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리(新安吏) - 신안의 관리 -

ㅡ 杜甫

 

客行新安道(객행신안도)① 객이 신안의 거리에 들어서니

喧呼聞點兵(훤호문점병) 병사들 점호하는 시끄러운 소리 들린다.

借問新安吏(차문신안리) 신안의 아전에게 물으니

“縣小更無丁(현수갱무정)②” 현이 적어 장정이 없습니다.

“府帖昨夜下(부첩작야하) 병첩이 지난 밤에 왔기에

次選中男行(차선중남행)③.” 다음 차례 중남들을 뽑고 있습니다.“

“中男絕短小(중남절단소) 중남들은 체구가 작으니

何以守王城(하이수왕성)?” 어찌 왕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肥男有母送(비남유모송) 살찐 남아들은 모친이 나와 송별하는데

瘦男獨伶俜(수남독령빙)④. 야윈 남아들은 혼자 외롭다.

白水暮東流(백수모동류) 하얀 강은 어둠 속에서 흐르고

青山猶哭聲(청산유곡성) 청산은 큰소리로 곡을 하는 듯하다.

“莫自使眼枯(막자사안고) 스스로 눈물을 마르게 하지 말고

收汝淚縱橫(수여루종횡). 흐르는 눈물 거두게 하지도 말라

眼枯即見骨(즉고즉견골). 눈물 말라 뼈가 드러난다 해도

天地終無情(천지종무정)! 하늘과 땅은 끝내 무정할테니

我軍取相州(아군취상주)⑤ 관군이 상주를 취하여

日夕望其平(일석망기평). 그날 저녁에 난리를 평정하리라고 기대했건만

豈意賊難料(기의적난료) 어찌 적의 동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歸軍星散營(귀군성산영). 관군이 흩어져 후퇴했으나

就糧近故壘(취량근고루) 옛 보루 근처에서 식량을 구하고

練卒依舊京(련졸의구경)⑥. 옛 서울에 의지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니

掘壕不到水(굴호부도수) 호를 파도 물이 차지 않으니

牧馬役亦輕(목마역역경) 말을 기르는 일도 역시 가볍다.

況乃王師順(항내왕사순) 하물며 왕의 군대는 하늘에 순응하니

撫養甚分明(무양심분명) 보살핌과 급양도 심히 분명하다.

送行勿泣血(송행물읍혈) 배웅하면서 너무 울지 말아라

仆射如父兄(복야여부형).” 부형처럼 대해줄 곽자의(郭子儀) 복야가 있으니!

 

http://wwww.yangco.net/new0822/?doc=bbs/gnuboard.php&bo_table=sungdang&sselect=&stext=&ssort=wr_datetime&sorder=desc&soperator=&page=2&wr_id=20 

 

한시선 > 성당 > 신안리(新安吏) - 신안의 관리 -

· 오늘 :  233  · 어제 :  285  · 최대 :  2,389  · 전체 :  1,626,483 

wwww.yangco.net

당숙종(唐肅宗) 건원(乾元) 원년(758년) 겨울 장안과 낙양을 수복한 곽자의(郭子儀)는 여세를 몰아 이광필(李光弼)과 왕사례(王思禮) 등의 아홉 절도사들과 함께 20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동진하여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인 업성(鄴城 = 相州)에서 아버지 안록산을 죽이고 반란군의 대장이 된 안경서(安慶緖)를 포위했다. 그러나 곽자의와 이광필 등의 장수들을 믿지 못한 어리석은 당숙종은 전군의 통솔을 환관 어조은(魚朝恩)에게 주어 군기와 선무 및 병영의 일을 처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파견했다. 군사의 일에 무지한 어조은으로 인해 관군은 통솔이 안 되었고 또 겸하여 군량미마저도 부족하여 군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관군과 반군이 다음 해 봄까지 대치상태로 있다가 결국은 사사명의 지원군에 합세로 관군은 업성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곽자의는 동도 낙양을 지키기 위해 후퇴하고 나머지 각 절도사도 모두 자신의 관할지를 지키기 위해 돌아갔다.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은 건원 원년(758) 겨울 안록산을 죽인 안경서가 장안을 버리고 동쪽으로 후퇴하여 상주로 들어가 주둔하자 숙종이 곽자의와 이광필에게 명하여 아홉 절도사의 20만 보군을 이끌고 상주를 포위하여 공격할 때다. 관군이 겨울에 시작해서 봄에 이르기까지 상주를 함락시키지 못하는 사이 하북의 사사명이 위주(魏州 = 今河北大名)를 경유하여 안경서를 구원하기 위해 남진했다. 사사명의 반군은 관군과 안양을 가로지르는 장하(漳河)의 북안에서 회전에 들어갔다. 아홉 절도사의 군사들은 대패하여 괴멸되어 남쪽으로 패주했다. 안경서와 사사명은 다시 낙양을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다행히 곽자의가 이끄는 삭방군(朔方軍이) 황하를 도하할 수 있는 하양교(河陽橋)를 끊어 간신히 안사의 반군이 남하는 길을 끊을 수 있었다. 상주에서의 패전으로 부족한 병졸들을 대거 보충해야 했음으로 조정에서는 징집령을 발했다. 이때 두보는 낙양에서 신안(新安)을 거쳐 화주(華州)로 돌아가면서 징병이 행해지는 정황을 보고 느낀 바를 시로 지었다.   

 

 

https://kydong77.tistory.com/18758

 

두보 - 戰亂의 참혹한 현실/ 三吏 三別

https://ko.wikipedia.org/wiki/%EB%91%90%EB%B3%B4 두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두보(중국어 정체자: 杜甫, 병음: Dù Fǔ 두푸[*], 712년 ~ 770년)는 당나라 때의..

kydong77.tistory.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