치 못한 것이 아니니, 항상치 못한 것이 아님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견실(堅實)이라 이름하나니, 가타라전단나무나 침향의 성질이 견실한 것같이 해탈도 그와 같아서 성품이 견실하며, 성품이 견실함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비지 않음을 이름이니, 비유컨대 대와 갈대는 속이 비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니,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더럽힐 수 없음을 이름이니, 비유컨대 담벼락이 회벽을 하기 전에는 파리·모기 따위가 붙어 유희하여 더럽혀지지만, 회를 바르고 단청을 한 뒤에는 벌레가 단청 냄새를 맡고는 붙어 있지 않나니 이렇게 붙어 있지 않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가[邊]가 없음을 이름이니, 비유컨대 촌락은 가가 있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며, 마치 허공은 가가 없음같이 해탈도 그와 같이 가가 없나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볼 수 없음을 이름이니, 마치 공중에 새 발자국을 보기 어려움 같아서, 그렇듯 보기 어려움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매우 깊음을 이름이니, 왜냐 하면 성문과 연각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연고니라. 들어갈 수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매우 깊은 것은 부처님과 보살들의 공경하는 바라, 마치 효자가 부모에게 공양하면 공덕이 매우 깊은 것 같으니, 공덕이 깊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보지 못함을 이름이니, 마치 사람이 자기의 정수리를 보지 못함 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성문이나 연각이 보지 못하는 것이며, 보지 못하는 것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집이 없는 것이라 하나니, 마치 허공에는 집이 없는 것 같아서 해탈도 그러하며, 집이라 함은 25유(有)에 비유한 것이고, 집이 없다 함은 참 해탈에 비유한 것이니,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가질 수 없나니, 아마륵 열매는 사람이 가질 수 있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가질 수 없으며, 가질 수 없음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잡을 수 없나니, 마치 환으로 된 물건은 잡을 수 없거든, 해탈도 그러하여 잡을 수 없으며, 잡을 수 없음은 참 해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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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몸이라 할 것이 없나니, 마치 사람은 몸에 옴이 오르고 대풍창과 등창이 나고 미치고 조갈병 들고 마르는 병이 있거니와, 참 해탈 중에는 그런 병이 없나니, 그런 병이 없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한 맛이라 하나니, 마치 젖이 한 맛인 것처럼 해탈도 그와 같아서 다만 한 맛이니, 한 맛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청정하다 하나니, 마치 물에 진흙이 없으면 고요하고 청정한 것처럼 해탈도 그러하여 고요하고 청정하며, 고요하고 청정함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한결같은 맛이니, 마치 공중에서 내리는 비가 한결같이 깨끗한 것처럼 한결같이 깨끗함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없애 버림이니, 마치 보름달은 구름이 가리지 않는 것처럼, 해탈도 그러하여 가린 구름이 없으며, 가린 구름이 없음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고요함이니, 마치 사람에게 앓던 열병이 나으면 몸이 고요하여지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몸이 고요하여지며, 몸이 고요함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평등이니, 마치 벌판에 있는 독사나 쥐나 이리는 모두 죽이려는 마음이 있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며, 죽이려는 마음이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평등하다는 것은 마치 부모가 아들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가지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마음이 평등하며, 마음이 평등함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다른 곳이 없나니, 어떤 사람이 훌륭하고 깨끗한 집에만 살고 다시 다른 데가 없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다른 곳이 없으며, 다른 곳이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만족한 줄 앎이니, 굶주린 사람이 맛난 음식을 만나면 싫은 줄 모르고 먹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우유죽을 먹은 이에게는 다른 음식이 필요하지 않나니, 다른 것이 필요치 않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끊음이니, 결박을 당한 사람이 결박한 것을 끊고 벗어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의심의 결박을 끊음이라, 의심을 끊음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저 언덕에 이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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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강에는 이 언덕과 저 언덕이 있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이 언덕은 없으나 저 언덕은 있나니, 저 언덕이 있는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잠잠한 것이니 큰 바다는 물이 출렁거리며 요란한 소리가 나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니, 이런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아름답고 묘하니, 모든 약에 하리륵(呵梨勒)을 섞은 것은 맛이 쓰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고 맛이 감로 같나니, 맛이 감로 같음을 참 해탈에 비유하였고,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번뇌를 제함이니 마치 좋은 의사는 신기한 약으로 모든 병을 잘 치료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를 제하는 것이며, 번뇌를 제한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비좁지 않음이니, 작은 집에는 많은 사람을 용납할 수 없으나,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얼마든지 용납하는 것이며, 얼마든지 용납함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애욕을 멸하여 음욕이 없나니, 여인들은 애욕이 많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며, 여래는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과 교만 따위의 번뇌가 없느니라. 또 해탈은 사랑이 없음이라 하거니와, 사랑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아귀 같은 사랑이요, 하나는 법에 대한 사랑이다. 참 해탈은 아귀 같은 사랑을 여의고 중생을 불쌍히 여기므로 법에 대한 사랑이 있나니, 법에 대한 사랑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나와 내 것을 여의었으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요, 여래는 곧 법이니라. 또 해탈은 구호함이니, 모든 두려워하는 이를 구호하는 것이므로, 해탈은 곧 여래요, 여래는 곧 법이니라.
또 해탈은 귀의할 곳이니, 만일 귀의할 데가 있으면 이런 해탈은 다른 귀의할 데를 구하지 않느니라. 마치 사람이 임금에게 의지하면 다른 의지할 데를 구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나니, 임금에게 의지한 것은 흔들림이 있거니와 해탈에 의지하면 흔들림이 없으며, 흔들림이 없는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요, 여래는 즉시 법이니라. 또 해탈은 집이니, 어떤 사람이 거친 벌판에 다니려면 험난한 일이 있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험난이 없으며 험난이 없는 것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두려움이 없나니, 사자가 모든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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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마군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두려움이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협착한 일이 없나니, 마치 협착한 길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갈 수 없는 것과 같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착박[迮]하지 않다는 것은 비유컨대 사람이 범이 무서워서 우물에 떨어질 수 있는 것과 같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착박하지 않다는 것은 마치 큰 바다에서 낡은 배를 버리고 견고한 배를 얻어 타면 바다를 건너 편안한 곳에 이르러 마음이 쾌락함 같나니, 해탈도 그와 같아서 마음이 쾌락하니, 쾌락함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모든 인연을 뽑아 버림이니, 비유컨대 젖을 인하여 타락을 얻고, 타락을 인하여 소(酥)를 얻고 소를 인하여 제호를 얻거니와, 참 해탈에는 이런 인연이 없나니, 인연이 없음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교만을 항복받음이니, 큰 임금은 작은 임금을 업신여기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요, 여래는 곧 법이니라. 또 해탈은 방일을 굴복함이니, 방일하면 탐욕이 많거니와, 참 해탈에는 그런 말이 없으며, 그런 말이 없음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무명을 없앰이니, 가장 좋은 생소에서 찌꺼기를 없앤 것을 제호라 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무명의 찌꺼기를 없애면 참 밝음[眞明]이 나타나나니, 참 밝은 것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고요하여 하나뿐이요 둘이 없나니, 마치 빈 들판에 코끼리가 하나뿐이고 짝이 없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하나뿐이고 짝이 없으며, 하나뿐이고 짝이 없음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견실하다 이름하나니, 마치 대나 갈대나 피마자가 줄기는 속이 비었지만 씨는 견실함 같으니라. 