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S0JhQ-vNXOo

 

 

www.youtube.com/watch?v=Qx2TWDb3nUw

 

 

www.youtube.com/watch?v=Wp80ropaxQs

 

 

www.youtube.com/watch?v=i5uPGR8jD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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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 - 위키문헌, 우리 모두의 도서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海東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해동육룡비 막비천소부 고성동부) 중세국어[편집] 海東 六龍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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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5년(세종 27년)에 창작되어 1447년(세종 29년)에 간행된 악장이자 서사시. 한글로 간행된 최초의 문헌이다. 모두 125장으로 이뤄져 있다. 

 

제1장

한문

海東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해동육룡비 막비천소부 고성동부

중세국어

海東 六龍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天福이〮시니〮 古聖이〮 同符ᄒᆞ〮시니〮

현대어

해동(우리나라)의 여섯 마리 용이 나시어(=왕이 되시어) (하는) 일마다 하늘의 복이니 옛 성인들과 같으니(이다)

 

제2장

한문

根深之木 風亦不扤 有灼其華 有蕡其實근심지목 풍역불올 유작기화 유분기실
源遠之水 旱亦不竭 流斯爲川 于海必達원원지수 한역불갈 유사위천 우해필달

중세국어

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ᆡ〯 곶 됴〯코〮 여름〮 하〮ᄂᆞ니〮
ᄉᆡ〯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츨〮ᄊᆡ〮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현대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를 이뤄 바다에 가나니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511 

 

1. 자료 해설

용비어천가는 穆祖로부터 太宗에 이르기까지 六祖의 사적을 통해 조선 왕조 건국의 어려움과 그 천명성을 보이고 있는 125장의 한글 가사와 그에 해당하는 한시를 본문으로 하여, 각 장별로 한문 주해가 붙어있는 책이다.


이 책은 세종대왕의 명에 의해 세종 24년(1442년) 3월부터 준비작업이 시작되어, 세종 27년(1445) 4월에 권제, 정인지, 안지 등에 의해 본문이 製進되었고, 다시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등이 보수를 명 받아 주해를 덧붙인 후 세종 29년(1447) 10월 전 10권으로 간행되었다.


龍飛御天歌의 각 장은 한글 가사, 한시, 한문 주해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부분에는 한자 독음 및 관련 사항에 대한 설명을 위해 협주가 덧붙기도 한다.
이 책은 한글 표기에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는 종성 표기에 8종성 외의 문자들이 쓰인 것이고, 둘째는 한자어의 한글 표기가 없다는 것 즉 한자어는 한자로만 적었다는 점이다.
(* 참고문헌: 金貞娥, 龍飛御天歌, 국어사 자료와 국어학의 연구, 1993.)

2. 용비어천가 관련 기록
1) 議政府右贊成 權踶 、右贊參〔右參贊〕 鄭麟趾 、工曹參判 安止 等進 《龍飛御天歌》 十卷 ~命刊板以行。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올리다

    (世宗 108卷, 27年(1445 乙丑 / 명 정통(正統) 10年) 4月 5日(戊申) 3번째기사)

2) 殿下覽而嘉之 賜名曰龍飛御天歌(중략) 就加註釋 於是粗敍其用事之本末 復爲音訓 以便觀覽 共十一卷(중략) 正統十二年二月日(중략) 崔恒拜手稽首謹跋
전하가 보시고 기뻐하셨다.  이름을 내려주기를 용비어천가라고 하였다.  주석을 더하여 비로소 거칠게나마 일의 쓰임에 있어서 본말을 서술하게 되었다. 다시 발음과 듯을 붙여 보기에 편하게 하였다. 모두 11권이다. (세종 29년 2월,  최항의 용비어천가 발문)


3)  《龍飛御天歌》 五百五十本于群臣。
     《용비어천가》 5백 50본을 군신에게 내려 주었다
      (世宗 118卷, 29年(1447 丁卯 / 명 정통(正統) 12年) 10月 16日(甲戌) 1번째기사)

 

현대어 譯이 첨부됨

https://www.gitden.kr/yb125_utf-8.html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설명] 이 표의 스크린샷은 2015년 10월에 테스트한 것입니다. "홀수 화면"(화면1, 화면3 등)은 유니코드의 옛한글을 시스템 글꼴에서 지원하는지 확인하는 것이고, "짝수 화면"(화면2, 화면4 등)은 HT

www.gitden.kr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84%B8%EC%A2%85#%EC%84%B8%EC%A2%85%EC%9D%98_%EC%A7%81%EA%B3%84_%EC%A1%B0%EC%83%81

 

조선 세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종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세종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세종(世宗, 1397년 5월 7일[1] ~ 1450년 3월 30일)은 조선의 제4대 국왕(재위 :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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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제4대 국왕   출생사망

   세종 世宗   
1397년 5월 7일[1] (음력 4월 10일조선 한성부 준수방 사저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52세)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 사저

 

애민정책[편집]

관비(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여자 종)가 출산할 경우, 1주일의 산후 휴가만 주어졌는데 출산후 100일을 쉬도록 명을 내렸으며[20], 관비의 남편 또한 산후 1개월의 휴가를 주었다.[21] 이러한 명령에 대해 당시의 일부 관료들이 비판하였지만 세종은 이를 그대로 시행하였다. 또한 노비를 가혹하게 다루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자에 대해서 법령에 따라 엄중히 처단할 것을 명하였다.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년) 윤7월 24일 (신축) 條

 노비는 비록 천민이라고는 하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임금된 자의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1432년) 8월 17일 (계묘) 조

이밖에도 나라의 노인들을 우대하였으며, 쌀과 의복을 내려 구휼하였고 때로는 양로연을 열어 노인들을 위로하였다. 승정원에서 양로연에 초대받은 노인 중 천민의 참석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이를 일갈하며 노인의 신분에 관계 없이 죄를 지은 자가 아니면 모두 참석하게끔 지시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노인으로서 천한 자는 양로연(養老宴)에 나오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천(至賤)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예하게 하고, 그 장죄(贓罪)를 범하여 죄를 입어 자자(刺字)한 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불교에 귀의[편집]

재위 초반에 장녀 정소공주가 요절하고, 재위 후반에는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하면서,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 마저 승하하자 세종은 세자와 대군들을 이끌고 불교 사원을 찾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며 불사를 중단할 것을 청하였다.[22]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였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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