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피난민 아이들로 떠들썩한 교실에는 노량해전을 앞두고 기도하는 이순신의 마지막 모습이 걸려 있었다.
양달석 화백*이 그린 “최후의 기도”였다
최후의 기도
ㅡ 김창범
1.
두 눈으로 공손히 하늘을 바라보며, 두 손을 겸손히 모아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이 목숨 거두시고 왜적을 섬멸시켜주소서.
이 가난한 백성을 구해주시고 이 가련한 아이들의 나라를 세워주소서.
2.
전쟁이 끝나고 빈곤과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그는 기도하는 이순신의 간절한 모습을 그려 주었다.
무너진 교실을 다시 세우자고 쓰러진 아이들을 일으켜 주었다.
눈물 가득한 아이들과 어릴 적 풀밭에도 달려갔다.
누렁이 황소와 함께 마음의 도화지를 펼치고 그는 천국을 그렸다.
배운 것 없이 머슴 노릇을 했어도, 숯덩이 하나만 쥐면
바위마다 쓱쓱 꿈많은 아이들의 천국을 펼쳤다.
어느 날, 작은 마을에 새벽 안개가 몰려들더니
나라가 무너졌단다. 만주로 간도로 저마다 살길 찾아 떠나고
누군가 누렁이마저 데려간 뒤, 그의 마음엔 하얀 도화지만 남았다.
3.
외로울 땐 산에 올라 한려수도 그 아름다운 바다며 섬들을 보았다.
불화살이 날아들고 조총소리 가득한 저 바다 거센 물길마다,
그의 도화지엔 한산대첩이며 명량대첩이며 하산도대첩이며 승전보가 가듯했으니,
이순신은 수백, 수천의 왜놈 병선(兵船)을 어떻게 쳐부수었을까?
새벽마다 누렁이 목을 안고 하루 일을 하늘에 부탁했듯이,
이순신도 뱃머리에 무릎 꿇고, 이 전쟁을 도와달라고, 이 백성을 구해달라고
노량해전 앞에 절치부심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작전 지시를 내렸구나.*
아, 새벽 바다가 감동했구나. 하늘의 신인(神人)이 도우러 왔다.*
*행록이나 그 자신의 <난중일기>에도 여러 번 나타나듯이, 대전 작전에 백발노인, 또는 신인(神人)으로부터 자전지시를 예언적으로 받는다.> '수국단상(水國斷想,2010, 이기반저, 2010년),328쪽
4.
그는 간절한 기도, 최후의 기도를 도화지에 옮겼다.
불타는 하늘의 마음, 분노하는 얼굴이 나타날 때까지 그리고 또 그렸다.
죽어서도 성웅이 된 이순신을 보라, 무너지고 흩어진 조선이 일으켰다.
고개 넘고 바다 건너 파도처럼 울며 헤매는 백성들을 일어났다.
어쩌랴, 총탄으로, 이념으로, 증오로 갈라진 그 후손의 나라는 어쩌랴?
갑판을 치며 파도 앞에파도 앞에 부르짖는 이순신을 보라. 아직 최후의 기도는 남았다.
그는 알았다. 이순신의 기도에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공의와 성실로 띠 삼아 통곡하는 기도에 저 하늘도 몰려오는 것을.
비로소 보았다. 그것은 소리치는 백성의 얼굴. 아, 황소처럼 분노하는 얼굴.
5.
무너진 나라에도 때가 왔다. 가련한 내 아이들아, 일어나자.
누렁이 황소가 드러눕고 아이들은 누렁이 등을 타고 노래하는
이 나라의 천국을 그려보자. 한려수도 저 아름다운 노량(露梁)의 밤바다에
목숨 던진 이순신의 마음, 이순신의 나라를 그려보자.
이제, 그대 마음에도 하얀 도화지를 펼쳐라.
이 나라의 도화지를 활짝 펼쳐라.
최후의 기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1년 7월 10일 지음)
[참고]
*양달석(梁達錫, 1908-1984) : 서양화가, 호 여산(黎山), “최후의 기도”는 그의 작품이다.
**이기반 박사(余山 李基班, 1946- )의 ‘수국단상’(2010년, 추수루 간), 328쪽. <‘행록’이나 그 자신의 ‘난중일기’에서도 여러 번 나타나듯이, 대전 직전에 꿈속에서 백발노인, 또는 신인(神人)으로부터 작전 지시를 예언적으로 받는다.>
시인 소개 / 김창범 (1947- 현재) ; 1972년 계간 창작과비평 겨울호 시 발표로 등단, 시집 ‘봄의 소리’(1982), ‘소금창고에서’(2017), ‘노르웨이 연어’(2020), 등이 있다, 2021년 동국문학상 수상.
[참고] 아래는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블로그 운영자가 추가한 것임.
화가는 [마태 27:46}의 아래 그림을 연상시키는 예수의 이미지를 전제한 것으로 추정됨. 그리하여 해당찬송가를 추가함.
https://www.youtube.com/watch?v=95rrLRqWsAQ
[김창범, 최후의 기도] 완성본/ 총5련 번호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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