부처님을 제하고는 모든 인간·천상 사람들이 다 견실하지 못하며, 참 해탈은 온갖 번뇌와 생사를 여의었나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잘 깨달아 나를 이익케 함이니, 참 해탈도 그와 같으며, 이런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모든 것을 버림이니, 마치 사람이 먹고는 토하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것을 버렸으며,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이름이 결정이니, 마치 바사꽃의 향기가 칠엽수(七葉樹)에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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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같이 해탈도 그러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이름을 수대(水大)라 하나니, 수대는 다른 대(大)보다 훨씬 뛰어나서 온갖 초목의 씨를 축이는 것이며, 해탈도 그러하여 모든 생류들을 축이나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들어감이라 하나니, 문이 있으면 들어갈 수가 있고 금의 성질이 있는 데서는 금을 얻을 수 있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그 문으로는 나가 없음[無我]을 닦은 이가 들어갈 수 있나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선한 것이니, 마치 제자가 스승을 따라다니며 가르치는 말을 잘 받들면 선이라 하듯이 해탈도 그와 같으니,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세상에 뛰어난 법이라 이름하나니, 모든 법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며, 여러 가지 맛 가운데 소(酥)의 맛이 가장 훌륭하듯이, 해탈도 그러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흔들리지 않음을 이름이니, 마치 문턱을 바람이 흔들지 못하듯이 참 해탈도 그러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파도가 없음이라 하나니, 저 바다에는 파도가 요란하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마치 궁전과 같으니, 해탈도 그러하며 이러한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쓸 데가 많은 것이니, 염부단금은 쓰이는 데가 많으며 그 금의 나쁜 허물을 말할 이 없음같이 해탈도 그러하여 허물이 없으며, 허물 없는 것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어린애의 버릇을 버림이니, 마치 어른이 어린애의 버릇을 버리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5음(陰)을 제하여 버렸으며, 5음을 버린 것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이름이 필경[究竟]이니, 마치 결박되었던 사람이 결박에서 풀려나면 목욕하여 깨끗이 하고 집에 돌아가듯이 해탈도 그러하여 필경까지 깨끗한 것이니, 끝까지 깨끗함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함이 없는 즐거움이니, 함이 없는 즐거움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토한 연고니라. 마치 사람이 잘못하여 독약을 먹고는 독을 제하기 위하여 토할 약을 먹으며, 토하고 나면 독이 없어지고 몸이 편안해짐 같으니, 해탈도 그러하여 번뇌에 속박된 독을 토하고 몸이 안락하여짐을 함이 없는 즐거움이라 하며, 함이 없는 즐거움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네 가지 독사인 번뇌를 끊음이니, 번뇌를 끊음이 참 해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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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모든 생사를 여의고 모든 괴로움을 없애고 온갖 즐거움을 얻으며, 탐욕·성냄·어리석음을 영원히 끊고 모든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니, 번뇌의 뿌리를 뽑은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모든 함이 있는 법을 끊고, 온갖 무루(無漏)의 선근을 내며 여러 갈래를 막음이라 하나니, 이른바 나다, 내가 없다, 내가 아니고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는 데서, 다만 집착만 끊고 나란 소견을 끊지 않는 것이다. 나란 소견은 불성이요 불성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공하지 않은 공[不空空]이니, 공한 공[空空]은 있는 것이 없음이요, 있는 것이 없음은 니건자 외도들이 억측하는 해탈이니, 니건자는 해탈이 없으므로 공한 공이라 하고, 참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므로 공하지 않은 공이라 하나니, 공하지 않은 공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공하고 공하지 않은[空不空] 것이니, 마치 물병·술병·우유병·타락병·꿀병 따위에 물이나 술이나 우유나 타락이나 꿀이 없더라도, 물병 내지 꿀병이라 하나니, 이 병들은 공하였다고도 할 수 없고 공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느니라. 만일 공하다면 빛과 냄새와 맛과 촉(觸)이 없어야 할 것이고, 공하지 않다면 물이나 내지 꿀이 있어야 할 것이니, 해탈도 그와 같아서 빛이라 빛 아니라 말할 수 없으며, 공하다 공하지 않다 말할 수 없느니라. 만일 공하다고 말한다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常樂我淨]이 없을 것이요, 공하지 않다면 누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받겠느냐. 이런 이치로 말미암아 공하다거나 공하지 않다거나 말할 수 없느니라. 공하다 함은 25유와 모든 번뇌와 온갖 괴로움과 온갖 모양새와 온갖 함이 있는 행법(行法)이 없다는 것이니, 마치 병에 타락이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함과 같고, 공하지 않다 함은 진실한 참 빛이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여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니, 마치 병의 빛깔과 냄새와 맛과 촉함이 있으므로 공하지 않다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해탈을 병에 비유하건대 병은 인연을 만나면 깨어질 수 있지만,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깨뜨릴 수 없나니, 깨뜨릴 수 없음이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또 해탈은 사랑을 떠난 것이라 하나니,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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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왕이나 대범천왕이나 자재천왕을 희망하거니와, 해탈은 그렇지 아니하여 만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사랑도 없고 의심도 없나니, 사랑도 없고 의심도 없음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니, 만일 해탈에 사랑과 의심이 있다면 옳지 아니하니라. 또 해탈은 모든 탐욕을 끊고 온갖 모양새, 온갖 속박, 온갖 번뇌, 온갖 생사, 온갖 인연, 온갖 과보를 끊음이니, 이런 해탈은 곧 여래요, 여래는 곧 열반이니라. 모든 중생은 번뇌와 생사를 무서워하여서 3귀의를 받나니, 마치 사슴들이 사냥꾼을 무서워하다가 벗어나고 한 번 뛰는 것을 1귀의에 비유하고, 나아가 세 번 뛰는 것을 3귀의에 비유하면, 세 번 뛰었으므로 편안함을 얻게 되느니라. 중생도 그와 같아서 네 가지 마군의 사냥꾼을 무서워하므로 3보에 귀의하고 3보에 귀의하므로 편안함을 얻나니, 편안함을 받는 것은 참 해탈이요, 참 해탈은 곧 여래요, 여래는 곧 열반이며, 열반은 다함이 없고, 다함이 없음은 불성이요, 불성은 결정함이요, 결정함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열반과 불성과 결정과 여래가 한 뜻이라면, 어찌하여 3귀의가 있다 이르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모든 중생들이 생사가 두려워서 3귀의를 구하고, 3귀의를 하였으므로 불성이 결정이요 열반임을 아느니라. 선남자여, 어떤 법은 이름은 같으나 뜻이 다르고, 어떤 법은 이름과 뜻이 모두 다르니라. 이름은 같으나 뜻이 다른 것은, 부처도 항상하고 법도 항상하고 비구 스님도 항상하고 열반과 허공이 모두 항상하므로 이름은 같으나 뜻이 다르다는 것이요, 이름과 뜻이 모두 다르다는 것은,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이요 법은 깨닫지 않음이요 스님은 화합이요 열반은 해탈이요 허공은 선한 것이 아니며 또 걸림이 없음이라고 이름하나니, 이것은 이름과 뜻이 모두 다른 것이니라. 선남자여, 3귀의도 그와 같아서 이름과 뜻이 모두 다른 것이어늘 어찌 하나라 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마하파사파제(摩訶波闍波提) 교담미(憍曇彌)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공양하지 말고 승가에 공양하라. 승가에 공양하면 3귀의에 구족히 공양함이 되리라’ 하니, 마하파사파제가 대답하되 ‘승가 가운데는 부처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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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법도 없거늘 어찌하여 승가에 공양하면 3귀의에 구족히 공양함이 된다고 합니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내 말을 따름은 부처에게 공양함이요, 해탈을 위하므로 법에 공양함이요, 승가가 받으므로 승가에 공양함이 된다’고 하였다. 선남자여, 그러므로 3귀의는 하나가 되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여, 여래가 어떤 때에는 하나를 말하여 셋이라 하고, 또 셋을 말하여 하나라 하나니, 이런 이치는 부처의 경계요 성문이나 연각들의 알 것이 아니니라.”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필경까지 안락한 것이 열반이라 하심은 무슨 뜻입니까? 열반은 몸을 버리고 지혜를 버림이니, 몸과 지혜를 버렸으면 누가 안락을 받겠습니까?”
“선남자여, 어떤 사람이 밥을 먹고 가슴이 답답하여 토하려고 밖에 나갔다가 이미 토하고 다시 들어왔는데, 동무가 묻기를 ‘그대의 답답한 병이 모두 나아서 돌아왔는가?’ 하기에 그가 대답하기를 ‘아주 나아서 편안해졌다’ 하였으니, 여래도 그와 같아서 25유를 끝까지 여의고 열반의 안락한 곳을 영원히 얻으면, 변동할 수도 없고 끝나는 일도 없어서 온갖 받음[受]을 끊었으므로 받는 일 없는 즐거움[無受樂]이라 하나니, 이렇게 받는 일 없음이 항상한 즐거움이어늘, 만일 여래가 즐거움을 받는다 하면 옳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필경까지 즐거움이 열반이요, 열반은 참 해탈이며 참 해탈은 곧 여래니라.”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해탈이라 합니까?”
“그러니라. 선남자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이 해탈이니, 이러한 해탈이 곧 여래니라.”
“만일 나지도 멸하지도 않음이 해탈이라면, 허공의 성품이 나지도 멸하지도 아니하오니, 마땅히 여래일 것이오며, 여래의 성품과 같아서 곧 해탈이겠습니다.”
“선남자여,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니라.”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그렇지 않습니까?”
“선남자여, 가란가새[迦蘭伽鳥]나 명명새[命命鳥]의 소리가 맑고 아름다움이 까마귀·까치의 소리와 같겠느냐?”
“그렇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까마귀·까치 소리를 공명조의 소리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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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면 백천만 곱으로도 비길 수 없나이다.”
가섭보살이 또 말을 계속하였다.
