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45fCvCnN5FI 

 

 

 

https://www.youtube.com/watch?v=t3s7hf2BBa4&list=RDt3s7hf2BBa4&start_radio=1 

 

 

https://www.youtube.com/watch?v=m8TrrwRYqLw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535

 

김소월(金素月)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관은 공주(公州).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안북도 구성 출생. 아버지는 김성도(金性燾),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 목도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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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특히,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문단의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시작활동은 1920년 『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그리워」·「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 『개벽』에 실린 「금잔디」·「첫치마」·「엄마야 누나야」·「진달래꽃」·「개여울」·「제비」·「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삭주구성(朔州龜城)」·「가는 길」·「산(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꽃촉(燭)불 켜는 밤」(1925)·「무신(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나무리벌노래」(1924)·「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지연(紙鳶)」(1925)을 발표하고 있다.
소월의 시작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그동안 써두었던 전 작품 126편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은 그의 전반기의 작품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당시 시단의 수준을 한층 향상시킨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민요시인으로 등단한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다.
생에 대한 깨달음은 「산유화」·「첫치마」·「금잔디」·「달맞이」 등에서 피고 지는 꽃의 생명원리, 태어나고 죽는 인생원리,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원리에 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시 「진달래꽃」·「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먼후일」·「꽃촉불 켜는 밤」·「못잊어」 등에서는 만나고 떠나는 사랑의 원리를 통한 삶의 인식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민요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에 대한 인식은 시론 「시혼」에서 역설적 상황을 지닌 ‘음영의 시학’이라는, 상징시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시집 『진달래꽃』 이후의 후기 시에서는 현실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민족혼에 대한 신뢰와 현실긍정적인 경향을 보인 시로는 「들도리」(1925)·「건강(健康)한 잠」(1934)·「상쾌(爽快)한 아침」(1934)을 들 수 있고, 삶의 고뇌를 노래한 시로는 「돈과 밥과 맘과 들」(1926)·「팔벼개 노래」(1927)·「돈타령」(1934)·「삼수갑산(三水甲山)·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次岸曙先生三水甲山韻)」(1934) 등을 들 수 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소월(金素月))]

 

https://blog.daum.net/ulsanedu/7430225

 

김소월의 시, 초혼에 얽힌사연

김소월의 시, 초혼에 얽힌사연 초혼이 뭔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이 아닌가? 김소월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처절한 슬픔이 담겨진 사연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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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다.
김정식이 3살 때 아버지는 일본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정식은 할아버지 집에서 아픈 상처를 가진 채 성장했다.
이후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3살 많은 누나 오순을 알게 된다.
정식은 종종 오순과 마을 폭포수에서 따로 만나며 마음을 의지했다.

정식이 14살이 될 때 까지 둘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일제강점기 하에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정식에게 행복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가 14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강제로 혼인을 올리도록 명령한 것이다.
혼인의 상대는 할아버지 친구의 손녀 홍단실이었다.
당시엔 집안 어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였고,

정식은 말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홍단실과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오순이 19살이 됐을 때 다른 사람과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둘의 연락은 끊겼지만 자신의 아픔을 보듬어주던 오순을 잊지 못한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이후에 일어난다. 
3년 뒤에 오순이 남편에게 맞아 사망한 것이다.
오순의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고 폭력을 일삼았다.
정식은 아픈 마음을 안고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때 사랑했던 오순을 기리며 적은 시가 초혼(招魂)이다.
 

초혼

ㅡ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채로 이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https://m.blog.naver.com/sub28/221701938235

 

#김소월(素月)의 삶과 시

소월 김정식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났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193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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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에게
ㅡ 김소월


한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아직도 때마다는 당신 생각에
추거운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낯모를 딴 세상의 네길거리에
애달피 날 저무는 갓 스물이요
캄캄한 어두운 밤 들에 헤매도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당신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비오는 모래밭에 오는 눈물의
추거운 베갯가의 꿈은 있지만
당신은 잊어버린 설움이외다

 

https://www.youtube.com/watch?v=Uy4G-dN0j5w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ㅡ 김소월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당신이 하도 못 잊게 그리워서
그리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잊히지도 않는 그 사람은
아주나 내버린 것이 아닌데도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가뜩이나 설운 맘이
떠나지 못할 운(運)에 떠난 것도 같아서
생각하면 눈물이 쉬르르 흘러납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6%8C%EC%9B%94

 

김소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훗날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평안북도 곽산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시옥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면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한테도 천시를 받았고 일본의 압박으로 부인과 동반자살 기도까지 했다.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2] 향년 33세였다.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쓴웃음지으며 우울해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소월이 자살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김소월의 증손녀가 증언한 바로는,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었고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먹곤 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인해 아편 과다복용의 후유증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서울 남산 시비

 

    가족 관계

  • 아버지: 김성도
  • 어머니: 장경숙
  • 작은어머니(숙모): 계희영
  • 부인: 홍단실(풍산 홍씨) - 홍시옥의 딸
    • [추가]홍단실은 <임꺽정>을 지은 벽초 홍명희의 손녀. 벽초의 아들 홍기문은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한 사람이자 북한 향가 연구의 대가인 유명 국학자.
    • 첫째 딸: 김구생[10]
    • 둘째 딸: 김구원[10]
    • 첫째 아들: 김준호[10]
    • 둘째 아들: 김은호[10]
    • 셋째 아들: 김정호 - 1953년 반공포로로 석방, 김소월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남한에 거주하였다.
      • 손녀: 김은숙
      • 손자: 김영돈
    • 넷째 아들: 김낙호[10]

 

[참고]

부인: 홍단실(풍산 홍씨) - 홍시옥의 딸 - 벽초 홍명희의 손녀

벽초 홍명희

https://namu.wiki/w/%ED%99%8D%EB%AA%85%ED%9D%AC

일제강점기의 소설가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이다. 호는 벽초(碧初)[2]이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알려진[3] 인물로 실제로 셋은 죽마고우였으며 홍명희는 이 중 유일하게 친일로 변절하지 않았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렸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4]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6.25전쟁 당시 이광수가 납북되자 신변을 보호해주었으며 이광수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출생으로 할아버지 홍승목은 일본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5]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한일병합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다니다가 한일병합이라는 비보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1919년 고향에서 3.1 운동에 참가하였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보고 왔다.[6] 1927년 신간회 창설에 참가하여 부회장 직을 맡는 등 굵직한 항일 운동들을 전개해 나간다. 이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데 소설 <임꺽정>이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 홍명희는 한국인 최초로 에스페란토를 배운 사람이다. 벽초(碧初)란 호 자체가 '최초의 청록인', 즉 최초의 에스페란티스토를 의미하는 거라고 한다.
  • 그의 아들 홍기문은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한 사람이자 북한 향가 연구의 대가인[11]유명 국학자

 

https://kydong77.tistory.com/18251

 

김소월의 시세계

*[운영자 생각]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통해 일제에게 말살당한 민족혼을 일깨우고 주권회복의 염원을 토로한 작품으로 해석함이 맞을 것 같네요. 술에 취해 아편 복용

kydong77.tistory.com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김소월

나는 꿈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가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갈. 나는 나아가리라
한걸음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새벽 동무들 저 혼자 -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개벽>, 1923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251 

 

 

 

https://www.youtube.com/watch?v=eWdDSpaZmhU 

 

 

https://www.youtube.com/watch?v=KhLexw_eGTk 

 

[왕십리 역전광장]

 

 

https://www.youtube.com/watch?v=SMvQxm2NgSA 

 

 

https://www.youtube.com/watch?v=iRfmRbjd_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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