“가란가의 소리는 아름답고 몸매도 같지 아니하옵거늘, 여래께서 어찌하여 까마귀·까치에 비교하나이까? 겨자씨로 수미산에 비교함과 같으며, 부처님을 허공에 비유함도 그와 같겠으니, 가란가의 소리를 부처님 음성에는 비유하려니와 까마귀·까치의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가섭보살을 칭찬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깊고 깊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치를 그대가 잘 이해하는구나. 여래가 어떤 때에는 까닭이 있어서 허공으로 해탈에 비유하거니와, 이와 같은 해탈은 곧 여래니라. 참 해탈은 천상·인간에 비유할 것이 없으며, 허공도 비유가 되지 못하건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비유가 안 되는 것으로 비유하나니, 해탈은 곧 여래며, 여래의 성품이 곧 해탈이어서 해탈과 여래가 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않은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비유가 안 된다 함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 비유가 되지 않건만 인연이 있으므로 비유하는 것이니, 경전에 말하기를, 얼굴이 단정한 것을 보름달 같다 하고, 흰 코끼리가 깨끗함을 설산과 같다 하는 따위니, 보름달이 얼굴과 같을 수 없고, 설산이 코끼리 같을 수 없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무슨 비유로도 참 해탈을 비유할 수 없건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비유하는 것이니, 모든 비유로써 법의 성품을 알게 함도 그와 같으니라.”
“여래께서 어찌하여 두 가지 말씀을 하십니까?”
“선남자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성난 마음으로 여래를 해하려 할 적에 여래는 화평한 얼굴로 한탄하는 기색이 없으리니, 그 사람이 여래의 몸을 상하여 역적죄를 이루겠느냐?”
“그렇지 못하리이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여래의 몸은 상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 이유를 말하면, 빛깔로 된 몸은 없고 법성신(法性身)만 있으니, 법성신의 성품은 깨뜨릴 수 없거늘, 그 사람이 어찌 부처님 몸을 상하오리까만 다만 악독한 마음인 까닭으로 무간죄를 이룰 뿐이오니, 이런 인연으로 모든 비유를 끌어서 참된 법을 알게 하나이다.”
이 때에 부처님께서 또 가섭보살을 칭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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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내가 하려는 말을 그대가 하는구나. 또 선남자여, 비유컨대 어떤 흉악한 사람이 자기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밭에 쌓은 낟가리 곁에 있을 적에 어머니가 밥을 가지고 오거늘 그 사람이 보고 죽이려는 마음을 내어 칼을 갈거든, 어머니가 알아차리고 낟가리 속에 숨었는데, 그 사람이 칼을 들고 낟가리를 들면서 여러 번 찌르고 죽인 줄 알고 기뻐하는 동안에 어머니가 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하면, 이 사람이 무간지옥 죄를 이루게 되겠느냐?”
“세존이시여, 일정하게 말할 수 없나이다. 왜냐 하면 죄가 있다고 말하려면 어머니의 몸이 상하였어야 할 터인데 상하지 않았으니 죄가 있다 할 수 없고, 죄가 없다 하려 해도 죽인 줄 생각하고 쾌한 마음을 가졌으니 어떻게 죄가 없다 하오리까? 이 사람이 비록 역적죄를 구족하지는 않았더라도 역적죄를 면치는 못할 것이오니, 이런 인연으로 비유를 들어 참된 법을 알게 합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러한 인연으로 가지가지 방편과 비유를 말하여 해탈에 비유하거니와, 아무리 한량없는 아승기 비유를 들더라도 실로는 비유로 비교할 수 없느니라. 어떤 인연으로는 비유로 말할 수도 있고, 어떤 인연으로는 비유하지 못하기도 하나니, 그러므로 해탈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여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며, 열반과 여래도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이 있느니라. 이렇게 한량없는 공덕을 원만히 성취하였으므로 대열반이라 이름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에야 여래의 이르시는 곳이 그지없음을 알겠사오며, 이르는 곳이 그지없사올새, 수명도 끝이 없음을 알겠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여, 그대가 이제 바른 법을 잘 보호하는구나. 만일 선남자·선여인이 모든 번뇌의 결박을 끊으려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이 바른 법을 보호하여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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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경 제 6 권

송대 사문 혜엄 등이 니원경에 의거하여 덧붙임

8. 네 군데 의지함[四依品]

부처님께서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미묘한 대반열반 가운데 네 종류 사람이 바른 법을 수호하고 바른 법을 세우며 바른 법을 생각하며, 세상 사람들을 이익케 하고 불쌍히 여기어, 세간의 의지가 되고 천상·세간 사람을 안락케 하리라. 무엇을 네 종류라 하는가. 어떤 사람은 세상을 벗어나고도 번뇌의 성품을 구족하였으니 이것이 첫째요, 수다원을 얻은 사람과 사다함을 얻은 사람은 둘째요, 아나함을 얻은 사람이 셋째요, 아라한을 얻은 사람이 넷째니라. 이 네 종류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서 세간 사람들을 이익케 하고 불쌍히 여기며 세간의 의지가 되어 천상·세간 사람들을 안락케 하리라.
어떤 이를 번뇌의 성품을 구족한 이라 하는가. 계율을 받들어 지니고 위의를 갖추어 바른 법을 세우며, 부처님께 들은 것을 글과 뜻을 이해하고 다른 이에게 말하여 탐욕이 없는 것은 도요, 탐욕이 많은 것은 도가 아니라 하며, 큰 사람이 깨달을 여덟 가지 법을 연설하며, 죄를 지은 이에게는 죄를 털어 놓고 참회케 하여, 보살의 방편으로 행하는 비밀한 법을 잘 아는 이라, 이는 범부요 제8인(人 : 忍)이 아니니, 제8인은 범부라 하지 않고 보살이라 하며, 부처라고는 하지 않느니라.
둘째는 수다원과 사다함이니, 바른 법을 얻으면 그대로 받아 지니며, 부처님께 법문을 듣고는 들은 대로 쓰고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며 다른 이에게 말하느니라. 만일 법을 듣고도 쓰지 않고 받아 가지지 않고 말하지 아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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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하인이나 부정한 물건을 쌓아 두라고 부처님이 허락하였다 하면 옳지 아니하니라. 이러한 이를 둘째 사람이라 하나니, 이 사람이 비록 둘째 자리나 셋째 자리를 얻지 못하였더라도 이름을 보살이라 하며 수기를 받았느니라.
셋째는 아나함이니, 아나함은 바른 법을 비방하거나 종이나 하인 따위의 부정한 것을 두도록 허락하였다고 말하거나, 의도들의 경과 논을 받아 가지거나, 객진(客塵) 번뇌에 장애가 되거나, 모든 업의 번뇌에 가리웠거나, 여래의 진실한 사리를 간직하였거나, 밖의 병의 해침을 당하거나, 4대 독사의 침노를 받거나, 나라는 것을 주장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면 옳은 것이며, 세상 법에 집착한다고 말하면 옳지 아니하고 대승이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옳은 것이며, 태어나는 몸에 8만의 벌레가 있다고 한다면 옳지 아니하고 음욕을 영원히 여의어서 꿈에서도 부정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옳은 것이며, 임종할 때에 두려움을 낸다고 한다면 옳지 아니하니라. 아나함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이 사람이 돌아오지 않음은 위에 말함과 같으며, 모든 허물이 영원히 물들이지 못하고 오고 가면서 주선하므로 보살이라 이름하고, 이미 수기를 받았으므로 오래지 않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니, 이것을 셋째 사람이라 하느니라.
넷째는 아라한이니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어 무거운 짐을 버렸고, 자기의 이익을 얻어 할 일을 이미 마쳤고, 제10지에 머물렀으며, 자재한 지혜를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지가지 빛과 몸매를 모두 나타내어 모든 장엄과 같이하여, 부처님 도를 이루려 하면 곧 이룰 수가 있으며, 이렇게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아라한이라 하느니라. 이러한 네 종류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서 세상 사람들을 이익케 하고 가엾이 여기며, 세간의 의지가 되어 천상·세간 사람들을 안락케 하여, 천상 인간에서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며 여래와 같으므로 사람 중에 수승하며 귀의할 곳이 되느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이 네 종류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겠나이다. 왜냐 하면 구사라경(瞿師羅經)에 부처님께서 구사라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늘 사람이나 마군이나 범천들이 바른 법을 파괴하려고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화하면, 32상과 80종호(種好)를 두루 갖추었고, 둥근 광명이 한 길이며, 얼굴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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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달처럼 원만하고 양미간의 백호상(白毫相)은 옥보다 눈보다도 희며, 이렇게 장엄하고 너에게 올 것이니, 너는 잘 살피어서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정하여야 하며 이미 깨닫고는 항복받으라’ 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마군들이 부처님의 형상으로도 변화하는데 하물며 아라한 등의 네 가지 몸으로 변화하지 못하리이까. 허공에서 눕고 앉으며 왼쪽 옆구리로는 물을 내고 오른쪽 옆구리로는 불을 내며, 몸에서 불꽃과 연기 내기를 불더미같이 하리니, 이런 인연으로 저는 그 속에서 신심을 낼 수 없으며, 혹 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받을 수 없으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의지할 수가 없나이다.”
“선남자야, 내가 하는 말에도 의심이 있으면 그대로 받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그런 것에 있어서랴. 그러기에 잘 분별하여 좋은 일인지 좋지 못한 일인지, 할 만한 일인지 그렇지 못한 일인지를 알고서 행하면 장구한 밤중에 즐거움을 받으리라. 선남자야, 도둑개가 밤에 집에 들어오는 것을 그 집 하인들이 알았으면, 곧 호령하여 쫓아 보내되, 빨리 나가지 아니하면 목을 자르리라 하면, 도둑개가 듣고는 곧 도망하여 가리라. 그대들도 오늘부터 파순을 항복하되, 말하기를 ‘너는 그런 형상을 꾸미지 말라. 만일 일부러 꾸민다면 다섯 가지 속박으로 너를 계박하리라’ 하면 파순이 듣고는 곧 달아나기를 도둑개같이 하고 다시 오지 아니하리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구사라 장자에게 말씀한 것처럼 그렇게 마군을 항복하오면 대반열반에 가깝게 될 터이온데, 여래께서 어찌하여 이 네 종류 사람이 의지할 데라 말씀하시나이까? 이 네 종류 사람이 말을 하더라도 꼭 믿을 수는 없나이다.”
“선남자야, 나의 말도 그러한 뜻이지, 그렇지 말라는 것은 아니니라. 선남자야, 나는 육안(肉眼)을 가진 성문들을 위하여 마군을 항복하라고 말한 것이요, 대승을 배우는 사람에게 말한 것이 아니니라. 성문들은 천안(天眼)이 있다 하여도 육안이라 말하고, 대승을 배우는 사람은 육안이 있더라도 불안(佛眼)이라 말하나니, 왜냐 하면 이 대승 경전은 불승(佛乘)이라 하나니 불승이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건장하고 용맹하면 겁약한 무리들이 와서 의지하거든, 용맹한 사람이 겁약한 사람을 가르치되, 그대들은 이렇게 활과 살을 잡으며 창으로 찌르고 갈고리로 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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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고 줄로 얽는 법을 배우라 하고, 또 말하기를 싸움하는 일은 칼날을 밟는 것 같지만 두려운 생각을 내서는 안 되나니, 천상 사람·세간 사람을 대하여는 연약한 줄 생각하고, 스스로 용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용맹하지 못하면서 거짓 건장한 모양을 가장하여 활과 살과 칼 따위의 병장기로 엄숙하게 차리고 전장에 나와서 큰소리로 외치더라도, 그대들은 그 사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그 사람이 그대들의 두려워함이 없는 기색을 보면 오래지 못하여 물러가기를 저 도둑개같이 하리라. 선남자야, 여래도 그와 같아서 성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마왕 파순을 두려워하지 말라. 만일 파순이 부처님으로 변화하고 너에게 오거든, 네가 견고한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어 마군으로 하여금 항복케 하면 그 마군은 근심하고 불안하여 오던 길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선남자야, 저 건장한 사람이 다른 이를 따라 익히지 않듯이, 대승을 배우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가지가지의 깊고 비밀한 경전을 듣고는 마음이 환희하며 공포를 느끼지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그렇게 대승을 배워 익히는 사람은 지나간 세상에서 한량없는 억천 마군이 와서 침노하더라도 그런 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아갈타(阿竭陀) 약을 얻으면 독사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나니, 이 약의 효력을 의지하는 까닭이며, 또 모든 독기를 소멸할 수 있는 까닭이니라. 대승 경전도 그와 같아서 아갈타 약이 모든 마군과 독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것들을 항복받아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니라.
또 선남자야, 비유컨대 어떤 용이 흉악한 성질을 가지고 사람을 해치려 할 때에 혹은 눈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기운을 불기도 하므로, 모든 사자·호랑이·표범·늑대·이리·개 따위가 모두 공포를 내며, 이런 짐승들이 소리를 듣거나 형상을 보거나 그 몸을 건드리기만 하여도 생명을 잃게 되느니라. 주문을 잘하는 사람이 주문의 힘으로써 이러한 악독한 용·금시조(金翅鳥)·코끼리·사자·호랑이·늑대 따위를 잘 길들여서 타기도 하고 몰고 다니면, 저 나쁜 짐승들이 주문하는 사람을 보기만 하여도 곧 조복되나니, 성문과 연각도 그와 같아서 마왕 파순을 보고는 공포를 내지만, 파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군의 짓만 하느니라. 대승을 배우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성문들이 마군을 무서워하여 대승에 대하여 신심을 내지 못함을 보고는, 먼저 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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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마군을 항복받아 길들이고 조복하여 타고 다닐 수 있게 하고, 인하여 가지가지의 묘한 법을 연설하면 성문·연각들은 마군이 항복됨을 보고는 무서운 생각을 내지 않고, 대승의 훌륭한 법에 대하여 믿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고 말하기를, 우리들도 이제부터는 이러한 바른 법에서 장애를 짓지 아니하리라고 할 것이니라.
또 선남자야, 성문과 연각은 번뇌에 대하여 공포심을 내거니와 대승을 배우는 사람은 조금도 공포가 없나니, 대승을 배우는 사람은 이런 힘이 있으므로 내가 예전에 말한 것은 저 성문·연각으로 하여금 마군을 조복케 하려 함이었고, 대승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은 소멸하거나 굴복할 수 없는 것이니, 매우 기특한 일이니라. 어떤 이가 듣고 받아 가지며 여래가 항상 머무는 법인 줄을 믿으면, 이런 사람은 대단히 희유하여 우담바라 꽃과 같으리니, 내가 열반한 뒤에 어떤 이가 이렇게 미묘한 대승 경전을 듣고 믿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면, 이런 사람들은 오는 세상에서 백천억겁이 지나도록 나쁜 갈래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때에 부처님께서 가섭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열반한 뒤에 한량없는 백천 중생들이 이 미묘한 대반열반경을 믿지 않고 비방하리라.”
가섭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중생들이 부처님 열반하신 지 얼마쯤 후에 이 경을 비방하오며, 어떤 선한 중생이 그렇게 법을 비방하는 무리를 제도하겠습니까?”
“선남자야, 내가 열반한 뒤 40년쯤 동안에 염부제에 널리 유포 되다가 그 뒤에는 땅에 숨어버리리니, 선남자야, 마치 사탕수수·멥쌀·사탕·타락·제호들이 있는 데서는 그곳 사람들이 그것이 제일 좋은 음식이라 할 것이요, 어떤 사람들은 좁쌀이나 돌피쌀을 먹으면서도 자기네가 먹는 것이 제일 좋은 음식이라 하리니, 이 박복한 사람은 나쁜 업보를 받는 탓이거니와, 복 있는 사람은 좁쌀이나 돌피쌀은 이름도 듣지 못하고 멥쌀·사탕수수·석밀·제호만 먹으리니, 이 미묘한 대반열반경도 그와 같아서 박복한 둔근(鈍根)들은 듣기를 좋아하지 않음이 마치 박복한 사람이 멥쌀이나 석밀을 싫어하는 것 같으니라. 2승들도 그와 같아서 위없는 대반열반경을 싫어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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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 이 경전 듣기를 좋아하며 듣고는 환희하여 비방하지 않는 이는 복 있는 사람이 멥쌀을 먹는 것 같으니라.
선남자야, 어떤 임금이 험악한 깊은 산중에 있으면서 사탕수수·멥쌀·석밀이 있지만 구하기 어려우므로 쌓아 두고 아끼면서 먹지 아니하고, 좁쌀과 돌피쌀만 먹었는데, 다른 나라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딱하게 여겨 여러 수레에 멥쌀과 감자 따위를 실어 보내니, 그 임금이 받아서 온 나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하였다. 백성들이 그것을 먹고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저 나라 임금의 덕분으로 우리들이 훌륭한 음식을 먹었다’ 하리라. 선남자야, 이 네 종류 사람도 그와 같아서 위없이 큰 법의 대장이 되었거든, 이 네 종류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다른 지방의 한량없는 보살들을 보니, 비록 대승 경전을 배우고 제 손으로 쓰기도 하고 남을 시켜 쓰기도 하지만 이양(利養)을 위하고 명예를 위하고 법을 알기 위하고 의지하기 위하고 다른 경을 사기 위하여 하는 일이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널리 선전하지 못하므로 이 미묘한 경전을 그 지방으로 보내어 보살들에게 주고, 그들로 하여금 위없는 보리심을 내어 보리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 보살들이 이 경을 얻고는 곧 다른 이들에게 널리 연설하여 한량없는 대중으로 하여금 대승법의 맛을 받게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한 보살의 힘으로 듣지 못하던 경전을 듣게 한 것으로서 저 나라 사람들이 임금의 힘으로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된 일과 같으니라.
또 선남자야, 이 미묘한 대반열반경이 유전하는 데는 그곳이 곧 금강이며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금강과 같은 줄을 알 것이며, 이 경을 듣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아니할 것이고, 그 소원을 모두 성취하게 되어 오늘날 내가 말하는 것과 같으리니, 너희 비구들은 잘 받아 지니어라. 어떤 중생이나 이러한 경전을 듣지 못하는 이는 매우 불쌍한 사람이니 왜냐 하면 이 사람은 이러한 대승 경전의 깊은 이치를 받아 지닐 수 없는 까닭이니라.”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40년 동안 이 대승 대열반경이 염부제에 유전되다가 그 뒤에는 땅에 묻힌다면, 그런 뒤 얼마나 있다가 다시 나오게 되리이까?”
“선남자야, 만일 나의 정법시대가 80년이 남았으면 먼저 40년 동안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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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이 염부제에서 다시 법비를 내리리라.”
“세존이시여, 이런 경전을 정법이 멸하려는 때, 계율이 무너지는 때, 잘못된 법이 성할 때, 법다운 중생이 없는 때에 누가 능히 들어 받고 받들어 지니고 읽고 외워서 통달케 하며, 이롭게 하며 공양하고 공경하고 쓰고 해설하오리까? 바라옵건대 여래께서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어 분별하여 말씀하시어, 보살들로 하여금 듣고는 받아 지니고, 지니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때에 부처님께서 가섭을 찬탄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야, 네가 이러한 이치를 잘 물었다. 선남자야, 어떤 중생이 희련(熙連)강의 모래수 같은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런 경전을 받아 지니고 비방하지 아니하리라. 선남자야, 어떤 중생이 항하의 모래수 같은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 법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이 경전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이를 위하여 널리 연설하지는 못하리라. 선남자야, 어떤 중생이 두 항하의 모래수 같은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 법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바로 이해하고 믿고 좋아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서도, 다른 이를 위하여 널리 연설하지는 못하리라. 어떤 중생이 세 항하의 모래 수 같은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 법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경전을 쓰기도 하고 다른 이를 위하여 널리 연설하면서도 깊은 이치를 이해하지는 못하리라. 어떤 중생이 네 항하의 모래 수 같은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 법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경전을 쓰기도 하고 다른 이를 위하여 16분 중에서 1분의 뜻을 연설하리니, 비록 연설하더라도 구족하지는 못하리라. 어떤 중생이 다섯 항하의 모래 수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 법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경전을 쓰기도 하며, 다른 이를 위하여 16분 중에서 8분의 뜻을 연설하리라.
어떤 중생이 여섯 항하의 모래 수 같은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 법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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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쓰기도 하고 다른 이를 위하여 16분 중에서 12분의 뜻을 연설하리라. 어떤 중생이 일곱 항하의 모래 수 같은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 법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경전을 쓰기도 하고 다른 이를 위하여 16분 중에서 14분의 뜻을 연설하리라. 어떤 중생이 여덟 항하의 모래 수 부처님 계신 데서 보리심을 내었으면, 이 나쁜 세상에서 이 법을 비방하지 아니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경전을 쓰기도 하고 다른 이를 권하여서 쓰게 하며, 자기가 받들고 다른 이에게도 권하여서 받들게 하며 읽고 외우고 통달하고 옹호하며 굳게 유지하게 할 것이며, 세간의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어서 이 경을 공양하고 다른 이를 권하여 공양케 하며, 공경하고 존중하고 읽고 외우고 예배하는 일도 이와 같이 할 것이며, 구족히 해석하여 뜻을 다하리니 곧 여래는 항상 머물러 변역하지 않고 필경까지 안락하다는 것이며, 중생마다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하고 여래의 모든 법장을 잘 알며, 이렇게 부처님께 공양하고는 위없이 바른 법을 세우며 받아 지니고 옹호하리라. 만일 처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는 이는 오는 세상에서 이러한 바른 법을 세우고 받아 지니고 옹호하리니, 그대가 오는 세상에서 법을 수호할 사람을 알아야 하리니, 왜냐 하면 이렇게 보리심을 내는 이는 오는 세상에서 위없이 바른 법을 수호할 수 있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나쁜 비구가 내가 열반한다는 말을 듣고 수심하지도 않고 ‘오늘 여래가 열반에 든다니 얼마나 통쾌한가. 여래가 세상에 있으면서 나의 이익을 방해하더니, 이제 열반에 든다니 누가 다시 나를 못살게 굴겠는가. 못살게 구는 이가 없으면 나는 도로 그전대로 이익을 얻을 것이다. 여래가 세상에 있을 적에 계율로 금지함이 엄하였는데, 이제 열반에 든다니 모두 버릴 것이며, 가사를 받음은 본래 형식을 위한 것이니 이제는 나무 끝의 깃발과 같이 찢어버리겠다’ 하리니, 이런 사람들이 대승 경전을 비방하고 거역하리라. 선남자야, 그대는 이렇게 기억하여라. 만일 어떤 중생이 한량없는 공덕을 구족히 성취하였으면 이 대승 경전을 믿을 것이며 믿고는 받아 지닐 것이요, 다른 중생이 법을 좋아하는 이가 있거든 그를 위하여 이 경전을 말하면 그 사람이 듣고는 지난 세상의 한량없는 겁 동안에 지은 죄업이 모두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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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할 것이요, 만일 이 경전을 믿지 않는 이는 금생에 한량없는 고통의 시달림을 받고, 여러 사람에게 모욕을 당할 것이며, 목숨이 마친 뒤에 다시 태어나도 사람들의 천대를 받으며, 얼굴은 추악하고 살림이 곤궁하여 항상 구차하며, 태어날 적마다 빈궁하고 미천하고 바른 법을 비방하는 나쁜 소견을 가진 문중에 나게 될 것이며, 임종할 때에도 흉년을 만나거나 난리를 당하거나 포악한 임금이나 원수들의 침해를 받을 것이며, 비록 선지식이 있더라도 만나지 못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마음대로 얻지 못하며, 비록 조그마한 이익은 얻더라도 매양 기갈에 시달리고, 다만 용렬한 하등 사람만이 상종하고 국왕이나 대신은 아는 체하지 아니하며, 설령 설법하는 것을 듣거나 그것이 이치에 맞아도 믿어주지 아니하니 이런 사람은 좋은 곳에 이르지 못하나니, 날개가 부러진 새는 날아다닐 수 없듯이, 이 사람도 그러하여 오는 세상에는 천상에나 인간에 태어나지 못하느니라. 만일 이러한 대승 경전을 믿는 사람은 타고 난 얼굴이 설령 누추하더라도 경전의 공덕으로 단정하여지고 신수와 위의가 날마다 좋아지며, 천상·세간 사람들이 보기를 좋아하고 공경하며 사랑하여 떠나려 하지 아니하며, 국왕·대신이나 일가 친척들이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모두 믿고 공경하리니 나의 성문 제자들도 제일 희유한 일을 행하려거든 세상 사람들에게 대승 경전을 널리 연설하여야 하리라.
선남자야, 비유컨대 안개가 아무리 자욱하더라도 해뜰 때까지만 있는 것이요, 해가 뜨면 할 수 없이 스러지나니, 선남자야, 모든 중생의 지은 나쁜 업도 그와 같아서 세상에 머물러 있는 세력은 대열반의 해를 볼 때까지니, 대열반의 해가 뜨면 모든 나쁜 업이 소멸하게 되느니라. 또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으나 사미의 10계를 받지 못하였을 적에, 어떤 장자가 스님들의 공양을 청하면 대중과 함께 가서 공양을 받나니, 계는 비록 받지 못하였으나 대중 축에 들어 있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마음을 내어 대승 경전인 대반열반경을 배우고 지니고 쓰고 읽고 외우는 이도 그와 같아서 지위가 비록 10주(住)에 이르지 못하였더라도 이미 10주 수(數) 중에 들었음이니라. 만일 중생이 부처님의 제자거나 아니거나 간에, 혹 탐심으로 혹은 이양을 위하여 이 경을 한 게송만이라도 듣고 비방하지 아니하면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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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웠느니라. 선남자야, 이런 인연으로 네 종류 사람은 세간의 의지가 된다고 내가 말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야, 이 네 종류 사람은 부처님 말씀을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할 리가 없느니라. 선남자야, 그대는 이 네 종류 사람에게 공양하여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제가 어떻게 그 사람인 줄을 알고 공양하오리까?”
“가섭이여, 바른 법을 세우거나 수호하는 이가 있으면 이런 사람에게 따라가 여쭙고 몸과 목숨을 버려서 그를 공양할 것이니, 내가 대승 경전에서 말한 것처럼 할지니라.”

바른 법을 아는 이가 있거든
그가 늙은이거나 젊은이거나
공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기를
불 섬기는 바라문과 같이 할지며

바른 법을 아는 이가 있거든
그가 늙은이거나 젊은이거나
공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기를
하늘들이 제석천왕 섬기는 듯이.

가섭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 말씀과 같이 스승에게 공양하는 것은 그렇게 하려니와, 이제 의심이 있사오니 해설하여 주옵소서. 만일 나이 많은 대덕 스님이 계행을 엄정하게 가지면서 젊은이들에게 모르는 일을 물을 때에 어찌하여 공경하고 예배하여야 합니까? 공경하고 예배해야 한다면 계행을 가졌다고 이름할 수 없겠습니다. 만일 젊은이가 계행을 엄하게 가지면서 계행을 파한 늙은 스님에게 모르는 것을 물을 적에도 예배하여야 합니까? 또 출가한 사람이 집에 있는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물을 적에도 예배를 하여야 합니까? 그러나 출가한 이는 집에 있는 사람에게 예배하지 않는 것이며, 불법 중에는 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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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나이 많은 스님을 공경하여야 하나니, 나이 많은 스님은 먼저 구족계를 받아 위의를 성취하였으므로 공경하고 공양한다 하오며, 부처님 말씀에 계를 파한 이는 부처님 법에서 용납하지 않나니, 좋은 밭에 가라지[稊稗] 같다 하였으며, 또 부처님 말씀이 법을 아는 이가 있으면 늙은이건 젊은이건 제석천왕 섬기듯이 공양하라고 하였으니, 이 두 구절 말씀의 뜻이 어떠합니까? 여래의 허망한 말씀이 아닙니까? 또 부처님 말씀에 계행을 가지는 비구도 범할 때가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여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세존께서 또 다른 경전에서는 파계한 이를 다스리라 하였으니, 그렇게 말씀하신 뜻을 알 수 없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나는 오는 세상의 보살들로서 대승을 배우는 이를 위하여 그런 게송을 말한 것이요, 성문 제자를 위하여 말한 것이 아니니라. 선남자야, 내가 먼저 말한 것은, 바른 법이 멸하고 계율이 파괴될 때와 파계하는 일이 많고 법답지 못한 짓이 성행할 때와 모든 성인들이 숨고 나타나지 아니할 때와 종과 같은 부정한 것을 받아 쌓을 때에, 네 종류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나마 세상에 나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도를 닦으면서, 모든 비구들이 제각기 종과 하인 따위의 부정한 것을 받아두면서도 정한지 부정한지도 알지 못하고, 계율인지 계율 아닌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그런 비구들을 조복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들과 함께 빛을 섞으면서도 티끌은 함께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행할 곳과 부처님의 행하는 곳을 잘 분별하여 알며, 다른 이들의 바라이죄를 범한 것을 보고도 드러내어 말하지 아니하나니, 왜냐 하면 내가 세상에 나타나서 바른 법을 세우고 보호하게 하려는 까닭으로 다스리지 않느니라. 선남자야, 이런 사람은 법을 보호하기 위하는 것이므로 비록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파계라고 이름하지 않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임금이 병이 나서 죽었고 아들은 어려서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는데, 한 전다라가 재물이 수없이 많고 권속도 많으므로 그 세력으로써 나라의 빈틈을 타서 임금의 자리를 억지로 빼앗고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더니, 그 나라의 거사와 바라문들이 배반하여 다른 나라에 도망가기도 하고, 나라 안에 있는 이들도 그 전다라 왕을 옳게 보려 하지 않으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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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장자와 바라문은 본래 있던 데를 떠나지 않고, 마치 나무가 났던 자리에서 쓰러지듯이 그곳에서 죽으려 하였다. 전다라 왕은 나라 사람들이 도망하여 가는 줄을 알고 다른 전다라들을 보내어 길목을 지키게 하였으며, 7일 후에는 북을 치면서 바라문들에게 호령하기를 나를 위하여 정수리에 물을 부어주는 사람[灌頂師]에게는 나라의 반을 나누어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모든 바라문은 이 말을 들었으나 한 사람도 오지는 아니하고 말하기를 그런 일을 할 바라문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였다. 전다라 왕은 또 말하기를, ‘바라문들 중에 나의 정수리에 물을 부어주는 이가 한 사람도 없으면, 나는 모든 바라문들을 끌어다가 전다라들과 한데서 거처하며 먹고 자고 일을 같이하게 하겠고, 만일 내 정수리에 물을 붓는 이가 있으면 나라의 반을 나누어 상을 줄 것을 실행하겠으며, 주술을 부려서 가져오는 33천의 감로수 불사약을 나누어서 함께 먹겠노라’고 하였다.
그 때에 나이 20살쯤 되고 깨끗한 행을 닦고 머리를 기르고 주술을 잘 아는 어떤 바라문 동자가 왕에게 가서 말하였다.
‘대왕이여, 대왕의 명령을 제가 모두 좇겠나이다.’
왕은 대단히 기뻐서 이 동자로 관정사를 삼았다. 바라문들은 이 소문을 듣고 모두 성을 내면서 그 동자를 꾸짖었다.
‘네가 바라문으로서 어찌하여 전다라의 스승이 되느냐?’
그 때에 왕은 나라의 반을 갈라서 동자에게 주고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며 여러 해를 지났다. 한번은 동자가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우리 가문의 법을 어기고 일부러 와서 왕의 스승이 되고 모든 비밀한 주문을 왕에게 가르쳤는데, 왕은 아직도 저와 친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왕은 대답하기를 ‘어째서 내가 그대를 친하지 않는다 하느냐’고 하자 동자는 말하기를 ‘선왕께서 마련하여 두었던 불사약을 한번도 나누어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였다. 왕의 대답은 ‘좋은 일이오. 대사여, 나는 참으로 알지 못하니 대사는 마음대로 가져가시오’ 하였다. 그 때에 동자는 왕의 말을 듣고 불사약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대신들을 청하여 함께 먹었더니, 모든 신하들이 먹고 나서는 왕에게 말하기를 ‘대사에게는 참말로 불사약이 있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스승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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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어째서 대신들하고만 감로수를 나누어 먹고 내게는 주지 않느냐.’
그 때에 동자는 독약이 섞인 다른 약을 왕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왕은 그 약을 먹고 잠깐 동안에 약독이 발작하여 혼절하여 땅에 쓰러지고 인사불성이 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그 때에 동자는 전왕의 태자를 세워 왕을 삼고 말하기를 ‘임금의 용상에 전다라가 앉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저는 본래 전다라가 임금이 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전다라가 나라와 백성을 다스려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대왕께서는 이제 임금이 되셨으니 선왕의 법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십시오’ 하였다. 동자는 이런 일을 하고 나서는 다시 해독하는 약을 전다라에게 먹여 깨어나게 하고, 그런 뒤에 나라 밖으로 쫓아내었다. 동자가 이런 일을 하였지만 바라문을 잃지 아니하였고, 다른 거사나 바라문들도 이 소문을 듣고는 모두 칭찬하기를 ‘그대가 능히 전다라 왕을 몰아내었다’고 하였느니라.
선남자야, 내가 열반한 뒤에 바른 법을 보호할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방편으로써 계를 파한 이나 이름만 빌린 이나 모든 부정한 것을 쌓아 두는 스님들과 더불어 모든 사업을 함께 하거든, 그 때의 보살들이 만일 어떤 사람이 계율을 범하였지만 계행을 비방하는 나쁜 비구들을 다스리기 위함인 줄을 알았으면 곧 그이에게 가서 공경하고 예배하고 네 가지 일로 공양하며 경전이나 모든 필요한 물건을 받들어야 하며, 자기에게 없거든 방편을 써서 단월에게 빌려서라도 이바지하여야 하나니, 이런 일을 위하여서는 여덟 가지 부정한 것도 저축할 것이니라. 왜냐 하면 이 사람은 저런 나쁜 비구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니, 마치 동자가 전다라를 몰아내기 위하는 일과 같은 까닭이니라. 이 때에 보살들이 비록 이런 사람을 공경하고 예배하며 여덟 가지 부정한 것을 받아 쌓더라도 죄가 없나니, 그 이유는 이 보살이 나쁜 비구들을 배척하고 청정한 스님들로 하여금 편안히 머물게 하기 위함이며 대승 방등경전을 유포하여 모든 천상과 세간 사람들을 이익케 하기 위함이니라. 선남자야, 이러한 인연으로 내가 다른 경전에서 그러한 두 게송을 말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바른 법을 수호하는 사람을 함께 찬탄하라 한 것은 저 거사와 바라문들이 동자를 찬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라. 법을 수호하는 보살도 그와 같나니, 어떤 사람이나 만일 법을 수호하려는 이가 파계한 스님과 함께 일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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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보고 죄가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재앙을 받을지언정, 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죄가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비구가 계율을 범하고도 교만한 생각으로 덮어두고 참회하지 아니하면 이 사람은 참으로 파계한 것이겠지만, 보살마하살이 법을 보호하기 위하여서 계를 범하는 것은 파계라고 이름하지 않나니, 왜냐 하면 교만한 생각은 없고 죄를 드러내어 참회하는 까닭이니라. 선남자야, 그러하여 경전 중에서 내가 덮어 놓고 이런 게송을 말하였느니라.

바른 법을 아는 이가 있는 곳에는
늙은이나 젊은이나 빨리 나아가
공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기를
불 섬기는 바라문과 같이 할지며,
욕계의 6천 중의 둘째 하늘이
제석천왕 섬기듯이 해야 하리라.

이런 인연으로 나도 성문 배우는 이를 위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보살들을 위하여 이 게송을 말한 것이니라.”
“세존이시여, 이러한 보살마하살이 계율에는 비록 느슨하나 본래 받은 계는 그대로 있습니까?”
“선남자야, 너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왜냐 하면 본래 받은 계는 그대로 있어 잃은 것이 아니요, 설령 범하였더라도 곧 참회하며, 참회하면 깨끗하니라. 선남자야, 마치 낡은 둑이 구멍이 뚫리면 물이 새듯이, 사람이 막지 아니하는 연고며, 막기만 하면 새지 않느니라. 보살도 그러하여 비록 파계한 사람과 함께 포살(布薩)하고 계를 받고 자자(自恣)하고 비구의 일을 같이하더라도 본래 있는 계율은 낡은 둑이 새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니, 왜냐 하면 만일 청정하게 계율을 가지는 이가 없으면 스님들이 줄고 느슨하고 게으름이 날마다 늘려니와, 청정하게 계를 가지는 이가 있으면 곧 구족하여 본래 받은 계를 잃지 아니하리라. 선남자야, 대승[乘]에 느슨한[緩] 이는 느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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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려니와, 계에 느슨한 이는 느슨하다 아니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대승에 대하여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하면 계율을 받든다고 이름하나니, 바른 법을 수호하기 위하여 대승의 물로 목욕하므로 보살은 비록 현재에 계를 파하여도 느슨하다고 하지 않느니라.”
“부처님과 스님들 중에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암라 열매의 설고 익음을 알 수 없듯이 파계하고 지계함을 어떻게 압니까?”
“선남자야, 미묘한 대반열반경을 의지하면 알기 쉬우니라. 어째서 대반열반경을 의지하면 안다고 하느냐. 농사꾼이 나락 씨를 심고 가라지 따위의 김을 매는 것을 육안으로 보면 잘 맨 밭이라 하지만, 열매가 여물 적에는 풀과 곡식이 각각 다르듯이, 여덟 가지 일로 더럽혀진 스님들을 제하면 육안으로 보고는 청정한 줄 알지만 계율을 가지고 파하는 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을 때에, 육안으로 보고 분별하기 어렵거니와 나쁜 짓이 드러나면 알기 쉬운 것이니 마치 이삭이 팬 뒤에는 가라지를 알기 쉬운 것 같으니라. 스님들도 그와 같아서 여덟 가지 부정한 독사 같은 법을 여의면 깨끗한 성스러운 대중의 복밭이라 하여 천상 인간의 공양을 받지만, 청정한 과보는 육안으로는 분별할 수 없느니라.
또 어떤 가라가(迦羅迦) 숲에 많은 나무 가운데서 진두가(鎭頭迦)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가라가 열매와 진두가 열매는 비슷하여서 분별하기 어려운데, 그 열매가 익었을 적에 어떤 여인이 그 열매를 따서 모았으나, 진두가 열매는 1분밖에 안 되고 가라가 열매는 10분이었다. 그 여자가 어느 열매인지 알지 못하고 저자에 가지고 가서 팔았다. 어리석은 아이들이 분간할 줄 몰라서 가라가 열매를 사서 먹고는 곧 죽었다.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그 여인에게 어디서 이 열매를 땄느냐고 물었더니, 그 여인이 따던 곳을 말하였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곳에는 많은 가라가 나무와 한 그루의 진두가 나무가 있다’고 하면서 웃고 가버렸다. 선남자야, 대중 가운데 여덟 가지 부정한 법도 그와 같아서, 그 중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법을 받는 이가 많고, 다만 한 사람만이 계행을 깨끗하게 가지고 여덟 가지 부정한 법을 받지 아니하면서, 다른 이들이 법답지 못한 것을 받아 두는 줄을 알지만, 함께 일을 하면서 버리고 떠나지 아니한 것이, 마치 가라가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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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한 그루의 진두가 나무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어떤 우바새가 그 대중들의 법답지 못한 것을 보고는 공경하지도 공양하지도 아니하였고, 공양하려 할 적에는 그대들에게 묻기를 ‘스님들은 저러한 여덟 가지 일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까? 만일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그런 사람들과 함께 포살하고 함께 갈마하고 함께 자자합니까?’ 하였다. 대중은 대답하기를, ‘여래께서 가엾이 여겨 그런 것을 받도록 허락하였다’고 하였고, 우바새는 말하기를, ‘기원정사에 있는 여러 비구들이 혹은 금이나 은을 받으라고 부처님께서 허락하였다 하고, 혹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는 허락하였다는 비구들과는 함께 있지도, 계를 말하지도, 자자하지도 아니하였고, 심지어는 흐르는 강물도 함께 먹지 아니하며 모든 이양하는 물건을 함께하지 아니하였는데, 당신들은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허락하였다고 말하는가. 부처님께서는 하늘 중의 하늘이시니 비록 받으셨다 하더라도 당신네들은 받아 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며, 만일 받는 이가 있으면, 그들과 함께 계를 말하거나 자자하거나 갈마하거나 스님들의 일을 함께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함께 계를 말하거나 자자하거나 갈마하거나 스님들의 일을 같이한다면 죽어서 지옥에 들어갈 것이니 저 어리석은 사람이 가라가 열매를 먹고 죽는 것과 같으리라’ 하였느니라.
또 선남자야, 어떤 도시에 약장사가 있어서 설산에서 나는 좋은 약을 팔면서 다른 약도 팔았는데, 맛이 좋기는 비슷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모두 설산에서 나는 약을 사려 하였으나 분별할 수 없었으므로 약 파는 곳에 가서 설산에서 나는 약이 있느냐고 물었다. 약장사가 있다고 대답하고는 다른 약을 주면서 설산에서 나는 약이라고 속였더니, 약을 사는 사람은 육안이어서 잘 분별하지 못하고 약을 사 가지고 가서 설산에서 나는 좋은 약을 얻었다고 좋아하였다. 가섭이여, 성문 대중 가운데는 이름만 빌린 비구도 있고 진실한 비구도 있고 화합한 비구도 있으며, 계행을 갖는 이도 있고 계율을 파한 이도 있거든, 이 대중에게 평등하게 공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나니, 이 우바새가 육안이어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약을 사는 사람이 설산의 좋은 약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누구는 계행을 가지고 누구는 계행을 파하며, 누구는 참 비구이고 누구는 가짜 비구인 것은 천안통을 얻은 이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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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느니라. 가섭이여, 만일 우바새가 그 비구가 파계한 줄을 알았다면 보시하고 예배하고 공양하지 말아야 하며, 그 사람이 여덟 가지 법답지 못한 것을 받아둔 줄을 알거든 요구하는 것을 공급하거나 예배하거나 공양하지 말아야 하며, 스님들 가운데 파계한 이가 있으면 가사를 입었다는 인연만으로는 공경하고 예배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좋은 말씀이십니다. 여래의 말씀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하오니, 제가 금강의 보배와 같이 받들어 지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비구들은 네 가지 법에 의지하여야 하오리니, 무엇을 네 가지라 하나이까?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며, 이치에 의지하고 마(魔)에 의지하지 말며, 지혜에 의지하고 식(識)에 의지하지 말며,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니, 이 네 가지 법은 네 종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하리이다.”
“선남자야, ‘법’을 의지한다는 것은, 곧 여래의 대반열반이니, 모든 부처님 법이 곧 법의 성품이며, 법의 성품이 곧 여래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않는 것이거늘, 어떤 이가 여래는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법의 성품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이니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의지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위에서 말한 네 종류 사람은 세상에 나서 법을 수호하는 사람이니, 그런 줄을 알고 의지할 것이니라. 왜냐 하면 이 사람은 여래의 비밀하고 깊은 법장을 잘 아는 까닭이며, 여래가 항상 머물고 변하지 않는 줄을 아나니, 만일 여래가 무상하고 변역한다고 말하면 옳지 아니하니라. 이 네 종류 사람은 곧 여래라 하리니, 왜냐 하면 이 사람이 여래의 비밀한 말씀을 잘 이해하고 또 말할 수 있는 까닭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의 깊고 비밀한 법장을 잘 알고 여래가 항상 머물고 변역하지 않는 줄을 안다면 이런 사람은 이양을 위하여서 여래가 무상하다고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런 사람에게도 의지하여야 하겠거늘, 하물며 네 종류 사람에게 의지하지 아니하겠는가. 법에 의지함은 곧 법의 성품이요 사람에게 의지하지 아니함은 곧 성문이며, 법의 성품은 곧 여래요 성문은 곧 함이 있는 것이며, 여래는 항상 머무는 것이요 함이 있는 것은 무상이니라.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파계한 몸으로 이양을 위하여 여래가 무상하고 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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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말하면 이런 사람에겐 의지하지 않아야 하나니, 선남자야, 이것을 결정한 이치라 하느니라.
‘이치’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이치는 깨달음이요 깨달았다는 뜻은 못나고 약하지 않음이요, 못나고 약하지 않다는 뜻은 만족함이요, 만족하다는 뜻은 여래의 항상 머물러 변역하지 아니함이요, 여래의 항상 머물러 변역하지 않는다는 뜻은 법이 항상함이요, 법이 항상하다는 뜻은 승가가 항상하다는 것이니, 이것이 이치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아니함이니라. 어떤 것이 말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인가. 꾸며대는 언론과 번드르한 문장이니, 부처님이 말한 경전들과 같이, 탐심이 많아 만족한 줄을 모른다거나, 간교하고 아첨한다거나, 가면으로 친한 체하거나, 점잖은 모양을 꾸며 이양을 구하거나 세속 사람들을 위하여 일을 하거나, 또 말하기를 ‘부처님도 비구들에게 종이나 부정한 물건인 금·은·보배·곡식·창고·소·양·코끼리·말 따위를 받아서 저축하는 일과 장사하여 이익을 구함을 허락하였으며, 흉년드는 세상에서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어 비구들에게 저축하고 묵게 하면서 손수 밥을 지으며 받지 않고 먹을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면, 이런 말은 의지할 수 없느니라.
‘지혜’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지혜라 함은 곧 여래니 만일 성문들이 여래의 공덕을 잘 알지 못하거든, 그런 식은 의지하지 말아야 하며, 여래가 곧 법신인 줄을 알면 그러한 참 지혜는 의지할 만하거니와, 여래의 방편으로 이룬 몸을 보고 그것이 5음·6입·18계의 소속된 것이며 음식으로 기르는 것이라 말하면 의지하지 말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식은 의지하지 못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나 그런 경전도 의지하지 말 것이니라.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는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불요의경은 성문승이니 부처님의 깊고 비밀한 법장을 듣고는 의심을 내고 이 법장에서 큰 지혜를 내는 줄을 알지 못함이, 마치 어린아이가 아는 것이 없음과 같은 것은 이름을 불요의라 하고, 요의라 함은 보살의 진실한 지혜를 말함이니, 그 마음을 따르는 걸림없는 지혜는 마치 어른이 모르는 것이 없는 것과 같으니 그것을 요의라 하느니라. 또 성문승은 불요의요 위없는 대승은 요의며,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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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말한 것을 증득하여 알아라 함은 불요의요 보살의 말한 것을 증득하여 알아라 함은 요의며, 만일 여래가 음식으로 자란다 하면 불요의요 만일 항상 머물러 변역하지 않는다 하면 요의며, 여래의 열반에 드는 것이 나무가 다하여 불이 꺼짐과 같다 하면 그것은 불요의요, 여래가 법의 성품에 든다 하면 그것은 요의니라. 성문승의 법은 의지하지 말지니, 왜냐 하면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성문승을 말하였으므로 마치 장자가 아들에게 반쪽 글자[半字]를 가르침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성문승은 밭을 처음 갈고는 열매를 거두지 못함과 같으므로 이것을 불요의라 하나니, 그러므로 성문승은 의지하지 말 것이니라. 대승의 법은 의지할지니, 왜냐 하면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대승을 말한 것이므로 의지할 것이라 하면 이것은 요의라 하느니라. 이러한 네 가지 의지할 데를 알아야 하느니라.
또 ‘이치’에 의지하라는 것은, 이치는 질직한 것이요, 질직함은 광명이며 광명은 못나거나 약하지 않음이요, 못나거나 약하지 않음은 여래며, 또 광명은 지혜요 질직함은 항상 머무는 것이니라.
여래가 항상하다는 것은 ‘법에 의지함’을 이름이니, 법은 항상함을 이름이요 또한 가없음을 이름이라, 헤아릴 수도 없고 붙들 수도 없고 얽어맬 수도 없지만, 볼 수는 있는 것이니라. 만일 볼 수 없다고 말하면 이런 사람은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니라. 또 어떤 사람이 미묘한 말로 무상하다고 말하면 이런 말은 의지하지 말아야 하나니, 그러므로 이치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니라. 승가는 항상하고 함이 없고 변하지 아니하며 여덟 가지 부정한 것을 받아 두지 않는 것이니 그러므로 지혜에 의지하고 식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니라. 만일 식이 짓고 식이 받는다 말하면 화합승(和合僧)이 없으리니, 왜냐 하면 화합이라 함은 아무것도 없음이요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항상하다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식은 의지하지 못할 것이니라.
‘요의’에 의지한다 함은 요의는 만족한 줄을 아는 것이니, 가면으로 위의가 청백한 듯이 나타내며, 교만하고 높은 체하여 이양을 탐하지 아니하며, 여래의 방편으로 말한 법에 대하여 집착을 내지 아니하면 이것을 요의라 이름하며, 만일 이런 가운데 머무는 이가 있으면 이 사람은 이미 제일의에 머문 줄을 알지니, 이것이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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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불요의라 함은 경전에 말하기를, 모든 것이 타는 것이요 모든 것이 무상하고 모든 것이 괴롭고 모든 것이 공하고 모든 것이 내가 없다고 한 것을 말하나니, 왜냐 하면 이러한 이치를 분명히 알지 못하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아비지옥에 떨어지게 하느니라. 그 까닭을 말하면 집착하는 연고로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모든 것이 탄다 함은 열반도 타는 것이라고 여래가 말하였다 함이요, 모든 것이 무상하다 함은 열반도 무상하다는 것이요, 괴롭고 공하고 내가 없다 함도 그와 같은 것이므로 불요의경이라 하나니, 의지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선남자야, 어떤 이가 말하기를, 여래가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며 시기를 잘 아나니, 시기를 잘 알므로 가벼운 것을 무겁게 말하고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말하였다 하며, 여래가 제자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이바지할 단월이 있어 궁핍함이 없게 할 줄을 알았으면 이러한 사람에게는 종이나 금·은이나 재물 따위의 부정한 것을 받아 두거나 장사하여 팔고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거니와, 만일 제자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할 단월이 없거나 흉년을 당하여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종이나 금·은이나 수레나 집이나 밭이나 곡식 따위를 받아 두기도 하고 쓸 것을 무역하도록 허락하였으나 마땅히 깨끗이 보시하는 신심이 견고한 단월이어야 한다고 말하면, 이러한 네 가지 법은 의지하여야 하며, 어떤 계율에나 아비담(阿毘曇)이나 수다라(修多羅)라도 이 네 가지에 위반하지 않는 것을 의지할 것이며, 어떤 이가 말하기를, 때가 되었거나 때가 아니거나 법을 수호하지 않거나 간에, 여래께서 모든 비구에게 이렇게 부정한 물건을 받아 두라고 허락하였다고 말하면, 그런 말은 의지하지 말아야 하며, 어떤 계율이나 아비담이나 수다라에 이 말과 같은 것이 있으면 이러한 세 가지는 의지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나는 육안을 가진 중생들을 위하여 이 네 가지 의지할 것을 말하였거니와, 혜안(慧眼)이 있는 이를 위한 것은 아니리라. 그러므로 내가 지금 네 가지 의지할 것을 말하는 것이니, 법이란 것은 곧 법의 성품이요, 이치라 함은 여래가 항상 머물러 변치 아니함이요 지혜란 것은 모든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다는 것이요, 요의라 함은 온갖 대승의 경전을 통달하는 것이니라.”

[141 / 90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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